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꽁이의 찬양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해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사43:21)

‘독립운동의 대부’최재형 선생

댓글 0

이 사람을 보라

2019. 8. 14.

‘독립운동의 대부’최재형 선생

 

 

글 올린이




저는 어제 러시아로 출발하여 1박2일 일정으로 다녀왔습니다.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 선생님의 순국 100주년을 앞두고 

기념비를 제막하기 위해 우수리스크에 다녀온 것입니다.

 

최재형 선생님은 1886년 함경북도 출생으로 

아버지는 함경북도의 노비요, 어머니는 기생으로, 

한 마디로 기구한 운명으로 태어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가난과 굶주림으로부터 해방을 받기 위하여 러시아 러시아 연추에 있는 고려인 최초의 촌락인 지신허라고 하는 마을로 갔는데, 거기서도 배고픔과 굶주림이 계속 되자 항구에서 뱃일을 도우면 밥은 굶지 않는다는 소문을 듣고 포시에트 항구로 갔습니다. 하지만 그는 며칠 동안을 굶주리며 걸어왔기 때문에 너무나 배고프고 허기져서 항구에서 쓰러져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쓰러진 꼬마를 독실한 기독교인인 러시아의 한 선장이 발견하고 양아들로 삼게 됩니다.


그런데 그는 아주 머리가 좋아서 최재형은 훗날 러시아군의 통역관이 되어 연해주에 사는 고려인들의 가축을 러시아 군에 납품해 주면서 고려인들을 잘 살게 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고려인들이 최재형에게 ‘페치카’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습니다. 벽난로처럼 고려인들을 따뜻하게 대해주고 그들의 삶의 안위를 지켜 주었다는 의미입니다다. 그뿐 아니라 돈을 엄청나게 벌어서 고려인들도 잘 살게 해 주었지만 그 돈의 대부분을 다 독립운동을 위해 쓴 것입니다. 그는 러시아 동의회 회장이 되고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는데 모든 거사를 계획하고 무기를 구입하는데 뒷돈을 대 주신 숨은 후원자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돈을 벌어서 연해주의 32개의 마을에 학교를 세우고 교회를 세웠습니다. 왜냐면 그는 기독교 신앙을 갖는 것이 곧 애국을 하는 것이고, 문맹을 깨우쳐야 나라를 위해 일할 수 있다고 확신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노블레스 오블리제의 삶을 철저하게 실천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그의 삶의 가치와 목적은 오직 조국의 독립과 민족의 해방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가운데서도 최재형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철저하게 배후에서만 후원을 했습니다. 그리고 안중근 의사도 취조를 받을 때 자기를 뒤에서 도운 최재형에 대해서 철저하게 비밀을 지켜주었는데 일본 헌병이 조사를 해 보니까 독립운동 지원금과 무기 지원이 최재형으로부터 나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1920년 4월 20일에 일본 헌병에 잡혀가서 소베스가야 언덕에서 총살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남자 주인공 유진 초이의 실제 모델인 최재형은 드라마보다 훨씬 더 극적인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일전에 최재형 선생님의 고택을 방문했을 때 보니까, 기념관은 마련되어있지만 그의 순국 기념비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일간지 신문에 최재형 선생님에 대해서 여러 번 글도 쓰면서 몇몇 국회의원님들에게 소베스가야 언덕에 기념비라도 하나 세우자고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대답은 쉽게 하지만 흔쾌히 나선 사람이 없었는데 국회 문화관광위원장이신 안민석 의원님께서 선뜻 나서주셨습니다. 


그래서 민간단체로서는 하기 힘든 일이었지만 ‘최재형 순국 100주년 추모위원회’가 주최하고 국회, 국가보훈처와 외교부, 대통령 직속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등 정부 단체가 후원하고 한민족 평화 나눔재단에서 주관하여 이번 기념비 제막식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최재형 기념비가 세워진 곳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기 전, 안중근 의사가 사격연습을 했던 최재형의 자택이 있던 장소로 현재는 기념관이 있는 곳입니다.


제막식 추모 공연에서는 내년 최재형 순국 100돌을 기념해서 제가 직접 작곡·작사한 <자유의 아리아>를 테너 박주옥 교수가 불렀는데 그 감동은 말로 다 할 수 없었습니다. 하늘에서도 최재형 선생님을 추모하는 눈물을 흘리듯 빗방울이 떨어졌고, 저와 안민석 의원을 비롯한 참가자들은 목이 터져라 애국가를 불렀습니다.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의 애국애족 정신이 민족의 광야에 순백의 꽃으로 피어나고, 별처럼 빛나기를 기도합니다.

1소강석

 

 ***********************************

 [오소운 목사 퍼 온 글]

***********************************



독립운동가 최재형(용산구 제공).© 뉴스1

(서울=뉴스1) 전준우 기자 = 서울 용산구는 3·1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구한말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1858-1920) 선생 알리기에 나선다고 20일 밝혔다.

 

21일 오후 2시 구 평생학습관에서 '민족의 영웅. 위대한 독립운동가 최재형'이란 제목의 특강을 연다. 현재 최재형 기념사업회 이사장직을 맡고 있는 문영숙 작가가 강사로 나선다.

 

최재형은 1858년 함경북도 경원에서 노비의 자식으로 태어났다. 가족들과 함께 9세 때 연해주로 이주해 러시아 학교에서 러시아 말과 문화를 배웠다. 11세 때는 가출해 러시아인 선장의 도움으로 세계를 돌아다녔다.

 

이후 장사를 통해 돈을 모으고, 연해주에서 농장을 운영했다. 7년간의 선원 생활로 세계 선진 문물에 높은 식견을 가졌으며 한인들의 교육 문제에도 관심이 많아 자비로 학교를 설립하고 학생들을 지원했다.

 

한인사업가로 명망이 높았던 최재형은 러일전쟁(1904~1905) 후 일본으로 건너가 박영효를 만나고 조국의 위기를 절감했다. 이범윤과 함께 국민회를 조직해 의병을 모집했다. 안중근(1879-1910) 의사도 여기 참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1910년에는 러시아 교민단체 신문 '대동공보'를 인수해 언론으로 일제를 규탄하고, 국권피탈 후 상하이 임시정부 초대 재무총장에 임명됐으나 참여하지 않고 별도로 독립단을 조직해 무장투쟁을 이어갔다.

 

1920년 최재형은 러시아 우수리스크에서 일본군에 체포됐으며 이송 도중 탈주를 시도했다가 총격을 받고 순국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