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꽁이의 찬양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해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사43:21)

마사다(מצודה) 요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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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8. 17.

마사다(מצודה) 요새

 

마사다(מצודה, 메추다, 요새란 뜻)는 이스라엘 남쪽, 유대 광야의 동쪽에 우뚝 솟은 거대한 바위 절벽에 자리잡은 고대의 왕궁이자 요새이다. 주후 73년 제1차 유대-로마 전쟁 당시 끝까지 로마 군에 항거하던 유대인 저항군은 패배가 임박하자 포로가 되지 않기 위해 전원 자살했다. 마사다는 현재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 유산 중 하나이며 유명한 관광지이다.

 

다윗은 사울의 압박을 피해 한 때 아둘람 굴에 숨었다(주전 11세기). 이 때 부모를 비롯한 가족과 친족들이 억울한 일을 당한 무리와 함께 다윗을 찾았다. 약 400 여명의 무리가 되었다. 피신이 쉽지 않을 것을 안 다윗은 가족과 친지들을 모압 왕에게 맡기고 자신은 모압의 건너편 즉 사해의 리숀 반도 서쪽에 위치한 요새(히브리어 메추다)에 숨었다.

 

“부모를 인도하여 모압 왕 앞에 나아갔더니 그들이 다윗의 요새에 있을 동안에 모압 왕과 함께 있었더라 선지자 갓이 다윗에게 이르되 이 요새에 있지 말고 떠나 유다 땅으로 들어가라 다윗이 떠나 헤렛 수풀에 이르니라” (삼상22:4-5절)

 

나중 유대인 독립 왕국인 하스모니안 시대(주전 142-63년) 얀네우스가 기원전 2세기경 최초로 이곳을 요새를 만들었고, 헤롯 대왕(Herod the Great)이 기원전 35년에 개축하였다. 한 때 헤롯 대왕은 자신의 가족을 이곳에 피신시켰다. 그는 자신의 피신처로 삼기 위해 로마식 왕궁을 세우고 천명 이상의 군인들이 2-3년 버틸 수 있는 무기와 양식을 비축시켜 난공불락의 요새로 만들었다.

 

마사다는 450m의 높은 바위 절벽 꼭대기에 지어진 천혜의 요새였다. 남북 길이 600미터, 너비 250미터, 둘레 1,300m 그리고 평균 120미터인 평평한 마름모꼴 정상으로 배(船) 모양을 하고 있으며 사람이 거주하기 편안한 장소였다. 사방이 절벽이고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좁은 뱀 길뿐이다. 5m가 넘는 높은 성벽과 20m가 넘는 37개의 망루까지 있었다. 그러나 헤롯은 자신을 위해 한번도 사용하지 못했다.

 

이후 주후 67-70년 유대인 1차 항쟁이 발생했다. 로마 군단은 3차례 진압했다. 1-2차는 베시파시우스와 그의 아들 디도 장군 아래 골란 고원, 갈릴리 지역과 사마리아 지역이 먼저 진압되었다. 2차 때 사해에 위치한 에세네 파의 쿰란 공동체가 무너졌다. 그리고 3차 때 디도 장군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이 때 예루살렘으로부터 도망한 시카리 파의 지도자인 ‘엘리에젤 벤 야이르’가 열심당원을 포함한 967명을 데리고 방비가 허술했던 마사다를 손쉽게 점령했다. 유대인 항쟁 군은 이곳에서 마지막으로 저항했다. 당시 로마의 최강인 10군단은 9천명의 병사들로 주변에 8개 진영을 세우고 2년 넘게 공격했다. 그러나 성공하지 못했다.

 

고지대에 위치한 성과 요새는 포위 당한 후 물, 식량부족으로 인해 쉽게 끝나기 마련이다. 이런 점에서 마사다는 완벽한 요새였다. 마사다를 비롯한 주변 광야는 대부분 석회로 이루어져 빗물이 땅에 흡수되지 않았다. 빗물이 흘려 내려가는 지점을 막아 물 저장고로 만들었다. 마사다 곳곳에 만들어 둔 물 저장고는 총 750만 리터의 물을 저장할 수 있었다. 목욕탕과 사우나를 운용할 수 있을 정도로 물이 풍족했다.

 

식량 또한 수년을 먹을 수 있도록 포도주, 기름, 곡물, 과일 등이 보관되어 있는데 마사다의 특이한 기후와 창고의 설계가 맞물려 저장 기간이 백 년도 문제 없었다. 평평한 광야인 마사다의 중앙에 밭도 일구어 식량 문제도 해결했다. 비둘기 집(콜룸바리움)을 만들어 육류 조달은 물론 배설물을 이용해 연료나 비료로 사용했다. 로마 군이 수년을 포위해도 생존에 문제가 없었다.

 

반면 공격하는 로마 군에게 유대 광야는 무척 힘든 환경이었다. 여름 50도 넘는 기후와 비 한 방울도 내리지 않는 황야 때문에 물은 물론 식량 공급도 원활하지 못했다. 우기(雨期)의 집중 호우는 마사다의 유대 인들에게 물을 공급해주었지만 로마 군에게는 땅에 흡수도 되지 않은 물로 인해 발목까지 잠기게 했다. 비가 제대로 흡수되지 않아 지형마저 바꿔버릴 정도의 홍수도 자주 나며 포위하고 있던 로마 군은 많은 병력을 잃었다.

 

최고 시속 100km나 하는 광야의 강풍은 진을 붕괴시킬 정도였다. 이런 바람이 호우와 함께 하는 우기인 겨울 최강의 로마 군단도 견디기 쉽지 않았다. 이런 기후와 지형 덕분에 게릴라와 암살에 능한 열심 당원들의 공격은 로마 군을 엄청나게 짜증나게 만들었다.

 

플라비우스 실바 장군은 무식한 방법을 택했다. 서쪽 방벽이 비교적 경사도가 낮음을 알고 유대인 포로 6천명을 이용하여 돌과 흙을 메우며 토산을 쌓아가며 공격로를 만들었다. 동족 노예를 공격할 수 없었던 유대인 항쟁 군은 패전을 예상했다. 서쪽 성문을 더욱 강화시켰으나 로마 군의 공성무기에 성문이 마침내 뚫렸다. 다음날 안식일임을 안 로마 군은 공격을 멈추고 물러났다.

 

안식일이 시작되는 금요일 저녁 야이르는 모든 남자들을 회당에 모았다. 그리고 안식일 전멸 당할 것을 말하며 승리를 로마 군에게 넘겨주지 말자고 권했다. 포로로 잡힌다면 남자들은 십자가 형에 죽임 당하고 부녀들과 자식들은 노예로 잡혀가 비참한 나날을 살게 될 것을 그는 말했다. 그리고 자유인으로서 집단 자살을 권했다.

 

 

 

자살을 권한 야이르는 열심 당원(젤롯당)으로 시카리의 우두머리였다. 시카리는 예루살렘에 사는 열심 당원으로 가슴에 단칼을 늘 품고 다녔다. 로마 제국에 협력하는 제사장들과 고위 유대인들을 단칼로 암살한 후 무리 속으로 사라지거나 함께 소리 질렀다. 하나님에게 심판을 맡기지 않고 매국하는 유대인 고위층을 이들은 직접 암살했다. 그리고 예루살렘 멸망 전 탈출하려는 동족을 칼로 죽였다.

 

이들은 민족적 애국주의 이름으로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손쉽게 어겼다. 이젠 상황이 달라졌다. 암살용으로 사용하던 칼을 자신에게 향해야 했다. 자유인으로 스스로 죽자는 야이르에 권면에 처음 열심 당원들은 주춤했다. 그러나 동의할 수 밖에 없다고 이들은 생각했다. 남자들은 각자 돌아가 사랑하는 자기 가족들을 칼로 죽였다.

 

돌아온 이들은 토기 조각에 각자의 이름을 썼다. 그리고 열 개의 조각을 추첨식으로 뽑았다. 이들은 남아있는 남자들을 칼로 찔러 죽였다. 그리고 열명 중 둘을 뽑아 나머지 8명을 죽인 후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죽였다. 살아남은 그는 스스로 자살했다. 안식일 아침부터 공격을 시작한 로마 군은 마사다가 의외로 조용함을 알았다.

 

식량 창고는 그대로 남아있고 갑옷이 한 가운데 수북이 쌓인 가운데 모든 유대인들이 죽어있음을 실바 장군은 알았다. 충격 받은 실바 장군은 모든 이유를 이해한 후 야이르가 이겼다고 고백하며 물러났다. 이 때 숨겨져 있었던 두 늙은 여인과 5 명의 아이들을 찾았다. 실바는 이들을 살려두었다.

 

유대인 전쟁 역사를 쓴 요세푸스가 이 기록을 넘겼다. 살아남은 여인들의 진술을 들었을 것이다. 이후 비잔틴 시대 마사다에 수도원이 세워졌다. 그러나 비잔틴 제국이 무너진 후 주후 7세기부터 20세기 중반까지 모든 유대인들은 마사다에 대해 잊고 있었다. 1948년 독립 후 1963년부터 요세푸스의 기록에 근거를 두고 히브리 대의 야딘 교수가 발굴하기 시작했다.

 

마사다 요새에 대한 애국적 이야기가 유대인들 사이 퍼졌다. 유대인들에겐 민족의 용기, 자긍심을 심어주는 이야기이다. 이스라엘 군인들은 훈련소에서 퇴소할 때 모두 이 요새의 정상에서 "마사다는 다시 함락되지 않으리라!"(שנית מצדה לא תיפול שנית)고 외치면서 전의를 다졌다.

 

마사다는 성경과도 연결되며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장소이다. 오늘날 유대인은 신약을 전혀 믿지 않는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바벨론 포로 귀환 이후 스룹바벨 성전 재건, 말라기 선지자, 헬라 제국, 프톨레미 또는 셀루키드 제국, 유대인 하스모니안 왕조, 로마 제국, 비잔틴 제국과 무슬림 제국들과 십자군 원정, 오토만 터키, 영국의 위임통치와 이스라엘 독립이 전부다. 예수님에 대한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마사다를 방문할 때마다 이스라엘의 민족혼을 알려주는 애국적 역사를 반복적으로 상기하며 감동 받는다. 그러나 다른 한편 신, 구약 성경을 믿는 기독교 신자 입장에서 이 역사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라는 근본적 질문이 머리에 뱅뱅 돌았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과연 긍정적인가?

 

분명한 사실 하나가 있다. 구약의 이스라엘은 아들 그리스도의 복음이 온 세상에 전해지도록 이 지상에서 사라져야 했다. 구약의 대소선지자들은 이를 이해했다. 이들은 이스라엘이나 유다의 멸망이라는 비극적 예언과 함께 새로운 출발이라는 낙관적 계시를 동시에 주었다. 주전 7-8세기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이 이를 잘 증언한다.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내가 가로되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대답하시되 성읍들은 황폐하여 거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가 전폐하게 되며 사람들이 여호와께 멀리 옮기워서 이 땅 가운데 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오히려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삼키운 바 될 것이나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사6:8-13절)

 

그러나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은 말라기 선지자 시대 이미 영적으로 타락했다. 이사야가 했던 경고성 예언의 내용이 말라기 선지자에 의해 또 다시 반복되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사1:11-15절)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말1:10절)

 

세계 정세가 재편되는 과정에서 자신을 지배했던 셀류키드 왕국이 쇠퇴하며 유대인은 독립 왕국인 하스모니안 왕조(주전 142-63년)를 한 동안 세울 수 있었다. 약 80년 정도 유지한 후 로마 제국의 봄페이 장군에 의해 멸망 당했다. 그러나 애국적 민족주의 성향은 예수님 당시에도 계속되었다. 주후 67년 제 1차 유대인 항쟁이 발생한 이유였다.

 

주후 70년 예루살렘 성전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이 때 약 십만 명의 유대인 포로들이 노예로 로마로 끌려가 콜로세움 경기장 건설에 동원되었다. 그리고 주후 163년에 발생한 제 2차 유대인 항쟁 때 유대인들은 더 이상 예루살렘에 출입할 수 없었다. 로마의 하드리안 황제는 가나안이란 지명을 유대인들이 몹시 싫어하는 팔레스타인이란 지명으로 변경시켰다. 그리고 전 지역이 로마 식으로 재건되었다.

 

민족주의 성향을 보일수록 하나님은 로마 제국을 통해 더욱 철저히 이들을 핍박했다. 그 결과 이들은 전 세계로 흩어졌다. 민족주의적 애국자인 유대인 열심 당원들은 대소선지자들이 이미 수없이 예언한 하나님의 뜻과 의지에 반했다. 이들은 선민이란 자긍심 때문에 로마 제국에 순순히 굴복할 수 없었다.

 

로마에게 승리의 기쁨을 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전 예레미야 선지자는 남방 유다를 멸망 시킨 바벨론의 평안을 위해 기도하라는 충고를 유대인 포로들에게 했다. 새로운 시대를 소망하며 하나님의 저주를 믿음으로 기쁘게 받아들이라는 계시였다.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하기를 힘쓰고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니라” (렘29:7절: 렘24장 참조)

 

결국 마사다에서 보인 유대인들의 집단 자살은 하나님의 뜻과 의지에 자신을 굴복시키지 않을 것이란 민족주의적 의지의 발로였다. 다른 한편 이 행위는 자신의 운명을 하나님의 자비한 손길에 맡기기보다 자유인으로서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는 불신앙의 표현이기도 했다. 결국 창조주와 섭리주인 여호와 하나님을 거역했다. 물론 굴복의 결과는 십자가형이나 노예로 팔려가는 것이었다.

 

마사다의 집단 자살이란 역사적 사건은 인본주의 관점에서 (또는 현상학적으로) 이스라엘인에게나 세계인에게 감동적 이야기이다. 이스라엘을 민족적으로 더욱 단단하게 뭉쳐지게 만드는 영웅적 이야기이다. 그러나 만약 이들이 조상인 족장들처럼 하늘에 소망을 두었다면(히11:8-10, 13-14절) 그리고 섭리주인 하나님의 선한 뜻에 자신을 맡겼다면 고난과 환난 중에서도 소망을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다(시119:67, 72, 92절).

 

이들은 이를 거절했다. 물론 이는 쉽지 않다. 오로지 믿음으로 가능하다. 동일한 사건을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해석과 그 후 삶은 완전히 달라진다. 하박국 선지자의 계시가 심각하게 마음에 닿는다.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2:4절)

 

이 글은 대체신학의 정당성을 주장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