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國敎會史

만우 송창근(宋昌根) 박사님


         

만우 송창근(宋昌根)

 


   만우 송창근 목사의 일대기를 연재합니다


   본지는 이번 11일부터 매주 토요일 <만우 송창근 바로보기>라는 제목의 송창근 목사의 일대기를 연재합니다. 이를 통해 그 동안 한국교회에서 과소평가 받아야 했던 송창근 목사의 신앙과 삶을 재조명하고자 합니다. 그는 한국기독교장로회를 창립한 장공 김재준 목사를 전도한 인물이자 신앙적 스승이었습니다. 또 당시 기라성 같은 목사들만 부임한다던 평양 산정현교회를 맡아 시무할 정도의 역량을 갖춘 목회자였습니다. 하지만 1950년 한국전쟁 때 공산당에 의해 납북되어 52세의 이른 나이에 순교를 당하고, 그가 가르쳤던 제자들이 얼마 남지 않아 송 목사의 업적이 제대로 연구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지난해 11월 말 송창근 평전 ‘벽도 밀면 문이 된다’(송우혜 저·생각나눔)가 출간됐습니다. 이 책은 그 동안 그늘에 가려져 빛을 보지 못한 송 목사의 존경 받을 만한 신앙과 삶, 업적들을 구체적인 자료들을 통해 집대성했습니다. 송창근 목사를 연구한 경건과신학연구소(소장 주재용 교수)와 저자 송우혜 집사로부터 저작권 사용 허락을 받고 이 책의 내용을 바탕으로 글을 연재합니다. 그에 앞서 송창근 목사가 누구인지 궁금해하실 독자들을 위해 고 강원용 목사의 회고록 <역사의 언덕에서>에 나오는 송 목사에 대한 이야기를 맛보기로 소개해 올립니다.


   송창근은 누구인가 · 고 강원용 목사


   지금도 나는 송창근 목사를 생각하면 몽양 여운형이 함께 떠오른다. 해방 이후 기독교계와 정치계 그리고 우리 현대사에 위대하다는 인물들을 거의 다 만나봤지만, 정치계에서는 여운형, 교계에서는 송창근 목사만큼 나를 아쉽게 만드는 인물이 없다. 한창 일하실 나이에 잡혀가고 암살 당한 두 분의 삶이 내게는 너무나 아쉽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기막힐 정도의 미남자라는 것도 있지만 두 사람 다 휴머니스트라는 점이다. 그들은 인간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가진 인도주의자였다. 또 자유분방한 사람이라는 점도 공통점으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어떤 틀 속에 매여 살 수 없는 사람이 송창근 목사이고 여운형이었다.


   송창근 목사는 강의하러 들어와서도 신학 얘기보다는 그저 사는 이야기를 구수하게 들려주었다. 강의가 끝나갈 무렵, 학생들이 선생님의 신학은 무슨 신학이냐고 물으면 흑판에 커다랗게 ‘잡종신학’ 이렇게 네 글자를 적어놓고 나갔다. 조직신학이니 무슨 신학이니 하는 어떤 틀 안에 갇히는 것을 거부했다.


   송창근 목사와 여운형은 이 외에도 공통점이 하나 더 있다. 해방 이후 60여 년이 지나는 오늘까지 우리 역사에서 정말 큰 별과 같이 나타난 두 분이지만 오늘 이 역사 속에서는 거의 잊혀져가고 있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지난 1997년 7월 19일은 여운형 선생이 떠난 지 50년째 되는 해였다. 그때 기념사업회의 위원장을 내가 맡아 선생의 산소 앞에서 50주기 추도식을 거행했는데, 그날 그 무덤가에는 노인들만 한 쉰 명 나와 있었다.


   1999년 10월 5일에는 송창근 목사 탄신 백주년을 맞아 만우 신학 기념 강연회가 있었다. 나는 그곳에 나가 강연을 했는데, 그 자리에도 많은 사람은 나와 있지 않았다.


   송창근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송창근 목사의 연보를 보면 2년 동안 ‘수양동지회’ 사건으로 감옥에 갔다 온 것이 기록되어 있는데, 사실 그는 안도산의 직계로 신간회 등 여러 사건으로 감옥에 갔다 온 전력이 있다. 언젠가 한 번은 나더러 이런 애기를 한 적도 있다.


   “야, 너 큰소리 치고 다니는 것은 좋은데, 절대로 감옥엔 붙잡혀 가지 말아라.”


   송창근 목사가 감옥에 가서 고생하던 얘기 중에 가장 잊을 수 없는 것이, 앞에서도 말한 남산 사건이다. 밤에 남산에 끌려가 온몸을 발가 벗긴 채 큰 소나무에 꽁꽁 묶여 아침까지 모기들에게 뜯긴 것이, 육체적으로 또 정신적으로 참 고통스러웠다는 얘기였다.


   그가 농담 삼아 하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


   “세상엔 무서운 사람이 셋이 있어. 밖에서는 형사, 교회에서는 장로, 집에서는 며느리야.”


   어쨌거나 나는 그의 고문 얘기를 듣고 일은 열심히 하되 어떻게든 감옥에 가는 것만은 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시 우리 교계에는 세 부류의 지도자가 있었다. 하나는 주기철 목사처럼 감옥에서 저항하다가 순교를 당한 사람이다. 그 다음은 진짜 친일을 하는 목사다. 그런 목사들은 신사참배를 하러 떠나면서 “우리 눈에 보이는 천황께 충성 못하는 사람들이 눈에 안 보이는 하나님께 어떻게 충성하겠느냐”고 말한 작자들이다.


   송창근 목사는 이런 두 유형에 속하지 않고 부득이하게 일제의 테두리 속에서 목숨은 이어가면서도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기 위해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낸 인물이다. 그런데 그가 해방 이후 친일을 했다는 말이 여기저기 번져 있어 그는 신경과민 증세를 보이기도 했다. 그가 했다고 하는 친일 내용을 자세히 알아보면 그것은 친일이라고 얘기할 수도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일제의 강요로 이곳 저곳에서 강연을 하도록 강요 받았는데, 송 목사는 정치 이야기는 일부러 안하고 신불출 저리 가라고 할 정도로 사람들이 배꼽 잡고 웃을 수 있는 이야기들만 했다. 일본에 협력하는 일을 그런 식으로 교묘하게 피해간 것이다.


   그런데 그게 나중에 친일 의혹을 사게 되어 처단할 사람의 명단에 올랐을 때 그는 큰 충격을 받았다. 다른 사람 같으면 대수롭지 않게 넘겼을 텐데 송창근 목사에게는 가슴에 못을 박는 아픔이 된 듯하다. 곁에서 보고 있는 내가 답답해서 “뭐, 그런 걸 가지고 그렇게 마음 상해 하십니까’라고 말하면 그는 그렇지 않다고 하면서도 계속 속상해했다. 일말이라도 거리끼는 일을 견뎌내지 못하는 분이었다.


   일제시대를 살아보지 않은 사람은 친일이나 항일을 너무나 쉽게 생각한다. 거물들이야 창씨개명을 거부할 수 있었겠지만 민초들이 무슨 수로 그런 것을 거부할 수 있었겠는가. 저항시인 윤동주가 창씨개명을 했다고 하면 요즘 사람들은 놀라겠지만, 그 시대는 생존이 걸린 문제였다. 완전히 세상을 등지고 깊이 숨어 살지 않는 바에야 주민등록증 갱신하듯 선택의 여지가 없는 문제였다. 아니 그보다 더했다. 전쟁 중 식량 배급도 받을 수 없었고, 심지어 기차표도 살 수 없었다.


   자신의 안일을 위해 일제에 자진하여 협력한 사람과 생존을 위해 마지못해 침묵으로 암흑을 견뎌낸 사람이 똑같이 친일 인사로 올라서는 안 될 일이다. 더구나 친일 경력을 감쪽같이 덮어두고 잘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데 말이다.


   현재 우리 민족의 가장 큰 과제는 남북의 평화와 통일을 기도하는 것이다. 송 목사는 말끝마다 “많은 날을 같은 조선놈끼리 북놈 남놈 붙어서 싸우니 무슨 짓이냐”고 호통을 쳐댔다. 그런 그이기에 함경도와 가장 사이가 좋지 않은 평안도에 가서 목회를 했고, 평안도에서 또 부산으로 내려온 것이다. 이런 지방 사역을 통해 지방색을 초월하고자 한 사람이 송창근 목사였다. 남이면 어떻고 북이면 어떤가 모두 조선사람인데, 하는 송창근 목사의 이 생각은 오늘날 한국 사회와 한국 교회가 귀담아 들어야 할 대목이다.


   21세기의 한국 교회가 지난 역사에서 뚜렷이 부각시켜야 할 인물이 있다면 바로 송창근 목사라고 나는 말하겠다.
 
   이동휘 선생과의 만남과 YMCA 활동


   광성중학교는 학교가 있는 곳의 지명을 따서 일명 ‘소영자중학교’라고도 불렸다. 당시 ‘독립군학교’로 불리면서 명동촌의 명동중학교 못지 않은 명성을 지니고 있었다.


   광성중학교에 간 송창근은 그의 전 생애에 매우 강력하고도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인물을 만났다. 성재 이동휘 선생이었다. 광성중학교를 세우고 운영하는 일에 이동휘가 적극 관여하고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이동휘와 송창근의 만남은 그 정서상에서 보았을 때 흡사 물과 물고기가 만난 것 같았을 것이다. 지닌 품성으로 보아, 두 사람은 서로 매우 비슷했다. 세상에 익히 전해진 대로 이동휘는 ‘감격의 인물’이었다. 연설에 매우 능했고, 하고자 하는 일에 자신을 던져 불사르는 열정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런데 송창근 역시 본질적으로 ‘감격의 인물’이었던 것이다.


   이동휘는 만나는 즉시 소년 송창근을 매우 아끼고 총애했다. 그를 따로 불러 사동처럼 심부름을 시키면서 가까이 데리고 다녔다고 한다. 송창근도 마음을 다해서 이동휘를 모셨고 깊이 따랐다. 그리하여 송창근은 어린 나이에 국가적 대인물의 훈도를 경험한 것이다.

  
   이동휘는 독립운동가이자 교육가로서 “속이는 자에게는 알고도 속이워야 한다. 만일 그 속임을 당하지 아니한다면 똑 같은 적은 사람이다”라는 소신으로 평생을 살았다. 그는 열정의 인물이었다. 웃을 곳에 웃지 않고 울 곳에 울지 않는 사람을 볼 때면 “냉혈의 동물이다. 목우와 등신다”라고 크게 나무랐다. 그는 대중 앞에서 연설할 때 피눈물을 휘뿌리고 목 놓아 통곡하는 때가 많았다.


   이동휘는 ‘기독교’에 희망을 걸고 살았다. “민족이 갱생하려면 사람이 먼저 변화해야 한다”는 절체절명의 명제 안에 그가 기독교에 걸었던 희망의 본질이 있었을 터였다. 기독교의 가르침을 따라서 사람들이 변화할 때 우리 민족이 나아갈 새로운 길이 열릴 것이라고 본 것이다. 그래서 어린 송창근에게 “너는 본국에 돌아가서 목사가 되라”고 명한 것이다.


   이동휘의 가르침은 송창근의 뼛속 깊이 아로새겨졌고, 그의 나머지 생애를 관통하는 지침이 되었다. 이동휘의 그 놀라운 재능과 뛰어난 능력, 충정을 가지고도 해결할 수 없었던 것, ‘사람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힘’을 지닌 기독교적 대변혁에 대한 열망이 송창근을 사로 잡았다. 그래서 그때부터 불과 5년 뒤에 송창근은 신학을 공부하여 목사가 될 길을 밟았다. 당시 3.1운동이 일어나서 상해엔 임시정부가 설립됐고, 이동휘가 상해 임시정부의 국무총리가 되었지만 송창근은 상해로 가지 않았다.


   그러나 이동휘의 삶과 연결된 마음의 끈은 오래도록 송창근의 마음 속에 생생하게 살아남아 있었다. 그는 뒷날 일본 동양대학에 유학했을 때 출신학교를 적는 난에 ‘광성중학교’라고 적어 넣었다.


   송창근은 북간도에서 집으로 돌아온 뒤, 한동안 부모님의 농사일을 거들었다. 신학을 공부하러 가려 해도 서울에 갈 돈이 없었다. 그는 길게 간 밭이랑을 따라가면서 두 알 세 알 콩을 심고 소를 먹이는 등 하릴없는 농사꾼의 나날을 보냈다. 그의 첫딸 한나가 1916년생인 것을 보아, 그가 고향에 돌아온 때는 적어도 1915년임을 알 수 있다.


   가출하여 외지에 나갔을 때 게속 미션스쿨을 다녔던 사람답게 그는 고향에 돌아온 뒤에도 교회생활을 열심히 했다. 그래서 19세의 어린 나이에 이미 그의 고향 교회에서의 신급이 ‘영수’였다. ‘영수’라면 장로와 집사 중간에 있는 직책으로서 그 당시의 교회 풍속에서 보자면 매우 높은 직책에 속했다. 그냥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역시 농사꾼으로서의 소박한 삶을 살아내기에는 꿈과 이상이 너무도 컸다. 그는 어느 날 홀로 된 셋째 숙모가 소를 사려고 모아 두었던 돈을 훔쳐서 서울로 달아났다. 그리하여 이동휘 선생이 “너는 본국에 돌아가서 목사가 되라”고 명했던 가르침을 지키는 첫걸음 떼었다. 실행 방식이 과히 은혜롭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나 서울에 가서 신학 공부를 하려는 데 차비가 없었으니 그런 비상수단을 쓴 것이다.


   당시 조선은 총독 사내정의의 무단통치 하에 있었다. 정치, 사회, 경제, 교육 모든 면에서 숨이 꽉 막힐 듯 억눌려 있었다. 그러나 유일하게 종교계 그것도 기독교계만은 숨이 나가는 곳이었다. 서양 선교사들과 그들의 모국인 서양 열강의 국력이 일종의 방패막이가 되어준 까닭이다. 그래서 많은 젊은 인재들이 기독교 안으로 뛰어들었다.


   송창근은 1916년에 서울에 온 뒤 피어선 성경학원에 다녔다. 피어선 성경학원은 1912년에 설립된 초교파적 성경학원이었다. 입학 당시 성경학원은 새 교사를 건축 중이었다. 송창근이 왜 피어선 성경학원에 들어갔는지는 알 수 없다. 배재학당이나 경신학교나 연희전문처럼 기독교 계통 학교들도 있었고, 신학교로는 협성신학교도 있었는데, 그는 피어선을 선택했다.


   송창근은 피어선 성경학원에서 공부하는 한편,중앙기독청년회(YMCA)에 가입하고 기독교청년회관(YMCA 회관)에 드나들면서 여러 지도자들의 가르침을 받아다. YMCA 회관은 종로에 우뚝 서 있던 3층의 커다란 붉은 벽돌 건물이었다.


   이때부터 1926년 일본 청산학원을 졸업할 때까지 만 ‘10년’이란 세월에 걸쳐서 YMCA는 송창근의 삶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을 가진 매우 소중한 신앙공동체이자 사회단체가 되었다. 그는 서울에서는 서울 YMCA에서 열심히 활약했고, 일본 유학 중에는 동경 YMCA에서 크게 활동했다. YMCA 활동을 위해서 자신을 던지고 헌신했다.


   송창근이 처음 YMCA에 갔을 때 민족의 지도자이자 YMCA의 지도자였던 이상재 선생이 그를 상대로 장난을 쳤던 일화가 있다. 이상재 선생은 마침 바나나 송이를 갖고 있었다. 그는 새로 온 젊은 친구 송창근에게 바나나 한 가닥을 떼어준 뒤, 보란 듯이 자신도 한 가닥을 떼어서 입에 넣고 껍질째 깨물어 먹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바나나를 난생 처음 본 송창근도 그를 따라서 바나나를 껍질째 깨물었다. 그러나 이상재 선생이 대뜸 손벽을 치고 웃으면서 “저, 촌놈. 바나나 먹는 것 좀 봐라!”라고 놀리더라고 한다. 아마도 유쾌한 웃음판이 한바탕 벌어졌을 것이다. 집 떠난 외로운 젊은이의 마음을 훈훈하게 녹이고 따뜻하게 다독여주는 것은 그처럼 죄 없이 밝은 한바탕의 웃음판이었다.


   당시 서울 YCA 회관이 집과 고향을 떠나서 서울에 새로운 둥지를 튼 젊은 송창근의 마음에 얼마나 위안이 되었을지 역력하게 알 수 있다. 국경지방의 젊은이가 홀로 서울에 올라와서 지낼 때 사방을 돌아봐야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백사지와 같은 고장에서 YMCA는 그에게 따뜻한 가정의 역할을 해주었다. YMCA에서 만나는 이들이 곧 그의 가족이요 보호자요 친구였다.


   송창근은 이상재 선생과 같은 대인물이 자리 잡고 있는 종로 YMCA 회관을 드나들면서 그의 직접적인 훈도를 받았다. 송창근이 후일 유머를 즐기고 사람들을 대할 때 매우 포용력이 큰 우의관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했던 것에는 이처럼 청소년 시절에 이상재 선생을 가까이에서 모시면서 직접 보고 들음을 통해 받은 감화가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서울 YMCA를 통해서 그와 같은 대인물을 가까이 대할 수 있었던 것은 젊은 시절의 송창근이 누렸던 커다란 인복 중의 하나였다.


   청년 김재준과 송창근의 역사적인 첫 만남


   송창근이 1919년 3월에 피어선 성격학원을 졸업했을 때, 마침 남대문교회의 조사(전도사)의 자리가 비어 있었다. 조사였던 함태영 씨가 3.1 만세 사건으로 수감됨으로써 그 자리가 빈 것이다. 그런데 송창근이 그 자리에 발탁되었다.


   이는 당시 기독교계에서 송창근에 대해 지니고 있었던 평가가 어떠했는지를 보여준다. 함태영은 연륜과 관록을 함께 지녔던 당대의 거물이었다. 대한제국 시기에 이미 검사와 판사를 역임했던 분으로서, 사회적 위상은 물론 종교적으로나 나이로도 까마득히 위인 대선배였다.


   그런데 그의 후임자로서 송창근이 선택되었다는 것은 피어선 성격학원 재학 3년 동안에 송창근이 기독교계에서 스스로 크게 두각을 나타내는 데 성공했음을 의미한다. 송창근은 남대문교회 조사가 됨으로써 생애 처음으로 자신의 직업을 갖게 되었다. 그는 열정을 갖고 조사로서의 업무를 수행해 나갔다.


   그러던 중 1919년 3월에 3.1운동이 일어났다. 이 운동으로 인해 일본의 대조선 정책이 크게 달라졌다. 무단정치를 일삼던 육군파의 사내정의 총독이 갈리고 그 후임으로 해군파의 재등실 총독이 1919년 9월 1일 부임했다.


   그러나 조선 민족은 재등실 총독이 편안하게 부임하도록 놔두지 않았다. 그가 일본에서 건너와서 부산에서 기차를 타고 상경하여 남대문 정거장에서 내린 뒤 폭탄 투척사건이 일어났다. 기차에서 내린 그가 마차에 올라서자 강우규 의사가 폭탄을 던전 것이다.


   재등실은 혁대에 탄피가 맞았을 뿐 무사했지만 다수의 사상자가 났다. 신임 총독의 부임길에 발생한 폭탄투척사건을 미리 방지하지 못해서 독이 오를 대로 오른 일제 경찰은 조선인 혐의자들을 마구잡이로 검거하여 사납게 신문했고, 거기에 송창근도 걸려들었다. 폭탄이 북쪽에서 왔을 것이라는 이유로 북쪽 인사들을 주로 잡아다가 취조했다고 하는데, 송창근도 북쪽 출신이라서 잡혔던 것 같다.


   당시 송창근은 남산 왜성대에 끌려가서 신문을 받았는데, 낮에는 취조하고, 밤이면 벌거벗겨 나무에 묶어 놓아 모기들이 밤새도록 피를 빨아먹게 하는 고문을 당했다고 한다. 그 때의 고초가 어찌나 컸던지, 뒷날 송창근은 두고두고 그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김재준의 회고에 의하면 “그 때 경시청은 남산, 지금의 외교구락부 언덕 위에 있었다. 만우는 유치장에 갇혔다. 샅샅이 조사한다. 밤에는 벌거벗겨 바깥 나무에 꽁꽁 묶어 놓는다. 남산 사는 모기란 모기는 모두 들러붙어 생피의 향연을 즐긴다. 꽁꽁 묶였으니 모기를 때릴 수도 없고 가려운 데를 긁을 수도 없었다. 밤 새고 낮에는 조사 받고 먹을 생각도 없어 죽고만 싶었노라 했다”는 것이다.


   9월 1일에 폭탄을 던졌던 강우규 의사는 9월 17일에 자수했다. 자신이 잡히지 않고 있음으로 해서 무고한 사람들이 붙잡혀서 갖가지 고문을 당하는 것을 전해 듣고 그냥 견디고 있을 수가 없어서 자수했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송창근도 풀려났는데, 불과 며칠 사이에 얼굴을 몰라볼 정도로 몹시 상했더라고 한다.


   그로부터 넉 달 뒤인 1920년 1월에 송창근은 다시 일경에 잡혀 들어갔다. 이번에는 무고한 혐의를 뒤집어 쓴 게 아니었다. 실제로 독립운동에 관련된 창가를 배포한 일 때문에 빚어진 사건이었다. 현재 국가기록원에 그 사건으로 경성지방법원에서 1920년 3월 19일에 선고된 판결문의 원본이 소장되어 있다.


   창가를 직접 지었던 박인석 및 그와 함께 그 창가를 6백 부 인쇄하여 각 학교 생도들에게 반포한 송창근에게 적용된 법률은 ‘정치범죄 처벌령’과 ‘출판법의 위반’이었다. 두 사람에게는 실형이 선고되었다. 박인석은 징역 2년, 송창근은 징역 6월이었다.


   6개월 뒤 그는 감옥에서 출감하여 고향에 근친하러 갔다. 그가 감옥에 있던 6개월 동안 근심걱정으로 마음을 태웠을 부모님을 안심시켜드리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이 때 귀향한 김에 그는 고향인 웅기는 물론 인근 도시인 회령 등지의 여러 교회를 돌면서 ‘강연회’를 열어 연설을 했다. 당시 강연회는 4백여 명의 청중들이 몰릴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다.


   당시 송창근의 나이 22세. 이 때부터 그는 타고난 재능으로 기독교계만이 아니라 일반 사회에도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감옥살이를 하고 고향에 근친하러 온 길에 고향 일대의 도시들에서 강연회 연사로 초창받고 그 일이 서울에서 발간되는 신문에 실리는 사람이 된 것이다. 그가 회령의 강연회에서 4백여 명의 청중을 상대로 강연할 때 “심원한 이상과 격절한 어조는 무한한 감상을 야기케 하였다”고 하니 매우 성공적인 강연회를 가진 것이다.

 

   

송창근 목사(왼쪽)와 김재준 목사(오른쪽)


   송창근이 김재준을 처음 만난 것이 바로 이 당시의 고향 방문 시기였다. 그 때 만났던 김재준의 회고담을 보면, 송창근은 매우 밝고 의연하고 당당했다. 아직 청청하게 젊은 나이라서 6개월의 감옥살이쯤은 아무런 상처가 되지 않았던 듯하다. 김재준의 회고담은 다음과 같다.


   내가 만우 송창근 형을 처음으로 만난 것은 1919년 12월 크리스마스 가까이였던 것 같다. 그 때 내 나이는 19세, 함경북도 웅기항에 있는 웅기 금융조합 서기로 근무하고 있었다. 기독교 신자도 아니었고 사상적으로 계발된 데가 없는 한 청과 같은 소년이었다. 그래도 3.1운동 직후라서 상해로부터 또는 만주, 시베리아를 거쳐 잠입하는 독립신문도 가끔 읽을 수 있었고 두만강 저편으로 건너가기 위해서 잠깐 들리는 독립지사들도 만나볼 수 있었다. 그래서 민족의식이 약간 싹트기 시작하였다.


   만우형은 나보다 두살 위였으나 교회인, 사회인으로서 이미 성숙한 청년이었다. 그는 그 다시 서울 남대문교회 조사(전도사)로 시무하면서 3.1운동에 가담했다는 것 때문에 6개월 징역을 치르고 출감한 후 근친도 할 겸 고향 교회들도 예방하려고 웅기에 온 것이었다. 그는 재치 있는 미남으로서 연설도 잘하고 좌담에도 능숙하고 교제 솜씨도 세련된 품위 있는 청년이었다. 나는 교회와는 관계가 없었기 때문에 그가 웅기 교회에서 연설을 했다고 들었지만 별 흥미도, 관심도 없이 넘겨보냈다. 그런데 하루는 그가 내 하숙집 방에 일부러 찾아와서 정중하고 첫 인사를 하고 “말씀 많이 들었기 때문에 인사라도 드리고 가려고 이렇게 실레스러운 방문을 했습니다”하고서는 곧 떠났다. 이튿날 나는 거리에서 그를 만났다. 그는 좀더 구면인 친밀감으로 나를 대했다. “지금 3.1운동 이 후에 우리 민족은 일어나고 있습니다. 천운은 갔다가도 반드시 돌아옵니다. 김선생 같은 유능한 젊은이가 그저 이런 데 묻혀 있을 때는 아닙니다. 용감하게 정리하고 서울 와서 공부를 다시 하십시오”하는 것이었다. 나는 가슴이 뭉클해지고 결단의 용기 같은 것을 느꼈다. 그래서 몇 달 후에는 직장이니 뭐니 다 치워 버리고 서울에 모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송창근과 김재준의 첫 만남이었다. 김재준과 처음으로 만나게 된 계기를 증언하는 위의 일화는 송창근이 지닌 바 인품을 잘 드러내고 있다.


   송창근은 천성적으로 ‘설계자’로서의 특성을 지닌 사람이었다. 큰 눈으로 현상을 보고 본능적으로 그에 대한 대비를 하는 사람이었다.실제로 그는 몇 년 뒤에 ‘자기건축(自己建築)’ 곧 “자기 자신을 어떻게 설계하여 운용할 것인가?”하는 문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글을 써서 세상에 발표했다.


   송창근이 지닌 그러한 특성은 나이나 경력과 상관없는 것이다. 천품에 속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 때 불과 만 22세의 나이였다. 보통 사람으로 치자면 자신의 미래를 생각하며 그에 대응하기에도 힘겨워할 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송창근은 달랐다. ‘인재발굴’에 대한 본능적인 감각과 실천력이 있었다. 송창근이 실천했던 인재발굴 작업은 “민족을 일으키려면 사람이 필요하다”는 절박함을 지니고 평생에 걸쳐 끊임없이 시도되었다. 이는 ‘인간 송창근’이 지닌 가장 중요한 특징이었다.

 

    송창근의 호 만우(晩雨) 또는 시온성(時蘊城)
   송창근은 23세 이전에 이미 자신의 호를 지어서 사용하기 시작했다.


  ‘만우(晩雨)’


   풀이하자면, ‘늦은 비’라고 표기되는 아주 운치 있는 호였다. 그는 1921년 5월에 발표한 자신의생애 첫 논설의 필자명을 ‘송만우(宋晩雨)’라고 표기할 만큼, 그는 자신의 호에 대해서 큰 자긍심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어찌하여 하필 ‘만우’라는 호를 지었을까?


   송창근의 일본 청산학원 시절의 친우인 조승제 목사의 회고에 의하면, 송창근에게서 직접 들은 이야기인데, 그가 말하기를 “자기 호의 뜻은 야고보서 5장 7절에 있는 ‘늦은 비’의 뜻으로 ‘만우’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로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야고보서 5장 7절)


   ‘만우’라는 아호는 글자에 담긴 뜻이 매우 아름답고 심원하다. 발음하기에 음운적으로도 깊고 부드럽다.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라는 성경 구절 중에서, ‘늦은 비’라는 상념이 그의 마음 속에 뛰어 들어와서 크게 자리 잡은 것이다. ‘이른 비’와 ‘늦은 비’ 중에서 특히 ‘늦은 비’가 더 그의 마음에 들었던 것에는 그가 지닌 문학적 감각도 작용했으리라.


   그의 일생을 보면, ‘만우’라는 그의 호가 어떤 깊은 상징성을 지니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그는 농부들이 귀한 열매를 맺게 해줄 것이라고 믿고 길이 참아 기다리는 ‘늦은 비’의 역할을 자신이 전 생애를 바쳐서 이루어 내었던 사람이 아닌가.


   송창근은 자신의 호를 스스로 짓기도 했지만, 다른 사람에게 지어주기도 잘했다. 조승제 목사는 자신의 호인 ‘춘우(春雨)’는 송창근의 권유에 의한 것이라고 술회했다. 김재준의 회고에 의하면, 송창근은 동경에 유학하고 있을 때 김재준에게 ‘장공(長空)’이라는 호를 지어 주었다고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만우도 동경 유학의 길을 걸었다. 동경서 채필근, 강봉우 등과 함께 고학하면서 동양대학 문화학과에 다닌 것으로 기억된다.


   나는 그때 서울에 있었다. 학자금이 없어서 정식 학생으로 등록은 못했어도 도서관 덕분에 책은 많이 읽었고 꿈도 드높았다. 만우와의 편지 왕래는 잦았다. 나는 내 창작이랄까 수상이랄까 어쨌든 내키는 대로 적은 글들을 소포로 만우에게 보내기도 했었고 만우로부터 장공(長空)이란 호를 그때 받았다.


   송창근이 지은 ‘장공’이란 호는 아시시의 걸식승 성 프란시스의 시 ‘태양의 노래’에서 따서 지은 것이라고 한다. 송창근은 1926년 8월 29일에 ‘태양의 노래’를 번역하여 <청년> 잡지 1926년 9월호에 게재했다. 시의 말미에는 “1926년 8월 29일 새벽에 종현 성당의 미사 종소리를 들으면서 ‘태양의 노래’를 초역하여 내 평생 높게 여기는 믿음의 형제에게 보내나이다”라는 말이 참가되어 있다. 그런데 그 시 안에 들어 있는,


   내 주께 찬송을 드릴지라
   우리 형제 바람과
   태양과 구름과 만리의 장공(長空)
   그리고 사계절을 지으시고
   주는 이 모든 것에게 영원한 생명을 베풀어 주십니다


   라는 구절 가운데서 ‘장공’을 따서 김재준의 호로 선사한 것이다.


   가깝게 지내던 선배인 채필근 목사의 호는 ‘편운(片雲)’으로서, ‘열왕기상 18장 44절’에서 딴 것이라고 한다. “일곱번째 이르러서는 저가 고하되 바다에서 사람의 손 만한 작은 구름이 일어나니이다 가로되 올라가 아합에게 고하기를 비에 막히지 아니 하도록 마차를 갖추고 내려가소서 하라 하니라”하는 44절에 이어지는 다음 구절인 45절에는 “조금 후에 구름과 바람이 일어나서 하늘이 캄캄하여지며 큰 비가 내리는지라”라는 구절이 따라 나온다. 시작은 ‘사람의 손 만한 작은 구름인’ 편운으로 작게 일어나서 이내 하늘을 뒤덮어 ‘하늘이 캄캄하여지며 큰 비가 내리는’ 과정이 채필근의 마음에 들었던 듯하다.


   ‘만우’라는 아호의 아름다움은 이미 유명한 것이다. 정대위 목사가 기독교계 선배들의 아호를 논한 글 속에 송창근의 아호 ‘만우’와 관련된 이야기가 다음과 같이 들어 있다.


   아무리 보아도 송창근 박사의 아호 만우(晩雨)는 하나의 풍경화를 연상케 하는 아름다운 것이라 생각된다. 그런데 그 동안 나는 왜 이러한 그의 아호를 늦은 단비로 혹은 한밤중에 몰래 오는 가느다란 초가을 비 정도로밖에 상상할 수 없었을까? 그것은 아마도 자애롭고 부드러우며 또한 자상하고 따스하여 거의 여성적이랄 수 있는 요소를 두루 갖춘 구의 품격을 나는 지금까지도 여실하게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아무튼 만우란 아호는 그의 동경 학우들에게 뿐 아니라 1926년 이후 그의 샌프란시스코, 프린스톤, 웨스톤 등의 신학교 동창들에게도 매우 애호를 받았다. 그의 프린스톤 시대의 동창인 최윤관 목사는 송 박사의 아호 만우가 너무도 아름다워 자기는 춘우(春雨)라 하였노라고 말씀하시던 것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송창근은 ‘만우’라는 호를 가진 외에 ‘시온성(時蘊城)’이라는 별호도 지어서 자주 사용했다. 그러나 ‘시온성’의 용도는 따로 있었다. 그것은 그가 문학 작품을 발표할 때만 썼다. ‘시온성’의 함의는 다층적이다. 하나는 예루살렘의 시온성을 사모하는 마음을 담은 것이고, 다음으로는 그 한자가 뜩하는 바, ‘시 시(時)’ ‘쌓을 온(蘊)’ ‘성 성(城)’ 문자 그대로 ‘시를 쌓아 놓은 성’이란 뜻으로 자신이 지닌 문학에 대한 열정과 집념을 담은 별호였던 것이다.


   송창근이 20대 때부터 활발하게 시작한 각종 장르의 집필활동에 따라 ‘만우’와 ‘시온성’은 여러 언론 매체의 지면에 등장하여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또한 뒷날의 이야기인데, 그는 미국 유학 중에 ‘프란시스’라는 이름을 쓰기도 했었다. 그것은 물론 아시시의 성 프란시스에서 딴 이름이었다.

 

 

   일본 동양대학 유학시절과 한국 순회 전도 강연


   김재준과의 만남에서 보았듯, ‘인재 발굴하여 키우기’는 송창근이 지난 특성 중 하나였다. 그런데 송창근이 그 못지않게 마음을 쏟아 노력한 것이 ‘자신을 키우기’였다. 남대문교회 전도사 노릇을 하던 송창근은 아직 2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서울에서 손꼽히는 큰 교회의 전도사가 된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일본 유학을 계획했다.


   일본으로 건너간 송창근은 의외로 ‘신학’을 전공으로 선택하지 않았다. 그는 동경에 있는 ‘동양대학 문화학과’에 입학했다. 아마도 ‘문화학’을 먼저 전공한 뒤에 그 바탕 위에서 다시 ‘신학’을 전공하려고 마음 먹었던 모양이다.


   동양대학은 1887년에 창설된 ‘사립 철학관’이 전신이다. 1903년에는 교명을 ‘사립철학관대학’으로 개칭했다가 1906년에 다시 ‘동양대학’으로 개칭했다. 동양대학에 문화학과가 생긴 것은 1921년이었다. 문화학과는 전문학부 소속이고 3년제로서, 일본의 대학과정으로서는 새로운 시도였다. 문화학과의 교육과정은 철학과 문학을 중심으로 삼고 창작시간도 있으며, 최신의 새로운 학문인 사서학과 신문학 과정도 설치되어 있었다.


   일본 동경의 동양대학 문화학과에 입학한 뒤, 송창근은 즉시 동경에 있는 조선 YMCA의 일본지부인 ‘재일본동경조선 YMCA’의 회원이 되어 활발하게 활동하기 시작했다. 서울에서의 Y활동이 그대로 연장된 것이다.


   ‘재일본동경조선 YMCA’의 공식 명칭은 ‘재일본동경조선기독교청년회’로서 서울에 있는 한국 YMCA의 지부로서 동경에 설립되었다. 1905년에 노일전쟁이 종전된 이후 급격하게 일본에 유학하는 한국 유학생이 늘어나서 동경에 있는 유학생의 수가 400여 명에 달하자, 서울에 있는 황성기독교청년회에서는 1906년 8월에 부총무 김정식을 동경으로 파송하여 동경조선기독교청년회를 조직하도록 조치했다.


   동경에 간 김정식은 대한제국 일본 주재 공사관에 머물면서 준비한 끝에 1906년 11월 5일에 신전구 미토대정에 있는 일본인의 ‘동경 YMCA’의 2층방 하나를 빌어서 ‘동경조선기독교청년회’를 발족시켰다. 초기 동경조선 YMCA의 중심 프로그램은 성서연구반의 운영이었다고 한다.


   1914년 9월에 재일본동경조선 YMCA는 신전구 서소천정 2정목 5번지에 130평의 부지를 마련하여 건평 74평의 2층 양옥 건물을 신축했다. 동경 YMCA는 자체 건물을 확보한 것을 계기로 동경 유학생들 활동의 구심점이 되어 더욱 빠르게 발전해 나갔다. 그 일에 대하여 <재일본한국기독청년회사>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2층은 13~14명의 학생을 수용할 수 있는 침실로 되어 있었고, 아래층은 사무실, 응접실, 식당 등으로 배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모든 프로그램들이 진행되었다. 큰 집회 때에는 아래층 전체가 강당의 역할을 했다.


   비록 작다고는 하지만 내 집을 마련하게 된 동경조선기독교청년회의 사기는 하늘을 찌르는 듯 높아갔다. YMCA의 모든 프로그램이 더 한층 활기를 띠었다. 동경교회의 예배와 전도 집회는 물론이고, 학우회의 각종 집회가 모두 여기에서 이루어졌다. 일본에 유학하는 한국인 학생들은 기독교 신자이건 아니건 간에 모두가 이 집을 내 집으로 알고 드나들었다. 그리하여 2.8독립선언이 모의된 곳도 바로 이 집이었던 것이다.


   1922년 4월에 일본에 간 송창근이 내 집처럼 드나들었던 곳이 바로 이 YMCA 건물이었다. 송창근은 서울에서 이미 활발하게 YMCA 활동을 했던 터라, 동경에 도착한 이래 동경조선 YMCA에서도 극히 중요한 인물로 떠올랐다.


   송창근은 그해 여름에 매우 중요한 임무를 맡았다. 7월부터 시작되는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동경 유학생들이 조직한 ‘모국 방문 순회 전도 강연대 4명’ 중 한 사람으로 발탁된 것이다. 1922년 봄에 일본에 건너가서 4월부터 6월까지 불과 석 달 동안 대학을 다닌 뒤, 모국 방문 강연대원으로 다시 모국 땅을 밟았다.


   당시 동경에 있던 수백 명에 달하는 많은 기독교인 유학생들 중에서 갓 일본에 온 그가 ‘모국 방문 순회 전도 강연대 4인’ 중 한 사람으로 선정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서울에서 발행되던 조선의 중앙 YMCA의 잡지 <청춘>의 필자로 활발하게 활약해온 그의 경력 및 대중 연설에 능하고 시국을 바라보는 균형 잡힌 예리한 안목이 있고 포용력이 큰 성품 등이 동경 유학생 사회에 크게 어필한 까닭으로 보인다. 낭중지추(囊中之錐), 곧 주머니에 든 송곳처럼 지난 바 품성과 능력이 뛰어난 인재답게 그는 언제 어느 장소에 놓이든지 간에 이내 두각을 크게 나타내는 사람이었음을 이때 매우 인상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모국 방문 순회 전도 강연’은 1922년 7월 5일 부산에 도착하여 9월 6일까지 2개월 동안 전국 40여 개 도시를 순회하는 대규모강연이었다. 강사는 백남훈, 송창근, 송의정이었다. 백남훈은 현직 동경조선 YMCA의 총무 간사였고, 문자 그대로의 유학생은 채필근, 송창근, 송의정 3사람이었다.


   이 때 강연대가 겉으로 내세운 명목은 ‘모국 방문 순회 전도 강연’이었지만, 숨은 목적은 따로 있었다. 1919년 이래 동경조선 YMCA에서는 좁은 회관을 새로 크게 증축하는 것이 관계자들의 매우 고시해온 현안이었는데, 이 강연은 그 사전 준비 작업이었던 것이다.


   강연은 1922년 7월 하순부터 8월 중순까지 이어졌으며, 동아일보에 그 내용이 나와 있다.


   청년회 전도대 강연

 

   재동경 기독교 청년회 종교부 주최의 전 조선 순회 전도단 일행은 본월 5일 오후 7시 당지 유지 제씨의 환영리에 백마역에 도착하야 동 8시 반부터 백마 예배당 내에서 전도 강연회를 이준화 목사의 사회로 개(開)하얐는대 채필근 씨는 진정한 종교의 본질이라는 제(題)로 송창근 씨는 억(億)! 무정(無情)이라는 제(題)로 장시간의 열변을 토하야 5백여 명의 청중에게 다대한 감각을 여(與)하고 동 11시에 폐회하얐는대 일행 중 백남훈 씨는 의외 병기(病氣)로 인하야 예정과 여(如)히 강연치 못하얏슴으로 당지 인사는 유감을 마지 아니하더라.


   송창근은 강연회 내내 간 곳마다 서로 다른 주제를 가지고 강연했다. 보도된 제목을 보면 ‘기독(基督)의 도(道)’(개성), 이적(異蹟)을 구(求)하는 자와 지혜(智慧)를 심(尋)하는 자’(진남포), 억(憶)! 무정(無情)’(백마), ‘십자가의 도’(선천) 등이었다. (아마도 선천에서 행한 강연 제목은 ‘십자가의 도’이었을 터였을 것인데 ‘가’자가 빠진 듯하다.) 제목들을 일별해 보아도, 그가 각지의 사정과 청중에 맞추어서 적합한 메시지를 전하려고 애쓴 충정을 여실하게 느낄 수 있다.


   순회 전도 여행이 마무리된 뒤에 송창근은 다시 동경으로 갔다. 그처럼 대원들이 애를 쓴 결과 표면적으로 거둔 성과는 컸다. 그러나 조선총독부의 훼방으로 이때의 순회 전도 강연은 이면의 숨은 실제적 목적을 달할 수 없었다. 백남훈 씨의 자서전을 보면, 조선총독부에 신청해 두었던 ‘회관 건축을 위한 기부금 모집 허가원’에 대한 불허 통지가 그들이 동경으로 돌아간 뒤인 192년 9월 20일 경에 사무실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재일본 동경 유학생 순회 전도 여행의 근본 목적은 ‘회관 건축을 위한 기부금 모집’이었고, 그 사전 작업으로서 조선 전국 각지를 돌면서 ‘동경 Y’를 선전하고 그 중요성을 알리는 강연회를 진행했다. 그런데 끝내 조선총독부의 기부금 모집 불허 통지로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 것이다.


   백남훈 시는 그로 인한 정신적 심리적 타격이 너무 커서 완전히 의욕상실에 빠졌다. 그래서 그로부터 몇 달 뒤인 1923년 1월에는 재일본 동경 YMCA의 총무간사 직을 사임하고 물러났고, 끝내 15년간에 걸쳤던 일본생활을 모두 청산하고 영구 귀국했다고 한다.

 

 

    아! 샌프란시스코


   1922년 여름방학의 전국 순회 대강연 여행을 마친 뒤, 송창근은 동경으로 귀환하여 동양대학 문화학과에 계속 다녔다. 그러다가 1924년 봄 학기에 신호(神戶:고베) 신학교에 편입하여 본격적으로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이후 1924년 가을 학기에 청산학원 신학부 전문부(3년제)의 2학년으로 편입했다. 청산학원의 신학부에는 본과와 전문부가 있었는데, 본과는 4년제이고 전문부는 3년제였다. 이때 그가 전문부 2학년으로 편입한 것은, 동양대학 문화학과와 신호신학교에서 공부한 학력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1926년 3월 하순에 청산학원 신학부를 졸업한 송창근은 우선 조선으로 건너왔다. 그리고 미국 유학 준비를 서둘렀다.


   유학 대상 학교는 프린스톤 신학교. 부지런히 수속하여 입학 허가서와 장학금을 확보하고 여권을 내고 여비를 만들어서 9월 학기가 시작되는 것에 맞추어서 떠나야 했다. 이때 그는 선교사들의 연줄이나 후원에 전혀 의지하지 않았다. 일본 유학을 독자적으로 해낸 것처럼 미국 유학 역시 독자적으로 해내려고 한 것이다.


   그가 미국에 갈 여비를 구할 때, 이용도 목사가 집을 팔아서 여비를 대었다고 하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그 뿐 아니라 이용도 목사는 송창근이 입고 있는 양복이 너무 허술한 것을 보고 자신의 양복을 내주어 고쳐서 입고 떠나게 했다.


   당시 미국에 가려면, 일본 동경 인근의 항구인 횡빈(橫濱:요코하마) 항구에서 배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야 했다. 드디어 미국행 출발 준비가 모두 끝나서 그가 다시 일본으로 건너간 때는 1926년 8월 말이었다. 이때 태평양을 건너던 일을 회상한 송창근의 회고담이 다음 해인 1927년 2월에 발행된 잡지 <청춘> 제7월 제1호에 실렸다. 제목은 ‘태평양 바다 위’였고, 편지글 형식으로 쓰였다.


   R형-


   본국을 떠난 지는 벌써 두 달이 거의 됩니다. 떠난다 떠난다 하면서도 얼른 떠나지지 않는 걸음을 8월 30일에사 서울에서 동경으로 옮겼습니다. 초가을 선선한 바람이 거리에 왕래합니다.


   9월 20일에 횡빈에서 배를 타고 지금은 태평양 바다에 떠 있습니다. 동무 없는 걸음이니 퍽 적적합니다. 바다가 예상 밖에 잔잔해서 다른 사람들은 퍽들 좋아합니다.


   횡빈을 떠날 때에 동경에서 내려온 동무들이 선실에 들어와 보고서는 말은 안 해도 퍽들 걱정하는 것 같았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마시라”고 위로했습니다. “조선사람에게 삼등도 과분하오. 아무 데를 가더라도 고난과 구차한 것으로는 제일이라는 조선사람의식만 잊지 않으면 삼등은 고사하고 사등이 있다면 그걸 타고 갈거요!”라고 했습니다.


   떠난 저로서는 그러다가 바다에 물결에 사나와서 배가 곤두박질하면 어쩌나 하고 은근히 걱정도 했습니다. 그러나 바다는 참말 잔잔합니다. 나는 바다와 나는 아무 인연도 없는 줄 알았었는데 이번 길에서는 바다에 대한 애착심이 많이 생겼습니다.


   그렇기에 서글픈 노래나마 날마다 일기책에 적으면서 옵니다.


   바다


   오늘도 선실에서
   갑판 위로 나오니
   때는 점심 훨씬 지난 오후 세 시입니다.


   하도 잔잔한 대양을 바라보노라면
   바라보는 젊은 나그네 마음은
   어머니 곁에서 앓는 어린애 같습니다.
   바다여! 하고
   나는 부릅니다.
   “바다여 그대는
   어머니 같으다”고.


   송창근이 태평양을 건너 캘리포니아 주의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날은 1926년 10월 11일이었다. 드디어 미국 땅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다. 당시 그는 윤치호가 쓴 <무선생영어자통無先生英語自通>이라는 영어회화 자습서를 챙겨 갖고 미국에 갔다고 한다.


   당시 그가 미국에 도착한 때의 상황과 전말을 소상하게 밝혀주는 귀한 자료가 있다. 1928년에 <기독신문> 지면에 4회에 걸쳐서 연재되었던 그가 쓴 “푸린스톤 만필(漫筆)”이라는 제목의 기사이다.


"하도 오랜간만에 붓을 잡사오니 무슨 말씀부터 먼저 올려야 하오리까. 그 중에도 내 몸이 하늘 한 끝에 나도는 외로운 나그네 신세라는 것을 먼저 생각하온즉 그저 마음이 아득아득할 따름입니다.


   본국을 떠난 때는 재작년 8월 중순 가을바람이 우리 서울 거리에 나돌고 하늘의 별빛이 고요히 땅 위에 내리는 그 어느 날 밤이었습니다. 실상 떠나기 힘드는 결음을 떠나 동경 와서 얼마 있다가 9월에 횡빈을 떠나 태평양을 건넜습니다. 산프랜시스코에 이르던 대는 10월 열하루날 비오던 새벽이었습니다.


   산프랜시스코에 들어서자마자 배에서 우리 회관에 전화를 걸었더니 그 날이 마침 주일날이었음으로 아무도 없는 까닭에 누구 하나 나를 만나러 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정향이 없이 내려 하루 종일을 두고 우리나라 사람 찾던 그때 이야기는 쓸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 날은 어떤 호텔에서 자고 그 다음 날에 우리나라 분들을 만났습니다. 처음 뵈온 이가 상항(桑港)에 오래 계신 황사선(黃思宣) 목사였습니다. 그때 우리는 처음 만나서 울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나라 어른을 뵈오니 하늘에서 내려온 이 만난 것보다 더 반갑습디다요."


   이때 그가 받은 스트레스가 무척 엄청난 것이었던가 보았다. 그가 말한 ‘우리 회관’이라 하면 아마도 ‘한인 회관’이거나 ‘YMCA 회관’이었으리라. 그는 미국에 도착한 날 “비 오던 새벽에” 배에서 “정향이 없이 내려 하루 종일을 두고 우리나라 사람을 찾다”가 못하고 어떤 호텔에서 잤다고 한다. 그런데, 그때로부터 2년이나 지난 때에 그 일에 관해 글을 쓰면서도 한 마디로 “그때 이야기는 쓸 길이 없습니다”라는 것이다. 본성이 섬세하면서도 격정적인 데가 있는 사람이라서 그 특별했던 일요일의 일들 하나하나가 온 존재를 뒤흔들 만큼 격동적으로 마음에 사무쳤던 모양이다.

 

       송창근 목사가 프린스톤 신학교로 가기 전 1년간 공부했던 샌 안셀모의 샌프란시스코 신학교.


   샌프란시스코는 미국 서부 캘리포니아 주의 해안에 있는 첫 기착지로서, 그가 프린스톤으로 가기 위해서 스쳐 지나가야 했던 미국의 대도시들 중 하나였다. 송창근은 미국 유학 수속을 할 때 이미 프린스톤의 입학 허가서와 장학금을 받아서 그걸 갖고 미국 유학 수속을 한 터였기 때문이다. 프린스톤은 미국 동부의 뉴저지 주에 있는 학교였다. 그래서 거기로 가려면 샌프란시스코에서 급행열차를 타고 대륙을 횡단해야 했다.


   그런데 송창근은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해서 그 곳에서 만난 한인 교역자들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눠 본 뒤에 진로를 수정했다.


   우선 제일 먼저 꺼려지는 것이 ‘영어 실력’이었다. 프린스톤은 일류 대학이라서 영어가 되지 않으면 따라갈 수가 없다는 점이 마음에 크게 걸렸던 것이다. 그래서 프린스톤으로 곧장 가지 않고 샌프란시스코 교외지대인 샌 앤셀모에 있는 샌프란시스코 신학교로 가서 우선 1년 동안 공부한다는 것으로 계획을 바꾸었다.


   송창근은 샌 안셀모에서 보낸 샌프란시스코 신학교의 1년 생활을 두고 “금을 주고도 바꾸기 어려운 생활”이라고 말한 바 있지만, 일단 샌프란시스코라는 도시 자체가 그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고 정서에 잘 맞는 곳이었다. 그가 늘 사모하고 흠모하는 아시시의 성자 성 프란시스를 기려서 그 이름을 딴 도시였기 때문이다. 그는 미국에서 사는 동안 성 프란시스의 이름을 따서 ‘프란시스 송’이라는 이름을 쓰기도 했을 정도로 성 프란시스를 좋아하고 흠모했다.


   송창근은 샌프란시스코에 머문 채로 서둘러서 프린스톤 신학교에 편지를 보내어 “샌프란시스코 신학교에서 1년 동안 공부할 수 있도록 양해해 줄 것”을 프린스톤 신학교 당국에 교섭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프린스톤 신학교 측의 허락을 얻어서 샌프란시스코 신학교에 우선 1년간 재학하는 것으로 처리되었다.


   송창근은 자기 앞에 놓여지는 삶에 마음을 활짝 열고 전심전력으로 부딪쳐가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에게는 기쁨도 슬픔도 고통도 늘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 그런 사람에게 낯선 외국 땅에다 뿌리를 내리는 것은 마음 가득한 외로움과 슬픔을 참는 일과 동의어였다.


   기독교인이라면, ‘그가 자신의 삶을 어떻게 느끼고 받아들이면서 살아갔는가’하는 것을 총체적으로 알게 하는 코드가 있다. 그것은 곧 ‘그가 어떤 찬송가를 가장 좋아하는가’이다. 가장 좋아하는 찬송가로서 그가 살아간 평생의 삶의 빛깔이 구분되는 것이다. 그런데 송창근이 가장 좋아한 찬송가는 429장이었다.


   열두 살 어린 나이 때부터 객지에 나가서 떠돌면서 살았던 송창근이 느꼈던 외로움과 슬픔이 얼마나 절절한 것이었는가. 또한 말도 통하지 않는 외국 땅에서 언어를 익히고 자리를 잡아가면서 송창근이 느꼈던 소외감과 고달픔이 얼마나 절절했던 것인가. 그리고 그런 고통 속에서 그가 주 예수를 얼마나 간절하게 붙잡고 살았던가.


   이 찬송가는 그런 것들을 한꺼번에 느끼게 한다. 널리 잘 알려진 그의 밝고 활달하고 툭 트인 성품의 뒤 안에 웅크리고 있는 슬프고 외로운 영혼의 존재를 눈 시리도록 선명하게 알려주는 찬송가라 하겠다.
 


   프린스톤 신학교로 전입


   1927년 9월, 송창근은 11개월 간의 캘리포니아 주의 샌프란시스코 생활을 마감했다. 그가 “금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생활”을 한 그 곳을 떠나서 뉴저지 주의 프린스톤으로 간 것은 ‘1927년 9월 하순’이었다.


   그는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미주 대륙을 횡단하여 프린스톤으로 향했다. 프린스톤 신학교와 정식 명칭은 ‘Printon Theological Seminary’로서 1812년에 창설된 장로교 신학교였다. 처음 신학교가 개교되었을 때 교수는 아처빌드 알렉산더 한 사람이었고, 학생 수는 12명이 채 되지 않았다고 한다.

 
   송창근 목사가 1927년 9월 27일에 입학한 프린스턴 신학교의 등록부.


   그러나 곧 ‘프린스톤 신학교의 창설은 미국의 신학교 교육의 역사를 새로 쓰게 만든 것과 같은 의미와 비중을 지닌 일이 되었다’고 이야기되듯 빠르게 발전하면서, 칼빈과 존 녹스에서 비롯된 개혁교회에 신학적 전통의 뿌리를 두고 있는 장로교 신학교로서 명성을 크게 떨치게 되었다. 그리하여 개교 이래 1백여 년이 지나 송창근이 입학한 1927년에는 캠퍼스 곳곳에 백 년 이상 된 거대한 나무들이 우뚝우뚝 서 있고, 알렉산더 홀을 비롯한 거대한 건물들이 즐비한 대단한 캠퍼스가 되어 있었다.


   프린스톤 신학교 재학 시절 송창근은 한국의 기독신문에 4회에 걸쳐 프린스톤 생활기를 담은 기사를 연재했다. 당시 프린스톤에는 5명의 한국 학생들(송창근, 한경직, 윤하영, 이규용, 최윤관)이 있었다. 그 중 한경직과 관련된 내용이 실린 기사를 소개한다.


   인제 필자 자신의 이야기를 한 마디 사뢰겠습니다. 이 글이 편지인 것 만치 쓸데없는 이야기 잔소리가 많이 섞이는 것 같습니다. 저도 인제 미국 땅에 발을 부친 지는 만 2개년이 오는 10월입니다. 한데 아직까지 영어난리(英語難離)에 죽어 삽니다. 우리 다섯 가운데는 제가 제일 영어를 못합지요. 나머지 분네는 다들 한 가락씩 듭니다. 해도 잘해요. 최윤관 씨 한경직 씨 같은 이는 백인들도 칭찬이 자자하게 잘합니다. 그 중에도 최 형은 사담(私談)이 능하고 한 형은 강도(講道) 말씀이 능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저는 꿔 온 보리자루 셈입니다. 그러길래 제 스스로가 ‘나는 떡 먹는 부처님이라’고 말합니다. 말은 잘못해도 하루 세끼 먹는 데야 남 못지 않습니다. 말 없이 양떡에 뻐터기름을 발라 먹기만 하니 그 소위 떡 먹는 부처님이란 말씀입니다. 그리고 나는 미국이 별나라는 별나라이라요 하고 어떤 친구에게 말했더니 웨요? 하고 반문하길래 아니 벙어리 웅변법 연구하는 데야 미국밖에 어디 또 있겠소 한즉 또다시 그 무슨 뜻이냐고 묻기에 그때에 나는 내 자신이 증명한다고 대답했습니다. 처음 오던 해에 수인사말도 못하는 사람을 강도학(講道學) 시간이면 교사가 강단에 올려 세우고 한 15분씩 죽을 지경을 구니 참 기가 막힙디다.


   인제는 만지막으로 한경직 형을 소개하렵니다. 한 형은 정주 오산과 평양 숭실전문학교를 마친 뒤에 ‘엠포리아’ 와서 다시 대학을 마치고 ‘푸린스톤’에 온 지 햇수로 3년입니다. 부인에게서 종종 편지가 오는데 이야기를 듣노라면 ‘언제나 오시겠는지 그때를 꼭 말씀해달라’는 부탁이 있은 지 벌써 오래다고 합니다. 아직도 3년을 더 있어야 귀국할 심산인 것 같으니 구름물 만리를 사이에 두고 가고 싶어하는 마음 기다리는 정이 어떠하오리꺄. 내 남이 피차에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한 형은 일언( 一言)의 보배덩어리올시다. 미국 온지 몇 해 안되는데 영어는 물론, 이 학교는 끄릭 공부가 특별히 어려워서 작년에 백인 학생도 왔다가 감당을 못하고 다른 학교로 간 사람이 드문드문 있는데 온 학교에서 첫째를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금년에 히부루를 시작해서 얼마 하다가 그 중의 잘하는 사람 얼마를 뽑아 특별반을 조직하는데 한 형이 응시한 결과에 제일 우수한 성적으로 급제를 해놓고 보니 학생 선생 모두가 칭찬에 우리 조선(사람) 모두가 어깨가 읏슥읏슥했댓습니다. 그 날은 백인 학들 중에 어떤 사람은 조선 만세! 만세! 하고 외치면서 길에 다니는 사람이 다 있었고 우리와 백인 학생 몇 사람은 과자와 아이스크림을 사다 놓고 감사와 치하(致賀)의 기도회까지 다 했습니다. 훌륭하지 않습니까.


   형은 끝까지 신학을 연구할 목적이라고 합니다. 그리고는 절실히 조선사람은 어디를 가든지 조선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주장합니다. 그러길래 그는 본국 있을 때나 미국 와서나 그 한 모양입니다. 우리 조선교회의 앞을 위하여 끔즉이도 즐거운 일입니다. 그런데 한 형은 늘 몸이 약해서 고생 중에 있습니다. 친애하는 벗네는 전에 못 뵈웠더라도 그를 위하여 특별히 생각을 하시고 때를 얻으시는 대로 기도로 도와 줍시사고 신실한 부탁을 전해드립니다. 진실로 우리는 한 마음으로 아끼고 사랑하여야 할 친구의 하나입니다.


   1927년 가을에 프린스톤에서 만나 친구가 된 송창근과 한경직은 서로의 사람됨을 깊이 알아보았고 서로 존경하고 좋아했으며 나머지 평생을 두고 매우 깊고 돈독한 우정을 유지했다. 당시 송창근이 얼마나 한경직의 마음에 들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한경직은 프린스톤 신학교를 졸업한 해에 폐결핵 판정을 받고 요양원에 가서 1년 반 동안 요양하고 있을 때, 자신의 방에 가족사진과 함께 송창근의 사진을 놓아두었다고 한다.

 
   미국 유학시절 송창근(왼쪽)과 김재준(오른쪽).


   송창근은 1928년 가을 학기와 1928년 봄 학기를 프린스톤에서 마쳤다. 프린스톤에서 만 1년 동안 공부한 것이다. 그리고 1928년 여름 방학 동안에 한경직과 함께 뉴욕에 가서 일자리를 구해서 아르바이트로 돈을 벌었다.


   1928년 가을 학기가 되자, 송창근은 펜실베니아 주의 피츠버그에 있는 웨스턴 신학교로 전학해 갔다. 프린스톤에서는 2백불 장학금을 받았는데, 웨스턴에서는 3백불 장학금을 받기로 하는 등 조건이 더 나았기 때문이다.


   송창근은 프린스톤에 있을 때, 공부만 한 게 아니었다. 김재준이 미국에 유학할 수 있도록 프린스톤 신학교 당국에 교섭하여 허락을 받는 데 성공했다. 김재준은 1928년 3월에 청산학원을 졸업할 예정이었다. 그래서 그를 위해서 미리 프린스톤 신학교의 ‘입학 허가서’와 200불의 ‘장학금 허락서’를 받아서 동경에 있는 김재준에게 보냈다.


   송창근은 자신을 위해서나 타인을 위해서 무언가를 주선하고 마련하는 데 매우 유능하고 노련했다. 그래서 누군가를 설득하는 데 매우 뛰어난 수완을 보였다. 그가 프린스톤 신학교에서 김재준을 위해서 입학 허가서와 장학금 허락서를 받아낼 때 무슨 말로 프린스톤 당국자들을 설득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처럼 공부 잘하는 한경직도 ‘150불’의 장학금을 받는 데 불과한데, 얼굴도 본 적 없고 게대가 현재 일본에 있는 김재준에게 ‘200불’ 장학금을 주도록 프린스톤 신학교 당국자들을 설득해낸 것은 확실히 ‘특별한 수완’에 속했다.


   송창근은 1927년부터 1년 동안 프린스톤 신학교에서 신학을 배운 뒤, 1928년 9월 초 그곳을 떠나 펜실베니아 주 피츠버그에 있는 웨스턴 신학교로 전학해 갔다.
 
 

   만우 송창근 6년만의 귀국


   송창근이 뉴저지 주의 프린스톤 신학교에서 펜실베니아 주 피츠버그에 있는 웨스턴 신학교로 전학해 간 것은 1928년 9월 초였다. 1928년 가을 학기부터 피츠버그에서의 삶이 시작되었다.


   피츠버그 시는 역사가 오랜 도시였다. 시의 이름은 식민지 시대에 영국 수상이었던 윌리엄 피트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고 한다. 윌리엄 피트의 고급 부관인 존 포베스 준장이 미국으로 건너와서 프랑스 소유였던 두케즈네를 점령한 뒤, 상관인 윌리엄 피트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그의 이름을 따서 지역 이름을 피츠버그라고 지었다.


   웨스턴 신학교의 정식 명칭은 ‘Western Theological Seminary’로서, 1787년에 조셉 스미스 교수에 의해서 처음 문을 연 장로교 신학교였다. 그로부터 세월이 흘러 1929년 가을에는 “기숙사도 좋고, 교수들 신학사상도 학문과 경건을 겸했고, 특히 구약 부분이 강하다”는 평을 듣는 신학교가 되었다.


   송창근은 웨스턴 신학교로 옮겨간 지 1년 만인 1929년 가을 학기에 김재준도 웨스턴 신학교로 오도록 주선했다. 그를 위한 3백 불 장학금을 확보해 놓고 부른 것이다. 김재준으로서는 1928년 가을 학기에 미국에 도착하여 프린스톤 신학교에서 공부하기 시작하여 1년이 된 때였다.


   그렇게 되어 김재준은 1929년 가을 학기부터는 피츠버그의 웨스턴 신학교에서 송창근과 함께 생활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호사다마라고 새 학기가 시작될 무렵에 사단이 하나 일어났다. 김재준이 돈을 잃어버린 것이다.


   김재준은 프린스톤에서 피츠버그로 가기 직전이었던 1929년 여름방학에 미국에 와서 처음으로 아르바이트를 해서 돈을 벌었다. 뉴욕 롱아일랜드 피서지에 있는 주택식 고급식당에서 키친 보이로 일해서 삼백불을 번 것이다. 그는 그 돈을 갖고 피츠버그로 온 것인데, 그것을 몽땅 잃었다.


   이 일로 인해 송창근과 김재준의 사이는 크게 멀어졌고, 이후 송창근은 김재준을 배려하고 이끌어주던 일을 일체 중단한 듯하다. 김재준의 회고록 <범용기>와 <만우 송창근>에 이 사건이 기록돼 있는데, 조금 다르게 기록된 부분들이 있다.


   김재준의 회고록 <범용기>에는, 돈을 잃어버린 후 침대방에서 “만우가 들어와 ‘어디 아프냐?’기에 이야기했더니 입맛이 쓴지 ‘에잇!’하고 나갔다”고 되어 있다. 그런 반면, <만우 송창근>에는 ‘송 청년은 격분하여 ‘야! 분간 못해!’하고 고함을 치더니 보기 좋게 따귀를 때리더라는 것이다. 그리고는 K씨를 붙잡고 엉엉 울었다는 것이다. 내일이 개학날인데 기가 막혔을 것이다. 한참만에 ‘도리 없지’하면서 자기가 준비한 학비를 내주면서 ‘취직이라도 내가 쉽지’하더라는 것이다”라고 기록돼 있다. 그러나 정확한 실상이 어떤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문제의 ‘삼백 불 분실 사건’에 주목하게 되는 이유는, 그 사건 때문에 송창근과 김재준 사이의 우정에 큰 금이 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송창근 목사가 박사학위를 받은 콜로라도 주 덴버의 아일리프 신학교.


   송창근은 다음 해인 1930년 5월에 웨스턴 신학교를 졸업하면서 신학석사 학위를 받은 뒤, 콜로라도 주 덴버의 아일리프 신학교로 옮겨가서 박사과정을 밟기 시작했다. 그는 1931년 6월에 박사학위를 받아 졸업했고, 귀국하는 길에 LA에서 몇 달 머물렀다가 조선으로 돌아갔다.


   그러면서 송창근은 김재준이 계속해서 박사학위 과정을 밟을 수 있도록 주선해 주지 않았다. 그래서 김재준은 웨스턴 신학교에서 1932년 5월에 석사학위를 받은 뒤에 그대로 귀국길에 올랐다.


   당시 한경직은 1929년 5월에 신학석사학위를 받아 프린스턴 신학교를 졸업했다. 프린스톤 신학교에는 박사과정이 없었기 때문에 예일대학에 가서 교회사를 전공하면서 박사과정을 밟으려고 계획하고 여름방학 동안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런데 계속 감기 기운이 심하면서 약을 먹어도 감기가 도무지 떨어지지 않았다. 병원 검진 결과 ‘폐결핵 3기’였다. 도리 없이 박사과정을 포기하고 요양원에 들어갔다. 1929년 여름부터 1930년 연말까지 입원 치료하여 폐결핵 자체는 겨우 완치 됐다.


   1931년 6월 송창근은 아일리프 신학교를 졸업했다. 이로 인해 아일리프 신학교가 있는 덴버에서송창근과 함께 지냈던 김재준과 한경직은 짐을 싸서 귀국길에 올랐다. 한경직은 곧장 귀국했고, 송창근은 LA에 가서 몇 달을 보낸 뒤 1931년 연말에 귀국했다. 이 때의 LA행은 그의 인생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사건이 되었다. 그가 거기서 흥사단에 입단했기 때문이다.

 
   아일리프 신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송창근 목사.


   LA는 도산 안창호 선생이 독립운동단체인 흥사단을 조직한 곳이다. 그는 1913년 12월 20일에 창립위원회를 구성하고 단우 확보에 나섰다. 그가 흥사단에 건 기대와 쏟은 노력은 대단했다. 1919년 이래 상해에 가서 임시정부에서 활약하고 있을 때도 그는 흥사단의 상해 지부를 결성하고 조직의 활성화를 위하여 매우 노심초사했다. 흥사단은 안창호의 독립운동 방략의 기본이 되는 단체였기 때문이다. 그런 기대에 부응하여 흥사단원들은 안창호의 독립운동 활동을 극력 뒷받침했다.


   나중에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구속된 송창근에 대한 판결문에 의하면, “1931년 9월 하순 경에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흥사단 본부에서 김병연의 권유를 받고 입단했고, 1932년 1월 2일경 위의 본부에서 송종익 외 약 50명에 대하여 ‘유다야이즘’이라는 연제 아래 ‘기독교에는 실생활에 중점을 두는 유다야이즘과 신비를 주장하는 포올이즘이 있다. 나는 유다야이즘에 찬성한다. 이는 흥사단의 무실역행의 주장과 서로 합치하므로 우리 흥사단원도 또한 기독교도와 연락을 취하여 소기의 목적을 수행하기에 매진하여야 한다’는 취지를 역설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송창근은 연말이 다가오자 태평양을 건넜다. 그가 일본을 거쳐서 서울에 도착한 날은 1932년 1월 5일이었다. 당시 산정현교회를 담임하고 잇는 목사는 강규찬 목사였다. 그는 1917년부터 산정현교회의 목사로 시무하기 시작하여 14년째 산정현교회에서 목회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사임하기도 전에 당회에서 그의 후임 목회자로 미국에 있는 송창근을 모시기로 결정해 놓은 것이다. 아마도 ‘새로운 목회’에 대한 갈망이 있어서 그랬을 것이다.


   주목할 점은 송창근은 귀국하기도 전에 평양에서 유명인이었고, 그가 평양에 와서 할 일이 모두 확정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산정혀교회에서의 목회와 숭실학교 성경 교사, <신학지남>의 편집이 그것이었다.


   1932년 1월 초순, 드디어 서울에 도착한 송창근은 곧장 평양으로 가지 않았다. 서울에서 사람들을 만난 뒤에 함경도 고향에 가서 근친을 하고 다시 서울에 가서 친지들을 만나는 등의 일로 여러 달을 보냈다. 그가 평양으로 간 때는 1932년 4월 상순이었다.


   그는 고향에 있는 가족들을 모두 이끌고 평양에 부임했다. 함경북도 웅기에서 평양으로 가려면 기차를 타고 함경선과 경원선을 갈아타면서 서울로 가서 거기서 다시 경의선 기차로 갈아타고 평양역에 가서 내려야 했다.


   그런데 이때 평양에 도착한 송창근의 가족들 모습이 두고두고 화제가 되어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고 한다. 송 박사가 가족들과 평양역에 내려서 교회 사택으로 가는 동안 내내, 송 박사의 부인이 손으로 송 박사의 혁대를 꼭 움켜쥐고 송 박사 옆에 붙어서 걸어가더라는 것이다. 다시 워낙 많은 사람들이 환영을 나왔기에 인파가 아주 대단했는데, 그걸 본 소심한 부인이 혹시라도 인파 속에서 남편을 잃어버릴까봐 남편의 혁대를 꼭 붙잡고 걸었던 것이다. 그런데 송 박사는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부인에게 혁대를 잡힌 채로 흔연하게 걸어가더라는 것이다.

 
   송창근 목사의 부인 김재권 사모.


   여기서 부인관 관련된 흥미로운 일화를 하나 더 적고 가야겠다. 송창근이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하자 이내 여러 이야기들이 나왔는데, 그 중 하나가 “송 박사가 곧 이혼할 것”이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송창근의 부인 김재권 씨는 작은 체구에 외모나 성품이나 성격에 모두 매우 평범하고 교육도 받지 못한 시골 여인인데다가 6년이나 연상이었다. 그래서 주위에서는 모두들 “이제 머나먼 선진국 미국에 가서 박사까지 따온 분의 눈으로 보면 부인이 도저히 성에 차지 않아서 곧 이혼하게 되리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이런 소문이 평양에 떠도는 가운데, 송창근이 평양으로 부임하는 길에 가족들과 함께 숙소에 묵고 있을 때였으리라. 하루는 송 박사가 모두들 보란 듯이 부인을 데리고 화신백화점에 가서 같이 팔짱을 끼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르내리면서 부인에게 백화점 구경을 시켜주었다. 그 이후로 “송 박사가 곧 이혼할 것이다”라는 소문이 아예 영영 사라졌다고 한다.


   당시 화신백화점이라 하면 서울 시내에서 가장 사치스럽고 최고로 번화한 장소에 있던 건물이었다. 그런데 그런 곳을 택하여 부인과 팔짱을 끼고 구경 다니는 모습을 연출해 보임으로써 세간에 일고 있는 ‘송 박사의 이혼’에 대한 소문을 일거에 불식해 버린 것이다. 송창근이 지녔던 ‘처세’에 대한 뛰어난 감각을 여실하게 보여주는 일화이다.

 

 

   평양 산정현교회로 부임하다


   송창근 목사가 산정현교회에 부임한 것은 1932년 4월 상순이었다. 산정현교회는 일명 산정재교회라고도 불렸다. 현(峴)은 고개를 말하는 것이라서, 고개 ‘재’ 자를 넣어 부르기도 하는 것이다.


   산정현교회는 장대현교회에서 분립한 교회다. 장대현교회의 교인들이 늘어나면서 1903년 남문외교회가 분립했고, 1905년 사창골교회, 1906년에 산정현교회가 분립했다. 네번째 분립한 교회라서 처음에는 ‘평양성 제4교회’라고 불렀다. 그러다가 1907년 6월에 산정현에 교회당을 새로 지으면서 ‘산정현교회’로 바꿨다. 산정현교회는 1천여 원의 예산으로 건평 56평짜리 한옥을 세워 600석 규모로 지어졌다.


   미국 번하이셀(Chales Francis Bernheisel, 1874-1958) 선교사가 산정현교회 초대 담임목사로 부임했다. 그의 한국 이름은 편하설(片夏薛)이다. 그는 1906년 1월 장대현교회에서 산정현교회가 분립할 때 그 책임을 맡았고, 1913년 1월에 처음으로 한국인 한승곤 목사를 동역 목사로 청빙하여 교회를 이끌어 갔다.


   한승곤 목사는 산정현교회에서 시무하다가 1916년 3월에 사임하고 미국으로 떠났다. 후임으로 안봉주 목사가 3개월 간 임시 목사로 시무한 뒤 1917년 6월에 제2대 목사로 강규찬 목사가 부임했다.


   강규찬 목사는 16세까지 한문 공부를 하여 한시(漢時)에 능통했고, 천문지리에도 조예가 깊었다. 1908년에는 미션스쿨인 선천 신성중학교에서 한문을 가르치기도 했다. 백낙준, 박형룡, 정석해 등이 이 학교 출신이다.


   1931년 강규찬 목사가 산정현교회에서 목회한 지 14년이 된 해에 산정현교회 당회는 목사를 바꿀 계획을 세웠다. 미국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은 송창근을 제3대 목사로 모시기로 확정한 것이다. 이는 송창근이 아직 미국에 있을 때의 일이었다. 당시 산정현교회의 당회원으로는 김동원, 조만식, 변홍삼, 박정익, 오윤선, 최정서, 김찬두 씨가 있었다.


   이때 함경도 출신인 송창근이 평안도 지방인 평양의 대교회를 맡게 된 배경을 두고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다. 그때만 해도 각 지방 간의 교류가 적고 지방색을 무척 따졌던 시절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일이 벌어지게 된 이유에 대해 지금까지 대체적으로 거론되는 이야기는 ‘일본 유학 시절의 선배들인 채필근 목사와 강봉수 선생의 추천에 의한 것이리라’는 추정이다. 송창근에 대한 청빙 이야기가 나온 1931년 중반에, 채필근 목사는 숭실전문학교의 교수였고, 강봉우 선생은 숭실중학교의 교무주임이었다.


   그러나 이는 너무 무리한 추정이다. 그보다는 ‘산정현교회 당회원인 장로들이 이미 송창근에 대하여 익히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보는 것이 보다 정확할 것이다.


   젊은 목회자 송창근은 이미 조선의 기독교계에서 잘 알려져 있었다. 우선 1922년 여름에 있었던 동경 유학생 모국 방문 순회 전도 강연회 때, 그의 강연 내지 연설 실력이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졌다.


   그것은 평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강연회가 평양에서도 이틀에 걸쳐 여러 차례 열렸다. 평양 강연회 역시 대성황을 이뤘다고 하니, 평양 기독교계에서는 그때부터 이미 송창근에 대해 깊은 인상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김재준이 일찍이 말했듯이 “그는 재치 있는 미남으로서 연설도 잘하고 좌담에도 능숙하고 교제솜씨도 세련된 품위 있는 청년”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산정현교회 장로들로서는 불과 9년 전이었던 강연회 때의 기억을 생생하게 지니고 있었을 것으로 봐도 무리가 없다.


   또한 송창근은 일본 유학을 가기 전이나 일본 유학 도중에, 그리고 미국에 가기 전에 이미 여러 기독교계 신문과 잡지들에 다수의 논설을 발표했었다. 그는 바울에 관한 책을 일본어로 번역하고 편집하여 출간했고, 영어소설도 번역하여 출간했다. 또 <기독신문>에 연재했던 ‘푸린스톤 만필’에서 보듯, 미국에 간 뒤에도 줄곧 국내의 신문 잡지 등에 글을 발표한 유명인사였다.


   당시 기독교계에서 발행되는 신문 잡지의 수는 극히 적었다. 그래서 그런 언론매체에 글을 발표하는 사람은 곧 주목을 받게 되어 있었다. 송창근은 이미 뛰어난 강연으로 주목 받고 있었으며, 기독교 언론매체를 통해서 이름이 널리 알려진 사람인데다가, 더 나아가 미국에서 신학박사 학위까지 받은 유명인사였던 것이다.


   그래서 산정현교회 장로들이 그를 담임목사로 모시려고 욕심 낸 것이었다는 주장이 설득력 있다. 귀국하기도 전에 미국에 있는 송창근과 연락하여 ‘귀국하면 산정현교회의 담임목사로 모신다’라고 서로 확정해 놓고 기다린 것이다.
 

 1932년,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아 귀국한 송창근 목사(앞줄 맨 오른족)가 

첫 담임목사를 맡은 평양 산정현교회의 신도들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부인 김재권 사모(앞줄 가운데)가 막내딸 시온 양을 안고 있다. 

사진제공=경건과신학연구소


   송창근 목사가 산정현교회에 부임한 것은 1932년 4월 상순이었는데, 조선 장로교회의 규정상 평양신학교를 나오지 않은 사람에게는 목사 자격을 주지 않아서 ‘조사(전도사)’의 자격으로 부임했다.


   당시 조선 장로교회는 일본이나 미국에서 신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한 사람들로 하여금 반드시 평양신학교의 별과(別科: 1년 과정)를 거친 뒤 ‘목사 시취 시험에 합격해야’ 조선 장로교회의 목사가 될 수 있도록 제한했다. 아무리 일본이나 미국에서 신학교를 다니고 신학을 전공하여 학위를 받은 목사라 해도 그 사람은 ‘일본 목사’나 ‘미국 목사’에 불과했다. 이는 선교사들이 운영하고 있는 ‘평양신학교’가 차지하고 있던 위상을 절대적으로 만들기 위한 조치였다. 당시 조선 기독교계는 선교사들의 권력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그렇게 평양신학교의 1년 별과 과정을 이수한 송창근은 드디어 1933년 10월에 평양노회에서 ‘목사 고시’를 통과한 후 목사 장립을 받았다. 이때 시험문제 중에 ‘요한복음 3장 16절을 외워 보라’는 것이 있어서 송창근이 그대로 외웠다는 것은 두고두고 화제가 되었다.


   송창근이 1933년 10월에 목사로서 장립 받음으로써 산정현교회에서는 박형룡 목사의 임시 당회장 체제가 끝나고, 송창근이 담임목사로 교회를 이끌어 가기 시작했다. 그의 목회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설교에 능하고 사람을 끌어당기는 카리스마와 친화력이 대단하면서도 ‘경건’을 강조하는 성실한 목회였기에 나날이 교인들이 빠르게 늘어났다.


   송창근의 산정현교회 ‘전도사’ 시절의 단독 목회 회고담이 최문환 목사가 쓴 글에 남아 있다. 최문환 목사는 송창근이 전도사로서 산정현교회를 시무하고 있을 때, 평양신학교 학생이었다. 현직 전도사들이 1년에 한 학기 3개월 동안씩 신학교에 와서 교육을 받게 했던 특별과정에 속한 신학생이었다. 그는 그 기간 동안 산정현교회 예배에 출석했다. 그래서 당시 ‘전도사’로서 목회하고 있던 송창근의 목회 모습을 잘 알고 있는데, 다음과 같이 증언을 남겼다.


   제가 송 박사님을 알게 된 것은 송 박사님 고향인 경흥에서가 아니고 멀리 평안북도 평양북도 평양에서였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40년 전이 되겠읍니다만 그때 송박사님은 미국에서 신학을 수학하시고 박사학위를 받으신 후 어떤 인연이었는지는 몰라도 평양으로 건너오셔서 산정현교회에서 전도사로 시무하시고 계셨습니다. 산정현교회라고 하면 우리가 다 잘 알고 있는 유명한 애국자 조만식 장로님이 당회원으로 시무하시고 계셨던 교회였습니다.


   그때 제가 받은 산정현교회의 인상은 매우 깊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줄곧 그 교회로만 나갔던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린다면 그때 그 교회를 목회하시던 송 박사님은 위대한 목회자이다라고 느꼈습니다. 신분은 목사도 아닌 전도사로서 지방색을 초월한다고 하지만 나라의 끝지방 미미한 함북 출신으로서 우리나라 기독교의 본산이라 할 수 있는 대 평양성에서 몇째 아니 가는 대 산정현교회에서 권위당당하게 목회하신다는 사실에 저는 커다란 충격을 받았고 또 그대로 인정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분의 목회이념 또는 그 목회방법이 저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한 가지 실례를 든다면 이런 것을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주일 예배시간은 문자 그대로 엄수되었습니다. 일분일초도 어김이 없었습니다. 만일 조금이라도 늦게 들어온다면 그야말로 불호령이 나기 마련입니다. 이론이 너무도 정당하기 때문이지요. 예배는 하나님을 뵈려 하는 엄숙한 예절에 속하는 것인데 온다고 약속한 시간을 제 마음대로 변경하는 일이 가당한 일이겠느냐고 만일 어느 경찰서장을 면회할 시간을 약속해 놓고도 5분 15분 늦게 와서 이러쿵 저러쿵 되지 못한 변명이나 늘어 놓는다면 그것이 어찌 도리에 맞는 일이겠느냐고 만일 부득이한 사정이 생겨서 불가피 시간을 어길 경우가 생긴다면 차라리 그날 예배에는 불참하는 것이 옳을 것이라는 이론이었습니다. 너무나도 정당한 이론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각 예배가 시작된 뒤에는 누구 하나 얼씬하는 일이 있을 수 없었고 그러기에 예배의식은 그야말로 엄숙했습니다. 그리고 어린 아이를 데리고 온 엄마들은 언제나 뒷자리에 앉게 마련이었고 어쩌다가 울음소리가 날 경우면 어느 사이에 문을 박차고 나갔는지 두 번 울음소리를들을 수 없도록 긴장해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만큼 예배에 정성을 다하도록 노력하는 이링 그 얼마나 성스러웠는지 그야말로 감격스러웠습니다.


   저는 그때 한 학기 동안 10여 회 그 교회에 나가면서 그것은 멀리 뒷 자리에서 예배의식에 참석했을 뿐 단 한번 송 박사님 서재로 찾아가서 한 시간 대화를 나눈 일이 있었을 뿐, 그 짧은 기회가 저의 일생을 통해서 잊을 수 없는 깊은 인상을 주었다는 사실은 아무리 생각해도 그는 훌륭한 인격자요, 또 전형적인 목회자였다고 느끼지 아니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산정현교회를 떠나 부산 나병원으로


   송창근 목사의 지도 아래 산정현교회는 날이 갈수록 부흥했다. 교인 수가 많이 늘어서 교회 건물이 비좁아졌다. 교회 건물은 한식으로 건물 내부에 여기저기 기둥이 박혀 있어서 1935년 여름 교회 신축 문제가 대두됐다. 이는 전 교인이 모두 동의하고 있었다.


   교인이 늘어서 교회를 새로 늘려 지어야 한다는 일은 기쁜 일이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교회당 신축자금 때문에 문제가 일이났다. 송창근 목사가 산정현교회에 부임한 이래 처음으로 목사와 장로들 사이에 큰 의견 대립이 일어났다. 교회 건축자금 문제로 인한 의견 충돌이었다. 교회에는 이미 비축된 재산이 많이 있었다. 교인들이 특별한 사용 목적을 밝히고 그걸 위하여 헌금한 재물들, 또는 죽으면서 기증한 재물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장로들은 교회 신축을 그 자금으로 하자고 나섰다. 그러나 송창근 목사의 의견은 달랐다. 그 헌금은 헌금한 이들이 제시한 특별한 용도에 따라서 사용되도록 해야 하고, 교회 신축 자금은 새로 모금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세상적인 눈으로 본다면, 이때 장로들이 보인 행태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교회당을 새로 짓는다면 아무래도 장로들에게 제일 먼저 “건축헌금을 내라”는 유형무형의 압박이 가해진다. 그리고 장로들은 당연히 일반 교인들보다 더욱 많은 헌금을 낼 것이다. 당시 산정현교회 장로들은 교회에 이미 비축되어 있는 재물을 사용함으로써 그러한 건축헌금 압박에서 피할 길을 찾은 것이다. 그런데 송창근 목사가 거기에 제동을 건 것이었다.


   송 목사로서는 그간 자신이 세워놓은 권위와 지도력에 대한 자신감이 있었다. 장로들이 처음에는 반대한다 해도 자신이 강력하게 밀고 나가면 이내 수그러들 줄 알았다. 그러나 장로들의 입장은 완강했다. 게다가 장로들 중에서 그가 부임한 뒤에 새로 장로로 뽑은 ‘홍 장로’의 행태가 송 목사의 눈에 너무나 거슬렸다. 그가 다른 장로들보다 앞장서서 송 목사에게 반기를 들고 나섰기 때문이었다.


  ‘홍 장로’의 그런 행태는 송 목사로서는 너무도 뜻밖인 일이었다. 송 목사가 산정현교회에 부임한 뒤에 보니까, 홍 모 집사라는 교인은 매우 가난하고 배운 것도 전혀 없는 사람으로서 시장에서 채소장사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 믿고 교회 일하는 것에 아주 극진했고 열심이었다. 그래서 송 목사는 그를 장로로 만들고 싶었다. 산정현교회는 보낼 전국적인 명성을 지닌 거물급 장로들이 진치고 있는 교회로 유명했는데, 그런 유명인사들만이 아니라 무명의 보잘것없는 사람도 예수를 열심히 믿는 믿음 하나만으로 그들과 같은 장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세상에 보여주고, 그가 그 유명한 장로들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여 교회를 섬기면서 열심히 교회 일을 하는 것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 또한 목사의 욕심이라 치면 욕심이로되 참으로 선한 욕심이었다.


   송 목사가 홍 모 집사를 장로로 만들고자 하는 뜻을 밝히자 기존의 유명한 장로들이 모두들 반대했다고 한다. 아무래도 한 교회의 장로라 하면 배움도 어느 정도 있어야 하고 기타 사회적인 여건도 어느 정도는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는 식의 반대였다. 그러나 송 목사는 그런 반대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래서 송 목사가 평신도들에게 직접 영향력을 발휘해서 장로 투표에서 그가 뽑히도록 밀었다. 그 결과, 그 ‘믿음 좋은 홍 집사’는 ‘홍 장로’가 되었다.


   그런데 건축헌금 문제로 송 목사와 당회원인 장로들 사이에 갈등이 일자, 다른 사람 아닌 홍 장로가 제일 앞장 서서 반대하고 나섰다. 본래 무식한 사람이라 반대도 무식하게 했는데 다른 장로들은 방관했다. 아마도 송 목사가 자신들의 반대를 무시하고 그런 사람을 장로로 뽑았다가 그렇게 당하고 있는 것에 대한 고소한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송 목사는 그런 사태를 당하면서 강한 위기의식을 느꼈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교회 신축 문제’의 차원을 넘어서는 중차대한 사태라고 받아들인 것이다. 그는 이런 분위기가 바뀌지 않는 한 자신이 더 이상 산정현교회에서 목회할 수도 없고, 또 목회할 필요도 없다고 느꼈다.


   1936년 4월, 송창근은 장로들이 자신의 의견에 끝내 따르지 않을 경우를 대비하여 마지막 통첩을 준비했다. 그리고 당회를 소집했다. 장로들은 여전했다. 그래서 그는 그 자리에서 담임목사 직을 사임했다.


   그리고는 곧장 평양을 떠날 준비를 했다. 갈 곳은 이미 생각해 두었다. 부산이었다. 거기는 호주 선교부 관할 구역이었다. 부산에서 호주 선교부 소속 매켄지 선교사가 나병환자들을 돌보는 큰 병원을 세우고 그들을 돌보는 목회를 하고 있었다. 청년시절부터 늘 아시시의 성자 성 프란시스를 진심으로 기리고 사모하고 있었던 송창근은 본래 빈민을 대상으로 선교하는 일에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그는 그대로 부산으로 가서 매켄지 선교사와 함께 나병원에서 일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송창근 목사가 사임 의사를 전했을 때 누구보다도 당회원들이 제일 크게 놀랐다. 교회 건물 신축 문제가 필수적으로 제기될 만치 교회가 크게 부흥한 상황이란 것은 당회원들로서도 매우 기쁜일이었다. 다만 교회 신축자금 마련 문제에 대하여 서로 이견이 생겼을 뿐이라서 목사님 쪽에서 양보해서 모든 일이 편편해질 것을 바라고 버틴 것인데, 그것이 ‘담임목사 직 사임’이라는 천만 뜻밖의 일로 번진 것이다.


   당회원인 장로들은 즉각 사임을 만류했다. 은혜롭게 추진해야 할 교회 신축 문제에서 당회원인 장로들이 고집을 부려서 돌연 목사를 잃게된 상황이란 것은, 그 자체로 매우 난감한데다가 더욱이 일반 교인들을 대할 면목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송창근 목사는 단호했다. 마지막 당회를 마친 뒤 즉각 이삿짐을 쌌다. 사태를 알게 된 교인들은 이삿짐을 붙들고 떠나지 못하도록 버텼다. 그러나 송 목사는 완강했다. 그런 만류를 끝내 물리치고 표표히 부산으로 떠나버렸다.


   송창근 목사의 직제자 김정준 목사의 글에 송창근 목사의 사임과 관련한 ‘홍 장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 해 여름 송목사님은 돌연히 교회를 사면하고 부산으로 내려 가시고 말았다. <전기편>에서도 보는 바와 같이 “목회에 실패했다”는 전격적인 판단 때문이었다. 자기가 세운 한 무식한 장로가 자기를 배신할 줄이야 꿈에도 생각 못하셨다. 이 사람이 장로될 때 그 유명한 장로들이 반대를 했다. 송 목사의 의도는 그 유명한 장로들이 사회적 명성과 위치 그대로를 교회에서 인정받는 것보다는, 사회에서 무명하고 학식이 좀 모자라는 사람도 교회에서는 장로가 될 수 있고 또 되어야 한다는 인간평등론과 교회는 결코 사회의 연장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프로테스탄스적인 만인사제론에 의한 신도론에 의거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사상을 받아 이해할 만한 사람이 장로가 되지 못한 것이 유감이었다.


   그렇게 평양을 떠나서 부산으로 간 송창근 목사는 마음이 계속 몹시 아팠던 것 같다. 부산에 가서 처음으로 어느 교회에서 설교를 하는데 산정현교회 생각 때문에 자꾸 눈물이 나서 눈을 감은 채 설교를 하는데 산정현교회 생각 때문에 자꾸 눈물이 나서 눈을 감은 채 설교를 했더니 “목사님이 졸면서 설교를 했다”고 소문이 났다는 후일담이 있다.


   송창근 목사가 당회원들과 의견이 일치하는 않는다 해서 그처럼 표표하게 산정현교회를 떠난 행위 안에는, 당시 교계의 풍토에 대한 반감과 경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시절에는 목사와 교인들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면 서로 끝까지 버티면서 싸우는 경향이 강했다. 같은 평양 시내에 있는 대교회이자 산정현교회의 모교회이기도 한 장대현교회의 경우를 보아도 그러했다. 1930년대의 전반에 들어서서 담임목사인 길선주 목사와 교인들 사이에 분규가 일어나서 2년여 세월을 두고 격렬히 싸운 끝에 양쪽 모두 큰 상처를 입었다. 평양노회에서 나서서 노회 차원에서 문제 해결을 위해서 여러 가지 모양새로 개입하기도 했지만 제대로 해결되지 않았다. 끝내 결말은 길선주 목사가 1934년 5월에 장대현교회에서 자신을 따르는 교인들 2백2십여 명을 이끌고 나가서 다른 교회를 세운 것으로 마감되었다. 그리고 산정현교회 자체를 보아도 그러했다. 전임 목사인 강규찬 목사가 새 목회자가 부임한 뒤에도 계속 여러 달 동안을 버티고 있다가 마지못해 사임했을 때의 일 역시 편편하지 못한 점이 있었던 것이다.


   송창근 목사는 그러한 교계의 모습과 현상에 질색했다. 그래서 오히려 보란 듯이 표표히 떠난 것이니, 그 또한 김인서가 지적한 바 ‘송창근의 결벽과 강직’에 해당한 것이었다.


   산정현교회를 떠나기로 결심했을 때 송창근의 마음에 떠오른 것은 조승제 목사를 통해서 알게 된 ‘부산 나병원’이었다. “그곳의 나환자들을 향해 가리라”하는 것이 그의 결심이었다. 미리 부산 나병원 원장 매켄지 선교사에게 그 곳으로 가겠다고 전하여 서로 양해가 된 듯하다.

 
   부산에서 나병원을 운영하면서 나환자 구료사업을 크게 벌렸던 매켄지 선교사와 함께 사진을 찍은 송창근 목사. 사진제공=경건과신학연구소


   당회원들의 입장에서 보면 송창근 목사의 사임은 너무도 뜻밖이고 갑작스러웠다. 그래서 몹시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그들이 송창근 목사에게 바랐던 것은 ‘건축헌금 문제에서의 양보’였지 ‘사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송창근 목사가 단호하게 떠난 뒤에 그들은 후임 목사를 구하기 시작했으나 얼른 정해지지 않았다. 결국 송창근 목사가 떠난 뒤 석 달이 흐른 1936년 7월에야 마산 문창교회 담임목사이던 주기철 목사가 산정현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했다.


   주기철 목사가 산정현교회에 부임한 뒤 곧 교회 신축문제의 방향이 매듭지어졌다. 건축헌금 문제는 이전에 기부되어 있던 교인들의 재물도 사용하고 교인들에게서 새로 건축헌금도 걷는 이중의 절충방식이 선택됐다. 송창근 목사 사임에서 얻은 교훈 때문인가. 이번에는 당회에서도 ‘새로 건축헌금을 걷는 방식’을 받아들였다. 교인들이 크게 줄어들어서 이젠 ‘교회 신축’이 전혀 다급하지 않은 상황이 되었지만, 목사의 사임까지 불러온 현안이었다. 당회원들로서는 그 문제로 교회를 떠난 교인들을 되불러 들이기 위해서도 울며 겨자 먹기로 교회 신축 문제를 계속 추진할 수밖에 없었다.


   새 예배당은 1937년 9월 초에 완공되었다. 건축헌금 5만여 원을 들여서 지은 300평 규모의 서양식 2층 벽돌건물이었다. 9월 5일에 입당예배가 성대하게 울려졌다. 그러나 주기철 목사가 부임한 뒤 1년 2개월이란 세월이 쌓인 그때에 이르기까지, 산정현교회의 교세는 ‘600명’선으로까지밖에 회복되지 않았다.

 

   부산에 세운 성빈학사


   부산은 송창근에게 새로운 선교사업을 시작할 새로운 땅이었다. 새로운 각오를 지니고 그는 부산으로 내려갔다.


   1936년 4월 바닷바람이 싱그러운 부산에 도착한 송창근은 이내 평양에서 생각하고 계획했던 선교의 방향을 바꾸었다. 부산 나병원의 울타리 안에서 그 곳에 수용되어 있는 나환자들을 위해서 일하는 대신, 한 차원 더 앞으로 나아간 새로운 형태의 선교사업을 추진하기로 한 것이다.


   그는 호주 선교부의 원조를 받아서 부산 남부민동에 빈민선교를 목적으로 하는 기독교 사회사업체인 ‘성빈학사(聖貧學舍)’를 세웠다. 성빈학사의 ‘성빈’은 물론 성 프란시스의 거룩한 가난, 곧 ‘성빈’을 흠모해서 따온 것이었다. 성 프란시스적인 삶을 살기 위한 구체적인 목표의 설정이고 제시였다. 그리하여 부산이라는 조선 제2의 대도시의 어두운 그늘에서 신음하는 도시 빈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송창근의 선교사업이 새롭게 시작되었다.


   송창근 목사가 ‘성빈학사’를 통해서 실시했던 사업들은 대강 다음과 같았다.


   1. 호주 의료 선교사들의 협조 하에 이뤄진 여직공들을 위한 보건사업
   2. 교회당을 빌려 주간학교 체제로 무산층 어린이 교육
   3. 유치원과 학원 설립 및 운영
   4. 매 주일 오후 성경 강좌
   5. 일본 유학생들의 숙박 주선
   6. <성빈> 잡지 발간
   7. <성빈문고> 및 기타 단행본 발간


   위와 같은 일들은 각기 앞으로 전개할 사업의 기초가 되는 일들 이었다.


   호주 의료 선교사의 의료진을 동원해서 여자 직공들의 건강을 살피는 일은 도시빈민선교의 기본에 속했고, 평일에는 비어 있는 교회를 빌려서 주간학교 체제로 무산층 어린이들을 교육시키는 일도 그러했다. 가난한 가정의 아이들을 대상으로 유치원과 학원도 운영했다.


   성경강좌는 보수동 교회를 빌려서 매 주일 오후 2시마다 열었는데, 부산 기독교계에서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각 교회 지도자나 남녀 청년들이 많이 참석했는데, 송 목사는 이 강좌에서 성서를 가르침과 동시에 성 프란시스의 사상과 생활을 전하고 신자들의 생활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강조했다고 한다.


   일본 유학생들이 도일하기 전에 하루쯤 묵는 숙박을 주선한 일은 미래를 염두에 두고 한 일이었다. 일본 유학생들은 전국 각지에서 부산에 와서 일본으로 건너갈 배가 뜨기를 기다려야 했는데, 으레 부산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고 대개 숙박업소에 투숙해야 했다. 그런 유학생들에게 성빈학사에서 하룻밤의 숙박을 제공한 것이다. 앞길이 창창한 일본 유학생들을 그런 식으로 접촉하여 간접적으로 기독교 신앙을 전하려고 했던 것이다. 성빈학사 건물로는 미처 수용이 안 되어 각 교회 또는 여유 있는 이들의 방을 빌려서 유학생들을 수용했다고 한다.


   또한 문서선교의 일환으로 <성빈> 잡지를 발간하여 배포하는 일에도 그는 힘을 크게 쏟았다. 그는 <성빈> 잡지에 계속 글을 썼다. 그리고 <성빈문고> 시리즈 및 기타 단행본들을 발간하는 일 역시 중요하게 다룬 사업이었다.


   이 시기에 그가 <성빈> 잡지에 쓴 글 하나를 소개한다. ‘슬픔’에 관해서 생각한 단상이다.


   슬퍼한다는 것은 극히 젊은 말로 하면 현재 자기에게 불만을 말하는 것이요 전체적으로 오늘 이상의 좀더 높고 귀한 생활을 요구한다는 향상의 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슬퍼할 줄 모르는 사람은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찾아 영원한 생명에 나아가라는 주님의 가르치신 참뜻을 모르는 사람들이외다. 그래서 오늘에 슬퍼할 줄 아는 사람만이 천국을 찾게 되나니 슬픔은 인간으로 하여금 새 세상을 바라보게 하는 관문이요, 인생의 색채요, 인생의 갖은 정서를 알리는 음악이외다. 참 슬퍼하는 심령에서만 거짓이 없는 인생의 전폭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고로 참된 슬픔은 인생 생활의 새로운 정화와 창조의 원동력이 되나니 슬픔은 가장 신비한 것입니다. 이렇듯 신비한 슬픔은 오로지 남다른 포부와 큰 뜻을 가진 사람만이 가지는 것이니 큰 포부 높은 이상을 가지면 가진 사람마다 또한 더 큰 슬픔을 가슴에 품은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까리 모이는 데마다 이루 다할 수 없는 불상사가 생기는 까닭이 다 우리에게는 남다른 포부와 이상이 없노라는 고백이니 즉 우리는 슬퍼할 줄 모른다는 것이 가장 슬픈 현상이외다. 우리에게 슬퍼할 일이 있다하면 이 백성 슬퍼해야 할 일에 슬퍼할 줄 모르는 일이외다.


   ‘슬픔’의 정체와 그 신비한 기능에 대하여 매우 진지하고 깊이 있게 묘파한 글이다. 삶을, 또는 살아가는 일을, 진심으로 슬퍼한 일이 있었던 사람만이 쓸 수 있는 글이라 하겠다. 읽는 이로 하여금 자신의 삶에 대하여 다시 돌아보게 하는 힘을 가진 글이다.


   그 시기에 송 목사 댁에 가본 사람들은 송 목사 가족이 매우 가난하게 지냈다고 증언했다. 가진 것을 빈민 돕는 데 모두 써서 그렇더라는 것이다. 빈민을 돕는 선교사업을 한다고 하니까, 송 목사 댁에는 거지들이 떼를 지어 자주 찾아왔다. 줄을 이어 찾아 드는 그들의 성화에 시달리던 가족들이 때로 그들과 실랑이를 벌이는 때가 있었다. 그러면 송 목사가 안에서 듣고 고함을 질렀다.


   “아, 거지 대장이 예 있어. 대장 집에 왔다가 그냥 갈까, 몇푼 주어 보내오!”


   아마도 이때가 송창근의 전 생애를 통해서 몸은 몹시 힘들었어도 마음은 가장 편안했던 시기가 아니었나 싶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목회했던 손순일 목사가 이 시기에 본 송창근 목사의 모습은 다음과 같았다.


   송 박사님이 부산에서 성빈학사를 하실 적에 가끔 찾아가 뵈었지요. 그때 그 분은 여간 가난하게 지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도움을 청하러 오는 사람이나 학생들을 그대로 보내는 일이 없었습니다. 꼭 응분의 도움을 주었고 그냥 손님이라도 후한 대접을 하여서 보냈습니다.


   그리고 내가 때때로 부산거리를 거닐다가 뜻밖의 곳에서 송 박사님을 뵙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뒷골목이나 빈민촌 뒷거리에서 가끔 허름한 옷에 지팡이를 짚고 거니시는 그 분을 뵈었습니다. 송 박사님은 그렇게 다니시다가는 깡패, 부량소년들이 우글거리는 그런 데서 누구하고나 대화를 하고 가장 가난한 노인네들과도 친구처럼 마주 앉아 오래 시간을 보내시는 것을 자주 목도했습니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지요. 여름 방학에 송 박사님의 지시를 받아 농촌으로 가서 그곳 교회를 열심히 받들었습니다. 정말 견디고 참기 어려운 고난을 겪어가면서 도운 보람이 있어 떠나올 무렵에는 제법 교회도 부흥이 되었지요. 그래서 돌아온 길로 송 박사님을 찾아 뵙고 자랑스러이 자세한 보고를 드렸습니다. 한데 송 박사님은 별로 감탄도 않으시고 한마디의 칭찬도 없으신 겁니다. 그래서 내가 불안한 생각이 들어 “목사님, 아직도 저한테 뭔가 부족한 일이 있습니까?”하고 여쭤보았습니다.


   송박사님은 눈을 크게 부릅뜨시며, “임자, 눈치가 내가 칭찬해 주길 바라는 모양인데 칭찬할 일이 무언가? 아, 임자가 교회를 섬기는 일이야 너무도 당연한 일이지. 꼭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야”라고 하셨습니다. 어쨌던 나는, 송 박사님 생각이나 생활은 감히 흉내낼 수도 없고 또 그 비슷하게 사는 이도 못 봤습니다. 그 분의 감화로 나도 목사가 되었지요.


   성빈학사의 구성원으로는 직제자인 김정준을 제외하고도 월급을 받는 직원이 세 사람이나 더 있었다니, 꽤 큰 규모였음을 알 수 있다. 뒷날 1970년대에 가서야 한국 사회에서 본격적으로 시도되고 실시된 도시빈민 선교사업을 송창근은 이미 1936년부터 그처럼 몸소 실행했던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섭리는 정말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이 시기에 송창근 목사는 부산에서 가까운 곳인 거제도에 사는 부자인 진정율 장로와 잘 알고 지내게 되었다. 그런데 1946년에 조선신학교를 대학 과정의 신학교로 설립하는 허가를 받기 위하여 재단법인을 만들 때 전혀 재원이 없었는데, 송창근 목사가 진정율 장로에게 말하여 임야 50만 평을 무상 기부 받아서 재단법인을 만들어서 조선신학교를 대학 과정의 신학교로 설립 허가를 받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수양동우회 사건


   1937년 10월 28일


   송창근 목사는 돌연 부산에서 체포되었다. 그가 부산에 내려가서 도시빈민선교사업을 시작한 지 2년째인 때였다. 그의 피체와 관련해서 당시 <조선일보>에는 다음과 같이 보도되었다.


   지난 십일 오전 열시 경에 북부산경찰서 고등 형사대가 부내 초장정에 있는 성빈학사 장 신학박사 송창근 씨를 검거하야다가 극비밀리에 취조중으로 사건 내용은 엄밀에 부치고 있다.


   그러나 이 같은 기사는 송창근 목사가 경찰에 체포된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된 기자가 그렇게 쓴 것일 뿐, 실제로 체포된 날짜는 ‘1937년 10월 28일’이었다. 성빈학사에서 송창근은 직접 모시고 일했던 제자 김정준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의 실제 상황은 이러했다.


   그 해(1937년) 10월 28일 송목사님은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서울서 내려온 고등계 형사에게 이끌려 서울로 압송되어 갔다. 부산역에서 “성빈학사를 자네에게 부탁하네, 하셨지만, 나 외에 세 사람의 직원들의 월급과 성빈지를 찍어내는 비용 등 송 목사님 떠난 후 내가 전혀 생각지 못한 학사 운영문제가 다급해졌다. 당시 호주 선교부 매켄지 목사를 비롯한 부산에 계신 여러 친구들, 그리고 성빈을 받아본 전국의 친구들이 ‘성빈학사’의 고충을 알고 다소 보조를 해주었지만 내가 끌고 갈 수 있는 한도는 이듬해 2월까지였다.


   송창근 목사는 서울로 압송되어 종로경찰서 유치장에 갇혔다. 이 사건은 당시 중일전쟁이 확대되어 가고 있던 상황에서 일제가 시국을 확실하게 장악하기 위해서 터뜨린 사건이었다. 흥사단 계열의 민족주의자들을 일망타진하려는 의도에서, 흥사단의 국내용 호칭이었던 ‘수양동우회’의 회원들을 모두 체포한 것이다.


   1937년 6월 6일에 서울에 있는 회원들에 대한 검거가 시작되었고, 수사과정에서 압수한 명부에 의해서 점차 전국으로 확산되면서 모두 150여 명이 체포되었다. 취조 과정에서 어찌나 고문이 심했던지, 최윤호와 이기윤 두 분이 옥중에서 사망했고, 김성업은 불구가 되었다.


   수양동우회의 실질적인 지도자였던 도산 안창호 선생도 이때 함께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감옥에서 고생하던 그가 건강 악화로 옥사하게 될 우려가 있자, 일제 당국은 1937년 12월 24일자로 ‘병 보석’이라 해서 감옥에서 꺼내다가 경성제대 대학병원에 입원시켰다. 안창호 선생은 그 날로부터 두 달 반 뒤인 다음해 3월 10일에 대학병원에서 별세했다.


   도산 안창호는 송창근이 가장 좋아했던 애국지사였다. 정치인이라면 으레 싫어하고 심한 기피증이 있던 송창근도 도산만은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때 같은 사건으로 일경에 걸려들어서 생사가 갈린 것이다.


   모진 취조과정이 끝난 뒤에 1백여 명이 석방되고 공판에 회부된 사람은 모두 42명이었다. 송창근 목사도 공판에 회부된 피고인 42인 중에 들었다.


   그런데 이때 송창근이 체포되어 고난을 겪은 원인에 대해 오해가 더러 있다. “귀국 도중에 L.A. 몇 달 머물고 있을 때 입단했을 뿐 국내에서는 전혀 활동하지 않았는데 체포되었다”고 인식하는 것이다. 김재준 목사의 회담에 다음과 같이 쓰여 있기 때문이다.


   만우는 귀국 도중에 L.A.에 몇 달 머물렀다. L.A.는 흥사단 본고장이다. 친구를 좋아하는 만우는 친구들을 따라 흥사단에 가입했다. 대부분 친구가 흥사단원이었기 때문이다. 귀국한 다음에는 흥사단 모임에 참석한 일이 없었다. 그러나 명단에 이름이 적혀 있으니 단원임에는 틀림없었다.


   흥사단은 국내에서는 수양동우회라는 이름으로 조직된 민족주의 단체다. 도산 선생의 민족개조론에 근거한 애국단체라 하겠다. 국내에서는 이광수, 주요한, 장리욱, 한승인, 조병옥, 김윤경, 이윤재, 정인과, 백영렵 등이 중요 멤버였다. 그리고 국외에서는 도산 선생이 직접 지도하였다. 만우는 열심당이 아니었지만, 귀국 도중에 L.A.에서 명단에 이름을 올렸기 때문에 연루된 것이었다. 종로경찰서에 잡힌 것도 그 이유에서였다.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수감되었다가 풀려난 뒤의 송창근 목사.


   그러나 실제는 그렇지가 않았다. 송창근은 귀국하여 산정현교회 목사로 시무할 때 수양동우회에 가입하고 그 모임에 참석했다. 그런 사실이 재판기록에 의하여 입증된다. 송창근 박사가 1931년 하반기에 귀국 도상에서 L.A.에 몇 달 묵고 있던 때 흥사단에 가입하고 ‘유다야이즘’이라는 제목으로 모임에서 연설까지 했음은 앞에서 언급한 바 있다. 그런데 같은 판결문의 기록에 따르면, 평양에서 ‘동우회’에 입회했고 모임에서 연설도 했음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송창근은) 소화 7년(1932년) 6월 2일 평양부 순영리에 있는 평안고무판매소에서 개최된 동우회의 월례회에 출석하여 동회가 궁극에 있어서 조선의 독립을 도모할 목적으로 조직된 결사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 이에 가입하여, 피고인 김동원의 범죄사실 제2의 (10)에 기재한 바와 같이 동우회원과 기독교도와의 연락에 관한 문제를 협의하고, 그 밖에 소화 10년 3월, 부산부로 갈 때까지 자주 동지와 회합하여 그 목적의 수행을 위하여 여러 가지로 활동하고


   소화 7년 7월 2일, 평양부 계리 상공협회 회관에서 피고인 조명식 등과 회합하여, 송창근이 동우회와 기독교와는 상호 간에 서로 합치되는 점이 많으므로 기독교도와 연락을 취하여 동우회의 확대 강화를 도모하여야 한다는 취지를 역설하자, 일동은 이에 찬성을 하고


   위의 인용문에 나오는 김동원은 산정현교회의 장로로서 소설가 김동인의 형이었다. 해방 뒤에 월남해서 국회 부의장도 지냈다. 그는 부유한 실업가로 동우회의 회합 장소인 ‘평양고무판매소’의 주인이기도 했다. 송창근은 수양동우회의 활동에 이처럼 적극적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1940년 8월 21일에 있었던 경성복심법원의 제2심 재판에서 다음과 같이 실형에 선고된 18인 중 한 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징역 5년 : 이광수
   징역 4년 : 김윤경, 김종덕, 박현환, 주요한
   징역 3년 : 김동원, 김성업, 김병연, 조명식
   징역 2년 6개월 : 조병옥
   징역 2년 : 오봉빈, 백영업, 송창근, 김봉성, 김찬종, 조종완, 이영, 최능진


   그러나 일제 당국의 정략적 판단과 조치에 의하여 1941년 7월 21일에 있었던 최종심인 고등법원 형사부 재판에서 모두 무죄가 선고됨으로써 사건이 끝났다. 사건의 처리는 ‘초심에서는 전원 무조 선고, 검사의 항고에 따른 복심에서는 일부 피고들에 대한 중형 선고, 다시 최종심에서는 전원 무죄 선고’라는 과정을 거쳤다. 피고들은 초심인 경성지방법원의 무죄 판결이 있었던 1938년 12월 8일이 지난 뒤에 보석으로 풀려 나왔다고 한다.


   뒷날 김재준에게 당시 체포되어 종로경찰서에 수감되어 있을 때의 이야기를 할 때 송창근은 말하기를 “더럽고 질퍽하고 냄새 나는 지하실 시멘트 바닥은 짐승도 못 살 곳이었고, 꼭대기 작은 들창에서는 눈보라가 쳐들어 왔는데 그렇게 추울 수가 없었다”고 했다.


   송창근이 출옥하여 부산에 있는 집으로 돌아갔을 때,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피골이 상접하고 초췌했다. 조선출도 “휴가 때 귀국하는 길에 부산에 들려서 송 박사님을 뵈오니 얼굴빛이 백지장 같고 피골이 상접하여 참으로 보기에 민망했다”고 썼다. 그런데도 그가 돌아왔을 때 집에서 기르던 개는 즉각 알아보고 기막히게 반가워하여 송창근을 크게 감동시켰다. 그래서 뒷날 “사람보다 강아지가 낫더라”는 이야기를 자주했다. 

 

   조선신학교 설립


   송창근이 충옥하고 보니 그간 시국은 더욱 많이 악화되어 있었다. 그가 감옥에 있는 동안 ‘성빈학사’는 완전히 문을 닫고 뿔뿔이 흩어져 버려서 도저히 되돌릴 수가 없는 상태였다.


   나빠진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조선총독부에 의한 집요하고 잔혹한 신사참배 강요에 조선 천지가 굴복했다. 마지막까지 홀로 버티던 조선 장로교조차 1938년 9월에 열린 제27차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정했다. “신사참배는 종교가 아니요 애국적 국가의식이다”라는 매우 구차한 논리를 내세운 고통스럽고 부끄러운 타협이었다. 그러나 선교사 윤산온 교장이 이끌고 있던 숭실전문학교는 과감하게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폐교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송창근에게 충격적으로 다가온 것은 1938년 여름방학을 끝으로 평양신학교가 사실상 문을 닫은 일이었다. 그 역시 신사참배 강요를 거부한 조치였다. 선교사들이 운영하던 평양신학교가 문을 닫았다는 것은 곧 외국 선교사들에 의한 신학교육의 시대가 끝난 것을 의미했다. 그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비상상황이었다.


   “이런 상황과 사태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송창근은 고민하고 고뇌했다.


   유일한 장로교 신학교육기관이었던 평양신학교가 문을 닫은 사태를 그저 감수하고 바라보고 있다면, 조선의 기독교 신학교육은 아주 끝이 난 암흑상태에 떨어진다. 그런 암흑의 길을 막는 유일한 대안은 ‘조선인에 의해 운영되는 신학교를 새로 세우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해결방식은 보다 더 참혹한 사태에 처함을 의미했다. 현 시국에서 신학교를 세운다는 것은 일제당국의 ‘신사참배’ 요구를 받아들여야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실로 진퇴유곡의 딜레마에 속하는 문제였다. 평양 산정현교회에서 목회하고 있을 때만 해도 신사참배문제는 두 번 다시 생각할 것도 없는 사안에 속했다. 산정현교회에서 열렸던 총회 석상에서 신사참배 문제로 인한 ‘3숭(숭전, 숭실, 숭의) 학교’ 존폐문제를 토론할 때 종교교육부 총무이던 정인과 목사 등이 “신사에 참배해서라도 학교 문을 닫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자 송창근 박사가 회의장에서 정 목사의 목덜미를 잡아 끌어다가 회장 밖으로 밀어내쳤던 일이 있었을 정도였다.


   그러나 평양신학교가 문을 닫은 지금, 상황이 달랐다. 기독교 목회자들을 길러내는 신학교육을 아예 포기하는 것은 기독교 자체를 포기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고 느껴졌다. 그렇다면 선택할 길은 두 가지 중 하나였다. 암흑을 받아들여 암흑 속에서 칩거할 것인가? 아니면 ‘신사참배’를 하면서라도 ‘조선인에 의해 운영되는 새로운 신학교’를 세워서 새로운 가능성을 찾을 것인가? 그것은 조선 기독교계의 역사가 좌우되는 매우 중대한 고비에 해당했다.


   참혹하고 처절한 고뇌 끝에 송창근은 기독교 신학교육이 단절된 암흑상태를 거부하고 ‘조선인의 손에 의해 운영되는 신학교’를 새롭게 세우기로 결심했다. 그는 비상한 기운을 내어 급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서울에 올라가서 신학교 설립 준비작업에 들어갔다. 신학교 명칭은 ‘예수교 장로회 조선신학교’로 정했다.


   무엇보다도 학교 설립에 먼저 필요한 것은 ‘돈’이었다. 믿음 좋고 부유했던 김대현 장로를 설득하여 설립자금 25만 원을 내기로 약속 받았다. 신학교 설립사무를 맡을 사람들도 모았다. 채필근, 김우현, 윤인구, 이학봉, 인인식, 조희염, 함태영, 김길창, 차재명, 한경직, 김관식, 김응순 등이 호응했다.


   신학교육 전반에 관한 구체적인 청사진도 만들었다. 교과과정을 마련하고 새로 세울 신학교 건물도 구체적으로 설계했다.


   그렇게 바쁘게 뛰고 있는 송창근에게 조선총독부에서 강한 압력이 들어왔다. “동우회 사건으로 보석 중에 있는 자가 무슨 일을 하겠다는 거냐, 도로 잡아넣겠다”고 협박했다. 압력이 들어온 시기는 1939년 여름 이후로 고증된다. 1939년 여름에 정대위가 원산에서 결혼할 때 결혼식 주례를 하기 위해서 송창근이 원산에 갔었다. 그는 당시 ‘조선신학교 기성회’의 ‘총무’로서 실무를 맡아 처리하고 있었으며, 원산에서 정대위에게 조선신학교의 설립과 운영에 대한 원대한 포부를 자세하게 이야기했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총독부가 본격적으로 압력을 행사하자 송창근은 도리 없이 신학교 사무에서 손을 떼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추진되었던 ‘조선신학교’의 규모와 실체를 알 수 있는 자료가 있다. ‘조선신학교 설립 개요’라는 제목의 서류이다.


   조선신학교 설립 취지
   조선신학교 설립 개요 : 1. 목적, 2. 명칭, 3. 위치, 4. 수업연한, 5. 정원, 6. 입학자격, 7. 각과 학과 과정, 8. 강좌 그 교수, 강사, 9. 시설, 10. 경상비 급 기금, 11. 장학금 또는 산업부 기금, 12. 재단법인 조선신학교 유지재단.


   위와 같은 체제로 작성된 서류에는 앞으로 신축할 건물들의 정면도와 평면도도 첨부되어 있다. 인쇄하여 총독부에 납본한 날이 1939년 5월 27일이고, 거기서 통과되어 발행한 날은 1939년 6월 5일이었다.


   여기서 ‘조선신학교 설립 취지’를 읽어 본다. “조선신학교를 왜 세워야 하는가?”하는 문제에 대한 분명한 의사와 의지가 확고하게 표명되어 있기 때문이다. ‘설립 취지서’는 다음과 같다.


   우리 조선 반도에 들어온 기독신교가 과거 50여 년 동안에 급속한 발달과 장족의 진보를 보게 된 것은 참말 세인의 경이할 만한 바가 있었다. 이것은 물론 하느님의 무한하신 은총과 환경의 복잡한 변천이 가장 큰 원인이 되었거니와 또한 외국 선교사들의 다대한 공헌과 우리 선배들의 부단의 노력과 결정이라고 아니할 수가 없다. 우리 장로교회의 과거를 회고하건대 먼저 미북, 미남, 호주, 가나다 등 4교파의 선교사들을 생각하게 된다. 교파를 갈르며 개인을 들어 상세히 소개할 수는 없거니와 우선 맨 처음으로 도래한 미국 북장로교회 선교사 원두우 박사와 신학교를 평양에 창설한 마포삼열 박사와 같은 이는 조선교회에서 영원히 잊을 수 없는 큰 은인들이었다. 그들의 열렬한 신앙과 건전한 인격이며 원대한 계획과 정밀한 준비는 오늘날 반도 교회의 기초를 세운 것이다. 이제 우리는 그이들의 제반 사업과 위대한 공적에 대하야 거듭거듭 감사를 드리지 아니할 수가 없다. 그러나 외국에서 들어온 그들로선만은 독장난명(獨掌難鳴)이란 말과 같이 어찌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하느님께서 반도 안에 위대한 창업적 교역자를 많이 일으키셨다. 이제 누구누구를 다 열거할 수는 없거니와 최초에 목사의 성직을 받은 7인의 선각자만은 과연 대표적 인물이 될 것이다. 그들은 명치 34년(1901)에 창립한 평양신학교에서 제1회 졸업생으로 명치 43년(1907)에 목사의 성별식을 지나 그때부터 조선노회를 조직하였던 것이다. 외람되히 한 마디씩으로 그들의 성격을 붙이여 그 씨명을 소개하면 헌헌장부(軒軒丈夫)의 서경조씨, 악악간사(鍔鍔諫士)의 한석진씨, 온후장자(溫厚長子)의 송인서씨, 독학군자(篤學君子)의 양전백씨, 친절강직(親切剛直)한 방기창씨, 충후열렬(忠厚熱烈)한 길선주씨, 인자순량(仁慈順良)한 이기풍씨 등의 7인이다. 아! 그이들은 지금 세상에서는 다시 찾아보기 어려운 훌륭한 인격자들이었다.

 
 조선신학교 설립 시절 송창근 목사(가운데)


   이 최초의 목사들은 그 대부분이 벌서 천국에로 이적하였다. 오직 한석진, 이기풍 두 분이 지금까지 생존하였을 뿐이다. 그 중에 한 분인 이 목사는 멀리 남해 연안에서 80 가까운 고령의 노구로 아직 교역을 계속한다. 한 목사만은 현금 경성 교외에 거주한 관계상 필자가 신학교 설립 기성회 일을 처음 생각할 때에 먼저 그 고견에 고문하고 싶어 그 문을 두드렸다. 그는 노안에 미소를 띠우고 흔연히 영접하야 유감없이 진정을 토로하야 주었다. 예리한 비팜과 심절한 권면을 섞어가지고 이런 말씀을 건네주었다. <우리 손과 우리 머리로 신학교를 설립하야 보자는 말인가. 조선에 벌서 있어야 할 것인데 아직까지 이런 운동도 없었다는 것은 너머 늦었지. 선교사와 조선 교회야 언제든지 정의 좋게야 헤여질 줄 알았는가. 그 사람네야 이러든지 저러든지 우리가 할 일이야 우리가 하여야지. 그러나 나야 이제 80 가까운 것이 출마한들 무엇을 하겠나. 또 아직까지 조선 사람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나는 모르겠네. 좌우간 연부역강(年富力强)한 자네들이나 하야 보게. 나야 물론 마음으로야 전폭적으로 찬성하지.> 이런 뜻의 말씀이었다.


   비록 간단한 말씀이나마 한숨과 눈물이 없이는 배청할 수가 없었고 분발과 결심이 없이는 퇴출할 수가 없었다. 참말 귀중한 훈시인 동시에 적절한 격려이었다고 생각한다. 더욱이 지금은 국가에서 동아의 신질서를 수립하고저 막대한 희생을 애끼지 아니하고 최선의 노력을 요구하는 이때에 우리 교회에서도 자연히 신질서를 세우지 아니할 수가 없게 되었다. 초대에는 선교사가 주체이었고 반도의 신자가 객체이었으나 시대는 점차로 전개되여 양자의 관계는 호상 협조의 상태에 있어 왔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반도의 신자인 우리들의 교회 사역의 주체가 되지 아니하면 안 될 것이다. 그러면 교역자를 양성하는 기관인 신학교는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의 손으로 경영하지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여기는 몸과 마음을 받힐 이도 생기고 땅과 돈을 드릴 이도 생겨야 할 것이다. 유지독지(有志篤志)의 남녀 신도는 합흥호래(盒興乎來)리오. 모사(謨事)는 재인(在人)이어니와 성사(成事)는 재천(在天)이니 오-성삼위(聖三位)의 하느님이시여 이루어 주옵소서. 아멘.


   소화14(주후 1939)년 3월 일 경성부 아현정 462번지 2호 장로회 설립 기성회장/신학교 설립 동위원장 채필근


   이 서류에는 설립 사무를 실제로 담당한 총무인 송창근의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보석 중이라서 조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무렵 평양에서도 조선인들의 손으로 신학교를 새로 설립하고 채필근 목사에게 교장 직을 제의했다. 새로 설립된 평양신학교는 1938년에 문을 닫은 평양신학교의 유산을 그대로 지닌 학교였다. 모든 것을 새로 마련해야 하는 서울의 조선신학교와는 비교될 수가 없었다. 채필근 목사는 조선신학교 설립 추진진에다가는 일체 아무런 말도 없이 평양으로 가서 평양신학교 교장으로 취임했다.


   한편 총독부의 강한 압력으로 조선신학교 설립 사무에서 손을 뗄 수밖에 없었던 서울의 송창근은 당시 북간도 용정의 은진중학교 성경교사로 있던 김재준에게 전보를 보내어 서울에 와서 ‘조선신학교’를 맡도록 부탁했다. 1936년 4월에 송창근이 부산으로 내려간 뒤에 평양에 남아 있던 김재준은 그 뒤 신사참배 문제에 협력하지 않는다 해서 숭인 상업학교 교장으로부터 물러나 달라는 이야기를 듣고 사표를 내었다. 그리고 몇 달 뒤에 북간도 은진중학교의 성경교사 자리가 나서 거기 취직하여 북간도에 가 있었던 것이다.


   김재준은 송창근의 부탁에 따라 서울에 와서 ‘조선신학교’를 맡았다. 경기도에서는 막상 인가를 내줄 때 신학교가 아닌 1년짜리 강습소로서의 인가를 내주었다. 그래서 1년마다 새로 인가를 받아야 하는 ‘학원’형태로 운영하는 ‘조선신학원’으로서 문을 열어야 했다. 김재준은 조선신학원의 문을 열어 1940년 4월 1일에 시험을 치러서 53명의 학생을 뽑아서 2일에 개강했다. 이사진과 교수진은 다음과 같았다.


   제1대 원장 겸 이사장 : 김대현 장로.
   이사 : 함태영, 김관식, 오진영, 조희염, 김길창, 김영주, 김영철, 한경직, 윤인구.
   전임 교수 : 윤인구, 김재준, 궁내창.


   송창근은 뒤에서 학생이 조선신학교에 가도록 주선하는 등 보이지 않게 도왔다.
 

   김천 황금정교회에서의 행복한 목회


   부산의 도시빈민선교사업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태로 막을 내렸고, 서울에서 조선신학교 일을 볼 수도 없게 된 송창근은 1940년 초에 경북의 김천으로 옮겨갔다. 김천 황금정 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한 것이다.


   김천은 경북의 한 중소도시이다. 옛날에 금이 나는 샘인 금지천(金之泉)이 있는 땅이라 해서 ‘김천(金泉)’이라는 지명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송창근 목사가 이때 느닷없이 김천으로 간 계기는 황금정 교회의 강익형 장로와의 인연 때문이라고 한다. 강 장로가 주도적으로 나서서 초빙했다.


   강 장로는 본래 평남 덕천 사람인데 3.1운동으로 평양형무소에 투옥되었었고, 그 후 일경의 압박과 감시가 심해서 이남으로 피신하여 처가쪽과 인연이 있는 김천에 자리 잡았다. 그리고 상업에 투신하여 해산물 도매업을 해서 크게 돈을 모았다. 그래서 평안도에 사는 친족 집안들도 대거 따라 내려와서 김천에 자리 잡았는데, 온 가문이 교회 일에 무척 열심이었다고 한다.


   김천에서 송창근은 생애 두 번째 목회를 시작했다. 삼십대 시절에 평양 산정현교회에서 생애 첫 목회를 할 때는 친구들이 그를 둘러쌌었는데, 사십대 시절에 김천 황금정교회에서 목회를 할 때에는 제자들이 그를 둘러쌌다.


   제일 먼저 옆에 온 사람은 공덕귀였다.그녀는 일본 요코하마 여자신학교 4년제를 졸업하고 김천 황금정교회로 왔는데, 그 일을 자신의 회고록에 이렇게 적었다.


   뜻밖에도 졸업식에는 일본유학을 반대했던 위들스 선교사가 일본까지 건너와 축하를 해주었다. 그리고 졸업했으니 함께 일해 보자고 청했다. 그 외에도 여러 곳에서 요청을 받았다.


   그러나 나는 그의 청을 거절하고 김천교회로 가기로 결정했다. 김천에 와 계시던 송창근 목사님이 교회 전도사 자리를 마련해놓고 기다리고 계셨다. 내가 졸업할 무렵에는 대동아전쟁이 일어나 인도의 선교사로 가겠다는 말도 꺼내기 어려운 때였다. 그러니 선교사 대신 전도자가 될 수밖에… 그때 우리는 신학을 하면 으레히 교회 봉사를 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교회에 가서 한 영혼을 꾸준히 추격해서 구원을 성취시키는 일이 신학자의 의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6월엔가 졸업을 하고 곧 김천교회로 갈 준비를 했다. 송목사님께서 여름 하기학교도 있고 하니 김천으로 바로 오라고 하셨다. 일단 김천으로 짐을 부쳤다. 책 외에는 별로 산 것이 없었다. 전도사로 시골을 가는데 외출이 많을 테니 비옷을 하나 사고 가위를 하나 샀다. 이것이 일본에서 한 쇼핑의 전부였다. 선물을 살 여유는 전혀 없었다.


   비옷 산 것을 알기라도 하듯 김천역에 내리니 비가 왔다. 교회 목사, 장로들이 마중을 나왔다. 강익형 장로는 내가 너무 젊다고 염려하면서도 월급 10원을 20원으로 올려 책정했다고 송목사님께서 후일 귀뜸해 주었다. 당시 시골 전도부인의 월급은 10원이 고작이었다. 이래서 나는 김천 황금동교회 정식 전도사로 부임했다.


   그 다음에 온 사람은 조선출이었다. 그는 동경에 유학 가서 청산학원에서 예과 3년, 신학부 본과 3년, 도합 6년을 공부하고 졸업한 뒤에 김천으로 왔다. 그 역시 송창근의 지도를 기다려서 그가 시키는 대로 순종한 것이다. 그가 써놓은 당시의 이야기는 이러하다.


   내가 청산학원을 졸업했을 때 송박사님은 경북 김천읍 황금정교회 담임목사로 시무하고 계셨다. 나는 편지로 나의 졸업 후의 일을 의논드렸더니, 졸업하는 대로 김천으로 오라는 명령이었다. 큰 기대를 갖고 와보니 김천읍을 중심으로 해서 그 주위 여려면에 산재해 있는 7개의 농촌교회 순회전도사 일을 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일곱 교회가 연합해서 중고 자전거를 한 대 마련해 주었다. 나는 아무 불평 없이 그 일을 맡았다. 지금 생각해 봐도 신통하게 느껴진다. 명색이 동경 유학생인데 한두 교회도 뭣할텐데 세상에 일곱 교회를 맡게 되었으니 말이다. 설상가상으로 나는 자전거에 서툴렀다. 얼마나 넘어지고, 얼마나 물에 빠지고 했는지 말로써 다 형언할 수 없다. 어떻게 생각하면 참으로 애처롭기도 했다. 그래도 묵묵히 1년간 전도사 노릇을 했더니 그 다음 해에는 교회 세 개를 나눠서 다른 전도사에게 맡기고, 나는 네 교회만 맡게 되었다.

 

            김천 황금정교회 찬양대원들과 함께 사진을 찍은 송창근 목사(42세)

            사진제공=경건과신학연구소


   그 다음에 온 제자는 정대위였다. 그는 숭실중학교를 나온 뒤 일본 경도에 가서 동지사대학에서 신학을 전공했다. 그 역시 졸업하자 스승인 송창근이 원하는 대로 김천 근처에 있는 예천읍 교회로 부임하여 목회를 시작했다. 정대위의 경우는 다음과 같았다.


  내가 일본에서 신학을 졸업한 것이 1941년 봄이었는데 만주 신경(지금의 장춘)에 있는 한교회와 원산에 있는 다른 한 교회로부터의 초청을 모두 거절하고 만우 선생의 지시에 따라 한국의 ‘뒤떨어진’ 지역인 경북 예천읍교회로 부임한 것은 이른바 일본인들이 태평양전쟁이라고 부른 그 싸움의 서전이 시작되기 직전인 1941년 봄이었다. 그때에 만우 선생은 김천에서 목회를 하고 계셨다. 그는 그의 계신 근처로 나를 부르신 것이다.


   송창근은 김천에서 행복한 목회를 했다. 사랑하는 제자들이 솥발처럼 벌려 서서 주위를 채우고 있는 중에 그는 본격적인 목회를 해나갔다. 다만 부산에서 성빈학사를 할 때 와서 도왔던 김정준은 뒤늦게 일본 동경의 청산학원에 유학 가서 공부하고 있었기에 목회 초기에는 같이 합류하지 못했다.


   송 목사는 본래 사람을 학식의 유무나 재산의 빈부나 사회적 지위의 고하에 따라 차별하지 않는 평등주의를 본능적으로 실천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김천의 무식한 촌로인 교인들을 대할 때도 그의 평등한 자세와 따듯한 유머가 늘 환하게 빛났다.


   송 목사는 마음 어느 한 구석에라도 “나는 미국 신학박사요, 당신들은 아무래도 무식한 이들! 나는 잘난 도회인이요, 당신들은 어쩔 수 없는 촌사람들!”하는 식의 우월감이 조금만치라도 들어 있었다면 절대로 만사가 그처럼 편편하게 돌아가지 않았을 것이다.


   송 목사가 그렇게 목회해 나아가니까 황금정교회는 물론 김천 시찰 구역 전체가 매우 빠르게 발전했다. 과거 40년 동안 목사 한 분밖에 없었던 시찰구역인데, 송창근 목사가 김천에 간 지 3년 만에 여러 명의 목사와 여려 명의 남녀 전도사가 모여들어 함께 목회하는 큰 시찰구역으로 변했다.


   부산에서 ‘성빈학사를 운영하면서 보냈던 2년’이란 삶도 따로 열매를 맺고 있어서, 많은 일본 유학생들이 방학에 고국에 돌아오면 중간에 김천에 내려서 송창근을 만나고 갔다. 그들은 마음을 쏟고 정을 나눌 대상으로 송창근을 찾은 것이다.


   그는 열심히 목회를 하면서 한편으로는 각지에 있는 미션 스쿨에 가서 특별신앙강좌를 인도하는 일도 열심히 했다. 그런 일을 결코 귀찮아 하지 않았다. 어린 학생들에게 신앙을 갖게 하고 성경을 알게 하는 일의 중요성을 남달리 마음 깊이 아로새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송창근이 미션 스쿨의 신앙수양회를 어떻게 가졌는가를 보여주는 증언이 있다. 뒷날 조선신학교에서 공부하여 제자가 된 이장식 교수의 경북 대구 계성중학교 시절의 회고담이다.


   계성학교에서는 1년에 한 번 신앙수양회가 있었는데, 이때는 외래 특별강사들을 모셨다. 그러므로 5년간 재학하면서 나는 5명의 특별강사의 설교를 들었다. 그들의 설교에서 인상적인 것들만이 내 기억에 남아 있다. 첫째는 송창근 박사님의 설교였다. 그는 서울의 장로회 조선신학교를 설립해 놓고 일본 경찰 당국의 미움을 산 일로 그 학교를 떠나서 김천 황금정교회에서 목회하고 계셨다. 하루는 그가 설교하면서 두루마기 소매를 걷어 올리고 주먹을 불끈 쥐면서 “일어서라”고 큰 소리로 외치는 바람에 학생들이 모두 깜짝 놀랐다. 그는 누가복음에 있는 탕자비유를 가지고 설교하면서 탕자가 멸망할 지경에야 일어서서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는 이야기를 하다가 그렇게 외쳤던 것이다. 그는 이때 우리에게 젊은 열혈 청년의 각성을 촉구하신 것이었다. 이 시절 일본은 만주를 침략하면서 내선일체(內鮮一體) 정책과 황국신민화 운동을 한창 벌일 때였다.


   이장식 교수에 의하면, 그 특별신앙강좌 이후 송창근 목사는 계성중학교 학생들 사이에서 “일어서라! 목사님”이란 별칭으로 불리면서 오래도록 화제가 되었다고 한다.
 

   광복과 조선신학교 교장 취임


   피고인들이 보석인 상태로 진행되고 있던 수양동우회 사건이 드디어 마지막 막을 내린 것은 1941년 7월 21일이었다. 그 날 고등법원 형사부의 최종심에 의하여 ‘피고인 전원 무죄’라는 판결이 내려졌다. 사건의 시작부터 조선총독부의 정치적 필요에 의한 고도의 정략에서 비롯되었고, 결말 역시 정략 차원에서 마무리된 것이다.


   제2심에서 ‘징역2년’을 선고 받았던 송창근 목사는 이때 다소 착각을 일으켰던 것 같다. 최종심에서 피고인 전원 무죄의 판결이 내려진 것을 두고 일본제국의 국가적 차원에서 실행된 간교한 정략적 쇼였다고 생각하는 대신, 오히려 일본제국의 사법제도에 대한 일말의 신뢰가 생겼던 것 같다. 그런 신뢰의 형적은 그가 이 시점에서 신학교 경영운동에 적극적으로 뛰어드는 것으로 나타났다.


   송창근은 수양동우회 사건이 마무리 되자 곧 조선인에 의한 신학교 건설 작업을 제대로 추진하려고 급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전에는 ‘보석 중인 피고인 신분’이라 해서 활동을 제지 당했지만 이제는 최종심의 무죄 판결로 인하여 그러한 핸디캡이 아주 사라진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자신이 진지한 성품을 갖고 있는 사람은 남도 그런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때의 송창근이 바로 그러했다.


   그는 제약이 심하고 억눌린 신학교육을 펼쳤던 외국 선교사들이 가고 없는 이 땅에 새로운 비전과 기상의 신학교육을 펼칠 제대로 된 신학교를 세우고 싶어서 조바심을 냈다. 그런데 학교 인가가 문제였다. 1940년 봄에 김대현 장로의 기부금으로 시작한 조선신학교는 끝내 ‘학교’로서의 설립 허가를 받지 못하고 기껏 1년 주기로 해마다 새로 허가를 받아야 하는 강습소로 허가를 받았다. 그래서 ‘학원’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어서 ‘조선신학원’이란 간판을 내걸고 승동교회 아래층을 빌려 문을 열고 있는 상태였다.


   학교가 아닌 1년짜리 강습소 허가를 가지고서는 제대로 된 신학교 교육을 하기 어렵다. 그러나 총독부 당국은 기독교에 관계된 것에는 일체 냉혹하게 굴었다. 더 이상 기독교 신학교육을 위한 신학교 허가를 내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송창근은 이미 ‘학교’로서의 인가를 받아가지고 있는 ‘신학교’로 눈을 돌렸다. 당시 서울에는 성결교에서 경영하는 경성신학교가 있었다. 그런데 선교사들이 떠나고 선교비 지원이 끊어지자 학교 문을 닫을 위기에 처한 결과, 새로운 경영자를 찾고 있는 중이라는 소식이 들렸다. 만나서 이야기를 해본 결과 성결교회의 중진들도 송창근 목사를 신학교 운영자로 모시고 새롭게 출발하는 것에 크게 찬성했다. 그는 경성신학교를 맡아서 이상적인 신학교육기관으로서 크게 육성하고 운영할 계획을 세웠다. 젊은 사업가 몇 사람이 헌신적으로 자금을 대기로 약속하고 나섰다.


   의욕에 부푼 송창근은 1941년 가을에 일단 ‘부목사’라는 칭호로 직제자인 정대위 목사를 김천 황금정교회에다 데려다 놓았다. 자신이 곧 서울에 가서 경성신학교 교장을 하게 될 것을 대비하여 자신의 빈 자리를 채울 목회자로 정대위 목사를 선택한 것이다.


   그러나 조선총독부가 어떠한 곳인가. 송창근이 교장으로 취임할 허가를 끝내 내주지 않았다. 결국 송창근은 ‘자유인’이 된 1941년이 저물어갈 무렵에 일제 당국의 본색을 확실하고 선명하게 알아보았다. 일제가 물러가기 전에는 송창근이 경영하는 신학교는 불가능한 꿈이었다. 그는 할 수 없이 계획을 포기했다. 그것은 정말로 영혼까지 아프게 하는 괴롭고 쓰라린 상처였다. 경성신학교는 결국 문을 닫았고, 학교 건물은 일제 경찰이 자기들의 교육기관으로 사용했다.


   송창근은 아픈 마음을 안고 다시 김천 황금정교회의 목회에 전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왕 온 것이고 또 그간 교세가 크게 확장되어 있었기에 역시 ‘부목사’는 필요했다. 정대위 목사는 부목사로 눌러앉아서 송창근 목사와 같이 황금정교회의 목회에 동역했다.


   좌절된 ‘신학교’에 대한 꿈으로 인한 쓰라린 상처를 제외하면 김천에서의 목회는 행복했다. 정말로 열심히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고 섬기는 복된 나날이었다. 송창근과 그의 제자들은 열심히 목회에 전념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 소화 천황의 ‘무조건 항복’으로 해방이 되었다. 김천에서 해방의 소식을 들은 송창근 목사는 그 날로 서울로 올라갔다고 한다.


  당시 조선신학원은 개교한 지 6년째였다. 그간 학원장이 세 차례나 바뀌었다. 1940년 4월에 제1대 학원장으로 취임한 김대현 장로가 9월에 별세하여, 제2대 학원장으로 윤인구 목사가 취임했다. 1943년에 윤인구 목사가 떠난 뒤에는 제3대 학원장으로 김재준 목사가 취임했다.


  그간 신학원은 자체 소유 건물이 없는 채로 이리저리 떠돌며 지냈다. 처음에는 승동교회 1층을 빌어서 교육을 시작했고, 정동의 일본인 교회의 건물을 빌어서 쓰기도 했으며, 덕수교회 건물을 빌어서 사용하기도 했다.


   해방과 더불어 즉각 조선신학원에도 획기적인 변화가 일었다. 우선 9월의 가을 학기 개강에 맞추어 교수진을 대폭 충원했고, 피난민 학생들이 많이 몰려들었다. 이사회에서는 신약과 목회신학 교수로 송창근, 영어와 실천신학 교수로 최윤관, 교회사 담당으로는 공덕귀를 전임강사로 발령했다.


   가을 학기 동안에 이사회에서는 다음 학기부터 신학원을 이끌고 갈 제4대 원장을 새로 뽑았다. 원장 후보는 제3대 원장인 김재준 목사와 송창근 목사 두 사람, 이사회에서 논의 끝에 투표에 부쳐서 송창근 목사가 제4대 원장으로 선출되었다.

 
   *조선신학교 교장 시절 송창근 목사(가운데) /사진제공=경건과신학연구소


   송창근은 1946년 3월부터 제4대 원장으로 근무하기 시작했다. 그는 원장으로 취임한 즉시 미군정의 문교부와 교섭하여 조선신학원을 학사, 석사, 박사의 학위를 줄 수 있는 정규대학과정의 교육기관으로 승격시키는 작업을 시작했다. 그리하여 이듬해 7월에 드디어 인가를 받아 내었다. 단지 다른 신학교와의 관계상 학교 이름은 ‘조선신학교’로 하는 조건이어다. 이로써 조선신학교 남한 유일의 대학과정 신학교가 되었다.


   1947년 7월에 대학과정인 ‘조선신학교’로서 문교부 인가가 나오자, 이사회에서는 즉시 조선신학교 제1대 교장으로 송창근을 선임했다. 이리하여 당시 전국의 신학교 중에서 최초로 학위를 줄 수 있는 대학과정의 신학교가 된 것이다. 그래서 10월에 대학인가를 기념하는 큰 잔치를 베풀었다.


   하지만 이때 조선신학교 경영은 대단히 어려웠다. 당시 이 신학교가 조선예수교장로회의 유일한 교단 신학교였다. 그리고 이제는 해방이 된 때이지만 미국 장로교 선교부로부터나 교단으로부터도 원조가 없었다. 다만 캐나다 연합 교회가 약간의 원조를 했을 뿐이었다. 교수진에는 송창근 박사를 비롯해 조직신학의 김재준 교수, 신약의 조선출 교수, 영어와 영신학 독습의 최윤관 교수, 실천신학의 한경직 교수, 그리고 교회사의 서고도(Scott) 교수들이 전임교수였다. 그리고 강사로서는 신약의 지동식 교수, 구약의 프레이저(Fraser) 캐나다 선교사, 종교학의 최거덕 목사, 기독교 교육의 로스(Ross) 캐나다 선교사 등이 있었다. 송창근 목사는 부족한 학교 운영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친지를 찾아가 도움을 청하기도 했다. 조향록 목사는 다음과 같이 그 모습을 술회했다.


   “초동교회 장로이던 정훈 장로가 함북 경원 분인데, 명동에서 큰 신식 약방 운영하고 있었다. 내가 그 곳에 자주 갔는데, 거기서 송 박사를 자주 만났다. 월급 때가 되면 신학교 운영자금을 마련하러 오신 것이었다. 약방에서 나가실 때문, ‘또 어디 가서 비럭질을 해야 하겠나’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그런가 하면 미군의 구제물품 담당자와 사적으로 교섭하여 새벽에 구제물품 창고에 가서 구제물품을 얻어다가 팔아서 신학교 운영자금으로 쓰기도 하고 직원들과 신학생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그 일이 조선출 목사의 글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천리교 재산을 접수하여 동자동에는 남자 조선신학교를, 영락동에는 여자 조선신학교를 경영하다가 다시 두 신학교를 합쳐서 조선신학교 남자부와 여자부가 되고 송창근 목사가 교장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통합 후에 송창근 교장의 명에 의하여 여자부가 있는 영락동에 이삿짐을 풀게 되었다. 와 보니 한경직 목사가 여자부 부장 겸 영락교회 목사로 계셨고 공덕귀 선생이 여자부 교수 겸 사감이었다. 나는 살기는 여자부에서 살았지만 주로 동자동에 가서 가르치는 일과 살림을 맡아, 말하자면 송창근 교장의 비서 노릇을 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나의 서울 생활이 자리를 잡게 된 셈이다.
 

             조선신학교 제1대 교장 취임식 /사진제공=경건과신학연구소


   그러나 그것은 문자 그대로 파란만장한 고생길이었다. 많은 고생 중에도 제일 이려운 것은 경제 문제였다. 명색이 학교인데 운영비가 있어야지, 학생들은 많이 모여들었지만 학비가 있어야지. 교수들의 생활비가 어디서 나오는지 나는 잘 모르지만, 내가 아는 바는 마침 어디서 화물자동차 하나를 구해가지고 미군 구제물품 창고에서 구제물품 보따리를 얻어 해결하곤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그 창고가 북창동 시경 자리였는데 그곳 총책임자가 천주교 신부였다. 송 목사님의 지시대로 전날 밤에 신부에게 닭 두어 마리를 갖다 주고 다음날 아침 만날 시간을 저하고 오는 것이었다. 나는 새파랗게 젊은 사람이니까 무관하였지만 그래도 명색이 교장이란 양반이 새벽 미명에 창고에 나와서 신부와 악수하는 것을 보면 참으로 눈시울이 뜨거운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런 일이 주로 새벽에 이뤄졌기 때문 그 고충을 아는 이는 거의 없다.


   이러한 경제적 고충 속에서도 조선신학교는 점점 체계가 잡혀가면서 빠르게 발전하고 있었다.
 

    조선신학교 운영과 성바울교회 목회


   해방 이후에 조선신학교에 사방에서 학생들이 밀려 왔다. 송창근은 물 만난 물고기처럼 신학교육의 현장을 사랑하고 교육에 힘을 쏟았다. 송창근이 담당한 과목은 목회신학이었다. 그는 경험에서 우러나온 살아 있는 강의를 했다. 당시 조선신학교에는 우수한 학생들이 많이 몰려들었다. 강원용, 장준하, 문익환, 문동환, 이우정 등이 모두 이때 조선신학교에 들어와서 교육받던 학생들이다.


   그런 학생들 중에서 송창근 교장과 강원용(1917~2006) 학생의 관계는 매우 특별했다. 강원용은 학생이면서 이미 사회적으로 유명했던 저명인사였다. ‘1백년 만에 하나 나오는 연설가’라는 평이 있을 정도로 뛰어난 대중연설가였던 그는 해방 정국에서 전국 각지로 다니면서 정치 연설을 했다. 그러나 송창근은 강원용이 소위 ‘정계의 3영수(이승만, 김구, 김규식)’ 등 정치계 인사들과 가까이 지내고 그들을 위해 연설을 하고 다니는 일을 끔찍하게 싫어했다.


   정동감리교회에서 전국 기독청년대회가 열렸을 때 송창근은 강사로 와서는 4천 명 청중 앞에서 사회자인 강원용을 가리키며 “여러분, 그리스도를 주로 믿는 기독 청년들은 오늘 반기독교주의자들을 몰아내야 해요. 반기독교주의자가 무언지 아시오? 내가 말하는 반기독교주의자는 ‘반기독교(反基督敎)’가 아니라 ‘반기독교(半基督敎)’인데, 예를 들면 오늘 저녁 사회를 보는 강원용 같은 사람이 전형적인 반기독교주의자요, 반은 기독교운동하고 반은 정치운동하는 사람 말이요.”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강원용 목사가 기억하는 ‘교수로서의 송창근’은 매우 인상적이다. 송창근은 자기관리를 어찌나 철저하게 하는지 극도의 정통 보수파 인사들에게도 책잡힐 일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그가 보니, 송창근은 불필요한 갈등이 일어나는 것을 사전에 차단하는 데 신경을 크게 쓰더라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목사고시에 대비하여 학생들에게 예수교 장로회의 ‘교리문답’을 외우게 하는 준비를 시킬 때도 그러했다. “문 : 사람의 사는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이나뇨? 답 :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오.”라고 되어 있는 교리 문답을 어미까지 본문 꼭 그대로 외우게 했다는 것이다.
 

        1946년 (48세). 조선신학교 신입생 환영 야외예배에서 

학생들과 함께(10월 18일 동구릉).

          /사진제공=경건과신학연구소


   강원용 목사가 특히 인상적으로 기억하는 것은 송창근 목사의 대여성관계였다. 송 목사는 매우 잘 생긴 헌칠한 미남으로서 남성만이 아니라 여성들에게도 정말 인기가 많았다. 주위에는 늘 내로라 하는 잘난 여성들이 많았다. 그런데도 자기 관리를 어찌나 철저하게 했는지 스캔들이 일체 없었다. 송 목사는 스캔들이 일어날 소지 자체를 아예 차단하기 위해서 가까이 있는 여성들에게 모두 자신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했다. 그래서 나이가 몇 살 차이가 나지 않는 여성까지도 송 목사를 “아버지”라고 불렀다. 일단 “아버지”라고 부르는 이상, 남녀의 관계로 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는 것이다.


   송창근은 조선신학원에서 교수로서 강의를 하는 한편 목사로서 ‘성바울 전도교회’에서의 목회에도 큰 정열을 기울였다. 1945년 12월 2일 주일에 동자동 천리교 조선본부 자리에서 18명이 모여서 예배를 드림으로써 문을 연 ‘성 바울 전도교회’는 빠르게 발전하여 이내 2년 안에 7백 명 교인이 모이는 대교회로 발전했다. 교인들은 송창근 목사의 설교에 반하고 예배의식에 반해서 모여들었다. 그런 사례 중 하나로 작곡가 나운영 교수와 그 부인인 메조 소프라노 유경손 장로가 1946년에 ‘성바울 전도교회’에 나오게 된 일을 들 수 있다. 유경손 장로의 자서전에서 당시 일을 살펴본다.


   우리는 주일마다 애기를 업고 청파동에서 걸어서 덕수교회를 다녔다. 어느 주일날 동자동 길을 걷고 있는 길가에 바울교회라는 교회 간판이 보였다. 그날은 좀 늦기도 했고 덕수교회에서 책임을 맡고 있는 것도 없고 하여 그 교회로 들어가 예배를 드렸다.


   건물은 일제 때 천리교가 사용하던 낡은 건물이었고 의자는 간이의자로 소위 호떡의자였다. 하지만 예배를 끝내고 나온 우리는 완전히 황홀지경이었다. 교인들의 자리 배치는 앞에서부터 차례로 가족이 같이 앉았고 찬송을 부를 때는 온 교인이 화음을 넣어 불러서 무슨 합창단의 합창 연주 같았다. 그런 가운데서도 제일 우리를 사로 잡은 것은 목사님의 설교였다. 그 목사님은 유명하신 송창근 목사님이셨다. 우리는 그때부터 성남교회를 다니기로 했다.


   ‘성바울 전도교회’에는 신학생들도 많이 나왔다. 그래서 신학생들에게는 목회실습을 하는 현장으로서의 기능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성바울 전도교회’라는 이름으로 1년쯤 지난 뒤에 노회에서 특이한 이름은 오해를 부를 소지가 있다고 이의를 제기함에 따라 교회 이름을 ‘성남교회’로 바꾸었다.


    김재준의 제명과 장로교의 분열


   1947년 봄부터 송창근 목사에게 ‘신학생 51명의 진정서 사건’이라는 고통이 닥처왔다.


   이 사건은 신학생 51명이 김재준 교수와 송창근 교수 및 정대위 교수의 강의 내용에 불만을 품고 그에 항의하는 진정서를 1947년 4월 18일에 대구에서 열린 제33회 총회에 제출함으로써 일어났다. 그들은 주로 평양신학교에 다니다가 해방 뒤에 월남한 신학생들이었는데, 세 명의 교수들 강의 내용에서 문제를 잡아 가지고 “조선신학교에서 정통신학이 아닌 자유주의 신학을 강의한다.”는 내용의 진정서를 작성하여 제출한 것이다.


   송창근 교수에 대한 혐의점은 ‘신약공관복음 자료 문제’에 관한 다음과 같은 네 가지 발언이었다. ①공관복음서 중에는 마가복음이 제일 먼저 된 것인 바 이 복음은 로기아에 의해 쓰인 것. ②마태복음 기사의 4분의 3은 추상이고 4분의 1은 마가복음과 타 자료에서 취했다는 것. ③복음서 기자의 인격적 영감설을 설명함에 있어서, 성경은 금광과 같아서 그 중에는 금도 있고 돌도 있는데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금뿐 이라고. <그러나 우리는 성경 전체를 금으로 본다> ④’성서신학이란 것은 성경의 종교적 생명을 그 시대에 합당한 방법을 찾아 해석 설명하는 것이요, 그래서 성서를 역사적 과학적 방법으로 연구함으로 가장 합리적인 연구 결과를 찾아내고자 함’이라고 함.


   그 외에 “과거 평양신학교는 학생들을 무지케 하여 지도코자 하는 노예교육이라 공격했다.”는 것이 하나 더 추가되었다.


   정대위 교수에 대한 혐의점은 하나였다. 학생들 앞에서 “자기는 이때까지 그리스도의 속죄론에 대하여 이해치 못하였다. 하나님과 자기 사이에 예수라는 존재가 없다면 문제는 단순한데 예수가 끼어 있어서 이해치 못하다가 지난 수난주간에 한경직 목사의 이사야 53장 설교 시에 처음으로 바늘구멍만치 이해하였다”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김재준 교수의 경우는 달랐다. 학생들의 근본 타깃은 김재준 교수였다. 김재준 교수의 구약 강의는 고등비평학을 수용한 것으로서 학생들의 진정서에 기재된 조목도 24개나 되었고 분량도 매우 많았다. “모세 5경을 모세가 쓰지 않았다고 하고, 노아 홍수설에 대한 역사성을 부인하고, 이사야 40장에서 66장까지는 저자 불명 운운했다” 등으로 이어지는 고발이었다.


   그래서 총회에서는 1947년 5월에 조사위원회를 구성하여 문제가 된 세 교수를 직접 조사해 보기로 했다. 그 사건은 단순한 성서관이나 교리의 문제뿐만 아니라 교회정치와 교권 문제까지 두루 얽혀 있는 사건으로 발전했다.


   정대위 교수는 이 사건을 당하면서 굉장한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그가 이야기하는 당시의 사건은 다음과 같다.


   나는 그 당시 학부에서 고급 그리스어를 가르치고 있었는데, 문제가 된 바로 그 얘기는 그 클라스에서 한 이야기의 내용을 전혀 무시하고 말끝을 잡아 왜곡시킨 것이었다.


   나는 너무도 억울해서 기막힌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 고발 문제에 대해서 총회는 하나의 조사위원을 구성하여 신학교로 보내왔다. 이 기회에 나는 내가 말한 것으로 되어 있는 문제의 발언을 해명할 수 있어야 할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우 선생은 나에게 그런 기회를 주지 않으셨다. “장공 선생이 너무도 문제가 될 수 있는 구약학설을 자꾸 발표하셔서 이런 문제가 된 것이니 총회의 조사위원들이 나오는 경우엔 함구하여 임자랑 아무말도 하지말라”는 것이었다. 나는 정말 그대로 복종하고야 말았다. 그러지 않으면 문제는 더 악화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 일이 있은 다음엔 만우 선생의 함구령에도 물론 유감스런 것을 느꼈지만 또한 그 정도의 이야기가 그토록 왜곡되는 신학교에서 나는 떠나야겠다고 거의 감정적인 결심을 하였던 것이다.


   당시 장로교 총회가 보낸 조사위원회의 위원 중 한 사람이었던 문재린 목사는 다음과 같은 증언을 남겼다.


   1940년 김대현, 송창근, 김재준 등 뜻있는 기독교인들이 조선교회를 이끌어 갈 목회자를 자주적으로 키우려고 조선신학교를 설립했다. 이 학교에 외국에서 교육받은 신학자들이 교수로 들어와 성서의 새로운 해석을 강의하니, 이제껏 선교사들이 전해 준 정통 보수 신학만을 믿어 온 이들 중에서는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다.


   1947년, 평양신학교 졸업생들을 포함해 조선신학교 재학생 50여 명이 이른바 ‘이단’ 교수들을 쫓아낼 것을 요구했다. 문제가 된 교수들은 이 학교의 핵심인 김재준, 송창근, 정대위 교수였다. 그러자 장로교총회와 학교에서 공동으로 조사위원회를 구성했고, 나도 이 학교 이사였기에 조사위원회에 참여하게 되었다. 조사위원은 함태영, 계일성, 김원일, 이장익, 문재린 등 한국인 6명과 미국북장로교 선교사, 남장로교 선교사 한 명씩 해서 모두 8명이었다.


   송창근 교수의 발언 중 문제가 된 것은 4복음서 중에서 마가복음이 제일 먼저 쓰였다고 했다는 것이었다. 성경을 문자 그대로 믿는 사람들은 신약에 수록된 순서대로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 차례로 기록되었다고 믿었던 것이다. 송창근을 불러 어느 복음서가 제일 먼저 쓰였느냐고 물으니 “마태복음”이라고 대답하고 나가 버렸다. 그는 정치를 잘 아는 사람이라 이런 일로 말썽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 기억은 안 나지만 정대위 교수도 정말 말도 안 되는 것으로 문제가 되었다. 그도 요령껏 대답하고 빠져 나갔다.


   그런데 김재준 교수는 논문을 복사해 와서 나누어 주고는, 성서의 내용이 역사적으로 전부 사실은 아니라고 말했다 해서 정죄한다면 갈릴레오의 지동설을 문제 삼은 중세 기독교와 같은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라고 강변했다. 나는 그래도 일을 원만히 해결하고 싶어서 김 목사에게, 성경의 내용에 글자 그대로는 역사적 사실이 아닌 것이 있으나, 그 본뜻에서 성경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래서 내가 위원들에게 김 목사가 성경이 잘못됐다고 하지 않았잖느냐고 하니, 그들은 문 목사가 질문을 교묘하게 해서 그렇다고 반박했다.


   한국인 조사위원들의 의견은 3대 3으로 갈렸다. 그래서다음날 일찍 이장익 조사위원을 설득하러 찾아갔더니 계일성 조사위원과 같이 있기에 두 사람에게 이야기했다. 이 신학교는 총회의 신학교이고, 그 교수들은 학교를 설립한 당사자들이며 학장이다. 그런데 그 교수들이 나가겠느냐. 안 나가면 총회에서는 신학교를 따로 세워야 하고 총회가 갈라질 텐데, 그러지 말고 당신들도 나도 학교에 들어가서 직접 강의하면서 그들을 잘 지켜보고, 정말 문제가 있으면 그때에 쫓아내자고 설득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선교사들은 내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교수들이 신신학이라는 말만 듣고 그들 편이 되어, 투표 결과가 3대 5로 교수들을 내보내는 것으로 결정이 났다. 학교 이사회에 보고했더니 위원회 결정을 따르겠다고 하기에, 내가 일어나 자초지정을 설명하니 그럼 안 되겠다고 하고, 총회에 위원회 결정을 따르지 않기로 했다고 통보했다.


   그러나 1953년 대구에서 열린 38회 총회에서 김재준 목사와 캐나다 선교사 서고도 목사가 제명되었다. 그리고 김재준을 따르는 사람은 모두 제명하기로 결정함으로써 장로교는 둘로 갈라지게 되었다. 김재준의 신학은 해외의 보수적인 교단에서도 인정되는 것인데도 선교사들에게 보수적인 신학만을 배워 온 한국 교단은 수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송창근 목사는 그 사건을 무마하기 위해서 갖은 노력을 다했다. 다음 해인 1948년 4월 20일에 새문안 교회에서 열렸던 제34회 총회에서 김재준이 제명될 위기에 처하자, 그것을 막으려고 그가 강원용에게 “청년들을 동원하여 막으라”고 지시했던 일은 유명하다. 강원용 목사의 글에 그 전말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새문안 교회에서 예수교 장로회 총회가 열리고 김재준 교수의 추방안이 한창 토의되던 때다. 그때 나는 한국신학대학 학생회 회장이었다. 어느날 밤에 그는 나를 그의 방에 불렀다. “너희 청녇들이 그게 무슨 꼴이냐. 그래 그 못된 늙은이들이 죄 없는 김 교수를 간교한 방법으로 추방하는데 그저 보고만 있어?”하기에 “알겠습니다. 생각해 보고 행동하겠습니다.”하고 나와서 학생회 임원들과 의논하여 다음 날 학생 200여 명을 새문안 교회에 동원시켰다. 김 교수의 이단설에 대해 그에게서 직접 배우고 있는 학생회 대표에게 언권을 달라는 언권 청원서를 정식 청년부를 통해 제출했다. 그러나 총회는 이 언권 청원에 대해 회중에 물어보지도 않고 묵살한 채 김 교수의 추방을 결의하려 했다. 결국 언권을 달라고 소리를 지른 것이 도화선이 되어 총회는 결의를 못한 채 수라장이 되었다. 나는 송 목사님이 속으로 칭찬하려니 생각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그가 매우 흥분해서 야단야단하더니 결국 이사회 압력으로 내게 무기정학을 선고했다. 몹시 화가 나서 그를 찾아가서 항의조로 이야기 했더니 “야, 이 어리석은 녀석아, 내가 청년들이 왜 가만히 있느냐고 했지 학생들이라고 하더냐? 네가 기독청년연합회 간부니 청녇들이 무엇 좀 하라고 한 것인데, 우리 학생들을 동원시키면 도대체 어떻게 한단 말이냐?”하는 것이었다.


   송창근 그처럼 갖가지 방법을 동원하여 무마하고 있던 동안에는 사건 자체가 그대로 가라앉을 전망이었다. 그러나 그가 6.25로 납북된 뒤에 알력과 갈등이 계속해서 확대 재생산을 거듭한 결과 1953년에 결국 장로교단이 둘로 나뉘는 대분열로 끝이 났다. 그 와중에서 양편 모두 큰 상처를 입었다.


   지금은 당시 원수처럼 격렬하게 싸우면서 분열된 상대편인 예장(예수교 장로회) 측의 신학대학들에서도 성서신학을 이른바 ‘고등비평학’을 수용하여 가르치고 있다. 송창근의 예상대로 된 것이다. 그런 걸 생각하면, 당시 송창근이 말했다는 “아직은 때가 아닌데, 시간이 좀 지나면 저절로 다 해결되는 것을 가지고 미리 그럴 필요가 없는데”라는 한탄이 새삼 절실하게 마음에 와 닿는다. 신학생들에게 좀더 시간을 주었으면 고등비평학을 수용할 수 있게 되었을 텐데, 평양신학교에서 보수 일변도의 교육만 받던 ‘어린아기 같은’ 신학생들에게 대뜸 ‘젖’이 아니라 ‘단단한 음식’을 먹이려고 했던 것이 당시 김재준 교수의 방식이었던 것이다. 

 

   친일 시비와 납북


   ‘진정서 사건’ 이후에 있었던 일이 ‘송창근의 친일 시비’였다.


   그가 일제 말기에 강연을 다녔던 일 때문에 ‘출옥 성도 모임’에서 그의 이름을 ‘친일파’ 명단에 넣었다는 이야기가 들려 왔다. 출옥 성도 모임이라 함은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투옥되었다가 해방을 맞아서 출옥한 교인들을 말했다. 그들은 대단한 기세로 일제시대 기독교인들의 행태를 논죄하고 정죄하였고, ‘친일파 명단’이란 것을 작성하여 발표했다. 그런데, 송창근의 이름도 그 ‘친일파 명단’ 안에 들어 있다는 것이었다.


   일제 말엽에 송창근은 조선총독부 당국자의 강연 요구를 소화하면서도 실제로는 그들의 요구에 따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강연을 하기는 하면서도 그 내용은 총독부 당국자들의 청중들에게 해주기를 원하는 이야기 대신에 웃기는 만담 같은 이야기로 채웠었다. 그런데 그처럼 섬세하게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 행위에 의해서 해방된 내 나라에서 ‘친일’ 시비에 걸린 것이다.


   송창근 목사는 매우 큰 충격을 받았다. 마음이 크게 상했다. 조그마한 거리낌이라도 있는 것을 못 견뎌 하는 맑은 성품 때문에, 그는 계속 마음이 상해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 속상함은 고혈압을 불러왔고, 그는 계속 머리가 아파서 ‘노싱’이란 두통약을 줄곧 복용하게 되었다.


   강원용 목사의 이야기에 따르면, 일제시대에 정말로 친일 했던 목사들은 그 명단에 들어 있어도 전혀 아무렇지도 않아 하더라는 거였다. 그런데 실제로는 친일을 하지도 않은 송 목사가 그 명단에 들었다 해서 하도 속상해 하기에 “뭐, 그런 걸 가지고 그렇게 마음 상해 하십니까”라고 말리면 “아니다.”라고 하면서도 계속 마음 상해 하더라는 거였다.


   한번 의기가 꺾이자 두통이 날로 더욱 심해졌다. 더군다나 1948년에는 “’반민특위’라는 것이 조직되어서 친일 인사들을 체포하여 재판한다.”는 소식이 전해지더니 1948년 10월 23일에 ‘반민족행위 처벌법’이 국회에서 통과되었다. 그렇게 하여 조직된 반민 특위는 1949년 1월 5일부터 업무를 시작했다. 박흥식, 이광수, 최남선 등의 인사들이 속속 체포되어 조사를 받기 시작했다.


   송창근은 ‘출옥 성도 모임’에 의해서 “친일을 했다.”고 지적당한 뒤로는 자신감을 잃었다. 그래서 반민 특위에서 아무런 연락이 없었지만 스스로 위촉되어 스스로 고통을 겪었다.


   그런 상황에서 마침 밥 존스 대학에서 초청장을 보냈다. “1년 동안 머물면서 공부하라.”는 초청장이었다. 송창근은 미국에 가서 조선신학교를 위한 기금도 모을 겸 떠나기로 결심했다. 여권 수속이 끝나 그가 미국으로 떠난 것은 1949년 2월이었다.

 

           1949년 2월 도미할 때 여의도 비행장에서. 

왼쪽부터 김재준 목사, 최순복 집사, 송창근

           목사, 유재기 목사, 장남 송윤규 의사. 

사진제공=경건과신학연구소


   밥 존스 대학은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의 그린빌에 있는 대학이었다. 대학 측은 신학교 교장의 대우로서 귀빈으로 모셨다. 거기서 때로 강의도 듣고 때로는 다른 곳에 산재해 있는 제자들도 찾아보면서 지냈다. 이때 대학 부속병원에서 진찰해 보니 심한 고혈압 증세였다.


   당시 그의 미국생활 중에서 특기할 것은 피츠버그에 있는 웨스턴 신학교의 졸업식 행사에 참석한 일었다. 마침 그 해에는 웨스턴 신학교의 ‘1930년 클라스’가 전체 동창회의 초청 대사이었기에 그도 초청 받은 것이다.


   웨스턴 신학교 졸업식과 졸업생 재상봉 행사에서 그는 특별 대우를 받았다. 신학교 교장이라 해서 헤드 테이블에 않게 하고 연설도 하게 했다. 그는 연설에서 한국과 조선신학교의 현황을 설명하고 도서관에 비치할 서적이 필요함도 말했다. 연설이 끝나자 모두들 기립박수를 했다고 한다. 미국 각지에서 큰 교회를 맡아 목회를 하고 있는 동창들은 조선신학교를 위하여 특별헌금과 서적 모으기를 할 것을 결의했고, 송창근이 자신들의 교회를 순방해 주도록 서둘러 일정까지 짰다.


   그처럼 일이 일사천리로 은혜롭게 진척되는 것에 크게 고무된 송창근은 기쁜 마음으로 일단 밥 죤스 대학으로 돌아가서 여행준비를 하기로 했다. 그리고 순회여행을 떠날 준비를 다 마치고 차표까지 사놓았는데, 뜻밖에도 뇌일혈로 수족마비를 일으켜서 쓰러졌다. 몸을 움직일 수 없고 입도 돌아가서 말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1949년 5월 31일의 일이었다.


   그래서 모든 계획과 일정이 취소되어다. 그는 입원하여 치료를 받고 겨우 조금씩 움직일 수가 있고 어눌하게나마 말도 하게 되지 하와이로 옮겨가서 휴양했다. 하와이에 있는 김태묵 목사가 자택에 모시고 지내면서 지성껏 간호했다고 한다.


   그는 어느 정도 움직이게 되자 귀국했다. 1년 1개월 만의 귀향이었다. 그런 상태에서도 조선신학교를 위한 기증품들을 받아 모아서, 송 박사가 하와이를 떠날 때는 그간 신학교를 위하여 모아진 짐이 거의 조그만 화물선 한 배를 채웠다고 한다. 그는 그 짐을 실은 화물선에 올라서 하와이를 떠났다고 한다.


   그가 서울에 도착한 때는 1950년 3월 14일이었다. 조선신학교에서는 귀국 환영회가 열렸다. 그는 지팡이를 짚고 학생들과 교수들 앞에 나와서 연설을 했다. 그 유명한 ‘소’와 ‘무덤’ 이야기가 나온 연설이었다.


   여러분, 나는 빈 손으로 갔다가 빈 손으로 돌아왔소이다. 그러나 일 년 동안 미국에서 병을 얻어 누어있으면서도 열심히 기도하고 염려한 것이 우리 신학교 일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소가 되자고 말하고 싶습니다. 평생토록 열심히 일하고 죽어서도 고기요 가죽이요 뼈요 할 것 없이 하나도 버릴 것 없이 모든 것을 다 바치는 소야말로 우리의 숭엄한 선생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도 소와 같은 심정으로 이 신학교를 위하여 마지막 하나까지 바치는 정성을 가지렵니다. 내 생명을 건지시어 다시 고국에 돌아오게 하신 하나님의 뜻도 그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여러분께 부탁 드리고저 합니다. 이담에 내가 죽거든 신학교 정문 밑에 묻어 주십시오. 그래서 여러 신학생들이 내 몸을 밟고 드나들게 되면 나의 기쁨이 되겠습니다. ‘남산’ 위의 개가 아무리 달을 보고 짖은들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우리는 우리가 옳다고 믿고 따르는 길을 꾸준히 걸을 따름입니다.


   학생들은 물을 끼얹은 듯한 숙연한 자세로 그의 귀국 후의 첫 소리를 들었다.


   이때 그가 말한 “내가 죽거든 신학교 정문 밑에 묻어 달라.”는 말은 그의 비극적 죽음과 더불어 유명한 말이 되었다. 일찍이 스코틀란드의 종교개혁가 존 녹스도 같은 말을 했다고 하는데, 이장식 교수는 그 말 뜻을 다음과 같이 풀이했다.


   “신학생들로 하여금 ‘자신의 존재와 그 의의와 열정과 투지를 기억하라’는 뜻이라고 생각한다.”


   그로부터 석 달 뒤에 6.25가 발발했고, 송창근 교장은 납북되어 생사를 모르게 되었다. 서울이 수복된 뒤에 돌아온 교수들과 학생들은 돌아오지 않는 송창근 교장과 그의 유언과도 같았던 그 말을 생각하고 몹시 슬퍼했다고 한다.
 

   송창근의 사상과 유산


   송창근의 삶과 사상을 일관한 것은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사랑’이었다. 그는 그것을 향하여 항사 자신의 전부를 열어놓고 살아간 사람이었다. 그의 사상의 외피는 다양하면서도 그 내용은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사랑이라는 점에서 하나로 일관되어 있었다.


   주재용 교수는 그의 사상의 다양함을 

1. 성빈사상 

2. 말씀의 신학 

3. 기독교 윤리신학 

4. 민중신학 

5. 민족교회의 신학

 6. 실천적 목회신학으로 정리했다.


   그는 ‘감격’의 사람이었다. ‘감격’은 그의 삶의 근본 토대였다. 그래서 찬송가를 불러도 열정적으로 힘 있게 불렀다고 한다. 이장식 교수의 회고록에 ‘찬송가를 부르는 송창근의 모습이 들어 있다.


   나는 성바울교회에서와 신학교 예배실에서 송창근 박사님의 찬송 부르시는 모습을 눈 여겨 보았다. 그는 찬송가 책을 한 손에 높게 드시고 힘차게 그리고 큰 목소리로 부르셨다. 그는 감격을 가지신 분이었다. 그가 해방 전에 <청년>지에 감격을 강조하는 글을 쓰신 것을 나는 훗날 언젠가 읽은 적이 있다. 그는 젊었을 때 열혈 청년이었다. 그가 계성중학교의 신앙수양회에 오셔서 젊은 학생들 앞에서 열정적이고 고무적인 설교를 하셨던 것을 나는 기억한다. 그는 청년들을 끄는 매력을 가지신 분으로 감격이 없는 신앙은 죽은 신앙이라고 말씀하셨다. 그의 본을 받은 신학생들이 학교 예배시간에 찬송을 힘 있게 그리고 화음을 맞춰서 크게 부르곤 했는데, 외국인 손님들 역시 크게 감명 받은 일이 많았다.


   찬송을 부르는 모습이야말로 기독교인들이 지닌 신앙의 참된 열정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바로미터에 해당한다. 송창근 목사가 찬송을 부를 때 “찬송가 책을 한 손에 높게 드시고 힘차게 그리고 큰 목소리로 부르셨다.”라는 것은 그의 감격이 늘 살아 움직이는 것이었음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그는 삶의 아름다움을 즐기는 탐미주의자이기도 했다. 그는 설교 시간에 자주 “죽은 개의 이빨에도 아름다움이 있다.”고 말하고는 했다. 그는 또한 ‘사람’을 키우는 일에 특별히 마음과 정성을 쏟은 사람이었다. 그러한 그의 소신과 생각을 잘 드러낸 글 한 편이 <신학지남>에 실려 있다. 그가 평양 산정현 교회에서 목회하면서 <신학지남>에 자주 기고하던 때 쓴 것으로 추정되는 글이다.


   전당건축(殿堂建築)에서 인간건축(人間建築)에


   "사도 베드로가 그리스도의 품위에 대하여 정당한 이해를 가진 때 주께서는 베드로에게 ‘반석’의 칭호를 주시고 다시 그 ‘반석’ 위에 당신의 교회를 건축하기로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면 교회 건설의 기초는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에 대한 정당한 이해를 가진 ‘인격’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옛사람도 ‘백년지계(百年之計)는 재어수인(在於樹人)’이라고 했으니 인물 기르는 것이 건설의 기초원리임을 알 것입니다.


   그런데 50년래의 조선교회는 과연 ‘반석’ 같이 흔들리지 않는 인물을 양성하기에 얼마나한 계획과 노력을 하여 왔습니까? 선배들의 노력이 크기는 하지마는 지금껏 주 안에서 참으로 위대한 인물을 가지지 못한 것은 아직도 조선교회가 그 터전이 다져지지 않은 것을 의미함이 아닙니까?


   예배당 짓는 정성은 상당합니다. 그러나 인물 짓는 정성은 거의 없다 하여도 과언이 아닙니다. 유위한 청년남녀 중 조금만 성의 있게 붙들어주고 도와주면 주 안에서 큰일을 맡아 할 수 있을 것을 짐작하면서도 다들 보는 체 안하고 아는 체 안하므로 마침내는 곁길로 나아가 타락의 구렁텅이에 떨어져 민멸해지고 마는 참극을 얼마나 많이 보고 있습니까? 인물을 아낄 줄 모르고 인물을 감사할 줄 모르고 인물이 지극한 보배인 줄 모르는 교회가 어찌 주 앞에서 축복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교회의 기초는 돈이 아니오 규칙이 아니오 오직 바른 믿음 가진 ‘인격’에 있는 것을 생각하여 전당건축에서 인물건축에 새로운 계획과 노력을 아끼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위와 같은 말을 송창근은 그냥 하지 않았다. 자신의 전부를 걸고 자신의 전부를 쏟아서 말했다. 그는 실로 평생토록 ‘주 안에서 제대로 된 사람을 제대로 기르는 일’에 헌신했다. 그는 또한 하나님의 나라를 지상에 이루는 길은 곧 제대로 된 신학교육에서 비롯된다고 보았기 때문에, 그는 신학교를 세우고 경영하는 일에 자신을 모두 바쳤던 것이다.

 

   

조선신학교 교장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던 때 어느 야유회 날에. 가운데 

앉은 사람이 송창근 목사. /사진제공=경건과신학연구소


   오늘날, 송창근에 대한 재조명의 요구가 새롭게 머리를 들고 있다. 그가 남긴 유산과 그가 제시한 길이 새삼 선명하게 우리의 나아갈 바를 지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강원용 목사는 송창근이 보여주었던 ‘새로운 목회자상’에 주목한다. “인간 중심의 신학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한 모든 피조물, 그것은 동물, 식물뿐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새, 저 푸른 하늘에 지나가는 달아, 별들아! 그렇게 노래 부르는 바로 그것이 송 목사님의 사고였다”면서, 오늘의 생태계, 에콜로지가 21세기에는 아주 중심적인 문제인데 이것이 이 송 목사님의 사상 속에 뚜렷하게 있다”고 지적했다.


   그런가 하면, 교회사학자 민경배 교수는 송창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송창근은 한국교회가 그 역사 50년에 정치적으로 얽힌 일제 하의 시련기에서 그 노도를 헤치고 나아갈 방향을 지시하였던 신학자로 그 기치가 드높은 인물이다. 그가 왕성하게 활동하였던 1930-1940년대는 선교사들의 언필칭 토착성을 구조적으로 강행하려고 하였던 때였고, 그 과정에서 신앙유형 간의 갈등이 노출되어 한국교회에 일대 지각변동의 회오리가 몰아치던 때였다.


   그런 난시에 역사를 꿰뚫어 보고 비록 대세의 적조가 있었으나 고독과 소외를 마다하고 시대적 소명감이라 확신한 일에 맹진하여 한국교회의 정로를 멀리 지시하다가 간 시대의 예언자, 그가 바로 송창근이었다.”


   12살의 나이에 공부하기 위해서 생애 최초의 가출을 감행한 이래, 송창근은 늘 벽과 맞서 싸웠다. 그가 자주 토로했다는 말처럼, ‘벽도 문이라고 믿고 밀고 나가면 문이 된다.’는 것은 그의 삶의 체험에서 울어난 지혜였다. 그는 평생 수많은 벽을 만났고 그 별들을 하나하나 밀고 나가 문으로 만들어 통과하면서 자신의 삶을 보다 완전한 형태로 끌어올렸다.


   북간도와 서울과 일본과 미국에서 받은 여러 가지 형태의 교육을 토대로 자신을 완성해간 그는 평양 산정현교회의 목회, 부산에서의 도시 빈민 선교, 김천 황금정교회에서의 목회, 그리고 조선신학교에서의 신학교육을 통해서 세상을 변화시켜서 보다 하나님의 나라에 가까운 곳으로 만들려고 노력했다. 그에게 ‘미래’는 이미 닥쳐온 현실 안에 잇는 그 무엇이었다. 그는 그 현실을 보다 나은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혼신의 힘을 다했다.


   그는 사람들에게 여러 형태의 인상을 남겨주었다. ‘유머에 능했고, 인정다웠고, 창의적이었고, 용감했고, 민족애에 불타는 애국자’(김재준), ‘총명 위에 다독하고 다정한 위에 결벽한 사람’(김인서), ‘경건, 학문, 선교의 신학교육 이념을 정립하신 이’(김정준), ‘교계인사 중 가장 멋있고, 사랑스럽고, 존경하는 분’(강원용), ‘불이면서 물이신 분’(박한진), ‘신학이론이 아니라 신학의 실상, 한국교회의 실상을 가르쳐주신 이’(김영수) 등등 그에 대한 회상의 대역은 매우 넓다.


   그의 인간적인 측면에 주목한 김경재 교수는 “만우의 언행과 그의 탁월한 영적 지도력은 그가 가지고 태어난 개인 심리적 유형과 능력, 그리고 그가 후천적으로 연구하고 노력하여 습득한 자질에 힘입은 바가 적지 않을 것이다. 그의 다정다감한 미학적 감성능력, 그의 인간을 사랑하는 휴머니즘적 기질, 그의 인간관계에서 갖는 포용력과 판단력, 사물과 사건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통찰력, 특히 교육과정에서 엄격한 부성적 측면과 인애하는 모성적 측면의 절묘한 조화, 인간집단체의 조직력과 그 운용능력 등등 실로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한 능력을 스스로 함양하고 발휘하여 한국 개신교사에서 드물게 보는 큰 인물로서 모든 사람의 존경을 받는다는 것이 당연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돌아보면 그가 품었던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크기와 인간의 삶에 대해 지녔던 뜨거운 이해와 가없는 포용력의 크기가 현기증일 일게 한다. 그가 평생에 걸쳐 씨름했던 명제는 ‘하나님’과 ‘하나님 앞에 선 인간’이었다. 그래서 그는 ‘인간 건축’을 부르짖었다. 그는 “교회의 기초는 돈이 아니오 규칙이 아니오 오직 바른 믿음 가진 ‘인격’”이라고 선포하고, 한국 교회로 하여금 그러한 성취를 이루도록 하기 위하여 자신의 전부를 바쳤다.


   그는 가고, 이제 우리 앞에는 그가 걸어간 길이 남았다. 그 길을 어찌할 것인가. 그것이 지금 우리 앞에 놓인 과제요 현안이다. (2009. 5. 26. 베리타스)

   자료제공: 경건과신학연구소(소장 주재용 교수)
 

[오소운 목사의 추억]


1950년 필자가 조선신학교 재학 시절, 교장이시던 송창근 목사님은 제자들에게 늘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장차 목사가 될 사람들이다. 영어로 「목사(moxa)」는 쑥이다. 쑥이 될 바에는 독 쑥이 되지 말고 약쑥이 되어라.”

어느 날 교정에서 송 목사님을 만났다. “오 군, 공부 할 만 한가?” 느닷없이 내 성을 부르는 교장 님이 고마웠다. 그 분은 신입생이 입학하면 만날 적마다 “자네 이름이 뭐지?”하고 물어 한 달 안에 학생들 이름을 다 외우시는 분이었다. “녜, 뭐 그렇지요.” 하고 얼버무리는 필자에게 “자네 목사에서 점 하나를 빼면 뭐가 되는지 아는가?” 순간 나는 당황했으나 얼른 대답을 했다. “녜, 독사가 됩니다.” 그러자 그는 내 손을 잡으시며 “이제야 정답을 아는 놈을 만났군. 그런데 그 점이 무언지 아는가?”하고 다시 물으시는 것이었다. 아까는 순간적인 기지로 한 대답이 먹혀들었지만 얼른 생각이 안 떠올랐다. “사랑이란 거야.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지. 사랑이 없는 자는 마귀 새끼, 곧 독사가 되는 것이지.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처럼...”

그리고는 지팡이를 짚고 휘적휘적 가시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