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꽁이의 찬양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해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사43:21)

'안수정등'(岸樹井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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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11. 8.

'안수정등'(岸樹井藤)

 

 

 

바벨론 느부갓네살 왕의 우상에게 절을 안 하고 쇠를 녹이는 수천도의 풀무불에 들어간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목숨을 건 신앙의 지조를 배우는 과목이다. 오늘 자료는 석가가 설법했다는 [안수정등]이라는 비유를 시작으로 불교사상은 전도서의 허무사상만을 채택한 것인가 의문을 제기하고, 초대 불교는 구원관이 없었는데 후에 기독교의 메시야 사상을 차용했다는 논문 등으로 이 자료를 만들었다. 다니엘의 세 친구들의 “그렇게 아니하실지라도”의 신앙을 본받아 모든 것 하나님께 맡기고 충성하자.(오소운).

 

1. 벌꿀에 취해 죽음을 잊다

 

다음 비유는 석가가 인도 왕에게 한 얘기로서 불교교리의 핵심을 설한 것이란다.

“대왕이여, 나는 지금 대왕을 위하여 간단히 한 가지 비유로써 생사의 맛과 그 근심스러움을 말하리니, 왕은 지금 자세히 잘 듣고 잘 기억하시오. 한량없이 먼 겁(怯) 전에 어떤 사람이 광야에 놀다가 사나운 코끼리에게 쫓겨 황급히 달아나는데 의지할 데가 없었소.

 

그러다가 그는 어떤 우물이 있고 그 곁에 나무뿌리 하나가 있는 것을 보았소. 그는 곧 그 나무뿌리를 잡고 내려가 우물 속에 몸을 숨기고 있었소. 그 때 마침 검은 쥐와 흰 쥐 두 마리가 그 나무뿌리를 번갈아 갉고 있었고, 그 우물 사방에는 네 마리 독사가 그를 물려하였으며, 우물 밑에는 독룡(毒龍)이 있었소.

 

그는 그 독사가 몹시 두려웠고 나무뿌리가 끊어질까 걱정이었소. 그런데 그 나무에는 벌꿀이 있어서 다섯 방울씩 입에 떨어지고 나무가 흔들리자 벌이 흩어져 내려와 그를 쏘았으며, 또 들에서는 불이 일어나 그 나무를 태우고 있었소.”

왕은 말하였다.

 

 

 

 

“그 사람은 어떻게 한량없는 고통을 받으면서 그 보잘것없는 맛을 탐할 수 있었겠습니까?” 석가는 말하였다.

 

“대왕이여, 그 광야란 끝없는 무명(無明)의 긴 밤에 비유한 것이요, 그 사람은 중생에 비유한 것이며 코끼리는 무상(無常)에 비유한 것이요, 우물은 생사에 비유한 것이며, 그 험한 언덕의 나무뿌리는 목숨에 비유한 것이요, 검은 쥐와 흰 쥐 두 마리는 밤과 낮에 비유한 것이며, 나무뿌리를 갉는 것은 찰라 찰라로 목숨이 줄어드는 데 비유한 것이요,

 

네 마리 독사는 사대(四大)에 비유한 것이며, 벌꿀은 오욕(五欲)에 비유한 것이요, 벌은 삿된 소견에 비유한 것이며, 불은 늙음과 병에 비유한 것이요, 독룡은 죽음에 비유한 것이오. 그러므로 대왕은 알아야 하오. 생ㆍ노ㆍ병ㆍ사는 참으로 두려워해야 할 것이니, 언제나 그것을 명심하고 오욕(五慾)에 사로잡히지 않아야 하오.”

그리고 석가는 다시 다음 게송(偈頌)으로 말하였다.

 

넓은 들판은 무명의 길이요

달리는 사람은 범부의 비유며

큰 코끼리는 무상의 비유요

그 우물은 생사의 비유니라.

 

나무뿌리는 목숨의 비유요

두 마리 쥐는 밤과 낮의 비유며

뿌리를 갉는 것은 찰라로 줄어드는 것이요

네 마리 뱀은 네 가지 요소이다.

 

떨어지는 꿀은 오욕의 비유요

벌이 쏘는 것 삿된 생각의 비유며

그 불은 늙음과 병의 비유요

 

사나운 용은 죽는 고통의 비유다.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이것을 관찰하여

생(生)의 재미를 곧 싫어하라.

 

오욕에 집착 없어야

비로소 해탈한 사람이라 하나니

무명의 바다에 편한 듯 있으면서

죽음의 왕에게 휘몰리고 있나니

소리와 빛깔을 즐기지 않으면

범부의 자리를 떠나는 줄 알라.

 

그 때에 승광대왕은 석가가 말하는 생사의 근심스러움을 듣자 일찍이 알지 못했던 일이라 생사를 아주 싫어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합장하고 공경하며 한마음으로 우러러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석가는 큰 자비로 저를 위해 이처럼 미묘한 법의 이치를 말씀하였사오니, 저는 지금 우러러 받들겠나이다.”

 

석가가 말하였다.

“장하오. 대왕이여, 그 말대로 실행하고 방일(放逸)하지 마시오.”

이것이〈불설비유경〉의 전문이다.

위의 비유를 불교신문에서는 이렇게 해설한다.

 

①태어나는 괴로움[生苦]

②늙는 괴로움[老苦]

③아픔의 괴로움[病苦]

④죽음의 괴로움[死苦]

⑤미움의 괴로움[怨憎會苦]

⑥헤어지는 괴로움[愛別離苦]

⑦얻지 못하는 괴로움[求不得苦]

⑧번뇌가 치성(熾盛)하는

이 삶 자체가 괴로움이다[五陰盛苦]

 

사바세계의 중생은 이와 같은 괴로움을 당연한 것인 양 받아들여야 한다. 사바에 태어난 중생이 받아야 하는 업(業)이 바로 4고(苦)요 8고(苦)라는 것을 자각하여, 기꺼이 받아들이고 능히 감당하고자 할 때 행복의 문이 열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와 같은 괴로움 자체를 싫어한다. 자신도 모르게 태어났으니 태어남의 괴로움은 어쩔 수 없다 할지라도, 늙기 싫어하고 병들기 싫어하고 죽는 것은 더더욱 싫어한다. 그리고 그 싫은 것으로부터 멀리멀리 달아나고자 한다. 달아나면 편안한 곳에 이를 것처럼 느끼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상(無常)의 살귀(殺鬼)인 미친 코끼리는 달아날 기회조차 주지 않는다. 인정사정없는 코끼리는 '지은 업대로 살다 죽어라'며 사정없이 우리를 내몰아 버린다. 마침내 미친 코끼리에 쫓겨 올라간 곳은 나무 위, 그 나무는 바로 업연처(業緣處)이다.

 

우리는 이 외로운 나무, 곧 가정이나 직장 등의 업연처에 의지하여 삶의 길을 찾는다. 그렇지만 업연처에 의지하여 살기란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다. 잠자리도 불편하고 먹을 것도 입을 것도 변변하지 못한다. 도무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찾아보기가 힘들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탈출구를 찾는다. 미친 코끼리인 무상의 살귀와 불편하게 지낼 수밖에 없는 업연처로부터 벗어나 편안히 머물 수 있는 자리를 찾는 것이다.

 

마침 나무에 얽혀 있는 칡넝쿨이 아래쪽의 크고 깊은 우물로 드리워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위험을 무릅쓰고 칡넝쿨에 매달려 아래로 내려간다. 하지만 업을 피해 도망간다고 하여 결코 특별한 곳에 이르지는 못한다. 목숨줄인 칡넝쿨을 타고 내려가 닿는 우물의 밑바닥은 바로 황천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언제나 황천을 향하고 있다. 목숨줄인 칡넝쿨만 놓아 버리면 황천이요, 내생이다. 그러므로 있는 힘을 다해 목숨줄인 칡넝쿨을 부여잡고 견뎌야만 한다. 더욱이 우물 속의 사정은 탈출을 했던 나무 위보다 좋지가 않다.

 

우물 밑바닥에는 이무기 세 마리가 떨어지면 잡아먹겠다며 입을 크게 벌리고 있고, 우물 입구사방에는 독사 네 마리가 혀를 날름거리며 잔뜩 노려보고 있기 때문이다. 세 마리 이무기와 네 마리 독사는 삼독(三毒)과 사대(四大)이다.

 

삼독은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이다. '나'에게 맞으면 탐욕을 일으키고, '나'에게 맞지 않으면 분노하며, '나'의 탐욕을 채우고 분노를 달래기 위해 갖가지 어리석음을 저지른다. '나'를 위해 세 가지 독기운을 뿜어내는 것이다. '나'를 위해 뿜어낸 이 세 가지 독기운은 세 마리 이무기가 되어 '나'를 통째로 삼키려 하고 있는 것이다. 또 네 마리 독사는 우리 몸을 구성하고 있는 네 가지 기운인 지(地)ㆍ수(水)ㆍ화(火)ㆍ풍(風)을 뜻하는 것으로, 목숨이 떨어지면 곧바로 그 기운들을 거두어가기 위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해와 달을 상징하는 흰 쥐와 검은 쥐가 번갈아 가면서 목숨줄인 칡넝쿨을 갉아먹고 있으니…. 이것이 우리네 인생의 실체이다. 괴롭고 슬프고 무상하고 덧없기 짝이 없는 것이 우리 인생이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무 위 벌집에서 떨어지는 달콤한 꿀 한 방울을 받아먹는 재미로 인생의 실체를 잊으며 살아간다. 달콤한 꿀물! 그것은 오욕락(五欲樂)이다.

 

①먹고 싶은 것 맘껏 먹는 즐거움[食欲樂]

②맞는 이성과 함께 하는 즐거움[色欲樂]

③많은 재물을 갖는 즐거움[財欲樂]

④이름을 떨치는 즐거움 [名欲樂]

⑤휴식을 취하는 즐거움[睡欲樂]

 

등 오욕에 빠져 괴롭고 슬프고 무상하고 덧없는 인생살이를 모두 잊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월간 [법공양] 에서-

 

2. 불교의 기본교리

- 고익진<동국대교수 · 불교학> -

 

불교는 소승(小乘)불교와 대승(大乘)불교로 크게 갈라진다. 소승불교의 기본이 되는 것은 아함경이고 대승불교의 기본이 되는 것은 반야ㆍ법화ㆍ화엄ㆍ정토 등의 초기 대승경전이다. 초기 대승경전 중에서도 반야ㆍ법화는 대승의 원시적 교설을 포함하고 있다. 이런 원시적 대승교설은 아함의 교설과 밀접한 체계성을 이루고 있다. 따라서 불교의 기본교리는 아함ㆍ반야ㆍ법화의 삼부경에 전개된 교리체계라고 말해도 좋다.

 

종교가 문제로 삼는 것은 의식주에 관한 것이 아니다. 우주와 인간과 가치에 관한 궁극적인 문제이다. 종교적 사유의 중심이 되는 이러한 세 가지 주제 중에서는 우주에 관한 것이 근본이 된다. 우주를 창조한 자가 누구인가? 우주의 본질은 무엇인가와 같은 문제가 해명될 때 인간의 현실존재는 저절로 해명될 것이고 인간의 현실존재가 해명될 때,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의 생의 가치문제가 또한 저절로 해명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종교는 우주에 관한 궁극적인 문제를 명확하게 언설로 해명해 주고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것을 덮어놓고 믿어야 한다. 최고의 권위가 부여된 그 말씀은 의심하거나 비판해서는 안 될 진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불교는 그런 권위를 내세우려고 않는다. 종교적 진리는 스스로의 마음속에 확인되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궁극적인 깨달음을 이룰 것을 강조하고 그에 이르는 길만을 제시하고 있다.

 

궁극적 깨달음에 이르는 길은 중층적(重層的) 구조를 띄지 않을 수가 없다. 눈앞의 현실에 집착해 있는 사람들을 이끌어 현실의 배후에 숨은 참다운 진리를 깨달아 가도록 교화해야 하기 때문이다. 마치 학교 교육의 교과 과정 처럼…. 불교에 숫한 법문(法文)이나 복잡하게 시설되어 있음은 이 때문이다.

 

이들은 어느 것이나 깨달음에 이르는 한 맛(一味)의 법문임은 물론이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아함ㆍ반야ㆍ법화의 삼부경에 전개된 근간적인 교리체계는 다섯 가지로서 이들을 원고지 18매라는 제한 속에서 극히 간략하게 소개해 보면 다음과 같다

 

가. 업설(業說)

석가는 말한다.「일체(一切)는 12처(處)에 들어가나니, 눈ㆍ귀ㆍ코ㆍ혀ㆍ몸ㆍ의지요, 색ㆍ소리ㆍ냄새ㆍ맛ㆍ촉감ㆍ법이니라」[阿含]. 인식 할 수 있는 것에서부터 종교적 진리를 탐구해 들어감을 엿볼 수가 있다. 이 12처의 세계관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점은 인간을 의지로 파악하고 그 대상을 법(法)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점이다.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종교간의 견해는 일정치 않다. 불교는 자유의지의 존재를 엄연한 현실적 사실로 인식하라는 입장을 보여주고 있다.

 

자유의지에 대한 자각(自覺)을 강력한 인생관으로 전개되지 않을 수가 없다. 자기현실을 개척하고 타개해 나갈 것은 자기 의지력이라는 이치가 뚜렷해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지적 작용을 업이라고 말하고 그러한 업에 의해 대상이 나타내는 필연적인 결과를 보(報)라고 한다. 업에는 반드시 그에 상응한 보가 따를 것이며 이러한 업보의 인과 관계는 엄격하게 추구해 가면 숙세 · 현세 · 내세의 삼세에 걸쳐 전개됨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나. 사제설(四諦說)

석기는 다시 말다.「일체는 덧없고 괴롭고 무아이니라.」아무리 좋은 업을 지어 천상에 난다고 하더라도 죽음을 면 할 수는 없다. 인간이 이렇게 죽음을 면 할 수 없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생존을 지속하려는 괴로움을 더 이상 감당 할 수가 없어 부서지기 때문이다. 생존을 지속하려는 이 괴로움은 왜 일어나게 될까?「나」아닌 것을「나」라고 집착하고 있기 때문 일 것이다. 이렇게 살펴볼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 뚜렷한 사실에 눈을 뜨게 된다.

 

첫째, 인간은 그 존재 자체가 괴로움이다.

둘째, 그러한 괴로움은 잘못된 나의 집착 맹목적인 욕망에서 발생한다.

세째 괴로움의 근본적 해결은 잘못된 집착이나 욕망을 멸하는 데에 있다.

네째, 그러기 위해서는 참다운 나에 대한 바른 견해를 갖고 올바른 종교적 실천을 닦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네 가지 사실을 사성제라고 한다. 아함경에 설해진 실천법 중에서 중추(中樞)적인 것이다.

 

다. 12연기설(緣起說)

4제의 실천을 통해 마침내 밝혀낸 참다운 실재(實在) 이것을 명(明)이라고 한다. 생사의 괴로움을 발생시키고 있는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이제 이「명」에 대한 무지(無知)라고 말 할 수가 있다.

 

따라서 “무명에 연(緣)하여 행(行)이 있고, 행을 연하여 식(識)ㆍ명색(名色)ㆍ6처(處)ㆍ촉(觸)ㆍ수(受)ㆍ애(愛)ㆍ취(取)ㆍ유(有)ㆍ생(生)ㆍ노사(老死) 등이 일어나 하나의 커다란 괴로움을 발생 시킨다” (阿含經). 이러한 괴로움은 무명을 다함에 의해 함께 사라질 것은 다시 말할 필요가 없다. 이 교설을 12연기설 이라고 하는데 아함경에서는 이것을 부처님의 깨달음이라고 말할 정도로 최고의 법문으로 치고 있다.

 

라. 육바라밀설(六波羅蜜說)

언설이 뜻하는 바는 세간에서의 좋은 과보이다. 4제설과 12연기설은 그러한 과보도 바라지 않는다. 생사로부터의 완전한 해탈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종교적 방향은 열반에 안주하면 세간을 망각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제 그 열반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되돌아보자. 절대적 존재성을 인정 할 수가 있는가?

 

생사와 열반이라는 두 법은 서로 의존관계에 있다. 그렇다면 다 같이 연기(緣起)한 법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고 동시에 그들의 자성(自性)은 공(空)하다고 판단해야 할 것이다.

 

모든 법이 공(空)함을 부르짖는 대승불교는 바로 이러한 자각에서 흥기한 교설이다. 생사와 열반에서 비롯된 일체의 분별을 초월하여 무한한 실천으로 참다운 진리의 깨달음을 추구한다. 이러한 사람들을 보살이라고 말하고 그들의 지혜를 반야라고하며, 그러한 반야가 궁극적으로 도달할 종교적 경지를 바라밀이라고 한다. 보살은 열반과 같은 법에도 안주하지 않으므로 대사회적 활동 또한 쉬지 않는다. 반야 바라밀 외에 보시(布施) · 지계(持戒) · 인욕(忍辱) · 정진(精進) · 선정(禪定)의 다섯 바라밀을 함께 행함은 이 때문이다.

 

마. 일불승설(一佛乘說)

보살은 이렇게 사회적 관심을 잃지 않지만 그럼 반야가 궁극적으로 이를 바라밀은 피안(彼岸)의 성격을 벗어나지 못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최상의 깨달음은 이러한 피안에 있어서의 깨달음을 의미하는 것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법화경에서 석기는「모든 법의 참다운 모습(實相)은 오직 부처와 부처만이 서로 주고받을 뿐이니라, 부처가 세상에 출현함은 오직 이 부처의 깨달음을 사람들께 열게 하기 위함이니라. 세상에는 오직 이 목적을 위한 한줄기 불승이 있을 뿐이다.」 4제ㆍ12연기ㆍ육바라밀의 삼승은 일불승에서 짐짓 그렇게 분별한 것에 불과하다.

 

불교의 궁극적 목적으로 제시된 이러한 깨달음은 어떤 성격을 띠고 있는가. 석기는 그것을 깨끗한 땅이 아니라, 더러운 땅에 피는 하얀 연꽃에 비유하고 있다. 모든 부처는 열반에 들지 않고 항상 세간에 머물러 무수한 불국토를 건설하며 중생을 교화한다. 이 진실한 법에 믿음을 일으킨 사람들께도 장차 성불하여 훌륭한 불국토를 건설할 것을 사명으로 짊어지우고(授記) 있다. 어렴풋이나마 최상의 깨달음이 어떤 성질의 것인가를 짐작 할 수가 있을 것이다.

 

불교의 목적은 열반이나 피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우주의 참다운 실상을 깨달아 진실한 인간생활의 가치를 구현하는 데에 있는 것이다.

 

3. 불교의 교리와 [전도서]

위에서 본대로 불교의 교리는 헛되다. 한자로 공(空)과 허(虛)다. 전도서는 솔로몬이 주전 912년 이전에 쓴 인생론으로서 핵심이 되는 낱말은 '헛됨', 즉 하나님을 떠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전혀 허망하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지혜롭고 부유하며, 가장 영향력이 컸던 왕 솔로몬이 삶을 말년에 관망하고서, 인간적인 관점에서 그 모든 것이 헛되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결론에 가서 하나님 자신이 아니고서는 권세ㆍ인기ㆍ명성ㆍ쾌락 등 그 어느 것도 하나님께서 인생 가운데 만들어 놓으신 그 공허함을 채울 수 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단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보게 되자 삶의 의미와 목적이 생기게 된다는 것이다.

 

남북으로 분단된 후 북왕조 이스라엘은 주전 722년에 멸망하여 전세계로 흩어져 디아스포라가 된다. 그들은 중동을 거쳐 동진하여 인도ㆍ중국으로 한반도ㆍ일본에까지 흩어져 살았는데, 인도에서 주전 563년 태어난 석가가 30여년 왕궁에서 살 때 유대인들의 <전도서>를 읽고 삶의 무상을 깨달아 출가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볼교사상과 <전도서>의 결론을 뺀 부분은 너무나도 같아 쌍둥이 같다.

 

석가가 시작한 불교는 자력구원(自力救援) 종교로서 깨달음으로 열반에 들어간다는 소승불교(小乘佛敎)다. 그런데 중국으로 들어갔을 때 중국에 퍼져 있는 기독교의 네스토리우스파인 경교(景敎)의 영향을 받아 <메시야 사상>을 받아들여 변질된 것이 중국ㆍ한국ㆍ일본의 대승불교(大乘佛敎)다. 이에 대한 논문을 소개한다.

 

4. [구세주] 사상 받아들인 대승불교(大乘佛敎)

- 유재신 목사| 1997. 8. -

 

불교는 크게 소승불교와 대승불교로 나뉜다. 소승불교에서 아라한(Arahan)은, 도덕적 수양을 통해 성자가 되어서 죽은 다음에 깨달음을 통해 열반에 간다. 도덕적 계율을 지킨다든지 경전을 읽거나 명상을 통해서 깨달음(覺)을 얻고, 죽은 다음에 속세에서 해방되어 열반(涅槃)에 간다는 특징을 지닌다. 즉 원시 불교는 인간의 자력신앙을 강조했다.

 

불교에서는 불멸(佛滅) 후 약 100여 년부터 대승불교(大乘佛敎, 대승 Mahyana, 큰 수례를 의미)라는 종파가 생겨났다. 대승불교는 중국ㆍ한국 그리고 일본 등에 널리 퍼져있는 불교 종파다.

 

5. [보살신앙]으로 타력구원설

대승불교는 ‘자비를 통한 구세주 신앙’에 그 특징이 있는데 특히 보살(菩薩)신앙을 강조한다. 보살은 중생의 고통을 구원하기 위하여 자비를 가지고 중생을 구원하는 ‘구세주’ 같은 분이다. 보살에게 헌신하고 신앙을 가지고 보살의 도움을 통해 구원을 받아 극락에 갈 수 있다는 타력신앙을 강조한다.

 

보살신앙이란 불타를 신처럼 존경하던 신앙에서 비롯되었다. 불타를 생존시에 불타를 하나님 이상으로 존경했다. 불타가 오랜 수련을 통해서 여러 가지 형태로 태어났다고 본다. 불타를 신으로 섬기던 불탑 전통에 기인한다. 또한 보살신앙은 다신론(多神論, 비시뉴, 시바, 크리스타 등)에 인도의 토속신들을 불교적으로 받아들여 활용한 것이다. 보살신앙은 또한 이란 및 근동의 문화적 영향과 기독교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구원의 방법에 있어서 불타가 가르친 자력신앙이 불교의 본질적인 면이라고 한다면, 대승불교는 후에 [보살신앙] 등으로 불교가 필요에 따라 방편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즉 인간 불타를 신격화해서 우주적인 신으로 숭배하게 되었으며, 불타를 포함한 보살이 필요에 따라 인간을 자비로 구제하는 타력신앙으로 후에 발전한 것이다. 대승에서는 불타의 이름만 외우면 구원을 받는다고 보았다.

 

석가는 도덕적 모법에서 예배의 대상으로 소승불교에서는 개인적인 힘으로 개인의 수도와 명상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는 종교로서 엄격한 승단생활에 의한 수도생활이 요구되었다. 대승불교에서는 실제 생활에서 많은 사람들의 구제가 문제가 되었다. 대승불교는 불타를 신격화하여 많은 보살들과 더불어 신앙의 대상으로 숭배하게 되었다. 소승불교가 인간 석가를 도덕적인 모범으로 간주하였다면 대승불교에서는 불타를 예배의 대상으로 보고 불타에 대한 신앙을 강조하였다.

 

불교 경전에 이런 구절이 있다. “작은 돌을 물 위에 놓으면 물에 가라앉지만 배 위에 백 개의 돌을 올려놓아도 배로 인해 가라앉지 않는다. 인간이 이전에 아무리 나쁜 짓을 했다 하더라도 불타를 통하면 지옥에 가지 않고, 불타를 모르는 사람은 죽어 지옥에 떨어진다”고 말한다. 즉 불타를 구원하는 큰 배(大乘)로 본 것이다.

 

즉 불타의 무한한 자비에 의해서 나쁜사람도 신앙으로 구원받는다는 사상은 기원 초기에 유대교와 조로아스터교, 인도교 등의 영향으로 이러한 구원사상이 형성된 것이다. 이것은 평신도들의 구원을 위한 방편으로 도입된 것으로, 금욕적인 소승불교에서 민중중심의 대승불교로 넘어갈 때 그 근방 종교들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 하겠다. 여기에서 불타는 신으로서 보살과 더불어 자비로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구세주 역할을 하는 것이다.

 

기독교와 비교하면, 기독교와 대승불교 양쪽이 모두 타력구원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비슷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격한 차이점이 있다. 기독교에서는 구약성서에서부터 인격적인 신에 대한 믿음의 뿌리가 실존적으로 강조되고 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과 부활을 통해서 구원을 받은 것은 실재적인 개념이다.

 

이에 반해 불교는 원래 인간 중심의 인본주의적 자력구원 종교인데, 타력구원(他力救援)은 필요에 따라 방편으로 요구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실재성을 갖지 못하고 생명력이 약하다. 기독교에서는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비록 타력 신앙을 강조하면서도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는 물과 기름 같은 존재인 것이다. 그러나 불교에서의 불타는 도덕적으로 완성된 신으로 완전 타자로서의 신이 아닌 인간이라고 본다.

 

즉 보살을 통한 구원은 인간을 통한 인간 구원이라는 점에서 기독교의 절대 타자인 하나님의 인간 구원과는 차이가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일본의 고승이 불교가 생명력이 부족하고 실재적인 면이 약하여 기독교로 귀의한 것은 이런 점을 반영하는 것이라 하겠다.

 

이 대승불교에는 세 가지 학파가 있다. 그 가운데서 기원후 3,4세기경에 나갈주나에 의해 시작된 중관파(中觀派)를 먼저 살펴보자.

 

불타는 지혜와 명상을 강조했는데 특히 계율적인 면, 윤리적인 면을 강조한 것에 반해 중간파에서는 지혜의 형이상학적인 면을 강조했다. 즉 '초월적인 진리' 인 불타는 절대적이며,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상대적 진리이므로 절대적 진리를 상대적 진리로 표현할 수 없다고 보았다. 눈에 보는 것은 독립적인 것이 아니고 타(他)와의 관계에 있어 상대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보았다.

 

중관파에서는 절대적인 진리는 하나라고 가르치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달은 하나이지만 호수에 비춰진 달은 많다. 호수에 비춰진 달은 실재 달이 아니라 달그림자에 불과하다. 그러나 호수에 비춰진 달을 통해서 하늘의 달을 알 수 있다. 실재의 달과 호수에 비추인 달은 다른 것이 아니라 같은 것으로 하나이다.”

 

즉 불타는 달(月)인데 인간이 불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불타와 인간은 궁극적으로 하나라고 보는 것이다. 인간의 경험 속에서 태어나는 것과 죽은 것, 중단하는 것과 계속하는 것, 같은 것과 다른 것, 나타나는 것과 사라지는 것은 다 상대적인 것으로 실재가 아니고 오직 우주적인 불타만이 유일한 존재라고 보는 것이다. <빛과소금>에서

 

6. 다시 [안수정등] 이야기

석가가 설(說)한 불교 우화 [안수정등(岸樹井藤)]은 재미있게 인생을 논했지만 죽어가는 자의 구원의 길이 없다. 그냥 사바세계란 이렇다 설할 뿐이다.

 

대한기독교계명협회(The Korea Christian Literacy Association) 편집인 겸 작가(Editor & Writer)로 일할 때인 1960년 2월, 나는 계몽 소책자《얘기 주머니》에서 이 이야기를 인용하고 끝에 이런 결론을 달았다.

 

“불교에서는 칡넝쿨에 매달린 사람의 구원에 대해서는 말을 못하지만, 우리 그리스도교에서는 하늘에서 내리는 구원의 손길을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늘로부터 내려오셔서 칡넝쿨에 매달린 가엾은 인생을 구원하여 하늘나라로 데려가신다. 달과 태양의 관계처럼 석가는 하나의 예언자로서 그리스도의 빛을 반사할 뿐이다. 이것이 불교와 기독교의 차이다. 불교인도 말한다. ‘불교는 종교가 아니라 철학이다’ 라고.”

 

[결론]

 

맞다! 진리다. 불교는 철학일 뿐 종교가 아니다. 석가는 태양 빛을 반사해주는 달일 뿐이다. 발광체가 아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의(義)의 태양’이시다. 달은 수시로 변하고빛은 죽은 빛이지만 태양 빛은 영원한 ‘참 빛’이요, ‘생명의 빛’이다.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요 8:12)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