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꽁이의 찬양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해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사43:21)

{한국 크리스천 문학인 클럽}의 어제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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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천문학가협회

2005. 6. 14.

 

 

이 글은 <한국크리스천문학> 지에 연재한 글(1-4회)이다.



한국크리스천문학인클럽의 어제

오소운 

(목사, 아동 문학가)


1. 그 탄생(誕生)


50 여 년 전의 일인데 바로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종로 2가에 있는 옛날 기독교서회(基督敎書會) 5층 빌딩의 2층에 있는 회의실에서 한국 기독교 문학인 클럽이 탄생되었다.

  

1958년 당시 나는 월간 {기독교사상(基督敎思想)} 잡지의 초대 편집장으로서 바쁘기 이를 데 없었다. 1957년 4월까지 월간 {새가정} 편집장으로 있었는데, 기독교 가정 잡지가 잘 팔리지 않아 손해만 본다고 이를 폐간하고, 목회자들을 위한 교양 잡지를 내기로 방침을 바꾸어, 부랴부랴 작년 7월에 {기독교사상(基督敎思想)} 창간호를 내었는데, 직원은 주간(主幹) 김천배(金天培) 선생과 나 단 둘이서 국판 128 면의 잡지를 제때 내려니까 얼마나 바쁜지 몰랐다.

 

지금이야 원고를 E-mail로 받거나 디스켓으로 받고, 잡지사마다 자동차가 있고 사람마다 전화도 있으니 기동력이 충분하지만, 버스도 별로 없고, 전차(電車)를 타거나 걸어서 다니는 그 시절, 원고 독촉도 전화가 귀한 시절이라 직접 찾아가서 독촉하고 받아 오는 시절이었다.


하나 다행스런 것은, 아래층에 [시온 다방(茶房)]이 있어서 문인(文人)이나 화가(畵家)들이 자주 드나들어 큰 도움이 되었다.


그 날도 다방에서 필자를 만나고 막 올라오려는데, 같은 사무실에 있는 {새벗} 잡지 주간 강소천(姜小泉) 선생이 부른다.


"오 선생, 오늘 오후에 몇몇 사람이 모여서 가칭 [기독교 문학인 클럽]을 결성하기로 했는데, 오 선생도 꼭 참석하시오."  

"저 같은 사람이 참석해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죠. 내가 인정하는 오 선생이니까 문제없어요."

하고는 휭하니 나가는 것이었다.

 


 강소천 선생


강소천 선생은 내가 기독교서회 편집부에 있을 때인, 1955년에 오리 전택부의 후임으로 새벗사 주간으로 왔다. 전택부가 서울 YMCA 총무로 자리를 옮긴 것이다.


당시 기독교서회 편집부장은 고영춘(高永春) 목사가 미국 유학을 떠나고, 전영택(田榮澤) 목사가 왔는데, 그는 일본 동경에 있는 한국 YMCA 총무로 있다가, 기독교서회 총무인 김춘배(金春培) 목사의 요청으로 귀국하여 편집 부장을 맡았다.


1954년 6월에 기독교서회 편집부 신입 사원으로 들어간 나는, 이듬해 모 일간지 신춘 문예 현상 모집에 동화를 써냈다. 그런데 성탄절이 가까운 어느 날, 새벗사 주간 강소천 선생이 나를 데리고 시온 다방으로 갔다. 성미가 급한 강선생은 앉자마자


"오 선생 서운하오. 사람이 왜 그렇소?"

하고 싫은 소리를 하는 것이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는 신학대학 한 해 후배인 강경구(姜庚龜)의 숙부였기 때문에, 나는 그를 삼촌처럼 대접했다.


"남들은 신춘 문예 때만 되면 나하고 줄을 대 보려고 야단들인데, 한 직장에 있으면서 어쩌면 귀뜸 한 마디 없소?"


"아, 예 그거...?"

사람 사귀기를 제일 어려워하는 나는 얼버무리며 말을 못 맺자, 그는 경위를 설명해 주었다.

 

그 신문사에서 자기하고 이○○ 두 사람에게 아동 문학 응모 작품을 심사해 달라 위촉하여, 최종 결선에 두 편이 남았는데, 한 사람의 동화는 30매인데 또 한 사람의 것은 25매였다는 것이다. 30매 내외로 원고 분량을 공고하였는데, 25매 짜리가 작품으로는 당선 감이어서 자기는 그것을 당선시키자 하고, 상대 심사 위원은 30매 짜리로 하자고 장시간 논란을 했다는 것이다. 자기가 끝까지 고집을 부리니까 그가 하는 말이


"30매 쓴 이 사람은 나한테 지도 받은 지 3년 되는 사람입니다. 두 번 떨어졌지요. 그러니 이 사람을 당선작으로 하고 25매 쓴 이 사람은 가작으로 합시다. 30매 내외인데 25매 밖에 안 썼으니..."

하고 간청을 하더란 것이다. 그러나 타협을 모르는 강 선생은


"원고 분량도 못 지키는 이 사람 것은 없었던 일로 하고, 이 사람 작품은 가작 수준밖에 안되니, 금년에는 당선작 없이 가작이나 하나 냅시다."


그리고 집에 와서 25매 쓴 사람 이름을 곰곰 생각해 보니 바로 나였다는 것이다.


"오 선생은 당선 된 거나 마찬가지이니, 신문 따위 신경 쓰지 말고 새벗에 동화를 쓰시오. 당선 돼도 쓸데가 마땅찮은데 우리 함께 이 길을 갑시다."


그런 일이 있은 다음부터 그는 내게 새벗 잡지에 성경 이야기를 연재하게 하였고, 수시로 동화를 쓰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기가 부탁 받은 세계 명작 동화 번역물들을, 바쁠 적이면 내게 번역을 하게 하였다. 물론 원고료는 내가 받지만 이름은 그의 이름으로 책이 되어 나왔다. 그런 관계로 그는 나를 새로 발족하는 [기독교 문학인 클럽]에 가입하라고 권하는 것이었다.


오후가 되자 당대의 유명하다는 문인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회의 장소는 2층 기독교서회 회의실인데, 우리 사무실은 바로 그 회의실 맞은 편에 있었고, {새벗}사와 {基督敎思想}사는 같은 사무실을 쓰고 있어서 회원들은 회의실로 가지들 않고, 우리 사무실에서 벅적대고 있었다.


그 때 모인 회원들을 당시 동아일보 수석기자였던 이상로(李相魯)는 {基督敎文學} 1967 추계호(秋季號)에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이 때의 주요 회원들을 생각나는 대로 적어 보면 다음과 같다.

전영택(田榮澤), 임영빈(任英彬), 김말봉(金末奉), 강소천(姜小泉), 임옥인(任玉仁), 박계주(朴啓周), 박두진(朴斗鎭), 이상로(李相魯), 주태익(朱泰益), 김형식(金亨湜), 박화목(朴和穆), 임인수(林仁洙), 석용원(石庸源), 김경수(金京洙), 이범선(李範宣), 김현승(金顯承), 박목월(朴木月), 윤혜승(尹惠承), 전대웅(田大雄), 이보라(李保羅), 오소운(吳小雲) 등이었고, 그 규약(規約)에 회원 자격을 '반드시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이념(理念)과 목적(目的)에 찬동하는 사람도 회원이 될 수 있다'는 규정(規定)으로 자타(自他)가 보아 기독교인 아닌 사람도 회원에 넣었었다. 그 예로 소설가 박영준(朴榮濬) 같은 사람도 회원으로 넣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날 회의에서는 초대 회장에 전영택 목사를 만장 일치로 추대하였고, 전 목사는 몇 번 사양하다가 회장직을 맡았다. 그러나 다른 부서는 두지 않았다. 연락 사무를 볼 간사 격으로 이종환(李鍾桓)을 두었는데, 그는 월간 {새가정}의 전신인 {기독교가정}의 편집장을 역임한 한신과 새가정 편잡장 선배였다.


이렇게 하여 제1차 사업으로《한국 기독교 문학선집》이 기독교서회 출판으로 나왔고, 그 인세로 임인수의 시집 {땅에 쓴 글씨}가 나왔다.


그런데 전영택 목사님은 나를 특히 사랑하셨다. 같은 문학의 길을 가기 때문인지 평생 나를 자식처럼 아껴 주시며 격려해 주셨다. 전 목사님은 점심 시간이면 자주 내 방으로 오셔서

"오 군, 냉면 먹으러 갈까?"

하시며 무교동 [삼오정](三五亭)으로 데리고 가셔서는 무조건

"여기 냉면 둘만 주시오."

하시는 것이었다.

 


기독교서회 편집부 시절, 서회에서  

광릉 소풍 갔을 때 전영택 목사님과 

 

서울 사람들은 당시만 해도 냉면의 맛을 몰랐다. 그러나 존경하는 어른이 하시는 일이라 순순히 따를 수밖에. 이리 해서 냉면의 참맛을 알게 된 나는 지금도 겨울에 냉면을 먹기 때문에 모르는 사람은

"오 목사 고향이 이북이요?"

하고 묻기도 한다.

 

 

《한국 기독교 문학선집》이 나온 며칠 후, 전 목사님이 나를 [삼오정]으로 데리고 가셨다.

"《한국 기독교 문학선집》봤지? 비기독교인 문인들이 서운해하는 것 같던데..."

"서운하겠지요. 하지만 [한국 기독교 문학인 클럽]이라면서 비기독교인을 넣은 것은, 김춘배 총무 님이 아주 잘못된 일이라고 하셔요."


김춘배 목사는 내 선친(先親)의 전도로 예수를 믿고, 그의 부친의 핍박 때문에 가출하여 일본으로 건너가, 고베(神戶)신학교에서 신학 공부를 하고 목사가 된 분이다. 그는 문학인 클럽 소식이 알고 싶으면 만만한 나를 불러 물어 보곤 했는데, 비기독교인도 회원으로 받아들인다는 규약을 보고는「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하며 정관을 고쳐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후 회의도 안 거치고 정관을 고쳤기 때문에 말이 많았다. 


"맞아. 나는 순수하게 기독교인들만의 동인회(同人會)를 만들고 싶었는데, 회의에서 많은 사람들이 주장하는 바람에 일이 어렵게 됐어."


[한국 기독교 문학인 클럽]이라고 이름을 붙이고서 비기독교인 회원을 두는 것은 이치에 어긋난다는 기독교서회 총무 김춘배 목사의 주장으로 [한국 기독교 문학인 클럽]은 큰 난관에 부닥쳤다. 기독교서회의 후원 없이는 아무리 좋은 글을 모아도 책으로 낼 수 없던 시절이다. 저마다 먹고 살기에 바빠, 책을 사 본다는 것은 사치스런 일에 속하는 시절이었고, 더군다나 문학 작품은 얼마 안 나가기 때문에 손해를 각오하고 누가 출판해 주어야 하던, 6·25 직후 얘기다.


2. 그 재건(再建)

이렇게 해서 초창기 [한국 기독교 문학인 클럽]은 {한국 기독교 문학선집}과 임인수 시집 한 권을 내고 깊은 잠에 들어갔다. 그 때 일을 이상로(李相魯)는 이렇게 회고했다.


"해방 20 년이 넘는 동안 이 땅의 기독교인 중, 문학을 하고 문학에 뜻을 두는 몇몇의 힘이라는 것이 고작 그러한 발자취 밖에 남기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기독교적인 문학 작품을 남긴 것과는 별 문제다. 즉 기독교 문학인으로서 단합된 문학 클럽이 그렇다는 것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기독교 문학인 클럽]이 필요하냐 하면 반드시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요(要)는 있자면 짭짤하게 있고, 없으면 없어도 좋지 않느냐 하는 것이 필자의 소견이다.


그러한 중에 최근 종로 2가 {전원} 다방을 중심 회합 장소로 주태익, 임인수, 석용원, 이종환, 김우규, 김태규 등의 주선으로 재 결성을 보게 된 것이 [한국 크리스챤 문학인 클럽]이다. (1967. 1. 21일 결성)


명예 회장 전영택, 회장 주태익, 부회장 이종환·이범선, 상임이사 석용원이고, 시(詩)에 황금찬, 김현승, 박두진, 박목월, 오신혜, 김경수, 황양수, 석용원, 윤혜승, 조남기, 박이도, 정기환, 박정희, 김원식, 박근영, 이상로, 전재동, 심일섭, 김태규, 장우현, 노영수, 손재준; 소설(小說)에 이종환, 전영택, 임옥인, 이범선, 전순란, 이원복; 희곡(戱曲)에 주태익, 이보라, 김원태, 이 반; 평론에 김우규, 전대웅, 김송현, 김영수, 임춘갑; 수필(隨筆)에 조향록, 김형식, 전택부, 김인덕; 아동문학(兒童文學)에 박화목, 유영희, 최운걸, 오소운, 한낙원, 황광은, 최인학, 이윤자, 윤두혁, 최효섭 등(이상 무순)이다."(上揭書 79p.)


1958년 말, 나는 기독교서회를 떠나 계명협회(啓明協會)로 자리를 옮겼다. 이 단체도 김춘배 목사를 중심으로 만든 기독교 계몽(啓蒙) 사업 단체인데, 거의 70%의 자금을 미국 NCC(National Council of Christian Churches)의 원조로 해 나가고 있었다.

 

거기서 작가 겸 편집인(Writer & Editor)이란 직책을 주고, 매월 46판 64면(전지 한 장) 짜리 기독교 계몽 서적을 집필하고, 편집·출판하는 일이 내가 할 일이었다.


계명협회 책임자는 서울 중앙감리교회 안신영(安信永) 장로인데, 내 4촌 형 (完根)의 공주 영명학교 은사였다.

월급도 기독교서회보다 낫고 밖으로 뛰어 다니지 않아 편했다. 잡지 기자는 작가를 만나러, 인쇄서에 교정보러 삽화 그릴 화가 만나러 늘 밖으로 뛰어다녀야 했는데, 나다니기를 싫어하는 나에게는 고통이었던 것이다.


책임자인 안신영(安信永) 총무는 다재다능(多才多能)한 감리교 장로인데, 작곡도 하는 음악 애호가였고, 한글학회 이사를 지낸 분이었다. 그의 형님은 [정이월 다 가고 삼월이라네]로 시작하는 당시 애창곡의 작곡가로서 월북한 작곡가 안기영(安基永)이었다. 안장로님은 여간 깐깐한 분이 아니어서 그를 아는 사람 중에는

"그 분 밑에서 오래 못 견딜걸."

하면서 자리 옮기는 것을 만류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분과 마찬가지로 완벽(完璧)주의자인 나를 그는 완전히 믿고, 쓰는 글마다 책으로 내어 전국에 있는 2천 여 개의 [독서 클럽]에 보내어 농촌 계몽을 하게 되었다.


매해 계몽 서적을 10여 권씩 저작·출판하다 보니, 동화를 쓸 겨를이 별로 없었다. 문학가 클럽도 긴 잠을 자게 되었는데, 다행히도 전영택 목사님이 계명협회의 실행 위원이기 때문에, 회의석상에서 자주 만나 뵙게 되었고, 함께 식사도 나누며, 쓴 글에 대한 평가도 받았다.


1960년, 기독교서회에서는 [어린이 찬송가]를 발행하기로 하고, 그 편집 책임을 가사는 강소천(姜小泉), 곡조는 나운영(羅運榮)에게 맡겼다.


어느 날 강소천 선생이 나를 전화로 불러 내었다.

"이번에 서회에서 어린이 찬송가를 내기로 하여 내가 가사를 맡았는데, 아는 문인들에게 작사를 해 달랬더니, 이건 찬송가하고는 동떨어져서 쓸 수가 없는 거야. 오 선생은 신학을 했고, 문학을 하고 있고, 또 음악에도 소질이 있으니 가사 다섯 편만 써 주시오. 아마 원고료도 줄 거요. 쥐 꼬리 만하겠지만."

하며 웃는 것이었다.


"쥐 꼬리 만하면 그래도 길겠군요. 그 동안은 노루 꼬리만 밖에 안 했고, 어떤 때는 아예 주지도 않고 '책에 이름 실려 준 것만해도 고마운 줄 알아야지.' 하시는 게 김춘배 총무님 아니었어요?"


그런데 다음 날 나운영(羅運榮) 교수가 계명협회로 찾아 왔다.

"이번에 기독교서회에서 어린이 찬송가를 내는데..."

"강소천 선생에게서 어제 들었습니다."

 

"아, 그래요? 그런데, 이미 나와 있는 <어린이 찬송가> 출판사에서 자기네 것은 사용을 금하고 있으니, 전부 새 곡으로 낸다면 이게 팔리겠어요? 그래서 걱정인데..."

하고 걱정을 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편집한 것에 새 곡도 있지만 대다수가 옛날 현제명(玄濟明) 선생이 편찬한 <아동 찬송가>에 있는 것인데요."

"그런데 그 <아동 찬송가>를 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현제명 선생 댁에도 그 책이 없어요."

 

"제가 가지고 있는데요."

하니까 나운영 교수는 와락 내 손을 잡으며,

"인제 살았다. 정말 고맙습니다. 그게 없어서 고민이었는데 오 선생이 가지고 있다니...내일 당장 가지고 오세요."

 

 

 


이리해서 나는 뜻밖에 어린이 찬송가 편집에 깊이 관여하 30여년간 찬송가위원회의 전문위월을 자내게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주태익 선생이 나를 찾아 왔다.

"오 선생, KBS 방송 어린이 프로 PD로 스카웃 제의가 들어왔는데, 좋은 기회요. 한 번 가 보시오."

"KBS에서요? 난 거기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데요."


"오 선생이 '방송 문화 연구실'의 방송 모니터 일을 보고 있지요?"

"녜, 그건 지금도 하고 있는데요."

"그 방송 문화 연구실의 노○○ 국장이 이번에 KBS 방송 국장으로 갔는데, 오 선생을 어린이 담당 PD로 스카웃하고 싶다는 거예요. 모니터 일을 얼마나 잘 했기에 칭찬이 자자합디다."


나는 기분이 좋았다. 가고도 싶었다. 그러나 나를 철석 같이 믿고 있는 계명협회 총무에게 떠나겠다는 말이 안 나왔다. 그래서 이를 거절하자, 그후 며칠 있다가 주태익 선생이 또 찾아 왔다. 또 그 얘기였다.


나는 용기를 내어 안신영 총무에게 그 얘기를 했다. 그러자 아니나 다를까

"이제 겨우 자리 잡혀가는데 계명협회를 두고 어디를 간단 말이오? 같이 일합시다."

하는 것이었다. 주태익 선생은


"참 아쉽게 되었군. 그 자리가 이 자리보다 훨씬 자기 계발에 도움이 될 텐데..."

하며 돌아서는 것이었다.


재건(再建) [한국 크리스챤 문학인 클럽]의 초대 회장이 된 주태익 선생은 웬만한 공문은 다 내게 부탁을 하였다. 상임이사인 석용원에게 부탁하면, 기독교서회 타이피스트에게 가지고 가서 부탁을 해야 하고, [한국 크리스챤 문학인 클럽]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 김춘배 총무의 눈치가 보여, 직접 타자를 치며, 비교적 자유로운 나에게 모든 심부름을 시키곤 했다.


 

 

 
                           사진은 강소천 묘비 앞에서 유영희 장로와 필자  

 

 

 

한국 크리스천 문학가협회의 어제

오 소 운

(목사․아동 문학가)

 

3. 해온 일

 

1967년 1월 21일, 재기(再起) 총회 공문을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원문대로 한자를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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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뢰는 말씀

 

玉體 萬康하시기 仰祝하나이다.

아뢰올 말씀은 그 동안 冬眠中에 있던 <基督敎文學人 클럽> 再組織의 必要性을 切感하여 다음과 같이 再起 總會를 가지고자 하오니, 꼭 參席해주시기 바라옵니다.

 

1. 時 日: 1月 21日(土) 下午 1時

2. 場 所: 平壤館(종로 예식장 西便 入口)

2. 會 費: 200원

但, 不參時에는 委任狀을 보내 주시기 바랍니다.

 

西紀 1967年 1月 14日

發起人: 田榮澤 朱泰益 林仁洙

李鍾桓 黃錦澯

 

貴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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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총회에서 선출된 임원 명단은 지난 호에 언급한 바 있으므로 생략한다.

 

새 회장이 된 주태익 선생은 의욕적으로 일을 시작하였다. 그 일들을 日誌 형식으로 적어 본다. 훗날의 참고를 위해서이다.

 

 

1월 27일: 韓國크리스천 文學家協會 발족 人事狀을 각계에 발송.

1월 31일: 회장단들이 기독교 각 기관에 인사차 방문.

4월 13일: 원고료 인상 건의문 기독교 언론 기관에 발송.

 

5월 8일: 제3회 이사회에서 기독교 예술 축전(祝典)에 대한 대표 파견 선정(전영택, 황금찬, 석용원)

 

 

5월 23일: 기독교 예술축전에 대한 사업 결의

1. 기독교 문학의 밤 개최

2. 신인 동화 현상 모집

3. 일본 작가 및 평론가 초청 강연

7월 15일: 동화 모집, 각 신문 및 방송, 잡지에 광고 의뢰.

8월 1일: 예술축전 심포지엄, 크리스챤 아카데미에서. 참석자: 이범선, 김경수, 석용원.

8월 14일: 동화 작품 심사위원 결정. 예심: 황금찬, 석용원 본심: 박화목, 최효섭, 이범선

8월 23일: 일본 평론가 佐古純一郞 씨와 소설가 稚名麟三 씨에게 초청장 발송.

10월 10일: 동화 작품 최종 심사. 가작 3편 河某, 李貞愛, 김덕수

10월 11일: <基督敎文學> 제1집 발행

10월 12일: 하오 7시 YMCA 대강당에서 「문학의 밤」 개최. 동화 당선자 시상(상금 3인 10.000원씩), 일본 평론가 佐古純一郞 씨 초청강연.

 

이중에, <원고료 인상 건의문>건은 해설이 필요하리라 보여 몇 마디 적는다. 지금도 별로 나아진 것은 없지만, 30년 전 기독교 출판사의 원고료는 일반 출판사의 40% 수준에 미칠까 말까였다. 따라서 글을 써서 생활한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하였지만, 형극(荊棘)의 길인 순수문학의 길을 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 韓國크리스천 文學家協會에서는 이런 결의를 하고 다음과 같은 공문을 기독교계 언론사에 보내며 호소를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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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챤 문협 제4호

 

귀하

 

원고료 인상 건의에 대하여

 

문서전도의 사명과 기독교 문화 향상을 위해 헌신하시는 귀 기관의 노고에 대하여 충심으로 사의를 표합니다.

아뢰옵기는 이번에 우리 크리스천 문학가협회에서는 원고료를 인상해야 하겠다는 것을 절감하고 귀 기관에서도 적극 협조해 주시기를 건의하는 바입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한국문인협회에서도 ①산문 1매(200자) 당 300원 이상,시 1 편당 400원 이상, ②10매 이내는 10 매로 간주, ③원고와 원고료의 교환, 이상과 같이 건의한 바 있었습니다. 기독교 문서 활동 및 출판계의 어려움을 잘 알고 있는 처지이지만, 사회 출판계와 엄청나게 동떨어진 원고료를 그대로 감수만 할 수 없어 이렇게 건의하는 것입니다. 이미 많은 협조를 해 주셨지만, 앞으로도 길러주는 뜻에서 이번 기회에 결단을 내려서 적절한 액수로 원고료를 인상해 주신다면 이에서 고마움이 없겠습니다. 따라서 우리들도 한층 분발하여, 좋은 작품을 쓰기에 노력하겠습니다.

주님의 은혜 중 귀 기관의 무궁한 발전을 빕니다.

 

1967년 4월 일

 

韓國크리스천 文學家協會

회장 주태익

회원 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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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대한 교계의 반응은 아주 냉담했다. 그도 그럴 것이 잡지나 신문 모두 적자 운영을 하고 있고, 경영 악화로 문을 닫느냐 마느냐 하는데 원고료 타령이라니! 하는 말뿐이었다. 그래서 문학을 전업으로 하는 사람은 굶기를 밥 먹 듯했다. 평생 직장을 가지지 않고 시만 쓰며 살아 간 임인수(林仁洙)가 그랬다. 그는 필자의 조선신학교(朝鮮神學校) 선배로서 필자가 󰡔???새가정󰡕???이나 󰡔???기독교사상(基督敎思想)󰡕??? 잡지 편집장으로 있을 때는 누구보다 우선적으로 배려했던 필자이다. 그는 늘 시온 다방이나 전원 다방에 나와 친구들을 만나 차나 점심을 신세지면서도 추호도 비굴하지 않고 당당하던 그 선배였다. 그가 일찍 타계(他界)한 것도 당시의 예술지상주의자들이 가는 길을 간 것이다. 그의 장례 때 처음으로 그 집에를 갔던 고 석용원 회원은 ‘임인수 형은, 무서운 사람이야.’라고 필자에게 말하는 것이었다. ‘아 글쎄 집에 가 보니까 쌀이 없어 밥을 못 먹는 어려운 살림에, 책꽂이에는 최신간들이 없는 게 없더라니까.’ 그러며 ‘임형은 평생 시만 쓰며 소신껏 살다 간 사람’이라고 평하는 것이었다.

 

1968년, 새 해 벽두에 韓國크리스천 文學家協會에는 슬픈 사건이 발생했다. 명예 회장이신 전영택 목사님이 뜻밖에 교통 사고로 별세하신 것이다. 1968년 1월 17일.

이 때의 일기를 옮겨 본다.

 

1월 17일 (수) 날씨 화창함.

아침에 눈을 뜨자 조간을 펼쳐 들었다. 낯익은 전영택 목사님 사진이 검은 띠에 둘려 신문에 실려 있질 않은가!

이게 웬 일인가. 어제도 뵌 어른이 Corona 차에 치어 별세하셨다니...

인간의 한계성이 다시금 가슴속에 육박해 온다.

생전의 그 다정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낮에 문상을 갔다. 노부인의 애절해 하는 모습이 가슴 아프다.

주인 없는 댁에를 가니 쓸쓸하기만 하다.

 

나도 언젠가는 갈 것이다.

어디서 언제, 어떤 모양으로 갈 것인가?

순간 순간을 경건한 마음으로 진지하게 살아야겠다.

사랑하는 목사님의 죽음 앞에서 옷깃을 여민다.

내가 죽을 때의 모습이 뭇 사람에게 조롱거리가 되지 않게,

주께 영광을 돌리는 죽음이고 싶다.

 

1월 20일 (토) 날씨 흐림

늘봄 田榮澤 목사님 장례식, 貞洞敎會에서 (10:00 AM)

 

【시】

 

늘봄을 기리며

오 소 운

 

그 仁慈하시던

生前의 모습

눈에 선하네.

 

그 多情하시던

牧師님 音聲

귀에 쟁쟁하네.

 

아, 나를

끔찍이도 아껴주시던

牧師님 생각에

가슴이 아프도록 메어 오네.

 

牧師님,

고이 잠드소서. 주님 품에!

하늘 나라에서 뵈오리다.

 

<제2회 정기 총회>

제2회 정기 총회가 1968년 7월 3일 하오 6시 40본에 초동교회에서 열렸는데, 참석자는 17명, 위임자 5명이었다. 임원 명단을 보면:

■제2대 회장: 이종환(李鍾桓)

부회장: 주태익, 이범선, 상무이사: 김경수, 각 분과 위원장: 시; 황금찬, 소설; 이범선, 평론; 김우규, 희곡; 이보라, 수필; 조향록, 아동문학; 박화목, 감사: 조남기, 석용원

 

이 해의 주요사업 계획:

 

 

1. 문학 강좌 개최

2. 크리스챤 文學賞 제정

3. 신문학 60년 심포지움

4. <크리스챤 文學> 지를 월간으로 하는 문제

5. 전영택 목사님의 묘비를 건립

6. 어린이 월간지 <새벗> 폐간을 보류해 달라는 결의문을 기독교서회에 보내기로.

이중 전영택 목사님의 묘비는 1969년 1월 16일제 제막식을 했다. (모금액 84.300, 건립비 60.010원. 잔액 24.290원)

<基督敎文學>은 <크리스챤 文學>으로 題號를 바꿔 제2집 발행하였다(5월 20일). 「문학의 밤」(YMCA에서) 개최

 

<제3회 총회>

1969년 1월 30일 韓國크리스천 文學家協會 제3회 총회가 기독교서회 회의실에서 개최되었다. 참석자는 11 명인데, 새로 난 임원은 다음과 같다.

■제3대 회장: 임옥인(任玉仁)

부회장: 황금찬, 주태익, 상무이사: 김경수, 각분과 위원장: 시;이상로, 소설; 이범선, 수필; 조향록, 희곡; 이보라, 아동문학; 박화목, 평론; 김우규, 감사; 석용원, 조남기

주요 사업 계획: 황금찬 시집 출판 기념회(1969년 7월 20일 개최)

 

<제4회 총회>

1970년 3월 7일 韓國크리스천 文學家協會 제 4회 총회가 종로 2가 91번지 대한기독교서회 회의실에서 열렸는데, 참석 인원 17명으로 신임원은 다음과 같다.

■제4대 회장: 임옥인(任玉仁)

부회장: 황금찬, 이종환, 상무이사: 조남기, 각분과 위원장: 시;이상로, 소설; 이범선, 평론; 김태규, 수필; 조향록, 희곡; 주태익, 아동문학; 석용원, 감사; 김태규, 유안진

 

주요 사업:

 

 

1. 좌담회

때: 1970. 6. 27.

곳: 기독교 시청각교육국 국장실

주제: 「기독교 문학의 오늘과 내일」

참석자: 임옥인, 황금찬, 이범선, 조향록, 김우규, 이종환, 조남기, 주태익, 이상로

2. 전국 순회 문학 강연회

때: 1970. 10월 - 11월

곳: 서울, 인천, 대전, 부산

◇서울: (괄호 안은 강사)

① 답십리교회, 전국 기독교 대학생 연합회(임옥인, 조남기, 김영수)

② 중앙신학교 강당(김현승, 임옥인)

③ 신당동교회, 남녀 청장년회(임옥인, 황금찬)

④ 덕성여대 기독학생회(임옥인)

⑤ 미8군 수양관, 육군 기독장교단(임옥인)

◇인천:

인천 제3교회, 인천지구 교역자 연합회(임옥인, 조남기)

◇대전:

① 대전대학(임옥인, 조남기)

② 대전보육대학(임옥인, 조남기)

3. <크리스챤 文學> 제3집 발행

<주요 내용>

【시】박두진, 이상로, 오신혜, 이수복, 정기환, 황금찬, 윤혜승, 조남기, 김경수, 김태규, 황양수, 주정애, 전재동, 유안진

【동시】황광은(유작)

【소설】임옥인, 황영찬

【동화】이윤자

【희곡】이 반

【수필】김재준, 조선출, 김준섭, 조향록, 안병욱, 안병무, 최옥자, 임택진

【평론】전대웅, 김영수, 김희보

【좌담회】韓國基督敎文學의 오늘과 내일(이종환, 황금찬, 조향록, 이범선, 주태익, 조남기

 

<크리스챤 文學> 제3집은 대한기독교서회 조선출 총무의 도움으로 빛을 보게 되었는데, 편집을 맡은 조남기 상무이사의 편집후기의 일단이 마음을 울린다.

 

 

...◇初代 常任理事였던 石庸源 氏가 이 冊이 나올 때마다 하나씩 會員이 世上을 떠나간다고 목을 놓아 울더니만, 정말 이게 무슨 偶然일까? 올해 들어 그 後職을 이어 받고 그 동안을 아무 일도 없다. ‘이번 호에야 설마...’ 했더니 故 林仁洙, 田榮澤 會員에 이어 또 어이 된 일인가. 兒童文學家인 黃光恩 牧師가 突然 世上을 떠났다. 그렇게도 이 冊이 나온다고 좋아하고, 原稿까지 쓴다고 서둘던 黃 牧師가.......그의 마지막 遺稿인 童謠 「까치」를 실어 이에 弔意를 표한다.

 

위의 편집후기를 쓴 조남기 목사는 물론 석용원 회원도 이미 고인이 되었다.

 

 

 

 

‡회․고․록*‡

 

 

한국크리스천문학가협회의 어제

 

오 소 운

 

제5회 총회

1971년 1월 13일, 한국크리스천문학가협회 제5회 정기 총회가 종로구 장사동 182 세운상가 4층에 있는 중앙신학교에서 모여 임원을 개선하였는데, 당일 회장으로 추대 예정인 김현승 시인은 위임장만 보내고 불참하였다. 나도 위임장만 보내고 참석치 못했다.

 

당시 나는 미국 교회협의회(NCCC)의 장학금으로 일본 유학을 마치고, 1969년에 귀국하여, 본직인 대한기독교계명협회(大韓基督敎啓明協會, The Korean Christian Literacy Association)의 편집인으로 복직되었으나, 미국 NCC 방침에 따라 계명협회와 기독교서회가 합병을 하는 바람에, 기독교서회 직원이 되어, 대한기독교서회 편집부에서 [대중의 책(Popular Book)] 편집 책임자로서 일하던 중, 뜻하지 않은 사기사건에 휘말려 일시 사직했다가, 억울함이 밝혀져 월간 [교회학교 새벗] 잡지의 보급책을 맡아, 전북 이리(裡里)에 가서, 전북 지역의 주일학교 교사들을 모아놓고, [교회학교 새벗]을 기독교교육에 어찌 이용할 것인가를 강습하고 있었기 때문에 총회에 참석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 날 선임된 임원 명단은 다음과 같다.

 

▲제5대 회장: 김현승(金顯承)

부회장: 이상로(李相魯), 이범선(李範宣)

상무이사: 김태규(金泰奎)

시분과 위원장: 황금찬(黃錦燦)

소설 분과 위원장: 이종환(李鍾桓)

희곡분과 위원장: 이보라(李保羅)

평론분과 위원장: 김우규(金佑圭)

아동문학분과 위원장: 박화목(朴和穆)

수필분과 위원장: 조향록(趙香祿)

외국문학분과 위원장: 김영수(金榮秀)

감사 조남기(趙南基), 석용원(石庸原)

등이었다.

 

이 해에 한 사업을 보면 다음과 같다.

I. 고 김말봉(金末峰) 여사의 10주기 행사

때: 1971년 2월 9일

곳: 예총회관

기도: 조향록 목사

조사: 김재준 목사

강연: ①말봉의 문학-김우규

② 말봉의 인간-이종환

 

II. 제1회 문학 심포지엄

때: 1971년 10월 27일-28일

곳: 종로 5가 기독교회관 대강당

주제: 문학과 신학

 

연제 및 강사:

① 문학과 신학과의 만남-문익환

② 한국 현대소설에 끼친 기독교의 영향-김우규

③ 한국 현대시에 끼친 기독교의 영향-김영수

④ 한국 현대문학에 끼친 토착 종교의 영향-김 현

참가 회원: 매일 300명, 연 600명

후 원: 한국신학대학협의회 및 가타 몇몇 기관에서 재정 후원.

 

III. 출판 기금 조달

1971년 10월에 김현승 회장이 회지 발행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한 끝에, 금성문화사에서 출판 가획한 [文學聖書]의 편․저작권을 본 협회가 얻어, 편․저작권비로 일금 30만원을 받아 옴.

 

IV. [크리스찬 문학] 제4집 발행

국판 100면으로 색도 표지, 호화 장정.

책임편집: 박화목

편집위원: 김현승, 이상로, 이보라, 조남기, 김원식, 김태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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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대의 참고를 위해 [크리스찬 文學] 第4輯의 目次를 漢字 사용 그대로 옮겨본다.

 

發刊辭:........................................金顯承(9)

小說:

症狀만은 아니다..........................李鍾桓(61)

皇帝의 꿈.....................................吳昇在(70)

人間邊地......................................全純蘭(81)

戱曲:

두 사람(單幕)..............................李 盤(91)

************************************

大聖山 시절

故 田榮澤 先生을 생각함....................朱泰益(101)

************************************

詩:

感謝하는 마음.............................金顯承(41)

바 람...........................................朴斗鎭(42)

꿈 결...........................................오신혜(43)

저녁 안개(外一篇)...........................朴和穆(44)

生 活...........................................張壽哲(46)

永訣式.........................................申瞳集(47)

젖은 詩語(外一篇)..........................石庸原(48)

조용한 湖水.................................黃錦燦(50)

信號燈 앞에서..............................趙南基(52)

祈 禱...........................................盧榮壽(53)

어느 外國人 神父..........................金京洙(56)

가을 바다(外一篇)...........................朴根瑛(54)

밤 낚시........................................全在東(57)

아름다운 叛逆..............................黃希榮(58)

時 間...........................................廉天錫(59)

餘白의 詩.....................................曺原煥(60)

隨筆:宗氏.....................................嚴堯燮(27)

집 념...........................................咸處植(28)

남편 덕.........................................朴贊一(31)

旅行과 하늘..................................成耆兆(33)

牧歌的 幻想.................................尹春炳(34)

하나님과 하느님...........................최운걸(37)

매력의 회로.................................李保羅(39)

評論:

神과 現代文學과 野獸...........李廷基(10)

詩에서의 撞着語法의 機能....金榮秀(20)

書評:............(104) 심포지움:...........(106)

表紙․目次․컷 金光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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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문학 심포지엄

(강연요지를 당시의 자료에서 옮겨 싣는다.)

 

□10월 27일:

1. 神學과 文學의 만남

文 益 煥(韓神大 敎授)

 

신학이란 본래 문학 중의 문학인 성서의 산물이다. 문학의 옷을 입었던 이스라엘 민족의 생생한 하나님 경험이, 헬라의 논리와 만나면서 신학이 탄생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학과 문학은 새삼스럽게 만나야 하는 서먹서먹한 사이가 아니라, 혈연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신학과 문학은 꽤나 서먹서먹한 사이가 되어버려서 새삼스럽게 통성명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한국에서는 더욱 그렇다. 좀 나아지기는 했어도 한국 교회의 반(反) 문학적인 바탕은 쉽사리 고쳐질 것 같지가 않다. 이렇게 신학과 문학이 유리(遊離)된 데는 그 책임이 전적으로 신학 편에 있다. 논리적인 일관성으로 체계화된 어떤 한 신학이, 시대와 장소를 넘어서 사람들의 사고(思考)를 통제하게 될 때, 신학은 문학의 적(敵)이 될 수밖에 없다. 문학은 개성(個性)과 자유(自由)를 존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학과 문학의 유리(遊離)는 불행하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참’과 ‘좋음’만을 문제삼아오는 동안, 신학은 ‘아름다움’에 눈을 돌릴 겨를이 없었다. 그런데 문학을 포함하는 예술이, 신학의 횡포에서 벗어남으로써 비로소 그 ‘아름다움’이 빛나기 시작한 것이다. 서구(西歐)의 신학은 아직까지도 ‘아름다움’을 그 주제로 다루지 못하고 있다. 이 점에 있어서, 자연을 심미적(審美的)으로 보는 동양의 시각이, ‘아름다움’의 신학적 의미를 줄 수 있지 않을까?

 

문학이 신학에서 독립함으로 해서, 비로소 신학은 인간을 신학적인 편견 없이 보는 눈을 갖출 수 있게 된다. 얼굴마다 다른 것처럼, 사람마다 개성이 다르다는 것, 사람마다 문제의식이 다르다는 것, 꿈과 아픔과 즐거움도, 사람마다 다르다는 것을 보는 눈을, 신학은 갖출 수 있게 된다. 인간을 구원(救援)의 대상으로 얕보기만 하던 신학이, 인간을 존경하면서 사랑하는 눈을 갖출 수 있게 된다는 말이다.

르네상스와 함께, 신학의 횡포가 끝나면서, 신학과 문학의 사이가 서먹서먹하게 되었지만, 실상 그것은 다행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아직도 신학과 문학은 제대로 통성명도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신학은 아직도 고자세(高姿勢)를 견지하고 있고, 문학은 아직도 신학을 의아한 눈으로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신학을 전달하는 매개(媒介)로 문학을 이용하려는 신학이 아직도 있다면, 그것은 중세기의 생리를 버리지 못한 것일 것이다.

 

문학을 포함한 모든 문화 활동은, 인간의 궁극적인 관심의 표현이요, 신학은 거기 대한 대답이라는 틸리히(P. Tillich, 필자 註) 식의 문화신학(文化神學)은 어떠한 것일까? 이것이 버려야 할 신학의 터무니없는 고자세다. 문학을 포함한 예술이 우선 ‘아름다움’에 대한 신학적인 해명이 있어야 할 것이다. 헬라의 조형미술의 아름다움으로 기독교 신앙을 표현한 미켈란젤로가 “나는 창조주의 완전을 조각하고 있다.”고 한 말은 음미해 볼 만한 말이 아닐까?

 

2. 韓國 現代小說에 끼친 基督敎의 影響

金 佑 圭(文學 評論家)

 

신문학 초창기의 춘원(春園)이나 전영택(田榮澤)으로 비롯하여, 기독교와 혈연관계를 맺어온 작가들을 우리는 적잖이 기억하고 있다. 이들의 작품은 우선 기독교 신앙의 한국적 양상(樣相)에 대한 검증에, 구체적인 사례를 제공해주고 있다. 또 지금까지의 비평적인 논의 역시, 주로 이러한 선상(線上)에서 제기되어 오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은 신학이나 비종교학적인 관심사(關心事)일지언정, 문학비평적인 작업은 아니었다. 따라서, 이제 우리에게는 그보다도 기독교 신앙이 작자들의 의식 속에 침윤(浸潤)되고 있는 가를 검증해야 할 하나의 과제가 주어지고 있다. 이것은 기독교적 테마를 소설 속에서 어떻게 소화․처리해 나갈 것인가 하는, 기독교적인 소설의 가능성을 타진해보는 전초작업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러한 논의에는 진작부터 스스로 하나의 한계가 있다. 그것은 한국인의 기독교 신앙 자체의 한계이면서, 동시에 그것과 문학과의 함수관계(函數關係)에서 제기되는 한계이기도 하다.

 

일찍이 기독교가 이 땅의 근대화의 추진체로서 담당했던 점을 높이 평가하는데 인색할 필요는 없다. 도처에 용립(聳立)하는 십자가,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근대화의 증인이요, 수난(受難)의 계절에서 마멸(磨滅)될 뻔했던 민족의식의 마지막 보루(堡壘)를 제공해준 기념비이기도 하다. 그러나, 십자가는 오늘날 그 존재 이유가 그런 감상적인 회고 속에서 연역(演繹)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생활권 안에서 그처럼 적지 않은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십자가는, 그러나 우리의 의식 구조에서는 외곽으로만 돌고 있다. 이것은 생활 전통의 문제이기도 하리라. 우리는 원래 신(神)이 없는 이방(異邦)의 주인이었으니까. 도대체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생(生)의 이원적(二元的)인 모순을 입체화시킬 줄 모르는 백성이다. 그러니, 신앙이 우리의 의식구조의 내측(內側)에 ‘깊이의 차원(次元)’을 확보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생활 인습에는 어느 만큼 파급(波及)되어 있으면서도, 아직 지성(知性)의 주체적 수용이라는 절차를 미필(未畢)한 기독교는, 이 땅에서 생활과 관념의 괴리(乖離)에서 오는 자가당착(自家撞着)을 얼버무린 채 공존하는 기묘한 현상을 빚어내고 있다. ‘크리스챤’과 ‘작가(作家)’가 별개의 양식에서 영위(營爲)되고 있는 사례도 그 좋은 예이다. 기독교신앙이 문학적 지성의 적극적인 근거로 다져지지 못하고 있다는 증좌(證左)다. 이러한 문제는 기독교 소설을 쓰려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부딪치게 되는 숙명적인 장벽이요, 또 고민이기도 하다. 이것은 본래 신(神)이 없는 세계, 따라서 드라마를 찾을 수 없는 세계가 가져다주는 고민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우선 이러한 고민과의 대결이요, 그 대결을 문학의 과제로 끌어들이는 일인 것이다. 요컨대 신부재(神不在)의 생활 속에 놓인 존재의 양식에 조명을 비추어 그 참된 리얼리티를 해명하는 일이라 하겠다.

 

□10월 28일

韓國 現代詩에 끼친 基督敎의 影響.

金 榮 秀(文學 評論家)

 

이 강연의 목적은, 한국 근대사에서 기독교적 전통과 문학적인 전통이 상호 작용하여, 각기 그 표현과 의미내용을 풍부하게 한데 대한 공헌을 찾아보고, 여기에서 종교적 충동(衝動)과 미적(美的) 충동과의 사이에서의 상호작용의 면(面)과, 한국 시(詩)에서도 기독교는 시인이 자기의 체험을 분류하는 경우의 이상적인 방법이 되어져 있다는 것을 실증하는데 있다. 이것은 시적인 것과 종교적인 것과의 융합(融合)이 오늘의 시인들이 추구하고 있는 통일과 질서의 형식을 미적(美的)으로 실현하는데 있어서, 결실이 풍부한 방법의 하나가 될 수 있다는 문학적 신념이다.

 

한국 근대시(近代詩)와 기독교와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역사적 전제(前提)가 필요하다. 이것은 기독교의 영향의 배경과 범위를 추출하는데 중요한 근거가 된다.

 

 

1) 기독교가 전래(傳來)되기 전에 한국에는 다른 형태의 서양문명이나 서양의 세속적 물질문명이 들어와 있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기독교의 복음에 부착(附着)되어 들어온 서양문화의 하나의 형태가, 한국에서는 서양문화의 대표적인 규범(規範)이 되었다.

 

2) 이러한 문화운동이 기독교학교를 매개(媒介)로 하여 보급되었다. 창가(唱歌)의 진원지(震源地)가 기독교학교였다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라 할 수 있다.

 

3) 가장 중요하고도 한국문학의 발전을 규명하는데서 거의 간과(看過)되어온 사실은, 성서(聖書)의 번역이 한글 문장의 국어화의 기대(機臺)가 되어왔다는 사실이다. 소설문장의 형성은 물론 초기시의 표현 문제를 볼 때, 성서 문체의 영향이 짙게 나타나 있다. 더욱이 성서는 각 문학 장르와 그 문체(文體)를 보유하고 있다는 점에서였다.

 

4) 기독교가 근대 한국의 역사적 리얼리즘이 되었다는 점이다.

한국시(韓國詩)에 대한 기독교의 영향을 서구(西歐) 시에서와 같이 신학적인 체계로 규명해간다는 것은 무리이다. 한국교회 특히 개신교의 경우는, 문학을 인생에 대한 멜로드라마적 태도로 거부해 왔다. 이에 따라서 근대시에 대한 기독교의 영향은, 신학적인 전통에서가 아니라 신구약적인 도식(圖式)으로 그 사상적 굴절(屈折)을 규명할 수 있다는 말이다.

 

주요한(朱耀翰)의 [불놀이]에 시적(詩的)인 것과 비(非) 시적인 것이 공존하는 표현에서, 성서의 영향과 기독교의 영향의 일반적 유형(類型)을 찾아낼 수 있다.

 

또 기독교적인 가치도식(價値圖式)을 시이해(詩理解)에서 요구하는 김현승(金顯承)과 박두진(朴斗鎭)에서, 기독교사상이 시적체험(詩的體驗)을 창조의 신화(神話)와 탐구(探究)의 신화로 계층화(階層化)시키고 있고, 문학적 전통과 기독교적 전통이 이들의 시에서 이루고 있는 상호작용과 그들이 표상(表象)하고 있는 종말론(終末論)의 도식으로 분류해볼 수 있다.

 

다음에, 종교적 충동과 미적 충동과의 상호작용과, 기독교가 시인의 체험을 분류하는 이상적인 방법이 될 수 있다는 예를, 임인수(林仁洙)와 김소월(金素月)에서 볼 수 있다. 김소월의 시는 전통적(傳統的)인 관점(觀點)에서보다, Neo-platonism의 영향으로 볼 때, 이와 함께 신교(新敎) 사상의 영향과 그가 보존하고 있는 형이상적(形而上的) 시의 특질이 어떤 것인가가 밝혀지고, 소월 시의 개성적 가치가 달라져야 함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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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註]

① 김 현 씨의 강연 요지는 본인이 제출 안 했음.

② 본래 원고는 국한문 혼용이었지만, 당시 필자가 한글 타자기로 옮겨, 순 한글로 프린트한 것을, 이 원고에서는 한자를 적당히 괄호 안에 다시 넣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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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록

 

 

한국크리스천문학가협회의 어제__끝

 

오 소 운

 

 

 

 

제6회 총회

크리스챤문학가협회 제6회 총회가 1972년 1월 22일, 종로 5가 기독교 회관 소강당에서 열렸는데 신임 임원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당시 공문 그대로 한자를 쓴다.)

 

회 장: 金顯承

부 회 장: 李範宣

朴和穆

상무이사: 金佑圭

시 분과 위원장: 石庸源

소설분과 위원장: 金光植

희곡분과 위원장: 李保羅

평론분과 위원장: 金榮秀

수필분과 위원장: 全澤鳧

아동문학분과 위원장: 柳聖允

외국문학분과 위원장: 文益煥

감 사: 趙南基  金泰奎

 

이 해에 한 사업은 다음과 같다.

1. <크리스챤문학> 제5집 발행

2. 전국 주일학교 학생 글짓기 대회

3. 이상로 회원의 치료비 모금 운동

4. 정관 개정

5. 사무국을 신설, 간사직을 두다.

초대 간사  李盤

 

위의 사업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하면;

 

<크리스챤문학> 제5집은 면수를 늘려 132면으로 하고 목차도 옵셋으로 하였는데

특집은 「尹東柱의 人間과 文學」으로 하였다.

 

그 목차를 보면;

 

<創作>

碑石李範宣

풀뿌리 敎會吳昇在

에이프릴 푸울金龍雲

어느 癌 환자의 죽음尹男慶

춤추는 마을이현주

울고 있는 물고기吳小雲

<나와 基督敎>

精神의 搖籃金東里

<詩>

사탄의 얼굴金顯承

봄 果樹園 外一篇朴和穆

나의 집黃錫燦

紅疫金京洙

마음의 江黃希榮

아담의 後裔趙南基

잎이 지듯朴根瑛

春雪朴利道

어떤 自畵像 外一篇全在東

廉天錫

<특집: 尹東柱의 人間과 文學>

太初의 終末과 만남文益煥

人間 尹東柱의 片貌鄭炳昱

東柱와 詩人의 逆說 高錫珪

尹東柱의 少年時節金楨宇

尹東柱 遺稿 未發表作 三篇

尹東柱 關係 硏究文獻

<隨筆>

二月이 오면전택부

藏書와 書齋成甲植

牧師와 돈林澤鎭

六番地朴贊一

童心과 宗敎柳聖允

또 하나의 연봇대金禧慶

<評論>

韓國 信仰詩의 位相金榮秀

韓國基督敎文學과 人間像金禧寶

現代 美國文學에서의

프로테스탄티즘 金玄齋

會員 名單

 

 

그런데 이번에는 회원들의 글도 원고료를 지불하였다. 글을 써서 먹고 살아가는 소위 ‘글쟁이’들의 잡지에서 원고료를 주지 않으면서, 다른 잡지나 신문더러 원고료를 올려 달라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주장이 받아들여져 원고료를 지불하고 나니, 제작비가 바닥나 제작 책임을 맡았던 金榮秀 회원은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고, 뒤늦게야 책이 나오게 되었는데, 그는 편집 後記에서 이렇게 푸념하고 있다.

 

 

“돈이 없어서 일을 못하고, 거기에 게을러서 더욱 일을 못하는 곳이 우리 단체인 것 같다.

없는 돈을 꾸려 원고료를 주고 나니, 인쇄하여 책을 내놓을 비용이 없다. 그러다 보니, 한 해는 거의 다 가고, 늦게나마 맨주먹으로 서둘렀으나, 겨우 3개월만에 해산을 보게 되었다.

산고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이렇게 교계와 몇 회원들의 성원으로 창피는 면하게 되어 다행스럽다. 다음에는 이런 꼴을 되풀이하지 않을 분이 맡아 일을 해야 하겠다...”

어느 단체나 남모르게 희생하는 사람에 의해 존속된다고 하지만, 특히 우리 단체가 그렇지 않나 하는 말에 나도 동감이다.

 

2. 전국 주일학교 어린이 글짓기 대회

때: 1972. 5. 7.

곳: 기독교회관 소강당

시상식:일체의 경비를 柳聖允 회원이 담당3. 와병 중인 李相魯 회원의 치료비 모금

호사가인 金榮秀 회원이 주동이 되어 모금하여 30.000여 원을 전달하였다. 회원들의 연회비가 1.000원이던 시절의 일이다.

 

제7회 총회

1973년 2월 26일, 크리스찬문학가협회의 제7회 총회가 서울 종로 2가 대한성서공회 회의실에서 열렸는데, 새 회장으로 박목월 시인을 추대하자고 하는 의견과, 현재 회원 중에서 뽑자는 의견이 있어, 장시간 토의 끝에 박목월 시인을 회장으로 추대하고, 다음과 같이 임원을 개선하였다.

회 장: 朴木月

부 회 장: 黃錦燦  朴和穆

상임이사: 金榮秀

시 분과 위원장: 金京洙

소설분과 위원장: 金光植

희곡분과 위원장: 朱泰益

평론분과 위원장: 金佑圭

아동문학분과 위원장: 柳聖允

외국문학분과 위원장: 鮮于楠

수필문학분과 위원장: 全澤鳧

감 사: 李保羅  石庸源

 

이 해의 사업은 다음과 같다.

1. 크리스찬문학 제6집 발간

편집위원:朱泰益, 黃錦燦, 柳聖允, 吳小雲

제작 책임: 吳小雲

그 내용을 보면;

<發刊辭>朴木月

<詩>

밤 소나기 外一篇朴和穆

돌부처吳丙洙

외로운 祝祭金京洙

過速趙南基

三變章高眞淑

訥言朴利道

아침咸惠蓮

나비의 幻像金元植

山居記金南植

自我文永陸

<라디오포엠>

하늘이여 들어주십시오全在東

<創作>

마음의 빛을尹男慶

<隨筆>

江原道趙善出

약속이 붙은 별명林澤鎭

誤診朱泰益

제멋에 산다張河龜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고全澤鳧

韓國의 美術成甲植

돌 有情尹春柄

牧會者의 辯石浩仁

李用雨 畵伯黃錦燦

南支那海 죽움 三重奏高桓圭

<兒童文學 特輯>

호들기이윤자

이상한 거울오소운

두레박유성윤

어떤 아버지 어떤 아들박승일

동시 朴京鍾

<희곡> 하루의 첫날원익환

<평론>

文學과 神學金榮秀

眞實論과 啓示論 I. A. 리챠즈

會員 住所錄

後記

 

2. 교회 순회 문학 강연

*1973. 4. 1(주일)

청량리교회(임택진 회원 시무)

강사: 박목월 “현대 시의 이해”

*1973. 6. 17(주일)

양평동교회(이정학 목사 시무)

강사:황금찬 “찬송가 가사의 시적 고찰”

오소운 “어린이 찬송가 가사 고찰”

 

제8회 총회

크리스찬문학가협회의 제8회 총회가 1975년 1월 25일 하오 3시, 종로 2가 서울 YMCA 친교실에서 열렸는데, 임택진 목사 기도 후 박목월 회장 사회로 회무 처리에 들어갔다. 상임이사를 대신하여 오소운 임시 서기가 회원을 점명하니, 33 명이 출석하여 회장이 개회를 선언하다.

이 날 개선된 임원은 다음과 같다.

회 장: 朴木月

부 회 장: 黃錦燦  朴和穆  趙南基

상임이사: 柳聖允

시 분과 위원장: 金京洙

소설분과 위원장: 李鍾桓

희곡분과 위원장: 李保羅

평론분과 위원장: 金榮秀

아동문학분과 위원장:石庸源

외국문학분과 위원장:金禧慶

수필문학분과 위원장:全澤鳧

감 사: 金泰奎  金元植

사무국장: 吳小雲

 

당시 나는 월간 <기독교교육> 편집장으로 있으면서, 통일공과, 계단공과, 여름학교 교본 편집에 바쁜 나날을 보내는 한편, 밤에는 朴和穆․石庸源 회원과 함께, 한신대 병설 선교신학 대학원에 다니느라 정말로 눈 코 뜰 사이 없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제1차 이사회에서 사무국장으로 임명하였다는 朴木月 회장의 통고를 받고 누차 사양하였으나, 상임이사로 선임된 柳聖允 회원 마저 ‘오형이 안 도와주면 난 일 못해’라고 하며 반 강제적으로 밀어붙였다. 사실 당시 대한피혁이라는 큰 회사의 사장으로 있는 柳聖允은 정말로 바빴다. 하는 수 없이 나는 그 일을 맡았다.

 

회장에 중임된 朴木月 선생은 어느 날 나를 자기 집으로 초대했다. 당시 나는 원효로 2가에서 마포로 넘어가는 속칭 「사창 고개」에 살았는데, 박 회장의 집은 원효로 4가였다. 퇴근길에 댁으로 찾아가니 많은 회원들이 와 있었다. 朱泰益 黃錦燦을 필두로 하여 文益煥, 全澤鳧, 石浩仁, 李保羅, 朴和穆, 石庸源, 그 밖에도 많은 회원들이 참예하여 저녁을 먹게 되었다. 木月 선생 사모님은 기독교장로회 효동교회의 장로님으로서 손님 접대가 아주 푸짐하였다. 그야말로 상다리가 부러지게 차린 음식을 앞에 놓고, 文益煥 목사가 기도를 하는데, 단 5초도 안 되는 기도를 하였다. 지금도 거의 그 문구를 외운다.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리는 사람이 많고, 먹을 게 있어도 병들어 먹지 못하는 사람이 많은데, 저희에게 건강을 주시고 또 이렇게 좋은 음식을 주시니 하나님 감사합니다.’ 대개 이런 내용이었다.

 

우리 나라에서는 음식 앞에서 식사 기도를 할 때, 대개가 장황하게 하고, 그 가정에 복을 내려 달라고 하나님께 비는 게 상례고, 그런 기도에 익숙해진 회원들은 뭔가 미흡한 표정으로 눈들을 떴다. 그러자 오리 全澤鳧 선생이 만면에 웃음을 띠고 입을 열었다.

 

“문 목사님, 참 기도 잘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축복 기도에 익숙해 있기 때문인지, 그 기도만으로는 어딘가 허전합니다. 석호인 목사님도 오셨으니, 석 목사님께서 이 가정을 위하여, 크리스찬문학가협회를 위하여 축복 기도를 해 주십시오.”

 

좌중에 잔잔한 미소가 흘렀다. 그러자 석호인 목사가 일어나 다시 그 가정을 위하여, 협회를 위하여 열심히 축복기도를 하였다.

 

이렇게 하여 식사가 시작되자 사모님이 은주전자 하나를 들고 들어와 자랑을 하신다.

“여기 松葉酒가 들어 있습니다. 지난봄에 제가 시골에 가서 솔 이파리 세 가마니를 직접 따서, 순 솔잎만으로 숙성시킨 것인데, 향이 기가 막힙니다. 약간 알코올 성분도 생겼습니다. 세 가마니에서 요 주전자 하나 밖에 안 나와, 다 드릴 수는 없고 맛만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며 도토리 껍질 만한 작은 잔에 약 2 그람 정도가 될까말까 하게 따라 주시는 것이었다. 말석에 앉은 나에게 오기도 전에 온 방안에 솔잎 향기가 그윽하여, 그 냄새만으로도 황홀경에 이르는 것 같았다. 여기 저기서 찬사와 감탄이 새어 나왔다. 모두 한 마디씩 讚辭를 보내는데, 말로써 남의 心琴을 울리는 詩人들의 찬사이니 오죽하랴!

 

찬사를 받으신 사모님이

“난생 이런 찬사는 처음 받아 봅니다. 그러니 한 순배 더 돌리지요.”

또 사방에서 찬사가 터졌다. 그러자 사모님은 너무 기뻐

“나두 모르겠다. 오늘 다 마시고 가십시오.”

하는 바람에 좌중에서 폭소가 터졌다.

 

분위기가 고조되자 木月 선생이 말했다.

“아, 정말 즐겁다. 이런 자리에 우리 오소운 장로의 노래가 빠지면 안 되지. 오형 한 곡조 불러 보시오.”

木月 선생은 당시 마포교회 장로인 나를 ‘오 장로’로 불렀다가 급하면 ‘오형’이라 불렀다. 나보다 나이가 15세나 위인데도 말이다.

 

노래 부르라는데 사양할 내가 아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朴木月 자사 김성태 작곡인 「이별의 노래」을 불렀다.

 

기러기 울어 예는 하늘 구만리

바람이 싸늘 불어 가을은 깊었네.

아아!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내가 즐겨 부르는 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자 木月 선생은 손을 홰홰 내저으며

“그 노랜 안 돼!”

하는 것이 아닌가! 사모님까지도

“왜 하필 그 노래를...그걸 들으면 이 분은 우시는데...”

라고 중얼거렸다.

 

이 노래는 박 선생의 첫사랑을 노래한 것이란다. 왜정 말, 일본 우체국장의 딸과 사랑에 빠졌으나, 양가의 반대로 이루지 못하고 해방을 맞아 생이별한 이별의 아픔을 노래한 것이 바로 이 「이별의 노래」였다.

1절이 끝나자 박수가 터졌다. 나는 2절을 계속 불렀다.

 

 

한낮이 끝나면 밤이 오듯이

우리의 사랑도 저물었네.

아아!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그러며 나는 박 선생을 바라보았다.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나는 이왕 내친 김이라 3절로 들어갔다. 나는 이 노래 중 3절을 가장 좋아하는데 그걸 뺄 수가 있는가.

 

 

山村에 눈이 쌓인 어느 날 밤에

촛불을 밝혀 두고 홀로 울리라.

아아!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木月 선생의 그 커다란 눈에 하나 가득 눈물이 고여 떨어지는 걸 나는 보았다. 분위기는 푹 가라앉았다. 파티가 끝나고 나오는데

“에이, 왜 하필 그 노래를 불러 가지구 회장님을 울려드려.”

石庸源이 나를 원망하자

“아냐, 오형! 잘 불렀어. 덕분에 오랜만에 눈물도 흘려 보았잖아.”

그러며 木月 선생은 내 등을 두드려 주는 것이었다.

 

이 해의 사업은 다음과 같다.

1. 크리스찬문학 제7집 발간

편집위원:朱泰益, 黃錦燦, 柳聖允, 吳小雲

제작 책임: 吳小雲

 

그 내용을 보면;

發刊辭朴木月

<小說> 商村短信金秉老

<戱曲>

偶像(一幕)朱泰益

북 놀이(한 마당)李保羅

<詩>

待春의 章張壽哲

가을 찬 비 外一篇朴和穆

교실에서黃錦燦

出埃及抄石庸源

달아 달아金京洙

사과 씨와 聖書金貞起

體驗趙南基

天使의 꿈을朴利道

詩人-포도원의 농부咸惠蓮

住所金世翊

季節素描 外一篇金時百

先知者朴鍾九

<童話>

비둘기柳聖允

눈 나라의 어린이들오소운

<作故 文友 回顧 씨리즈>

*林仁洙의 人間과 詩朴和穆

*舍兄 故 石浩仁 牧師의

文學 周邊石庸源

*畿湖的 선비 詩人

-素鄕 李相魯 先生의 片貌金元植

<隨筆>

이조 백자 항아리 같은 선비 정신全澤鳧

境界人金禧慶

人間性에의 文學李秀雄

늙는다는 것조성호

솔제니친과 예수조성현

책 이야기尹春柄

聖誕節에 읽고 싶은 詩金英一

天職張河龜

<평론>

李箱의 作品에 나타난 女性李明子

會員名單

편집 후기

 

 

나는 편집 후기에 이런 말을 썼다.

 

“옛날 이스라엘의 文人은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고 했고, 佛家에서도 人生無常을 얘기하지만, 정말 人生이 無常함을 다시금 느끼게 된다. 지난 한 會期 동안 우리 회원이 여럿 他界했다. 李相魯, 金顯承, 石浩仁, 그리고 이 글을 쓰는 도중에 巡步 李鍾桓 선생의 부음을 받았다. 人生누구나 한 번은 가는 길이지만, 살아 生前에 더 多情히 지낼 걸 하는 후회는 누구나 솟는 감정일 것이다.

 

 

만약 죽음이란 것이 없었던들, 어리석은 人間은 잠시나마 스스로를 돌아보며, 숙연해지는 일 마저도 없었을 것이라 생각할 때, 죽음까지도 그리스도 안에서 축복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文友들의 誠金으로 本號가 나오게 되었는데, 너무 늦어서 미안한 마음 금할 길 없다. 다음 배턴을 받는 편집자는 제 때에 해내리라 믿는다.

 

 

2. 기독교 시문학 현상 모집

종전에 하던 어린이 동시 현상 모집을 성인부까지 확대하여 실시하였다.

童詩部:

금상-문동신

은상-손미혜

동상-이영숙

一般部:

금상-오병학

은상-이성우

동상-유강국

심사 위원:

일반부: 박목월, 황금찬, 김경수

아동부: 박화목, 석용원, 유성윤

 

시상식: 1975. 5. 5. 종로 5가 한국 기독교회관에서 하고 작품은 월간 󰡔??기독교교육󰡕?? 7-8월호에 게재하였다.

 

 

3. 제5회 어린이 동시 현상 모집

금상-송정석(서울) “운동장에서”

은상-김낙현(부산) “부지런한 어머니”

동상-유은영(전북) “우리 엄마”

 

심사위원: 박화목, 석용원, 유성윤

 

 

4. 중앙신학교 주최 문학 심포지엄 후원

때: 1976. 4. 21. 하오 7시

강사: 具常, 鄭乙炳

 

제9회 총회

(당시 공문을 옮겨본다.)

한국크리스찬문학가협회(회장 朴木月) 제9회 총회가 부회장 黃錦燦씨 사회로 1976년 4월 27일 하오 6시에 종로 5가에 있는 한국기독교회관 대강당에서 열렸다.

 

개회에 앞서, 지난 회기 동안 작고한 회원, 李鍾桓, 石浩仁, 金顯承, 이영도, 홍성영 회원을 추모하는 기도가 있었다. 상임이사 柳聖允씨의 사업보고에 이어, 事務局長 吳小雲씨의 會計報告를 받고, 임원 선거로 들어갔는데, 새로 選任된 임원 및 分科委員長 명단은 다음과 같다.

 

 

會 長:黃錦燦

副 會 長: 朴和穆, 趙南基, 石庸源

常任理事: 柳聖允

詩 分科 委員長: 咸惠蓮

小說分科 委員長:鄭乙炳

戱曲分科 委員長:李 盤

隨筆分科 委員長: 成甲植

外國文學分科 委員長: 鮮于楠

兒童文學分科 委員長: 朴京鍾

監 査: 金泰奎, 金元植

事務局長 : 吳小雲

 

■ 연재를 마치며

남아 있는 자료만으로 쓰다 보니, 누락된 부분도 많을 것이다. 있는 자료와 내가 겪은 일에만 의존하였기 때문이다.

 

다른 나라 사람들에 비하여 우리나라 사람들은 자료 정리에 소홀하다.

후대를 위하여 작은 것이라도 문서로 남기는 것이 얼마나 귀중한지

후배들이 알아서, 더욱 많은 자료를 남겨 주기 바란다.

 

 

37705

 

지금 흘러나오는 찬송 <사철에 봄바람 불어 잇고>는 

 

크리스천문학가협회 초대 회장님이신 고 전영택 목사님이 작사하신 것이다.

전 목사님은 나를 "친 아들보다 더 좋다" 고까지 하시며 사랑하셨다. 

 

 

회장님께

 

 

[겨울호] 286면에 있는 <역대회장> 순서가 잘못되었습니다.

제가 아는 대로만 정정하겠습니다.

 

 

初代 회장: 田榮澤(1958)

__________________________

 

再建 :

      1대 회장朱泰益(1967)

 

      2대 회장李鍾桓(1968)

      3대 회장林玉仁(1969)

      4대 회장 林玉仁(1970)

      5대 회장金顯承(1971)

      6대 회장金顯承(1972)

      7대 회장朴木月(1973)

      8대 회장朴木月(1974)

      9대 회장朴木月(1975)

    10대 회장 黃錦燦(19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