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꽁이의 찬양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해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사43:21)

한국의 명가 명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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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8. 26.



한국의 명가 명택


영양 조지훈 종택, 해남 윤선도고택, 예산 김정희고택,경주 최부잣집, 익산 송영구 고택




1. 경북 영양의 시인 조지훈 종택 - ‘지조론’ 낳은 370년 명가의 저력


재물과 사람과 문장을 빌리지 않는 ‘삼불차(三不借)’ 원칙을 370년간 지켜온 조지훈의 생가 호은종택. 조지훈도 삼불차 집안의 훈도를 받으면서 자라나 ‘지조론’을 말할 수 있었다고 한다. 굳세게 명가의 지조를 지켜오면서 박사만 14명 배출시킨 산골동네 주실마을 조씨 집을 들여다보니….



‘개똥밭에 굴러도 저승보다는 이승이 낫다’ ‘땡감을 따먹고 살아도 저승보다는 이승이 낫다’라는 한국 속담이 있다. 죽어서 저승 가는 것보다는 어찌되었건 간에 숨이라도 쉬고 살아 있는 것이 낫다는 말이다. 만고풍상을 겪어본 팔십노인들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듣다보면 삶에 대한 애착이 어떠한 것인지를 새삼 느낀다. 

냄새가 진동하는 개똥으로 범벅된 개똥밭에 굴러도, 떫디 떫은 땡감을 삼시 세끼 목구멍에 삼키더라도 죽음보다는 삶이 낫다는 것이 한국 사람들의 사생관(死生觀) 아니었나 싶다. 정말 끈끈한 사생관이다. 필자가 과문한지는 모르겠지만, 세계 어디에도 이처럼 질기디 질긴, 사생관이 농축된 속담이 있다는 소리는 들어보지 못했다. 이 속담대로라면 한국 사람들의 자살률은 세계에서 최하위권에 머물러 있어야 맞지 않을까? 

‘개똥밭에 굴러도’ ‘땡감을 따먹고 살아도’가 형성된 이면에는 우리 조선사람들이 겪은 근세 100년간의 눈물겨운 역사가 있다. 조선후기 탐관오리들의 끝없는 착취와 굶주림, 참다 참다 못견뎌서 백성들이 떨쳐 일어선 동학농민혁명과 죽음, 식민지 36년간 쥐어짜는 수탈과 압박, 뒤이어 6·25라는 겁살, 자유당 정권의 혼란과 부패…. 

정말이지 이처럼 눈물나는 근세 100년을 겪은 민족이 있으면 어디 나와 보라고 하고 싶다. 우리는 눈물어린 빵을 너무 지나치게 먹은 감이 있다. 근세 100년 동안 한국인들은 마치 공수부대의 살벌한 유격 훈련을 받았다고나 할까. 고강도 훈련 과정에서 고래심줄 + 잡초와 같은 끈기와 생존력을 체득하게 된 한국인이다. 

혹독한 고생을 겪고 살아남은 인간은 대략 2가지 유형으로 변화해간다. 하나는 생존을 위해서 품격이고 나발이고 다 던져버리고 악착같은 인간으로 변해가고, 다른 하나는 모든 것을 달관(達觀)하는 인간으로 변해간다. 비율을 따져보면 대략 8대 2 정도로 전자의 인간형이 많지 않나 싶다. 유감스럽게도 달관의 인품보다는 체면이고 자존심도 던져버리고 어떻게 해서든지 자기 앞에 큰 감을 놓고 보려는 범부(凡夫)가 압도적으로 많은 것이 우리 인간세상이다. 

악착같은 인간형에게서 우리는 강인한 생명력은 느낄지 몰라도, 그윽하게 풍겨오는 초절(超絶)의 향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이해관계 때문에 왔다 갔다 하지 않는 일관성을 기대하기 어렵다. ‘도덕경’의 ‘총욕불경’(寵辱不驚:총애를 받거나 욕됨을 당해도 놀라지 않음)의 경지를 기대하기는 더욱 어렵다. 

소설가 서머싯 몸도 ‘서밍업(Summing up)’에서 ‘Man is inconsistent(인간의 속성은 일관성이 없다)’라고 설파한 바 있듯이, 범부가 일관성을 견지하고 지조를 지키기는 정말 어려운 일이다. 나 역시 일관성을 지키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거기에 비례하여 현실에 돌아오는 결과는 불이익이라는 차디찬 열매였음을 길지 않은 인생에서 여러번 경험하였다.

그렇기에 매천(梅泉) 황현(黃玹, 1855∼1910년)이 죽으면서 남긴 절명시 한구절, ‘秋燈掩卷懷千古하니 難作人間識字人(가을 등불 아래에서 책을 덮고 지나간 천년 세월을 회상하니, 인간으로서 식자 노릇하기가 정말 어렵구나)’을 가슴속에 새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근래에도 한국 사회의 여러 명망가들이 결정적인 순간에 지조를 지키지 못하고 이해타산 때문에 왔다갔다 하다가 훼절하고 망신당하는걸 지켜보면서, 식자 노릇하기가 쉽지 않고 인간으로서 한평생 지조를 지키면서 산다는 것이 얼마나 고귀한 삶인지를 다시 한번 실감하게 된다.  

물론 지조를 지키면서 살아가기에는 우리 근대사가 너무나 감당하기 힘든 가시밭길이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 숱한 변절과 기만을 상황 탓으로 합리화하기에는 내면의 양심과 자존심이 용서하지 않는다. 양심과 자존심을 지킨 지조 있는 인간을 보고 싶다!

지조론으로 유명한 조지훈  

조지훈선생(趙芝薰, 1920∼1968년)은 시인이지만 그가 남긴 ‘지조론(志操論)으로 더 유명하다. 나 역시 조지훈을 시보다는 지조론의 저자로 기억한다. 지조론에 그 어떤 힘이 담겨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세간에서 그를 ‘마지막 선비’ 또는 ‘지사문인(志士文人)’으로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유명한 ‘지조론’의 일부를 인용해 본다. 

“지조란 것은 순일한 정신을 지키기 위한 불타는 신념이요, 눈물겨운 정성이며, 냉철한 확집(確執)이요, 고귀한 투쟁이기까지 하다. …지조가 없는 지도자는 믿을 수가 없고, 믿을 수 없는 자는 따를 수 없기 때문이다. 자기의 명리만을 위하여 그 동지와 지지자와 추종자를 일조에 함정에 빠뜨리고 달아나는 지조 없는 지도자의 무절제와 배신 앞에 우리는 얼마나 많이 실망하였는가? 지조를 지킨다는 것이 참으로 어려운 일임을 아는 까닭에 우리는 지조 있는 지도자를 존경하고 그 곤고(困苦)를 이해할 뿐 아니라 안심하고 그를 믿을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와 같이 생각하는 자이기 때문에 지도자, 배신하는 변절자들을 개탄하고 연민하며 그와 같은 변절의 위기 직전에 있는 인사들에게 경성(警醒)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지조는 선비의 것이요, 교양인의 것이다. 장사꾼에게 지조를 바라거나 창녀에게 정조를 바란다는 것은 옛날에도 없었던 일이지만 선비와 교양인과 지도자에게 지조가 없다면 그가 인격적으로 창녀와 가릴 바가 무엇이 있겠는가? 식견은 기술자와 장사꾼에게도 있을 수 있지 않은가 말이다.” 

조지훈은 말로만 지조를 부르짖은 것이 아니라 처신으로 보여주었다. 그는 일제때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되어 경찰에 잡혀가 신문을 받고 풀려난 후 강원도 오대산 월정사에서 비승비속(非僧非俗)의 신분으로 숨어 지냈다. 비록 총을 들고 항일투쟁은 하지 않았지만 비굴하게 일제에 날품팔이와 같은 행동은 결코 하지 않았다. ‘친일문학론’의 저자 임종국(林鍾國)은 일제에 협력하지 않은 문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조지훈을 꼽고 있다. 광복 이후 삶의 궤적을 보아도 선비로서 품격을 잃지 않았다. 

‘선비와 교양인과 지도자에게 지조가 없다면 그가 인격적으로 창녀와 가릴 바가 무엇이 있겠는가.’

필자는 조지훈이 남긴 어떤 시보다도, 바로 이 대목에 그가 일생 연마한 내공(內功)이 응축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가 남긴 이 초식은 입에서 휘파람처럼 나온 소리가 아니라, 저 아랫배 단전(丹田)에서 수십년 가다듬어 올라온 소리임이 틀림없다. 매사를 파고 들어가면 연원(淵源)이 있고 끌탱이가 있는 법이다. 단전에 지조의 힘이 차곡차곡 쌓이기까지는 오랜 시간의 적공(積功)이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지조론’을 낳은 조지훈의 연원과 끌탱이는 무엇이란 말인가? 그 정신을 낳게 한 배경이 무엇인가? 그것이 궁금하였다. 한국이 비록 작은 나라지만, 국토가 좁다고 해서 인물이 없는 것은 아니다. 찾아보면 골짜기 골짜기마다 그래도 인물이 있다. 천하명산(天下名山)을 주유(周遊)하는 취미를 가진 내가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는가. 인걸(人傑)은 지령(地靈)이라고, 그 인물의 출산지를 보아야 할 것 아닌가? 

그래서 나는 조지훈의 생가인 경북 영양군 일월면 주실마을을 찾아가 보았다. 영양군 일월면 주실마을 가는 길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경북 봉화쪽에서 청량산(淸凉山)을 끼고 돌아 들어가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안동에서 영덕 쪽으로 가다가 영양으로 꺾어 들어와 주실로 가는 길이다. 

영양으로 가는 길은 부드러운 길이고, 청량산을 돌아 들어가는 길이 훨씬 장엄한 것 같다. 청량산이 어디 보통 산인가. 층층의 바위 절벽, 마치 중후하고 청결한 신사의 기품을 느끼게 하는 바위절벽이 돋보이는 산이다. 산의 이름처럼 산의 전체적인 기운이 맑고 상쾌하다. 이런 산이 남아 있다는 것은 축복 아니겠는가! 아직 관광객의 탁기로 오염되지 않은 산임을 멀리서 보아도 알 수 있다. 퇴계 선생이 항상 청량산을 흠모했던 이유를 짐작할 수 있겠다.

내가 보기에 청량산은 야성과 품위가 어우러진 산이다. 승용차 창문을 열고 청량산 정기를 아랫배 단전으로 끌어당겨 본다. 단전으로 들어간 정기는 피가 되고 살이 되고 나의 뇌수(腦髓)까지 충실하게 채워줄 것이 틀림없다. 이런 길이라면 돌아다녀 볼 만하다. 지금 이 길을 달리고 있는 나는 얼마나 행복한가! 

三不借의 조지훈 생가  

청량산을 지나 첩첩 산중의 산길을 20분 정도 더 가니 주실마을(注谷里)에 닿는다. 동네는 60 가구 정도에 200명 남짓한 주민이 거주한다고 한다. 조지훈의 생가를 동네사람에게 물으니 동네 중심부의 맨 앞집이란다. 

대문 옆에는 ‘호은종택(壺隱宗宅)’이라고 새겨진 비석이 있다. 조지훈의 생가는 보통 집이 아니라 종택(宗宅)이다. 즉 그는 종가에서 태어난 것이다. 호은(壺隱)은 주실 조씨(趙氏)들의 시조이자, 1629년(인조7년) 주실에 처음 들어와 이 동네를 일군 사람의 호이다.

그러니까 이 집은 370년의 역사를 지닌 집이다. 4세기 가까운 세월 동안 집안을 유지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그만한 노하우가 있었을 것 아닌가.

현재 이 집을 관리하고 있는 조동길(趙東吉)씨를 만났다. 객지에서 공무원 생활하다가 정년퇴직하고 고향에 돌아와 종택을 관리하고 있다고 한다. 말년을 의미있게 회향(回向)하고 있는 셈이다. 생년이 신미생(辛未生)이라고 하니까 올해 칠십의 연세다. 꽉 다문 입과 약간 매서운 눈매, 그리고 깔끔한 차림새로 보아서 음양오행론으로 보면 ‘금(金) 체질’에 속하는 관상이다.

대개 금 체질들은 맺고 끊는 것이 정확한 사무라이 기질이 강하다. 이야기를 할 때도 앞뒤가 분명하고 요점만 이야기하는 특징이 있다. 서론이 짧고 뼈다귀만 이야기하므로 인터뷰 상대로는 최적이다. 

“호은종택에는 370년 동안 내려온 가훈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삼불차(三不借)라는 것이죠.”

“삼불차(三不借)가 무슨 뜻입니까?” 

“3가지를 불차한다, 즉 빌리지 않는다는 뜻이죠. 첫째는 재불차(財不借)로 재물을 다른 사람에게서 빌리지 않는다는 것이고, 둘째는 인불차(人不借)로 사람을 빌리지 않는 것이고, 셋째는 문불차(文不借)인데, 문장을 빌리지 않는다는 말이죠. 이 삼불차를 호은(壺隱) 할아버지 때부터 현재까지 계속 지켜왔습니다.” 

그런데 삼불차 중 두번째의 인불차가 확실하게 이해되지 않았다.

“사람을 빌리지 않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아- 그것은 양자를 들이지 않는다는 겁니다. 다른 종가들은 중간에 아들이 없어서 양자를 많이 들였지만, 이 집안에는 한번도 그런 일이 없었습니다. 16대 동안 양자를 들이지 않고 친자로 계속 이어져왔죠. 우리 주실 조씨들은 대체로 성질이 좀 꼿꼿한 편입니다. 머리를 숙이지 않으니 손해도 많이 봅니다. 주실 조씨들이 공직에도 많이 가 있는데 뇌물 받아 먹고 형무소에 간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손해 보면 보았지 비굴하게 살려고는 하지 않습니다. “

금체질의 검기(劍氣)를 지닌 조동길씨의 대답이다. 

그렇다! 호은종택은 삼불차의 집안이다. 조지훈 선생의 집안에 370년 동안 이어져온 가훈 삼불차는 한마디로 요약하면 남에게 아쉬운 소리 하지 말고 살자는 정신이다.

가훈을 이렇게 정한 걸로 보아서 호은공(壺隱公)이라는 양반의 성품이 짐작된다. 대단히 자존심이 강하고 강직했던 분이었던 것 같다. 남에게 아쉬운 소리 하지 말고 살자는 것이 어디 쉬운 각오인가! 그것도 당신 자신에게만 강요한 원칙이 아니라 후손 대대로 그렇게 살도록 당부한다는 게 어디 보통 신념인가! 

이 쾌남아의 사주팔자(四柱八字)나 한번 뽑아보면 대강 어떤 사람인가 짐작해 볼 수 있을텐데, 생년월일을 알 수가 없고 초상화도 남아 있는 게 없어서 아쉽기만 하다.

여하간 나는 삼불차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러면 그렇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조지훈의 ‘지조론’은 삼불차의 바탕 위에서 나온 것이다. ‘강장(强將) 밑에 약졸(弱卒) 없다’는 말마따나 그 선조에 그 후손이다. 조지훈은 어릴 때부터 삼불차 집안의 훈도를 받으면서 자랐기에 지조론을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400년 가까이 내려온 집안의 자랑스런 전통을 돈 몇푼하고 쉽게 바꿀 수 있겠는가? 아니면 일신의 출세와 쉽게 바꿀 수 있겠는가? 이래서 전통은 무섭다. 전통은 불가(佛家)의 엄한 계율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지조만 가지고 370년 동안 집안을 유지한다는 게 가능한 일인가 하는 의문을 제기해 본다. 물질력 없이 정신력만 가지고 연명하기는 어렵다는 것이 고금의 이치다. 강직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라 지혜도 있어야 한다. 

이런 각도에서 삼불차를 뒤집어 보자면, 빌리지 않아도 될 만큼 재(財) 인(人) 문(文) 3가지 요소를 주실 조씨들이 갖추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성립된다. 돈이 없어서 굶어 죽는 상황에 무턱대고 재불차만 부르짖을 수 없은 법이며, 후사가 없어서 대가 끊어졌으면 현재까지 집안이 내려왔겠는가. 무식한 사람이 문불차를 주장한다는 것이 어디 성립될 수 있겠는가. 주실 조씨들이 재물과 인물과 문장을 유지해온 지혜를 본격적으로 알아보기 전에 이 3가지 요소를 좀더 자세히 살펴보자. 

먼저 재물을 보자. 호은 종택 앞에는 논 50마지기가 있는데 평수로는 1만 평이다. 이 논은 370년 전 호은공 때부터 마련해 놓은 문전 옥답이다. 중간에 누가 손댄 사람 하나 없이 현재까지 그대로 내려왔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하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인물과 문장을 보자. 주실에서는 많은 학자들이 나왔다는 점이 주목된다. 박사만 해도 14명이 배출되었다고 한다. 그것도 궁벽진 산골 동네에서 14명이나 나왔다는 것은 무엇인가 있긴 있는 동네다. 전북 임실군(任實郡)의 삼계면(三溪面)이라는 곳에서도 박사가 40여 명 나왔지만, 그것은 면 단위이고 여기는 일개 조그만 마을이다. 조그만 마을 하나에서 현재까지 14명이나 나왔다는 것은 신기한 일이다. 

더군다나 주실마을에서 나온 박사들은 시원찮은 나이롱들이 아니다. 한국 인문학의 대가(大家)들이다. 대표적인 3인방만 꼽자면 조동일(趙東一), 조동걸(趙東杰), 조동원(趙東元) 교수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조지훈 선생의 호적 이름이 조동탁(趙東卓)이니까 이들은 모두 동자 돌림의 같은 항렬이다. 

서울대 국문학과의 조동일 교수는 ‘한국문학통사’(6권)로 유명한 학자다. 한국문학 전체를 삼국시대부터 근세에 이르기까지 통시적으로 정리한 이 책은 문학 뿐만 아니라 역사와 철학을 전공하는 사람들까지도 필독서로 꼽는다. 조동일 교수 특유의 직절(直切)한 필치로 문사철(文史哲)을 꿰뚫은 명저다. 그 뿐만이 아니다. 조동일 교수는 93년에 나의 가슴을 후련하게 한 책 ‘우리 학문의 길’을 펴낸 바 있다. 나는 이 책을 읽고 조교수의 팬이 됐는데, 그는 외국이론의 수입중개상 노릇이나 해서 먹고 사는 사람들을 통렬히 비판한다.

“학문의 수입업자나 하청업자 노릇을 하면서 행세하려고 하지 말고, 요즈음 유행하는 문자로 국제 경쟁력을 가진 자기 상표의 제품을 내놓아야 하는 것이, 생각이 깨인 다른 모든 나라에서 함께 채택하고 있는, 재론의 여지가 없는 유일한 노선이다.”

그는 그만 굽실거리고 이제는 자기 상표의 제품을 내놓을 때도 되지 않았느냐고 주장한다. 조교수의 글에서는 ‘주체성’이 느껴진다. 지조와 자존감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사람만이 이런 글을 쓸 수 있다. 

국민대 대학원장을 지냈고 현재는 명예교수로 있는 조동걸(趙東杰) 교수는 고려대의 강만길 교수와 함께 근세사의 양대 고수로 꼽히는 학자다. 또 성균관대 부총장을 지낸 조동원(趙東元) 교수는 발로 뛰어다니면서 한국의 금석문(金石文) 탁본을 20년에 걸쳐 정리한 ‘학국금석문대계’(韓國金石文大系, 7권)의 저자다. 남한 전지역의 비석에 새겨진 금석문을 집대성했기 때문에 현장에 직접 가지 않더라도 이 책만 있으면 원본을 그대로 볼 수 있다. 미술사, 역사, 불교 ,민속, 도교, 서예 전공자들에게 필수 장서임은 물론이다.

요즘에야 인문학이 파리 날리는 신세로 전락하여 겁없이 함부로 인문학을 전공했다간 자칫 쪽박차기 쉽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나라 그 민족의 혼과 정신은 역시 그 나라의 인문학에 들어 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인문학이 죽으면 그 나라의 주체성도 죽는다. 이런 점에서 주실마을 태생의 인문학자 3인방을 경외(敬畏)의 염(念)으로 바라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거기에다 조지훈까지…. 

주실마을 조씨들의 항렬을 따져 보면 동자(東字) 윗대 항렬은 영자(泳字)가 된다. 항렬 정하는데도 법칙이 있다. 오행(五行)의 상생(相生) 법칙으로 볼 때 목(木)인 동 자를 생해주는 것은 수(水)인 영 자 항렬이다(水生木의 이치). 

납북 한의학자 조헌영  

영자(泳字) 항렬 가운데서도 인물이 많이 배출되었다. 조은영(趙銀泳, 1896∼1970년), 조헌영(趙憲泳, 1899∼1988년), 조준영(趙俊泳, 1903∼1962년), 조애영(趙愛泳, 1911년∼) 4남매가 그렇다. 은영은 일본 와세다대 출신으로 국립도서관장을 지냈고, 헌영은 일본 중앙대 출신의 유명한 한의학자이고, 준영은 보성고보를 나와서 초대 민선대구시장, 경북도 지사를 지냈으며, 애영은 여류 시조시인이다. 

이중에서 조헌영이 바로 조지훈의 부친인데 한의학의 대가였다. 소문에 의하면 그는 납북된 뒤에도 한의학을 계속 연구하여 많은 한의학 제자들을 배출하였다고 한다. 상당수의 이북 한의학자들이 그의 제자라는 것이다. 

조헌영이 한의학을 연구하게 된 계기가 있다고 한다. 영문학도인 그가 엉뚱하게도 한방에 정통하게 된 것은 일본 유학시절 병에 걸린 친구를 치료하기 위해 독학으로 ‘동의보감’을 연구한 결과라는 것이다. 

원래 조헌영은 영문과를 졸업한 뒤 일본에 머물며 허헌(許憲)이 회장으로 있던 신간회 동경지회장을 지냈다. 귀국한 후에도 신간회 총무 간사를 지냈는데, 신간회가 해산된 뒤 일경의 감시를 피하는 방편으로 서울 명륜동과 성북동에 ‘동양의약사’라는 한의원 간판을 달고 의원 행세를 하며 광복을 기다렸다고 한다. 

그는 한편으로 ‘동양의학사’ ‘통속한의학원론’ 등 전문 한의학서를 여러 권 저술했는데, 한때 한의과대학의 교과서로 사용됐다. 이 책자에 대해 경희대 한의과대학 김병운(金秉雲) 교수는 “한의학의 과학성과 민족의학적 가치성을 처음으로 이론화한 입문서”라고 평가하고 있다.

그는 한의사 일 외에 조선어학회가 주관한 ‘한글맞춤법통일안’ 심의위원을 지냈다. 광복 후 고향에서 한민당 의원으로 당선되었으나, 민족 반역자를 척결하기 위한 반민특위위원에 선임된 후 한민당과 결별했다. 2대 의원선거에서는 무소속으로 나와 연속 당선되었다. 그러다가 6·25전쟁 때 납북됐는데, 북한에서도 한의학 연구서를 내는 등 북한 한의학의 기초를 닦았다고 한다. 북한은 88년 5월 평양방송을 통해 ‘조헌영이 노환으로 작고했다’고 그의 별세를 보도했다(조선일보 ‘新名家’, 1995.6.12일자에서 인용). 

역사학자 조동걸이 자신의 고향 이야기를 기술한 ‘주실이야기’를 보면 1930년대에 조헌영이 약재를 채취하기 위해서 동네 초동(樵童)들을 데리고 경북 영양 일월산을 누볐다고 되어 있다. 아무튼 조지훈의 부친도 보통 인물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근영, 헌영, 준영, 애영 4남매의 아버지는 누구인가? 바로 조인석(趙寅錫, 1879∼1950년)이다. 영자 위 항렬은 금(金)인 석자(錫字)이다(金生水의 이치). 조인석은 1900년 경 서울에 올라가 개화가 대세임을 목격하고, 동네에 돌아와 신학문을 가르치는 영진의숙(英進義塾)을 종가이자 자신의 집인 호은종택에 설치한다. 그는 ‘초경독본(初經讀本)’이라는 청소년용 교육 책자를 저술하고 동네 아이들에게 신학문을 가르쳤다. 계몽가이자 교육자였던 셈이다.

조인석은 자식 4남매를 모두 훌륭하게 교육했지만 그 자신은 자살로 생을 마감하였다. 여기에는 6·25 전쟁의 비극이 개입돼 있다. 당시 그의 3남인 준영이 경북도경국장을 지내고 있었기에 아버지인 조인석은 좌익 청년들에게 매일 시달렸다. 20대 초반의 젊은이들이 집에 들어와 “이 영감! 아들 어디에 있어? 아들 찾아내?” 하면서 칠십노인에게 반말로 모욕을 가하자 참지 못하고 마침내 근처 방죽으로 가서 투신 자살하였던 것이다.

나는 조인석의 자살도 주실 조씨들의 전통과 직접 연관이 있다고 생각한다. 자존심과 목숨 중에서 자존심을 선택했던 것이다. 보통 사람은 칠십 나이가 되면 어지간한 수모는 그러려니 하고 넘기기 마련인데, ‘삼불차’의 지조를 중시하였던 선비 조인석은 새파랗게 어린 것들로부터 이런 치욕을 받고 그냥 넘길 수 없었던 것이라고 해석된다. 조인석은 조지훈의 직계 조부다. 1950년 당시 30세였던 조지훈은 칠십 조부의 자살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기왕 족보 조사한 김에 조인석의 부친도 알아보자. 석자 위 항렬은 토(土)로 기자(基字)다. 조인석의 부친 조승기(趙承基, 1836∼1913년)는 일제가 국모인 명성황후를 시해하자 의병을 일으켜 의병대장을 하였다. 조승기 역시 불의에 분노할 줄 아는, 행동하는 선비였던 것이다.

이처럼 주실 조씨들은 학자도 많고, 그 학자들도 책상물림에 지나지 않는 백면서생이 아니라, 결정적인 순간에 한 방 날릴 줄 아는 행동하는 선비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주실에서는 이외에도 많은 인물이 배출됐음은 물론이다. 

지리적 안목으로 분석  

경북 영양군 일월면의 주실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이처럼 지조와 학문을 갖춘 인물들이 집중적으로 배출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재인문(財人文)의 삼불차를 4세기 가까운 세월동안 유지할 수 있었던 비방이 있었다면 그 비방은 무엇인가?

여기에 대한 해답은 두 가지 방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이판(理判)과 사판(事判)이 그것이다. 이판이란 눈에 안 보이는 데이터(invisible data)를 가지고 사태를 파악하는 방법이고, 사판이란 눈에 보이는 데이터(visible data)를 가지고 사태를 파악하는 방법이다. 전자가 다분히 신비적인 파악이라면, 후자는 요즘 말로 합리적인 파악이다. 사판이 드러난 현상에 대한 분석이라면, 이판은 배후에 잠재하는 부분에 대한 분석이라고나 할까.

그래서 어떤 사안에 대하여 정확한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는 이판과 사판 양쪽을 모두 보아야 한다는 것이 불가(佛家) 고승(高僧)들의 입장이다. 한쪽만 보아서는 미급이다. 이판사판(理判事判)을 모두 통과해야 실수가 적다. 그래서 이판사판이란 말이 나왔다. 이걸로 보나 저걸로 보나 답은 하나로 나왔으니 행동에 옮길 수밖에 없다는 것이 이판사판이다.

불교의 화엄철학에서는 이 경지를 이사무애(理事無碍)라고 표현한다. 이(理)와 사(事)에 모두 걸림이 없는 경지다. 고려 때까지만 하더라도 국사(國師)나 왕사(王師) 제도가 있었는데, 이런 정도의 경륜은 이사무애의 경지에서 나온다고 보았다. 요즘 공식적인 국사 제도는 사라졌지만 가톨릭의 김수환(金壽煥) 추기경이 어느 정도 국사 노릇을 한 듯하다. 최근 20년간 대통령이 중대한 정치적 결정을 내릴 때 김추기경 하고 상의하는 경우가 많아서 하는 말이다.

아무튼 사판적(事判的) 분석(分析)이야 세상사에 밝은 사람들이 많을 테니까 제쳐두고, 주로 이판적 입장에서 주실마을의 인물배출 배경을 뜯어보자. 

이판의 입장이란 천문(天文) 지리(地理) 인사(人事), 삼재(三才)의 안목에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천문이란 시간, 즉 타이밍을 가리킨다. 지리란 넒은 의미로는 환경을 말하지만, 좁은 의미로는 명당이다. 인사는 넒은 의미로는 천문과 지리를 매개하는 존재인 사람을 말하지만, 좁은 의미로는 인간의 몸에 대한 식견을 지칭한다. 이 3가지가 조화를 이룰 때 일이 성취된다. 

대만 총통의 국사를 역임한 남회근(南懷瑾, 1918∼) 선생은 그의 역저 ‘역경계전별강(易經繫傳別講, 국내에서는 ‘주역강의’로 번역돼 있음)에서 이를 명리(命理), 지리(地理), 의리(醫理)로 요약한다. 중국에서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관습에 따르면 식자라면 반드시 이 삼리(三理)를 공부해야 한다. 

자기 운명의 이치인 명리(命理)를 알아야 천시(天時)가 언제 오고 가는가를 알 수 있고 거기에 따른 진퇴를 결정할 수 있다. 지리(地理)를 알아야 살아 있을 때의 양택(陽宅)과 죽은 후의 음택(陰宅)을 제대로 잡을 수 있고, 의리(醫理)를 알아야 병의 원인을 파악해서 몸을 건강히 보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삼리 중에서 의리는 70년대 초반 한의학이라는 제도권 학문에 들어가 학문 대접을 받을 수 있었지만, 지리와 명리는 여전히 제도권 밖에서 ‘학문적 시민권’도 없이 서성대고 있는 상황이다. 

최근이긴 하지만 지리도 학문적 영역으로 조금씩 진입하는 분위기다. 서울대 최창조 교수가 한국사회의 식자층에 지리를 소개하면서 인식이 약간 개선된 것 같다. 미신 잡술이라는 종래의 인식에서 약간 벗어나 풍수라는 것이 우리의 전통적인 자연관을 반영한 것일 수도 있다는 쪽으로 변하고 있는 것이다. 

상대적으로 제일 천대받는 것이 명리다. 명리는 아직도 미아리 골목에서 잠자고 있는 것 같다. 이야기가 조금 옆길로 새버렸지만 다시 주실마을로 돌아가자. 내가 보기에 주실마을은 삼리 가운데서도 지리적 안목에서 분석할 필요가 있다. 한국의 문화현상은 한국의 토양에서 우러난 문법으로 해석해야 깊이 들어갈 수 있으며, 나는 그 문법이 바로 지리라고 생각한다.


주실마을의 가장 중심맥에 자리잡은 호은종택(壺隱宗宅) 터는 이름 그대로 호은공이 잡은 자리다. 한양 조씨인 호은공 선대는 한양에서 거주하다가 1519년 조광조의 기묘사화를 만나 멸문 위기에 처하자 전국 각지로 흩어져 피신했는데, 그 후손중의 하나인 호은공이 인조7년(1629)에 주실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고 한다. 

호은종택이 자리잡은 지맥은 영양 지방의 명산인 일월산(日月山)에서 흘러 내려온 맥이다. 주실에서 일월산까지 능선을 타면 12km 정도다. 주실에 도달한 지맥은 야트막한 3개의 봉우리로 응결된다. 그 가운데 봉우리 밑 부분에 호은종택이 자리잡고 있다.

호은종택에 내려오는 구전에 의하면 이 집터를 잡을 때의 일화가 흥미롭다. 호은공이 매방산(梅坊山)에 올라가 매(鷹)를 날려 매가 날아가다가 앉은 자리에 집터를 잡았다는 일화다. 매방산은 100여m 정도의 야트막한 산으로, 주실에 맺힌 3개의 봉우리중 맨 오른쪽에 해당하는 3번째 봉우리다. 이때의 매는 아마도 야생 매가 아닌 집에서 꿩 사냥용으로 기르던 보라매로 생각되는데, 이 매가 앉은 지점은 흥미롭게도 물기가 질컥질컥 배어 있는 늪이었다고 한다.

호은종택 터는 원래 늪지대였던 것이다. 늪을 메워 집을 지었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다소 희귀한 사례에 속한다. 매를 날려서 집터를 잡았다는 점, 그리고 늪지대를 메워 집을 지었다는 점에서 호은종택의 터잡기는 일상적인 택지법(擇地法)과다르기 때문이다.

불가에서 고승들이 오리를 날려 그 오리가 착지(着地)하는 지점에 절터를 정한 경우는 발견된다. 전남 순천의 송광사(松廣寺)가 그런 경우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고려 때 보조국사(普照國師)가 암자 터를 정할 때 오리를 날렸다고 한다. 또 한 가지 사례는 조선중기 호남지역에서 많은 신통(神通)을 나투었다고 회자되는 진묵대사 역시 나무로 만든 오리를 날려 절터를 잡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불가에서는 오리를 해수관음(海水觀音)의 화현으로 보기도 한다. 항해를 업으로 하는 뱃사람들에게 해수관음은 바다의 풍랑을 다스리는 신으로 여겨지는데, 비록 오리는 바다가 아닌 육지의 저수지에서 살지만 하늘을 날 수도 있고 물결 위에 떠 있을 수도 있어서 해수관음과 비슷하다고 보았다. 물론 이때의 오리는 집오리가 아닌 청둥오리로 여겨진다. 이처럼 고대인들은 오리를 신령한 능력을 지닌 동물로 여겼다. 솟대 위에 나무오리를 만들어 올려놓는 한국의 민속도 이러한 신령함의 표현이라는 게 학계의 정설이다. 여하간 불교에서 절터를 잡을 때 오리를 날렸다는 이야기는 있어도 매를 날려 집터를 잡았다는 이야기는 호은종택에서 처음 접한다. 

왜 매를 날렸을까? 아마도 날짐승은 하늘에서 날다가 땅에 내려앉을 때 본능적으로 유리한 지점을 잡는 능력이 있지 않나 싶다. 동물은 사람보다 감각이 발달돼 있다. 매를 날린다는 것은 동물의 감각 내지는 본능을 이용하는 방법 같다. 물론 처음부터 무턱대고 매를 날리진 않았을 것이다. 사람이 어느 정도 범위를 잡아놓은 다음에, 정확한 지점을 찍을 때 매를 날리지 않았을까. 혹은 2∼3군데 후보지를 잡아놓고, 그 가운데 어느 쪽을 최종적으로 선택할 것인지 고심하다가 마지막 결정에 동물의 촉각을 이용했을 개연성도 있다. 일종의 동물점(動物占)이라고 볼 수도 있다. 

늪지에 집터를 잡은 도인  

그다음 주목할 사항은 평지나 언덕이 아닌 늪지를 집터로 선택한 부분이다. 사람이 거주하는 양택을 늪지에 잡은 경우를 나는 거의 들어보지 못했다. 그러나 절터를 늪지에 잡은 경우는 있다. 백제 때 무왕(武王)이 잡은 익산의 미륵사 터가 원래 늪지였고, 진표율사(眞表律師)가 잡은 김제 금산사의 미륵전이 늪지였다. 이외에도 치악산 구룡사, 도선국사가 말년에 주석한 광양 옥룡사, 고창 선운사 대웅전 자리가 애초에는 늪지였다는 기록이 있다. 풍수의 좌청룡 우백호를 따지지 않고 늪지를 메워서 사찰을 세우는 것은 고대 불교에서 행해지던 유풍이다. 

늪지에 건물을 세우면 습기가 차서 목재가 쉽게 부식되기 때문에, 늪지를 메울 때는 반드시 숯을 집어 넣는다. 숯은 습기를 빨아들이는 작용이 탁월하다. 미륵사나 금산사 미륵전 자리에서 실제 숯이 출토되었는데, 호은종택 자리가 원래 늪지였음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그 밑에도 숯이 깔려 있을 공산이 높다. 

아무튼 불교사찰이 아닌 유교 선비가 양택을 늪지에 잡았다는 사실은 상당히 이색적일 뿐 아니라 흥미로운 일이다. 매를 날려 터를 잡은 호은공도 정신적으로 상당한 경지에 있었던 분이었다고 짐작된다. 호(壺)는 호리병을 지칭한다. 따라서 호은(壺隱)이란 호리병을 가지고 숨었다는 뜻으로 해석되는데, 이는 다분히 도가적인 취향이 내포되어 있다. 호리병은 방랑과 은둔을 좋아하는 도사들의 휴대품이다.  

이렇게 볼 때 호은종택을 잡은 호은공은 주자 성리학을 연마한 유가의 선비이긴 하지만, 내면세계 한 부분에는 다분히 도가적인 취향을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런 저런 사실을 종합해 보면 호은공은 방외(方外)의 학문에도 일가견을 지닌 인물이었던 것 같다.

붓처럼 생긴 문필봉  

호은종택의 대문을 등지고 정면을 바라보면 아주 인상적인 봉우리 하나가 빛을 발하고 있다. 눈이 부실 정도의 봉우리다. 정신이 번쩍 나게 한다. 바로 문필봉(文筆峰)이라서 그렇다. 집터나 묘터의 정면에 위치한 산을 안산(案山)이라 하는데, 홍림산이라고 불리는 문필봉이 호은종택의 안산에 해당된다. 이 문필봉이 왜 눈부신가 하면, 그 모습이 너무 문필(文筆)처럼 뚜렷하고 대문의 정면 일직선상에 교과서처럼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문필봉은 글씨 쓰는 붓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쉽게 말하면 정삼각형 산이다.

삼각형 모양의 산은 오행으로 따지면 목형(木形)의 산이다. 풍수가에서는 문필봉이 정면에 있으면 공부 잘하는 학자가 많이 나온다고 본다. 문필봉이 안산으로 자리잡고 있는 지역에서 장기간 거주하면 그 기운을 받아 사람도 역시 문필가나 학자가 된다고 신앙하는 것이 풍수이다. ‘천지여아동일체 아여천지동심정(天地與我同一體 我與天地同心正, 천지와 내가 한 몸이요, 나와 천지가 같이 바른 마음)’이라는 한자 문화권의 세계관에 비추어보면 이러한 신앙은 납득이 간다. 

문필봉이 있으면 대개 그 동네에는 특출한 학자가 많이 나오기 때문에, 길을 지나가다가 우연히 문필봉이 보이면 나는 다짜고짜 그 동네에 들어가보는 습관이 있다. 그리고 이 동네에 어떤 학자가 살았느냐고 동네 사람에게 물어본다. 십중팔구는 누구 누구가 있었다고 대답한다. 신기할 정도다. 문필봉이 있어서 학자가 나왔는가, 아니면 학자들이 문필봉을 보고 일부러 찾아 들어가서 학자가 나왔는가. 어찌됐든 둘 중 하나는 틀림없다.

한국의 산천에서 주목할 현상은 삼각형 모양의 문필봉과 그 지역의 학자배출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점이다. 산천과 인물이 같은 쳇바퀴로 돌아간다. 왜 그렇게 되는 건지 중간 공식은 범부인 나로서는 확실하게 파악할 수 없지만, 드러난 결과를 놓고 볼 때는 분명 상관관계가 있는데 어쩔 건가! 문제는 중간과정의 공식을 현대인이 모른다는 사실이다.

조선시대에 문필봉이 보이는 터는 요즘 식으로 이야기하면 땅값이 엄청나게 비쌌다. 돈만 있다고 되는 문제도 아니었다. 그래서 서민들은 천신도 못했다. 특히 주실마을 앞에 보이는 문필봉 같으면 내가 살펴본 문필봉 가운데서도 최상급의 문필봉에 속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양이 뚜렷하고 방정하기 때문이다. 손으로 쓰다듬어도 보고 보듬어도 보고 싶다. 문필봉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를 것 같다. ‘문필망식(文筆忘食)’이라고나 할까. 

폐일언하면 주실마을 산세의 모든 정기는 이 문필봉 하나에 집중되어 있다. 주실에서 학자가 많이 배출된 것도, 박사가 14명이나 나온 것도, 인문학의 조씨 3인방도 이 문필봉의 정기와 관련 있다고 생각한다. 주실 마을 박사들은 고향에 오면 그냥 가지 말고 이 문필봉에 감사할 줄 알아야 할 것이다. 

주실 사람들도 이 문필봉을 특별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 올해 4월에 제작된 ‘주실마을’이라는 14페이지짜리 팸플릿 첫 페이지는 문필봉 사진으로 시작된다. 첫페이지에 실었다는 것은 그만큼 마을의 명물로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증거다. 마을 사람들은 어렸을 때부터 나이드신 어른들로부터 이 문필봉의 영험성에 대하여 귀가 아프도록 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주실 마을의 집들은 거의 이 문필봉을 향하여 방향을 잡고 있다. 문필봉을 안대(案帶)로 삼고 있는 것이다.


한편 일월산(日月山)에서 12km나 달려온 용맥(龍脈)은 주실에 와서 3봉우리로 맺혔다. 그리고 그 3개의 봉우리에서 제각기 인물들이 나왔다. 주실을 정면에서 보았을 때 제일 왼쪽에 있는 제1봉에는 노계(魯溪) 조후용(趙容, 1833∼1906년) 고택과 만곡정사(晩谷精舍)가 자리잡고 있다. 노계 고택에서는 주실마을 개화와 구국운동에 앞장섰던 두석(斗錫), 붕석(朋錫, 독립유공자 건국훈장), 용해(龍海) 등이 태어났고, 현대에는 운해(雲海, 의학박사, 한솔그룹)와 서울대 국문학과 조동일 교수의 생가이기도 하다. 

이 집은 ㅁ자집의 전형적 건축양식이라고 팸플릿에 소개되어 있다. 만곡정사는 조선후기 명문장으로 이름 높은 만곡(晩谷) 조술도(趙述道, 1729∼1803년)에게 학문을 배우기 위하여 문하생들이 뜻을 모아 창건한 정자다. 만곡은 옥천공의 손자로 이대산(李大山)을 사사했고 많은 문도를 길러냈다. 만곡정사는 원래 영양 원당리에 건립했는데 순조 초에 주실로 옮겼다.

만곡정사의 액자는 정조 때 영의정 번암 채제공(蔡濟恭, 1720∼1799년)이 직접 썼다. 채제공은 남인(南人) 출신으로 조선 후기의 명재상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채제공은 죽기 2년 전인 1797년에 78세의 노구를 이끌고 주실을 방문해, 그 기념으로 현판 글씨와 자기 친필 사인을 남겨 놓았다. 같은 남인으로서 정치적 동지이자, 학문으로 이름 높았던 만곡을 만나기 위해 적어도 열흘은 걸렸을 여로를 마다하지 않고 산넘고 물건너 이 심심 산골까지 찾아온 그 동지애와 의리 그리고 풍류가 느껴진다.  

200년 뒤의 어느 비오는 날, 글을 쓰기 위해 찾아와 처마 밑에서 그 현판에 어린 사연을 쳐다보고 서 있는 나그네의 소회(所懷)도 무량하기만 하다. 사실 채제공 뿐 아니라 당시 남인 계통 실학자인 이가환(李家煥)과 정약용(丁若鏞)도 주실 조씨들과 깊이 교유했다.

만곡정사는 제1봉이 내려온 제일 끝머리에 위치하고 있다. 만곡정사 뒤의 입수맥(入首脈)은 바위여서 기운이 다른 곳보다 강하다. 흙에 비해서 바위가 깔려 있으면 기운이 강한 것으로 본다. 강한 곳은 일반 가정집으로는 부적당하고, 젊은 학생들이 모여 공부하는 학교를 세우면 좋다.  

정사 앞으로는 냇물이 활처럼 돌아 흐르고, 앞에는 문필봉이 도합 4개나 포진해 있다. 하나도 아니고 4개씩이나 푸짐하게 도열해 있는 것이다. 주실마을 전체에서 볼 때 이 위치가 문필봉이 가장 여러 개 보이는 장소다. 학문하는 정사로는 제대로 잡은 터 같다.

호은종택과 옥천종택  

제2봉은 주실의 내룡(來龍) 중에서 가장 중심 자리다. 풍수에서는 항상 중심맥을 높이 친다. 호은종택과 주실에 있는 또 하나의 종택인 옥천종택(玉川宗宅)이 제2봉의 줄기에 자리 잡았다.

호은종택은 제2봉의 맥이 내려온 끄트머리에 자리잡았다. 호박을 보면 가지의 끝에서 열매를 맺듯이, 땅의 기운도 위 보다는 아래에 그리고 끄트머리에 맺힌다. 이 터가 주실의 센터라고 보면 된다. 지금은 집이 없어져서 빈터로 남아 있지만 옛날에는 호은종택 바로 뒤에도 집이 있었다. 이 집에서 국민대 조동걸 교수가 태어났다. 그런가 하면 호은종택 바로 우측에도 집이 한 채 있는데, 이 집에서 성균관대 조동원 교수가 태어났다. 조지훈, 조동걸, 조동원 교수가 앞 뒤 옆집에서 태어났다. 재미있는 일이다. 

옥천종택은 주실 입향시조 호은공의 증손자이며 장사랑 조군(趙)의 둘째 아들인 옥천(玉川) 조덕린(趙德, 1658∼1737년)의 종택이다. 옥천공은 문과에 급제한 후 승문원 정자(正字), 세자시강원 설서(說書), 홍문관 교리(校理), 승정원 우부승지(右副承旨)를 지냈다.

옥천공은 당시 시폐를 비판한 ‘십조소(十條疏)’의 주인공으로 유명하다. ‘십조소’ 중 열째 대목이 노론을 자극해 제주도로 유배당하던 도중 강진에서 서거하였다. 희당(喜堂, 草堂) 운도(運道, 月下) 진도(進道, 磨岩) 술도(述道, 晩谷) 거신(居信, 梅塢) 만기(萬基, 독립운동 유공자 건국훈장) 대봉(大鳳, 교육학박사, 영남대) 등의 명사가 이 종택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옥천공의 아들 희당이 아버지를 기려 별당을 세우고 당호를 초당이라 하였는데 그에 따라 아호도 초당이라 했다. 이걸 보아 만곡정사의 주인공인 조술도는 옥천공의 아들임을 알 수 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주실마을 양택 중에서 옥천종택의 좌향(坐向)만 특이하다는 점이다. 호은종택을 비롯해서 다른 집들은 거의 간인좌(艮寅坐, 南西向)를 놓았는데, 옥천종택만은 거의 남향(南向)에 가까운 임좌(壬坐)다. 내룡도 2봉에서 맥 하나가 내려오다가 중간쯤에서 남쪽으로 70도 각도로 틀었는데, 그 꺾은 지점에 자리잡았다. 그러므로 옥천종택의 안대(案帶)는 문필봉이 아니다. 

대신 토금체(土金體, 산의 끝이 약간 평평한 모습)의 안대가 놓여 있다. 이러한 안대는 보는 사람에게 심리적 안정감을 부여한다. 그래서 중후하고 의지가 굳은 인물이 나온다고 한다. 안대 높이도 호은종택에 비해서 그렇게 높지 않고 적당하다. 호은종택은 안산인 흥림산이 높아서 약간 답답한 감이 있는데 비해서 옥천종택은 전망이 훨씬 시원하다. 툭 트였다. 주실에서 가장 전망좋은 집인 것 같다. 

마을에 하나뿐인 우물  

옥천종택에서 주목할 우물이 하나 있다. 마당 오른쪽 담장 곁에 있는 자그마한 우물이다. 특별히 깊은 우물은 아니지만, 이 우물은 주실에서 하나뿐인 우물이라는 특징이 있다. 옛날부터 주실마을에는 이 우물 하나뿐이었다. 60여 가구 사는 동네에 우물이 하나뿐이니 물 길어다 먹기가 상당히 불편했을 텐데도 우물을 여러 개 파지 않고, 오로지 이 우물 하나만 사용하였다. 

현재에도 주실에는 우물이 없다. 대신 50리 떨어진 곳에서 수도파이프를 연결하여 식수로 사용한다. 다른 동네 같았으면 젊은 사람들이 불편을 견디지 못하고 진작에 마당 한가운데 지하수 관정이라도 박았을 텐데 주실에서는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았다.

이유는 무엇인가? 풍수적인 원리 때문이다. 주실은 배 모양의 형국이므로 우물을 파거나 지하수를 파면 배 밑바닥에 구멍이 뚫린다고 믿어 왔다. 구멍이 뚫리면 배는 침몰하게 마련이다. 고로 우물을 파면 인물이 안 나온다고 생각한다. 이 생각을 현재까지 굳게 가지고 있다. 복제인간을 만들어낸다고 하는 이 과학시대에도, 이처럼 신화적인 사고를 지키고 있다니 놀랍기만 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보면 조상의 유업을 지키려는 정신이 살아 있다는 징표다. 1년이 멀다 하고 세태가 바뀌는 요즘 400년의 전통을 지키는 유서깊은 마을이라 무언가 다르긴 다른 마을임을 이런 데서도 실감한다. 무언(無言)의 법도와 기강이 살아 있음을 느낀다.

저녁해가 서산에 기울어갈 무렵 인적 없는 옥천종택을 이리 저리 살피고 있는데 갑자기 시골 아주머니가 대문을 박차고 들어온다. 긴장한 표정의 아주머니는 나를 한참 살펴보더니 한마디 꺼낸다. 

“아이고 나는 물건 훔치러 온 도둑인 줄 알았네요.” 

“저 도둑놈 아니고 답사 나온 사람입니다.” 

“아 그래요, 얼마 전에 도둑놈이 와서 현판을 뜯어간 적이 있어요.”

이야기 끝에 아주머니는 잠깐 어디로 가더니 음료를 한 병 사와 먹으라고 준다. 옥천공 후손으로 옥천종택을 관리하고 있는 조석걸씨(63) 부인이다. 털털하고 마음씨 좋은, 시골의 전형적인 어머니 모습이다.


유서깊은 동네에 오면 하룻밤 자고 가야 한다. 낮에 잠깐 들어 휑하니 사진만 찍고 떠나기보다는 하룻밤 자보아야 그 동네의 정기를 느낄 것 아닌가. 그러나 주실에는 여관이 없어서 숙소가 마땅치 않던 차에, 염치 불고하고 아주머니께 잠 좀 재워줄 수 있느냐고 부탁드렸다. 그리하여 그날 밤은 조석걸씨 사랑방에서 자게 되었다. 

주인양반 조석걸씨 역시 공무원 하다가 정년퇴직하고 고향에서 농사도 짓고, 주실마을의 여러 문화재와 옥천종택도 관리하는 분이다. 사랑방에서 조석걸씨와 옥천공에 관해 이야기하던 끝에 주실 조씨들의 기질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우리 집안은 대대로 청렴하고 강직하게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나도 새끼들이 셋인데 공무원 박봉으로 어렵게 애들 대학을 마쳤죠. 용돈 한번 넉넉하게 준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새끼들한테 항상 강조했습니다. 아무리 어렵더라도 우리 집안은 절대 부정한 방법으로 돈 벌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고 말입니다. 

막내 아들놈이 중학교 교사로 있습니다. 그런데 이 애가 학부형들이 성의 표시로 갖다주는 봉투를 전혀 안 받았던 모양입니다. 하도 거절을 하니까 지나치다고 생각했던지, 나중에는 교장선생이 따로 부르더랍니다. ‘어이 조선생, 너무 그래도 못쓰네’하고 타이르더라는 이야기를 저한테 합디다.” 

혹자에 따라서는 좀 지나치다고 평가할 수도 있는 대목이지만, 삼불차로 상징되는 370년 지조가 30대 초반의 조석걸씨 막내아들에게까지 유전(遺傳)되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신교육의 전당 월록서당  

마지막으로 제3봉은 매방산이라 일컬어진다. 이 봉우리에는 월록서당(月麓書堂)이 자리잡고 있다. ‘주실마을’이라는 팸플릿에서 조동걸 교수는 월록서당을 이렇게 설명한다.

“1765년에 한양 조씨, 양성 정씨, 함양 오씨가 협력하여 일월산 기슭을 업고 흥림산을 안대하여 낙동강 원류인 장군천을 끌어안은 곳인 주실 동구에 세운 서당이다. 조선후기 실학의 학풍과 더불어 교육의 대중화를 위한 서당 건립이 전국적으로 확산될 때 주실에는 월록서당이 건립되어 이 고을 교육의 중심을 이루었다.… 

건물은 겹집이며 팔작집으로 지었다. 내부 중앙은 강당이고 양편에 넓은 방이 꾸며져 있는데 좌편방에는 존성재(存省齋), 우편에는 극복재(克復齋)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구한말 이후에는 신교육의 전당으로 변신하였다. 식민지 시기에는 조석기(趙碩基)가 설립한 배영학당이 있었는데, 배영학당은 1927년에 조선농민사로부터 모범야학으로 표창을 받기도 하였다. 광복 후에도 야학은 계속되었던 한편 은화청년회와 주실 소년회의 연극과 음악회가 열리던 문화의 전당으로 구실하였다.” 

주실의 세 봉우리를 다시 정리하면 1봉에는 만곡정사와 조동일 교수의 생가가 있고, 2봉에는 호은종택과 옥천종택, 그리고 조동걸과 조동원 교수 생가가 있으며, 3봉에는 개화기 이후로 신교육의 전당인 월록서당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조선의 지령(地靈)이 헛되지 않아 봉우리마다 열매가 맺혔다…. 주실마을을 다녀온 지 일주일이 지났는데도 아직까지 가슴이 뿌듯하다. 지조를 생각해본다




2. 전남 해남의 고산 윤선도

천문과 풍수 녹아든 녹색의 장원


1만평의 집터에 50만평에 달하는 장원(莊園)을 가진 윤선도 고택에서는 호방함과 소요유(逍遙遊)의 쾌감을 맛볼 수 있다. 더욱이 청룡 백호 주작 현무라는 ‘유교적 만다라’의 세계를 잘 보여주는 고산 고택은 천문과 지리에 해박한 옛 사람들의 지혜도 엿볼 수 있다.


진(晉)나라 때 장한(張翰)이란 인물은 낙양에서 벼슬살이하다가 가을 바람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는 고향인 오중(吳中)의 순채국과 농어회가 간절하게 생각났다. 그는 “인생은 자기 뜻에 맞게 사는 것이 귀중하다”고 말하면서 당장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버렸다.

소슬한 가을 바람이 불 때면 나도 살며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든다. 누군가 그 돌아갈 곳이 어디냐고 묻는다면, 나는 ‘녹색(綠色)의 장원(莊園)’이라고 대답하련다.

내가 생각하는 녹색의 장원은 전라남도 해남에 있는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 1587∼1671년) 고택이다. 윤선도 고택은 그야말로 녹색의 장원이라고 불릴 만한 격(格)을 갖춘 집이다.

그 격은 건물 그 자체가 아니라 고택이 자리잡고 있는 터에서 전해지는 호방감에서 나온다. 그동안 답사해본 남한의 100여군데 명택 중에서 가장 호방한 터에 자리잡은 집을 꼽아보라면 나는 단연 윤선도 고택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집터 자체의 규모만 따지면 1만여평 되지만, 집터를 둘러싼 ‘전체의 터’는 어림잡아 50만평 정도 되지 않나 싶다. 여기서 말하는 전체의 터라는 것은 사신사(四神砂), 즉 청룡(靑龍, 동방) 백호(白虎, 서방) 주작(朱雀, 남방) 현무(玄武, 북방)가 둘러싸고 있는 가운데 면적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윤선도 고택은 사신사(四神砂) 내의 면적이 무려 50만평에 달하는 정원을 가진 장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호방함만을 놓고 볼 때 이 집은 호남을 대표하는 고택일 뿐만 아니라, 한국을 대표하는 고택이라고 생각한다.  

이처럼 호방한 고택은 입지 조건상 넓은 평야지대가 많은 호남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고 여겨진다.

이름난 고택이 많기로는 단연 영남이 앞선다. 그러나 영남은 호남에 비해 산들이 많고 들판이 좁아서 집터가 오밀조밀한 짜임새가 있는 데 비해 호방한 맛은 적다. 거꾸로 호남은 평야가 많아서 짜임새는 적지만 상대적으로 호쾌한 터에 자리잡은 집이 많다.

근세에 회자되었던 “경상도 부자는 3000석을 넘기 어렵지만, 전라도 부자는 1만석이 넘는다”는 말도 영·호남의 지리적 차이 때문일 것이다. 아무튼 윤선도 고택은 평야가 많은 전라도 지역에서 만석꾼 집의 특성을 전형적으로 드러내는 고택임이 틀림없다.

남도의 예술과 학문의 요람  

예술은 식후사(食後事), 밥 먹고 난 뒤의 일이라고 한다. 먹고 살기도 바쁜데 어떻게 미를 추구하겠는가! 예술뿐만 아니라 학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런데 해남 윤선도 고택에서 조선 후기 호남을 대표하는 예술가들이 배출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볼 수 있다. 

흔히 남도를 예향(藝鄕)이라고 하는데, 그 근원을 추적해 들어가면 윤선도 고택과 만나게 된다. 윤선도 고택은 호남 예술정신의 요람이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며, 그러한 예술정신의 표출 배경에는 50만평의 광활한 전망을 가진 녹색의 장원이 자리하고 있다.

중국의 경우를 보더라도 문화 창달을 위해서는 장원의 존재가 중요하다.

중국정신을 대표하는 ‘여씨춘추(呂氏春秋)’ ‘회남자(淮南子)’, ‘직하도가(稷下道家)’ 같은 저술은 대규모의 학자 그룹이 모여 만든 일종의 집단 저술이라 볼 수 있는데, 많은 학자들이 한자리에 모일 수 있었던 것은 여불위(呂不韋, ?∼B.C. 235년), 유안(劉安, B.C. 179∼B.C. 122년)과 같은 패트런(patron, 후원자)이 있었기 때문이다. 짐작컨대 그 패트론들은 틀림없이 많은 학자들을 수용할 수 있는 널따란 장원을 소유하고 있었을 것이다. 중국의 맹상군도 3000식객을 거느렸다고 하는데, 그 저택은 어느 정도 규모였을까 궁금하다. 맹상군도 장원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그 많은 식객을 수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윤선도 고택 뒤로 조성된 9000평의 비자나무숲을 산책하면서 또 한가지 생각이 떠오른다. 이 정도 장원이 있다면 한가롭게 유유자적할 수 있는 생활이 가능하므로, 굳이 서울에 올라가서 아등바등 벼슬살이에 집착할 필요성이 별로 없다는 점이다. 사실 조선시대의 벼슬, 그건 상당히 골치아픈 직업이었다. 자칫하면 당쟁과 모략의 그물에 걸려 제명에 못살기 십상이었다.

그런데 소요유(逍遙遊)의 쾌감(快感)을 알아버린 사람은 결코 조직사회의 속박에 묶이지 않는다. 고향의 순채나물과 농어회가 기다리고 있는 사람에게는 눈에 불을 켜고 벼슬에 집착하지 않을 것 같다.  

윤선도의 ‘어부사시사’  

윤선도 고택의 내력을 살펴보면 자못 그런 정서가 물씬 풍긴다.

강진 일대에 흩어져 살던 윤씨들이 해남군 해남읍 연동리(蓮洞里)에 들어와 터를 잡기 시작한 것은 16세기 초반 어초은(漁樵隱) 윤효정(尹孝貞, 1476∼1543년)에 의해서다. 고기나 잡고 땔나무나 하면서 은둔하겠다는, 다분히 도가적인 취향의 호를 가졌던 윤효정. 그러나 후손들이 실제 고기나 잡고 땔나무나 하는 생활을 한 것은 아니다. 이후로 윤선도에 이르기까지 5대에 걸쳐 내리 과거 급제자가 배출되면서 부와 명예를 갖춘 명문가로 화려하게 부상한다.

그러다가 고산 윤선도 대에 와서 은둔이 시작된다. 정치적으로 남인 계보에 속해 있던 고산은 당쟁의 와중에서 노론인 송시열에게 밀리면서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해남으로 귀거래사한 것이다.  

그러나 고산의 귀거래사는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처럼 생활고에 시달려야 하는 가난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벼슬살이라고 하는 사회적 욕구를 보상해줄 수 있는, 자연적 욕구인 소요(逍遙)의 즐거움이 기다리고 있었다고나 할까?

그는 보길도에다 낙서재와 동천석실, 세연정을 지어놓고 신선놀음을 하였는가 하면, 해남 연동의 종택을 증축한다. 윤선도는 고향에 돌아와 ‘귀거래사’ 대신 국문학상 유명한 한글가사인 ‘어부사시사’를 남긴다. 

‘취하여 누웠다가 여울 아래 내려가려다/ 배 매어라 배 매어라/ 떨어진 꽃잎이 흘러오니 선경이 가깝도다/ 찌거덩 찌거덩/ 인간의 붉은 티끌 얼마나 가렸느냐’(윤선도, 어부사시사 봄노래)

윤선도의 예술혼은 그의 증손인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 1668∼1715년)가 이어받는다. 윤두서야말로 실제 이 집에서 거주한 주인이다. 이 집에서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생애 대부분을 여기서 보냈으니까.


윤두서는 그의 자화상으로 유명하다. 극사실주의적인 수법으로, 하도 정밀하게 그려서 한국 최고의 초상화라고도 한다. 280년 전에 붓과 먹으로 그린 그림이 라이카로 찍은 사진보다 더 강렬한 인상을 준다. 특히 자신의 눈과 수염을 그린 부분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강렬한 느낌이 오도록 하는 그 무엇인가가 깃들어 있다. 

관상학에서는 남자의 관상에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로 눈을 본다. 눈에는 그 사람의 정기가 어려 있기 때문이다. 윤두서의 자화상을 보면 눈에서 정기가 품어 나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정도다. 눈을 부시게 하는 빛이 나오는 것 같기도 하다. 아마도 그림이 살아 있다고 하는 경우가 바로 이를 두고 말하는 듯싶다. 40대 남자의 수염 한올한올을 일일이 그려놓은 모습도 그렇다. 그 한올한올에서 굽히지 않는 야성과 아울러 정제된 섬세함이 느껴진다.

윤두서의 미술적 자질은 그의 손자인 윤용(尹溶, 1708∼1740년)에게까지 이어진다. 윤선도에서 윤용에 이르기까지 거의 150년 가량 예맥(藝脈)이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집의 사랑채에 걸린, ‘예업(藝業)’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나무 현판은 이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징표다. 

이 집안은 남도의 예술뿐만 아니라 조선 후기 실학사상의 요람이기도 하였다. 조선 후기의 실학은 주로 사색당파 중 남인들에 의해서 발전되었는데, 해남윤씨 집안이 전라도 남인의 중심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납득이 간다. 

먼저 윤두서와 밀접한 인간관계를 맺었던 인물이 옥동(玉洞) 이서(李, 1662∼1723년)다. 이서는 실학의 대가이자 ‘성호사설’을 쓴 성호(星湖) 이익(李瀷, 1681∼1763년)의 차형(次兄)이다. 이서는 윤선도 고택에 걸려 있는 ‘녹우당(綠雨堂)’이라는 당호와 이 글자를 새긴 현판을 직접 만들어준 사람이다.  

녹우당이라는 현판 글씨는 실학과 예술의 결합을 나타내는 작품이라고 평가받고 있는데, 집 뒤의 비자나무숲을 스치는 바람소리가 마치 비오는 소리 같다고 해서 붙여진 당호는 참으로 운치있게 지어진 이름같다. 

이 두 사람은 형제들끼리도 친해서 윤두서의 실형(實兄)으로 묘갈명을 썼던 윤흥서(尹興緖, 1662∼1733년), 이익과 이서의 장형인 이잠(李潛, 1659∼1706년) 등이 단짝이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윤두서의 부인인 전주이씨도 실학과 관련이 깊다. 부인은 바로 실학의 선구자이며 ‘지봉유설’의 저자인 이수광(李光, 1563∼1628년)의 증손녀다. 이 집안의 실학과의 관련은 여기서 끝나는 게 아니다. 

실학의 완성자라고 일컬어지는 다산 정약용(1762∼1836년)이 윤두서의 외증손이라는 사실도 주목해야 한다. 정약용의 어머니는 윤두서의 다섯 번째 아들인 덕렬(德烈)의 따님이다.

다산이 체계적이면서도 조선조를 통틀어 가장 방대한 분량의 저술을 남길 수 있었던 배경에는 외갓집의 영향이 있었을 개연성이 높다. 아마도 다산은 강진 유배생활 중에 외가인 녹우당에 비치되어 있던 수많은 장서들을 열람했을 가능성이 높다. 외갓집에 온축되어 있던 학문적 토양 위에서 조선 후기 사상계의 거인인 다산이 배출되었다고 한다면, 녹우당은 다산의 학문적 젖줄이었던 셈이다. 

이를 종합해보면 윤선도 고택, 즉 녹우당은 조선 후기 호남을 대표하는 예술적 성취와 실학사상의 산실이었음을 부인키 어려울 듯하다. 평지돌출은 어렵다. 한시대를 이끌 수 있는 사상가가 배출되기 위해서는 그만한 바탕이 있어야 한다. 그 바탕이 윤선도 고택, 즉 녹우당이었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사신사(四神砂)가 완비된 집터  

윤선도 고택이 동양적 의미의 녹색 장원이라 불릴 수 있는 입지적 특징은 서두에서 잠시 언급한 것처럼 무엇보다도 사신사가 아주 훌륭하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사신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녹우당이 지닌 특징을 제대로 읽어낼 수 없다고 본다.

사실 서구의 건축이론을 가지고 녹우당을 왔다갔다해봐야 별로 건질 만한 것이 발견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처음에 이 집터를 잡은 사람의 머릿속에는 서구의 건축이론이 전무한 대신 사신사라고 하는 풍수적 원리가 깊이 박혀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은 언급은 서구이론에 의존해서 자신의 건축을 설명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동양의 건축가들에게 따끔한 일침을 가하고 있다. 

“자신의 커뮤니티에 대한 인지방식이 없이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 방식으로 자신의 커뮤니티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인식하는 사회는 결국 다른 사람들의 사회를 위한 종속체와 기생체가 되고 만다”(‘중국 고전건축의 원리’) 

전통 건축분야에선 자신의 커뮤니티에 대한 인지 방식이 바로 풍수다. 적어도 한국에서는 전통건축을 이해하려면 풍수를 알아야만 종속체와 기생체를 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풍수적인 안목에서 볼 때 윤선도 고택 터는 먼저 뒷산인 현무에 해당하는 산부터가 아주 잘생겼다. 뒷산은 덕음산(德陰山)이라고 불린다. 집터에서 바라볼 때 대략 200m 높이의 산이라서 너무 높지도 낮지도 않은 산이다. 해남 대흥사가 자리잡고 있는 두륜산에서 내려온 맥이다.

왜 이름이 덕음산일까? 여기서 음(陰) 자는 그늘로 해석되기 때문에 덕음산은 ‘덕의 그늘’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수양산 그늘이 강동팔십리’라고 했듯이, 윤선도 고택은 덕의 그늘에 쌓여 있는 집이 된다. 

산 이름에 굳이 덕(德) 자를 집어넣은 이유도 풍수적 맥락에서 찾아볼 수 있다. 덕음산은 토체(土體)의 형상을 하고 있다. 산의 정상 부분이 한 일(一) 자처럼 평평한 산을 풍수에서는 토체라고 부른다. 흔히 두부를 잘라놓은 것 같다고 한다. 

그런데 음양오행에서 토(土)는 덕을 상징한다. 수(水)의 느긋함과, 화(火)의 정열, 목(木)의 고집, 금(金)의 결단성을 모두 가지고 있는 것이 바로 토다. 토는 어느 한쪽에 치우지지 않으므로 균형감각이 있다고 본다. 그래서 토를 덕이라고 표현한다. 무조건 후하게 베푸는 것이 아니라 균형 감각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게 덕의 덕목이기 때문이다.

선과 악, 급함과 느림, 미와 추, 이타(利他)와 이기(利己)의 중간에서 균형을 잡는다는 것은 사실 쉽지 않다. 동양의 제왕학에서는 이러한 균형감각을 제왕이 갖춰야 할 덕목으로 꼽았고 그 상징이 토다. 

그래서 풍수가에서는 집 뒤의 현무에 해당하는 산인 내룡(來龍)이나, 또는 집 앞의 주작에 해당하는 안대(案帶)가 평평한 두부 모양의 토체 형상일 경우 이를 매우 귀하게 여겼다. 이른바 말하는 ‘일자문성(一字文星)’이 이것이다. 

내가 보기에 덕음산은 완전한 토체의 모습은 아니지만 돌출된 바위나 울퉁불퉁한 기복이 없는 산이다. 전체적으로 단정함과 깔끔함이 돋보이는 산이다. 덕음산에서 풍겨오는 이미지는 중후하고 세련된 신사의 인품을 보는 것 같다고나 할까? 

먹을거리 풍부한 노적봉  

현무 다음으로는 좌청룡(左靑龍)과 우백호(右白虎)의 맥을 살펴보아야 한다. 좌청룡의 좌측이라는 방향은 집을 등지고 보았을 때의 왼쪽이다. 그러니까 집을 마주보는 방향에서는 우측에 해당한다. 우백호는 좌청룡과 반대 방향이다. 

좌청룡·우백호의 실질적인 기능은 바람을 막는 역할에 있다. 그러니까 좌측과 우측에서 불어오는 바람인 라이트 훅과 레프트 훅을 막아주는 역할이 좌청룡, 우백호다. 만약 이게 시원찮으면 좌우에서 바람이 몰아쳐 마침내 레프트·라이트 훅을 맞게 된다. 그러므로 좌우의 바람을 막지 못하면 그 터는 오래 가지 못한다고 본다. 

특히 종교적 수행을 위주로 하는 불교사찰이라면 몰라도 사람이 거주하는 일반 양택의 경우 좌우 방풍(防風)은 빠트릴 수 없는 중요한 기능이다. 바람을 막아주지 못하면 기운이 흩어진다. 울타리가 없으면 폭풍의 언덕처럼 되고, 막아주면 온화하며 어린아이의 요람처럼 아늑하다. 

더욱 좋은 경우는 청룡 백호가 겹겹이 막아주는 경우다. 한 겹보다는 두 겹이, 두 겹보다는 세 겹이 좋은 것은 당연하다. 청룡 백호가 여러 겹으로 둘러쌀수록 좋다. 이럴 때 두껍다고 표현한다. 윤선도 고택의 지형을 자세히 살펴보면 덕음산에서 내려온 청룡 백호가 세 겹으로 집터를 둘러싼 것을 볼 수 있다. 그만큼 두꺼운 형세의 터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여기서 백호에 관한 여담 하나를 소개하고 넘어가자. 전북 고부의 두승산(斗升山)에 올라가면 해발 500m 정상 부근에 유선사(遊仙寺)라는 고찰이 있는데, 이 절의 우백호 쪽에는 석고로 만든 3m 정도의 호랑이 상이 산을 내려오는 모습으로 조성돼 있다. 백호의 맥(脈)이 아주 약해서 인위적으로 호랑이 상을 만들어 보비(裨補)한 것이다. 이것은 방풍기능은 물론 주술적인 효과까지를 염두에 둔 사례에 해당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남쪽의 주작을 살펴보자. 주작에 해당하는 산은 보통 안산(案山)라고 부른다. 안산은 좌정하고 앉아 있을 때 정면에 마주 보이는 산이다. 안산의 기능을 비유하자면 마치 볼록렌즈와 같다. 볼록렌즈는 집터를 향해 빛을 반사해주는 작용을 한다. 반사한다는 것은 집을 향해 기(氣)를 쏘아 보내준다는 의미다. 1∼2년을 쏘아 보내준다면 그 효과가 미미할지 몰라도 수십년을 계속해서 쏘아 보내주면 그 효과를 무시할 수 없다. 인체의 바이오 리듬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안산은 너무 높아도 안 되고 너무 낮아도 안 된다. 적당한 높이가 좋다. 툇마루에 앉아 있을 때 눈높이 정도 되거나 그보다 약간 낮아도 좋다. 안산이 너무 높으면 위압감이 들고 답답한 느낌을 준다. 반대로 너무 낮으면 허한 감이 들어서 안정감이 적다. 뿐만 아니라 정면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차단하는 기능이 약해진다. 녹우당의 안산 높이는 적당하다. 높지도 낮지도 않다. 더구나 그 생긴 모습도 나락을 쌓아놓은 노적봉처럼 생겨서 더욱 좋다. 노적봉은 먹을 것이 풍부한 것으로 본다


윤선도 고택의 특징은 청룡 백호 주작 현무라는 사신사가 이상적으로 구비되었다는 점에 있고, 이를 달리 표현한다면 ‘유교적 만다라’라 할 수 있다. 

만다라는 티베트불교에서 우주의 총체성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그림을 말한다. 기하학적인 도형과 무늬를 사용하여 우주의 삼라만상을 표현하고 있는 게 만다라다. 만다라를 한참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내가 우주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우주는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 우주의 중심에 있다는 느낌은 완벽한 안정감을 준다. 완벽한 안정감이야말로 니르바나(열반)의 즐거움이 아니겠는가. 이처럼 만다라는 우주 중심에 있는 나를 불교식으로 표현하는 방식이다. 

그렇다면 인도나 티베트가 아닌 한자문화권의 세계에서는 어떤 식으로 표현했을까? 윤선도 고택을 조망하면서 유교적인 방식은 과연 무엇일까를 곰곰이 생각해 본다. 나는 유교적인 만다라가 청룡 백호 주작 현무가 아닐까 싶다. 

이 사령(四靈)은 우주의 동서남북을 가리킨다. 우주의 동쪽 끝에는 청룡이 있고, 서쪽 끝에는 백호가 있고, 남쪽에는 주작, 북쪽에는 현무가 있다고 여긴다. 따라서 사령(사신사)이 둘러싼 한가운데에 집터를 잡는다는 것은 우주의 중심에 자리를 잡는 것과 같은 의미가 된다.

아마도 유교적 만다라는 바로 풍수적 만다라이고, 풍수적 만다라는 자기를 둘러싼 동서남북의 산들, 즉 사신사가 완벽하게 집터를 둘러싼 형국이 해당된다. 이 안에 들어가 있으면 우주의 자궁 속에 들어가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사실 이만한 터 같으면 경주의 불국사가 들어와 있어도 될 만한 자리다. 그런데 개인 집터가 자리잡고 있다. 불교가 성하던 고려시대 같았다면 절이 들어섰을 자리지만, 유교의 조선조가 들어서면서 유가 선비의 집이 된 것이다. 고려에서 조선으로, 불교에서 유교로 패러다임이 바뀌면서 사찰이 들어설 터에 집이 들어섰고, 출세간적인 가치지향에서 입세간적인 가치지향으로 전환된 것이다. 

불교는 집을 떠나서 사찰에 들어가 무아를 깨닫고자 하는 시스템이지만, 유교는 집을 떠나지 않고 집안에서 수신제가(修身齊家)하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불교의 중심이 사찰에 있다면, 유교의 중심은 집(家)이다. 삶과 문화의 단위가 집을 통해 이루어진다.

따라서 유교적인 관점에서 볼 때 집이라는 곳은 밥 먹고 잠이나 자는 거주공간만이 아니라 거경궁리(居敬窮理)라는 유교적 수양을 실천하는 성스러운 공간인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 데나 집터를 잡을 수 없다. 성스러운 장소에 잡아야 한다. 

유교적 성스러움을 확보하기 위한 조건 중의 하나는 사신사라는 풍수적 장치가 조화를 이룬 곳이다. 불교를 극복하고 유교로 넘어온 조선시대 선비들은 양택(陽宅)을 이런 각도에서 생각하였고, 녹우당은 그러한 유교적 성스러움을 전형적으로 갖춘 집이라고 보아야 한다.

하늘에 기원 둔 풍수론  

한편으로 풍수에서 말하는 사령(청룡 백호 주작 현무)은 그 근원이 땅에 있는 게 아니라 하늘에 있다. 유교적 만다라의 근원도 하늘에 있다. 사령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늘을 연구해야 한다고들 한다. 그래서 ‘도의 근원은 하늘에서 나온다(道之大原 出於天)’라는 말이 하늘을 연구하는 사람에게는 절절하게 다가온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천(天)의 개념은 인격적인 상제나 하느님이 아니다. 천의 개념은 다름 아닌 천문(天文)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 동양고전에 해박한 오초(吾超) 황안웅(黃安雄) 선생의 견해다. 그러므로 천문을 연구하지 않고는 지리를 제대로 이해하기 힘들다고들 말한다.

동양의 고천문학(古天文學)에서 특별하게 생각하는 별자리는 황도대에 걸쳐 있는 이십팔수(二十八宿)와 북두칠성(北斗七星)이다. 하늘의 둥그런 원이 이십팔수이고, 이 이십팔수를 북두칠성이 마치 시계바늘처럼 돌아가며 가리킨다. 이십팔수가 손목시계의 둥그런 원이라면, 칠성은 시간을 가리키는 시계바늘 역할을 한다. 손목시계는 12개(12시)의 눈금이 있지만 하늘의 시계에서는 28개(28시)의 눈금이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지금 시간이 몇시인가를 알려면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아야 하지만, 지금 우주시(宇宙時)는 몇시인가를 알려면 이십팔수를 들여다보아야 한다. 

하늘의 가장자리 둘레인 이십팔수는 크게 동서남북 4개의 구획으로 나뉜다. 하늘의 동쪽에 28수 중 7개의 별이 배당되고, 나머지 서쪽·남쪽·북쪽에도 각기 7개가 배당된다.

먼저 동쪽에 있는 7개의 별 이름은 각(角) 항(亢) 저() 방(房) 심(心) 미(尾) 기(箕)이며, 별자리 전체 모습을 용의 모습에 비유해 청룡이라 한다. 이를 테면 각은 용의 뿔에 해당하고, 항은 용의 목, 저는 가슴, 방은 배, 심은 엉덩이, 미는 꼬리끝이라고 본다.

그런데 1세기경에 성립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사전인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는 용에 대해 ‘춘분날 하늘로 올라가 추분이 되면 연못에 잠긴다(春分而登天 秋分而潛淵)’고 하고 있다. 정말 용이 존재해서 춘분날 하늘로 올라가는가? 이는 실제 용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별을 가리키는 말이다. 정확하게는 동방의 7별(각·항·저·방·심·미·기)인 청룡이 춘분날 하늘에 올라가서 추분날 내려오는 것이다. 

“춘분날부터 매일 저녁 6시부터 1도씩 높이 솟아오르던 용은 약 3개월 만에 자신의 전모를 완전히 드러내게 된다. 하짓날 저녁 6시, 아직 여름 해가 서산마루로 떨어지지 않았을 뿐 점차 어둑어둑해지는 하늘에 각항저방심미기의 용의 자태가 그 머리는 드높은 남쪽하늘 위에 두고 꼬리는 동쪽의 산등성이까지 서서히 그 장대한 모습을 번쩍이는 비늘과 함께 드러낸다. 그후 다시 3개월후 추분날 저녁 6시. 지는 해를 따라 서산 마루에는 용의 대가리가 마치 떨어지는 해를 잡아먹을 듯 부지런히 날아가는 모습이 눈에 보인다.”(‘음양오행으로 가는 길’)

마찬가지로 서쪽의 별자리 이름은 규(奎) 루(蔞) 위(胃) 묘(昴) 필(畢) 자() 삼(參)인데, 그 모습을 호랑이에 비유해 백호라고 여긴다. 남쪽은 정(井) 귀(鬼) 유(柳) 성(星) 장(張) 익(翼) 진(軫)으로 공작의 모습에 비유해 주작이라고 한다. 북쪽은 두(斗) 우(牛) 여(女) 허(虛) 위(危) 실(室) 벽(壁)으로 거북의 모습에 비유해 현무라고 여긴다. 

이 동서남북 가운데에는 하늘의 중심인 자미원(紫微垣)이 자리잡고 있다. 옛날 선비들은 28수를 주문처럼 외우고 다녔다. “각항저방심미기 두우여허위실벽 규루위묘…” 이렇게 외우면 복이 온다고 여길 만큼 많이 암송했다. 

이처럼 풍수에서 중시하는 사신사는 하늘의 천문에 그 근원을 두고 있다. 하늘의 별자리에 있는 4마리의 동물이 땅에 내려온 것이 사신사인 것이다. 따라서 사신사의 풍수적 의미를 종합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땅만 가지고 되는 일이 아니고, 천문에 대한 지식이 필수적이다.

천문을 관측한 윤선도  

녹우당의 주인이었던 윤선도나 윤두서가 천문에 대해 전문가적 식견을 지니고 있었다는 징후는 여러 곳에서 포착된다. 먼저 윤선도를 보자. 그는 서울에서 벼슬살이를 그만두고 고향으로 귀향하면서 ‘남귀행기(南歸記行)’라는 시를 남긴 바 있다. 그 첫 단락이 이렇다.

‘만력 39년에/ 북두칠성의 두병(斗柄, 손잡이)이 자방(子方)을 가리키는 7일이라/ 거문고를 수선하고 약을 구입했으니 내 일은 마쳤구나/ 멀리 부모 계신 곳 그리며 해남으로 향하네(萬歷紀年三十九 斗柄揷子日有七 修琴賣藥吾事畢 遙念庭 向南國)’.

여기서 ‘두병삽자일유칠(斗柄揷子日有七)’이라는 대목이 눈길을 끈다. 고산이 밤 하늘의 북두칠성 움직임을 면밀하게 관찰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두병(斗柄)이란 북두칠성의 손잡이 부분을 가리키는데, 정확하게는 북두칠성의 7개 별 중 제6번째 별(武曲星)과 제7번째 별(破軍星)로 이어지는 부분을 말한다. 이 부분을 시침(時針)이라고 한다. 시계바늘과 같은 기능을 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예를 들면 입춘날 저녁 술시(戌時, 저녁 7~9시)에 북두칠성의 두병이 가리키는 방향을 보면 정확히 패철상의 인방(寅方)을 가리킨다. 인방은 음력 1월이다. 북두칠성이 가리키기 때문에 정월이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고산이 밤하늘을 쳐다보는 바로 그 날에는 북두칠성의 시침(두병)이 자방(子方, 정북쪽)에 꽂혀 있었다는 말이다. 따라서 고산이 서울을 출발하던 그 날 시침이 정북쪽을 가리키는 날이었던 것이다. 이 표현은 고산이 서울을 떠나 해남으로 출발하는 날짜를 표시하기 위한 용도였다. 시(詩)에다 적어놓을 정도로 보아서 고산이 평소에도 천문의 흐름을 유심히 관찰하는 습관이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이렇게 우주시가 몇시인가를 알아야 인간세계에서 돌아가는 역사시(歷史時)를 알 수 있다는 관점이 동양 고천문학자(古天文學者)들의 세계관이다. 우주시와 역사시는 톱니바퀴처럼 서로 맞물려 돌아간다는 사고, 즉 천문현상과 인간의 삶이 서로 연관관계에 놓여 있다고 보는 천인상관적(天人相關的) 사상이 고천문학인 것이다. 

윤선도뿐만 아니라 윤두서도 천문에 깊은 조예가 있었던 듯싶다. 윤선도 고택에는 유물전시관이 별도로 마련돼 있는데, 고산과 공재가 보았던 많은 장서들이 눈을 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나의 관심을 끄는 책은 34번으로 분류되어 있는 ‘관규집요(管窺集要)’ 25권이다. 유물 전시관에서 이 책을 발견한 순간 나는 약간의 현기증과 함께 형언할 수 없는 반가움이 겹쳤다.

나는 몇년 전부터 고천문학에 관심을 가지면서 이 분야에 조예가 깊다는 여러 선생님들을 찾아 이 골짜기, 저 골짜기 자문을 구하고 다녔다. 한국에서 천문에 관한 계보는 서경덕(徐敬德)-이토정(李土亭)-이서구(李書九)-이운규(李雲奎)-김일부(金一夫)로 이어져 내려왔는데, 근래에 오면서 그 맥이 희미해졌다. 제도권 대학에서는 고천문학이 거의 실전(失傳)되다시피하는 바람에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래도 재야에는 간혹 사람이 있었다. 그 분들에게 과연 어떤 책을 보아야만 고천문학을 이해할 수 있는가 하고 물었을 때 바로 ‘관규집요’라는 책을 보라고 했다. 

이 책은 총 73권 분량으로 청나라 때 저술된 책이다. 28수와 북두칠성 그리고 오성(五星)의 운행에 관한 내용들이 들어 있는데, 동양 고천문학 서적 중에서 가장 포괄적이면서도 깊이가 있는 책이라고 한다. 사실 이 책 제목을 아는 사람도 별로 없다. 재야에 계신 극소수의 천문 전문가만 아는 책인데, 바로 이 책이 윤선도 고택에 비치되어 있었다니 놀라울 뿐이다.

‘관규집요’는 윤두서가 보던 책인데, 그가 어떤 경로를 통해서 이 책을 구입할 수 있었을까도 궁금하다. 당시로서는 엄청나게 비싼 책이었을 뿐만 아니라 구입하는 경로도 쉽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이 정도 수준의 천문서를 독파했던 윤두서의 학문 경계는 과연 어느 정도였을까?


윤선도는 천문뿐만 아니라 지리에도 전문가였다. 재야에서 유통되는 국내 지리서들 가운데는 역대 우리나라의 풍수 고수(高手) 중 한 사람으로 고산이 빠짐없이 거론된다. 이걸 보면 윤선도가 풍수 전문가로서 전국적인 명성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최근 우리나라 역대 풍수 명인들에 관한 자료를 정리한 ‘조선 풍수학인의 생애와 논쟁’(김두규 저)을 보면 윤선도가 효종의 왕릉 선정 작업에도 참여할 정도로 풍수의 대가였음을 알 수 있다. 훗날 정조는 윤선도의 풍수 실력을 무학대사와 같은 반열에 놓을 정도였다고 하니 그의 경지가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는 효종의 왕릉 선정 작업에 참여한 뒤 당시 임금인 현종에게 ‘산릉의’(1659년)라는 저술을 통해 당대의 명묘라고 일컬어지는 묘지들에 대하여 자신의 관점을 밝히고 있을 정도다. 

이외에도 윤선도는 같은 시대에 살았던 명풍수가이자 친척이기도 한 이의신(李懿信)과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남기고 있다.  

이의신은 해남의 연동 녹우당에서 고산과 함께 기거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의신이 밤중이면 몰래 말을 타고 집을 빠져나가 새벽녘이면 들어오곤 하자, 윤선도는 이의신이 명당을 찾고 있는 중이라고 짐작하였다. 어느날 윤선도는 이의신에게 술을 먹여 일찍 잠들게 하였다. 잠이 든 것을 확인한 윤선도는 평소 이의신이 타고 다니던 말을 앞세웠다. 말은 주인 이의신이 밤중이면 언제나 가곤 하던 그 길을 따라 한참을 가다가는 어느 지점에 멈추었다. 그 지점을 보니 명당임이 틀림없었다. 윤선도는 썩은 말뚝 하나를 찾아내 혈처에 묻고 집으로 돌아와서 시치미를 떼고 이의신에게 부탁하였다. 내가 평소에 자리를 하나 봐둔 게 있으니 같이 가자고. 윤선도가 이의신을 안내한 곳은 바로 이의신 자신이 잡아놓은 자리였다. 이의신은 깜짝 놀라 “명당에는 임자가 따로 있다”는 말과 함께 그 자리를 윤선도에게 양보하였다고 한다. 해남지방에서 지금까지 회자되는 이야기다(‘조선 풍수학인의 생애와 논쟁’).

녹우당의 좌향(坐向)은 갑좌(甲坐)다. 갑좌는 거의 서향에 가까운 방향이고 오행으로는 양목(陽木, 양 기운의 목)에 해당한다. 

천문과 풍수의 조화  

녹우당에 서서 주변 산봉우리들을 바라보면 오른쪽 방향의 산봉우리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주변 봉우리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봉우리인데, 바로 문필봉이다. 조지훈 종택에서 설명한 바 있지만 문필봉이야말로 조선조 유교사회에서 가장 비중을 차지한 봉우리다. 녹우당에도 빠지지 않고 문필봉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집이 앉은 좌향을 기준으로 놓고 볼 때 문필봉이 어느 방향에 있느냐에 따라 의미 부여가 달라진다. 패철을 놓고 재어보니 신방(辛方)이다. 신은 오행 중에서 음금(陰金, 음기운의 금)에 속한다. 집의 좌향인 양목과 비교해볼 때 금극목(金克木, 금이 목을 이긴다는 의미)이다. 집인 자기(甲)를 이겨 먹는 것(문필봉, 金)을 가리켜 사주학에서는 정관(正官)이라 한다. 따라서 문필봉은 집 좌향으로 놓고 볼 때 정관봉(正官峰)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정관은 무엇인가? 점잖은 벼슬을 상징한다. 학자가 배출되는데, 그 학자는 점잖은 벼슬을 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므로 녹우당에서는 옛날부터 이 문필봉을 중시했다. 왜정 때는 일본사람들이 인부들을 데리고 올라가 문필봉 정상부분을 삽으로 파내었다고 한다. 훼손하기 위해서였음은 물론이다.  

이렇게 오행의 상생상극(相生相剋)으로 집터와 주변 봉우리 방향과의 역학관계를 따지는 방법은 그 사람의 팔자를 보는 사주명리학(四柱命理學)과 똑같은 방식이다. 산을 볼 때도 동일하게 사람을 보는 방식을 적용했다는 점에서 산인일치(山人一致)라고나 할까. 물론 풍수연구를 하는 학자 중에는 집의 좌향과 산의 특정 방향을 비교하는 것을 두고 ‘술법 풍수’라 하여 거부감을 표시하는 사람들도 있다. 

결론적으로 조선 후기 호남의 예술과 학문의 요람이었던 윤선도 고택의 풍수적 특징은 바로 사신사의 조화에 있고, 그 사신사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천문까지 파고 들어가야 하며, 그래야만 이 집터를 잡았던 당대 선비들의 안목에 접근할 수 있다.

그러나 범상한 머리를 가지고 윤선도 고택에 숨어 있는 천문과 지리의 비밀에 접근하다 보니 나의 내공(內功)이 부족하다는 걸 여실히 느낀다.  

이럴 때는 숲 속에 들어가 쉬어야 하리라. 녹우당의 뒷길 덕음산 쪽으로 30분 정도 숲 속 길을 올라가다 보면 500년 된 비자나무숲이 9000평이나 자리잡고 있다. 그 비자나무 숲에는 비자열매들이 여기저기 지천으로 널려 있다. 한 알을 주워 씨를 꺼내서 입 속에 넣어보니 쌉싸래한 향기가 레몬 향기 비슷하다. 비자향을 맡으면서 예향 남도를 생각한다.

[출처]: 조용헌 원광대 사회교육원 교수<한국의 명가 명택-전남해남의 고산윤선도 고택>/신동아,2000.11.




3. 충남 예산의 추사 김정희 고택 

- 문자향(文字香)과 서권기(書卷氣) 감도는 명당


충남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 가면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년) 선생의 고택이 있다. 충청도에 산재한 많은 명택 가운데서 제일 먼저 추사 고택을 찾은 이유는 그가 추사체(秋史體)라는 서예를 통하여 조선 후기 예술의 정수를 국제사회에 보여준 인물이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의 실학을 대표하는 인물이 다산 정약용이라고 한다면, 조선 후기의 문화예술계를 대표하는 인물은 추사 김정희라고 하여도 과언은 아니다. 영·정조시대 조선 후기 문화의 르네상스라고 일컬어지는, 이른바 ‘진경문화(眞景文化)’를 이끌던 세력 중심에 추사라는 인물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그런만큼 이 시대의 학문을 논할 때 정다산을 비켜갈 수 없듯이, 예술을 논하려면 김추사를 비켜갈 수 없다고 본다. 

그는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의 인구에 회자되는, 유명한 서예관(書藝觀)을 피력한 바 있다.

“가슴속에 청고고아(淸高古雅)한 뜻이 있어야 하며, 그것이 문자의 향기(文字香)와 서권의 기(書卷氣)에 무르녹아 손끝에 피어나야 한다.” 

명필은 단순히 글씨 연습만 반복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고 많은 독서와 사색을 통해 인문적 교양이 그 사람의 몸에 배었을 때야 비로소 가능하다는 관점이다. 문자향과 서권기는 그러한 인문적 교양을 함축한 말이다. 

한자 문화권의 3대 예술장르라고 할 수 있는 시(詩)·서(書)·화(畵) 삼절(三絶)은 공통적으로 인문학적 지층이 두터워야 함은 물론이다. 온축된 학문적 바탕 없이 테크닉만 가지고는 대가의 반열에 오를 수 없다. 

시서화 삼절 가운데서도 서(書) 부분이 특히 그렇지 않나 싶다. 시가 읽는 예술이라고 한다면, 그림(畵)은 보는 예술이라는 측면이 강하고, 글씨(書)는 양쪽을 겸비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서예라고 하는 장르는 글씨가 담고 있는 의미를 읽는 예술인 동시에 글씨마다의 조형적인 아름다움을 눈으로 보면서 감상하는 예술이라는 말이다. 이처럼 서예가 시와 그림 양쪽의 중도통합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보니, 한자문화권에서 상대적으로 시나 그림보다도 더욱 존중되었던 예술세계다. 

아무튼 추사가 창안한 ‘추사체’ 서예는 서권(書卷)의 기(氣)라고 하는 사고의 깊이와, 문자(文字)의 향(香)이라고 하는 감성의 향기를 아울러 갖추었다는 점에서 한·중·일 삼국의 지식인 사회에 크게 반향을 일으켰다고 여겨진다. 요즈음 바둑의 천재 이창호가 천하제일의 끝내기로 삼국을 주름잡고 있는 것처럼, 19세기에는 김정희의 추사체가 그 문자향과 서권기의 품격으로 동양 삼국을 한바탕 풍미하였던 것이다. 

충청도 양반론의 근거  

필자가 용궁리에 있는 추사고택을 답사하는 이유 역시 추사의 문자향과 서권기를 배출한 그 풍광과 토양이 어떠했나를 추적하기 위해서다. 

과연 어떠한 집터였기에 이런 인물을 배출할 수 있었을까? 비범한 터에서 비범한 인물이 나온다는 것이 감여가(堪輿家)의 지론인만큼 그 터에는 어떤 특징이 있을 것이다.

제일 먼저 검토할 사항은 추사가 충청도 양반 출신이라는 사실이다. 구한말의 지식인 황현(黃玹, 1855∼1910년)이 “평양은 기생 피해가 크고, 충청도는 양반 피해가 크고, 전주는 아전 피해가 크다”고 지적했듯이, 충청도는 양반이 하도 많아서 양반의 피해를 운운할 정도였다. 그렇다면 왜 충청도에 양반이 많이 살 수밖에 없었는가? 충청도가 양반 살기에 적당했던 인문지리적 조건은 무엇인가? ‘택리지’에서는 충청도를 이렇게 설명한다.

“남쪽의 반은 차령 남쪽에 위치하여 전라도와 가깝고, 반은 차령 북편에 있어 경기도와 이웃이다. 물산은 영남·호남에 미치지 못하나 산천이 평평하고 예쁘며, 서울 남쪽에 가까운 위치여서 사대부들이 모여 사는 곳이 되었다. 그리고 여러 대를 서울에 사는 집으로서 이 도에다 전답과 주택을 마련하여 생활의 근본되는 곳으로 만들지 않은 집이 없다. 또 서울과 가까워서 풍속에 심한 차이가 없으므로 터를 고르면 가장 살 만하고, 그중에서도 내포(內浦)가 제일 좋은 곳이다. 가야산 앞뒤에 있는 열 고을을 함께 내포라 한다. 지세가 한모퉁이에 멀리 떨어져 있고, 또 큰 길목이 아니므로 임진년(임진왜란)과 병자년(병자호란) 두 차례의 난리에도 여기에는 적군이 들어오지 않았다. 땅이 기름지고 평평하다. 또 생선과 소금이 매우 흔하므로 부자가 많고 여러 대를 이어 사는 사대부 집이 많다.”

충청도에 양반이 많이 살았던 이유를 정리하면, 우선 정치권력이 집중된 서울과 가까운 거리에 있다는 교통의 이점과, 그 다음으로는 산천이 평평하고 예쁘다는 풍수적인 장점을 꼽을 수 있다. 마지막으로는 추사고택이 자리잡고 있는 내포(內浦)라는 지역이 난리를 겪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소금과 생선이 풍부한 지역이라는 점이다.

풍수적으로 볼 때 충청도는 높고 가파른 산들이 다른 도에 비해서 현저하게 적다. 대구 팔공산이나 영암의 월출산을 둘러볼 때 다가오는 위압감이나 야성적인 느낌을 주는 산들이 충청도엔 거의 없다. 돌산보다는 흙으로 이루어진 야트막한 야산들이 주를 이룬다.

그래서 흔히 충청도 산세의 부드러움을 표현할 때 “개떡을 엎어놓은 것 같다”거나 “솜이불을 덮어놓은 것 같다”고들 한다. 그만큼 야트막한 둔덕 같은 산들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심리적인 안정감과 평화로움을 느끼게 한다. 붉은 석양이 서산에 질 무렵 길가에 차를 대놓고 야트막한 둔덕의 가장자리에 자리잡은 충청도 시골집들의 굴뚝에서 솟아오르는 흰 연기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누구라도 고요한 충만감이 가슴에 밀려오는 걸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살기가 전혀 없는 추사 고택  

추사고택이 자리잡고 있는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 주변의 산세 역시 ‘솜이불을 덮어놓은 것 같은’ 충청도 산세의 전형을 보여주는 곳이다. 추사고택은 솜이불같이 포근한 기운을 풍기는 야트막한 둔덕들이 둘러싸고 있다. 주변 사방 어디를 보아도 아주 부드러운 속살 같은 이불뿐이요, 쇠붙이 같은 날카로운 느낌을 주는 산이 전혀 없다.

집터 앞의 안산(案山)은 마치 누에가 가로로 길게 누워 있는 듯한 야산일 뿐만 아니라, 청룡자락과 백호자락을 둘러보아도 높은 산이 없다. 그런가 하면 집 뒤의 내룡(來龍)을 보아도 해발 100m도 안되는 야산이라서 위압감이 전혀 느껴지질 않는다. 한마디로 추사고택 주변 산세의 특징은 살기(殺氣)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살기란 무엇인가? 바위나 암벽이 드러나 있는 험한 산에서 방사되는 기(氣)를 일러 살기라고 한다.

이를 쉽게 풀어보기로 하자. 지구 자체가 실은 하나의 거대한 자석(磁石)이며, 여기서 방사되는 자력 성분을 띤 일종의 에너지를 지자기(地磁氣)라고 한다.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틀림없이 존재하며 지구 환경에 영향을 끼치는 이 에너지를 풍수가에서는 지기(地氣)라고 부른다. 

그런데 지자기는 흙으로 된 토산(土山)에 비해 바위로 된, 또는 바위나 암벽이 노출된 산에서 강하게 발산된다. 과식하면 몸에 해롭듯이 에너지가 필요 이상으로 강하면 인체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즉 바위에서는 평범한 사람이 소화 흡수할 수 있는 양을 넘어서는 지기가 방사되고 있기 때문에 해를 미친다고 보고 이런 부작용을 살기라 하는 것이다. 물론 집터를 잡을 때 이러한 산세를 피하는 것이 일반이다. 

그러나 지기가 강한 바위가 있다고 해서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니다. 칼을 휘두르며 적진을 돌파해야 하는 무장(武將)들은 오히려 강한 곳을 좋아한다. 살기가 있는 곳에서 담력과 기백이 솟아나오기 때문이다. 

신라시대 화랑도들이 전국의 명산(名山)을 돌아다니면서 심신을 연마하였다고 한다. 이때의 명산이란 대개 바위산을 가리킨다. 김유신 장군이 칼로 바위를 베었다는 고사가 전해지는 경주 근처 단석사(斷石寺)만 하더라도 짱짱한 화강암으로 뭉친 터다.

장군들과 마찬가지로 불교의 고승들도 강한 지기가 뿜어나오는 곳을 선호한다. 검선일치(劍禪一致)의 이치에서다. 선승(禪僧)이 되려면 검객의 기질을 가지고 있어야 하고, 실제로 선승과 검객은 통하는 면이 있다. 그 증거로 사찰에 가면 가끔 ‘심검당(尋劍堂)’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글자 그대로 ‘검(칼)을 찾는 방’이라는 뜻이다. 왜 산 속의 절간에서 칼을 찾아야만 하는가? 칼이 있어야 단도직입(單刀直入), 일도양단(一刀兩斷)으로 번뇌를 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때의 칼은 쇠로 만든 칼이 아니라 지혜의 칼을 의미한다.

유명한 고승이 머물렀던 우리나라 불교사찰의 터를 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대부분 바위산에 둘러싸여 있거나 바위 위에 자리잡고 있다. 가야산의 해인사, 속리산 법주사, 월출산 도갑사, 북한산 망월사, 관악산 연주암, 삼각산 도선사, 대둔산 태고사 등이 모두 그렇다. 그것도 한결같이 아주 험한 바위산들이다. 

이렇게 바위산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어야 추사고택만이 지닌 차별성을 파악할 수 있다. 야트막한 둔덕뿐이라서 주변 사방에 살기가 보이지 않는 산세는 조선시대 양반들이 가장 선호하던 지역이었다. 양반들이 좋아하던 산세의 모범답안이 이곳이라고 해도 좋다.

주지하다시피 조선시대는 성리학(性理學)의 시대였고, 조선의 성리학은 무(武)보다는 문(文)을 지향하던 신념체계다. 조선 초기 이방원이 왕자의 난을 거쳐 태종으로 등극한 이래 쿠데타 가능성이 있는 무신들을 은근히 배제하던 분위기가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조선조의 당파싸움이란 것도 그 성격을 따지고 들어가 보면 문신(文臣)들이 서로 권력을 장악하려는 싸움 방식이었다. 

문과 무를 놓고 볼 때 ‘이불을 덮어놓은 것과 같은’ 산세가 바로 문을 상징하는 것이라면, 바위나 암벽으로 위압감을 주는 산세는 무를 상징한다. 그래서 지나치리만큼 숭문주의에 빠진 조선조 양반사회에서는 양택과 음택을 막론하고 터 주변에 바위산이 보이는 곳은 흠이 있는 것으로 여겼다. 

이런 맥락에서 추사고택은 바위산의 무기(武氣)가 보이지 않고 야트막한 둔덕의 문기(文氣)만 가득한 무릉도원(武陵桃源)이다. 애초 무릉도원의 말뜻이 무를 차단하는 큰 언덕이요, 칼이 없는 그곳에 복사꽃 만발한 복숭아 동산을 가리킨다. 전쟁과 격절된 채 평화가 흘러넘치는 유토피아인 것이다. 바로 이런 곳에서 문과 서를 애호한 나머지 문자향, 서권기가 나오지 않았나 싶다. 

추사고택이 무릉도원이라면 혹시 복숭아밭이 있나 찾아보았으나, 늦가을의 빨간 사과들이 탐스럽게 매달린 사과밭이 여기저기 많다. 이 지역이 사과가 잘 되는가 보다. 꿩 대신 닭이라고 무릉사과밭도 괜찮은 것 같다.


잉글랜드는 신사(紳士, Gentry), 인도는 브라만, 일본은 무사 계층이 그 사회를 주도하였다면, 조선조를 주도했던 계층은 당연히 양반 계급이었다. 추사는 충청도 양반인데, 그것도 보통 시시한 양반이 아니라 일급 양반에 속하는 집안에서 태어난 인물이다.

양반에도 종류와 격이 있다. 조선의 양반을 연구해온 일본학자 궁도박사(宮島博史)에 따르면 양반은 크게 두 종류로 나뉜다. 서울에 주로 거주하는 재경양반(在京兩班)과, 지방의 농촌에 거주하는 재지양반(在地兩班)이 그것이다. 

재경양반은 양반층 중에서도 명문에 속하는 가계가 많다. 이들 가계는 대대로 서울과 그 주변 지역에 거처를 정하여 과거 합격자를 많이 배출했고 고위 관직을 상당수 차지했다. 조선의 왕실인 전주 이씨를 비롯해 파평 윤씨, 안동 김씨, 풍양 조씨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런데 전주 이씨나 안동 김씨라 하더라도 모두가 재경양반에 속하는 것은 아니었다. 재경양반으로서 위세를 유지했던 가계는 전주 이씨나 안동 김씨 중에서도 특정한 파(派)였고, 재지양반층으로 농촌 지역에 거주하는 가계도 있었다. 

재경양반층 사이에는 중앙정부의 권력 변동에 따른 세력의 성쇠가 있긴 했지만, 그들 가계는 그 근본이 분명했고 더구나 대대로 많은 관료를 배출했기 때문에 특권 계층인 양반 신분에 속하는 것으로 사회적으로 쉽게 인지되었다. 

이에 비해 향반(鄕班)으로도 불리는 재지양반층은 그 상황이 재경양반층과는 달랐다. 재지양반층은 한 가지 요인이 아니라 몇 가지 복합적인 요인에 의하여 형성되었다. 첫째는 과거합격자 또는 과거에 합격하지는 않았지만 당대를 대표하는 저명한 학자를 조상으로 모시고 있을 것이며 그와 함께 그 조상과 연결된 계보 관계가 명확해야 했다.

둘째, 여러 대에 걸쳐 동일한 지역에 집단적으로 거주하고 있어야 한다. 이런 대대손손의 거주지를 세거지(世居地)라고 하는데, 세거지에서는 양반 가문이 동족 집단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셋째는 양반의 생활 양식을 보존하고 있어야 한다. 양반의 생활 양식이란 조상 제사와 손님에 대한 접대를 정중히 행하는(奉祭祀, 接賓客) 동시에 일상적으로는 학문에 힘쓰고 자기 수양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넷째는 대대로 결혼 상대, 즉 혼족의 대상도 첫째에서 셋째의 조건을 충족시키는 집단에서 골라야 한다. 

그런데 재경과 재지양반 중에서 시간이 흐를수록 재지양반 쪽이 양반의 주류를 이루어 나갔다. 이는 중국의 사대부층이 명에서 청대에 걸쳐 점차 향거(鄕居;농촌 거주)에서 성거(城居;도시 거주)로 그 존재 형태가 변화하였고, 일본의 무사계층도 중세에 농촌에서 거주하다가 근세가 되자 성하정(城下町; 성 아래의 마을)에 집주하게 된 것과는 다른 양상이었다. 조선에서는 시간이 흐를수록 농촌에 거주하는 재지양반층이 늘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기준에 비추어 보면 추사 집안은 재경양반인가, 재지양반인가? 흥미롭게도 양쪽 모두에 해당하는 집안이었다. 추사는 16세기 중반부터 가야산 서쪽 해미 한다리(충남 서산군 음암면 대교리)에 터를 잡고 살기 시작한 소위 ‘한다리 김문(金門)’의 명문 집안이다.

먼저 추사의 고조부인 김흥경(興慶, 1677∼1750년)은 영의정(1735년)을 지낸 인물이다. 김흥경의 막내아들이 김한신(漢藎, 1720∼1758년)으로 영조의 장녀인 화순옹주(和順翁主, 1720∼1758년)와 결혼함으로써 영조의 사위인 월성위(月城尉)가 된다. 그러니까 추사는 월성위 김한신이 증조부요, 화순옹주가 증조할머니인 로열 패밀리인 것이다.

영조는 화순옹주를 무척 아꼈기에 큰사위인 월성위도 영조의 각별한 대접을 받았다. 그래서 영조는 옹주가 태어난 잠저인 창의궁(彰義宮, 천연기념물 제4호 백송이 있던 통의동 35번지)에서 얼마 멀지 않은 적선방에 월성위궁(月城尉宮, 현재 정부종합청사 부근)을 마련해주고 내당을 종덕재(種德齋), 외헌을 매죽헌(梅竹軒), 소정(小亭)을 수은정(垂恩亭)이라고 손수 써서 하사하기도 하였다.(‘과천향토사’, 154쪽) 

이처럼 영조의 각별한 배려를 받은 월성위는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고, 이 경제력을 바탕으로 집도 옮기게 된다. 즉 월성위 때부터 해미의 한다리에서 신암면의 용궁리로 옮겨 살게 된 것이다. 

육로와 해로의 교통요지, 용궁리  

월성위는 서울 동대문 밖 검호(黔湖)에 거처를 마련하는 한편으로 충남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의 오석산(烏石山)과 용산(龍山) 주변을 사들였다. 용궁리 일대는 삽교천 중류에 위치하여 내포(內浦)에서 서울로 연결되는 육·해로의 교통요지다. 서울에서 인천을 거쳐 배를 타고 하룻길이면 아산만에 진입하고 삽교천을 거슬러 올라오면 곧바로 선착장인 용궁리에 도착할 수 있는 것이다. 또 용궁리에 도착하여 말을 타고 10리만 가면 신례원(新禮院)이라는 역원(驛院)이 있는데, 역원에서 말을 바꿔 타고 한나절이면 월성위의 조상 선영이 있는 서산에 도착할 수 있다. 이처럼 용궁리는 서울과 서산의 선영을 잇는 교통의 요지에 있었다.

당시 해로는 요즘의 고속도로와 마찬가지였다. 인천의 새우젓도 여기를 통해서 들어왔고, 1868년 4월 남연군 묘를 도굴하러 온 프러시아의 오페르트 일당이 배를 대고 상륙한 곳도 바로 이곳이다. 또한 이곳 사람들이 인천에 가서 많이 살게 된 계기도 해로를 통한 교통 때문이다. 참고로 최근에 개통된 동양 최장의 서해대교(7.3km)가 바로 아산만을 가로질러 충청도와 경기도를 연결하는 대교다. 

아무튼 이곳을 고가로 사들인 월성위는 부친의 묘소(추사 고조부의 묘)도 쓰고 집도 지었다. 이 집들을 지을 때 충청도 53군현이 1칸씩 부조하여 53칸 집을 만들었다는 일화가 전해지는 것으로 보아 당시 월성위가의 명망이 어떠했는지 짐작이 간다.

이상을 정리하면 추사집안은 영의정, 판서, 대사헌을 지낸 인물에다 영조의 부마까지 배출한 명문이다. 그리고 서울에도 근거지를 가지고 있고, 시골에도 역시 세거지를 가지고 있던 양수겸장의 일급 양반 집안이다. 

물론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용궁리의 지리적 특색 때문이다. 용궁리는 서울의 재경양반과 충청도 내포의 재지양반을 연결하는 고리였던 것이다. 아무튼 월성위가 이곳 용궁리에 터를 잡은 일차적인 이유는 일이 있을 때 배를 타고 서울로 빨리 갈 수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던 것은 확실하다. 

둘째 이유는 두말할 필요없이 이곳이 더할 나위 없는 명당이기 때문이다. 음택과 양택에 모두 합당한 자리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점이 명당인가. 당대의 일급양반이 많은 돈을 들여 구입할 만큼 과연 명당이었던가. 필자가 1박2일 동안 현장을 면밀히 답사해본 결과 월성위가 왜 이곳을 탐냈는지, 그리고 이름을 하필이면 용궁리(龍宮里)라고 했는지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었다. 

먼저 이 동네의 소종래(所從來)를 더듬어 보자. 추사고택이 있는 마을 이름은 용궁리이고, 고택이 자리한 바로 뒷산 이름은 용산(龍山)이다. 용산 줄기는 멀리 팔봉산(八峰山)에서 시작된다. 팔봉산은 용산의 조산(祖山)에 해당하는 산으로 용산까지는 20리 정도의 거리다. 즉 팔봉산이 20리를 꾸불꾸불 오다가 그 끝자락인 용산에서 나지막하게 혈을 맺은 것이다.

‘천리행룡(千里行龍)에 일석지지(一席之地)’라는 풍수 용어가 있다. 용이 천리를 내려오다가 자리 하나를 만든다는 말인데, 호박을 자세히 관찰하면 줄기 끝에 열매를 맺듯이 혈자리는 그 끝자락에 있는 법이다. 

이곳 사람들은 꾸불텅 꾸불텅 내려온 20리 산줄기를 구절비룡(九節飛龍)이란 이름으로 부른다. 그 산줄기의 내려온 모양이 아홉 마디를 지닌 비룡과 흡사하다는 뜻이다. 여기서 구절이란 꼭 아홉 마디를 지칭하는 것은 아니고, 아주 많은 마디(節)라는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만큼 마디가 많다는 것인데, 풍수에서는 갈지자 형태로 이리저리 마디를 많이 만들수록 좋다고 본다. 마디없이 한일자처럼 직룡으로 내려온 줄기는 묘용(妙用)이 없다.

용산은 팔봉산에서 20리를 내려온 용의 머리에 해당한다. 그 용의 머리가 삽교천의 물로 들어가려는 형국이다. 용궁리에서 삽교천 강물까지는 300m 정도로 지척간이다.

추사의 고조부인 김흥경의 묘가 있는 곳은 용의 콧구멍에 해당하는 자리다. 지금은 지형이 바뀌었지만 원래 김흥경의 묘 앞에는 방죽이 있어서 물이 가득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화순옹주묘 앞에까지 물이 들어와 있었는데, 85년도에 경지정리를 한다고 흙으로 전부 메워버려 지금은 평토가 되었다. 

용궁은 물 속에 있듯이, 이곳이 용궁리인 것은 용의 머리 주변에 자연적인 방죽이 둘러싸고 있어서 물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때의 물은 재물로 간주한다. 이렇게 물이 주변을 둘러싸고 있으면 재물도 풍족하게 유지되리라고 여겼을 것이다. 길게 누운 용이 머리를 물에 대고 막 입수(入水)하려는 지점인 용궁리. 

등산화 끈을 조이고 야트막한 용산에 올라 동네를 관망한다. 아마도 150년 전 처음 이 집터를 잡을 때 풍수깨나 한다는 한다리 김씨들도 필자처럼 이곳에 올라 주변 사격(청룡·백호·주작·현무)을 관찰했을 것이다. 그들도 같은 심정이었을까, 온통 솜이불로 덮인 평화로움뿐이다.

팔봉산 쪽으로 방향을 틀어 한걸음 한걸음 주령을 타고 걸어본다. 지관은 눈으로도 보아야 하지만 반드시 발로도 밟아보아야 맛이 난다. 천상 ‘발로꾸니’가 되어야 한다. 산줄기라도 전혀 험하지 않고 뒷동산 산책하는 것같이 평탄하다. 이놈은 순한 용이라는 생각이 든다.

회룡고조의 추사 고택  

패철로 추사고택의 좌향을 재보니 유좌(酉坐)다. 유좌는 정동향(正東向)을 나타낸다.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비전(秘傳)에 의하면 정동향집은 아침에 태양이 정면으로 들어오기 때문에 정좌(靜坐)를 하기에 적합한 터다. 정좌는 떠오르는 태양의 기운을 받는 작업이므로 정신수련에는 좋지만, 늦잠을 자는 사람에게는 곤란하다. 뻘건 해가 동창을 물들이니 눈이 부셔서 빈둥빈둥 누워 있기 힘들 것 아닌가. 

추사고택에서 정면 오른쪽을 보니 저 멀리 높은 산봉우리가 눈에 들어온다. 동네사람 임수일씨에게 산 이름을 물어보니 팔봉산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 집은 회룡고조(回龍顧祖)의 형국이기도 하다. 용이 머리를 획 돌려 자기가 출발한 지점을 다시 쳐다보는 형국을 회룡고조라고 한다. 

현대인이 보기에는 무정물에 지나지 않는 산을 용에다 비유하고, 그 용도 그냥 용이 아니라 머리를 획 돌린 용으로 보는 것이 풍수다. 무정물에 생명이 있어서 꿈틀거린다고 여기는 사유방식, 바로 이것이 동양인 풍수관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필자는 그래서 풍수를 서양 종교학자들이 말하는 애니미즘(animism, 物活論)과 상통한다고 본다. 애니미즘에 의하면 산과 바위에는 모두 정령(精靈)이 있다. 우리 시각으로 이야기하자면 산과 바위에는 지기(地氣)가 있으며, 지기가 우리 몸속에 들어와 꿈으로 나타날 때는 정령으로 현현한다.

예산 지방에는 추사의 탄생과 더불어 전설이 하나 전해온다. 추사가 태어나던 날 고택 뒤뜰에 있는 우물물이 갑자기 말라버렸고, 뒷산인 용산과 그 조산이 되는 팔봉산 초목이 모두 시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추사가 태어난 뒤에 물이 다시 샘솟고 풀과 나무가 생기를 회복하였다는 전설이다. 그래서 인근 사람들은 추사가 팔봉산 정기를 받고 태어났다고 믿었다. 인물이 날 때는 주변 산천의 정기를 모두 끌어당겨서 태어난다고 우리 조상들은 생각하였다. 산천의 정기와 인물을 둘로 보지 않는 애니미즘적인 세계관의 반영이다.

추사고택에 관한 자료를 뒤적거리다 보니 얼마 전에 출간된 김구용(金丘庸) 선생의 일기가 눈에 띈다. 지금부터 35년 전인 1965년 4월에 추사고택을 답사한 일기가 소개돼 있다. 60년대 중반 먹고살기 어려운 시대에도 문화인들은 산 넘고 물 건너 추사고택을 답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대략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예산에서 경찰서 지프를 빌려 타고 출발하여 언덕산을 넘고 논둑길을 걸으면서 용궁리에 도착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때만 해도 추사선생의 4대 종손인 김석환옹(金石煥, 당시 72세)이 생존해 있었고, 6대 종손 김완호씨(金阮鎬, 당시 32세)가 집을 지키고 있었다. 집 안에는 완당선생 도장이 많이 있어서 종이를 미리 준비해 가면 그 도장(낙관)들을 찍을 수 있었다. 지금은 나무가 많지만 당시만 해도 용궁산은 기계로 깎은 듯이 나무가 없는 민둥산이었고, 추사고택은 외딴 초가 한 채만 덜렁 있는 상태였다고 나온다. 그런데 어느날 밤 원인모를 불이 나 옛 건물은 모조리 타버렸고, 그 바람에 완당선생의 필적과 유물도 많이 소실되었다고 한다.

추사고택은 1968년 다른 사람에게 매도됐는데, 1976년에 충청남도에서 지방문화재 제43호로 지정하면서 매수하여 새로 지은 건물이다. 옛날 53칸집은 아니다. 현재의 집은 인간문화재인 이광규옹이 부분적으로 재현한 것이다.


추사고택에서 볼 만한 물건은 나무판에 가로 세로로 걸린 현판과 주련이다. 서예의 대가 집답게 수많은 주련이 대문 옆에도, 현관 앞에도, 기둥 옆에도, 담벼락에도 걸려 있다. 온통 주련이 집을 감싸고 있다. 추사선생은 갔지만 그 주련들이 남아서 선생이 생전에 흉중에 품고 있었을 사상과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이 주련들은 학문과 예술에 대해서 당대 일급의 안목을 지녔던 인물이, 과연 어느 정도 사고의 깊이와 너비를 가졌는가를 엿보게 하는 간접적인 자료이기도 하다. 

사찰 대웅전이나 서원에도 몇 개씩 주련이 있긴 하지만 이처럼 주련이 도열해 있는 곳은 추사고택이 단연 독보적이다. 한마디로 ‘주련의 집’인 추사고택에서 이 주련들만 돌아가면서 보아도 문자향과 서권기에 취해서 반나절이 금방 가버릴 정도다. 샤넬의 향기도 감미롭지만 명문과 달필에서 우러나는 향기는 훨씬 은은하고 오래간다. 필자의 눈에 들어오는 것만 몇가지 소개해보자. 

‘해저니우(海底泥牛) 함월주(含月走) 곤륜기상(崑崙騎象) 노사견(鷺絲牽)’ (바다 밑으로 진흙소가 달을 물고 달리고 곤륜산에서 코끼리 타니 백로가 고삐를 끈다)-설두지송(雪竇持誦)-

이는 불교 선가(禪家)의 화두(話頭)다. 추사가 선가에 침잠해 있었음을 말해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필자가 아는 수준에서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여기서 바다 밑의 진흙 소(海底泥牛)는 인체의 하단전(下丹田, 배꼽 아랫부분에 있는 혈)에 숨어 있는 쿤달리니(kundalini) 에너지(근원적인 생명 에너지)를 가리키는 것이다. 

불화(佛畵)의 목우도(牧牛圖)나 십우도(十牛圖)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소는 요가에서 쿤달리니라고 말한다. 쿤달리니는 섹스에너지이기도 한데, 성교를 통해서 아래로 배출하면 생명을 낳고 명상을 통해 위로(上丹田) 끌어올리면 도인(道人)이 된다. 소를 다스린다는 것은 이 에너지를 다스린다는 의미다. 

곤륜산에서 코끼리를 탄다는 것은 쿤달리니 에너지를 상단전(곤륜산)으로 끌어올린 상태이고, 백로가 고삐를 끈다는 것은 모든 것이 자유자재해서 걸림이 없는 경지를 말한다.

설두지송(雪竇持誦)이란 이 문구를 설두(雪竇)가 항상 외우고 다녔다는 뜻이다. 설두는 구한말의 설두유형(雪竇有炯, 1824∼1889년) 스님을 가리킨다. 설두는 바로 추사와 선(禪) 논쟁을 벌였던 백파(白坡) 스님의 제자로, 영광의 불갑사(佛甲寺)가 거의 폐사 직전에 있을 때 이를 중흥해낸 인물이다. 그는 백파의 구암사 문중과 초의(草衣)의 대흥사(大興寺) 문중이 100년에 걸친 선 논쟁을 벌일 때 구암사 문중을 대변하는 저술 중의 하나인 ‘선원소류(禪源溯流)’의 저자이기도 하다. 그 다음 주련들을 보면 이렇다. 


書藝如孤松一枝(서예는 외로운 소나무의 한 가지와 같다) 
畵法有長江萬里(그림 그리는 법은 장강 만리와 같은 유장함에 있다)
世間兩件事耕讀(세상에서 꼭 할 만한 일 두 가지는 밭갈고 책읽는 일뿐이다)
且將文字入菩提(문자를 통해서 깨달음에 들어간다) 
唯愛圖書兼古器(오직 사랑하는 것은 그림과 책 그리고 옛 물건이다)
春風大雅能容物(봄바람처럼 고운 마음은 만물의 모든 것을 용납하고)
書已過三千卷(책은 이미 삼천 권이 넘었다) 
半日靜坐半日讀書(반나절은 정좌하면서 마음을 수양하고 반나절은 책 읽는다)


추사고택의 사랑채 댓돌 앞에 눈길을 끄는 물건은 ‘석년(石年)’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높이가 1m 정도인 돌기둥이다. 고택이 동-서 축으로 자리잡고 있음에 비해 이 돌기둥은 남-북 방향으로 자리잡고 있다. 

이 돌기둥은 해시계 구실을 한다. 태양의 위치에 따라서 이 돌기둥이 그림자를 만드는데, 그림자의 방향과 위치를 보고 시간을 알 수 있다. 옛날에는 시계가 없었으므로 이 돌기둥이야말로 훌륭한 자연시계였을 것이다. 추사선생이 제작하였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石年이라는 글씨도 추사체다. 다른 고택에서 보기 힘든 물건이다. 태엽을 감을 필요도 없고 배터리를 넣지 않아도 멈추지 않고 돌아가는 만년 시계임에 틀림없다.

음택과 양택의 동거 

추사고택을 둘러보면서 필자가 받은 강한 인상은 묘지가 고택 바로 옆에 붙어 있다는 점이다. 먼저 증조부인 김한신과 화순옹주의 합묘가 고택 오른쪽에 있고, 더 오른쪽에는 고조부인 김흥경의 묘가 단정하고 온화한 터에 있다. 그런가 하면 고택 바로 왼쪽에는 추사 본인의 묘가 있다. 

고택 좌우로 커다란 묘들이 포진하고 있는 셈이다. 어떻게 보면 좌우의 묘지 중간에 집이 있는 구조다. 본채의 좌우에 이처럼 묘가 있는 것을 보고 필자는 여러 가지 감회에 젖지 않을 수 없었다. 집과 묘가 나란히 있다는 것은 산자와 죽은자가 평화스럽게 공존하고 있음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집은 산사람이 사는 집이라서 양택(陽宅)이라 하고, 묘는 죽은 사람이 사는 집이라고 해서 음택(陰宅)이라 부른다. 음양택(陰陽宅)이 동거하고 있는 형국이 추사고택의 독특한 양상이다. 음양택의 동거, 산자와 죽은자의 동거, 어둠과 밝음의 동거.

이는 한국인의 사생관(死生觀)을 반영하는 풍경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죽음이 어디 멀리 공동묘지에 있는 게 아니라 바로 집 옆에 있다. 죽음이 무섭고 낯선 게 아니라 옆집처럼 이물없고 친숙하다. 그뿐 아니라 순환한다. 음택에서 양택으로, 양택에서 다시 음택으로 순환한다. 음택에서 다시 양택으로 순환한다는 것은 조상이 좋은 묘지에 들어가면 다시 그 집 후손으로 돌아온다는 믿음이다. 그러므로 한국인의 사생관에서 볼 때 죽어서 좋은 명당에 들어간다는 것은 죽음을 극복하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기쁨과도 같다.

추사고택에서 보여주는 음양택 동거처럼 한국의 전통문화를 자세히 살펴보면 이처럼 순환과 회귀의 장치가 몇 가지 더 있다. 회갑(回甲)만 해도 그렇다. 자기가 태어난 육십갑자로 60년 만에 되돌아오는 것이 회갑이다. 회갑에는 시간을 다시 시작하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겨울이 가면 다시 봄이 오는 것처럼 시간은 회귀한다. 

또 초상집에 갈 때 우리 선조들은 모두 흰색 옷을 입었다. 검은색은 죽음을 상징하기 때문에 입지 않았다. 흰색이 상징하는 의미는 시작과 탄생이라고 한다. 우리는 죽음의 장소에 가서 시작과 탄생을 기원하였던 것이다. 

추사 고조부의 묘를 둘러보았다. 용궁리 일대에서 제일 좋은 터는 이 고조부 묘인 것 같다. 용의 콧구멍 자리라고 하는데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다. 입수(入首)도 야트막한 둔덕으로 내려왔고, 주위의 사격(沙格), 혈구(穴口), 안대(案帶) 모두 흠잡을 데 없다.

그런데 이 묘를 한층 빛내는 기념물이 하나 있다. 바로 묘 앞에 서 있는 백송(白松)이다. 보통 예산의 백송이라 불리는데, 잎은 푸르고 몸체는 약간 흰색을 띤 희귀한 소나무다. 추사가 청나라 연경에서 돌아올 때 가지고 와서 고조부 김흥경의 묘 앞에 심어놓은 나무다. 수령 200년에, 높이는 10m다. 

우아하면서도 고고한 절개가 느껴지는 백송을 바라보면서 나는 혼자서 생명의 회귀(回歸)를 상상하였다. 혹시 김흥경이 죽어서 추사로 환생한 것은 아닌가 하고 말이다. 왕대밭에 왕대 나고 쑥대밭에 쑥대 난다고 한다. 동이족(東夷族)의 무속신앙에 조상이 3∼4대 후에 자기집 후손으로 다시 돌아온다고 믿는 관습이 있는 것을 비춰보면 그렇다는 이야기다. 추사도 그 어떤 예감을 느꼈기 때문에 중국에서 가져온 백송을, 전생에 자기 자신이었던 고조부 묘에다 심어놓았을 수도 있지 않았겠는가….


추사는 유학자이면서도 ‘해동의 유마거사’라는 칭호를 들을 정도로 불교에 조예가 깊은 인물이었다. 조선시대에 불교는 무부무군(無父無君)의 이단사상이었고, 승려는 기생, 백정, 광대와 함께 팔천(八賤)에 들어가는 천민으로 취급되었다. 그런데 추사 정도 되는 일급 양반이 불교를 좋아하고 불교에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추사는 구암사의 백파(白坡)선사와 삼종선(三種禪) 논쟁을 통하여 조사선(祖師禪)에 대해 비판을 가할 정도로 선의 세계에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금강경을 호신용 부적처럼 항상 휴대하고 다닐 정도였고, 차로 유명한 전남 대흥사의 초의선사와도 차와 불교를 매개로 특별한 우정을 맺는다. 이런 걸 종합하면 조선시대를 통틀어 명문가의 유학자 신분으로 추사처럼 불교에 깊이 들어간 인물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추사가 이처럼 불교를 알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인가? 그걸 추적하다 보니까 화암사가 나온다. 화암사는 추사 불교의 원천이다. 추사고택에서 걸어서 20분 정도 거리에 있는 오석산(烏石山)에 자리잡은 작은 절이다. 

이 절은 증조부인 월성위 때부터 추사 집안의 원찰(願刹)이었다. 원찰은 요즘 식으로 말하면 일종의 개인사찰이다. 자연히 추사는 어렸을 때부터 화암사를 출입하면서 자연스럽게 불교 분위기에 접했고 여러 불경을 보고 선도 익혔던 것 같다.

추사가 직접 화암사 대웅전 뒤편의 암벽에 남긴 ‘천축고선생택(天竺古先生宅)’과 ‘시경(詩境)’이라는 글자는 그러한 특별한 인연을 상징적으로 말해주는 자료다. 천축(天竺)은 서역의 인도를 말하고 고선생(古先生)은 부처를 유교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불교 사찰을 유교식으로 번역하면 바로 ‘천축고선생택’이 된다. 

추사의 친필 글씨가 암각돼 있는 화암사 지세를 면밀히 살피면서 글씨가 새겨진 암벽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암벽은 대웅전 뒤편에 병풍처럼 서 있는데, 가로가 30m 세로는 3∼4m 정도의 크기다. 절에서도 이 바위를 병풍암이라 부른다. 

화암사 뒷산의 이름이 오석산(烏石山)인데 까마귀 오(烏) 자를 집어넣은 이유는 돌을 깨보면 바위 속이 검기 때문이고, 그 바위가 잘 드러난 곳이 바로 이 병풍암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니까 조산인 팔봉산에서 고택이 있는 용산까지 20리를 내려온 구절비룡의 산줄기 가운데서 유일하게 바위가 돌출되어 암기(岩氣)가 강하게 발산되는 곳은 이곳 오석산의 화암사 대웅전 뒤편의 병풍암인 것이다. 

그리고 그 병풍암에 추사가 직접 글씨를 새겼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내가 보기에 병풍암에 서린 암기, 즉 무기(武氣)는 불교적 선의 경지로 이끄는 원동력이었고, 더 나아가서는 추사글씨의 특징 중 하나로 꼽히는 강건함을 구성하는 밑바탕이 되지 않았나 싶다.

이 병풍암 밑에는 나무로 만든 평상이 하나 놓여 있다. 왜 놓여 있는가 하고 스님에게 물어보니 지금도 절에서 중요한 천도재를 그 병풍암 앞에서 지내면 특별한 효험이 있다고 귀띔한다.

다양한 신분의 추사 제자들  

구한말 추사를 따르는 제자가 3000명이었다고 회자될 만큼 추사는 많은 제자를 거느리고 있었고, 이들 중 상당수는 돈과 실력을 갖춘 역관(譯官)과 의관(醫官)을 비롯한 중인층이었다.

그 대표적인 이가 역관이었던 이상적(李尙迪, 1804∼1865년)이다. 이상적은 추사가 제주도에 유배생활할 때 청나라를 출입하면서 구입한 귀중한 서적들을 스승에게 갖다드리려고 불원천리 제주도까지 갔던 인물이다. 추사의 유명한 ‘세한도(歲寒圖)’는 추사가 이상적의 정성과 의리에 보답하기 위하여 그려준 그림이다. 

이상적의 제자도 역관이었던 오경석(吳慶錫, 1831∼1879년, 오세창이 그의 아들임)이고, 오경석 역시 청나라의 고증학을 연마한 바탕 위에 추사의 ‘금석과안록(金石過眼錄)’을 더욱 계승 발전시켜 ‘삼한금석록(三韓金石錄)’이라는 저술을 남겼다. 그런데 이 오경석은 독실한 불교신자였다. 묘비명에 의하면 그는 항상 불경을 읽었으며 ‘초조보리달마대사설(初祖菩提達磨大師說)’이라는 불교 저술을 남길 정도였다. 

오경석의 불교사상은 다시 절친한 친구이자 개화파 지도자인 유대치(劉大致)에게 전해진다. 당시 백의정승(白衣政丞)이라 불리던 유대치 역시 중인계급인 한의사였으며 오경석과 교류하면서 개화사상의 지도자가 되었는데, 이때 불교도 같이 받아들였던 것으로 보인다.

유대치는 개화파의 주역인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에게 개화사상을 전해주면서 동시에 불교사상의 세례도 주었다. 그래서 김옥균을 비롯한 개화파들은 불교에서 말하는 ‘일체중생 실유불성(一切衆生 悉有佛性; 누구나 불성을 가지고 있다)’이라는 평등사상을 개화사상의 기반으로 하여 계급차별을 타파하려 했던 것이다. 

이상을 종합해보면 김옥균의 개화파들에게까지 영향을 끼쳤던 불교사상의 진원지를 찾아 올라가면 추사에게 다다르고, 그 추사의 불교는 바로 이 화암사의 병풍암에서 그 기초가 형성되지 않았나 추측된다. 이런 맥락에서 화암사 대웅전 뒤에 우뚝 솟아 있는 병풍바위에 추사가 새겨놓은 ‘천축고선생택’과 ‘시경’이라는 암각(岩刻)은 사연이 있는 글씨임에 틀림없다.

결론적으로 추사고택은 조선조의 양반이 가장 선호하던 부드러운 산세에 자리잡은 저택이자, 문자향과 서권기가 은은하게 풍기는 무릉도원의 이상향이다. 아울러 그 무릉도원에 배치되어 있는 음양택 동거 구조를 관망하면서 과연 생은 무엇이고 사는 무엇인가를 생각해 본다.



4. 경주 최부잣집  

경주 최부잣집9대 진사 12대 만석꾼 배출한 재력가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말라. 재산은 만석 이상은 모으지 말라. 과객(過客)을 후하게 대접하라. 사방 백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경주 최부잣집에 내려오는 200년 전통의 가훈이다.


부불삼대(富不三代, 부자가 3대를 넘기기 힘들다)란 말이 있다. 최근 들어 우르르 무너지는 재벌들을 보면서 이 말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된다. 100년은 유지될 줄 알았던 한국의 재벌들이 허망하게 넘어지는 광경을 목격하면서 부자가 3대를 넘긴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세간사(世間事)의 이치를 절절히 느끼는 것이다. 게다가 요즘의 부는 이루는 것도 빠르지만 망하는 것도 신속하다. ‘졸부(猝富)는 졸망(猝亡)’이라는 말이 허언은 아닌 듯싶다. 

과연 3000리를 내려가는 백두대간의 유장한 산줄기처럼 3대를 훌쩍 뛰어넘어 오래가는 부자가 한국에는 없단 말인가! 수십, 수백억원을 삽시간에 벌어 당당한 사업가 행세를 하던 이들이 어느날 갑자기 사기꾼으로 전락하는 것을 보면서 나는 경주 최(崔)부잣집을 생각하게 된다.

최부잣집은 유장한 부자, 즉 졸부가 아닌 명부(名富)의 면모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집안이다. 9대 동안 진사를 지내고 12대 동안 연이어 만석을 한 집으로 조선팔도에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진 집이다. 이 기록은 앞으로도 좀처럼 깨기 어려운 전무후무한 기록일 성싶다.

3대 부자도 어려운데 어떻게 12대를 이어갈 수 있었을까. 그렇게 대를 이어갈 수 있었다면 반드시 집안 나름의 경륜과 철학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 의문을 품고 경주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늦은 오후, 경주 교동(校洞) 69번지에 주소를 둔 최부잣집에 도착했다. 신라 천년의 수도였던 경주에서도 교동 69번지는 특별한 장소다. 원래 이 터는 신라의 요석공주가 살던 요석궁이 자리하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집 오른쪽 옆으로는 신라 신문왕 2년부터 자리잡은 계림향교(鷄林鄕校)가 있고, 뒤편으로는 신라 시조인 박혁거세의 탄생 설화가 어려 있는 계림(鷄林)이 자리잡고 있다. 또 왼쪽 뒤편으로는 내물왕 무덤을 비롯한 5개의 커다란 봉분이 작은 동산처럼 누워 있고, 거기서 좀더 왼쪽으로는 김유신 장군이 살던 재매정(財買井)이 있다.

이렇게 최부잣집은 주위가 온통 신라 신화와 역사의 자취로 둘러싸여 있다. 그래서 집터 자체가 박물관 분위기를 풍기는 듯하다. 

최부잣집의 가훈  

최부잣집에서는 대대로 가훈처럼 지켜내려온 몇 가지 원칙이 있다. 첫째,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말라. 둘째, 재산은 만석 이상 모으지 말라. 셋째, 과객(過客)을 후하게 대접하라. 넷째, 흉년에는 남의 논밭을 매입하지 말라. 다섯째, 최씨 가문 며느리들은 시집온 후 3년 동안 무명옷을 입어라. 여섯째, 사방 백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이를 차근차근 곱씹어보면 최부잣집의 향기가 배어 있다. 

‘첫째, 진사(進士) 이상은 하지 말라’는 것은 한마디로 정쟁(政爭)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서다. 조선시대 진사라는 신분은 초시(初試) 합격자를 가리키는데, 벼슬이라기보다는 양반 신분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자격요건에 해당한다. 쉽게 말하면 ‘양반 신분증’이고나 할까.

최씨 집안은 진사는 유지해도 그 이상을 넘어서는 벼슬은 꺼렸다. 벼슬이 높아질수록 감옥이 가까워진다는 영국 속담처럼, 조선시대는 벼슬이 높아질수록 자의반 타의반으로 당쟁에 휩쓸리기 쉬웠다. 한번 당쟁에 걸려들어 역적으로 지목되면 남자는 사약을 받거나 아니면 유배형을 당했고, 그 집안 여자들은 졸지에 남의 집 종 신세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다. 이른바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하는 것이다. 아마도 최씨 집안에서는 진사 이상의 벼슬을 한다는 것은 멸문지화에 접근하는 모험으로 여겼던 것 같다. 

최부잣집의 둘째 원칙은 ‘만석 이상을 모으지 말라’다. 만석은 쌀 1만 가마니에 해당하는 재산이다. 돈이라는 것은 한번 모이면 가속도가 붙는 ‘이상한’ 성질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최부잣집은 만석 이상의 재산 불가 원칙에 따라 나머지 재산은 사회에 환원하였다. 환원 방식은 소작료를 낮추는 방법이었다. 당시의 소작료는 대체로 수확량의 7∼8할을 받는 것이 관례였다. 최부잣집은 남들같이 소작인들로부터 7∼8할을 받으면 재산이 만석을 초과하는 문제가 발생하므로 그 소작료를 낮추어야만 했다. 

예를 들면 5할이나 그 이하로도 받았다. 이 정도면 거의 공짜나 다름없는 수준이다. 그러니 주변 소작인들은 앞을 다투어 최부잣집의 논이 늘어나기를 원하는 현상이 발생하였다. 최부잣집의 논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자기들은 혜택을 보게 되니까 말이다. 저 집이 죽어야 내 집이 사는 것이 아니라, 저 집이 살아야 내 집도 좋아진다는 상생(相生)의 현장이 구현된 것이다. 사촌이 논 사면 내 배 아프다는 속담과는 전혀 다른, 진정으로 아름답고 통쾌한 풍경이라 아니할 수 없다. 

또 둘째와 같은 맥락의 가훈이 넷째 ‘흉년에 논 사지 말라’다. 조선시대에는 흉년이 들어 아사 직전의 위기상황에 직면하면 쌀 한 말에 논 한 마지기를 넘기기도 하였다. 우선 먹어야 목숨을 부지할 수 있으니 논값을 제대로 따질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심지어 흰 죽 한끼 얻어먹고 논을 내놓았다고 해서 ‘흰죽 논’이란 말도 있었다.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쌀을 많이 가지고 있던 부자들로서는 이때야말로 논을 헐값으로 사들여 재산을 늘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이는 네가 죽어야 내가 산다는 상극(相剋)의 방정식이다. 그러나 최부잣집은 이것을 금했다. 이는 양반이 할 처신이 아니요, 가진 사람이 해서는 안 될 행동으로 보았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부자가 흉년에 논 사면 나중에 원한을 사게 되는 것은 뻔한 이치다. 헐값에 논을 넘겨야만 했던 사람들의 가슴에 맺힌 원한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두 수 앞만 내다보면 그 원한이 부메랑이 되어 되돌아올 것은 불문가지다. 최씨 가문은 도덕성과 아울러 고준한 지혜를 가졌던 듯하다. 

최씨 집안의 셋째 원칙은 ‘과객(過客)을 후하게 대접하라’는 것이다. 조선시대는 삼강오륜과 예를 강조하다 보니 사회분위기가 자칫 경직될 수 있었다. 그 경직성을 부분적이나마 해소해주는, 융통성 있는 사회 시스템이 바로 과객을 대접하는 풍습이 아니었나 싶다. 요즘같이 여관이나 호텔이 많지 않았던 사회에서는 여행을 하는 나그네가 전혀 알지도 못하는 양반집이나 부잣집의 사랑채에서 며칠씩 또는 몇 달씩 머물다 가는 일이 흔했다.

이들 과객들의 성분은 다양하였다. 몰락한 잔반(殘班)으로 이 고을 저 고을의 사랑채를 전전하며 무위도식하는 고급 룸펜이 있는가 하면, 학덕이 높은 선비나 시를 잘 짓는 풍류객이 있고, 무술에 뛰어난 협객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풍수와 역학에 밝은 술객들도 있어서 주인집 사람들의 사주와 관상을 보아주기도 하고, ‘정감록’이란 참서로 세상의 변화를 예측하기도 하였을 것이다. 

주인양반은 온갖 종류의 과객을 접촉하면서 새로운 정보를 수집하고, 다른 지역의 민심을 파악했다. 교통이 발달하지 못해 여행이 어려웠던 조선시대에 이들 과객집단은 다른 지역의 정보를 전해주는 메신저 노릇을 하였으며 여론을 조성하기도 하였다.

최부잣집에서는 이들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였다. 어느 정도였는가를 보자. 최부잣집의 1년 소작 수입은 쌀 3천석 정도. 이 가운데 1천석은 집안에서 쓰고, 1천석은 과객을 접대하는 데 사용하였고, 나머지 1천석은 주변 지역의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는 데 썼다고 한다. 1년에 1천석을 과객접대용으로 썼다고 하니 당시의 경제규모로 환산해 보면 엄청난 액수가 아닐 수 없다. 

최부잣집에서는 과객을 접대하는 데 나름의 규칙이 있었다. 과객 중에 상객(上客)이라고 여겨지는 사람에게는 매끼 ‘과매기’ 1마리를 제공하고, 중객(中客)에게는 반마리, 하객(下客)에게는 4분의 1마리를 제공하였다. 과매기는 전라도나 충청도에는 없는 경상도 특유의 음식으로 포항, 울산 지역에서 나는 마른 청어를 가리킨다. 현재는 마른 청어 대신에 마른 꽁치를 과매기라고 부르는데, 주로 날씨가 추운 겨울에 제 맛이 난다.

최부잣집에 과객이 많이 머무를 때는 그 수가 100명이 넘었다고 한다. 100명까지는 큰 사랑채와 작은 사랑채에서 수용할 수 있지만, 그 이상을 넘어설 때는 최부잣집 주변에 있는 초가집(노비들이 사는 집)으로 과객들을 분산 수용하였다고 한다. 부득이 노비집으로 과객을 분산해야 할 때에는, 반드시 그 과객에게 끼니를 해결할 수 있도록 과매기 1마리와 쌀을 주어서 보냈다. 

과객이 최부잣집에서 쌀과 과매기를 가지고 주변의 노비집으로 가면, 그 노비집에서는 무조건 밥을 해주고 잠자리를 제공하도록 룰이 정해져 있었다. 과객들을 접대하는 대가로 노비들은 소작료를 면제받았다. 최부잣집에서 50∼60리 멀리 떨어져 사는 노비들은 소작료를 제대로 내야 했지만, 인근의 노비들은 과객 대접한다는 공로로 혜택을 받았던 것이다.


밤을 지내고 떠나는 나그네는 빈 손으로 보내지 않았다. 과매기 한 손(2마리)과 하루분 양식, 그리고 노자를 몇 푼 쥐어 보냈다. 어떤 과객에게는 옷까지 새로 입혀서 보낼 정도였다고 한다. 최부잣집이 과객대접에 후하다는 소문은 시간이 지나면서 입 소문을 타고 조선팔도로 퍼졌다. 강원도 전라도는 물론 이북 지역에까지 최부잣집의 명성이 퍼졌다고 한다.

이는 결국 최부잣집의 덕망으로 연결되었다. 중국에 3천식객을 거느렸다고 하는 맹상군이 있었다면, 조선에는 1년에 1천석의 쌀을 과객에게 대접하는 최부자가 있었던 셈이다.

최부잣집의 덕망은 여섯째 원칙인 ‘사방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데서도 나타난다. 경주 교동에서 사방 100리라고 하면 동으로는 경주 동해안 일대에서 서로는 영천까지고, 남쪽으로는 울산까지, 북으로는 포항까지의 영역이다.

주변이 굶어 죽고 있는 상황인데 나 혼자 만석하는 것은 의미가 없으며, 부자양반의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소작수입 가운데 1천석을 주변 빈민구제에 사용한 것도 이런 차원이다. 불교의 ‘유마경’에 유마거사가 병석에 누워 있으면서 했다는 유명한 말이 있다.

“중생이 모두 아픈데 내가 어찌 안 아플 수 있겠느냐!” 

다섯째 원칙은 ‘최씨 가문 며느리들은 시집온 후 3년 동안 무명 옷을 입어라’다. 조선시대 창고의 열쇠는 남자가 아니라 안방마님이 가지고 있었다. 재산 관리의 상당 권한을 여자가 지니고 있었음을 뜻한다. 그런만큼 실제 집안 살림을 담당하는 여자들의 절약 정신이 중요하다.

보릿고개 때는 집안 식구들도 쌀밥을 먹지 못하게 했고, 숟가락도 은수저는 절대 사용하지 못하게 하여 백동 숟가락의 태극무늬 부분에만 은을 박아 썼다. 과객 대접에는 후했지만 집안 살림에는 후하지 않았던 것이다. 

최씨 집안의 어느 며느리는 삼베 치마를 하도 오래 입어 이곳저곳이 누덕누덕 기워져 있었는데, 서 말의 물이 들어가는 ‘서말치솥’에 빨래를 하기 위해 이 치마 하나만 집어넣으면 솥이 꽉 찰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너무 많이 기워 입는 바람에 물에 옷을 집어넣으면 옷이 불어나서 솥단지가 꽉 찼다는 말이다. 최부잣집 여자들의 절약정신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일화다.

이상 여섯 가지 원칙이 최부잣집의 제가(齊家)하는 철학이라면, 육연(六然)이라고 하는 수신(修身)의 가훈도 있었다. 육연은 다음과 같다. 

▲자처초연(自處超然): 스스로 초연하게 지내고 ▲대인애연(對人靄然): 남에게는 온화하게 대하며 ▲무사징연(無事澄然): 일이 없을 때는 맑게 지내며 ▲유사감연(有事敢然): 유사시에는 용감하게 대처하고 ▲득의담연(得意淡然): 뜻을 얻었을 때는 담담하게 행동하며 ▲실의태연(失意泰然): 실의에 빠졌을 때는 태연하게 행동하라. 여기서 ‘연’의 사전적 의미는 ‘그러하다’ ‘그렇다고 여기다’인만큼 전체적으로 관용, 긍정, 초연의 뜻이 담겨 있다.

최부잣집의 장손인 최염씨(崔炎, 68)는 어렸을 때부터 매일 아침 조부 방에 문안을 가면 조부님이 보는 데서 붓글씨로 육연을 반드시 써야만 했다고 술회한다. 어려서부터 군자다운 행동을 하도록 철저히 교육받았던 것이다. 

노블리스 오블리제  

최부잣집의 가훈을 음미하면서 나는 로마 천년의 철학이 생각난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를 보면, 로마가 천년을 지탱하도록 받쳐준 철학이 바로 ‘노블리스 오블리제’였다는 것이다. 이를 번역하면 ‘혜택받은 자들의 책임’ 또는 ‘특권계층의 솔선수범’이다.

로마의 귀족들은 전쟁이 일어나면 자기들이 솔선수범하여 최전선에 나가 피를 흘리는가 하면 공중을 위해 금쪽 같은 자기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곤 하였다. 귀족은 사회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던 것이다. 여기서 로마를 이끌어가는 리더십이 나왔다.

시오노가 ‘로마인 이야기’ 전체를 통하여 몇 번이고 강조한 대목은 바로 노블리스 오블리제다. 이것은 가진 자가 못 가진 자에게 베풀어야 한다는 도덕적 의무만 뜻하는 것은 아니다. 노블리스 오블리제는 그것을 행하는 사람 자신을 위한 것이며, 그들의 삶의 질을 더 높이고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한 것이라는 게 시오노의 주장이다. 

여기서 도덕적 의무를 통해 자신들의 삶의 질을 높였다는 대목이 중요하다. 최부잣집의 원칙들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는 도덕적 실천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그것을 통해 자신들이 이 세상에 태어난 의미와 보람을 증가시키는 방법이었던 것이다. 삶의 질은 의미와 보람에 달려 있는 것 아니던가. 

한국사람들은 이를 ‘적선지가 필유여경(積善之家 必有餘慶: 좋은 일을 많이 한 집에 반드시 경사가 있다)’이라 하였다. 이는 요즘의 민법이나 형법보다 훨씬 강력한 윤리적 기제였으며 동시에 사회를 건강하고 아름답게 이끄는 철학이었다. 최부잣집의 원칙들은 바로 한국적인 노블리스 오블리제인 것이다. 

어떻게 보면 최부잣집의 고향인 경주와 로마는 유사하다. 사실 세계 역사에서 1000년 수명을 유지한 나라는 신라와 로마제국을 빼면 없다. 물론 그 규모와 영향력 면에서 신라와는 비교 대상이 될 수 없을 정도로 로마가 월등하지만, 그 유지된 시간만 놓고 볼 때는 신라와 로마는 천년제국이라는 점에서 대등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역사가 오래되었다는 것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는 물음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해 나는 철학과 경륜은 그 세계의 체험 내지 경험의 두께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경륜은 책상 위에서 습득한 건조한 지식에서 나오기보다는 치열한 실전 체험에서 나온다. 체험이 빈약하면 철학도 빈약하다. 그래서 두터운 역사와 전통은 큰 나무의 깊은 뿌리가 된다. 

그래서 천년 고도 경주에서 9대 진사와 12대 만석꾼을 낸 명가(名家)가 지켜온 가훈이 우연히 나온 것이 아니고, 천년 제국 로마에서 노블리스 오블리제가 나온 것도 필연인 것 같다.

육연(六然)만 해도 그렇다. 프랑스에서 오래 살다 돌아온 홍세화씨가 자주 하는 이야기 중 하나가 ‘톨레랑스(tolerance)’다. ‘관용’ 또는 ‘용인’으로 번역되는 톨레랑스는 프랑스 정신이라고 할 만큼 프랑스인들에게 체질화되어 있다고 한다. 톨레랑스는 남의 생각과 행동이 나와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하는 태도다. 

19세기까지 프랑스 파리가 세계의 수도 노릇을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온갖 다양성을 넉넉하게 수용할 줄 아는 톨레랑스 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프랑스 사회가 언뜻 볼 때는 혼란스러워 보이지만 난잡으로 흐르지 않고 세련된 문화를 가꾸어 나갈 수 있는 원동력은 톨레랑스라는 것이다. 

나는 톨레랑스를 홍세화씨의 책 ‘나는 파리의 택시운전사’에서 배웠는데, 최부잣집의 액자에 걸려 있는 육연을 보면서 조선 선비의 톨레랑스를 느꼈다.

이를 종합하면 최부잣집의 수신(修身)은 프랑스의 톨레랑스요, 제가(齊家)는 로마의 노블리스 오블리제였다는 결론이 나온다. 재물과 벼슬에 대한 끝없는 욕망에 사로잡혀 사는 것이 인간일진대, 보통 인간이 이 욕망을 제어하고 절제하면서 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삶의 본질에 대한 깊은 통찰력이 없으면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삶에 대한 통찰력에서 지혜가 나오고 이 지혜를 후손에게 전승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가 종교의 계율로 나타나는데, 그 계율 가운데 하나가 바로 최부잣집 정신인 것이다. 

해동성자 설총을 낳은 터  

지금부터는 본격적으로 최부잣집의 집터를 살펴보기로 하자. 앞에서 언급했듯이 집터는 요석공주가 살던 곳이었다. 최부잣집이 이곳에 자리잡은 시기는 대략 200년 전. 그러니까 현재 장손인 최염씨의 7대조가 되는 최언경(崔彦璥, 1743~ 1804)대의 일이다.

그 전에는 경주시 내남면의 ‘게무덤’이라 불리는 곳에서 살았다고 한다. 이곳은 형산강 상류 쪽인데 양쪽에서 물이 흘러와서 합수(合水)되는 지점이라고 한다. 풍수가에서 볼 때 양쪽에서 물이 흘러와 만나는 곳은 돈이 많이 모이는 터다. 짐작건대 ‘게무덤’도 그러한 터였을 것이다.

아무튼 여기서 최부잣집의 파시조(派始祖)이자 13대조인 최진립(崔震立, 1568~ 1636)이 살았고, 아들 손자대로 내려가면서 점차 재산이 쌓였다. 재산이 늘어감에 따라 방문하는 손님도 늘어나자 좁은 집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리하여 최언경대에 이르러 여기 저기 터를 물색하던 중 현재의 요석궁터를 택지(擇地)했던 것이다. 

요석궁은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의 로맨스가 어린 곳으로 유명하다. 그 로맨스로 인해 요석궁에서 신라의 대문장가 설총이 태어났다. 

그러니까 최부잣집은 원효대사의 아들인 설총의 임신지(姙娠地)이자 출생지(出生地)라고 보아야 한다. 설총이 누구인가. 신라의 대학자로서 이두문자의 창시자 아니던가. 이 집터에서 일차로 설총이 배출되었음을 기억하자.


집터의 입지 조건을 보통 배산임수(背山臨水)라고 한다. 그런데 최부잣집을 보면 임수(臨水)는 되어 있는데, 배산(背山)이 잘돼 있지 않다. 

집 앞에 흐르는 모내(汶川)는 1300년 전 원효대사가 다리에서 미끄러져 옷을 적셨다는 유서 깊은 냇물로 임수에 해당한다. 동쪽인 토함산에서 발원하여 남쪽의 낭산과 남산 사이로 흘러오다가 반월성 부근에서 각도를 꺾어, 반월성의 움푹 들어간 부분에서 한번 모였다가 다시 최부잣집 앞을 거쳐 서쪽으로 돌아 흘러간다. 최부잣집에서 보면 동출서류(東出西流)의 수국을 이루는데, 집 앞에 물이 흘러야 돈이 생긴다. 

그런데 집 뒤의 배산이 제대로 보이질 않으니 이상하다. 대개 명택들은 뒤에서 내려오는 배산(背山, 풍수 용어로 來龍)이 튼튼한 편인데 이 집은 내룡이 확실치 않다. 야트막한 둔덕으로 내려와서 언뜻 보면 평지에 가깝다. 

‘왜 그럴까’ 하고 지맥을 조사하기 위하여 집 뒤에 있는 밭을 여기저기 돌아다녀 보았다. 거기에는 아름드리 괴목(회화나무)이 몇십 그루 들어서 있었다. 웬 나무들인가? 아마도 이 괴목들은 집 뒤가 허하니까 그 허함을 비보(秘報)하기 위하여 심어 놓은 나무가 아닌가 추측됐다. 나중에 장손인 최염씨를 만나 집의 내룡이 약해서 집 뒤가 허하다는 이야기를 했더니, 그의 답변이 필자의 추측과 같았다. 

최염씨의 말에 따르면 형산강 상류의 원래 집터인 ‘게무덤’ 자리도 뒤의 내룡이 거의 없었고, 요석궁터인 이 집도 내룡이 야트막한 둔덕이라서 뒤가 허하다는 것이다. 그 점을 보완하기 위해서 요석궁터를 집터로 일단 잡아 놓고, 집을 짓기 수년 전에 미리 집 뒤에 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나무 중에서도 수명이 오래 가는 수종인 괴목을 선택해서 심었다. 그러니 지금 아름드리 괴목의 고목들은 약 200년 전에 최언경이 집터에 대한 비보책으로 일부러 심어놓은 것들이다. 광복 전에는 괴목 숲이 빽빽하였으나 일제 말엽 일본인들이 괴목을 공출해 가기 위해 많이 베어버렸고, 광복 이후에도 많이 훼손돼 지금은 듬성듬성한 상태다. 빽빽하게 밀집된 괴목 숲이었다면 뒤에서 불어오는 북풍을 어느 정도 차단할 성싶다.

다른 집에서는 집 뒤에 대나무를 심어 놓은 경우가 많은데, 이는 내룡이 험한 바위산으로 되어 있을 때 바위산에서 풍기는 살기를 차단하기 위한 방살용(防殺用)이다. 괴목에 비해 대나무는 관리가 거의 필요없고 빨리 자라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괴목은 성장하는 데 오래 걸리므로 장기적인 투자와 관리가 필요하다. 그 대신 성장하기만 하면 대나무보다 훨씬 품격이 있고, 시간이 흐를수록 대나무보다 키가 크고 두껍게 자라 방풍 효과는 크다. 계림 숲도 모두 괴목이다. 

한편 최부잣집의 터를 자세히 보면 바로 옆에 위치한 향교보다 약간 낮게 자리잡고 있다. 200년 전 공터였던 이곳에 집을 지으려고 할 때, 향교의 반대가 심해 향교보다 터를 낮게 깎아내고 지었다. 현재 주춧돌을 살펴보면 향교보다 2계단 정도 낮다. 안채 뒤를 보니 실제로 땅을 깎아낸 흔적이 보인다. 3m 정도는 원래의 자리에서 흙을 깎아내고 집을 지었음이 발견된다. 이는 향교보다 낮게 짓기 위해서이기도 하겠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내룡이 편평하게 내려와서 뒤에 떠받쳐주는 맥이 약하므로 터를 전체적으로 깎아서 바닥을 낮추어 자연히 집 뒤의 둔덕을 높이는 풍수적 효과를 얻기 위한 장치로도 해석된다.

그러나 내룡이 약하다고 이 집이 맥(脈)도 없는 것은 아니다. 집 앞의 문천을 건너 앞산에 올라가 이 집터의 국세를 전체적으로 조망하면 동쪽의 반월성 쪽에서부터 용맥이 구불텅구불텅 한참을 내려와 계림을 지나 최부잣집 근처에서 멈추었음이 확연히 나타난다. 내룡이 야트막한 둔덕으로 내려와 약하기는 하지만 맥이 이어져서 최부잣집에 뭉쳐 있음은 확실하다.

재물이 쌓이는 도당산  

형산강 상류의 게무덤 자리에서 경주 교동으로 이사온 최언경부터 현재의 자손인 최염까지 계산하면 7대다. 12대 만석 중에 앞의 5대는 게무덤에서 하였고, 나머지 7대를 요석궁터였던 현재의 교동집에서 한 것이다. 

교동집을 풍수적인 안목에서 볼 때 최대 강점은 집 앞의 안대가 아주 좋다는 점이다. 이 집의 좌향은 임좌(壬坐)로 남향집에 속한다.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경주에서 남향집은 남산을 향하게 되어 있으므로 최부잣집 역시 남산이 안대다. 이 집 대문에서 정면을 바라보면 ‘도당산’이라는 야트막한 야산이 바로 앞에 보이고 그 너머로 남산의 세 봉우리 끝부분이 멀거니 서 있다. 물론 도당산과 남산은 실제 상당 거리 떨어져 있지만, 이 집에서 쳐다볼 때는 거의 이중으로 겹쳐진 것처럼 보인다. 

나는 최부잣집의 이중 안대를 보고서야 비로소 ‘안도감’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이 집이 만석꾼이 살던 집이라면 명당이 틀림없을 것이고, 명당이 틀림없다면 과연 어떤 점이 명당인가를 해명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었는데, 안대를 보는 순간 그 부담감에서 해방되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200년 전에 터를 잡은 최언경도 앞산의 이중 안대에 매혹되었을 것이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도당산 생김새는 재물과 관련이 있다. 도당산은 말발굽처럼 디귿(ㄷ)자 형태로 생긴 야산이다. 마치 곡식을 쌓아놓은 모양이라 하여 창고사(倉庫砂)로 보는데, 말발굽형 창고사는 그중 최고로 친다. 그리고 디귿(ㄷ)자의 터진 쪽이 최씨집 앞과 일치돼 있어서, 최씨 집에서 보면 재물이 새나가지 않고 쌓이는 형국이다. 

그런가 하면 도당산 너머로 남산의 세 봉우리가 넘어다 보인다. 세 봉우리는 둥그스름한 금체(金體)에 가깝다. 금체에서는 귀인이 나온다고 간주한다. 아쉬운 점은 금체 봉우리의 모양이 약간 기울어져 있다는 점이다. 금체봉이 똑바로 서 있었으면 귀(貴)가 좀더 높았을 것이다. 어찌됐든 창고사 위에 금체가 겹쳐 서 있는 형국의 안대는 대단히 희귀한 안대임에 틀림없다. 재물과 귀(貴)가 겹쳐서 시너지 효과를 내는 안대가 바로 최부잣집 안대인 것이다. 행여나 교과서적인 이중안대(二重案帶)를 보고 싶거든 최부잣집 대문 앞에 서서 무한정 구경하시라! 관람료도 받지 않으니 몇 시간씩 보아도 공짜다. 

최부잣집의 내룡과 안대를 보면서 양자의 상관관계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양택일 경우에는 안대가 더 중요하고, 음택일 경우에는 내룡이 더 중요하다. 최부잣집을 보아도 이 등식은 입증된다. 내룡은 땅속으로 전달되는 기이므로 음기(陰氣)이고, 안대는 땅 위의 공기를 통해 공중으로 전달되므로 양기(陽氣)로 간주한다. 죽어서 누워있는 사람은 뼈만 남아 있으므로 음기를 주로 받지만, 활동하는 산 사람은 양기를 주로 받는다고 본다. 물론 음양기(陰陽氣) 모두 받을 수 있으면 더욱 좋지만 말이다. 그러므로 양택을 볼 때는 일단 안대를 먼저 볼 필요가 있다. 

이번에는 최부잣집 마당을 구경해보자. 사랑채에 놓인 화강암 주춧돌들을 바라보니 격조와 품격이 느껴진다. 사랑채에 올라가는 계단과 둥그스름한 기둥의 받침대가 모두 붉은색이 약간 감도는 경주 화강암이다. 민가에 이렇게 원형의 화강암 주춧돌을 사용한 사례는 처음 본다. 마치 큰 절터나 궁터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아흔아홉칸의 민간 궁궐 

원래 이 집은 아흔아홉 칸이나 되었고, 부지 2000여 평에 1만여 평의 후원도 있었다. 그 집에 살던 노비만도 100여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최염씨의 부인인 강희숙여사(姜熙淑, 63)가 1961년에 시집왔을 당시에는 방앗간 외양간 등이 헐려 마흔일곱 칸으로 줄어 있었고, 노비들도 거의 자유로운 몸이 되어 살림을 난 상태였다고 한다. 지금은 더 줄어들었다. 사랑채도 화재로 (1970) 주춧돌만 남아 있고 안채와 문간채 창고만 남아 있는 상태다. 

하지만 사랑채 터에 남아 있는 화강암 주춧돌은 최부잣집 전성기가 얼마나 화려했는지를 말해주고 있다. 알고 보면 이 화강암 주춧돌들은 200년 전에 반월성에 있던 것을 집을 지으면서 옮겨 놓은 것이다. 원래 왕궁 기둥을 받치던 돌들인 것이다.

여하튼 이 사랑채에는 당대의 기라성 같은 손님들이 머물렀다. 그 면면을 한번 보자. 구한말에는 경북 영덕 출신의 유명한 의병장 신돌석(申乭錫) 장군이 이 집에 피신하여 집 주인인 최준(崔浚, 1884∼1970)의 보호를 받고 있었는데, 그때 요석궁(최부잣집의 바로 옆집으로 종조부집이었다. 현재는 한정식집 이름)의 대들보를 혼자 힘으로 들어올려 설치했다는 일화가 있다. 

구한말에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 1833∼1906)도 의병을 일으킬 때 수백명의 수행원을 데리고 이 집을 방문하여 며칠을 묵었다고 한다. 그때 최부자로부터 상당한 거사자금을 받아서 돌아갔음은 물론이다. 면암은 충청도 기호학파라서 노론이었고, 최부잣집은 남인이라 서로 당색이 달랐지만, 국난을 당하자 당색에 관계없이 도움을 청하러 왔던 것이다.

강점기 때 스웨덴의 구스타프 국왕이 왕세자 시절에 경주 서봉총(瑞鳳塚)의 금관을 발굴하기 위해 경주를 방문하였는데, 이때 최부잣집 사랑채에 머물렀다. 서봉총이라는 명칭도 스웨덴의 왕세자가 발굴에 참여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외에 국내 저명인사로는 의친왕 이강, 손병희, 최남선, 정인보, 안희제, 여운형, 김성수, 장덕수, 송진우, 조병옥 등이 다녀갔다. 의친왕 이강공(李堈公)은 사랑채에 엿새 동안 묵으면서, 이 집 주인에게 ‘문파(汶坡)’라는 호를 적어주었다. 육당 최남선과 위당 정인보 두 사람은 이 집에서 1년 이상 머무르며 ‘동경지(東京誌)’를 편찬하기도 하였다.

천도교의 손병희는 집주인인 최준이 존경하던 터여서 자주 와서 묵었다. 손병희와 최준은 보성학원 이사로, 동아일보 발기인으로 같이 참여하기도 하였다. 최린도 왔었다. 최린은 보성학교 교장으로 재직할 때 천도교도 100명과 보성학생 100명을 인솔하고 수운선생 묘소를 참배온 적이 있었는데, 이들의 숙식을 모두 최부잣집에서 해결하였다. 최수운과 최부잣집이 같은 집안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아무런 부담없이 대인원을 데리고 와 묵어갔던 것 같다. 

인촌 김성수도 1년에 꼭 한 번은 들를 정도로 자주 왔다. 인촌 집안과 최부자 집안은 교류가 빈번했다고 한다. 인촌 집안은 호남에서 제일가는 부자로 당시 10만석을 하던 집이었고, 최부잣집은 영남의 제일가는 부자로 만석을 하던 집안이라 영호남 부자끼리 통하는 부분이 있었을 성싶다. 그러한 인연으로 인하여 최준은 동아일보 발기인으로 참여하였고, 인촌의 영향을 받아 교육사업에 전재산을 기부하였던 것이다. 인촌은 고려대를 세웠고, 최준은 대구대와 계림학숙을 세웠는데, 대구대와 계림학숙은 영남대의 전신이다.


문파(汶坡) 최준은 현재의 장손 최염의 조부이며, 마지막 최부자로서 나라가 망한 일제시대를 넘긴 인물이다. 마치 중국의 식민지가 된 티베트의 망명지도자 달라이 라마처럼, 문파는 일제 식민지 상황에서 최부잣집의 자존심을 지키면서 동시에 재산도 관리해야 하는 어려운 상황을 살았던 사람이다. 

동학 후 활빈당이 부자들을 습격할 때도 최부잣집은 그 덕망으로 인해 어려움이 없었지만 일제 식민지는 그 상황이 근본적으로 달랐다. 그는 조선의 명부(名富)로서 일본 명사들의 방문을 받긴 하였지만 재산을 지키기 위하여 자존심을 죽인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는 항일 대동청년당을 조직힌 독립투사 백산(白山) 안희제(安熙濟, 1885∼1943)와 의기투합하여 백산상회(白山商會)를 설립한다. 물론 그 운영자금은 대주주인 최준이 거의 책임졌다. 백산상회는 말이 상회지 임시정부의 김구선생에게 독립자금을 비밀리에 제공하기 위한 방편으로 세운 회사였다. 

상해에 계속 군자금을 보내니 백산상회는 손해가 나 결국 부도가 날 수밖에 없었고, 그 빚을 사장인 문파가 지게 되었다. 액수는 당시 돈으로 벼 3만석에 해당하는 거금 130만원이었다. 이로 인해 식산은행(殖産銀行)과 경상합동은행(慶尙合同銀行)이 문파 최준의 모든 재산을 압류하였다. 최준은 만석꾼에서 졸지에 빚쟁이로 전락한 것이다.

그러나 얼마 후 뜻밖에도 식산은행의 두취(頭取, 총재)인 아리가(有賀光豊)라는 일본인이 최준이 섰던 거액의 빚보증을 해제해주었다. 거액의 빚을 탕감해준 것이다. 그리하여 재산의 반절 정도를 되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커다란 의문은 왜 채권자인 식산은행 총재가 빚을 탕감해 주었는가 하는 점이다. 이 부분은 최부자의 친일 행위를 가름하는 중요한 대목이다.

탕감 이유에 세 가지 설이 있다. 첫째는 일제의 내선일체(內鮮一體) 정책 때문이다. 아리가는 당시 사이토 총독의 오른팔로서 일본의 호족 출신이었다. 아리가는 조선에 와서 조선팔도 곳곳을 여행하였다고 한다. 아리가의 취미는 고건축 답사와 여행이었고 겸사해 조선의 민심도 파악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리가가 방문하는 곳마다 사람들이 경주 최부잣집의 인심이 후하다는 이야기를 하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아리가는 최부잣집을 주목하게 되었는데, 만약 식산은행이 최부잣집의 재산을 몰수하여 거지로 만들면 일제의 식민정책을 많은 사람들이 의심할 것이라고 판단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즉 내선일체 정책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고 보았다는 것이다. 일본사람이 들어와서 경주 최부잣집이 망했다는 소문이 조선팔도에 돌면 일본에 대한 반감이 더욱 악화될 것이 아닌가. 

여기에다가 아리가의 최부잣집에 대한 개인적인 호감이 작용했을 수도 있다. 아리가는 일본의 명문가 출신으로 조선의 명문가로 소문난 최부잣집에 호감을 가졌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 아리가는 최부잣집에 자주 놀러오곤 했으며, 사랑채에 머무르면서 이 집의 가주(家酒)인 법주(法酒)와 김치를 곧잘 먹었다고 전해진다. 이러는 과정에 개인적인 우정이 싹텄을 가능성이 있다. 

식산은행 탕감 건으로 해서 나중에 사이토 총독은 일본 육군성으로부터 경고장을 받았다. ‘당신은 이적행위를 하고 있다. 그 돈이 상해 독립운동 자금으로 갔는데 왜 결손처분을 해주느냐?’는 내용이었다. 여기에는 해군 출신인 사이토 총독과 역대 총독을 배출한 육군 출신 간의 알력도 작용하였지만, 이 사건이 내부적으로도 상당한 논란이 있었음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최부잣집의 종부인 셈인데 친정은 어딥니까?” 

“저희 집도 경북 봉화(춘양)에서는 내로라하는 부잣집이었습니다. 당시 봉화의 강부자라면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막상 시집을 와서 보니 집이 어찌나 큰지 처음에는 길을 못 찾을 정도였어요. 수학여행 온 학생들이나 외국 관광객들도 찾아와 집구경을 하고 가곤 했으니까요.” 

강여사의 친정도 명문부택이었던 것이다. 최부잣집이 비록 진사 이상의 벼슬은 하지 않았지만, 그 혼반(婚班)은 영남의 일급 명문가들이었다. 최염씨의 6대 조모가 의성 김씨이고, 5대와 4대 조모는 모두 진성 이씨였고, 증조모는 서애 선생 후손인 하회 유씨이고, 조모는 안동의 풍산 김씨이고, 어머니는 청주 정씨(한강 정구 선생의 후예)였다. 그런가하면 누님은 동계 정온 선생 집의 종부로 시집갔고, 둘째누님도 서애 선생 종부다. 최씨집에 시집온 여자 쪽의 친정이 모두 기라성 같은 벼슬을 지낸 집안이라서, 최씨집에 대해서 우스갯소리로 붙인 별명이 ‘치마 양반’이었다고 한다. 

“경주법주가 원래 이 집에서 손님을 접대하던 가주를 상품화한 것이라고 하는데, 법주는 어떻게 만듭니까?” 

“우리 집안에는 ‘교촌법주’라는 특유의 술이 있어요. 이 술은 맏며느리만이 전수받아 빚을 수 있죠. 저도 시어머니에게서 배웠습니다만, 그 술 빚는 방법은 누구에게도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저도 제 큰며느리에게만 전수하였습니다.” 

법주는 가을 추수 후 햅쌀로 만들어서 초봄까지만 먹는 술로 온도가 올라가는 여름에는 상하기 때문에 담글 수 없다고 한다. 

가훈을 ‘어긴’(?) 장손  

나는 강희숙 여사에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자녀들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부부는 2남 1녀를 두었으며 장남인 최성길씨(崔成吉·40)는 사법고시에 합격해 현재 예비판사라고 한다. 2001년 2월에 서울지방법원에 정식으로 발령을 받을 예정이다. 따지고 보면 최성길씨가 최부잣집의 장손이다. 

“이 집 가훈은 진사 이상 벼슬을 하지 않는다는 것인데, 아드님이 판사를 하면 이 가훈에 위배되는 것 아닙니까?” 

“그렇지 않아도 그 때문에 갈등이 많았습니다.” 

강희숙 여사가 필자에게 털어놓은 이 집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소개하면 이렇다. 최성길씨는 사법고시에 도전한 뒤 11번째에 합격했다고 한다. 그 동안 무려 10번을 낙방한 셈이다. 그 과정에 마음 고생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실의태연(失意泰然)이라는 육연을 명심하면서 버텨왔으나 10번째 떨어지자 부모된 심정으로 가슴이 너무 아프더라는 것이다.

불교신자인 강여사는 차모라는 법사를 찾아가서 아들 문제를 상담하였다고 한다. 상담결과 차법사는 돌아가신 최씨집의 증조부께서 손자가 판사되는 것을 막고 있다는 답변을 하였다고 한다. 차법사는, 조상이 후손 잘되게 도와주어야지, 이렇게 출세 길을 막는 경우는 자기도 처음 보았다고 한다. 

최성길씨의 증조부는 문파 최준이다. 최씨집이 진사 이상의 벼슬은 하지 않는 것이 가훈으로 내려왔는데, 증손자가 그 원칙을 어기려 하니까 절대 안 된다는 것이다. 판사는 옛날로 치면 진사 이상의 벼슬이다. 비록 육신은 죽었지만 문파의 영혼은 남아서 집안의 가훈을 끝까지 지키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강여사는 시조부인 문파선생 영혼을 설득하는 모종의 조치를 취했고,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그 후 11번째 시험에서 최성길씨가 합격했다고 한다. 영혼의 세계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이기 때문에 가타부타 얘기할 수는 없지만, 이 일화를 통해 최부잣집이 가훈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노력해왔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필자가 이것 저것 귀찮은 질문을 던졌는데도 종부인 강여사는 전혀 귀찮은 내색을 보이지 않고 차분하게 답변해주었다. 명문가 종부의 품위가 오랜 세월을 통해 몸에 배어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절제된 담담함 같은 것을 강여사에게서 느낄 수 있었다. 만석의 재산은 사라졌지만, 그 절제된 담담함은 계속될 것이다.

 신동아 2001.1.



5. 익산의 표옹 송영구 고택

 -풍류의 멋 감도는 非山非野의 명당


국경을 초월해 명나라 때 대문장가인 주지번과 아름다운 인연을 맺고 있는 송영구 고택은 내룡(來龍), 안산(案山), 득수(得水) 3박자가 훌륭한 풍수 명당이자 고밀도 기에너지를 갖춘 ‘마당바위’로 눈길을 끈다.


한국에서 명문가라고 할 때 과연 그 자격 기준은 무엇인가? ‘신동아’에 명가 명택을 소개할 때마다 늘 이 부분은 필자에게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질문이다. 명가 명택의 기준으로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보편적인 조건은 그 집 선조 또는 그 집안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느냐?(How to live)’하는 문제로 귀결되는 것 같다. 꼭 벼슬이 높았어야만 명문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진선미(眞善美)에 부합되는 삶을 살았느냐가 중요한 것 아닐까! 그래서 ‘정승 3명보다 대제학 1명이 더 귀하고, 대제학 3명보다 처사 1명이 더 귀하다(三政丞 不如一大提學 三大提學 不如一處士)’라는 말이 인구에 회자되는지도 모르겠다. 

그 집안이 어떻게 살았느냐 하는 문제를 천착하다 보면 거기에는 반드시 드라마틱한 사건이 발견되게 마련이다. 이번 호에 소개하는 익산 왕궁의 표옹(瓢翁) 송영구(宋英耉, 1555∼1620년) 집안은 그러한 드라마를 가지고 있다. 

드라마는 호남의 고도(古都)이자 호남대로(湖南大路)의 중심지인 전주의 어느 건물 현판에서 시작된다. 전주 시가지 한복판을 지나다 보면 ‘객사(客舍)’라고 불리는 고색창연한 기와 지붕 건물이 나그네 눈길을 끈다. 

객사는 그 지역을 방문한 외부의 귀빈이 머무르는 건물로, 요즘 식으로 말하면 그 지역에서 가장 좋은 호텔에 해당된다. 서민 여행객이야 주막집에서 국밥이나 먹으면서 머물렀지만, 고급관료나 귀빈은 시설이 훌륭한 객사에서 잔치를 즐기며 여장을 푸는 것이 조선시대의 풍습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시설과 규모에서 중국 사신이 주로 머물렀던 개성의 태평관(太平館)이 가장 유명하였다 한다. 그리고 현존하는 객사로는 전주객사 외에 거제객사(1489년), 무장객사(1581년), 밀양객사(1652년), 부여객사(1704년), 선성현객사(1712년), 낙안객사(1722년), 완도객사(1722년) 등이 있다. 

전주객사(1471년 중건)는 조선시대에 건축된 객사 가운데 그 연대가 가장 앞서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전주 객사 정면에는 커다란 현판이 하나 걸려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풍패지관(豊沛之館)’이라 씌어진 현판이 바로 그것이다. 초서체의 호방하고 힘찬 필체인데 가로 4.66m, 세로 1.79m의 크기다. 이 정도 크기의 글씨를 쓰기 위해서는 붓 크기도 엄청났을 것 같다.

전주객사에 걸려 있는 이 현판은 필자가 국내에서 본 현판 글씨 가운데 가장 크기가 큰 글씨인 듯 싶다. 이북에 있는 것으로는 평양 금수산에 있는 ‘을밀대(乙密臺)’ 현판 글씨가 아주 크다고 전해지는데, 전주의 ‘풍패지관’ 글씨보다는 약간 작다는 게 전주의 어른인 작촌 조병희 선생(91)의 말이다.  

현판에 얽힌 사연  

왜 한낱 지방 객사에 지나지 않은 곳에, ‘풍패지관’을 굳이 이처럼 크게 써야만 했을까. 풍패(豊沛)는 한나라 건국자 유방이 태어난 지역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전주 역시 조선의 창업주 태조 이성계의 고향이기 때문에 왕도(王都)로서의 권위와 품격을 드러내기 위한 배려였을 것이다. 

그런데 풍패지관은 이 근방 명필이 쓴 글씨가 아니며, 더 나아가 조선 사람이 쓴 글씨가 아니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글씨는 중국인 사신 주지번(朱之蕃)이라는 인물의 작품이다. 조선을 방문한 중국의 공식 사신이 서울이 아닌 지방에다 이러한 현판을 남긴 것은 매우 희귀한 사례다. 

왜 중국 사신은 전라도 전주까지 내려와서 풍패지관이라는 거창한 사이즈에 거창한 이름의 현판글씨를 남기고 돌아갔는가? 그가 이성계를 흠모해서 그랬던 것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주지번은 전주에서 서북쪽으로 50리 떨어진 왕궁면(王宮面) 장암리(場岩里)에 살고 있던 표옹 송영구를 만나기 위해 한양에서 내려오던 길에 전주객사에 잠시 들렀다가 기념으로 써준 것이다. 

아무튼 ‘풍패지관’이라는 현판글씨는 전북지역의 명문가인 표옹 송영구 집안과는 밀접한 관련이 있다. 달리 말하면 이 현판글씨로 인해 표옹 송영구 집안이 호남의 명문가로 부상하게 된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400여 년 전인 1606년, 당시 주지번은 중국 황제의 황태손이 탄생한 경사를 알리기 위해 조선에 온 공식외교 사절단의 최고책임자인 정사(正使)의 신분이었다. 주지번 일행이 조선에 도착하기 전에 한양에서는 임금과 대신들이 함께 모인 어전회의에서 그 접대 방법을 놓고 고심할 정도였다. 또한 ‘조선왕조실록’에는 그가 서울에 오니 국왕인 선조가 교외까지 직접 나가 맞이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주지번은 조선으로서는 매우 비중있는 고위급 인사였던 것이다. 

그러한 주지번이 교통도 매우 불편했을 당시에 한양에서 전라도 시골까지 직접 내려온 것은 오로지 표옹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한 사적인 이유에서였다. 주지번은 장암리에 살던 표옹을 일생의 은인이자 스승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추측컨대 그는 공식 업무가 끝나자마자 부랴부랴 짐을 챙겨 표옹의 거처를 방문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표옹과 주지번 사이의 아름다운 사연은 ‘표옹문집’에 기록돼 있는데, 정리하면 이렇다. 

표옹은 임진왜란이 발생한 다음해인 1593년에 송강 정철의 서장관(書狀官) 자격으로 북경에 갔다. 그의 나이 38세였다. 그때 조선의 사신들이 머무르던 숙소의 부엌에서 장작으로 불을 지피던 청년이 하나 있었다. 그런데 이 청년이 아궁이에 불을 지피면서 무언가 입으로 중얼중얼 읊조리고 있었다. 표옹이 그 읊조리는 소리를 가만히 들어보니 장자의 남화경(南華經)에 나오는 내용이 아닌가. 장작으로 불이나 때는 불목하니는 요즘식으로 말하면 ‘여관 뽀이’인데, 그 주제에 남화경을 외우는 게 하도 신통해서 표옹은 그 청년을 불러 자초지종을 물어보았다. 

“너는 누구이기에 이렇게 천한 일을 하면서 어려운 남화경을 다 암송할 수 있느냐?”

“저는 남월(南越)지방 출신입니다. 과거를 보기 위해 몇 년 전에 북경에 올라왔는데 여러 차례 시험에 낙방하다보니 가져온 노잣돈이 다 떨어져서 호구지책으로 이렇게 고용인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너, 그러면 그동안 과거시험 답안지를 어떻게 작성하였는가 종이에 써 보아라.”

표옹은 이 청년을 불쌍하게 여겨 시험 답안지 작성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청년이 문장에 대한 이치는 깨쳤으나 전체적인 격식에는 미흡한 점이 있었으므로, 조선의 과거시험에서 통용되는 모범답안 작성 요령을 알려준 것이다. 그러고 나서 표옹은 자신이 지니고 있던 중요한 서적 수편을 필사하여 주고, 거기에다가 상당한 액수의 돈까지 손에 쥐어주었다. 시간을 아껴 공부에 전념하라는 뜻에서였다. 그 후에 이 청년은 과거에 합격하였다.

바로 이 청년이 주지번이었다. 결과적으로 표옹은 사람을 알아보는 능력, 즉 지인지감(知人之鑑)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뜨고 난 후에 손들면 소용없다. 뜨기 전 무명상태의 인물을 발탁하는 혜안이 바로 지인지감 아닌가!


조선왕조실록’ 시디롬에서 주지번 항목을 검색하여 보면, 그는 을미년(乙未, 1595)에 과거에 장원급제하였다고 되어 있다. 그러니까 표옹을 만난 지 2년 후에 수석합격한 셈이다. 당시 중국사람들은 학사문장가로 초굉, 황휘, 주지번 세 사람을 꼽았는데, 그 중에서도 주지번이 가장 유명하였다고 한다. 주지번의 벼슬은 한림원학사(翰林院學士)라고 소개되는데, 한림원은 당대에 학문의 경지가 깊은 인물들이 모여 있던 곳이다. 그는 또 ‘한서기평(漢書奇評)’의 서문을 쓴 인물이기도 하다. 여러 가지 정황을 고려할 때 주지번은 보통 관료가 아니라 중국 내에서 알아주는 일급 학자이자 문장가였던 것이다. 

그런 주지번이 부사 양유년과 함께 사신으로 조선을 방문하였을 때가 선조 39년인 1606년의 일이다. 당시 조선 조정에서는 정사 주지번의 카운터파트로 대제학인 유근(柳根, 1549∼1627)을 내세웠다. 유근은 선조 20년 일본의 승려 겐소(玄蘇)가 들어왔을 때 탁월한 문장력을 발휘하여 겐소 일행을 탄복케 한 당대의 문사이자, 풍모가 준수하고 언행에 절도가 있던 인물이었다. 유근이 바로 표옹의 고모부였다는 사실도 재미있는 점이다. 또 유근의 종사관으로는 허균(許均, 1569∼1618)이 발탁되었다. 조선에서도 일급 문사들을 내세워 주지번을 상대케 한 것이다. 

이렇게 중국측의 주지번-양유년 조를 상대할 수 있는 조선의 복식조로 50대 후반의 유근과 30대 후반의 허균이 선발되었다. 공식적으로는 양국 외교관의 만남이지만, 비공식적 차원에서는 한·중 문장가들이 재주를 겨루는 국가 대항 문장겨루기적 성격도 내포되어 있었다.

이러한 사연으로 해서 당대 중국과 조선에서 난다긴다하는 문장가인 주지번과 허균은 서로 만나게 되었고, 허균의 누님인 허난설헌의 시가 북경의 선비들에게 소개된 것도 주지번과 허균의 만남에서 비롯되었다. 주지번이 허난설헌의 시에 매료되어 중국에 가지고 가서 알린 것이다. 

한편 주지번이 전주 북쪽 50리 거리에 위치한 장암 마을에 있던 표옹을 찾아왔을 때, 표옹의 나이는 51세였다. 표옹은 46세 때 청풍군수를 지냈고, 52세 때에는 경상도 성주의 목사를 지냈다. 따라서 주지번이 방문한 시기는 청풍군수를 지낸 다음 성주목사로 나가기 바로 전해다. 북경의 영빈관에서 만났던 때부터 계산하면 13년 만의 만남이었다. 당시 주지번의 나이를 정확히 확인할 수는 없지만, 주지번이 허균과 개인적으로 친해졌다는 이야기를 감안해볼 때 허균의 당시 나이(38세)와 비슷한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쯤이었지 않나 싶다.

송씨 집안의 구전에 의하면 주지번이 한양에 도착해서 전라도 왕궁에 사는 송영구라는 사람의 행방을 물었다고 한다. 이때 주변에서는 “죽었다”고 답변하였다 한다. 그러나 주지번이 좀더 수소문한 끝에 표옹이 살아 있음을 확인하였다. 그래서 왜 거짓말을 했느냐고 추궁하니까 “대국인 명나라 사신이 한양에서 시골까지 찾아가면 접대 준비 때문에 가는 곳마다 민폐가 심하니 부득이 죽었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는 대답이었다. 그러자 주지번 왈 “그러면 말 한 필과 하인 1명만 준비해 줘라. 다른 준비는 필요없다.” 이렇게 해서 전주객사를 거쳐 장암에 도착한 것이다. 

주지번은 조선에 올 때 희귀한 책을 선물로 가지고 왔다고 한다. 물론 일생일대의 은인이자 스승인 표옹에게 드릴 선물이었다. 그 책 분량이 80권 정도였다고 하는데 그 책들은 나중에 규장각에 보관되었다. 

주지번이 왕궁면의 장암에 위치한 표옹의 집을 방문해서 남긴 흔적은 현재 두 가지가 전해지고 있다. 하나는 ‘망모당(望慕堂)이라는 편액이고, 다른 하나는 표옹의 신후지지(身後之地, 묘자리)를 택지해준 것이다. 가장 어려운 시기에 자기를 도와준 은인의 양택에는 망모당이라는 글자를, 은인의 편안한 사후를 위해서는 음택 자리를 잡아줌으로써 은혜에 보답한 셈이다.

3박자 풍수명당인 망모당 

편액의 좌측 밑에 ‘주지번서(朱之蕃書)’라고 선명하게 양각돼 있는 ‘망모당’은 글자 그대로 ‘멀리서 추모한다’는 뜻이다. 표옹의 집에서 바라다보면 전방 10리 거리에 표옹 부모의 묘소가 보이는데, 표옹은 부모를 기리기 위해 망모당이라는 글귀를 주지번에게 부탁한 것이다. 망모당이라는 편액은 자나깨나 부모를 생각하는 표옹의 효심을 상징하고 있다.

장암에 있던 표옹 저택의 본채와 사랑채는 사라지고 없다. 망모당은 1607년에 표옹이 선친이 묻혀 있는 선영을 망모하기 위하여 지은 별채이자 공부방이다. 현재 이 망모당 건물만 남아 있는 상태다. 망모당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집이다.

망모당 터는 풍수적인 안목에서 볼 때 학업으로 치면 국·영·수 삼박자가 고루 갖춰진 명당이다. 대개 국어와 영어를 잘하면 수학이 시원찮고, 수학을 잘하면 영어를 못 하는 수가 있는데, 장암에 자리잡은 표옹 고택은 국·영·수 삼박자가 모두 탁월하다는 뜻이다. 여기서 국어는 집터 뒤로 연결되는 내룡(來龍)을 말하고, 영어는 집 앞의 안산(案山)이고, 수학은 물(水)의 흐름이다. 

먼저 집 뒤의 내룡부터 살펴보자. 장암 일대의 산세는 산과 평야지대가 만나는 접점 지역이라는 점이 특징. 산이 달려오다가 드넓은 김제 만경의 호남평야 지대로 스며들어가는 형태인 것이다. 그 스며들어가는 접점에 표옹의 고택이 터를 잡고 있다. 산에서 들판으로 내려가는 도중이라 산세가 부드러울 수밖에 없다. 부드럽다는 측면에서는 충청도 산세보다 약간 덜하지만, 집터 부근에 전주에서 김제 만경에 이르는 널따란 평야지대가 펼쳐져 있는 것이 다른 지방과 다른 점이다. 

인문지리적인 측면에서 보면 평야지대가 많다는 것은 교통이 좋다는 점을 암시하고 있다. 실제로 망모당은 교통이 매우 편리한 지점에 위치해 있다. 망모당 전방 500m 앞에는 조선시대 파발마가 다니던 길인 호남대로(湖南大路)가 놓여 있다. 서울에서 목포까지 가는 호남대로 가운데 전주를 거쳐 여산, 논산으로 가는 구간 중간 지점에 망모당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현재도 이 길은 호남고속도로가 뚫려 있다. 망모당은 풍수적인 입지뿐만 아니라 동시에 교통도 편리한 요지였음이 드러난다. 

영남의 400∼500년된 고택들은 대체로 교통이 불편한 오지에 있는 반면, 충청과 호남의 고택들은 교통이 편리한 곳에 많이 자리잡고 있음이 발견된다. 예를 들어 경북 영양의 조지훈 고택, 하회마을 양진당, 충재고택이 있는 안동 닭실마을, 가야산쪽의 한강 정구선생 고택 등은 첩첩 산중에 자리잡은 반면에 예산의 추사고택, 논산의 윤증고택, 망모당 등 기호지방의 고택들은 대체로 대로변에 있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차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필자의 소견으로는 기호학파와 영남학파의 차이가 아닌가 싶다. 조선중기 이후로 기호학파의 노론쪽이 거의 정권을 잡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은 서울에 출장다닐 일이 많았다. 반대로 영남학파의 남인쪽은 정쟁에서 밀려나 외부와 두절된 산속에서 절치부심하며 공부만 해야 했기 때문이 아닐까? 학풍 자체도 주기론(主氣論)쪽인 기호학파가 상대적으로 개방적이라면 주리론(主理論)쪽인 영남학파는 보수적인 경향을 보이고 있는데, 이 기풍이 주택의 입지 선정 과정에도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한반도 전체적인 지형을 놓고 보면 영남지방이 산이 많아 험준한 지형이 많고 기호지방이 산이 적어 평탄한 지형이 많기 때문에 나타나는 자연스런 현상일 수도 있다.

표옹고택의 내룡을 추적해 올라가면 소조산(小祖山)에 해당하는 산이 대추산(大楸山)이다. 그런데 이 대추산은 색다른 묘미가 있다. 높이는 해발 300m 정도의 평범한 산이지만, 풍수적으로는 천호산(天護山)쪽에서 내려오는 맥과, 용화산(龍華山) 쪽에서 내려오는 두 줄기 맥이 합쳐진 산인 것이다. 그러니까 대추산의 근원인 천호산과 용화산이 함께 태조산(太祖山)이 되는 셈이다. 물도 양쪽에서 내려와 합수(合水)한 곳을 선호하듯이, 산 역시 양쪽에서 내려온 맥이 합쳐진 곳을 높이 평가한다. 

이처럼 양쪽의 맥이 합쳐서 내려온 곳은 한쪽이 고장나더라도 다른 한쪽이 받쳐줄 수 있으므로 그 수명이 오래가는 장점이 있다고 본다. 아울러 두 줄기가 합쳐졌으므로 시너지 효과가 발생한다고도 본다. 아무튼 대추산처럼 소조산 자체가 두 줄기의 맥이 결합되어 이루어진 곳은 매우 드물다.


대추산까지는 제법 높이가 있는 기세로 이어져 오던 산세는 대추산부터 장암에 이르기까지 2km 정도는 아주 완만한 둔덕의 모습이다. 비산비야(非山非野), 산이라고 볼 수도 없고 그렇다고 들판이랄 수도 없는 자그마한 동산의 형태로 맥이 들판을 향해 내려가고 있다.

대추산 정상의 작은 바위에 걸터앉아 장암을 향해 구불구불 천천히 내려가는 맥을 아스라히 쳐다보고 있노라니 왠지 가슴이 설렌다. 흘러가는 산의 맥이 살아 있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산은 무정물(無情物)이 아니라 유정물(有情物)이다. 산이 숨쉬는 맥박이 들리고, 발밑에 흐르는 지기(地氣)가 몸의 경락을 통해서 상단전(上丹田, 이마 부위에 있는 인체의 중요 혈)으로 느껴질 때 인간은 산의 품에 마음놓고 안긴다. 이때부터 산은 그냥 산이 아니라 나의 변치 않는 애인이 된다. 애인의 품에 안겨서 ‘마운틴 오르가슴(mountain orgasm)’에 몰입될 때 진정한 풍수인(風水人)이 된다. 

사실 산과 인간과의 교감이 가능하다고 보는 것이 동양적 자연관의 핵심을 차지한다. 서양인들과 이야기를 해보면, 그들은 동양인들의 유기체적인 교감을 이해하는 데 태생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느끼는 것 같다. 여기에 동·서양 자연관의 기본적인 차이가 있다.

아무튼 자연과 인간의 교감을 기본적인 전제로 해서 성립된 사상체계가 풍수라고 한다면, 풍수는 동양적 자연관을 다른 무엇보다도 가장 충실하게 대변하고 있는 셈이다.

망모당에 서서 보면 좌우의 청룡(靑龍)과 백호(白虎)가 겹겹이 싸고 있는 점이 발견된다. 특히 대추산에서 내려오는 청룡맥이 겹겹이 싸고 있다. 자세히 살펴보니 두겹, 세겹, 네겹, 다섯겹 정도나 둘러싸고 있는 것 아닌가. 여러 겹일수록 그 수에 비례해 좋다고 보는데, 이는 두터울수록 집터가 안전하게 보호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내룡에 전혀 살기가 보이지 않는다. 뾰쪽하고 날카롭게 솟은 바위가 없고 유순한 둔덕뿐이다. 이는 추사고택의 내룡과 같은 형태로서, 조선조 양반들이 가장 선호하던 산세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마치 암탉이 알을 품는 형국처럼 부드럽고 포근한 감을 준다. 망모당의 전체 형국으로 보아서는 반월형에 가까운 것 같다. 

망모당의 좌향은 유좌(酉坐)라서 동향집이다. 집 앞을 흐르는 냇물도 방향이 좋다. 9시 방향에서 망모당쪽을 향해 흘러 들어오다가 오른쪽 백호날에서 획 감아 돌아 흘러간다. 터 앞의 흐르는 물은 나가는(out put) 방향의 물보다는, 들어오는(in put) 방향의 물을 상서롭게 평가한다.

물은 수기(水氣)를 머금고 있는데, 이 수기가 있어야만 산에서 품어져 나오는 화기(火氣)와 배합된다. 지구상의 생명을 유지하는 양대 요소는 수와 화이고, 이 수화(水火)는 각기 따로 놀아서는 안 되고 반드시 서로 배합되어야 한다. 그 이상적인 배합의 형태를 ‘주역’에서는 ‘수화기제(水火旣濟)’라고 설명한다. 수가 위에 있고 화가 밑에 있는 형국이다. 그래야 안정된다. 머리는 시원하고 아랫배는 따뜻해야 몸이 건강해지는 이치와 같다. 이렇게 수화기제를 이루기 위해서는 집터를 향해서 물이 흘러들어오는 것이 이상적이다. 물론 흘러들어 올 때도 직선으로 곧바로 들어와서는 안되고 S자나 갈짓자 형태로 서서히 들어오는 것이 좋다. 망모당의 득수(得水)는 이와 같은 형국이다.  

‘봉’자가 있는 산의 특징  

이번에는 망모당의 안산을 보자. 안산은 봉실산(鳳實山)이라 불리는 산이다. 대개 봉(鳳) 자 지명이 들어가는 산은 여자 젖가슴처럼 둥그런 모습에다가 산 정상은 젖꼭지처럼 뾰쪽하게 튀어나온 형태가 많다. 봉황의 머리 모습을 여기에 비유한다. 망모당 앞쪽으로는 봉동(鳳東), 비봉(飛鳳), 수봉(首鳳) 등 봉 자가 들어가는 지명이 많이 포진하고 있어서 산세가 아름답다.

다른 각도에서 보면 필봉(筆峯)으로 보이는 산들이 많다. 망모당에서 바라보는 봉실산의 모습 역시 전형적인 필봉에 해당한다. 필봉이라 할지라도 두툼한 필봉이다. 봉실산의 하부구조는 젖가슴처럼 둥그렇고, 상부구조는 붓처럼 뾰쪽한 모습이다. 아래가 두툼한 반면 위는 선명하게 붓의 형태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손잡이 부분에 힘을 줄 수 있기 때문에 홀쭉한 필봉보다 한단계 위로 친다. 홀쭉한 필봉은 예리하고 맑기는 하지만 뚝심이 약하다고 보는 반면, 봉실산과 같은 필봉은 둔탁한 뚝심과 예리함을 겸비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망모당의 안산은 필봉에서 끝나는 게 아니다. 봉실산 오른쪽으로 산이 하나 더 붙어 있다. 그 형상이 필자의 눈에는 마체(馬體)로 보인다. 마체란 말 안장의 형상을 가리킨다. 말안장과 같이 중간이 약간 움푹 들어간 산을 마체라고 부른다. 말 안장은 벼슬아치나 귀인을 상징하는데, 이들은 말을 타고 다녔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체의 안산은 벼슬을 상징하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놓고 보면 망모당의 안산은 문필봉과 마체가 나란히 붙어 있는 형국이다. 지성과 권력의 융합이라고나 할까. 이처럼 문필봉과 마체가 나란히 붙어 있는 형국은 10년 전 필자가 충북에 있는 우암 송시열의 묘를 답사하였을 때 목격하였던 안산을 연상시킨다.

망모당의 안산과 우암 송시열 묘의 안산은 같은 유형이라서 필자의 흥미를 끈다. 우연의 일치일까, 아니면 까닭이 있는 것일까? 표옹 송영구가 죽은 후에 그 신도비의 비문 글자를 후배인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 1606∼1672)이 썼는데, 송준길은 송시열과 더불어 노론의 양 어깨(雙肩)로 불릴 만큼 밀접한 관계였음을 감안해 보면, 망모당의 안산이 송시열에게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높다. 그만큼 망모당의 안산을 비롯한 여러 풍수적인 조건은 모델 케이스가 되기에 충분한 자격을 갖추고 있다. 

죽기 17년 전부터 이미 자신의 묘자리를 준비해 놓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 우암 자신도 풍수에 전문가적인 식견을 지니고 있었던 인물이었다. 따라서 망모당 주변 산세에 대해서 사전 정보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표옹은 동춘당이나 우암보다 한 세대 위 선배로서 정치적으로도 같은 라인에 속한다. 표옹은 진천송씨(鎭川宋氏)이지만 우암이나 동춘당은 은율송씨(恩津宋氏)로서 관향은 서로 다르다. 

망모당 터에서 주목할 부분은 한 가지 더 있다. 바로 바위다. 망모당의 우측 백호날에는 커다란 바위가 그 끝자락에 뭉쳐 있다. 그러니까 백호날의 마지막 부분이 널따란 바위로 되어 있는 형국이다. 이 바위는 마당처럼 넓다고 해서 마당바위, 즉 장암(場岩)이라 불린다. 어림잡아 사람 수십 명이 넉넉하게 앉아 있을 정도로 큰 바위다. 이 동네 지명이 장암이라고 불리게 된 것도 이 마당바위 때문이다. 

대추산에서 2km를 꾸불꾸불 내려온 맥이 최종적으로는 이 장암에서 그 기운을 마무리하였다. 바위는 기운이 강해서 보통 살기로 보지만, 이처럼 땅바닥에 깔린 평평한 바위는 살기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기운이 뭉쳐 있다고 해서 좋게 본다. 

한국의 산을 다니다가 평평하게 넓은 바위를 보면 대부분 그 바위에서 신선들이 놀았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왜냐 하면 평평한 바위는 기 에너지가 풍부해 거기에 앉아 바둑을 두거나, 아니면 누워서 뒹굴방굴 놀더라도 자동적으로 암기(岩氣)를 받을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불규칙하게 파열된 듯한 날카로운 바위는 살기로 작용하지만, 평평한 마당바위는 고단백 에너지로 작용한다는 것이 신선도(神仙道) 수행자들에게 구전으로 내려오는 비밀이다.

만약 마당바위 옆에 물까지 흐르면 금상첨화임은 물론이다. 등산하다가 혹시 마당바위 같은 것이 눈에 띄면 무조건 허리띠를 풀고 한두 시간 누워서 잠을 자거나 혹은 좌선을 하면 몸이 풀리면서 정신이 개운해질 것이다. 찜질방이 따로 없다. 만약 집안에 이런 바위가 있으면 따로 등산갈 필요가 없다. 매일 하루에 한시간씩만 바위에 누워 있으면 자동적으로 찜질이 되니까 말이다. 표옹 자신도 한가할 때는 집앞의 이 마당바위에서 바둑을 두거나 시를 읊으면서 소일했다고 전해진다. 

참고로 마당바위에 관련된 이야기를 하나 더 소개해보자. 필자는 지난해에 미국의 풍수를 조사하기 위해서 이곳 저곳을 답사한 바 있다. 주된 관심사는 미국의 부자 동네에 있는 명택들이 과연 어떠한 풍수적 조건을 갖추고 있는가 하는 점이었다. 그래서 LA를 비롯해 샌프란시스코, 뉴욕, 워싱턴, 시카고에 있는 부자동네들을 둘러보았다.

그 중에 기억에 남는 곳이 뉴욕의 부자들이 모여 사는 알파인(Alpine)이라는 동네다. 맨해튼 5번가에서 자동차로 30분 정도 거리인 알파인은 도심지인데도 온통 숲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아주 조용하고 쾌적하였다. 부자들의 사생활을 보호하기 위해 집 주소도 없고 오로지 사서함으로만 우편물이 전달되는 특이한 동네였다. 보통 몇 백만 달러 하는 집들만 모여 있었는데 유명한 팝송가수인 머라이어 캐리의 1000만 달러짜리 집도 있었다.

바로 이 동네의 풍수적 특징은 마당바위였다. 동네 전체가 널따란 바위산에 올라앉아 있는 형태였다. 바위가 땅 위로 돌출되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마당과 집터를 삽으로 조금만 파보면 바닥이 전부 바위로 되어 있었다. 그래서 정화조를 팔려면 돈이 많이 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필자가 알파인에서 사흘을 머문 재미동포 박종화씨(朴鍾和·46) 집은 알파인에서도 마당바위 집의 전형이었다. 집 앞과 집 뒤의 마당에 각각 널따란 바위가 돌출되어 있었는데, 마치 건물이 거북이의 등에 앉아 있는 것 같았다. 앞의 바위는 거북이의 머리요, 뒤의 바위는 거북이의 꼬리에 해당되었다. 필자는 사흘 동안 이 집에서 자면서 누적된 미국여행의 피로를 풀고 생기를 되찾았다. ‘바위 발’을 제대로 받은 것이다. 미국의 영지(靈地, 명당)는 대부분 부자들이 소유하고 있다는 결론도 얻었다


‘북장암(北場岩) 남장대(南長臺)’. 전주 인근 최고 명당 두 군데를 일컫는 표현이다. 장암은 두말할 것 없이 표옹의 망모당 자리를 가리키는 것인데, 장대(長臺)란 어디를 지칭하는 것인가?

장대는 ‘장천부사(長川浮莎)’의 줄임말이므로, 원뜻은 ‘큰 냇물에 떠내려가는 뗏목’형의 명당을 의미한다. 장천부사 자리는 현재 전주 평화동 일대 어느 지점을 가리킨다. 옛날부터 장천부사 자리를 잡으려고 수많은 풍수 마니아들이 몰려들어 이곳에 집을 짓고 살았다. 서로 자기가 살고 있는 집터가 장천부사 자리라고 믿었다. 

내가 근무하는 원광대학교의 어느 교수 한 분도 자신의 집터를 장천부사 자리라고 생각하였다. 조부대에 명당이라 믿고 많은 돈을 들여 현재의 집터로 이사왔다는 것이다. 어느 곳이 정확한 장천부사 자리였는지 필자는 모른다. 더군다나 지금은 평화동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서 일대의 지형이 완전히 훼손돼버리고 말았다. 장천부사는 아파트 개발로 인해서 영영 떠내려간 것이다. 아파트가 들어서려 할 때 이를 가장 격렬하게 반대한 사람들은 다름 아닌 장천부사 명당을 믿는 풍수 마니아들과 그 후손들이었다는 사실을 환경운동가들은 유심히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풍수와 환경운동은 통하는 면이 있다는 말이다.

하여튼 ‘북장암 남장대’라는 표현은 겸암(謙菴) 유운룡(柳雲龍, 1539∼1601)이 일찍이 이 지역을 둘러보고 한 말이라고 전해진다. 겸암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유성룡(柳成龍)의 친형으로 안동 하회마을 양진당(養眞堂)의 주인이었던 인물이다. 

경상도 하회에 살던 사람이 멀리 전라도 전주까지 답사를 와서 이런 말을 남긴 것을 보면 흥미롭다. 이를 보면 겸암은 단순한 유학자가 아니라, 도학과 풍수에 깊은 식견을 지녔던 인물로 추정된다. 외형적으로는 유가의 선비이면서도 내면에서는 도가적 취향을 지녔던 것 같다.

일제 때 총독부에서 비밀리에 전국의 풍수도참서를 수집하여 만든 ‘조선비결전서(朝鮮秘訣全書)’라는 조그마한 책자가 있는데, 여기에 보면 ‘겸암결록(謙菴訣錄)이라는 항목도 있다. 즉 겸암이 남긴 예언서가 일제시대까지 내려오면서 전국에 유통될 정도였으니, 이로 미루어 보면 겸암이 보통 인물이 아니란 점을 알 수 있다.  

주지번이 잡은 음택 명당  

다시 표옹과 주지번의 일로 돌아가보면, 주지번은 직접 산세를 파악해 표옹의 묘자리를 잡아주었다. 조선 사람들의 사생관에 의하면 사람이 죽는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나는 게 아니라, 죽은 뒤에 그 사람의 혼(魂)은 하늘로 올라가고 백(魄)은 땅속의 뼈에 남는다고 보았다. 이른바 혼비백산(魂飛魄散)이라는 말도 원래 이런 이치를 두고 하는 말이다.

이렇게 뼈가 묻히는 묘자리는 백이 남아서 거주하는 집이므로 ‘음택(陰宅)’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미 죽은 자의 관을 다시 꺼내 ‘부관참시’하는 형벌은 사후세계의 삶까지 망가뜨리는 대단히 가혹한 형벌로 간주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음택자리를 잡아준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아무에게나 쉽게 부탁할 수 없는 문제인 것이다. 주지번은 표옹에게 보은하기 위하여 정성껏 자리를 잡았고, 이 일이 그가 할 수 있는 가장 실제적인 보답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주지번이 잡은 묘자리는 지금까지도 잘 보존되어 있는데, 아마 그는 풍수에도 조예가 깊었던 모양이다. 필자가 표옹 집안을 처음 알게 된 계기도 사실은 이 묘자리로 인해서다. 지금으로부터 7년 전 필자의 풍수 스승은 진천송씨 집안의 ‘주지번 소점(朱之蕃 所占, 주지번이 잡은 자리)’이 유명하니 반드시 볼 필요가 있다고 적극 권하셨다. 스승에 의하면 명사소점(明師所占, 명 풍수가 잡은 자리)이 분명하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필자의 스승도 자신의 그 윗대 스승으로부터 주지번 소점을 전해 듣고 알았다고 한다. 이것을 보면 예부터 주지번 소점은 전북 일대에서 풍수깨나 하는 사람들에게는 널리 회자되고 있었음이 확인된다.

주지번 소점은 좌향이 특이하다. 내려오는 맥으로부터 약 30도 정도 틀어서 자리를 잡았다. 이러한 법식은 고려 초기의 묘인 경북 안동의 권태사(權太師, 왕건을 가르킨 三太師 중의 한 명) 묘와 그 유형이 비슷하다. 아무튼 특이한 법식임은 분명하다.

주지번 소점을 답사하면서 필자는 조선시대 풍수에 능통한 명사(明師)들이 다른 사람의 묘자리를 잡아줄 때 어떤 윤리적 기준이 있는가 하고 스승에게 질문한 적이 있다. 부탁만 하면 무조건 잡아주는 것인가? 풍수가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오는 그 기준은 다음과 같다.

첫째, 묘자리를 부탁하러 온 사람의 사주와 관상을 본다. 사주와 관상은 그 사람을 겪어보기 전에 미리 그 인물됨을 파악해본다는 뜻이다. 일단 이게 좋지 않으면 거절한다.

둘째, 그 사람에 대한 주변 평판을 들어본다. 평소 주변에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살았는지 아니면 인색하게 살았는지를 조사한다. 주변 사람의 평판이 나쁘면 거절한다.

셋째, 묘자리를 부탁하러 온 사람의 조상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조사한다. 조상이 양심적이고 후덕한 사람이었는지 아니면 남의 가슴에 못을 많이 박고 산 사람이었는지를 참작한다.

넷째, 그 집의 선산에 있는 묘들을 조사한다. 선산이 과연 어느 정도 수준인지를 본다. 선산에 있는 선대의 묘들이 A급 터에 있는가, 아니면 B급 C급 터에 있는지. 선산에 있는 선대묘의 등급에 비례해서 그 후손들이 배출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만약 선산의 묘가 C급인 사람이 부탁하면 그보다 약간 높은 급수의 터를 잡아줄 수는 있지만, 두 계단 혹은 세 계단을 껑충 높여서 잡아주지는 않는다. 즉 C 마이너스급 선산을 가진 후손에게는 C 플러스급을 잡아주거나 또는 B 마이너스급을 잡아주는 식이다.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A급은 절대 잡아주지 않는다. 사기꾼에게 정승나올 자리를 잡아주지 않는다는 말이다. 여기서 특별한 경우란 그 사람이 죽어가는 사람을 살린 일과 같은 아주 큰 선행을 하였을 경우다.

다섯째, 명당을 잡기 위해서는 지관과 의뢰인이 몇 년 동안 같이 생활하면서 산을 보러 다닌다. 명당이 당장 구해지는 것이 아니므로 시간을 가지고 이곳 저곳 산을 보러 다녀야 한다. 이를 구산(求山)하러 다닌다고 표현한다. 이 여행 과정에서 지관은 의뢰인의 인간성을 면밀하게 관찰할 수 있다. 평소 자장면을 사는가 설렁탕을 사는지 아니면 한정식을 사는가 살펴본다. 지관에 대한 대접이 소홀하고 짜게 논다 싶으면 그에 맞는 자리를 잡아준다.

예를 들어 의뢰인과 지관이 접촉하는 과정에서 그 집의 차남은 지관에게 막걸리도 대접하고 먹을 것도 주면서 이것저것 친절을 베푸는 반면 장남은 소 닭보듯이 냉담하게 지관을 대하였다면, 장남에게는 불리하지만 차남에게 유리한 쪽으로 작용하게끔 지관이 슬며시 묘의 좌향을 돌려놓았다는 일화는 주변에서 심심찮게 들을 수 있다.

조선시대 명사는 이와 같은 기준을 가지고 남의 집 묘를 잡아주었다. 무조건 잡아준 것이 결코 아니라 엄격한 윤리적 기준이 있었던 것이다. 만약 이러한 윤리적 기준 없이 조자룡 헌칼 휘두르듯이 아무렇게나 명당을 남발하는 지관은 본인 스스로가 하늘의 견책을 받을 뿐만 아니라 자손이 끊어지는 과보를 받는다고 믿었다. 

그렇다면 주지번이 소점해준 표옹은 평소에 어떻게 살았을까. 생전에 그가 남긴 몇 가지 일화를 보자. 표옹은 52세 때 성주목사를 지냈고, 56세때 경상감사를 지냈는데 관찰사 임기 동안에 아주 강직하고 청렴한 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그가 관찰사를 그만두고 낙동강을 건너기 위해 어느 나루터에 닿았을 때의 일이다. 이때가 여름 무렵이었는데 경상감사를 배웅하기 위해 나루터까지 동행한 이방이 “어르신네가 경상도에 계셨다가 가지고 가시는 것은 손에 쥐고 있는 부채 하나밖에는 없군요”하고 한마디 하니까, 표옹은 그 말을 듣자마자 손에 들고 있는 부채를 낙동강에 던져버렸다. 부채마저 강물에 던졌다고 해서 당시 사람들이 낙동강에 붙인 이름이 ‘투선강(投扇江)’이다. 그리고 그 부채를 던진 나루터를 ‘투선진(投扇津)’이라고 하였다고 송씨 문중에 전해진다.

투선강과 투선진. 이는 이후 진천 송씨들의 정신이 되었다. 강직과 청렴의 상징으로서 표옹의 후손들이 조상에 대하여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이 바로 이 대목이다. 표옹의 정신은 눈앞의 작은 이익 때문에 자존심을 팔면서 구질구질하게 살지 말자, 아쉬운 소리 하지 말자, 없으면 없는 대로 살자, 공직에 있는 집안 사람에게 어떤 일이 있어도 청탁하지 말자로 은연중에 이어지고 있다는 게 표옹의 13대손 송억규씨(宋億圭·전 전북공무원교육원장)의 말이다. 명문가의 후손들을 만나보면 공통적으로 자존심이 강하다는 점이 발견되는데, 진천 송씨(鎭宋)들도 마찬가지였다. 집안의 전통에 대한 자존심이 후손들의 인격을 형성하고 있는 것같다. 

표옹의 정신은 그의 손자로 공조판서를 지낸 송창(宋昌)의 유언에서도 나타난다. 송창은 유언에서 3가지를 하지 말라고 남겼다. 물만장(勿挽章, 만장을 쓰지 말라), 물청명(勿請銘, 비문을 써달라고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지 말라), 물입비(勿立碑, 신도비를 세우지 말라)가 바로 그것이다. 삼물(三勿)에서도 역시 진송들의 자존심이 읽혀진다.

필자가 인터뷰해본 진송사람들 가운데 표옹의 12대 손인 송병순(宋炳循·72)씨도 아주 인상적이었다. 그는 재무부관세국장, 국민은행장, 은행감독원장을 거쳐 지금은 대만과의 합작회사인 ‘CDIB·MBS 벤처캐피탈’의 회장으로 있다. 그는 화금체(火金體)의 관상에, 사주도 박정희 전대통령의 사주처럼 지지에 인신사해(寅申巳亥)가 있었다. 이런 유형은 일생 동안 바쁘고 지뢰밭을 통과하는 것처럼 치열한 삶을 살아가는 무장(武將)의 명조에 가깝다. 아니나 다를까, 작년 12월에 출간된 그의 회고록 제목도 ‘나의 삶. 불꽃 70년’이었다.

그는 회고록 첫머리에 표옹 선조의 ‘투선진(投扇津)’ 일화를 소개하고 있었다. 자신이 45년 공직생활 동안 어려울 때마다 뇌리를 떠난 적이 없는 신조였다는 것이다. 그는 60년대 부산세관 충무출장소장으로 근무할 때 고질이었던 해상밀수를 뿌리뽑기 위하여 직접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 일본에서 들어오는 밀수선 영덕호를 해상에서 격침시킨 바 있다. 물론 박대통령의 사전허가를 받은 후였다. 이 사건 이후로 밀수선이 근절되었다고 한다.

80년대 초반 은행감독원장으로 재직할 때는 서울 창성동의 20평도 되지 않는 허름한 고가(古家)에서 생활을 했는데, 이때 프로판 가스가 터져 집이 불타고 부인은 중화상을 입은 적이 있었다. 이때 부인의 치료비가 없어서 할 수 없이 은행융자를 신청해야 했는데, 나중에는 이 소식을 접한 문중에서 십시일반 돈을 모아 보태고 사돈집에서 얼마를 도와주어 아파트로 이사갈 수 있었다고 한다. 은행대출 과정에서 은행직원들이 창성동 집을 보고 나서 모두 놀랐음은 물론이다. 한국의 은행감독원장이라는 사람이 여윳돈이 없어서 가계대출을 받는다는 것도 놀랄 일이고, 저런 허름한 집에서 살고 있을 줄은 정말 몰랐다는 것이다.

송회장은 현재 70대인데도 대만과의 합작회사 회장을 맡고 있다. 그런데 송회장과 대만과의 인연을 맺은 계기가 필자의 흥미를 자극하였다. 1969년 아시아 4개국 관세협력 회의 때 당시 대만의 관세국 부국장으로 참석했던 유태영씨(劉泰英·65)를 알게 됐는데, 만나자마자 두 사람은 의기투합하여 현재에 이르기까지 30년 동안 형제처럼 가깝게 지내는 사이가 되었다고 한다. 

유태영씨가 한국이 IMF 위기를 만나자 거액을 송회장에게 선뜻 투자하여 현재의 회사를 한국에 세우게 하였고 자기에게 회장을 맡겼다고 한다. 송회장과 유태영씨의 국적을 초월한 특이한 인연을 바라보면서 필자는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삼세인과설(三世因果說)이 생각났다.

전생의 선연이든 악연이든 금생에 다시 만나고 금생의 인연은 내생에 다시 만난다는데, 혹시 전생에 표옹이 중국에 가서 도움을 받았던 주지번이 환생해서 이번에는 반대로 표옹의 후신을 도와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전생의 선연이 다시 만나 금생에 아름다운 인연으로 꽃피우는 것인가 하는 상상을 해보았다.  

진천 송씨의 유명한 떡 ‘백자편’  

호남고속도로 익산 인터체인지 일대에는 진천 송씨의 선산이 있다. 선산에는 아주 아름답게 자란 오래된 육송들이 빽빽하게 서있다. 이렇게 잘 자란 소나무밭도 그리 흔하지 않다. 이 소나무들은 약 400년 전에 심은 유서깊은 나무들로 진송들의 전통을 말없이 드러내고 있다.

이 소나무들은 진송에 시집온 며느리로부터 연유된다. 표옹의 며느리 가운데는 남원의 삭녕 최씨 집에서 시집온 며느리가 있었다. 남원의 삭녕 최씨라면 훈민정음을 언해하고 용비어천가를 주해한 최항(崔恒, 1409∼1474)의 후손들을 지칭한다. 송씨 집으로 시집갈 때 친정아버지인 최상중(崔尙重)이 딸에게 물었다. “시집갈 때 무엇을 주면 좋겠느냐?”. 그러자 그 딸은 “변산 솔씨 서말만 주세요”라고 하였다. 변산은 예로부터 궁궐을 지을 때 사용하던 질좋은 소나무가 많은 곳으로 유명하였다. 인터체인지 일대의 보기좋은 육송들은 시집올 때 가지고 온 이 소나무씨를 뿌려서 성장한 나무들이다. 

이 며느리(할머니)가 진송 집안에 수립한 또 하나의 전통이 있다. ‘백자(百子)편’이라고 불리는 특이한 모습의 떡이다. 사람 발뒤꿈치 모양의 흰떡 수십개를 부채살처럼 둥그렇게 모아놓은 다음, 그 위에다 다시 계속해서 둥그렇게 얹어놓는다. 마치 피라미드처럼 6∼7층을 겹쳐서 쌓아놓는다. 행사가 끝나면 이 떡을 하나씩 먹으면서 자손의 창성을 기원한다고 한다. 백명의 자손이라는 백자의 뜻과 같이 송씨 문중의 자손들이 번창하기를 의미하는 떡이다. 지금도 문중 시제 때는 만들어서 모두 먹는다. 

매년 음력으로 7월16일. 백중 다음날에 망모당에서는 소쇄일(掃灑日)이라는 행사가 있다. 집안 전체가 모여서 청소도 하고 같이 식사도 하는 날이다. 이날에는 백일장도 열렸는데, 옛날에는 비단 송씨뿐만 아닌 인근의 선비들도 참여해서 시와 문장을 짓고 음식을 먹으면서 같이 즐겼다고 한다. 이 행사에 참석하느라고 여산에서 삼례에 이르는 일대가 흰옷 입은 선비들로 가득했다고 하며, 시회(詩會)가 끝나면 저녁에 칠월 백중의 둥그런 달을 보고 모두 귀가하는 풍경을 연출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