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동적인 이야기

맹꽁이 2020. 1. 22. 16:20

유한양행의 설립자

유일한(1895-1971) 선생

 

유일한 박사

 

유한양행의 설립자인 유일한柳一韓(1895-1971)은 평양에서 재봉틀 장사를 해서 자수성가한 유기현, 김확실 부부의 구 남매 중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예수 믿고 김기복으로 개명하였다. 부모님이 개화기인 당시에 기독교 복음을 받아 들였고 미국 감리교에서 조선인 유학생을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고 9살된 장남 유일한을 미국 유학길에 오르게 하였다. 동생들 일곱도 모두 중국, 일본 등에 모두 유학하도록 독려한 학구열이 강한 부모였다.

유일한은 태평양을 건너던 배 안에서 부모님이 유학비로 마련해 준 미국 돈인 달라를 몽땅 잃어버리는 안타까운 사고가 일어났다. 유일한 한국인 인솔자였던 독립 운동가인 박용만의 배려로 미국 네브래스카 주의 독신으로 혼자 살며 예수를 신실하게 믿는 태프트 자매에게 입양되었다.


태프트 자매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 성경 읽기와 기도를 드리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하였다. 낮에는 밭에서 하루 종일 일하는 성실하고 검소한 삶을 통해 기독교의 노동윤리를 실천하는 자매였다. 양모가 된 그녀는 어린 유일한에게 영어를 가르쳐서 미국 사회에 적응하도록 했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유일한은 인종차별로 서러움을 겪기도 하지만, 당당하게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강인한 성격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본래 유일형인데 미국 친구들이 일형이라 못 부르고 일한이라고 계속 부르자 나라 ‘韓’자를 쓰기로 하고 한국에 아버지에게도 편지로 동의를 구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3. 1 독립 운동이 일어나던 같은 해인 1919년에 미시간주립대학교를 졸업했다. 1922년 미시간대학교 대학원과 1953년 미국 스탠퍼드대학교 대학원에서 공부하였다. 서재필을 만나면서 독립 운동에 열심히 참여 하기도 하였다. 1938년 이후에 미국에 머물면서 ‘맹호군’이란 이름의 항일 무장 독립군을 창설하여 운영하다가 해방을 맞았다.


3.1 운동 소식을 접한 서재필은 만세운동에 호응하기 위해 4월 초에 공지하여 4월 13일 필라델피아에서 제1차 한인연합회의(The First Korean Congress)를 소집하였다. 유일한도 4월 13일부터 4월 15일까지 3일간 필라델피아에서 개최된 제1차 한인연합회의에 참석하였다. 3일간의 제1차 한인연합회의가 끝난 뒤, 바로 한국의 자유와 독립을 세계에 선언하고자 4월 16일에는 필라델피아에서 서재필의 주도로 열린 '한인자유대회'에 참석하였다. 유한양행의 로고인 둥근 버드나무 그림도 서재필이 디 자인해서 선물한 것이라고 한다.


그는 고등학교 졸업 후에 얼마동안 미국의 발전기회사에서 일한 경험을 살려서 제너럴 일렉트릭사에 취직한다. 그러나 1922년 사표를 낸 후 직장생활을 하면서 모았던 돈으로 숙주나물 통조림을 제조하는 라초이 식품회사를 설립하였다. 녹두를 납품하는 중국 사람의 탈세하는 행동을 못 마땅하게 여긴 그는 평생 미국과 한국에 정직한 납세 운동을 벌여서 1968년에는 정부로부터 모범 납세 기업 상도 받고 동탑산업훈장도 받았다.


미국에서 처음 사업을 시작할 때에 새내기 사업가를 눈여겨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유일한은 교통사고를 낸 적이 있는데 이 사고로 숙주나물 통조림 제품을 기자들이 언론에 소개해 주면서 미국인 특히 숙주나물을 조리하여 먹는 중국계 미국인들의 관심을 모으기 시작했고 덕분에 사업은 번창하기 시작하였다. 중국계 미국인 여성이자 소아과 의사인 호미리 여사와 결혼했다.


귀국한 그는 1926년 일본 식민지시대인 당시, 경성부에 유한양행을 설립했다. 유한양행이 1933년 처음 개발하여 판매하기 시작한 제품인 진통소염제 안티푸라민은 지금도 유명한 제품이다. 그의 부인 호미리 여사는 소아과 병원을 개업하여 가난한 가정의 아기들을 무수하게 돌보아 주었다. 유일한 박사는 유한양행의 수익금으로 ‘유한 학원’이란 이름의 재단을 구성하고 사재를 털어가며 1952년에는 고려공과기술학교르 세우고 1964년에는 경기도 부천에 유한공업고등학교를 설립하였다. 부천에는 나중에 그를 기념하는 ‘유일한 로’라는 길 이름도 생겨났다.


1969년 경영에서 은퇴하며 전문경영인에게 유한양행의 경영권을 인계하였다. 당시 조권순 전무에게 경영권을 승계했는데 이 전문경영인 제도가 실시된 건 한국에선 유한양행이 사실상 최초라고 한다. 이후 1971년 자신의 모든 재산을 사회에 기부하고 그 해 사망하였다. 중고등학교 일부 교과서에도 나오는 유명한 일화이다. 유일한 회장이 손자의 등록금만 제외하고 자신의 재산을 전액 ‘한국 사회 및 교육 원조 신탁 기금’이란 재단을 만들어 기부하였다. 당시에 그 액수는 모두 407억 원이다. 1971년 당시에는 쌀 20킬로그램에 1,440원이었다고 하니 당시의 407억 원은 오늘날로 하면 약 7,000억 원이 넘는다.


유일한 박사는 구한말 어둡고 암울한 시대에 예수를 영접하고 하나님을 믿기 시작한 부모님 슬하에서 9살에 헤어졌지만 성경에서 말씀하는 빛의 자녀다운 삶을 평생토록 영광스럽고 자랑스럽게 살다가 하나님 앞으로 돌아간 우리나라 개화기와 식민지와 6. 25을 거친 우리나라 발전기에 모범적인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며 살았던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1은 평양에서 재봉틀 장사를 해서 자수성가한 유기현, 김확실 부부의 구 남매 중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예수 믿고 김기복으로 개명하였다. 


부모님이 개화기인 당시에 기독교 복음을 받아 들였고 미국 감리교에서 조선인 유학생을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고 9살된 장남 유일한을 미국 유학길에 오르게 하였다. 동생들 일곱도 모두 중국, 일본 등에 모두 유학하도록 독려한 학구열이 강한 부모였다.


유일한은 태평양을 건너던 배 안에서 부모님이 유학비로 마련해 준 미국 돈인 달라를 몽땅 잃어버리는 안타까운 사고가 일어났다. 유일한 한국인 인솔자였던 독립 운동가인 박용만의 배려로 미국 네브래스카 주의 독신으로 혼자 살며 예수를 신실하게 믿는 태프트 자매에게 입양되었다.


태프트 자매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 성경 읽기와 기도를 드리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하였다. 낮에는 밭에서 하루 종일 일하는 성실하고 검소한 삶을 통해 기독교의 노동윤리를 실천하는 자매였다. 양모가 된 그녀는 어린 유일한에게 영어를 가르쳐서 미국 사회에 적응하도록 했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유일한은 인종차별로 서러움을 겪기도 하지만, 당당하게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강인한 성격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본래 유일형인데 미국 친구들이 일형이라 못 부르고 일한이라고 계속 부르자 나라 ‘韓’자를 쓰기로 하고 한국에 아버지에게도 편지로 동의를 구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3. 1 독립 운동이 일어나던 같은 해인 1919년에 미시간주립대학교를 졸업했다. 1922년 미시간대학교 대학원과 1953년 미국 스탠퍼드대학교 대학원에서 공부하였다. 서재필을 만나면서 독립 운동에 열심히 참여 하기도 하였다. 1938년 이후에 미국에 머물면서 ‘맹호군’이란 이름의 항일 무장 독립군을 창설하여 운영하다가 해방을 맞았다.


3.1 운동 소식을 접한 서재필은 만세운동에 호응하기 위해 4월 초에 공지하여 4월 13일 필라델피아에서 제1차 한인연합회의(The First Korean Congress)를 소집하였다. 유일한도 4월 13일부터 4월 15일까지 3일간 필라델피아에서 개최된 제1차 한인연합회의에 참석하였다. 3일간의 제1차 한인연합회의가 끝난 뒤, 바로 한국의 자유와 독립을 세계에 선언하고자 4월 16일에는 필라델피아에서 서재필의 주도로 열린 '한인자유대회'에 참석하였다. 유한양행의 로고인 둥근 버드나무 그림도 서재필이 디 자인해서 선물한 것이라고 한다.


그는 고등학교 졸업 후에 얼마동안 미국의 발전기회사에서 일한 경험을 살려서 제너럴 일렉트릭사에 취직한다. 그러나 1922년 사표를 낸 후 직장생활을 하면서 모았던 돈으로 숙주나물 통조림을 제조하는 라초이 식품회사를 설립하였다. 녹두를 납품하는 중국 사람의 탈세하는 행동을 못 마땅하게 여긴 그는 평생 미국과 한국에 정직한 납세 운동을 벌여서 1968년에는 정부로부터 모범 납세 기업 상도 받고 동탑산업훈장도 받았다.


미국에서 처음 사업을 시작할 때에 새내기 사업가를 눈여겨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유일한은 교통사고를 낸 적이 있는데 이 사고로 숙주나물 통조림 제품을 기자들이 언론에 소개해 주면서 미국인 특히 숙주나물을 조리하여 먹는 중국계 미국인들의 관심을 모으기 시작했고 덕분에 사업은 번창하기 시작하였다. 중국계 미국인 여성이자 소아과 의사인 호미리 여사와 결혼했다.


귀국한 그는 1926년 일본 식민지시대인 당시, 경성부에 유한양행을 설립했다. 유한양행이 1933년 처음 개발하여 판매하기 시작한 제품인 진통소염제 안티푸라민은 지금도 유명한 제품이다. 그의 부인 호미리 여사는 소아과 병원을 개업하여 가난한 가정의 아기들을 무수하게 돌보아 주었다. 유일한 박사는 유한양행의 수익금으로 ‘유한 학원’이란 이름의 재단을 구성하고 사재를 털어가며 1952년에는 고려공과기술학교르 세우고 1964년에는 경기도 부천에 유한공업고등학교를 설립하였다. 부천에는 나중에 그를 기념하는 ‘유일한 로’라는 길 이름도 생겨났다.


1969년 경영에서 은퇴하며 전문경영인에게 유한양행의 경영권을 인계하였다. 당시 조권순 전무에게 경영권을 승계했는데 이 전문경영인 제도가 실시된 건 한국에선 유한양행이 사실상 최초라고 한다. 이후 1971년 자신의 모든 재산을 사회에 기부하고 그 해 사망하였다. 중고등학교 일부 교과서에도 나오는 유명한 일화이다. 유일한 회장이 손자의 등록금만 제외하고 자신의 재산을 전액 ‘한국 사회 및 교육 원조 신탁 기금’이란 재단을 만들어 기부하였다. 당시에 그 액수는 모두 407억 원이다. 1971년 당시에는 쌀 20킬로그램에 1,440원이었다고 하니 당시의 407억 원은 오늘날로 하면 약 7,000억 원이 넘는다.


                           부천에 있는 우한양행 연구소



유일한 박사는 구한말 어둡고 암울한 시대에 예수를 영접하고 하나님을 믿기 시작한 부모님 슬하에서 9살에 헤어졌지만 성경에서 말씀하는 빛의 자녀다운 삶을 평생토록 영광스럽고 자랑스럽게 살다가 하나님 앞으로 돌아간 우리나라 개화기와 식민지와 6. 25을 거친 우리나라 발전기에 모범적인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며 살았던 하나님의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