맹꽁이의 찬양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해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사43:21)

한국 근대교육 선구자, 아펜젤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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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2019. 8. 7.

한국 근대교육 선구자, 아펜젤러 

 

1. 하나님이 선택한 나라, 조선

“조선 백성들에 빛과 자유를 허락하여 주소서”

 

 

1896년 당시 제물포 주 도로의 모습. 배재학당역사박물관 제공

 

최근 배재학당역사박물관 개관 6주년 기념으로 ‘아펜젤러의 친구들’이라는 기념전이 있었다. 그곳에서 아펜젤러의 사진첩과 일기 등이 공개된 적이 있다. 아펜젤러 유족들이 1985년 배재학교에 기증한 사진첩 가운데 1895년 명성황후 장례 모습을 담은 사진이 최초로 공개되었던 것이다. 공개된 사진은 1895년 실제 장례와 1897년 대한제국 선포 후 국장 여부로 논란이 되고 있음에도 근·현대사를 기록한 희귀 자료로 인정되어 언론에서 화제가 된 적이 있다.  


기도와 함께 시작된 아펜젤러의 한국선교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1858.2.6∼1902.6.11)는 언더우드 선교사와 함께 제물포에 들어온 미국 북감리교 선교사다. 당초 일본 선교에 자원했으나 미국 북감리교 선교부 애커만(G E Ackerman)의 권유로 2개월의 고민 끝에 한국 선교사로 임명받았다. 

그는 한국 선교를 앞두고 1884년 12월 17일 약혼자 엘라 닷지(Ella Dodge Appenzeller)와 결혼한다. 길지 않은 18년의 결혼생활을 한국 선교에 쏟아 부었던 그들 부부의 사랑과 희생은 아펜젤러의 비극적인 죽음 앞에서도 사라지지 않았다. 이후 미국에 있던 4남매는 아버지를 차가운 물속에 수장시킨 한국을 다시 섬기기 위해 왔다. 이들은 1920년 내한해 1940년까지 항일운동에 참여, 강제 추방당했다가 6·25전쟁 때 귀국, 고아들을 돌보는 등 아낌없는 사랑을 베풀었다.  

1885년 4월 5일 일요일 오후 3시. 제물포에 도착한 아펜젤러는 다음과 같은 기도를 드린다.

“우리는 부활절에 이곳에 들어왔습니다. 사망의 빗장을 산산이 무너뜨리고 부활하신 주님, 이 나라 백성들의 얽매여 있는 굴레를 끊으사 저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는 빛과 자유를 허락하여 주소서!”

아펜젤러의 기도는 실제로 그의 선교활동 가운데 이루어졌다. 한국 근대 교육의 선구자로서 1885년 배재학당을 설립해 교육의 이상적인 모습을 제시했다. 성서번역 언론 출판 활동을 주도해 관련 분야의 기초를 놓기도 했다. 그는 17년이라는 짧은 선교 활동에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아펜젤러가 제물포에 도착하기 2년여 전, 중국과 일본 선교에 정통한 매클레이(R S Maclay)는 쇄국으로 닫혀 있던 한국에 선교의 문이 열리기를 오래전부터 기도하며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의 간절한 소망이 이루어진 것일까. 1882년 5월 22일 한국과 미국의 수교(조미수호통상조약)를 기념하고자 1883년 한국의 사절단(보빙사)을 미국에 파송하는 일이 있었다. 

이들의 특이한 차림새는 당시 미국인들의 관심을 끌었고 뉴욕타임스와 뉴욕헤럴드, 보스턴 지역의 일간지 등은 ‘한국 사절단(The Corean Embassy)’이라는 제목으로 이들의 방문 경로와 옷차림에 대해 자주 언급했다. 미국의 해외선교부들은 오랫동안 문호가 닫혀 있던 한국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관심을 기울였던 터라 사절단이 미국 본토에 도착했다는 자체를 선교의 청신호로 생각했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한국 사절단이 미국에 도착하기 전부터 일본에 파송되었던 미국 성서공회 소속 목사 루미스(H Loomis)는 이들의 행보를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었다. 사절단이 가는 경로는 일본에 1개월간 체류하다 1883년 9월 2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는데 일본에 머무는 동안 루미스는 사절단 대표인 민영익을 만나 이들이 한국에 영향력을 끼치는 젊은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펜젤러의 한국 선교는 기도와 함께 시작됐다. 아펜젤러와 아내 엘라 닷지는 한국 도착 4개월 전 결혼했다. 배재학당역사박물관



한국 사절단에서 선교 가능성 보다 

루미스는 사절단이 미국 본토에 이르기 전 미국 성서공회 본부 총무 길맨(E W Gilman) 목사에게 다음의 편지를 보냈다. “한국 사절단에게 미국 문명의 기독교를 보여주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한국의 미래에 이들이 큰 영향력을 끼칠 것입니다.” 

미국을 방문하고 있는 한국 사절단으로 인해 미국 내 교회와 선교부가 한국 선교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을 때 매클레이를 후원하고 있던 미국 감리교 소속 가우처(J F Goucher) 목사는 샌프란시스코를 향하는 기차 안에서 한국 사절단으로 미국을 방문하고 있던 민영익(명성황후의 조카) 일행을 만난다.

가우처는 이들이 기독교에 대하여 긍정적인 반응이 있음을 파악하고 한국 선교를 추진하기로 결심했다. 그가 미국 감리교 해외선교부 총회에 2000달러를 기부하면서 5000달러의 기금이 구성되었고 매클레이 선교사에게 편지를 보내 한국 선교를 타진하도록 했다. 

중국과 일본 선교 경력만 40년에 가까운 매클레이 선교사는 노련했다. 그는 1884년 6월 13일 일본 나가사키를 떠나 24일이 되던 날 제물포에 도착했고 김옥균을 통해 고종에게 선교 허락을 얻어낸다. 1884년 7월 4일자 윤치호 일기에는 “고종이 미국의 독립기념일을 맞이하여… 미국상회의 근해 항해를 허가하고 미국인에게 병원 및 학교 설립을 허가하라” 는 교지를 기록했다. 일반인에게는 기독교 선교 윤허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지만 동북아 선교에 경험이 많은 매클레이와 미국의 해외선교부는 한국 선교의 발판이 마련되었음을 분명히 보았던 것이다. 

◇소요한 (명지대 객원교수·교목) 약력=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Th.M.)과 동 대학원(Ph.D.)에서 공부하고 연세대 기독교문화연구소 전임 연구원 및 연세대 강사를 역임했다. 지금은 명지대 객원교수와 교목으로 있다. 연구논문 및 저술로는 ‘조선후기 개신교 전래와 수용연구’ ‘초기 그리스도교 사상가들(공동 번역)’ 등이 있다.
소요한 명지대 객원교수·교목

 

 

 

2.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으로

美 북감리교 한국선교 실질적 책임자로 첫발

 

 

아펜젤러 선교사 부부는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오후, 한국 선교의 첫발을 내딛었다. 도착 당시 제물포항. 배재학당역사박물관 제공

 

 

알렌의 정착과 감리교 해외선교부의 파송 준비 

매클레이가 한국에서 김옥균을 통하여 고종의 윤허를 얻어 낸 이후, 그는 주한 미국 초대공사 푸트(Lucius H Foote)에게 선교사 부지를 부탁하여 마련했다. 곧이어 1884년 9월 20일 알렌이 의료선교사로 내한하였다. 당시 한국은 기독교를 금지하였기에 표면상 미국공사관에 소속되어 있는 ‘무급의료선교사’ 신분으로 들어왔다. 한국 정착이 쉽지 않은 상황에서 알렌이 그나마 정착할 수 있었던 것은 미국공사의 도움과 매클레이의 선교부지 마련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1884년 12월 4일, 서울의 풍경은 달빛이 유난히도 밝았다. 알렌이 평온한 밤을 보내고 있던 바로 그 시각, 우정국(郵政局) 낙성식에서 수구세력과 진보세력의 충돌이 일어났다. 바로 신구의 충돌로 대표되는 갑신정변이었다. 이 사건으로 한국 사절단 일원으로서 미국을 방문했던 민영익(명성황후의 조카)은 진보세력에 자상(刺傷)을 당해 생명이 위독하게 된다. 알렌은 독일의 외교고문 묄렌도르프와 푸트의 도움으로 중상을 입은 민영익을 치료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극적으로 살아난 민영익. 그는 서양 의술에 대해 남다르게 생각하고 있었다. 한국사절단으로 미국을 방문했을 때 근대 병원을 주의 깊게 지켜보았기 때문이다. 갑신정변은 진보세력으로 인해 개신교 선교에 위기를 맞을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도리어 고종과 민영익, 정부의 인식을 호의적으로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한국의 내란으로 정세가 긴박하게 돌아가는 동안 미국 북감리교 해외선교부는 한국에 선교사 파송을 준비하고 있었다. 스크랜튼이 1884년 10월 한국 의료선교사로 임명되었고 12월 4일(갑신정변일) 선교사로 안수를 받는다. 가족 구성은 아내와 2살 딸이 있고 스크랜튼의 어머니 메리 스크랜튼 여사가 있다. 스크랜튼 여사는 한국에 여성선교를 위해 파송된 최초의 여성 선교사로서 이화여대의 전신인 이화학당을 세웠던 인물이다.

아펜젤러 부부는 한국 선교를 위해 샌프란시스코로 갔다. 그곳에서 그는 의료선교사로 파송될 스크랜튼 가족들을 만나 선교 준비를 했다. 1885년 2월 2일 파울러 감독은 아펜젤러의 부인 엘라 아펜젤러에게 한국 선교를 돕는 조력자로 임명했다. 

 아펜젤러는 한국인의 일상에 관심이 많아 직접 다니면서 사진을 찍었다. 당시 그가 촬영한 짐꾼과 사탕 파는 소년. 배재학당역사박물관 제공



한국을 향해 가는 준비와 여정 

1885년 2월 3일 아펜젤러 부부와 스크랜튼 가족은 아라빅호(Arabic)에 탑승해 한국 선교를 위해 일본 요코하마로 출항했다. 아펜젤러는 23일간의 긴 여정 가운데 선상에서 예배를 인도했다. 배가 항해하는 동안에 풍랑을 만나기도 하였다. 스크랜튼을 비롯한 승객들은 생전 처음 보았던 풍랑을 경험하여 두려워 떨었는데 아펜젤러는 출애굽기 17장 6절의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하여 바위를 쳐서 생수가 나오게 하는 말씀’으로 설교했다. 그는 불가능한 일에도 하나님은 가능케 행하시니 거룩한 믿음을 가지라며 위로와 용기를 주었다.

1885년 2월 26일 일본 요코하마에 도착한 아펜젤러 부부와 스크랜튼 가족은 한국 선교를 앞에 두고 마지막 준비를 했다. 이들은 23일간의 여정으로 한국 정세와 한국어를 배웠다. 한국의 선교 정착을 위해 감리교 일본 선교지부의 책임자를 맡았던 매클레이가 한국 선교지부의 책임자를 맡았다. 그러나 거리가 너무 멀어 편지 왕래에 1개월 이상 걸린다는 점, 한국에서 선교를 시작하기에는 건강상의 문제로 힘들기 때문에 목사 선교사였던 아펜젤러를 한국 선교의 실질적인 책임자로 임명하였다. 

이를 계기로 아펜젤러는 한국 선교에 대한 복음전도의 열정이 충만했다. 그러나 매클레이는 열정을 갖되 정세를 살펴 선교에 임하라는 당부를 잊지 않았다. 앞서 매클레이는 중국 선교에서 태평천국운동(1853), 2차 아편전쟁(1856∼1860), 톈진학살(1871) 등 선교지의 정세로 생명의 위협을 받았기 때문에 현지 사정에 대해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은둔의 나라’를 향해 

1885년 3월 23일 아펜젤러 부부는 증기선 ‘나고야마루(名古屋丸)’를 타고 최종 목적지인 인천 제물포를 향했다. 3월 26일 배가 고베에 잠시 정착했을 때 아펜젤러의 선교동역자 언더우드 선교사가 탑승하였다. 마지막으로 배가 정착하는 곳은 나가사키이다. 이곳에서 이틀간 배가 정착했고 3월 31일 작은 증기선 ‘세이료마루(淸凉丸)’로 갈아타고 한국으로 향했다. 그의 포켓다이어리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은둔의 나라를 향해, 세이료마루에 승선하다!” 

작은 배는 2개의 섬을 거치고 마침내 한국에 입항하였다. 4월 1일 밤 12시30분. 첫 번째 정박지였던 부산으로 입항했다. 한국을 목격한 아펜젤러의 첫인상은 이랬다. “진흙 빛깔을 가진 집 덕분에 땅과 쉽게 구분이 되지 않는 한국인의 터전을 찾기 위해 다시 자세히 살펴보면서 찾아나갔다.” 부산에 도착했을 때 빈둥거리는 남성과 부지런히 빨래를 하고 있는 여성을 보면서 그는 “기근이 닥쳐오면 자신(남성)을 살릴 아내가 없는 홀아비들이 죽어간다는 말을 들었다”고 기록했다. 

부산 체류를 마치고 4월 3일, 제물포로 출발했다. 한반도의 남단을 돌아 서해로 가는 동안 풍랑과 높은 파도로 배가 느리게 움직였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뱃멀미로 고생을 했다. 4월 5일 날씨가 흐리고 비가 왔던 부활절 오후, 흐린 날씨가 이어진 가운데 아펜젤러 부부는 드디어 한국 선교를 위한 첫발을 내디뎠다.
소요한 명지대 객원교수·교목 

 

 

 

3. 제물포와 조선의 정착

갑신정변 불안한 정세로 서울 입성 연기

 

 

1880년대 말 제물포의 외국인 거류지 전경. 멀리 서구 열강의 기선이 정박하고 있다. 가운데는 아펜젤러가 머물렀던 대불호텔. 배재학당역사박물관

 

 

1885년 4월 2일, 주한 미국 대리공사 조지 포크는 매클레이에게 편지를 보냈다. 갑신정변의 여파로 한국 내 정세가 불안해 선교사업의 타진도 어렵고 신변 안전을 보장하지 못하니 최소한의 안전이 보장될 때 다시 알리겠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외교 정세에서는 어떤 미국인도 한국에 들어오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편지가 일본에 도착하기 전 아펜젤러 부부와 언더우드는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오후에 제물포항에 들어왔다. 주한 미국 공사관에서도 이들의 입국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이처럼 선교 시작부터 외교적 차원의 보호가 부재했던 것은 험난한 여정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아펜젤러를 맞이하는 제물포항 분위기는 분주했다. 따뜻한 환영 대신 일꾼들이 나와 이들의 짐을 날랐다. 독신으로 왔던 언더우드와 달리 아펜젤러는 그의 아내를 챙겨야 했다. 아내가 임신해 신변 안전에 만전을 다해야 했기 때문이다. 아펜젤러 부부는 제물포에서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일본인 해운업자 호리 히사타로(堀久太郞)가 운영하는 대불(大佛·Diabutsu)호텔에 머물렀다.  

1885년 4월 6일, 제물포에 정박하고 있던 미국 기선 오시피의 선장 맥글렌지는 대불호텔에 머물고 있는 아펜젤러 부부를 방문했다. 그는 신변이 염려돼 아펜젤러 부부의 서울 입성을 만류했다. 더욱이 아펜젤러의 아내 엘라 아펜젤러의 건강이 염려되었던 것이다.

 

맥글렌지는 서울에 있는 주미 대리공사 포크에게 안전에 대해 급하게 서신을 보냈고 당일 답신을 받았다. 서울은 정세가 매우 불안하기 때문에 입국할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정식 입국 절차로는 미국인의 서울 입성이 불가한 것이다. 

그렇게 제물포에 도착해 이틀이 지나갔다. 타국인 영사 중에서는 일본영사 고바야시가 이들을 가장 먼저 환대했다. 이어 영국의 스코트 영사가 방문했고 선교가 아닌 교육적 목적으로 서울 입성이 가능 하다는 대화가 오고 갔다. 아펜젤러가 타국 영사 두 명을 만나 느꼈던 감정은 다음과 같았다. “맥글렌지를 만났던 어제는 우리의 감정이 엉망이었지만 오늘 밤 두 손님을 맞으면서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

 

 

미국에서 유행했던 스미스 오르간으로, 아펜젤러가 제물포 입항 시 가져왔던 모델과 유사하다

 


한국 선교의 좌절 

한국에 입국한 지 며칠 지나 4월 10일이 되었다. 언더우드가 서울 입성을 강행해 알렌과 함께 있는 동안 맥글렌지 선장은 아펜젤러 부부에게 “서울 입경은 가능하지만 생명을 더 이상 보장할 수 없다. 무엇보다 임신한 부인이 걱정된다”는 입장을 펼쳤다. 후일 엘라 아펜젤러가 남긴 글을 보면 이러한 기록이 있다.

“서울 입경에 내가 짐이 되었다. 나 없이 그이(아펜젤러)는 서울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이는 자신의 신변에는 걱정하지 않았지만 나와 아기에 대해서는 매우 염려하고 있었다.” 

아펜젤러는 그의 아내의 안전뿐 아니라 선교를 강행하다 선교의 문이 닫히게 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서두르지 않기로 했다. 결국 아펜젤러는 일본 나가사키로 돌아가 한국 선교를 위해 보다 철저히 준비하기로 한다.

이후 아펜젤러 부부가 일본에 체류하는 동안 목사 선교사보다는 의료 선교사가 먼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1885년 4월 30일 스크랜튼을 먼저 파송했다. 스크랜튼은 가족을 홀로 남겨 두고 단신으로 한국에 도착해 1885년 5월 3일 서울에 입성하게 된다.  

아펜젤러 부부가 일본에 머무는 동안 그의 심경을 알 수 있는 편지가 남아 있다. 아펜젤러가 웨더스(Wadworth)라는 친구에게 쓴 편지인데 “한국에 도착하여 성공적이지 못한 선교 성과로 깊은 실망과 좌절감에 빠져 있었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아펜젤러는 “소망이 모든 것을 최선으로 만들게 될 것”이라는 고백을 가지고 한국 선교를 기다리며 간절히 기도하였다. 그는 나가사키의 해외 여성 선교부(Woman’s Foreign Missionary Society)에서 교육 사역을 배우고 한국어와 중국어를 공부했다. 또 학생이 없던 기독교학교를 도와주면서 100여명의 학생을 모으는 성과를 보여주기도 했다.  

아펜젤러는 일본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한국인에 대한 영감을 가지게 된다. 일본과 중국 문화를 배우고 있는 그에게 동북아는 한국이 가지고 있는 위치와 저력을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무대가 되었다. 일반 서구인들이 ‘한국인은 게으르고 무능하다’고 평가했던 것과는 달리 아펜젤러는 한국인이 가지고 있던 저력을 누구보다 먼저 파악했다. 그 저력을 이끌어 내기 위해 교육이 무엇보다 필요함을 깨닫게 되었다.



한국 선교의 두 번째 시도 

1885년 6월 10일, 의료선교사로 한국에 파송된 스크랜튼에게서 편지가 도착했다. 한국 정세가 안정되었으니 들어와도 된다는 편지였다. 1885년 6월 16일, 아펜젤러 부부와 스크랜튼 가족, 미국 북장로교 의료 선교사 헤론 부부(Dr. and Mrs. Heron)는 나가사키를 출발해 6월 20일 제물포항에 도착하게 된다.

 

스크랜튼은 가족을 위한 거주지를 마련했던 반면, 아펜젤러가 서울에 머물 수 있는 공간은 아직 마련되지 못했다. 중국인이 운영하는 해리스호텔이라는 곳에 머물렀지만 하루에 2달러의 호텔비가 아까워 한 달에 25달러 하는 초가집에 거의 한 달간 임시 거주했다. 1885년 7월 7일, 아펜젤러는 화물로 도착한 오르간을 펼쳐 ‘만복의 근원 하나님’ 등 찬송을 연주했다. 그가 기도로 고백하였던 만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이 오르간을 통해서 찬양으로 한국 땅에 울려 퍼졌던 것이다. 
소요한 명지대 객원교수·교목

 

 

 

4. 개신교 선교의 문을 열다 근대교육의 요람, 배재학당 태동하다


 

 

1899년 아펜젤러가 촬영한 서울의 서쪽 성벽에서 찍은 파노라마 사진. 중앙의 성곽보다 높이 솟은 서양식 건물은 프랑스 영사관으로 현재 정동의 창덕여중 자리다. 프랑스 영사관을 기준으로 왼쪽에 위치한 문이 서대문(돈의문)으로 이 사진은 서울의 옛 성곽의 윤곽을 살필 수 있다는 점에서 희귀 자료로 꼽힌다. 배재학당역사박물관

 

 

기도로 시작된 서울 입성과 정착 

아펜젤러는 1885년 7월 29일 제물포를 떠나 당일 밤 서울에 도착하게 된다. 아펜젤러는 미국 테네시에 있는 버넷 목사에게 보낸 편지에 서울 도착의 심경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저는 어두운 밤 북서문(돈의문)을 통해 서울에 도착하였습니다. 주님 발 앞에 무릎 꿇고 순종했던 것처럼, 주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저들의 영혼을 구원하는 도구로 사용하여 주소서! 라고 기도했습니다.”

서울에 입성한 아펜젤러는 첫해를 선교 토대 마련에 힘을 쓴다. 그는 교단에 상관없이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서 노력을 했다. 교육과 의료선교를 위해 좋은 부지를 물색하던 가운데 서울 정동에 기반을 잡게 된다. 이후 아펜젤러는 한국 선교와 주한 미국인들을 위한 공동체 구역을 마련하기 위해 미국인 커뮤니티를 만든다. 아펜젤러의 부인 엘라 아펜젤러는 그녀의 친한 친구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현재 6개의 선교사 가정이 있다. 우리 부부는 이들 가정과 하나의 가족처럼 선교를 하고 있다. 또한 친구처럼 편하게 지내고 있다. 우리는 조국에서 멀리 떨어진 정동의 집에서 매우 행복한 시간을 가지려고 노력한다.”

아펜젤러는 일본과 중국의 항구에 있는 외국인 거류지처럼 치외법권 성격을 지닌 미국인 타운을 정동에 만들고자 노력하였다. 하지만 일본과 중국의 거류지와 달리 정동은 시내 중심에 있고 왕의 궁궐과 지근거리에 있어 정치외교적인 상황에 민감한 지역이었다. 

그만큼 선교활동에는 제한적이었고 정부의 금교령이 강하게 미치는 지역이어서 직접 선교는 시도조차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펜젤러가 일구어 놓았던 정동의 선교사 거류지는 후에 나라사랑을 실천하는 배재학당 학생들의 협성회 활동을 도와주는 장소가 됐다. 

 

 

아펜젤러가 찍은 1899년 서울 정동의 모습. 미국 북감리교 건물과 선교사 사택이 있었던 곳이다. 배재학당역사박물관




근대교육의 요람 배재학당이 시작되다 

의료 선교가 한국 선교를 정착시키는 것에 기여했다면 아펜젤러의 교육 선교는 한국 선교를 발전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스크랜턴 선교사는 아펜젤러보다 서울에 먼저 입성해 알렌과 함께 제중원에서 의료사역을 도왔다. 그는 선교 사역에 좀 더 집중하기 위해 순수 선교기금으로 설립된 최초의 선교병원을 정동에 세웠다.

정동의 병원에 오는 이들은 주로 평민과 가난한 민중이 대부분이었다. 이들을 받기에 턱없이 힘이 부쳤음에도 스크랜턴은 마다하지 않고 환자를 진료하였고 한걸음 더 나아가 길가에서 죽어가던 이들을 찾아다니며 치료했다. 

이러한 스크랜턴의 사역을 도와주기 위해 제중원에서 함께 따라왔던 2명의 한국인 동역자가 있었다. 의사가 되기를 희망했던 이겸나와 고영필이었다. 1885년 8월 3일, 이들은 의사가 되기 위해서 아펜젤러에게 영어를 배우려고 찾아왔다. 이러한 배움의 뜻은 근대교육의 요람이었던 배재학당 설립의 씨앗이 됐다.

아펜젤러의 가르침은 이내 소문이 퍼져 육영공원의 전신이었던 통역 양성학교, ‘동문학(同文學)’에서 영어를 배우던 학생 3명이 이곳에 합류했다. 이들의 목적은 대부분 ‘출세를 하기 위해서’ ‘관직을 얻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호기심과 출세욕으로 찾아온 학생들은 대부분 정착하지 못했다.

학기 도중 학생들이 떠나기 일쑤였고 다음 학기가 시작되는 개학 일에는 심지어 단 한 명의 학생만으로 개강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배재학당의 빈자리는 수개월 내로 채워져서 18명 정도가 실제 출석인원이 되었다. 아펜젤러의 한국 정착은 늦었지만 배재학당은 근대교육의 도장이 됐다. 

1885년 9월, 일본 주재 선교사 매크레이에게 보낸 보고서를 보면 아펜젤러는 근대교육의 완전한 커리큘럼을 계획하고 있었다. 이후 학생들의 인원이 여전히 안정적이지 못했지만 그의 비상한 교육 이념에 동조하는 학생들이 속속 입학했다.  


한국어를 배우는 아펜젤러 

아펜젤러 선교사는 한국어 습득을 무엇보다도 우선순위에 두었다. 그는 한국어 습득에 매우 힘들어했지만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특히 선교 첫해에는 정착하기 위해 해야 될 일들이 산적해 있음에도 한국어 연습을 게을리하거나 미루지 않았다. 연이은 언어 소통의 실패에도 굴하지 않고 이내 한국어에 매진하였다.

이후에 아펜젤러는 한국에 왔던 신임 선교사의 한국어 교육을 전담할 정도로 한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하게 되었고 한국어에 정통하여 한·영 문법, 사전 등을 수정·보완하게 된다. 특히 선교사들의 성서번역을 아펜젤러가 주도하였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 서적, 교육 관련 서적의 번역, 유창한 설교는 선교를 향한 열정과 그의 피나는 노력의 결과였다.  
소요한 명지대 객원교수·교목

 

 

 

5, 고종과 아펜젤러의 교육선교 / 관료 지식인부터 민초까지 영어 배우기 열풍

 

 

 

아펜젤러가 직접 찍은 배재학당 초기 모습. 작은 사진은 고종이 하사했던 배재학당 현판. 배재학당역사박물관

 

영어 열풍의 발원 

1885년 9월, 아펜젤러의 한국 선교는 교육 선교를 통해 정착하게 된다. 아펜젤러의 글을 보면 한국인들이 영어를 습득하는 것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한국인들은 교육활동을 받아들이고 있으며 영어를 배우는 태도는 더욱 각별하다. 동양에서 영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정말 신기하다. 모두가 영어를 배우기 원하고 몇 마디만 알아도 자랑스럽게 여긴다. 우리 집 한국인 사내 아이도 몇 마디를 어깨 넘어 배우고 영어를 사용한다.” 

130년 전 관료 지식인을 비롯하여 민중에 이르기까지 영어를 배우려는 노력이 있었다는 것은 근대화를 위한 한국인들의 열망을 살펴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러한 근대 교육의 열망은 서구 열강의 침략에 맞서고 생존하기 위해 인재 양성이라는 국가적 차원의 노력이 기울여진 결과라고 할 수 있지만, 지도층을 비롯한 일반 민중에게는 영어라는 새로운 외국어가 각자의 목적에 따라 출세와 지식을 위한 도구가 되기도 하였다.

고종과 아펜젤러의 교육 선교 

1885년 10월 말, 미국 공사 포크는 아펜젤러의 교육 선교 정착을 위하여 고종과 알현을 가진다. 대화 내용은 한국의 근대 교육에 관한 것이다. 포크 공사는 고종과 대화하였던 내용을 아펜젤러에게 다음과 같이 4가지로 정리하여 전달하였다.  

“첫째는 당신(아펜젤러)이 가르치기 위해 한국에 왔다는 것, 둘째는 미국에서 먼저 내한한 육영공원 교사들과 마찰이 생길 수 있기 때문에 조선 정부는 별도로 학교 건물 제공과 학생들을 모집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셋째는 조선 정부와 백성들이 하고자 하는 근대 교육 활동과 충돌하는 활동을 지양 할 것, 넷째는 당신이 미국에서 풍부한 교육 경험을 가지고 있다는 점 등이다. 이에 대하여 고종은 당신이 조선을 도와주고 싶다는 의중에 대하여 기쁘기 그지없다는 뜻을 내비쳤다고 하였다.”  

아펜젤러는 고종의 호의를 긍정적으로 생각해 사실상 선교가 허가 되는 것으로 생각하였고 한국과 미국의 외교, 무역 관계 등이 한층 강화될 것이라는 기대감도 갖고 있었다. 고종의 첫 인상에 호감을 가졌기 때문인지 그가 선교를 펼치는 전반에 걸쳐 어느 선교사들보다 조선 왕에 대한 존경과 예우가 드러나는 장면이 많다.

청일 전쟁 후 청의 패배로 일본의 노골적인 침략과 친일 세력의 확장, 대원군에 의한 고종 폐위 시도, 명성황후 시해, 아관파천 등 고종에 대한 신변위협이 지속되는 가운데 아펜젤러는 선교사들과 함께 왕의 신변에 안전을 다하기 위해 충군애국적인 태도와 행동을 취하였기 때문이다. 

아펜젤러의 한국 사랑은 1897년 8월 13일 조선의 개국기념일에 행한 ‘한국에 대한 주한 외국인의 의무(The Obligation of Foregin Residents to Korea)’라는 연설에서 잘 드러난다. 이 연설은 아펜젤러가 독립협회에서 강연했던 내용으로 한국에 주재했던 다른 어떤 외국인보다 한국 문화와 국가에 대한 존경과 자부심이 잘 드러냈다.  

“우리는 한국을 믿어야 합니다. 한국은 극동의 이탈리아로 멋진 나라일 뿐 아니라 인구도 적지 않습니다. 한국에 대한 좋은 인상은 우리 외국인의 역할에 달려 있습니다. 외국인은 한국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한국을 올바르게 알고 믿을 수 있습니다. 한국의 지난 발자취에 드러난 뛰어난 사상들은 평화의 사상입니다. 우리는 앞으로 다가오는 미래에도 동일하게 한국을 지지하고 믿어야 합니다.” 

아펜젤러의 선교 열정 

아펜젤러는 자신이 한국선교를 위해 내한하였던 목사 선교사라는 신분을 항상 잊지 않았다. 선교 정착에 힘을 쏟는 동안 그의 재능을 눈여겨봤던 사람들은 그에게 여러 제안을 하였다. 청에서 파송된 최초의 외국인 외교고문관 묄렌도르프는 아펜젤러에게 육영공원의 교장을 제안하였으나 아펜젤러는 이러한 제안을 거절하였다.

그 이유는 정부 주도로 세워졌던 육영공원의 교장직이 자칫 선교를 하러 왔던 아펜젤러의 근본적인 목적을 해칠 수 있을 것 같다는 판단에서였다. 이러한 제안은 거의 10년이 지난 1894년 2월에도 있었다. 국립학교를 섬겨줄 수 있냐는 제안이었다. 하지만 목사 선교사로 한국에 왔던 그의 소명에 시간을 온전히 할애하지 못할 것 같다는 이유로 또 다시 거절했다. 

신변의 위협이 도사리고 있던 한국에서 아펜젤러의 개인적인 신변과 안전을 생각한다면 정부의 제안을 수용하는 것이 합리적일 수 있으나 이러한 제안을 거절했다는 것은 한국 선교에 대한 그의 소명이 얼마나 중요하였는지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현판 ‘배재학당(培材學堂)’이 걸리다 

아펜젤러가 한국에 오기 20여 년 전, 1866년에 시작된 병인박해는 1871년까지 6년간이나 지속되어 천주교에 가장 큰 피해를 주었고 조선 정부를 비롯한 사회적 분위기는 천주교도들을 ‘사학죄인(邪學罪人)’으로 몰아가던 분위기였다. 개신교에 대한 사회적 분위기와 인식도 그리 만만하지 않았다.

당시 아펜젤러를 비롯한 선교사들은 교육 활동에 대하여 정부적 차원의 안전장치가 필요하였다. 이를 두고 기도하며 선교를 진행하고 있는 동안 뜻하지 않았던 좋은 결과가 생겼다. 고종이 선교사들의 교육활동을 보고 이를 어질게 생각해 스크랜튼 대부인(스크랜튼 선교사의 어머니)의 학교에는 이화학당(梨花學堂), 아펜젤러의 학교에는 배재학당(培材學堂), 스크랜튼의 병원에는 시병원(施病院)이라는 사액 현판과 이를 보좌할 사람을 내려주었던 것이다.  
소요한 명지대 객원교수·교목

 

 

 

6. 배재학당의 정초석 학생 수 폭발적 증가, 서양식 학교건물 신축

 


 

배재학당의 초기 학생들 모습. 배재대 제공

 

아펜젤러는 교육 선교 초기에 의미 있는 일을 경험한다. 우선 왕에게 배재학당이라는 이름과 현판을 하사 받은 것이고 둘째는 배재학당의 건물을 서구식으로 지은 것이다. 그리고 셋째는 신앙을 갖게 된 학생들이 생겨 정동교회의 효시가 되었다는 점이다. 


배재학당 현판의 의미 

아펜젤러는 그의 일기에 고종이 1887년 2월 21일 현판을 하사했던 일을 기록하고 있다. 배재학당이란 이름은 고종과 조병식이 지었다. 조병식은 예조와 형조판서를 지낸 사람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조병식은 이후 배재학당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독립협회에 왕정을 전복시킨다는 누명을 씌워 탄압한 인물이다.

당시 아펜젤러는 이러한 조선 정부의 승인을 정부 차원의 보호로 생각했다. 그는 일기에 이렇게 썼다. “더 이상 학생들은 핍박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 없이 학교를 다닐 수 있다. 현판이 걸려있는 학교 정문은 우리의 교육 선교를 조용히 보호해준다. 더 이상 선교사라는 신분을 감출 필요도 없다. 이 현판이 가지고 있는 의미는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크다.”  

아펜젤러는 ‘배재학당(培材學堂)’이란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자세히 알기 원했다. 그는 조선에서 처음 세례를 주었던 일본영사 직원 하야카와(早川)에게 한문의 의미를 부탁하였다. 하야카와는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정동 거류지에 있던 판사 유키가 다음과 같이 해석을 하였습니다. 이름의 첫 번째, 한자인 배(培)자는 경작물을 얻기 위해 주변의 흙을 일구는 것으로, 뜻을 보면 양육하다(to rear)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고, 두 번째 한자인 재(材)는 집을 지을 때 쓰는 재료로써 뜻을 보면 집을 지을 때 좋은 재목을 사용하듯 ‘정부조직 가운데 좋은 인재’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어 유키 판사는 자신의 관점으로 바라볼 때 조선 정부가 당신의 학교에 유능한 인재를 양육하는 것을 기대한다는 의미라고 하였습니다.”  

아펜젤러는 배재학당의 의미를 일기에 적어두었고 그 아래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내가 희망하는 것은 조선을 위해 유용한 인물이 될 뿐 아니라 조선의 백성을 위해 필요한 인재가 되도록 할 것이다.” 아펜젤러의 이러한 사명은 그의 생명이 다 할 때까지 지속됐다. 조선 정부뿐 아니라 조선의 백성을 위해 인재 육성을 목표로 했던 배재학당은 우리나라 초대 대통령 이승만을 위시해 서재필, 주시경, 나도향, 김소월 등을 배출하여 ‘배재’를 실현시켰다.  

 

 

배재학당 정초식에 넣었던 잡지 가운데 하나로 스크랜턴 대부인이 가지고 온 기념품과 동일한 잡지의 표지(1887년 7월)이다. 소요한 교수 제공




배재학당의 정초석 

1885년 6월부터 시작된 교육 선교는 이듬해 10월에 이르자 학생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인원이 너무 많아 한옥식 교실에서는 수용이 어려워 새로운 건물이 필요했다. 아펜젤러는 1887년 1월 3일 선교본부의 리드 감독에게 새로운 건물이 필요성을 주장했고 그해 5월 선교본부로부터 편지가 도착했다. 내용은 학교 건축에 대한 허가와 후원이 이루어졌음을 알리는 기쁜 소식이 있었다.  

이후엔 학교 건축이 천천히 진행됐다. 아펜젤러의 일기나 문서를 보면 이 건물에 대해 ‘대학당(college hall)’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아펜젤러는 교육 선교 시작부터 대학으로 발전시키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1898년 아펜젤러는 선교의 후반부에 배재학당을 ‘서울대학교(Seoul University)’로 발전시키려 했었다. 그러나 감리교 선교본부, 동료 선교사와의 의견 충돌로 보류했다.  

배재학당 건물은 서양식 건물로 빨강색 벽돌을 이용하여 지었다. 76×52피트(368.3㎡)의 규모로 진행했다. 정초석(모퉁이 돌)을 쌓아 올릴 무렵 아펜젤러는 1887년 8월 5일 오후 4시45분에 스크랜튼 어머니, 하야카와 씨, 요시자와 씨와 함께 정초식을 거행하였고 정초석 안에는 박스 형태로 의미 있는 물건을 담았다. 일종의 타임캡슐과 같은 상자에는 당시 통영 되었던 현금과 일본 은화 1닢, 마가복음, 선교잡지 3종(1887년 6월 출간 ‘Gospel in all land’, ‘Heathen Woman’s Friend’, ‘Christian Advocate’), 배재학당 약사, 메모, 선교본부로부터 건축 허가를 받아낸 리드 감독의 서한을 담았다.  


배재학당을 통한 복음화 

배재학당이 근대 교육의 중심에 있었지만 학교 내 선교는 자유롭지 못했다. 국립학교에서 왔던 학생 한 명은 “하나님께서 비(rain)를 내리신다”는 영어문장을 읽지 않고 거부했다. 이에 아펜젤러는 보다 신중하게 선교에 접근하면서 하나님께 선교의 문을 열어 달라고 기도했다.  

이러한 그의 간절한 기도가 이루어졌는지 한용경이라는 학생은 아펜젤러를 한밤중에 몰래 찾아와 신앙에 대해 상담을 하였다. 1887년 7월 24일에는 박상중이라는 학생이 세례를 받게 된다. 박상중은 유능한 자원으로 하야카와 씨가 세례를 권고했다. 

이후 아펜젤러를 제일 먼저 찾아왔던 한용경은 고민 끝에 10월 2일 두 번째로 세례를 받게 된다. 이를 계기로 1887년 10월 9일 오후 남대문 부근에 성경사업과 반포를 위해 마련했던 한옥의 벧엘 예배당(Bethel Chapell)에서 한국인과 정식으로 첫 예배를 드린다. 이것이 한국감리교회의 모 교회 정동제일교회의 시작이다.
소요한 명지대 객원교수·교목

 

7. 배재학당과 한국 선교

“신자 100명·학생 30여명… 복음의 놀라운 승리” 

 

 

 

스크랜톤 대부인이 선교의 일환으로 세운 이화학당 초기의 모습. 

배제학당 역사박물관 제공

 

 

주한 외국인과 현지인 선교 

조선 정부는 현지인을 상대로 직접 선교를 금지했다. 그러나 주한 외국인들의 종교 활동은 허가했다. 아펜젤러는 그의 선교 초기였던 1885년 8월∼1887년 1월, 미국인 연합교회와 일본인 구락부를 중심으로 예배와 설교, 전도 등 목회 활동을 활발히 수행했다. 미국 북감리교 선교부의 1886년 연례보고서를 보면 서두에서 시작되는 통계를 통해 아펜젤러와 당시 선교사들의 노력을 간접적으로 살펴 볼 수 있다.

“교육과 의료 선교,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다. 1명의 예비 신자, 100명의 신자, 12명의 주일학교 교사, 30여 명의 배재학당 학생들, 환자들이 넘쳐나는 병원 모두는 복음의 놀라운 승리의 시작이 될 것이다.”

주한 외국인을 상대로 한 그의 목회 활동은 배재학당 가운데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1885년 5월 22일 시작된 스크랜튼의 의료 선교는 배재학당의 학생을 모집하는 결실로 이어졌고, 아펜젤러의 교육 선교는 배재학당을 발전시켜 교회 설립이라는 선교의 결실로 태동하게 된다. 

배재학당의 근대 교육이 복음 전파로 이어졌던 이유는 아펜젤러의 교육 이념에 있었다. 조선 정부가 기독교 선교를 금지시키고 있는 상황 가운데, 배재학당의 학생 몇 명은 교과서에 나타났던 기독교적 가치관을 거부하고 반발하였다. 하지만 아펜젤러는 이러한 상황에 굴하지 않았다. 그는 근대교육뿐 아니라 기독교 정신을 가르치기 위해 항상 갈등했다. 미국 드루에 있는 친구 비벤에게 보낸 아펜젤러의 서한들을 보면 고민이 잘 드러난다.

“서구의 문명을 가르칠 때 기독교는 배제 될 수 없다. 나는 가장 쉬운 단어 몇 개로 기독교를 가르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1887년 6월 9일 편지의 일부)  

“우리는 주님께서 이 학생들을 변화시킬 수 있음을 믿는다. 변화된 학생들은 주의 권능을 부여 받아 백성에게 선한 것을 베풀게 될 것이다. 교육은 세속적인 사역이지만 우리는 그 안에 복음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교육은 선교 사역의 통로가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사역에 충성을 다하면 엄청난 좋은 결과를 가져다 줄 것이다.” (1887년 7월 25일 편지의 일부)  

아펜젤러의 노력은 조선 정부가 선교를 금지하고 있는 상황임에도 학생들 일부가 주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결과를 가져다 주었다. 이뿐 아니라 1887년 2월 21일, 고종이 하사하였던 배재학당의 현판이 한국 학생들에게 시사했던 영향력은 컸다. ‘배재학당(培材學堂)’이라는 현판이 걸리고 난 후에 학생들은 왕이 선교사들의 교육과 의료선교를 승인하였고 예배 참여를 허락한 것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이화학당(梨花學堂)’, ‘시병원(施病院)’ 현판이 미치는 현상도 마찬가지였다. 현판이 하사된 후 일주일이 지나자 한국인들은 서울의 외국인 연합교회의 예배에 참석했다. 아펜젤러에 의하면 배재학당, 이화학당, 시병원에서 30명이 넘는 한국인이 몰려왔다고 한다.  
 

 

아펜젤러가 이북 지역 답사여행 중에 당시 산길을 다니는 사람들을 사진 촬영한 모습

 


이북 지역 답사 여행과 선교 확장의 꿈 

아펜젤러는 1887년 4월 13일부터 5월 8일까지 26일간 지금의 경기도 고양시와 황해도 개성시, 서흥군, 평산군, 황주군, 평안도의 평양시를 여행하였다. 원래는 장로교 의료 선교사 헤론과 함께 답사하기로 했으나 헌트와 함께 답사 여행을 시작했다. 이 여행에서 아펜젤러는 이북 지역의 풍물을 돌아보면서 이미 만주 지역의 스코틀랜드 선교사 매킨타이어와 존 로스에 의해 복음의 씨앗이 심겨졌던 지역을 되돌아보게 된다.

이들은 평양에서 로스와 매킨타이어와 동역하였던 한국인 권서가 뿌렸던 복음의 흔적을 찾았다. 하지만 이 지역의 기독교인들이 금교 정책으로 세례를 받지 못하고, 예배도 드릴 수 없고 교리서조차 가질 수 없는 상황을 바라보면서 선교가 이 지역까지 확장되는 비전을 품게 된다.  

“내가 가장 바라는 소원은 마을과 시내 곳곳에서 예수님을 전하는 것이다. 복음이 자유롭게 선포되는 날은 아직 오지 않았지만, 언젠가는 오게 되리라. 우리 기독 학생들이 이 나라 곳곳에 흩어져 넘쳐나게 되면 이 나라 전체에 좋은 영향력을 미치게 될 것임을 알 수 있다.”  

아펜젤러가 이북 지역 답사여행을 마치고 와서 최씨라는 기독교인을 만나게 된다. 최씨는 1881년 중국 목단에서 스코틀랜드 개신교 선교사였던 매킨 타이어에게 세례를 받았던 한국인이었다. 매우 신실한 그는 아펜젤러의 권서인이 되었다. 아펜젤러는 만주 지역의 존 로스와 매킨타이어의 선교가 열매 맺기를 원했다.

“이 두 분 목사님은 자신들이 뿌린 복음의 씨앗을 선교사가 거두기를 소망하신다. 권서인 최씨는 압록강에 있는 의주까지 갈 것이고 가는 도중 복음을 전파할 것이다. 최씨가 말하기를 평양에 많은 신자들이 있으며 선교사가 방문해서 세례를 베풀고 교회를 조직하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나는 올 가을에 이북 지역을 반드시 다시 한 번 방문해야 한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내가 가는 동안 학교를 돌보는 동역자가 없다. 이 가능성이 있는 한국으로 더 많은 일꾼들을 보내주시기를 기도한다.”  
소요한(명지대 객원교수·교목)

 

 

8. 정동교회의 모태 베델 예배당

작은 가옥서 7명 예배… 한국 최초의 감리교회

 

 

권서인과 조서의 여행 모습을 아펜젤러가 촬영한 사진으로 뒤에 아펜젤러의 아내와 자녀가 보인다. 아펜젤러의 해설에는 선교사의 여행 모습도 이와 같다고 했다.

 

 

한국 최초의 감리교 세례자 

1887년 7월 24일 한국인으로서 최초의 감리교인이 탄생하였다. 아펜젤러는 자신의 집에서 배재학당 학생인 박중상에게 세례식을 집례했다. 아펜젤러의 일기에 의하면 박중상은 일본에 유학을 갔다 기독교를 처음 듣고 한국에 돌아와 일본 영사의 직원 하야카와의 권면으로 세례를 받게 되는데 하야카와는 아펜젤러에게 신앙 양육을 받고 세례를 받았던 사람이었고 배재학당의 현판의 의미를 해석해 주기도 하였다. 아펜젤러는 세례의 감격을 다음과 같이 남겨두었다. 

“여기서 우리 사역이 시작되었다. 나는 그에 대한 모든 것을 주의 손에 맡겼다. 주님만이 그를 보호해 주실 수 있기 때문이다. 더 많은 이들이 우리 교회에 몰려올지도 모른다. 그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이다.”

1887년 10월 2일 주일 밤에는 배재학당 학생인 한용경에게 세례식을 집례하게 된다. 두 번째 세례식에서 아펜젤러는 한국어로 세례식을 거행하였다. 

 

 

아펜젤러는 한국인뿐 아니라 재한 외국인을 상대로 선교를 했다. 서울의 일본인 거류지역을 아펜젤러가 촬영한 것으로 일본식 주택들과 일본영사관이 보인다.



워런 감독의 방문과 예배 처소 마련 

미국의 워런 감독은 한국에서 1887년 9월에 세 번째로 열리는 감리교 연회에 참석하기 위해 방문하였다. 워런 감독은 아펜젤러의 사역에 깊은 감명을 받았고 그의 사역을 전적으로 후원하기로 하였다.

그는 아펜젤러에게 “한국 정부가 선교에 대하여 묵인한 것 같지만 절대 과소평가하지 말게. 내가 한국 선교를 위하여 힘써 밀 것이며 선교 후원을 하겠네” 라고 말했다.  

아펜젤러는 워런 감독의 도움으로 네 가지 정도의 선교 사역을 추진할 수 있었다. 첫째는 한국인만을 위한 예배 처소를 위해 가옥을 마련하였고, 둘째는 권서인(勸書人)을 내지로 파송하는 것과 그 사역을 후원하는 것, 셋째는 이북 지역인 평양에서 선교 사역을 하는 것, 넷째는 한국 선교를 위해 두 명의 선교사를 추천, 보강하는 것으로 한국 선교를 지원했던 일이다. 

한국 최초의 감리교회, 베델 예배당의 설립 

워런 감독의 방문과 후원에 힘입어 아펜젤러는 한국인을 위한 성경공부와 예배 처소를 구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9월 말에는 예배 처소의 하나로 아담한 가옥을 매입하였다. 이곳이 아펜젤러의 선교 사역의 결실이 되는 정동교회의 모태, 곧 베델 예배당이다. 베델 예배당의 교인 구성을 살펴보면 교파와 교단, 신분을 초월하는 특징이 드러난다.  

1887년 10월 11일 아펜젤러의 일기를 보면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남기고 있다. “10월 9일 베델 예배당에서 오후 예배를 드렸다. 이곳은 우리가 성경공부를 위해 매입한 가옥으로 지난주에는 만주 목단(현재 중국의 선양)의 존 로스 선교사가 이곳을 방문하였고 2명의 한국인 신자를 데리고 왔다. 그중 한 명은 현재 배재학당에 다니고 다른 한 명은 로스 선교사가 한국인 중에서 제일 우수한 인재라고 추천하여 두 번째 권서인으로 채용하였다.” 

아펜젤러가 가지고 있던 복음의 열정은 국가와 종파를 뛰어넘어 존 로스와 연합하는 결과를 가져다주었다. 미국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는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와 스코틀랜드 출신의 장로교 선교사 존 로스는 선교지를 두고 자존심을 내세웠던 것이 아니라 서로 이해하고 협력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존 로스는 당시 아펜젤러의 선교 사역을 보면서 약 15년 전 추운 만주에서 닫혀 있던 한국에 선교가 시작되기를 바라는 기도를 회상했을 것이다. 그리고 한국인 권서들과 밤낮을 세워가며 성경을 번역하였던 노력들이 여기서 결실을 맺게 될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존 로스가 아펜젤러에게 소개해 주었던 ‘제일 우수한 한국인’은 이러한 기대를 표현한 하나의 상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베델 예배당의 교인과 예배 

한국 최초의 감리교회는 1872년에 만주 지역에 파송된 스코틀랜드 선교사 존 로스와 매킨타이어, 한국인 권서의 기도와 성경 번역 등 말로 다 할 수 없는 피나는 노력들이 아펜젤러의 선교 열정과 연합하여 결실을 맺게 된다.  

베델 예배당의 교인은 존 로스가 데리고 왔던 2명의 권서인을 비롯해 강씨, 최씨와 그의 아내로 5명의 한국과 일본 기독교인 남성 2명이 들어와 7명으로 구성되었다. 베델 예배당은 한옥으로 사방 8자가 되는 방의 크기였다.  

아펜젤러를 비롯한 모든 교인들은 좌식(坐式)으로 예배를 드렸다. 예배 형식은 아펜젤러가 영어로 기도를 시작하면 성도들은 마가복음 1장부터 차례대로 강독하였다. 마가복음은 만주에서 이미 한글로 번역된 쪽복음서 가운데 하나였다. 그런 다음 권서인 중 한 명이 기도를 인도하였다.  

아펜젤러는 “나는 이 예배가 하나님께 쓰임 받는 중심지가 되도록 기도했다. 현재 서울에는 교인 수가 예배 교인을 포함하여 모두 7명이다. 이곳의 모임에 참여하고 싶은 사람들이 여러 명 있다”고 기록했다. 교인 수는 적었지만 모임에는 생기가 넘쳤다. 
소요한(명지대 객원교수·교목)

 

 

 

9. 베델 예배당의 정착

여성에 첫 세례… 안방까지 복음 열매

 

 

 

초기 정동교회는 남녀 자리를 구분했다. 출입문 가까이에 남자가 앉았고, 여성은 멀리 앉았다. 배재학당역사박물관 제공

 

 

베델 예배당의 처음 열매  

베델 예배당이 세워지면서 한국 선교의 시작을 알리는 최초의 열매들이 생겨났다. 1887년 10월 9일 한국 감리교인의 첫 예배가 드려진 이후 감리교 최초로 여성 세례가 거행됐다. 한국 감리교인을 위한 최초의 성찬예배를 드렸으며, 아펜젤러의 첫 한국어 설교가 시작됐다.  

한글 성서를 최초로 번역했던 존 로스 선교사는 아펜젤러의 선교 사역에 감탄했다. 그가 아펜젤러의 집에 머무는 동안 아펜젤러의 성품과 사역 원칙, 방식을 보면서 한국 사역이 결코 실패하지 않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로스는 아펜젤러의 첫 사역과 열매들이 사회에 모범이 되어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도록 충고도 아끼지 않았다.

개신교의 첫 여성 세례자와 성찬예식 

1887년 10월 16일 주일, 아펜젤러는 권서인 최씨의 아내에게 세례를 줬다. 최씨 아내는 개신교 최초의 여성 세례자이다. 아펜젤러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그녀는 세례문답에 매우 확실하고 분명하게 대답했다. 나는 우리 감리교가 안방까지 들어갔음에 무척이나 기쁘다. 말씀을 받은 다른 여성들도 있다. 하나님 첫 열매를 축복하소서!”  

아펜젤러가 ‘안방’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복음이 한국의 가장 핵심 장소까지 들어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안방은 대문, 부엌, 사랑채를 거쳐 들어가는 곳이다. 한국 남자들의 복음 수용에 이어 여성들까지 전해진 것은 한 가정의 온전한 복음화가 이루어졌다는 뜻이다. 복음이 수용되고 정착된 곳에는 성찬예식이 이루어진다.

아펜젤러는 일주일이 지난 10월 23일 한국 교인들의 주일예배를 위해 성찬예식을 거행했다. 베델 예배당이 반석 위에 굳건히 세워진 교회가 되도록 성찬예식을 가졌다. 성찬에는 권서인 최씨를 비롯해 최씨의 아내와 장씨, 강씨, 한씨, 의사 스크랜튼이 참석했다. 최초의 한국인 감리교 예배와 여성 세례, 성찬예식에 이르기까지 아펜젤러의 첫 성찬예식은 생명의 떡을 백성에게 나누어 주는 감격으로 이어졌다.

 

 

아펜젤러가 1900년 서울 남대문 상동에서 촬영한 한국 여자 감리교인.

 


개신교 최초의 예배와 수요기도회 

아펜젤러는 남녀 구분 없이 누구에게나 복음을 전하는 선교를 지향했다. 하지만 한국의 문화는 남녀를 엄격히 구분하는 남녀칠세부동석(男女七歲不同席)이라는 풍습이 있었기 때문에 복음전도가 그리 쉽지만은 않았다. 예배를 드리는 모습에도 이러한 풍습은 여실히 드러났다. 현대 교회와는 다르게 한 장소를 사용하면서 남녀 자리를 구분해야 되는 모습은 베델 예배당도 예외가 아니었다. 

최씨 아내가 세례를 받은 후 한국 감리교회에 복음을 듣고자 하는 여성들이 점차 몰려들었다. 1887년 11월, 가옥을 매입하여 베델 예배당을 확장했다. 사방 8자가 되는 정사각형의 좁은 예배당이 8×16자가 되는 직사각형의 예배당이 되었다. 그리고 설교 강대상을 중심으로 남녀는 가운데 휘장이나 병풍을 사이에 두고 자리를 잡았다.  

보통 교회의 남녀 배치는 강대상에서 회중석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남동녀서(男東女西), 남좌여우(男左女右)라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잘못된 상식이다. 회중이 많이 있는 예배당 같은 경우에는 철저히 남녀가 구분되고 여자들의 모습이 보이면 안 되기 때문에 출입구에서 가장 멀리 떨어지고 깊숙이 위치한 장소가 여자들의 위치가 된다.  

실제로 남녀가 구분되었던 예배당의 도면, 사진을 살펴보면 남녀의 위치는 거의가 출입구의 동선의 길이에 따라 구분된다. 예배의 모습은 여성들이 교회로 몰려오면서 자연스럽게 남녀의 자리가 구분이 되었을 것이며 아펜젤러는 정 중앙에 있어야 되는 강대상을 남자의 위치로 이동하여 남녀를 철저히 구분하였을 것이다.

1887년 12월 4일 주일, 아펜젤러는 배재학당 학생 유치겸, 윤돈규에게 세례를 주었다. 학생을 중심으로 세례를 받은 이들은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들은 복음에 목말라 있었다. 아펜젤러는 학생을 중심으로 수요일 저녁 기도회를 시작했다. 이것은 개신교 최초의 수요예배가 됐는데 처음엔 배재학당 학생들과 세례 받은 학생들이 모여 시작했다.  

호기심에서 주일 예배에 출석하는 이들이 모인 회중예배와 달리 수요기도회에 모이는 이들은 더욱 진지했다. 이들은 모일수록 신앙을 갈구했다. 아펜젤러는 신앙에 목말라 하는 이들에게 하나라도 더 많이 주의 진리를 가르치기 원했다. 그는 일상에서 의사소통 문제를 잘 언급하지 않았지만 복음을 전하는 사역에 임할 때마다 한국어에 유창해지고 싶었다. 그의 일기엔 언어를 위해 기도했다는 대목이 많다.

성탄예배와 한국어 설교 

아펜젤러는 권서인 최씨의 도움으로 한국어 설교를 시작했다. 그해 12월 25일 성탄절이었다. 아펜젤러가 영어로 말하면 최씨가 한국말로 표현했다. 어떤 대목에서는 서툴러도 한국어로 직접 말했다. 그는 “나는 설교를 읽을 수밖에 없었지만 어느 정도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을 말할 수 있었다”고 일기에 기록했다. 성탄 설교 본문은 마태복음 1장 21절이었다. 예배는 세례와 찬송, 스크랜튼의 기도, 말씀 봉독(마태복음 2장, 누가복음 2장), 설교, 주기도문, 찬송(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 축도로 진행됐다. 사회는 길모어 선교사가 맡았다.

성탄예배는 성황리에 마쳤다. 아펜젤러는 한국어 설교를 했던 자신은 초라했지만, 주의 이름으로 설교했기에 하나님의 영광이 가리지 않도록 기도했다. 아펜젤러는 한국 선교 2년 반이 되면서 지나온 시간을 되돌아보았다. 그가 추구한 선교는 한국인처럼 되는 것이었다. “편안한 마음을 가지고 한국어로 설교할 수 있는 때는 행복한 날이 될 것”이라고 고백한 것처럼 그는 한국인의 진정한 친구가 되고 싶었다.
소요한 명지대 객원교수·교목

 

 

10. 아펜젤러의 연합정신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하나”

 

 

 

1898년 촬영한 초기 정동교회의 예배당 내부로, 정동교회는 베델예배당이 모태였다. 배재학당역사박물관 제공

 

 

기도하는 한국교회 

1888년 1월의 추운 겨울. 한국인들의 신앙 열정은 식지 않았다. 서울 정동의 베델예배당에는 배재학당 학생들이 모여들었고 학생들의 남편에 이어 아내들도 함께 세례 신청을 하면서 예배당에 모여드는 사람은 많아졌다. 어떤 날은 학생들의 부인 다섯 명이 세례 신청을 했다. 아펜젤러는 주께서 한국인들 가운데 역사하고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한국인들은 또 자발적으로 기도하는 기간을 제안했다. 한국인의 뜨거운 신앙과 열정으로 베델예배당에 출석하는 교인 수는 평균 14명이 넘었다. 스크랜턴 대부인(윌리엄 스크랜턴의 어머니)은 여성을 위한 저녁예배를 시작했는데 첫날에 21명이 참석해 선교사들의 사역에 하나님의 영광과 번창함이 깃들게 됐다.

이런 분위기를 몰아 아펜젤러는 장로교와 감리교 등 교단과 상관없이 연합으로 기도 모임을 주도하였고 ‘신실한 말’이라는 주제로 설교했다. 예배에 참여해 은혜를 받았던 사람들은 정부가 금교(禁敎)를 했던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종교의 자유가 있는 것처럼 행동했다.  


연합 정신과 선교지 분할 

선교가 정착되고 발전되는 시기에 아펜젤러는 언더우드와 함께 효율적인 선교를 위해 한국 지역에 장로교와 감리교 선교 지역 분할을 논의하였다. ‘한국의 장로교와 감리교’라는 아펜젤러의 연설문을 보면 그는 “주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하나이며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연합시킨다”고 주장했다. 즉 선교에 있어 교리와 같은 작은 문제로 장로교와 감리교가 서로 싸우지 말고 효율적으로 많은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차원에서 선교지를 분할하자고 한 것이다.  

아펜젤러의 연설문을 보면 알 수 있듯 선교지 분할은 갈등의 결과로 나왔던 것이 아니다. 오히려 연합의 목적을 가지고 분할이 되었다. 선교사들이 같은 지역에서 복음 사역의 불필요한 중복을 피하고 빠르고 신속하게 전파하기 위해 ‘공통된 이해와 기초를 가지고 서로 나란히 상호 협조를 통해 격려해주는 것’이 선교지 분할의 근본적인 목표였다. 아울러 공동 선교 지역에서는 함께 해야 선교 사역의 힘을 받을 수 있는 의료 사업, 교육 사업, 인쇄 사업 등을 추진함으로써 선교 사역의 효율을 높이고자 했다.

선교지 분할의 초기 논의의 윤곽을 살펴보면 공동 선교 지역과 분할 선교 지역을 나누었다. 공동 선교 지역은 항구도시를 포함한 경기도였다. 한 선교회는 함경도 강원도북부 충청도 전라도를 맡고 다른 선교회는 황해도 평안도 강원도남부 경상도를 맡기로 윤곽을 세우고 몇 개월 뒤에 다시 논의하기로 했다.

아펜젤러의 연합운동은 교리에 의해 서로 경쟁하고 싸우는 미국 본토의 북장로교, 북감리교에 연합이라는 의미를 다시 생각하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적도 아니고 경쟁자도 아니며 공통된 목적을 위해 함께 일하는 우리’라는 개념은 아펜젤러의 연합정신이 구현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후 선교지 분할이 본격적으로 논의될 때 그 토대를 마련해 주었다.  


한국 최초의 서양식 결혼 

1888년 3월 14일 아펜젤러는 한국 최초의 서양식 결혼식을 집례했다. 일제시대 잡지인 ‘별건곤(別乾坤, 1928. 2)’에서는 최초의 서양식 결혼은 1890년이라고 언급하지만 아펜젤러의 일기에는 이보다 2년 거슬러 올라간다. 일기에 따르면 결혼 당사자는 한용경으로 아펜젤러에게 두 번째로 세례 받은 인물이다.

 

한용경의 상대 배우자는 과부 박씨(박시실)였다. 당시 윌리엄 스크랜턴의 시병원(施病院)에서 일하던 한용경은 그의 부인이 불과 4개월 전 세상을 떠나자 기독교인 친구들의 소개로 25세인 과부 박씨와 혼인을 맺기로 하였다. 한용경은 박씨에게 마가복음서와 십계명을 보내 신앙을 소개했고 그녀도 마가복음과 십계명을 좋게 생각했다. 이에 한용경은 결혼 식순을 신부에게 보내 결혼식을 함께 준비하도록 했다. 

결혼식의 모습을 살펴보면 감리교 선교부 전원과 장로교 선교부 몇 사람, 친구들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되었다. 한국의 전통 혼례와 다르게 저녁에 시작되었고 신랑신부가 앞으로 걸어나오는 것을 비롯하여 아펜젤러가 주례를 인도하면서 기독교식으로 예식이 거행되었다. 결혼식이 끝난 후에는 케이크와 아이스크림, 차를 먹었다. 이 결혼식은 최초의 교회 결혼식일 뿐만 아니라 한국 현대 결혼식의 기원이 여기서 비롯되었다는 의의가 있다.

기독교식 결혼이 한국사회에 끼친 영향은 생각보다 큰 의의를 지닌다. 이를 알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조선 후기의 역사적 배경과 관습을 알아야 한다. 조선 후기에는 과부에 대한 사회 인식이 부정적이었다. 조선 후기에 접어들면서 과부는 수절(守節) 즉 정절을 지켜야 하는 사회적 인식이 팽배해 재가(再嫁)는 사실상 괄시를 받았다.

물론 이는 계층에 따라 달랐다. 양반 집안 과부는 대부분 수절을 선택했다. 그러나 양인 이하의 계층은 과부로 살아가는 경우가 많았지만 상당수가 재가하기도 했다. 하지만 재가를 하더라도 불리한 조건에서 결혼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재가한 여성에 대해서는 마을과 이웃에서 쉽게 받아주지 않았다.

과부 재가에 대한 편견은 1894년 6월에야 비로소 깨진다. 고종이 갑오경장을 통해 과부 재가를 언급하면서 악습은 공식적으로 폐지됐다. 그런데 한국의 개신교는 이보다 6년이나 먼저 과부 재가를 실천했고 신부인 과부 박씨에 대하여 차별이 아닌 남녀를 평등한 위치에 놓고 결혼식을 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아울러 결혼으로 인한 무리한 가계 지출을 지양하고 결혼의 좋은 모델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당시 사회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