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꽁이의 찬양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해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사43:21)

나의 건강관리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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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관리

2019. 10. 27.

 

 


  이 글은 <월간 목회> (사장 박종구 목사) 07년도 1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나의 건강관리를 말한다


                                                                                           글 : 오소운 목사





1. 나의 어린 시절


나는 경기도용인군 남사면아리실교회1) 오연영(吳連泳, 1889-1951) 장로와 윤메리(尹馬拿, 1891~1960) 권사의 14 남매 중 13번째, 살아남은 4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위로 누님 두 분 모두 목사부인이요, 아래 동생도 목사다. 우리 부모님 자손 중, 목사가 13, 장로가 3, 전도사가 4, 찬양대 지휘자가 7 명이나 배출되었음을 하나님께 감사한다.


1) 아리실교회는 나의 할아버지(吳隣善, 1854-1912)가 1888년에 이화학당의 창설자 스크랜턴(Mary Scranton) 부인에게 전도를 받고, 예수를 믿어 1895년에 세운 감리교회였으나, 1906년 선교사들의 선교지역 분할로 장로교로 바뀌었다.


 

 

 아리실교회 당화록에 기록된 창립 역사 첫페이지. 백부 오건영(吳健泳, 1879~1937) 장로의 친필이다.

구주강생 연호가 서툴었던 그 때, 1896년이라 적었지만, 다른 페이지에 보면 1895년이 맞다.

 

 

  14남매라니! 입을 벌리는 분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인간에게 내리신 [첫 번째 복]이다.

<주> : 祝福이 아니다. 축복은「아무개에게 복을 내려줍소서」하고 하나님께 비는 인간의 기원에 쓰는 말이다. 하나님은 직접  <복을 내리시는 절대자>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께 <축복>이라고 쓰는 것은 하나님 모독이다.

 

이 첫번째 복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아닌가. 그래서 믿음의 선진(先進)들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대로 쑥쑥 낳아 길렀다. 감리교회의 창시자 존 웨슬리의 외조모는 25남매를 낳았고, 존 웨슬리의 어머니도 19남매를 낳았으니, 우리 부모님은 적게 낳으신 편이다.


예수님은 열매 없는 무화과(無花果) 나무를 저주하셨다. 이유는 꽃만 있고 열매가 없었기 때문이다. 꽃은 왜 피는가? 과실을 맥기 위해서다. 그런데 요즘에는 꽃만 만발하고 열매가 없는 <무과화>(無果花)들이 넘쳐난다.

 

<주> : 열매 없이 아름다움만 자랑하는 <無果花> 여성들도, 하나님의 창조섭리를 따라 부지런히 자식을 낳아, 이 나라를 부강한 국가로 만들 뿐 아니라 <모성애의 행복감>을 맛보시기를 진심으로 부탁한다.

 

우리 14남매는, 왜 우수리만 남고 다 일찍 갔는가? 아버지는 당신이 빨리 회개하지 않고, 뜨뜻미지근한 라오디게아 교회 같은 신앙생활을 했기 때문이라고 자책하셨다.

 

열 아이들은, 두 돌 지나 한참 재롱부릴 때 모두들 죽어, 마을사람들 입에 <그 집 애들은 세 돌을 못 넘긴다>는 말이 오르내렸다고 한다.


아버지는 참맘으로 회개한 후, 후사(後嗣)를 달라, 금식기도를 하셨단다. 그러자  <딸 둘 아들 하나> 라는 응답을 받으셨다는 것이다. 누님 둘을 낳은 후 내가 태어나자 <믿음으로 얻은 자식>이라고, 믿을 信자를 넣어 [신근(信根)]2) 이라 이름을 지어주셨다.

 

2) 지금 쓰고 있는 소운(小雲)이란 이름은, 은사 김정준(金正俊) 목사님이 지어주신 아호이다.

 

아버지 43세, 어머니 41세 때다. 그런데 3년 후에 동생을 주시자, 아버지는 보너스로 주신 선물이라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뜻으로 영화 榮자를 써서 영근(榮根)이라 이름 지으셨다.


 

 

왜 이렇게 주제와는 상관없는 얘기를 길게 늘어놓는가,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 내가 태어나자 <세 돌 못 넘길 것이다> 라고들 입방아를 찧었는데, 세 돌을 넘기자 사람들은 모두 놀랐단다. 어찌나 잔병치레가 심했던지, 어머니는 보채는 나를 안고 밤을 새우는 날이 허다했단다. 사경회 인도 차 오셔서 우리 집에 묵고 계신 박정동(朴貞同)3), 김득순(金得順)4) 여전도사님이 어머니 대신 나를 번갈아 안고 어머니에게 눈을 붙이도록 하신 일도 있었단다.

 

 

3) 박정동 전도사님은 평생 독신으로 살며, 양아들을 길러 성가시켰는데, 어느 날 전도사님을 양로원에 갖다 두고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고 한다. 내가 우연히 주일학생들을 데리고 양로원 위문을 갔다가 거기 계신 것을 발견하고 여쭤보았더니, 울면서 들려주신 말씀이다.

4) 김득순 전도사님은 경신학교 교목실장으로 은퇴한 김종희 목사 고모님이다.

 

 


내가 아홉 살이 되자, 소학교5) 에 시험을 치라는 통지가 왔다.6)

 

5) 당시는 공립심상소학교(公立尋常小學校)라고 하였다.

6) 당시 왜인들은 조선인에게 우민정책을 썼기 때문에, 학교 건물을 별로 안 지어 소학생들을 시험을 쳐서 입학시켰다. 떨어진 아이들은 <강습소> 라는 데서 교육을 받다가 나이가 들어 편입을 하였기 때문에, 나와 같은 반 아이들 중 4-5세 많은 아이들이 수두룩했다.

 

5킬로나 되는 학교에 아버지 자전거 뒤에 타고 가 시험을 쳤는데, 14명 중 나만 합격이 되었으니, 동무도 없이 학교에 다닐 일이 난감했다. 한 학기를 다니고 여름 방학에 양 무릎 관절염이 발병하였다. 가냘픈 다리로 매일 10킬로 이상을 걸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갖가지 민간요법을 쓰다가 마침내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하자, 동네 아낙네는 또 입방아를 찧었다지만, 주님의 은혜로 한 달 만에 완치되어 퇴원하였다.

 

아버지 등에 업혀 병실 4층에서 승강기(昇降機)를 기다리는데, 우리나라의 최초 의학박사이신 이용설(李容卨, 1895-1993) 박사님이 내 등을 어루만지며 말씀하였다.

 

 

“네가 이렇게 완치되어 퇴원하게 된 것은, 너의 부모님의 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께서 고쳐주신 것이다. 부모님께 효도하고 건강하게 자라서, 하나님의 큰 일꾼이 되어라.”

이 박사님은 아버지께 또 이런 말을 하셨다.


“이 병원에 무릎 관절염으로 세 사람이 입원했는데, 16세 소녀는 두 무릎을 절단하였고, 14세 소년은 한쪽 허벅지를 절단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애들보다 중한 양무릎 관절염의 아드님이 이렇게 완쾌 되었으니, 세브란스병원 역사상 처음 있는 기적입니다. 앞으로 심한 운동은 못하도록 주의를 시키십시오. 여기 진단서를 떼어 왔으니 학교 교장에게 주십시오.”

 

이듬해 복학을 한 나는 체조시간이면 교실에 홀로 남아책을 읽었다. 그리고 평생 운동하고는 담을 쌓고 살았다.



2. 나의 젊은 시절

내게는 이상한 버릇이 있다. 책을 붙들면 책에 몰입하여 남의 말을 전혀 듣지 못하는 것이다. 어려서 이 버릇 때문에 아버지께 자주 꾸중을 들었다. 나중에는 이를 아신 아버지는 내게 말을 걸 때는 나를 건드려 책에서 빠져나오게 한 다음에 말씀을 하셨다.


전혀 운동은 않고 책만 읽는 나는 몸이 아주 약했다. 그래서 생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맞선을 보았을 때, 장모님이 <너무 허약하여 딸이 소년 과부 될 것 같다>는 이유로 퇴자를 놓았으나, 아내가 부모와 인연을 끊더라도 나와 결혼하겠다고 하여, 어언 결혼 56주년을 넘겼다.


청년시절, 나는 얼마나 몸이 날씬(?) 했던지 별명이 <간디>였다. 신장 167에 체중 44.5킬로, 허리둘레 27인치. 그래서 징병검사 때면 체중미달이 되니까, 검사관이 앞으로, 뒤로! 하고 체중계에서 왔다 갔다 하게 하여, 바늘이 45를 지나는 순간 <합격> 하고 소리를 쳐 합격(?)은 했으나, 언제나 <제3을종>이란 딱지가 붙어 있었다.


하는 일은 신경을 많이 쓰는 편집 일이요, 작가와 화가를 만나러 다방에 가면 커피만 마시고, 월급으로 생활이 안 되니까 글을 쓴다, 번역을 한다, 하며 밤늦도록 커피로 잠을 쫓다보니, 매일 커피 20잔 이상을 마시는 생활을 10수년을 하였다. 마침내 십이 지장 궤양이란 진단으로 세브란스병원에 한 달 입원 치료하라는 권고를 받았다.



3. 전산초 누님의 식이요법

1952년부터 10년 동안, 두 살 터울로 5형제나 주셨는데 한 달 입원이라니…, 아득하였다. 참담한 마음으로 돌아오는 길에, 연세대 간호대학장으로 계신 전영택(田榮澤, 1894- 1968) 목사님의 맏딸, 전산초(田山草, 1921-1999) 박사를 만나 상담하려고 그의 사무실로 찾아갔다.


“아니, 동생이 웬일이야?”

전 박사는 나를 <동생>이라 불렀다. 전영택 목사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자식들 앞에서 <내 아들> 이라고 소개하셨기 때문에 나는 그를 누님이라 불렀다.


“저 십이지장 궤양이란 진단 나왔어요.”

“저런! 의사가 뭐래요?”

“한 달간 입원하래요.”

“그렇게 심해?”

“세 군데나 궤양이 생겼대요.”

“입원할 형편은 되나?”

“돈도 없고 시간도 없어요. 그래서 누님께 상의 드리려 왔어요.”

“잘 왔어. 걱정 마.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완치시킬 수 있어요.”


누님은 자상하게 치료법을 일러주시고《식이요법》책자까지 주셨다. 약 타러 올적마다 의사에게 특진료를 내야 하니까, 처방전을 가져오면 일반 약사들도 알아볼 수 있도록 다시 써줄 테니, 그걸 가지고 아는 약방에서 약을 사다 먹으면 비용이 절감된다며 그렇게까지 해주셨다.

누님이 일러준 말씀과, 식이요법에서 내가 읽은 내용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술은 물론, 커피, 홍차, 음료수 등 절대 금지. 위를 평안케 해야 한다. 

②맵고 짜고, 뜨겁거나 찬 음식 절대 금지. 위에 자극을 주지 말라. 

③기름에 튀긴 것은 절대 금지. 튀긴 것은 위장에서 복잡한 분해과정을 거쳐야 하니까 위에 부담을 준다.

④밥은 100번 이상 씹어 먹어라.7)

침은 하나님이 주신 최고의 소화제다. 물대신 침을 많이 만들어 삼켜라.

    7) 나는 지금도 김밥 같은 것을 먹을 때는 물을 안 마시고 100번 이상 꼭꼭 씹어 침으로

     삼킨다.


⑤빵은 기름 묻은 겉껍데기는 도려내고 속만 먹되, 굽지 말고 두 쪽만 버터와 잼을 조금 발라 먹어라. 버터를 발라 구은 토스트는 분해과정을 거쳐야 하니 위장에 부담을 준다.

⑥정 김치가 먹고 싶으면, 물에 씻어서 꼭꼭 씹어 우려먹고 섬유는 뱉어라.

⑦계란은 당분간 노른자만 먹고, 고기는 굽지 말고 푹 고아서 먹되, 초기에는 국물만 먹어라. 구워 먹는 경우에는 살짝 구워 먹어라.

⑧우유나 물도 미지근하게 데워, 조금씩 씹어 먹어라. 물에도 체한다.

⑨평생, 식사는 양의 80%만 하고, 군것질은 절대 하지 말라.

⑩늘 식사시간을 일정하게 하고,적당한 산책에 충분한 수면을 취하라.

⑪무자극,  저섬유, 고담백, 고칼로리 식사를, 초기에는 매일 세 시간마다 5끼를 들라.

⑫가장 중요한 것은 작은 일에도 기뻐하며 감하하는 것이다. 이게 만병통치약이다. 크게 웃으면 모든 기능이 활성화된다.



는 이를 철저하게 실천하며 병원에서 내린 처방대로 약을 먹었다. 당시 나는 기독교계명협회의 작가 겸 편집인(Writer and Editor)이었는데, 김숙자(金淑子)라는 고마운 여직원이 매일 지성껏, 10시, 13시, 16시에 식단표대로 사무실에서 음식을 만들어주어, 꼭 1년 만에 완치되었다. 그 기간 동안, 여러 회식자리에 가서도 나는 위의 수칙을 지켜, 어떠한 권유도 사양하자, 사람들로부터 <지독한 사람> 이란, 비난인지 칭찬인지 모를 소리까지 들었다.


4. 현재 나의 건강관리

내 생활리듬은 아주 기계적이다. 스스로 만든 생활시간표를 철저히 지키고 있다.


[3시 기상] 새벽 3시에 일어나, 작업실 겸 침실에서 새벽기도를 드린 후 세수를 하고 용변을 본다. 나는 새벽에 찬물을 500cc 이상 마심으로써 T임파구를 활성화한다. 하루 3리터 이상의 생수를 마시는데, 1년 내내 정수기의 찬물만 마신다.


[새벽 다과] 매일 아침 크래커 5쪽과, 두유 200cc를 먹고, 현미녹차를 마시며 아침 신문을 본다.


[새벽 작업] 컴퓨터를 켜고 E-mail 을 검색하고, 교회 홈 피를 둘러본 후, 일을 시작한다. 신문에 난 중요한 기사는 다운받아 저장해둔다. 현재는《재미있는 찬송가 역사 이야기》를 집필하고 있다. 7시에 아내가 일어나 내 방에 오면, 두 사람의 혈당을 체크한 후, 아내는 조반 준비에 들어가고, 나는 작업을 계속한다.


[아침식사] 아침식사는 8시에 한다. 음식은 가리는 것 없이 뭐든지 맛있게 먹는데 배가 부르기 전에 수저를 놓는다. 나는 <음식 맛있게 먹는 사람>으로 소문이 났다. 입맛 없는 친구들이 나를 불러내어, 같이 먹어달라고 하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내가 음식 먹는 것을 보면 <저절로 입맛이 생긴다>며, 나를 애피타이저(appetizer)라고 부르기도 했다.


[잘 먹는 음식] 병에서 해방된 후 확 달라졌다. 매운 것, 짭짤한 것, 해조류, 장류, 고추절임, 낙지볶음, 육개장, 생선회, 설렁탕, 호박찌게, 신선한 채소와 제철의 산채 모두 잘 먹는다. 그 밖에 갈비, 보신탕도 없어서 못 먹는다. 그러나 선지는 절대 안 먹는다. 소가 도살되기 전에 모든 독소를 피로 보내기 때문에, <선지는 인체에 해로운 독으로 가득 찼다>는 의사의 말이다.


[8-9시, 연속극 보기] 30분짜리 일일연속극을 녹화해 두었다가, 아내의 설거지가 끝나면 커피를 마시며 함께 본다. 한 때 나는 방송 드라마도 쓴 일이 있어서 작가의 입장에서 분석하며 본다. 방송관계자가 계속하라, 권하기도 했지만 나는 유혹의 손길이 너무나 많을 곳을 떠나, 기독교기관에서 평생 일하였던 것이다.


[9-12시, 황룡산 산책] 1991년, 큰 아들 의환(義煥, 1952-1991) 목사를, 하나님이 40세라는 젊은 나이에 불러가시자 마음이 병든 아내는, 당뇨병에 걸려 병원에 장기입원까지 했는데, 퇴원 후 식사조절과 규칙적인 운동으로, 인슐린은 끊고 약만 먹고 있다. 나도 고혈압에 예비당뇨환자이기 때문에, 연속극을 본 후 바로 둘이서 황룡산(黃龍山, 134m)으로 간다. 이 산은 소나무로 이루어진 기다란 산으로, 황룡이 엎드린 모양이라고 그런 이름이 붙여졌단다. 12 12 사태 때 출동했던 노태우 장군의 백마부대가 산 아래에 주둔해 있다. 능선을 따라 철책이 쳐져 있고, 사격 연습 때는 통행이 제한되어 불편한 점도 있지만, 능선 끝까지 가서 아내와 함께 <산상 중보기도>를 드린 후 도수체조를 한다. 매일 만나는 산책객에게 기회를 보아 전도하는 일도 내 사명 중의 하나다. 이렇게 90여분 동안 산책하고 돌아오면 만보계에 9,800여보의 기록이 남는다. 산책 코스로는 최고다. 샤워를 하고 나면 열두시. 얼큰한 낙지볶음에 국수를 서리서리 말아 먹고 30분간 낮잠을 잔다.

 

 <황룡산(黃龍山>은 일산(一山)과 파주시의 경계에 있는 야산이다. 길다란 능선이 약 2킬로나 되어, 일산 사람들의 좋은 산책로다.


[14-16시, 독서와 과일 먹기] 꼭, 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읽을 만한 책을 교보문고나 Yes24, 미국 헌책방 Alibris 등에 인터넷으로 주문하여, 이 시간대에 읽고 과일을 먹는다. 요즘은 주로 장준시(長樽枾)로 알려진 주먹만한 연시를 먹는다. 이 종류의 감은, 내가 어렸을 때 먹고 자란 탓에 옛 추억의 아련한 맛이 있다. 어느 해인가 고향 아리실 집 감나무 세 그루에서 200접을 땄다. 모두가 주먹만한 큰 감이다. 석 접은 마을 30호에 10개씩 맛보라 나누어주고, 7접은 겨우내 식구가 밤참으로 먹었다. 190접을 팔았는데 한 접에 쌀 한 말씩 받았으니 19가마니 값이다. 당시 쌀 한 되에 산 2평씩 거래되어, 3천 800평의 산을 사서 부모님 산소를 썼다. 사람들은 그 산을 볼 적이면, <저 산은 오 장로님네 감나무에 열린 산이여> 라며 웃었다.

                                                                   

 흔히 <홍시>로 알려진 장준시, <장준>이라고도 한다


[16-19시, 오후 작업] 이 시간대가 작업이 제일 잘 되는 시간이다. 작업에 몰두하고 있으면 아내가 저녁거리를 작업실로 들고 온다. 밥은 별로 안 먹고, 떡이나 고구마, 감자 그밖에 손자들이 사다 주는 것들을 아주 조금 먹는데, 반드시 견과류를 함께 먹는다. 그리고는 평안한 마음으로 케이블 TV로 CBS나 CTS의 설교를 듣는다.


[밤 9시] 9시뉴스 제목만 보고 취침8)

 오디오를 40분으로 맞춰놓고, 이화여대 음대 기악과 최한원 교수가 바이올린으로 연주한 찬송가 CD를 틀어놓고 속으로 따라 부르다가 잠이 든다.

 

8) 밤 9시에 자는 습관은 어언 30년 가까이 되었다. 그래서 내 생활리듬을 아는 사람은 절대로 밤 9시 이후에는 전화를 않는다. 성악을 하는 아들 며느리가 출연하는 음악회도 <독창회> 때만을 예외로 하고 전혀 안 간다.


“이 밤, 꿈 가운데도 주를 찬양케 하옵시고, 잠 잘 때 주께서 부르시더라도 기쁨으로 아멘하며 따라갈 수 있는 믿음을 더하여 주옵소서!”

이것이 나의 저녁기도다.


5. 맺는 말


나는 지금 젊어서보다 더 많은 글을 쓰고 있다. 건강이 그 때보다 좋아졌기 때문이요, 또 문명의 이기인 컴퓨터가 있기 때문에 쓰는 속도가 엄청 빠르다. 세계 각국을 돌아다니며 좋은 자료들을 찾아 번역하여 쓰다보니, 하루 24시간이 모자란다. 나는 8899보다는 9988 234를 좋아한다. 88세까지 9질9질하게 사는 것보다, 99세까지 88하게 창작생활을 하다가 23일 앓다가 가고 싶다는 말이다.

 

이를 위해 언제 깨질지 모르는 나의 이 <질그릇> 육신을 소중히 관리하며, 그 동안 처자식 부양하느라 못 다한 일을 마음껏 하고 싶다. 아직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많다는 게 너무나도 감사하여, 넘치도록 복을 주시는 하나님께 고개를 숙이며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