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꽁이의 찬양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해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사43:21)

40. 신학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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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1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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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신학논


1930년대, 한국은 신흥종교의 발흥, 자유주의, 신비주의부흥운동, 무교회주의의 등장으로 다양한 신학사상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습니다. 1920년대 미국유학을 떠났던 한국인들이 귀국을 하면서 선교사와 유학생들의 신학적 논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장로교, 남궁혁, 백낙준, 박형룡, 이성휘, 송창근, 채필근, 김재준, 윤인구, 김치선, 감리교, 전영택, 임영빈, 변홍규, 정경옥, 류형기, 갈홍기 등은 대표적인 유학파들이었습니다. 장로교와 감리교의 신학적 충돌, 그리고 새롭게 부상한 자유주의학파들의 심각한 신학적 오류는 일제시대 부흥기와 맞물리면서 커다란 국면으로 부상하였습니다.


언더우드, 알렌, 헤론, 앨러스 등 북장로교 선교사들 가운데 신학선교사는 언더우드 1명이었고, 성경무오설을 온전하게 신앙하는 사람도 언더우드밖에 없었습니다. 모펫(1889)과 레이놀즈(1892)와 같은 보수주의 선교사들이 조선에 입국하면서 보수적 신학을 견지하였지만 신신학을 견지한 선교사들의 동반진출을 막을수는 없었습니다. 캐나다선교회 스코필드 선교사는 한국선교지에서 근본주의자들과 자유주의 성경해석 사이에 신학적 차이가 나타났음을 지적하였습니다. 3.1운동이후 급격히 변화한 한국사회는 자유주의 사상이 침투하면서 신학계에도 본격적인 논쟁이 전개되었습니다.


한국에 파송된 북장로교 선교사 가운데 목사안수를 받은 사람들은 40명이었습니다. 이들은 프린스톤과 맥코믹, 샌 안셀모 등 보수적인 신학교와 다소 진보적인 칼라를 갖고 있는 뉴욕의 유니온신학교 출신자들이었습니다. 과학적 사고와 일치하는 기독교, 이성과 일치하는 합리적인 기독교를 표방하는 현대주의자들은 가장 근본적인 기독교 5대교리를 흔들었습니다. 예수님의 동정녀 강생(탄생), 예수님의 속죄제물과 죽으심, 부활, 승천, 재림 등 기독교 5대교리는 가장 중요한 핵심교리였습니다. 이러한 교리의 바탕이 되는 성경무오설을 부인하는 선교사들이 가독교 자유주의 논쟁을 일으키며 토론의 장으로 인도하였습니다.(1924년 어번신학교 어번선언)


1930년, 조선감리회 제1대 감독인 양주삼 목사는 신학적으로 개방적인 위치에 있었습니다. 감리교 교역자 양성기관인 협성신학교의 신학개방은 정경옥 교수가 주도하였습니다. 정경옥 교수는 게렛신학교 유학파로, 구 자유주의신학자 프랭클린 롤 교수의 영향을 받은 후 사회적인 문제, 문화적인 문제에 열린 태도로 다가 갔습니다. 전통적 복음주의와 웨슬리 신앙공동체의 보수적인 감리교는 윤리적인 공동체를 강조하며, 현재적인 형제자매안에서의 하나님 나라의 현존성이 강조되는 것으로 수정이 불가피하였습니다.


개방적이고 불신자를 학생으로 영입한 연희전문학교는 북장로교와 캐나다장로교, 남북감리교 선교회가 교수진을 구성하였습니다. 평양신학교는 보수적인 입장과 견해를 지지하는 반면 서울의 신학교는 신자유주의적인 태도로 전환하였습니다. 언더우드의 아들 호러스 호턴 언더우드(Horace Horton Underwood,원한경)가 연희전문학교를 주도하면서 개방적인 성과는 급속도로 진전되었습니다. 1930년대, 평양선교부와 서울선교부는 신학적 갈등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하였습니다. 세브란스 의과대학은 성경과 과학과의 관계, 성경과 진화론의 관계를 교육하는 과정에서 성경은 과연 하나님의 말씀인가?라는 세미나를 개최하는 등 매우 급진적인 태도로 전환하였습니다. 이러한 고등교육을 통하여 현대주의가 한국으로 유입되었고, 이것을 간과하였던 선교사와 신학계는 당황해 하였습니다.


현대주의 사상와 자유신학을 한국에 전파한 중심에는 캐나다연합선교회가 있었습니다. 1925년, 캐나다장로교, 감리교, 회중교회 연합으로 연합교회(the United Church of Canada)를 형성하고 다양한 교파출신 선교사들을 파송하였습니다. 1926년, 한국에 파송된 윌리엄 스캇(William Scott) 선교사는 함흥성경학교 교수에서 구역성경 욥기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고 전하였습니다. 럽, 그리어슨, 푸트 선교사들과 교단배경이 다른 캐나다 연합선교회 선교사들은 진보주의적 성향이 강했지만 스캇이 선교회의 책임자로 내정되었습니다. 현대주의 사상에 동조하는 김관식, 조희염 목사가 일본과 미국 유학에서 귀국하여 캐나다연합선교회의 교육사업에 합류하였습니다. 


캐나다연합선교회의 진보주의적 성향에 환멸을 느낀 보수주의 선교사들은 캐나다연합선교회에서 탈퇴하고 선교지를 떠났습니다. 조희염 목사는 성경 전체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것은 잘못이라고 규정하고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것도 많이 포함되어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러한 현대주의 사상은 캐나다 선교회의 중심에 서 있던 로브(A.F. Robb,업아력), 영, 이원규, 한기춘, 장도원을 조직에서 이탈하게 하였습니다.


1930년대, 일본신학교 출신 교역자들은 진보성향을 가진 신학적 사조를 갖고 있었습니다. 여권문제를 제기한 김춘배 목사, 창세기 저작권을 부인한 김영주 목사, 아빙돈단권주석 번역으로 문제가 제기된 송창근, 채필근, 김재준 목사 등은 모두 일본에서 신학교육을 학습한 교역자였습니다. 한국에서 신학정립이 완성되었거나 안정적으로 구축되지 않은 상태에서 외국유학자들의 무분별한 자유주의신학의 문화적 접근은 우려스러운 사건이었습니다. 평양신학교 교수겸 “신학지남”(神學指南) 편집장인 남궁혁 목사는 일본유학파 목사들을 대거 기고가로 영입하면서 신학지남의 성격은 진보적인 사관들로 채워져 있었습니다. 당시 일본기독교는 천황숭배, 신사참배, 일본패권주의를 긍정화, 찬성의견을 내면서 정부 어용단체로 전락해 있었습니다. 이러한 잘못된 신학적 사관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일본 유학파는 인본주의적 자유주의가 침투하여 신신학의 영향이 강하게 나타났습니다.


“기독교교의학”(1927)과 “교회교의학”(1932)의 저자 “칼 바르트”(Karl Barth)는 현대기독교사의 한 획을 그으며 중요한 지평을 열었습니다. 칼 바르트는 신학을 교회의 학문적 탐구영역으로 인도하였으며, 하나님인 동시에 인간인 예수 그리스도라는 기독론적 사고로서 인간의 인식과 윤리적문제를 다양하게 전개하였습니다. 칼 바르트의 변증법적 신학은 일본신학계를 강타하며 가장 탁월한 신학자로서의 위상을 갖게 되었습니다. 일본 신학계의 거장 후루야 야수오는 "재패니스 크리스찬 쿼터리"(The Japanese Christion Quarterly)에서 칼바르트를 유일한 신학자로 여길 정도로 그를 추종하였습니다. 


1930년대 일본 전역을 놀라게 한 칼바르트의 변증법적 신학은 허무와 좌절감에 빠진 유럽인들에게 기독교적 실존적인 해답을 명료하게 주었듯이, 전쟁과 사회적 불안감이 계속되는 일본제국주의에서 칼바르트가 문제해결의 키워드를 제공하였습니다. 칼 바르트의 신학은 가장 현실적인 신학으로 은혜와 진리를 동시에 추구하는 가장 완벽한 신학적 위상을 갖게 되었습니다. 마치 만병통치약의 비법과 같은 책으로 교회 교의학은 그 가치를 한층 더 높여 갔습니다. 김재준 목사는 미국 프린스톤신학교와 웨스턴신학교를 거쳐 일본 청산학원에서 칼 바르트의 교회 교의학을 접하였으며 이것이 평생의 철학적 기준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박형룡 목사는 남궁혁, 김재준, 채필근, 송창근 등 신자유주의적인 학파들과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박형룡 목사는 보수주의 신앙을 견지하며 자유주의적 접근을 경계하였습니다.


(1) “신학지남”(神學指南) 논쟁(1928)


1918년 3월, 엥겔(Engel, G.) 선교사에 창간된 장로교단 신학연구지 “신학지남”(神學指南)은 “장로교회의 목사와 신학생들에게 신학의 큰 바다에 방향을 지남(가르켜 지시하는 것)하려는 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신학지남은 당시 신학서적이 부족하던 시대적 상황에 따라 목사와 신학생들에게 학문적 갈급함을 해결하는 연구지로 널리 애독되었습니다. 신학지남은 일본과 조선에서 발행하는 신학잡지 가운데 가장 많은 사람들이 읽는 신학서적으로도 유명하였습니다. 초기 10년간 서양선교사들에 의해 편집운영되던 신학지남은 1928년 이후, 평양신학교 교수 남궁혁 목사가 편집장을 맡으면서 변화가 시작되었습니다.남궁혁 목사는 프린스톤신학교와 버지니아 리치몬드의 유니온신학교 출신으로 신학박사학위를 받은 유일한 한국인이었습니다. 


남궁혁 목사는 보수주의적 신앙관을 토대로 비교적 자유로운 토론과 의견을 존중하였습니다. 이러한 관용적 자세를 견지한 남궁혁 목사는 일본과 미국 유학파인 송창근, 채필근, 김재준과 같은 대표적인 신신학자들을 신학지남의 기고자로 신규 영입하였습니다.

➀ “김재준” 목사는 진보주의적인 성향을 가진 일본 “아오야마(靑山)학원” 신학부 출신으로 프린스톤으로 유학을 떠났으나 웨스턴신학교에서 구약학을 졸업하고 귀국하였습니다. 1932년, 김재준은 평양 숭인상업학교 성경교사로 재직하면서 신학지남의 편집인 대리역을 맡았습니다. 1933년 9월, 신학지남에 기고한 김재준은 “전기적으로 본 예레미야의 내면생활”에서 “당시에 기록된 여호와의 전기는 신명기밖에 없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창세기로부터 민수기에 이르는 모세오경을 전면 반박하는 듯한 김재준의 학문적 견지는 모세오경이 JEDP문서의 편집에 불과하다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의견과 일치하는 것이었습니다. 1934년 1월, “이사야의 임마누엘 연구”(이사야7:14)에서는 “임마누엘이 예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었으며 후대 신약성경의 기자가 삽입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로서 전통적인 개혁주의 성경해석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경향으로 이어졌습니다. 


1935년, “아빙돈(Abingdon)단권성경주석사건” 발생으로 자유주의 신학자의 주도자로 알려졌으며, 그후에도 이러한 자유주의적 시각에서 끊임없이 충돌하면서 1952년, 장로교 총회에서 제명되었습니다. 1953년, 김재준 목사는 기독교장로회로 별도 분립하였고 한국신학대학의 신학적 배경을 성립하였습니다.

➁ “채필근” 목사는 1905년, 숭실학교와 1913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후 함경북도에서 목회하던 중 일본 메이지학원 고등부와 1925년, 동경제국대학 철학과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숭실전문학교와 조선신학교 교수를 역임하였습니다. 비교종교학자 채필근 목사 또한 신학지남의 기고가로 참여하면서 논쟁의 불씨에 점화하였습니다. 기독교의 유일성과 예수 그리스도외에 다른 어떤 구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정통주의 장로교의 불변진리에 물음표를 던지는 듯한 채필근 목사의 논제는 매우 위험스러워 보였습니다. 


1930년 1월, “종교신앙과 종교연구”와 5월, “지리상 특징과 종교상 특징”에서 한국교회 목회자들의 수준을 비하하고, 기독교를 세상종교 가운데 하나의 종교영역으로 보는 전형적인 비교종교학적 견해를 드러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같은 신학지남의 편집위원이었던 박형룡 목사는 이러한 채필근 목사의 견해를 정면 반박하고 “기독교는 인간을 초월한 신의 묵시에 절대적 권위를 발견하고 신의 묵시의 기록인 성경으로 신앙과 행위의 무오한 원칙을 삼는다”고 정의하였습니다. 


1930년 9월, “반종교자의 무이해”는 타종교와 기독교와의 차이를 강조하면서도 비교종교학적 접근방식으로 기독교를 이해하려는 측면이 강하였습니다. 1931년 11월, “세계평화와 기독교”라는 글에서 1931년 5월18일에서 21일까지 일본 동경에서 개최된 일본 종교평화회의를 소개하면서 기독교 명사가 다수 참석한 사실을 공개하고 모든 종교의 상호간 이해와 대동단결과 일본의 지도적 지위 실현을 결의한 내용을 언급하였습니다. 


또한 모든 종교의 특이성을 시인함과 동시에 국제평화의 실현에 관하여 모든 종교는 상호 협력할수 있다는 평화선언안을 소개하자 채필근 목사의 논고에 대한 정통주의 기독교 지도자들의 반박과 비판이 제기되었습니다. 1932년 9월, “좌냐 우냐”(여호수아서)의 논고에서도 정통주의와 현대주의의 중도노선을 견지하면서 양극단을 우려하는 방향으로 비판하였습니다. 현대주의, 신신학, 자유신학, 사회적 복음, 기독교 사회주의와 근본주의, 정통파, 보수적 신학의 양극단을 경계하자는 의미로 해석된 채필근 목사의 논제는 결국 중도적, 관용적 포용이라는 측면에서 혼합신학의 우려가 있었습니다. 


일제강점기 신사참배 강요를 거부한 평양신학교가 강제 폐교된후 1940년, 조선총독부령에 의해 새로 설립된 평양신학교의 교장으로 채필근 목사가 임명되었습니다. 채필근 목사가 운영하는 평양신학교는 목회자에게 황민화 재교육실시등 친일어용학교로 평양신학교의 전통에서 배제되었으며, 학계에서는 “후평양신학교”, “채필근신학교” 등으로 부르고 있었습니다. 채필근 목사는 1938년, “조선임전보국단”에 발기인으로 참여하였고 “조선전시종교보국회”와 “조선종교단체전시보국회”에 장로교대표로 참여하였습니다. 1943년, 일본기독교 조선장로교단으로 흡수통합되었을 때 조선 초대통리에 임명되어 찬송가에 기미가요를 편입하였고, 강제징병감사예배를 드렸습니다.


➂ “송창근” 목사는 경흥 북일학교를 졸업하고 1910년, 간도 명동중학교와 광성중학교를 졸업하였습니다. 1919년, 피어선신학교를 졸업하고 남대문교회의 조사가 되었으나 독립운동 창가 유포혐의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6개월의 옥고를 치렀습니다. 1922년, 일본 도요대학 문화학과에 입학, 1923년, 아오야마대학 신학부에 편입한 후 1926년, 졸업하였습니다. 9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신학교에 입학, 1927년, 프린스턴신학교 편입, 1928년, 웨스턴신학교로 재편입 졸업하고 1930년, 신학석사학위를 받았습니다. 


그후 1931년, 아일리프신학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하였습니다. 송창근 목사는 1931년, 흥사단에 가입하고 1932년, 평양 산정현교회 목사로 부임하였습니다. 그는 신학지남에 기고한 “기독교 윤리문제”라는 기고에서 오직 우리 인간의 전 인격과 전 중심이 신의 의지에 정복되고 하나님 자신의 행동만 나타나는 완전한 윤리와 도덕생활의 주인공이 이 시대에 필요한 사람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송창근 목사는 한국교회의 가장 큰 문제를 기독교 윤리문제와 교양문제로 보았습니다. 교회내의 유지들과 권력가들을 비판하는 목소리를 높인 송창근 목사는 신성해야 할 교회내에 무례, 무법, 무색이 넘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위선과 가식으로 출세하는 세상, 교인들이 목회자를 훈련시키는 현상이 교계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고 탄식하며 비판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송창근 목사는 박형룡 목사를 우회적으로 비판하며 진정한 정통은 삶속에서 구체적으로 구현된 신앙이지 과거 신앙을 단순히 반복하는 정통은 죽은 정통에 불과하다고 하였습니다. “예정신학에서 예정신앙에”라는 송창근 목사의 시론은 교계를 비판하기 위한 논쟁이었습니다. 장로교인이 되려면 예정론을 말하고, 감리교인이 되려면 예정론을 부인하고, 성결교인이 되려면 성결을 부르짖어야 하는 외적인 치중에 경종을 가하려는 측면보다 박형룡 목사의 캘빈의 예정론을 비판하려는 목적에서 기인하였습니다. 비판에 능숙한 송창근 목사에게 대안은 있는가? 하는 문제에서 그의 답은 없었습니다.

 

교계를 비판하고 정통파들을 불신하였던 송창근 목사의 일생은 어느 방향으로 향하였는가를 살펴본다면 아이러니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1936년, 조만식장로가 우뚝 서 있는 산정현교회를 사임한 송창근 목사는 부산으로 내려가 성빈학사를 설립하고 운영하다가 1937년, 동우회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다가 1938년, 가석방된 후 11월, 사상전향을 하였습니다. 교계를 비판하고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비난하였던 송창근 목사는 조선신궁에 참배하고 국방헌금을 하며 일본 천황앞에 충의를 바치는 등 일본제국의 이상실현을 위한 합의서에 서명을 하였습니다. 


1939년 3월, 그러한 친일정신으로 김천 황금정교회를 담임하였고, 12월,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 경북노회지맹의 이사로 선임되었으며, 1941년, 국민총력 조선예수교장로회 경북노회이사장에 취임하였습니다. 1944년 12월, 일본기독교 조선장로교단 경부교구 부교구장에 취임하고, 일본패망소식이 들려오던 1945년 2월, 조선전시종교보국회 경상북도지부 이사 선임, 7월, 일본기독교 조선교단 총무국장 선임 등 치욕적인 이력서를 갖게 되었습니다. 해방후에는 전신이력을 감춘채 조선신학교 교장이 되었고, 1950년, 6.25전쟁때 납북된 후 1951년 7월, 대동군 수용소에서 사망하였습니다.


➃ “박형룡” 목사는 1897년, 평안북도 벽동 출신으로 선천 신성중학교와 평양 숭실대학을 졸업하고 1923년, 중국 금릉대학과 1926년, 미국 프린스톤신학교를 졸업하였습니다. 1927년, 켄터키주 루이스빌 남침례신학교에서 기독교변증학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1933년, 루이스빌신학교 철학박사학위를 취득하였습니다. 평양 산정현교회 전도사로 부임하여 목사안수를 받고 1931년, 평양신학교 교수로 취임하였으며 대표적인 보수주의 신학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박형룡 목사는 김재준, 채필근, 송창근 목사의 현대주의를 비판견제하며 정통주의와 보수주의적 신앙을 수호하려 하였습니다. 


변증학을 학생들에게 가르쳤던 박형룡 목사는 기독교의 불변 5대진리를 교수하고 이러한 중심사상의 변질을 우려하고 다양한 문화로 접근하는 것을 경계하였습니다. 박형룡 목사는 아직 반석위에 올려 놓지 못한 한국신학이 자유신학과 현대신학에 의해 무너지는 것을 경계하며, 선교사들과 보수주의 신학적 소명을 계승하는 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신학지남의 지면위에서 양날의 칼을 가진 현대주의와 보수주의간의 치열한 공방은 자칫 신학생들에게 혼란을 초래할 수 있으나 박형룡 목사는 자신의 제자들과 장로교단에 정통주의를 실현할 것을 끊임없이 촉구하였습니다. 1930년, “인본주의 종교”, “현 과학은 진화론을 의문한다”, 


1935년, “신본주의냐 인본주의냐” 등 기독교 변증학적관점에서 현대주의와 각을 세워 갔습니다. 1938년 6월, 신사참배 거부운동으로 평양신학교가 폐쇠되자 박형룡 목사는 일본동경에서 성경주석을 집필하였고, 1942년, 만주 봉천에서 동북신학교 교장과 교수직을 역임하였습니다. 1947년, 송상석 목사의 요청으로 고려신학교 교장으로 취임하였으며, 1948년 6월, 교단문제로 사임한후 서울 남산에 장로회 신학교를 설립하였고, 1953년, 총회직영 총회신학교 교장으로 취임하였습니다. 50년 신학사상에서 박형룡 목사는 오직 캘빈주의 신앙과 정통주의 보수신학을 계승하는 일관성을 보여 주었습니다.


(2) 아빙돈단권주석 논쟁(1934)


1934년, 한국감리교선교 50주년 기념 “성경주석”(Abingdon Bible Commentary)이 발간되었습니다. 한국선교 50년이 되는 과정에서 한국인들에 의한 주석과 번역주석 한권없는 점을 아쉽게 생각한 감리교는 선교 50주년을 기념하여 1929년, 미국 아빙돈 콕스베리(Abingdon Cokesbury)사와 함께 한국어 성경주석을 발간하였습니다. 오하이오 웨슬리안대학과 게렛신학교과 하버드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한 감리교 총리원 교육국 총무 류형기 박사를 중심으로 감리교적인 성경주석을 발간하였습니다. 아빙돈단권주석은 류형기박사를 중심으로 양주삼, 정경옥, 김창준, 전영택, 변홍규를 비롯한 감리교 목사들과 장로교 해외유학파 송창근, 김재준, 채필근, 한경직 목사도 번역에 동참하였습니다. 


미국에서 유명한 기독교 출판사인 아빙돈출판사에서 간행된 아빙돈단권주석은 당시의 신학적 연구성과를 총괄하고 고등비평을 수용하는 최첨단의 성경주석서로 해외에서도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1934년 12월, 장로교에서는 한성도서출판에서 발행한 아빙돈단권성경주석을 이단서로 규정하였습니다. 1935년, 제24회 장로교 총회에서 아빙돈단권성경주석사건이 정식안건으로 상정되었고 이 책의 번역과 집필에 관여한 장로교 목사들을 소환하였습니다. 아빙돈단권주석에는 “성경은 신약과 구약, 두 개가 장으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다만 참고의 편의를 위하여 후손들에 의한 것일뿐 원작자들이 구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최근 번역을 제외한 예전의 성경은 산문처럼 번역하여 왔고 그 성경에는 여러 가지 문학적 형식이 섞여 왔습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에 의한 것은 분명하지만 각 권이 기록된 시대적 문화적 배경, 문학적 양식, 기록한 사람의 성향에 따라 달라질수 있습니다.” 아빙돈 주석은 역사비평적 입장과 양식사적 입장에서 배경을 바라 보았기 때문에 다양한 해석과 견해를 기록하였습니다. 벨하우젠의 문서비평, 궁겔의 구전, 알브라이트의 성서고고학, 역사, 신학, 전승사들이 구성되어 성경이 오류가 있을 수 있다는 신신학적 조류를 포함하는 주석이 발간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석은 장로교와 보수적 선교사와 정통주의를 고수하는 신학계 입장에서 보면 성경의 무오성을 훼손하는 매우 위험한 전개라 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심각한 상황에서 장로교 신학교수이며 목회자들이 동참하였다는 사실은 아주 유감스러운 행동이었습니다. 채필근 목사는 주석에 참여한 것을 사과하고 집필에 불참의사를 밝혔습니다. 그러나 김재준, 송창근, 한경직 목사 등 3명은 신학지남에 사과성명을 발표하였을 뿐 입장을 달리 하지는 않았습니다. 김재준은 요나서를 제외한 12소선지서를 맡았고, 한경직목사는 고린도전후서를 맡았을뿐 그 내용에는 전혀 문제가 없다는 주장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장로교 길선주 목사와 박형룡 교수의 생각은 전혀 달랐습니다. 결국 장로교는 이러한 사건을 중차대한 위기로 인식하고 박형룡 목사를 중심으로 총회차원의 표준주석을 발간하였습니다.


(3) 창세기 저작문제와 여성권리 논쟁


서울 남대문교회 담임인 “김영주” 목사는 일본 자유주의 신학교 관서학원 신학과를 졸업하고 평양신학교에서 신학교육을 졸업하였습니다. 그는 캐나다 선교사 윌리엄 스캇의 영향을 받아 모세오경의 저작권에 대한 의문이 있었습니다. 창세기가 모세의 저작이라는 것은 기독교 2,000년의 고백이었습니다. 사도들과 교부들과 캘빈과 루터와 청교도들에게 이르기까지 변함이 없었습니다. 김영주 목사는 “만국주일학교공과”에 집필한 자신의 글에서 창세기 모세저작권을 부인하는 듯한 내용을 기록하였습니다. 성진중앙교회 김춘배 목사는 기독신보에 장로회 총회에 올리는 말씀이라는 대자보를 통해 교회내 여권신장문제와 관련하여 급변하는 시대, 여성의 권리와 지위에 대한 현실화를 주장하였습니다. 


여자여 잠잠하라는 말은 2,000년 전 한 지방교회의 교훈과 풍습을 말한 것일뿐 모든 여성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장로교 총회는 김영주 목사의 창세기 모세저작권부인 건과 김춘배 목사의 여권문제를 상정하여 이 문제를 연구하기 위한 연구위원회가 조직되었습니다. 창세기의 모세 저작문제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제기되어 온 해묵은 논쟁이었습니다. 김춘배 목사의 여권신장은 당시 시대적 상황에서 빚어진 사회적 현상과 맞물려 있습니다. 그러나 보수주의 학계에서는 여전히 여성목사 안수는 물론 여성의 목소리가 높아지는 것에 대하여 부정적인 견해를 갖고 있었습니다.


(4) 신흥우와 적극신앙단(積極信仰團) 논쟁(1932)


1883년 3월, 충북 청원군에서 출생한 “신흥우”(申興雨)는 1896년, 서재필, 윤치호, 이승만 등과 함께 협성회(協成會) 조직에 참여하여 청년부 지도자로 홀동하였고, 만민공동회와 독립협회에도 활동하였습니다. 그후 미국 서던캘리포니아 대학교를 졸업하고 1912년, YMCA이사와 배재학당 교장을 역임하였습니다. 3.1운동에는 참여를 거부하였고, 1920년, 조선체육회 발기인으로 참여하여 7대 회장을 역임하였습니다. 1925년, 적극신앙단과 밀접한 관련성을 갖고 있는 “흥업구락부”를 이승만과 함께 조직하였습니다. 그러나 1930년, 흥업구락부는 내분사태를 겪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흥업구락부 내에 포함되어있던 비기독교자본가 세력을 배제하고 순수 기독교인 중심의 신앙운동 조직을 구상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조선에 파견된 미국, 영국, 프랑스 선교사들의 한국인에 대한 공공연한 무시와 천대는 서양선교사들에 대한 반감으로 작용하였으며 이것에 대항할 필요성이 제기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경성부와 경기도 출신인 기호세력 중심의 새로운 세력구상은 기존의 선교사와 서북출신 중심의 기독교 리더 그룹과의 충돌이 불가피 하였습니다. 1927년,신흥우는 이상재, 허헌, 김병로, 조병옥 등과 함께 사회주의, 민족주의 항일단체인 신간회(新幹會) 조직에 참여하였습니다. 1927년, “기독교 연구회”를 별도로 조직한 신흥우는 반선교사, 반보수, 조선기독교의 성립과 교파의식 둔화를 목표로 하였습니다. 


이것으로서 한국적 기독교의 설립을 주장하였습니다. 1928년, 신흥우는 정인과, 김활란, 양주삼, 노블, 모펫 등과 함께 기독교의 토착화를 주제로 하는 “예루살렘 선교대회”에 참여하면서 이러한 조직설립을 실재화할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1932년 4월, 신흥우는 독일의 히틀러가 “적극기독교”를 주창하며 기독교운동을 통하여 게르만 민족의 대동단결을 이루고 기독교 청소년을 히틀러 청소년단으로 개편하여 민족 국가주의적 교육을 달성하고 독일민족 국가운동에 기여하게 하였다는 점에 매우 공감하였습니다. 이에 서울YMCA 총무이며 감리교 지도자인 신흥우를 주축으로 장로교와 감리교의 지도자들이 초교파 신앙운동단체를 결성하였습니다. 1930년대에 나타난 민족주의 의식과 반선교사적인 경향, 자유주의 신학적 경향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반서북, 반선교사, 반보수라는 세가지 요인을 가지고 나타난 것이 바로 신흥우를 주축으로 한 “적극신앙단”(積極信仰團) 운동이었습니다. 


신흥우는 초기 실력양성운동을 전개하면서 위축되어 있던 흥업구락부 운동을 계승하고, 기독교계 문화단체의 주도권을 획득하여 민족적 독립을 지향한다는 명목으로 1932년 6월, 박인덕(인덕대학설립자), 전필순(한국장로교목사), 함태영(3대부통령) 등과 함께 적극신앙단을 조직하였습니다. 적극신앙단은 새로운 생활신앙선언과 실천강령 21개조를 구상하고 진보적인 선교사들과 교회 목사와 지도자들에게 내용과 취지를 설명하였습니다. 적극신앙단에 참여한 사람들은 기호지역 출신의 감리교와 장로교인들이 대부분이었으며 이들은 미국과 일본유학파로 신학과 인문학을 공부한 민족사회운동가 들이었습니다. 감리교에서는 신흥우, 정춘수, 유억겸, 신공숙, 김인영,박인덕, 박연서, 구자옥이 참여하였고, 장로교에서는 함태영, 최거덕, 최석주, 전필순, 홍병덕, 김영섭 등이 참여하였습니다.


적극신앙단은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천국주의를 부르짖는 기독교의 소극적 태도를 비판하고 현대적이고 사회적이며 적극적인 태도와 행위를 갖는 기독교로의 전환을 촉구하였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실천적 원동력으로서 적극신앙선언 5개항을 발표하였습니다. 

“➀ 나는 자연과 역사와 예수와 경험속에 계시되는 하나님을 믿는다. 

➁ 나는 하나님과 일치되는 것과 악과 싸워 이기는 것이 인간생활의 제일원칙으로 믿는다. ➂ 나는 성별에 관계없이 인간의 권리, 의무, 행위에 있어서 완전한 평등이 있어야 하며 다른 사람에게 방해되지 않는 한에서 완전한 자유가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➃ 나는 새로운 사회의 건설을 위하여 개인적 취득동인을 고상한 기여동인으로 대치하여야 한다고 믿는다.


➄ 나는 사회가 모든 사람에게 경제적, 문화적, 정신적 생활에 있어서 승등적 균형과 안전을 보장하여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전통주의 기독교는 적극신앙단이 선언하는 5개항이 모순된 무지의 나열이라고 보았습니다. 계시는 성경에서 마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개별적으로 계시가 이루어진다는 논리는 이단성이 높은 견해를 갖고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는 어떠한 완전함도 자발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제2항은 인간생활의 제1원칙으로 규정하고 있었습니다.


적극신앙단은 기독교계 내 지부설립을 추진하고 재일YMCA 적극신앙단 지부가 조직되었으며, 감리교 내에서도 성경반이 설치 운영되었습니다. 적극신앙단은 기독교운동을 통하여 기독교적 독립사상을 고취하고 조선독립의 인재를 양성하고자 하였습니다. “민족의식의 양성, 민족체위의 향상, 단결정신의 함양과 훈련, 산업의 발전과 경제의 독립”을 4대 목적으로 경제운동을 통한 민족독립과 기독교 운동을 통한 민족정신개혁을 추구하였습니다. 신흥우의 적극신앙단은 비밀결사의 성격과 애국적, 진보적, 


이상적 진보단체로서 성향을 가지려 하였으나 선명하고 구체적인 신학적 가치의 부재와 선교사의 지원없는 한국교회의 독립이 여전히 불투명하였기 때문에 조기에 실패하였습니다. 또한 중심인물이었던 신흥우가 이혼한 박인덕 여사와 불륜관계가 되어 신흥우가 YMCA총무직에서 사퇴함으로서 YMCA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적극신앙단은 몰락하였습니다. 정치적 색채를 가지고 종교적 접근을 시도하였던 신흥우의 생각은 짧고 단순하였습니다. 한국교회가 지역편중이 심화되었고 선교사 중심의 교회에서 독립하려는 의지는 좋았으나 시기상조인데다 구체적인 신학적 토양조차 마련되어 있지 않는 상황이었음을 직시해야만 했습니다. 신흥우는 그후 1952년, 대통령후보로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