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꽁이의 찬양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해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사43:21)

찬송가 토착화(土着化) 운동의 선구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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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찬송가연구원

2005. 6.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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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가 토착화(土着化) 운동의 선구자들

 

 

글 : 오소운 목사

 


   한국음악으로 찬송가를 만들어 보려고 생각한 대표적인 선교사는 게일 목사이다. 그는 1895년 한국문화에 관해 논하면서, 한국인의 문화로 한국인들에게 접근해야 한다는 생각을 피력하였다. 그러나 한국 가락을 천히 여기던 그 시절, 찬송을 우리 가락으로 부르는 일은 가물에 콩 나듯 했다는 것이다.

 

  번역 찬송가는 시문학적 표현은 물론 형태도 갖추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 사람들은 노래부르기를 좋아하고 열심히 배워 서양찬송가 곡조도 잘 부르는 사람이 있으나, 이것은 순수하게 노래(song language)를 음미하여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노래라고는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때문에 서양음악은 한국인들에게 아무 의미가 없어 보인다고 말한다.

 

 

 

  한국 번역찬송가는 내용의 명료성(clearness), 운율, 억양, 경어에 있어서 결함이 많다. 대부분의 경어의 내용은 좋으나 표현이 분명하지 못하여 어색하여서 부르는 사람이 별로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의아할 수가 있다…. 경어 사용에 있어서도 제한된 글자 수 때문에 '하옵쇼셔' 하다가 '히' 나 '하게'로 산만하게 사용되고 있어서 고상한 표현이 아쉽다. 하나님께 대한 공경심과 위엄이 표현되어야 하는데, 번역으로는 불가능하다.  

  게일 목사(사진)는 연동교회를 맡아보고 있을 때, 제3대로 장로가 된 광대 출신 임공진(林公鎭·사진)을 교회 앞에 세워, 민요 [양산도] 가락에 맞춰 이런 찬송시를 써서 부르게 하였던 것이다.

 

 

 

1. 에에이에 공중 나는 새를 보라
  천부가 저 새를 먹여 기르신다.

 

2. 에에이에 들에 백합꽃을 보라
  천부가 저 꽃을 귀히 입히신다.

 

3. 에에이에 너희들은 낙심말고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여라

 

4. 에에이에 내일 염려 내일 하라
  오늘은 오늘에 고생 족하니라

  

<후렴> 염려 말아라 의복 음식 염려 말어라
           천부가 너에게 복을 내리신다.

 

 

 

 

<사진 설명> 게일 목사는 한국교회와 한국 음악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첫 아들을 낳아 유아세례를 베플 때, 한국 목사 1호인 길선주 목사에게 부탁하였다. 사진은 유아세례 기념 촬영이다. 앉은 남자가 길선주 목사요, 아기와 엄마는 게일 선교사의 아내와 아기다. 뒤에 서 있는 이가 광대 출신 장로인 임공진 장로이다. <출처; 사진으로 보는 연동교회 110년사>

 

 

  연동교회가 자리잡았던 연못골과, 그 이웃 찬우물골(현 효제동) 방아다리(충신동) 두다리목  등은 조선시대 직업서열인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제일하층인 나막신장수·배추장수·천민·갖바치·하급 병졸 등의 집단거주지였다. 그래서 초기 교인들의 대부분은 이 계층 출신이었다. 원산의 유명한 싸움꾼이었던 고찬익 장로도 원래 평안도 안주의 갖바치 출신이었다.

 

  임공진은 비록 천민이었으나 신앙열의는 대단하여 게일 목사가 장로로 추대하자 광대출신인 임공진의 장로(자녀: 2남 1녀) 추대 문제를 놓고 양반교인들의 반발이 거세게 일어났다.

 

 

  특히 이 문제를 토론하기 위해 모인 1909년 6월 25일 연동교회 제직회에는 원두우·아펜셀라·헐버트 목사 등 장·감 양교파의 선교사들까지 참석했는데 이 자리에서 게일 목사는 단호하게 임공진 장로의 신분을 막론하고 장로로 충분한 자격이 있다고 주장해 이원긍·함우택·오경선 세 영수가 천민 출신의 장로장립에 심히 분노하고 마침내 1백여명의  성도를 데리고 나아가 묘동교회를 세웠다. 연동교회 역사상 단 한번 밖에 없었던 이 분열 사건은 1년 간을 두고 진통을 겪었던 쓰라린 아픔이었다.

 

 

  당시 연동교회에는 상류계급의 양반출신이 있는가 하면 중류계급의 상민출신, 그리고 하류계급의 천민출신이 공존했었다. (연동교회 80년사). 이런 상황에서도 게일은 임공진을 장로로 세웠으니, 그의 국악사랑의 정신은 가히 [매니아 급]이다. 임 장로는 게일의 격려에 힘입어 가야금 병창 등 전통국악에 바탕한 한국적 찬송가 개발에 나섰다. 1917년에는 [조선음악연구회]를 조직, 3년간 찬송가 토착화작업을 모색하기도 했다. 

 

 

  게일은 한국 최초의 간이《한영사전》을 편찬하고, 1897년 4월 [그리스도신문]의 주간으로 시작해 [기독신보]로 바뀐 뒤까지 10년간 주필로 봉사했다. 안식년에 미국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1898년 4월 다시 한국에 왔다. 1900년 5월 연동교회 목회를 시작으로, 1901년 정신여학교와 경신학교의 교육을 통해 새로운 교육기반을 구축했으며 1901년 한국성교서회(현 기독교서회) 회장(제3대)과 황성기독청년회(현 YMCA) 창립위원 및 초대회장(1903)으로 문서 선교활동에 힘썼다. 조선예수교장로회 독노회장으로 두 차례(1908, 1910) 선출되었으며, 평양신학교 교수로도 활동했다. 1917년 피어선기념성서학원 원장이 됐고, [조선음악연구회]를 조직, 찬송가 개편을 주도했다. 1917년에는 음악연구회를 조직하고 찬송가 개편에 힘썼다.《텬로역정》(天路歷程·The Pilgrims's Progress)을, 김창직의 도움을 받아 한글로 번역하고, 김만중의 [구운몽]을 영어로 번역(1922)해 출판하는 등 단행본 저서가 43권에 이른다.

  

                                                                

 게일 목사가 번역한 <천로역덩>(天路歷程) 안표지

 

 

  나는 네 살 때 누님들이 읽어주는 천로역정을 그림을 보면서 외워버렸다. 나 혼자 그림을 보면서 천로역정을 외우자 어머니가 깜짝 놀라

 

   "얘가 글을 읽어요."

하시자 아버지가 시험해보니 읽는 게 어니라 외우는 것이었다.

  그래서 글자를 짚어주면서 외우게 하여 다섯 살에 한글을 깨친 일도 있다.

 

 

  한국 음악을 찬송가 곡조로 사용하는 문제에 대해서 선교사들은 호의적이었다. 평양신학교 교수로 있던 곽안련(郭安連, Charles Allen Clark, 1878∼1961) 선교사는 평양신학교 교재로 사용하던《목회학》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옛사람들은 어떤 곡은 신성한 것이요, 어떤 곡은 세속적인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현대인은 반드시 그렇게만 생각하지 않는다. 즉 그 곡 자체에는 별로 관계가 없고, 그 가사의 뜻과 곡이 어떻게 활용되는 가에 따라서 신성한 것과 세속적인 것의 구별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한국에서는 그대로 내려오는 신비한 악곡이 많은데, 속곡(俗曲)으로, 또는 사신경배용(邪神敬拜用)으로 사용하므로, 이것은 성가에 적합하지 않다고 배격한다. 그러나 그 곡 자체가 신성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가사만 고쳐서 후일에는 찬양대에 많이 이용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우리음악 찬송가화에 앞장 선 게일 목사는 [조선음악연구회]를 조직하여 [찬송가의 한국화]를 모색하였고, 이 흐름은 최초의 음악가인 김인식과 이상준, 그리고 김형준으로 이어지고 있다.

 

  한국 최초의 어린이 찬송가인《아동 찬송가, 1936》에 [조선의 꽃], [나는 주의 화원에] 등, 좋은 어린이 찬송을 작사 작곡한 이화여전 교수 박경호(朴慶浩, 1899∼1979)는 교회에 조선음악을 도입시키려 했던 김형준(金亨俊)을 높이 평가하고, 김형준의 의도대로 조선음악을 교회에서 연주하려 했던 자신의 경험담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주: 김형준은 <봉선화>의 작사자이다.

 

우리 양악의 선구자 박경호 선생 

 

 

  "김형준씨는 특히 [긔독교인들이 서투르게 부르는 구미식 찬숑가보다는, 차라리 동일한 의미의 가사에 조선식곡을 도입식힘이 조치 않는냐]는 주장으로 다양한 조선찬송가를 만들어 도입한 결과 일부 교역자 측에서는 맹렬한 반대가 있었다. 그 일례로 필자가 시내 모 교회의 음악을 지휘할 시 김형준 씨의 이 운동에 공명하여 김씨를 초빙하여 예배순서에 조선곡 찬미가를 합창한 일이 있었다.

 

 

  특히 젊은 학생들의 감격은 실로 장대하였건만 강단 위의 안자 있던 목사가 돌연히 기립 대호(大呼)하여 가라사대 '오늘 합창을 한다기에 허락하엿더니 이런 것인 줄은 몰랏소. 이런 소리는 요정이나 놀이터에서나 부를 것이지, 신성한 교회당에서는 절대 허용할 수 업소'

 

  당시의 챙피는 말할 것도 업거니와 김씨는 '미상불(未嘗不) 그럴 것이다'는 듯이 미소를 챙기고 즉퇴(卽退)하시던 광경이 아직도 눈에 서리는 것이다. 신성한 교회일수록 찬미의 (서양) 곡조는 부를 수 잇스되 조선음악을 부를 수 업다는 부패한 정신의 소유자가 당시 교역자중의 대부분이엇던 것이다. "

 

 

  박경호는 교회 안에서 조선식 교회음악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교역자들을 [부패한 정신의 소유자]라고 매도한다. 그런데 조선식 교회음악을 반대했던 목사의 입장에서 보면, 조선 음악이 [요정이나 놀이터에서나 부를 것이지 신성한 교회당에서는 절대 허용할 수 없는 것]이었으니 어찌하랴. 이 논란은 100년이 지난 오늘도 일부 교역자들에 의해서 계속되고 있지 않은가. 통탄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