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꽁이의 찬양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해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사43:21)

[하나님이 주신 스승] 나운영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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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찬송가연구원

2005. 6.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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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주신 스승"

  나운영 박사

 


문하생· 오  소  운


 


♬·시작하면서


인간의 짧은 생애에서 누구를 만나느냐 하는 것은 그의 삶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다. 농맹아(聾盲啞) 3중고(三重苦)의 멍에를 벗어버리고 위대한 인물이 된 헬렌 켈러(Helen A. Keller, 1880-1968)가, 그의 스승 설리번(Anne Sullivan, 1866-1936)을 만나지 못했던들, 그는 한 중증(重症) 장애인으로서 한숨과 고통의 삶을 살았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나는, 내가 만일 나운영 선생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오늘의 내가 있었을 것인가 생각해본다.


인생행로에 있어 [만남]보다 더 중요한 게 있으랴! 그래서 사랑을 찾아 헤매는 젊은이들은 이런 노래를 즐겨 부른다.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그것은 우리의 바람이었어.

잊기엔 너무한 나의 운명이었기에

바랄 수는 없지만 영원을 태우리.


그런데 만남이 바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데 문제가 있다.


♬·내 인생은 나의 것인가?

한 때 민해경이 부른 [내 인생은 나의 것]이란 노래가 청소년들에게 폭발적으로 유행한 일이 있다.


내 인생은 나의 것, 내 인생은 나의 것,

그냥 나에게 맡겨주세요.

내 인생은 나의 것, 내 인생은 나의 것,

나는 모든 것 책임질 수 있어요.


정말 내 인생은 나의 것인가? 내 인생이 나의 것이 되려면 무엇보다 내 맘대로 할 수가 있어야 하는데, 글쎄… 조금만 생각해 보자.


① 내가 부모를 선택하여 태어났는가?

② 내가 여자로, 혹은 남자로 결심하고 태어났는가?

③ 내 모습·내 건강·내 지능·내 성격, 내가 선택한 것인가?

④ 내가 한국이라는 이 나라를 택하였는가?

⑤ 내가 21 세기라는 이 시대를 택하였는가?


아니다, 하나도 아니다. 모두가 창조주께서 내게는 한 마디 상의도 없이 하신 일이다.

그래서 장로교회의 창시자 장 칼뱅(Jean Calvin, 1509∼1564)은, 이 우주 안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예정](豫定, predestination)대로 진행된다는 [예정설]을 주창했다. 그의 예정설은 성경 도처에서 뒷받침되고 있는데, 대표적인 성구를 보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창세(創世) 전에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대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예정(豫定)하셔서,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은혜를 찬미하게 하셨습니다. (표준새번역 엡 1:4-6).


그렇다. 이 우주 만물과 우리 인간의 삶은 모두 하나님의 예정 안에 있다.


♬·예정설로 본 나의 생애

 

80을 넘어 90으로 가는 지금 내 인생을 되돌아보면, 완전히 하나님의 예정 안의 삶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다.

① 나는 모태에서 예수를 믿고 태어나신 부모님의 아들로 태어나, 내 뜻과는 상관없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1941년 선친 오연영 장로 (맨 왼쪽),  평양에서 열린 장로교 총회 참석 기념



② 나는 시를 좋아하여 국민학교 다닐 때 소월(素月)의 시를 읊조리며 다녔고, 하이네(Heinrich Heine, 1797∼1856)의 시에 푹 빠지기도 했다. 누가 이렇게 만들었는가?

 

국민학교 3학년인 1943년 어느 날, 일본인 교사가 일본의 전통 시 하이꾸(はいく, 俳句) 짓는 법을 가르쳤다.「운(韻)은 5.7.5」로 하고 계절과 짐승이 들어가야 한다. 일본에서 최고의 하이꾸 명인(名人)은 에도(江戸) 시대의 잇사(いっさ, 一茶)란 사람인데 그의 대표작은 이렇다. 하며 칠판에 잇사의 하이꾸를 썼다.

 

“痩せ蛙負けるな一茶これにあり。

  마른 개구리 지지 마라 잇사 여기에 있다.”

 

[5.7.5의 운]에 개구리가 나오니까 계절과 짐승이 나오고, 약한 자의 편을 들어 주니까 잇사의 정의로운 정신이 잘 나타나 있는 명작이라며 너희들도 지어 보라는 것이었다.

 

나는 시상(詩想)을 가다듬고 즉석에서 이런 시를 써서 앞으로 나가 칠판에 적어 놓고 발표를 하였다. 

 

“青空に ひばりさえずり 雲が散る。

푸른 하늘에 종달새 지저귀고 구름이 지네.”

 

“이 하이꾸는 [5.7.5.의 운]이요 종달새가 나오니까 계절과 짐승이 나온다.” 

일본인 교사는

“우리 학교에 <하이꾸의 천재>가 나타났다.”

며 맹꽁이를 치켜세웠다. 이것이 13살 어린 나의 최초의 시요, 이때 맹꽁이는 음악가와 시인이 되리라 다짐했다.

 

③ 나는 음악을 좋아하여 국민학교 2학년 때 방과 후 교실에 남아, [함부로 치면 1주일 정학 맞는 오르간]을 치다가 교장에게 들켰지만, 교장 선생님은 나의 재능을 인정하여 오르간을 맘대로 치게 하였고, 열 한 살 때 큰 매형이 가지고 온 바이올린을 배워, '3년 배운 나보다 한 달 배운 네가 더 잘 하니 이건 네 것이다' 하고 바이올린을 주는 바람에, 시골구석에서 혼자 깡깽이를 켜면서 [바이올린의 천재 파가니니]를 그리기도 했는데, 이게 내 맘대로 된 일인가?


 

오르간을 배우기 시작한 2학년 때, 맨 뒸들 오른쪽 끝이 필자


④ 아버지의 반대로 문학도 못하고 음악도 못하고 신학을 하게 되었는데, 신학교에 입학하자 음악 교수가 나운영 선생 아닌가? 선생님은 해방 직후 [건국의 노래]를 통하여, 뵙지는 못했지만 흠모하던 음악가셨는데, 그에게서 음악을 배우게 될 줄이야! 이 모든 게 우연일까? 절대로 우연이 아니다. 하나님의 예정이었다고 나는 확신한다.


지금도 나는 황소가 뚜벅뚜벅 걸어가는 듯한 무거운 저음으로 시작하는 E장조 4분의 4박자인 [건국의 노래]의 곡조는 물론 가사까지 외우고 있다.


삼천리 반도강산 새날은 밝아

찬란히 솟아 오른 역사의 태양

새로운 붉은 맥박 힘차게 뛰는

삼천만 한데 뭉쳐 새집을 짓세.

전 민족의 정의와 진리

오 건국에 피끓는 이 땅의 젊은아,

조국의 마음아!

 

♬·신학교에서 만난 나운영 선생님

 

1950년 6월 5일에 [조선신학교]는 개강을 하였다.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시간에 교가를 배우는데, 나운영 선생 작곡이 아닌가!


                      <왼쪽부터 필자, 나운영 박사, 김성호 목사>


   

조선신학교 교가


조물주 만드신 아름다운 동산에

선교의 불길을 일으켜보자.

신령한 은혜의 깊은 골 찾고

학문의 높은 봉 달아 올라서

교회를 섬기는 한 뜻만 위해

만세에 뻗어나라 조선신학교

세상을 구원하는 복음을 들고.

 

 

 

 

가사 첫 자를 세로로 읽어보니 [조선신학교만세]가 아닌가. 나는 이런 식의 답관체(踏冠體·acrostic), 혹은 이합체(離合體)라고도 하는 시를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 내가 신학을 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유재헌(劉載獻, 1905∼1951 납북) 목사님이 작사한 《복음성가》에 이런 답관체 노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가 창설한 조선수도원의 원가를 [믿는 사람들은 군병 같으니](389장) 곡조에 맞춰, 다음과 같은 답관체 두운(頭韻)을 써서 작사하였던 것이다. [강원도철원군갈말면 조선수도원은 우리의 한 제단이로다].


이 노래의 2절까지만 인용한다.


<1절>

강물로써 둘리운 제이 에덴은

원수 사탄이가 범접(犯接) 못하네.

도처(到處)마다 바위 굴이 있으니

철야 기도하는 겟세마네라.

<후렴>

  제단에 향불이 타고 오르니

  단상에 임재(臨在)는 빛나고 있다.

<2절>

원근각처 성도 이 제단에 와

군데군데 자리 잡고 앉아서

갈한 심령 상태 주께 고하면

말씀과 생명을 채워 주시네. (이하 생략)


  조선신학교 교가를 작사하신 김정준(金正俊, 1914∼1981) 목사님은 시인 목사님이라 나는 더욱 친근감이 들어 무척 따랐다. 김 목사님은 늘 새벽기도회를 인도하셨는데, 매일 성경을 한 장씩 읽고 묵상하는 글, 요즘 말로 QT 자료를 써서 발표하라 하셨는데, 나는 매일 발표하여 김 목사님의 총애를 받게 되었고, 부산 피난 학교에서는 근로 장학생으로 교수님 댁 도배반자를 해드렸는데, 그 동안 내가 쓴 시첩(詩帖)을 보여드렸더니 [소운(小雲)]이란 아호(雅號)까지 지어주셔서 평생 본명(信根)은 안 쓰고 이 이름을 쓰고 있다.

 

김정준 목사님이 주신 아호

 

  개강 후 첫 음악 수업 시간에 나는 맨 앞자리에 앉아서 나 선생님을 기다렸다. 강의 시작 전에 선생님은 "누구든지 한 분 기도하십시오" 하셨다. 말씀이 떨어지자마자 내가 기도하였다. 선생님은 분필을 드시더니 [音樂的으로 본 說敎論]이라고 달필로 써 놓으시고, 설교도 음악과 같이 형식을 갖추어 해야 하고, 빠르기와 셈여림을 섞어서 하여야 한다고 역설하시고는, 가까운 남대문교회 김치선(金致善, 1899∼1968) 목사님의 예를 드시는데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김 목사님은 Mezzo-forte로 시작하여 Crescendo하여 Fortississimo에 accelerando까지 하시고는, 마침내는 목이 쉬어 Pianissimo로 울면서 끝내십니다.

사실이었다. 당시 나는 찬양대를 지휘하는 박태준(朴泰俊, 1900∼1986) 선생과 명설교가이신 김 목사님을 존경하여 남대문교회에 자주 나갔는데, 목사님의 설교는 우국충정(憂國衷情) 어린 설교여서 젊은 나의 피를 끓게 하였다. 설교가 최고조에 달하면 목이 터져라 외치시다가 마침내 목이 쉬고, 감정이 복받쳐 울음을 터뜨리시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한국의 예레미야]라고 불렀다.

다음에는 김정준 목사님의 설교를 선생님은 이렇게 평하셨다.


교가를 작사하신 김정준 목사님은 Allegro로 시작하여 Presto로 끝내시는데, 그 분 설교를 Andante Cantabile로 하시는 김재준 목사님이 하시면 두 시간 이상은 하셔야 할 겝니다.


나는 너무나 재미있어 폭소를 터뜨렸는데 몇몇 학생들의 반응은 어리둥절 그 자체였다. Allegro니 Presto니, Rondo 형식이니 Sonata 형식이니 하는 음악 용어를 모르기 때문이었다. 이 때 강의 내용은 그 후 {제2 수상집}에 [음악인이 본 설교론]으로 활자화되었는데 그 내용을 일부 인용한다.

 

설교와 음악은 그 표현법이 매우 같다고 나는 생각한다. 즉 음악에 있어서는 무엇보다도 강약의 변화·속도의 변화·음색의 변화·고저의 변화·표정의 변화 그리고 형식의 변화가 절대로 필요한 것인데 이 모든 것은 설교에 있어서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이다.


첫째로 강약의 변화가 필요하다. 너무 작은 음성으로 설교를 하면 말을 잘 알아들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자연히 졸음이 오게 되고 또 이와 반대로 너무 큰 음성으로 설교를 하면 처음에는 긴장해서 듣다가도 머리가 아프고 차츰차츰 피로를 느끼게 되어 역시 졸음이 오게 된다. 이 사실을 생각해 볼 때 이것은 무엇보다도 강약의 변화가 없는 탓이라고 말할 수 있다. 즉 강약의 변화가 있어야만 때로는 듣는 사람의 마음을 긴장시키기도 하고 풀어 주기도 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서론은 보통 음성(Mezzo-forte)으로, 본론은 큰 음성(Forte)으로, 클라이맥스로 향할 때에는 점점 크게(Crescendo), 클라이맥스에서는 매우 크게(Fortissimo), 그리고 클라이맥스 직후부터는 점점 작게(Diminuendo), 결론은―열정적인 표현에 있어서는 매우 크게(Fortississimo), 심각한 표현에 있어서는 매우 작게(Pianissimo) … 이와 같이 자유자재로 강약을 조절할 수 있어야 될 것이다.


둘째로 속도의 변화가 필요하다. 너무 빠른 설교는 내용을 음미할 마음의 여유가 없으므로 듣긴 들어도 잘 알아들을 수가 없고, 또 그 반면에 너무 느린 설교는 긴장이 풀리고 잡념이 생기게 되므로 감동을 받기 어려운 것이다.


예를 들면 서론은 느리게(Andante), 본론은 보통 속도(클라이맥스로 향할 때에는 점점 빠르게(Accelerando), 클라이맥스 직후부터는 점점 느리게(Ritardando), 결론은―열정적인 표현에 있어서는 빠르게(Allegro), 심각한 표현에 있어서는 느리게(Andante)… 이와 같이 자유자재로 속도를 조절할 수 있어야 될 것이다.

 


<아래 사진은 1953년 김정준 목사님 도미유학 직전 부산 피난지 캠퍼스에서>


미국 유학 갈을 떠나시기 전 날, 김정준 목사님과 필자

강의가 끝나자 선생님은 광고를 하셨다.


"내가 지휘하는 성남교회에서 찬양대원을 모집합니다. 뜻이 있는 학생은 강당으로 3시까지 모여 오디션을 받기 바랍니다."


학장 송창근(宋昌根, 1899∼1950 납북) 박사가 시무하시는 성남교회는 캠퍼스 안에 있었고 신학교에서는 강당으로 쓰고 있었다. 9명이나 되는 베이스 응모자 중 두 명만 뽑았는데, 나는 까다로운 [예수의 이름 권세여](James Elder 작곡)를 불러 당당히 합격하였다.


오디션에 합격된 나는 기분이 우쭐했다. 당장 선배들과 다음 주일 찬양곡을 연습하였는데, 처음 보는 곡조였다. 김재준(金在俊, 1901∼1987) 작사 나운영 작곡의 [우리 교회]라는 신작 찬송이었다. 내가 선생님 작곡의 초연을 하는 것이다. 얼마나 으쓱했던지! 가사를 보자.


       · 우리 교회 ·

<1절>

기쁜소식 전파되며 제물이 바쳐지고

성삼위께 찬송드려 속죄 사랑 감사하니

하늘 영광 그윽타. 거룩한 곳 우리 교회.

거룩한 곳 우리 교회.


<2절>

하늘나라 땅에 심어 자라는 생명나무

아드님이 본체(本體)되고 우리들은 그 가지라.

날마다 달마다 열매맺는 우리 교회.

열매맺는 우리 교회.


<3절>

어둔 사회 빛이 되고 썩은 맘에 소금 되며

가루 속의 누룩 같이 소리 없이 변화시켜

새사람 새나라 길러내는 우리 교회.

길러내는 우리 교회.



주: 이 찬송은 나 선생님의 {한국찬송가 100곡집} 제1집 40장에 다른 곡조로 실려 있다. 당시 우리가 부른 곡조는 《EACC Hymnal, 1964》(176장에 김영운 번역으로 처음 실려 국제화된 이 찬송은, 일본의 현행 찬송가인《讚美歌21, 1997》397장에도 실려 있어서 일본인 형제들도 부르건만 우리 찬송가에는 없다.   

 

<EACC HYMNAL> 176장에 실린 나운영 박사 작곡 찬송가


 

♬·유경손 독창회, 1952

 


공산군의 남침으로 학교는 부산으로 피난 갔고, 학교 이름도 조선신학교에서 한국신학대학으로 바뀌었다. 신학교로서 문교부의 학부 인정을 받은 것은 우리 학교가 처음이었다. 학장에는 당시 부통령이신 함태영(咸台永, 1873∼1962) 목사님이 취임하셨다.


  1951년 11월 13일 나는 결혼을 하고, 열 이틀 후인 25일에 부산으로 내려가 복교하였다. 배우는 과목 중 선생님의 음악 시간과 김정준 목사님의 시편 시간이 제일 즐거웠다. 서울에서도 선생님은 부부 교수로 가르치셨는데 부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1951년, 피난살이로 찌든 사람들은 절망적인 나날을 보내고 있었지만, 성탄절 합창으로 헨델의 메시야 발췌곡을 두 분께 연습하는 나는 구름을 탄 듯, 천상에서 노래를 부르는 기분이었다.


  1952년 우리 신학교 합창단은 부산 서면교회에서 열린 [유경손 독창회]에 찬조 출연을 하게 되었다. 우리가 부를 곡은 헨델의 오라토리오 메시야 중, 제9곡 - 알토 영창에 이은 합창 [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자여]를 독일어로 부르는 것이었다. 이 날은 부산 역사상 최고의 폭설이 내려 모든 교통이 두절되었고, 영하의 날씨에 내린 눈이 전선에 얼어붙어 줄이 끊어지는 바람에 도처에 정전 사태가 벌어졌다. 우리는 남부민동 산언덕에서 무릎까지 빠지는 눈길을 헤치며, 4킬로가 넘는 서면교회로 갔다. 그런 악천후에도 예배당은 그야말로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각박한 피난살이에 음악에 굶주린 음악 애호가들이 눈길을 헤치고 모두 찾아온 것이다.


   그 날 나는 베이스 파트에 앉아서 알토 영창이 끝나고 합창단이 일어서야 할 순간을 마음 조리며 기다리 고 있었다. 그런데 테너 파트장 김 아무개가 갑자기 벌떡 일어서지를 않는가? 그러자 모두들 따라 일어서고 있었다. 나는 당황했다. 아직 14 소절이 남아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안 일어설 수가 없다. 그 대목은 헷갈리기 쉬운 부분이었다. 알토가 [주 영광, 주 영광─]하고 변화화음을 연주하다가 [나타나셨네, 나타나셨네]라고 부르는 대목이다. 이와 똑같은 멜로디가 14 소절 후에 다시 반복된 다음 알토 영창이 끝나고, 간주 없이 합창으로 들어가는 것인데, 긴장한 파트장이 앞 부분에서 미리 일어선 것이다. 우리는 14 소절 동안 서서 독창자의 노래를 안절부절 듣고 있다가, 나 선생님의 사인을 받고 합창을 했는데 지휘하시는 선생님의 눈언저리가 날카로워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연주가 끝나자 선생님은 [수고들 했습니다] 한 마디 하시고는 파트장에게 불호령을 내렸다. 유 선생님이 인자하게 웃으시며 '폭설 속에 먼데까지 와서 수고했다'며 일일이 인사하시는 바람에 우리는 한숨을 돌렸다.


  ♬·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1954년 초가을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나는 선친 오연영(吳連泳, 1889-1951) 장로의 전도로 예수를 믿고 목사가 되어 기독교서회 책임자로 계신, 김춘배(金春培) 목사님의 배려로 서회 편집부에 취직을 하여, 사회 초년생으로 긴장과 보람에 넘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어느 날인가 서회 실행위원들과 교계 유지들, 그리고 서회 직원이 모인 자리에서, 나 선생님의 오르간 반주로 유 선생님이 독창을 하셨다. 생전 처음 듣는 곡조인데 전주가 인상적이었다. [미─레도라라─ 솔미미─] 하고, 마치 시골 소년의 피리 소리 같은 단선율에 이어 옥 쟁반에 구슬 굴러가는 듯한 아르페지오 코드가 네 번 울리자, 유 선생님이 눈을 지그시 감고 저음에서 노래를 시작하였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나 선생님의 대표작을 처음 듣는 순간이었다. 유 선생님의 노래는 부산 독창회 때 듣고 2 년 만에 처음 듣는데, 그렇게 정성스레 부르는 노래는 처음이었다. 더욱이 [진실로 선함과 인자하심이]의 대목에서는 숨이 넘어가 자지러지는 듯한 열창에 모두들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유 선생님은 이 밖에도 [피난처 있으니]를 비롯하여 {다윋의 노래}에 있는 여러 곡들을 불렀다. 반주를 하시는 선생님의 모습은 오르간에 가려 이마만 보이는데, 자작곡을 부르는 아내의 노래를 반주하는 기분이 얼마나 좋으실까, 너무너무 부러운 마음이었다. 그 때의 심정을 선생님은 {제3 수상집}에 실린 [은혼식]이란 글에서 이렇게 기록하셨다.


… 문득 부창부수(夫唱婦隨)란 말이 생각난다. 즉 남편이 하는 대로 아내가 따른다는 말인데, 나는 이 말을 부창부수(婦唱夫隨)란 말로 바꿔 생각하게 될 때가 많다. 왜냐하면 내 작품을 아내가 연주할 때 ㅡ 다시 말해서 아내가 노래부를 때에 나는 피아노 반주를 하게 되니 부창부수(婦唱夫隨)가 아니고 무엇인가?


이두(吏讀)의 대가이신 선생님은 참으로 늘 [부창(婦唱)]에 [부수(夫隨)]하셨다. 연주회가 끝나고 내가 선생님들께 인사를 하자 선생님은 나를 반기시며

 

"아니, 여긴 어떻게?"

하시는 것이었다.

 

 

옛날 종로2가 91번지 [기독교서회] 건물 (2층만 사용)


 

"저 서회에 취직되었습니다."

"아, 참 잘 됐습니다. 축하합니다."


선생님은 제자들에게도 깍듯이 경어를 쓰셔서 어느 때는 면구스럽기도 하였다. 그 때 강신명(姜信明, 1909∼1985) 목사님이 오셔서 환하게 웃으시며 선생님의 손을 잡았다.

  "참으로 오늘 세계적인 명곡을 들었습니다. 한국 가락으로 된 이 성가는 전 세계인에게 애창될 것을 나는 확신합니다. 축하합니다."

강신명 목사님은 일찍이 김동진(金東振, 1913∼ )과 함께 미국인 선교사 말스베리 (Dwight R. Malsbary)에게 작곡 공부를 하여, 1927년에 {강신명 동요 99곡집}을 낸 작곡가이다. 아버지 강병주 목사의 권에 못 이겨 방향을 바꿔 목사가 되었지만, 그의 음악 애호정신은 남달랐다. 그의 예언은 적중하였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는 전 세계 20여개국어로 번역되어 전 세계 그리스도인의 애창곡이 되었다.

  1970년대 초 선생님은 일본에 가신다며,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를 일어로 번역해 달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그 날 밤늦도록 머리를 짜 다음과 같은 번역을 하여 선생님께 갖다 드렸다.


エホバは我(わ)が牧者(ぼくしゃ)なり,われとぼしき事(こと)あらじ.

エホバは我が牧者なり,われとぼしき事あらじ.

主(しゅ)がわれを,綠(みどり)の牧場(まきば)に伏(ふ)させ,

いこいのみぎわに,いこいのみぎわに,導(みちび)きたもう.

めぐみあわれみ,我(われ)に來(き)たらん,我に來たらん,

我あらんかぎり必(かなら)ず.

われ主の宮(みや)にすまん,永(とこし)えに,永えに.

永えに宮にすまん.ア-メン.


"아주 잘 됐습니다. 맘에 꼭 들어요."

"그런데 [めぐみあわれみ] 부분은 한 자가 남는데요."

"거긴 3연음부로 하면 돼요. 아주 좋습니다."


선생님은 이게 외국어로 12번째 번역이라고 하셨다.


 

 


1. ♬-'된장 냄새 나는 곡조로 작곡하시오'


1955년 나는 월간 《새가정》 잡지 편집장으로 있다가, 이듬해 서회에서 {새가정}을 NCC 가정생활위원회로 양도하고 《基督敎思想》을 창간하여 초대 편집장이 되었다. 선생님께 그 동안 {새가정}에 수상(隨想) 같은 부담 없는 글들을 부탁했던 나는, 1958년 {基督敎思想}에 [한국교회음악의 진로](제1 수상집에 수록)란 제목으로 글을 부탁드렸다. 그러자 선생님은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쓰듯이 거두절미하고 토착화와 현대화를 주창하는 글을 서두부터 이렇게 써 나갔다.


 

민족성과 시대성을 떠난 작품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작품이라 할 수 없으며, 또한 이 민족성과 시대성이 희박한 작품이 위대한 작품이 될 수 없는 것임은 하나의 상식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민족성을 망각해서는 안 될 것이고 더욱이 이를 무시해서도 안 될 것이다.

 


어느 날 독일 유학을 하고 돌아와 감신 교수로 계시며, {基督敎思想} 편집위원이신 윤성범(尹聖範, 1916~1980) 박사님이 차나 한 잔 하자며 시온 다방으로 나를 데리고 내려가셨다. 이러저러한 이야기 끝에 음악 얘기로 옮겨가자, 그는 나에게 아주 재미있는 경험담을 들려 주셨다.

 

윤성범 박사

 

몇 년 전 독일 유학 시절 크리스마스 때였다. 각 나라 유학생들이 모여 자기네 나라 성탄 찬송을 부르는데, 윤 박사는 [고요한 밤]을 우리말로 불렀다는 것이다. 그러자 오스트리아 학생이 '그건 우리나라 사람인 그루버가 작곡한 건데' 하고 말하는 바람에 얼떨결에 [기쁘다 구주 오셨네]를 불렀더니, 이번에는 영국 사람이 '그건 우리나라의 헨델이 작곡한 건데' 하고 나섰다는 것이다.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모르는데 미국 학생이 '당신네 나라는 4000 년의 역사를 자랑한다면서 성탄 노래 하나 없는가?' 라고 비꼬는 것이었다. 윤 박사는 '없긴 왜 없어? 너무 많아서 어떤 것을 불러야 할지 선곡을 해야 하니까 다른 사람이 먼저 부르시오' 하고는 아리랑 곡조에다 찬송가 가사를 맞춰 보았다. 아리랑은 우리나라 가락이 분명하고, 가사야 우리말을 아는 사람이 없으니까 적당히 맞추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도우셨는가! 딱 맞는 가사가 있었다. 윤 박사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아리랑 곡조에 맞춰 노래를 하기 시작하였다.



괴로운 인생길 가는 몸이

평안히 쉬일 곳 아주 없네.

걱정과 근심이 어디는 없으리

돌아갈 내 고향 하늘 나라.



눈을 지그시 감고 구성지게 불렀더니 모두들 아멘, 아멘! 하고 화답을 하는 것이었다. 요란한 박수와 함께 2절을 부르라는 것이었다. 1절 부른 것도 국제적인 사기극이라 양심의 가책을 받았는데, 2절씩이나? 사양을 해도 막무가내다. 윤 박사는 눈물이 났다. 선교 70주년이 다가오는데 한국인이 작사 작곡한 성탄 찬송 하나 없어서 이런 사기를 치게 되었으니 눈물이 나고 화도 났다. 눈물을 머금으며 2절을 불렀다.



광야에 찬바람 불더라도

앞으로 남은 길 멀지 않네.

산너머 눈보라 재우쳐 불어도

돌아갈 내 고향 하늘 나라.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찬송을 부르자, 모두들 '은혜 받았다'고 아우성이더라는 것이다.


주: 미국 연합장로회는 아리랑 곡조에 찬송 가사(Christ, You are the Fullness, Vers. Bert Polman, 1986)를 붙여 그들의 찬송가 [THE PRESBYTERIAN HYMNAL, 1990] 346 장에 실렸다. TUNE NAME: ARIRNG

 

 

 

 

이 얘기를 들려주며 윤 박사님은 내 손을 잡고 이렇게 부탁을 하는 것이었다.

"오 선생도 작곡을 하는 줄 알고 있는데, 작곡을 하려면 된장찌개, 김치 냄새가 나는 곡조로 작곡을 해주시오. 한국인의 작사, 작곡에서 버터 냄새가 나서야 되겠소? 그래서 나 같은 국제적인 사기를 치는 사람이 다시는 없게 해 주시오."

나는 민속음악으로 작곡하는 나 선생님에게 작곡을 공부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으로 하나님께 내 장래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였다.



♬-'찢어 버리시지!'


1960년 여름 기독교교육협회에서는 각 교단에서 글줄이나 쓴다는 사람들 30여명을 초청하여 [기독교교육 집필자 훈련]을 하였다. 경기도 남양주 입석(立石)에 있는 감리교 캠프장에서 5박 6일 동안 훈련을 시킨 다음, 그 해 가을부터 집필에 들어가는 {계단공과} 집필자로 위촉을 하였다. 나도 그 일원이라 유년부 공과 집필을 위촉받고 집필하는 중, 그 단원에 맞는 노래가 없어 작사를 하고 편집자 문선희(文善姬) 씨에게 원고를 넘기자, '작곡은 나운영 선생님에게 부탁해주세요' 하는 것이었다. 불감청(不敢請)이나 고소원(固所願)이었던 나는 동자동(東子洞)으로 달려가 선생님께 작곡을 부탁하여 만들어진 어린이 찬송이 다음 두 편이다.



예수님 예수님 선한 예수님

영생을 얻으려면 무얼 할까요

유명한 율법학자 여쭤보았네

예수님을 시험하여 여쭤보았네.

(이하 생략).



성경은 성경은 고마운 거울

하나님의 모습을 비춰주고

예수님의 모습을 비춰주고

내 마음도 비춰주는 고마운 거울.

(이하 생략).



교육협회에서는 써온 원고들 중, 감수위원회에서 [재집필]이란 판정을 받은 원고들은 대개 한 건물 안에 있고 만만한 내게 위촉하였다. 그 바람에, 나는 누구보다도 많은 원고를 써야 했고, 거기 들어가는 노래들을 새로 만들게 되었는데, 어린 시절 시골교회에서 무턱대고 작사, 작곡하던 옛 생각이 나서, 이번에는 직접 작사, 작곡을 하여 선생님께 가지고 가서 레슨을 받게 되었다. 놀란 얼굴로 곡조를 검토하시는 선생님의 눈을 가슴 조이며 바라보는 나에게,


"허! 제법 괜찮은데요! 그런데 요기하고 조기하고를 고쳐서 다시 가지고 오시오."

하는 판정을 받은 날은, 기분이 하늘을 나는 것 같아 밤을 지새우며 곡조를 고쳤다. 그러나 죽 훑어보시고는

"찢어 버리시지."

하며 돌려주실 때는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 즉석에서 찢어 버렸다. 이렇게 하여 나는 4년 이상 작품을 들고 선생님을 따라 다니며 레슨을 받았는데, 어느 날 선생님이


"화성학은 누구 책을 가지고 공부합니까?"

하고 물으시는 것이었다.

"소화 7년에 일본 다까이 악기점(高井樂器店)에서 발행한 책인데요, 독일 라이프치히 음악학교장 스테판 크렐(Stephan Krehl, 1864~1924) 교수의 원저를 가다야마 신따로(片山顚太郞)가 번역한 {和聲學}을 가지고 공부하고 있습니다."

 

"어휴! 그 책은 일본에서도 어렵기로 소문난 책인데 왜 하필 그걸 가지고…. 고생이 많았겠군요."


"정말 너무 어려워요. 아무리 애를 써도 진도가 안 나가요."

선생님은 이러저러한 책을 가지고 공부하라고 자세히 일러주셨고, 나는 순한 양 같이 따랐다.

♬ {주일학교 찬송가, 1962}


1961년 새해의 어느 날, 아동 문학가 강소천(姜小泉, 1915~1963) 선생이 차나 한 잔 하자며 나를 시온 다방으로 불러 내렸다. 서회 2층에 사무실을 둔 어린이 잡지 {새벗}의 주간인 강 선생은, 나를 추천하여 문단에 등단케 해 주신 문단의 스승이다. 당시 나는 {基督敎思想} 편집장을 사임하고, 대한기독교계명협회(The Korean Christian Literacy Association)의 집필자 겸 편집인(writer and editor)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사무실이 서회 건물 3층에 있었다. 서회 지하 1층에 있는 시온 다방으로 들어서자 강 선생은 벌써 내려와 차를 시켜놓고 앉아 있었다.

 

 

강소천 선생


 

"오 선생, 서회에서 어린이 찬송가를 내기로 했습니다. 내가 가사 부분을 맡고 나운영 선생이 곡조 부분을 맡았는데, 오 선생 도움이 필요하오. 동시를 쓰는 친구들에게 가사를 써달라 했더니, 시는 좋은데 찬송가로는 쓸 수가 없단 말이오. 오 선생은 신학을 하고 아동문학을 할 뿐만 아니라 음악에도 조예가 깊으니 이 일을 좀 도와주시오."


"여부가 있습니까. 뭐든지 시켜만 주십시오, 열심히 하겠습니다."

"우선 가사 5편을 작사해 주시고, 이 영어 어린이 찬송들을 번역해주시오. 쥐꼬리 만하지만 원고료도 나옵니다."


"쥐꼬리 만하면 그래도 길겠군요. 그 동안은 노루 꼬리만 밖에 안 했고, 어떤 때는 아예 주지도 않고, '책에 이름 실려 준 것만도 고마운 줄 알아야지' 하시는 김춘배 총무님 아니었어요?"


그런데 다음 날 나운영 선생님이 계명협회로 찾아 오셨다.

"이번에 기독교서회에서 어린이 찬송가를 내기로 했습니다."

"아, 강소천 선생에게서 어제 들었습니다."

"그래요? 그런데 이미 나와 있는 {어린이 찬송가} 출판사에서 자기네 것은 사용을 못하게 하고 있어요. 전부 새 곡으로 낸다면 이게 팔리겠어요? 그래서 걱정인데…."


"그들이 편집한 {어린이 찬송가} 중에 새 곡도 있지만 대다수가 옛날 현제명(玄濟明, 1902~1960) 선생이 편찬한 {아동 찬송가, 1936}에 있는 것인데요."

"그런데 그 {아동 찬송가}를 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현제명 선생 댁에도 그 책이 없어요."


"제가 가지고 있는데요."

그러자 선생님은 와락 내 손을 잡으며,

"아니 그 책을 어떻게 구했습니까? 내가 구해보려고 헌책방을 두루 다녔지만 구할 수가 없었는데…."

 

<아동 찬송가> 안표지


 

"집사람이 시집 올 때 가지고 온 혼수 제 1호예요. 집사람이 어렸을 때, 권서(勸書)들이 정가 1원이나 하는 그 책을 2개월 할부로 팔았답니다. 집사람은 그 책을 사 달라고 사흘을 울며 졸라댔대요. 장인 어른이 하는 수 없이 월부로 사 주셨답니다. 피난민 시절 시집오면서 그 책을 제게 선물했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하시는 일은 헤아릴 수가 없군요. 그 책이 그렇게 오 선생 손에 들어오다니. 인제 살았다. 내일 당장 가지고 오세요."

 

이리하여 나는 아동문학의 스승 강소천과, 작곡의 스승 나운영 선생님을 도와 어린이 찬송가 편집에 깊이 관여하게 되었고, 이후 모든 어린이 찬송가 편집에 참여하게 된다. 하나님은 문학과 음악을 하고 싶어하는 내 마음을 아시고, 미리 예비하신 길로 이렇게 나를 인도하셨던 것이다. 참으로 고마우신 하나님 아니신가!


2년 간의 작업 끝에 출판을 하려 하니, {어린이 찬송가}라는 이름도 [판권이 등록되어 있으니 사용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김춘배 목사님은 화를 내셨다.

"아니, 1936년판 {아동 찬송가}도 우리 서회가 출판했고, 1953년의 {어린이 찬송가}도 우리가 출판했는데, 무슨 소리야?"


그러나 {어린이 찬송가}란 제호도 먼저 등록한 사람에게 판권이 있다니, 하는 수 없이 {주일학교 찬송가}란 이상한 이름으로 출판할 수밖에 없었다. 1962년 12월에 나온 이 찬송가는 총 167곡 중 한국인 작품이 46편(30%)나 들어 있다.



♬-최초의 작곡집 {할렐루야, 1965}


나는 무언가에 열중하면 거기 미쳐버리는 성질이 있다. 소학교 다닐 때 1학년 교과서를 다 외어버리고, 2학년, 3학년 하는 식으로 위 학년 교과서를 빌려다가 외어 나갔다. 4학년에 올라갔을 때는 6학년 교과서까지를 다 외우고 중학교 교과서를 찾아 이웃 마을을 헤매 다녔던 것이다. 작곡을 하기 시작하자 한 주일에 두 세 곡 씩 작곡을 하여 바쁘신 선생님께 전화를 하면, 한 번도 거절 않고 만나 가르쳐주셨다.


그 때까지만 해도 나는 [레슨비]라는 말을 몰랐다. 가르쳐주시는 게 너무 고마워 만날 적마다 종로 한일관 3층에 가서 불고기를 대접했는데, 육식을 좋아하시는 선생님과 나는 매번 4-5인 분씩을 먹었다.


이렇게 4년 이상 공부를 하였다. 가만히 계산해 보니까 4년이면 208주요, 매주 2.5회로 보면 520회, <520×4인분>이면 2,080인분, 요즘엔 불고기 1인분에 200 그램이지만 당시 불고기는 300 그램이었으니까, 살코기로만 624 킬로를 먹은 셈이니 황소 한 마리는 넉넉히 먹어 치운 셈이다.


1965년, 어느덧 70여 곡이 완성되었다. 나는 이 중에서 41곡을 가려 {할렐루야}란 제목으로 출판하였다. 표지는 안동교회 집사이며 삽화가로 유명한 김영주(金榮注, 1916~1998) 화백이, 삽화는 미인도(美人圖)로 유명한 동양화가 장운상(張雲祥, 1926~1982) 화백이 한국풍으로 그려주셨고, 머리말은 문학의 아버지 전영택(田榮澤, 1894~1968) 목사님과 나 선생님이 써주셨다. 선생님의 머리말을 보자.



현재 우리가 부르고 있는 [합동 찬송가]는 모두 서양 사람들의 곡입니다. 이런 곡들만을 어려서부터 불러왔기 때문에, 우리는 완전히 서양 정서에 젖어버려, 찬송가는 모두 서양식으로 되어야 한다고 잘못 생각이 들게 되어 버렸습니다. (중략).


우리나라에도 어린이 성가를 쓰는 사람들이 많기는 합니다만, 그 중 대다수가 서양식이며 수준 이하의 변화 없는 곡조를 내고 있는 것을, 나는 항상 민망스럽게 생각해 왔던 차에, 이제 이렇게도 아름답고 변화가 많고, 특히 한국 정서가 짙은 성가집이 나오게 되니 그 기쁨을 참을 수 없습니다. (이하생략).



그 때 나는 [지은이의 말]에서 이렇게 썼다.

저는 음악가가 아닙니다. 시인도 아닙니다. 그러한 제가 외람스럽게도 어린이 성가집 [할렐루야]를 낸 것은 오로지 하나님을 찬양하려는 붉은 정성, 간절한 마음 하나 때문입니다.

평소에 우리 주님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어린이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는데 자그만 힘이라도 바쳐오며, 저는 우리나라 어린이들이 주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많이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을 꽤 안타깝게 생각해 왔었습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가운데 느껴지는 시 아닌 시에 곡을 붙여본 것이 이 책입니다. (이하 생략).


 


출판 기념회를 해야 한다는 선생님의 강권에 못 이겨(?), 1965년 7월 16일 19시, 서울 남대문 시장 입구에 있는 [어머니 회관]에서 출판기념회 겸 작곡 발표회를 열었다. 때마침 게릴라성 집중 호우가 퍼부어 뚝섬, 한남동, 이촌동, 용산, 마포 등지에는 물난리가 났는데도 불구하고, 200 여명의 하객이 모여 축하를 해주었다.


축사는 나 선생님과 유영희(劉永熙, 1916~ ) 장로가 해주셨다. 2부 발표회 순서에는 탤런트 신애라의 아버지 신영교(辛永敎)가 지휘하는 무궁화어린이합창단이 합창을 하였고, 친구 조의수(趙義秀, 1931~1980)의 피아노 반주에 맞추어 기독교방송 기술과장 박흥(朴興) 선생이 하모니카로 내 곡들을 연주해 주었다. 그 때의 감동을 어찌 잊으랴!


 


♬-장로 안수식 소묘(素描)

1966년 12월 18일에 나는 36세라는 젊은 나이에 마포장로교회의 장로로 안수를 받았다. 선생님께 청첩장을 보내 드렸더니, 12월 11일 주일 오후에 선생님이 전화를 하셨다.

"오늘 교회를 못 찾아서 헤매 다니다가 그냥 돌아왔습니다."

"장립식은 다음 주일인데요."

그러자 선생님은 껄껄 웃으시며,

"오늘은 예행연습을 했군요."

하시며 자세한 지리를 물어오셨다.


다음 주 장립식에는 일찍 오셔서 사모님이 부르시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를 반주해 주셨다. 선생님과 사모님이 내 장로 장립식에 축하 찬양을 해 주시다니, 참으로 고마워 눈물을 흘리며 속으로 따라 불렀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를 독창하시는 유경손 사모님


 

1971년 6월 6일, 나 선생님이 성남교회에서 장로 안수를 받으시는 날, 나는 축하 선물로 러닝 셔츠 10 장을 예쁘게 포장하고, 카드에 이렇게 적어 넣었다.

"이 러닝 셔츠를 흠뻑 적시며,

올해에도 좋은 곡 많이 작곡해주십시오."

                                                              門下生 吳小雲

 

 

며칠 후 만난 선생님은

"아니, 러닝 셔츠만 사 주면 어떡해요. 팬티도 사줘야지."

하며 껄껄 웃으시는 것이었다.

"러닝 셔츠가 길다라니까 팬티는 안 입으셔도 집에서는 괜찮으실 거예요."

하자 선생님은 [맞아! 맞아] 하시며 폭소를 터뜨리는 바람에 웃음바다가 되었다.

1988년 6월 12일, 유경손 사모님이 장로로 안수 받으시던 날, 나는 서툴지만 자작 이두(吏讀)식의 한시(漢詩)를 써서 액자에 표구하여 가지고 갔다. 답관체(踏冠體) 두운(頭韻)으로 쓴 시 아닌 축사는 다음과 같다.


祝賀禮拜歸榮光 (축하예배 귀영광, 축하예배써 주께 영광 돌리나이다.)

柳長老任按手禮 (유장로님 안수례, 유 장로님 장로 안수 예배에)

慶祝賀客遠方來 (경축하객 원방래, 경축 하객이 멀리서들 모였습니다.)

孫孫子子繼信仰 (손손자자 계신앙, 자자손손 신앙을 이어 가시며)

長老職分盡忠誠 (장로직분 진충성, 장로 직분에 충성을 다하시고)

老少聖徒顧如親 (노소성도 고여친, 노소 성도들을 내 가족 같이 돌보시면)

按擔天父事亨通 (안담천부 사형통, 모든 책임 다 지시는 천부께서 형통케 하사)

手舞足跳主讚揚 (수무족도 주찬양, 손뼉치며 발구르며 주께 찬양 드리시오리.)


 

[넌센스 퀴즈] : 6월 6일 + 6월 12일은?

[정답] : 12월 18일. 이 날들은 선생님과 사모님과 내가 장로 안수 받은 날들입니다.

 

♬-{찬송가(어린이용), 1973}

1971년 봄, 찬송가위원회 총회가 종로 기독교회관 강당에서 열렸다. 당시까지만 해도 동 위원회는 NCC 산하 단체로서 상임직원은 없고, 비상임 간사가 서회 한 모퉁이에 책상 하나 놓고, 일이 있을 때에만 나와 사무를 보고 있었는데, 당시 간사는 조의수였다. 서울대 음대를 나온 그는 내 작곡 발표회 때 반주까지 할 정도로 나와 친한 사이인데, 오전 회의를 마치고 내가 근무하는 7층 월간 {기독교교육} 사무실로 올라왔다. 커다란 눈에 눈물이 글썽하였다.

 

조의수 간사


알고 보니 회계보고가 엉망이어서 간사를 경질하자는 말들이 지배적이라는 것이었다. 고정수입이라고는 쥐꼬리만한 위원회 것 뿐, 피아노 레슨으로 근근히 살아가는 그에게 간사 경질이란 치명적이었다.


그가 나간 다음 평생의 심우(心友) 김성호(金聖浩, 1930~ ) 목사가 찾아와, 위원회 간사를 경질해야겠다는 말을 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에게 조의수를 두둔해 말하였다.

 

김성호 목사


 

"그 사람은 막역한 내 친구야. 음악이 전문이지 회계법은 모르는 사람이니 이번 한 번만 용서하고 넘어가도록 도와주시오. 그의 친척 중에 공인회계사가 있다니까, 내년 총회부터는 그에게 재정보고를 감수 받아 제출하도록 하고 한 회기만 미루도록 힘을 써 주시오."


그리하여 오후 속회 때 김 목사가 제의하여 경질 사태는 면하게 되었다. 그 날 우리 세 사람은 의기 투합하여 함께 저녁을 먹으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자리에서 나는 두 가지를 제안했다.


첫째 찬송가 발전을 위해서 찬송가 위원회를 독립시키고, 성서공회와 마찬가지로 찬송가공회를 만들도록 추진할 것.

둘째 기독교서회의 [주일학교 찬송가] 대신 찬송가위원회에서 NCC 산하 각 교단 연합으로 [어린이 찬송가]를 만들 것.

두 친구는 전적으로 동의하여 찬송가위원회를 독립시켜 찬송가공회로 만드는 일은 김성호가, 어린이 찬송가 만드는 일은 조의수가 추진하기로 하였다.

얼마 후 조의수가 나를 찾아왔다.


"우리 찬송가위원회에서 어린이 찬송가를 내기로 하였는데, 오형하고 같이 일을 해야 할 텐데, 각 교단에서 추천해온 위원 명단에 오형 이름이 없어. 어떡하지?"


"찬송가위원회 위촉 전문위원으로 하면 될 텐데…."

"그러려면 실행위원회를 열어야 하지 않아?"

"모두 바쁜 분들이니까, 취지를 설명하고 전문위원 명단을 작성하여 일일이 찾아다니며 서명을 받으면 돼."


"그렇게 하는 법도 있나?"

"물론 편법이야. 이런 걸 [서면결의]라고 하는데 긴급을 요할 때 더러 쓰거든."

이렇게 하여 나는 전문위원 위촉을 받아 교단 연합 어린이 찬송가 편찬 작업에 참여하였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어린이 찬송가}란 제호를 사용하지 말라는 공문이 날아온 것이다. 하는 수 없이 {찬송가(어린이용)}이란 이름으로 편집에 들어갔다.


찬송가위원회 위원장은 김정준 목사님, 편집 위원장은 나운영 선생님, 전문위원은 선생님과 조의수와 나 셋이니 일은 일사천리 잘 진행되었다. 세계 각 나라에서 보내온 어린이 찬송들을 번역하여 넣었는데, 그 나라들은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캐나다, 중국, 인도, 영국, 아프리카, 일본, 이스라엘, 스위스, 오스트레일리아 등 14개국이다.


국내 것도 엄선하여 채택하고, 새로 작사 작곡도 하여 총 250곡 중, 한국인 작품이 87곡(35%)이나 수록되었다. 선생님은 성인 찬송가에서 채택한 찬송 중 어린이용을 제외한 50곡만을 4부로 하고, 200곡을 모두 반주부 2부 합창곡으로 편곡하였다. 조의수가 예산 걱정을 하면


"걱정 마시오. 예산 한도 내에서 주는 대로 받을 테니."

하시는 것이었다. 선생님은 교회기관 일에는 언제나 주는 대로 받으셨다.

이 {찬송가(어린이용)}의 특징은 어린이용과 교사용 두 가지로 낸 것이다. 어린이용은 문고판 크기에 비닐커버 2부 합창곡이고, 교사용은 반주곡을 다 붙여 국판 양장으로 냈다.


이 찬송가에는 내가 어려서부터 애창하던 작자 미상의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라는 곡을 채보(採譜)하여 나 선생님 편곡으로 54장에 처음으로 실렸다. 작사 작곡자에게는 모두 책을 보내는 게 관례였으므로, [하나님은 나의 목자시니]의 작곡자 이일래(李一來, 1903~1979) 선생에게 책을 보내드렸더니, 고맙다는 편지와 함께 [하나님이 세상을]도 당신 작곡임을 알려 주셔서 다음 판부터는 그의 작곡으로 출판되고 있다.



♬-찬송가 작사 작곡 현상모집


찬송가위원회에서는 한국 찬송가 개발을 목적으로 작업에 들어갔다. 제1회로 1977년에 14곡을 위촉하여 초동교회에서 발표하였다. 그러다가 현상 모집을 하기로 하여 가사를 공모한 후 작곡을 공모하였는데, 나는 평생 어린이 찬송가만 작사 작곡하기로 마음먹었으므로 응모를 하지 않았다.


어느 주일 날 선생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왜 현상 모집에 응모 안 하느냐는 힐책이었다. 이유를 대었지만, 하나님 찬양에 어른 아이 구별할 필요가 없다며, 응모작이 너무 적어 제2회 발표가 늦어지니 빨리 하라는 말씀이었다.


이리하여 응모한 것이 빛을 보기 시작, 매회 몇 곡씩 당선되었다. 당시 찬송가위원회 음악분과 위원들은 9명이었고, 선생님이 회장님이셨다. 응모된 곡조들은 모두 내가 5선지에 새로 �겨 그렸는데, 이름은 물론 필체까지도 감추기 위해서였다. 예선을 한 후 본선에 올라온 것을 위원 9명이 함께 불러보고 ABCD로 평가하는데, A를 과반수 이상 받은 곡만을 채택하였다.


어느 해엔가는 채택 21곡 중 13곡이 나 선생님 곡, 5곡이 내 곡, 그리고 세 사람이 한 곡씩 있었다. 위원회 김성호 총무는 당황하여 선생님께 5곡, 내게 2곡을 배당하고, 나머지는 차점자 것을 당선시켰다.


이 곡들은 선생님이 [소신껏] 수정하셨다. 7회에 걸쳐 당선된 곡들과 몇몇 지명인사 것을 추가 증보하여 1987년에 낸 것이 {한국 찬송가집}(146편 수록)이다. 연도별 발표 곡의 수는 다음과 같다.


제1회:1977. 2. 7. 초동교회 [나와 같은 죄인 위해] 외 13곡

제2회:1978. 12. 9. 영락교회 [나 같은 죄인까지도] 외 14곡

제3회:1980. 6.16. 동대문감리교회 [가시 밭 돌짝밭] 외 16곡

제4회:1981. 3. 30. 새문안교회 [그 어지신 주의 모습] 외 16곡

제5회:1982. 3. 8. 종교감리교회 [가난한 자 돌봐 주며] 외 25곡

제6회:1984. 12.1. 아현감리교회 [동방의 아름다운 금수강산] 외 14곡

제7회:1986. 6. 18. 청주제일교회 [고마운 사랑아] 외 14곡


 

현상모집 당선곡을 모아 낸 책


♬ {어린이 찬송가, 1979}


1979년 찬송가위원회는 완전 독립을 하여, 종로 2가에 있는 서회 빌딩에 단독 사무실을 차리고 초대 총무로 김성호 목사가 취임했다.


찬송가위원회의 총무직을 맡은 김성호 목사는 {찬송가(어린이용)}을 내었음에도 불구하고 각 교단에서 별도의 어린이 찬송가를 만들어 사용하고 있음을 안타깝게 여겨, [세계 어린이의 해]를 맞이하여 각 교단 관계자들과 합의를 하고, [한국 어린이 찬송가 통일 위원회]를 구성하고 통일 작업에 들어갔다. 그 찬송가의 머리말 일부를 보자.


이 찬송가가 나오기까지 실무 책임을 지고 수고하신 김성호 목사를 비롯하여, 전 곡을 반주곡으로 새로 편곡해 주신 나운영 박사와, 편집에 수고하신 오소운 목사, 조돈환 목사와 가사와 음악 전문위원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본 어린이 찬송가의 특색은


① 어린이 찬송가 50년사를 총 집대성한 것으로 초기 한국교회에서 애창된 어린이 찬송가를 비롯하여 우리나라 찬송가를 반 이상 수록하였고,

② 세계 각국의 유명한 어린이 찬송가를 번역하여 수록하였고,

③ 교회 절기에 부를 수 있는 새로운 노래와, 성경이야기 노래와 시편노래 등, 70곡을 새로 작사 작곡하여 수록하였고,

④ 교독문과 기도문을 어린이 용어에 맞추어 많이 수록하였고,

⑤ 매 장 찬송가 가사 주제에 맞는 성경 구절을 기입하였으며,

⑥ 전곡을 2부로 부를 수 있게 새로 편곡하였는데, 다만 성인용 예배찬송은 장중한 맛을 살리기 위하여 4부 그대로 수록하였고,

⑦ 전곡을 피아노는 물론 오르간으로도 반주할 수 있도록 편곡하였습니다.

이 찬송가의 특색은 1930년대에 전국 주일학교에서 애창하던 노래를 내가 채보(採譜)하여 넣은 것이다.

새로 채보한 노래는 다음 두 곡이다.


① 꽃피는 삼천리(남궁 랑 작사 / 권태호 작곡)

<1절>

꽃피는 삼천리 방방곡곡의

대한의 아가야 우리 아가야

손과 손을 잡고서 손과 손을 잡고서

꽃피는 동산에 봄 마중을 갈까나

얼싸얼싸 좋구나 앞날의 조선은 우리의 것

얼싸얼싸 좋구나 앞날의 조선은 우리의 것.

1절 밖에 없는 이 노래에 내가 2절을 추가하였다.


<2절>

늘 푸른 삼천리 방방곡곡의

주님의 아가야 우리 아가야

힘과 힘을 합쳐서 힘과 힘을 합쳐서

늘 푸른 동산에 주의 나라 세우자.

할렐루야 좋구나 앞날의 대한은 우리의 것

할렐루야 좋구나 앞날의 대한은 우리의 것.


② 꽃밭의 풀 싸움

<1절>

꽃밭의 풀싸움 얼음 위의 달음질

그 즐거운 모든 놀음을

잠시라도 그치고 주일학교 나오는

그의 걸음 아름답구나.


<후렴>

반가운 동무야 참 반가운 동무야

우리들은 네가 온 것을

정말 환영한다. 좋은 친구 되자.

참 반가운 나의 동무야.


<2절>

아침밥 못 먹고 비바람을 무릅쓰고

이 집 저 집 돌아다니며

친구들을 인도해 교회학교 나오는

그의 걸음 아름답구나.



위의 곡들을 채보하긴 하였으나 자신이 없어서, 선생님께

"댁에 가셔서 자료를 찾아 확인해 주십시오."

하고 여쭈었다. 다음 날 오신 선생님은 환하게 웃으시며

"일점 일획도 틀림이 없는 만점입니다."

하시는 것이었다.


또 하나, {찬송가(어린이용)}에 1절만 실었던 [하나님은 나의 목자시니]의 2-3절을 실은 것이다.

이 곡은 이일래 선생의 작곡집 {朝鮮童謠作曲集, 1938} 21장에 발표할 때 [시편(23)}이라 제목을 붙이고, 작사자 난에는 영어로 PSALM 23이라 적은 곡이다.

 

 

 

박재훈 목사는 그의 최근 저서 {내 마음 작은 갈릴리}(16쪽)에서, 1953년 {어린이 찬송가}를 편집할 때, 이일래선생의 시편 23편을 기억을 더듬어 채보하고, 석진영 선생에게 2-3절을 추가하게 하여 [석진영 작사]로 출판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작곡자 이일래 선생이 추후에 작사한 2-3절을 보내 오셔서 {어린이 찬송가, 1979}부터는 제 주인을 찾게 된 것이다.

그런데도 2007년에 발행된《21세기 찬송가》568장에는 아직도 석진영 작사로 되어 있다. 이일래 선생의 2-3절과 이를 비교해 보자.


※이일래 작사


<2절>

나의 영혼 다시 살리시고

바른 길로 나를 인도하시네.

주의 지팡이 주의 막대기 나를 지키니

조금도 두렵잖네. 주님 함께 계시네.


<3절>

주님께서 나의 원수 앞에

크신 상을 차려 내려주시며

내 머리 위에 기름 부어서 넘쳐흐르니

내 평생 주의 집에 영원토록 살리라. 아멘


《21세기 찬송가》568장의 석진영 작사 2-3절

※석진영 작사

<2절>

내 영혼을 구원하시오니

내게 감사함이 넘치나이다.

나로 하여금 모든 고난을 참게 하시며

하늘의 평안을 입게 하여 주시네.


<3절>

하나님이 함께 하시오니

내게 두려움이 없으리로다.

나로 하여금 땅에 살아도 진리 안에서

이기고 이기게 항상 능력 주시네.


1절 가사의 운과 맞춘 좋은 시지만, 시편 23편과는 동떨어져 버렸다. 그러나 이일래 선생 가사는 누가 봐도 시편 23편 그대로이다.

그런데 이 판부터 {어린이 찬송가}란 이름을 쓰게 되었는데, 그 경위는 이렇다.


당시 {어린이 찬송가}는 성결교 대표 위원인 전희준(田熙俊, 1935~ ) 장로가 박재훈 박사에게서 판권을 매수하여 가지고 있었는데, 편집 위원들의 간곡한 부탁으로 이 책 출판을 포기하고, 위원회에 {어린이 찬송가} 제호 사용을 쾌히 승낙한 것이다.


막대한 이권을 포기한 쾌거이기에 모든 위원들이 그에게 큰 박수를 보냈다. 이후 어린이 찬송가란 이름은 고유명사가 아닌 보통명사가 되어 너도나도 이 이름을 쓰고 있다.


이 찬송가에는 총 426곡 중 한국인 작사가 236곡(55.4%) 들어 있다.


♬-가면 노래극 {나의 주 나의 하나님}

70년대 초부터 80년대 말까지 약 20년 간 나 선생님과 김성호 목사와 나 세 사람은 매 주 2-3차례 만나 작업도 하고 저녁도 먹었는데, 목요일에는 일이 있건 없건, 종로에 있는 위원회 사무실에서 만나 함께 한국 찬송가 발전에 대한 얘기를 하고 저녁을 먹고 헤어졌다. 선생님은 우리 셋을 [三銃士]라 부르시며, 목요일엔 꼭 모이니까 [木友會]라 이름지으셨다. 그리고 또 [三兄弟]라고도 하셨는데, 띠동갑인 김성호와 나는 네니내니 하는 사이이고, 선생님은 우리의 대형(大兄), Big Brother이셨다.


어느 [木友會] 날 부활절 얘기가 나오자, 김성호 목사가 부활절이면 생각나는 다음 세 사람의 얘기를 했다.


 

① 옥합을 깨뜨려 주님의 죽음을 예비하는 순정의 여인 막달라 마리아,

② 그 순정의 향유를 돈으로 계산하는 유물주의자 가룟 유다,

③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뵙고도 만져보기 전에는 못 믿겠다는 실증주의자 도마

 


나는 그들 주인공 이야기로 노래극을 만들면 좋겠다 하자 선생님은 당장 시작하자고 동의하셨다. 그러자 김 목사는 자기 교회 집사 중에 우리나라 전통 가면극(假面劇)인 탈춤 전문가가 있는데, [가면 노래극]으로 만들자는 의견이 나왔다. 내가 대본과 작사를 하고 선생님이 작곡을 하고, 김 목사가 연출을 하기로 하여 부활절에 성남교회에서 공연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대본과 노래가 완성되었는데 탈춤 연습이 지지부진이었다. 아마추어를 데리고 연습하려니 너무 시간이 걸려 부활절이 훨씬 지난 6월 25일에 성남교회에서 공연을 하였다.

 

노래는 선생님이 지휘하시는 성남교회 찬양대가 하고, 후암교회 청년들은 탈춤을 추며 연기를 하였다. 십자가에 달려 [엘리엘리 라마사박다니]라고 주님이 처절하게 부르짖을 때 사탄이는 춤을 추지만, 주님이 부활하시자 지옥으로 떨어진다. 이 공연의 백미는 예수님이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시는 장면인데, 내 대본에는 없었던 것을 탈춤 지도자가 연출하여 공중으로 올라갈 때 막이 내리는 것이었다.


후에 이 작품은 가면극 대본도 곁들여서 [부활절 칸타타]로 출판되었다.



♬-신작 찬송가 봉헌예배

1979년 8월 말 어느 [木友會] 날, 제주도에 갔다 오신 선생님은 태풍으로 고생하신 얘기를 하시며, 하나님께서 중대한 계시를 주셨는데, 매월 7곡씩 신작 찬송가를 작곡하여 봉헌하라는 명령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제1회로 79년 9월 30일에 성남교회에서 선생님 지휘로 [외로운 배 한 척] 외의 6곡을 봉헌하였다. 당시 나는 김성호 목사가 시무하는 후암성결교회 교육목사로서 찬양대를 지휘하고 있었는데, 선생님은 우리더러 제2회 봉헌예배를 준비하라 하셔서, 79년 11월 4일에 후암성결교회에서 내 지휘로 [어느 민족 누구에게나] 외 6곡을 봉헌하였다.


제 3, 4회는 성남교회에서 봉헌하고, 제5회는 80년 3월 23일 용산에 있는 성광장로교회에서 김명엽 교수 지휘로 봉헌하였다. 담임목사 김동수 목사님은 선생님을 존경하는 음악 애호가요, 김명엽 교수는 문하생이었다.

"내 손에 피가 마를 때까지 신작 찬송가를 하나님께 봉헌하겠습니다."


이것이 선생님의 다짐이었고 하나님께 한 약속이었다. 그런데 매월 마지막 주일에 정규적으로 봉헌 예배를 드리기에는 일반 교회로서는 너무나 시간이 없었다. 고민고민 하시는 선생님에게


"아예 한국적인 찬양을 위해 교회를 창립하시면 어떻겠습니까?"

하고 조심스레 제안을 했다. 김성호 목사도 거들었다.

"그거 찬 좋은 생각이야. [한국 찬양교회]라 이름짓고 거기 가면 누구든지 장로님의 한국적인 찬양을 들을 수 있게 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아예 교회 이름까지 들고 나왔다.


"한국 찬양교회라…. 오 목사님 생각은 어떻습니까?"

"제 생각에는 [할렐루야 교회]라든지 [호산나 교회]가 성서적이고 국제적일 것 같은데요. Hallelujah Church, Hosanna Church 하면 외국 사람이 기억하기에도 좋지 않습니까?"

"원 성질들도 급하시지. 난 아직 교회 창립이란 꿈도 못 꾸었는데 이름부터 들고 나오다니…."


그러시더니 이렇게 말씀하셨다.

"한 주간 기도하며 연구해 보겠습니다. 다음 목우회 날 확답을 하지요."

다음 목요일 만난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교회를 창립하고 [한국 기독교장로회 운경교회]라 이름하기로 하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선생님은 압구정동에 교회를 설립하셨고 제6회부터는 운경교회에서 봉헌하셨다. 아직 개척교회라서 찬양대원이 많지 않아 운경합창단 단원들과 선생님의 제자들이 모여 연합 찬양대를 만들어 찬양을 하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부창(婦唱)]하시던 사모님이 [부수(婦隨)]하여 반주하시고, 둘째 따님 나효선 선생은 이름자 그대로 전속 솔리스트로 아버지께 효(孝)도 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었다.


선생님의 곡조는 서양음악인들이 보면 [비상식적인 진행]을 많이 하기 때문에 멜로디가 특이하여 배우기가 어려운 편이다. 양악에서는 화성적 진행을 할 때, [도미솔], [레파라], [솔시도]로 진행하지만, 한국 가락에서는 [도레솔], [레미라], [솔라도]로 진행하기 때문이다.


1982년 {羅運榮 博士回甲記念 韓國音樂論叢}에 내가 쓴 글 [은사 나운영 박사님의 성가의 세계] 중 [III. 현대화의 선구자] 첫 문단 끄트머리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공교롭게도 필자는 당시 연세대 음대 학장이시던 박태준 박사님 곁에 앉아 있었다. 한 곡이 끝날 때마다 우뢰 같은 박수가 터져 나오는데, 필자도 열심히 박수를 쳤으나, 도대체 어려워서 이해할 수가 없었다."

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이 문장은 선생님이 일부 잘라버리셨기 때문에 달라졌는데, 이 기회에 바로잡는다.

"…필자도 열심히 박수를 쳤으나 도대체 어려워서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박 박사님께 [박사님, 저는 너무 어려워 이해를 못하겠는데, 박사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하고 귓속말로 여쭤 보았다. 그러자 박 박사님은 [나도 몰라. 나 박사가 작곡한 곡은 무조건 박수를 쳐야 해. 그래야 무식하단 소리를 안 들어] 하시며 열심히 박수를 치시는 것이었다."


나 박사님이 토착화 현대화된 작품을 발표하시던 초기에, 그를 맹렬히 비난하던 사람들은 그 작품이 외국에서 대 호평인 것을 보고 놀라, 다음부터는 외국인 평이 나온 다음에야 평을 할 정도였으니까 박태준 박사님의 말씀은 정곡을 찌른 말씀이다.


선생님은 이 봉헌 예배를 통하여 전통 서양 가락과 화성의 틀을 깨고 [토착화된 가락에 현대화된 화성]을 붙여서 봉헌하셨다. 이렇게 제89회까지 운경교회에서 발표하고, 90회부터는 교회명을 [호산나교회]로 바꾸어 세상을 떠나실 때까지, 그야말로 [손에 피가 마를 때까지] 161회 동안 1300여 곡의 신작 찬송가를 하나님께 봉헌하셨던 것이다. 세계 역사상 유례가 없는 신앙의 봉헌이요 헌신이었다.


나는 선생님의 제1회 추도식에서 추모사를 할 때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하나님이 선생님을 이렇게 일찍 불러 가신 것은, 하늘나라에는 온통 서양음악의 찬송만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토착화되고 현대화된 한국의 찬송]이 듣고 싶으셔서, 선생님을 일찍 불러 가신 것이라 생각합니다."


♬-{어린이 찬송가, 1988}


20세기 후반은 격변의 시기였다. 해일처럼 밀려오는 외국 물결 중엔 복음송가와 CCM의 물결도 엄청나, {어린이 찬송가}의 개편도 어쩔 수 없는 시대의 요청이었다. 그래서 개편을 하였는데, 김성호 목사가 쓴 머리말은 이를 웅변적으로 설파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예배드릴 때 함께 계시며, 우리가 부르는 찬송을 기쁘게 받으십니다.


1936년 현제명 선생이 처음으로 101곡의 [아동 찬송가]를 펴내었고, 그 후 교단마다 따로 어린이 찬송가를 펴내어 불러오던 중, 1974년 1월에 여러 교단이 연합하여 [찬송가(어린이용)]을 펴내었고, 1979년 12월에는 한국어린이 찬송가 통일위원회 이름으로 426곡의 어린이 찬송가를 펴내어 10년 동안 널리 불려 오던 중, 보다 새롭고 더 좋은 찬송가를 펴내기를 바라는 한국 모든 교회의 요청으로, 이번에 440곡의 새로운 어린이 찬송가를 펴내게 되었습니다.



이 찬송가의 특색은

① 그 동안 부르던 모든 어린이 찬송가 중에서 즐겨 불려진 찬송을 뽑아 실었고,

② 번역하여 부르던 다른 나라 어린이 찬송가를 줄이고, 우리나라의 전통 가락에 맞춘 새로운 찬송을 많이 작사 작곡하여 실었고,

③ 교회 절기에 맞춘 찬송가와, 성경 내용을 주제로 한 노래를 실었고,

④ 유치부용 찬송과 교회학교에서 즐겨 부르는 돌림노래․동요․복음성가를 많이 실었으며,

⑤ 어린이용은 2부로 부를 수 있도록 펴냈고, 교사용은 악기로 반주할 수 있도록 만들어 따로 펴내었습니다.

총 440곡 중 278곡(63.2%)이 한국인 작품으로서 가히 {한국 어린이찬송가}라 자부할 만 했다. 이 찬송을 어린이용과 교사용 두 가지로 편집하는 일은 여간 손이 가는 일이 아니다. 지금은 악보를 그리는 소프트웨어들이 나와서 악보집 내기가 아주 쉬워졌지만, 당시만 해도 아트지에 5선을 긋고 일일이 도장을 찍어 악보를 그린 다음, 전사(轉寫)해온 가사를 악보에 잘라 붙이는 것인데, 교정을 다 보아 OK 단계에 들어갔을 때 갑자기 선생님이 [소신껏] 편곡을 바꾸시는 바람에 다시 새로 작업을 해야 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악보사의 안재홍 씨도 난색을 보이고 김성호 총무도 '웬만하면 그냥 OK 놓아주시지요' 하고 권했지만, 선생님은 막무가내였다.


"최상의 것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그래서 사보료가 20% 이상 증액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최상의 것을 하나님께]란 이 말씀에 누가 토를 달랴!

♬-아시아 찬송가 국제 세미나, 1990

1990년 8월 14일부터 2박 3일간, 수유리 크리스천 아카데미에서 [제1회 아시아 찬송가 국제 세미나]가 열렸다. 참가국은 한국을 포함하여 일본, 대만 등 3개국이었다.


마침 방학 때라서 나와 선생님은 매일 찬송가공회로 출근하여 준비작업을 했다. 역사적인 회의가 시작되었다. 우리 세 사람은 아카데미 하우스 한 방에 머물며 회의를 이끌어갔다. 회의 때 일본어 통역은 내가 하였다. 참석한 회원들은 모두 상기되어 있었지만, 우리는 차분히 진행하여 무사히 일정을 마치었다. 아래에 강연 제목과 강사소개를 적는다.


 

세미나 강사들, 왼쪽부터 나운영 박사, 기다무라 목사, 久世목사, 필자


【강연 제목】

주 제 강 연 : 아시아 찬송가 형성을 향하여(그 신학적 검토) 朴奉培

발제강연(1) : Toward a New era of Asian Hymnody I-to Loh

발제강연(2) : 일본 찬미가의 역사와 전망 北村宗次

발제강연(3) : 한국 찬송가의 토착화와 현대화 羅運榮

발제강연(4) : 일본 어린이 찬송가의 과제와 전망 久世望

발제강연(5) : 한국 어린이 찬송가의 역사와 전망 吳小雲

발제강연(6) : 일본기독교단 현행 讚美歌集에서 볼 수 있는 音樂的 特徵 橫坂康彦



【강사 소개】

朴奉培(Pong-bae Park) : 대전목원대학 학장, 목사, 전 감신대학장

駱維道(I-to Loh) : 中國南神學校敎授

北村宗次(Sohji Kitamura) : 日本キリスト敎團讚美歌委員長, 牧師

羅運榮(Un-Young La) : 전 연세대음대학장, 목원대 명예교수, 작곡가, 장로

久世 望(Nozomu Kuze) : 日本キリスト敎團讚美歌委員, 作曲家, 牧師

吳小雲(Sown K. Oh) : 韓國讚頌歌委員會 專門委員, 作曲家, 牧師

橫坂康彦(Yasuhiro Yokosaka) :日本キリスト敎團讚美歌委員, Niikata大 敎授


 

그러나 호사(好事)에는 다마(多魔)라 했던가. 교계 신문에 비전문가인 오 아무개가 무슨 발제강연을 하느냐며, 나를 헐뜯는 기사가 커다랗게 났다. 속이 상했다. 이런 소리 처음 듣는 게 아니다. 그래서 언젠가는 [연대 음대에 편입하여 선생님께 공부하고 싶습니다]라고 하였더니, 선생님은 [내가 가르쳐 내보낸 제자들보다 더 열심히 잘 하면서 왜 그러느냐] 하시는 것이었다. 그 날 나를 [비전문가]라고 비난한 신문을 선생님께 보여드리자, 선생님은 말없이 미소지으며 [南山小狗見月吠나 於我如浮雲이라]라고 적어주셨다.


"남산소구견월폐나 어아여부운이라, [남산에서 강아지가 달을 보고 짖어대지만 내게는 뜬구름과 같도다]란 뜻인데 옛날 어디서 본 것 같은데요."

"이 글귀는 조선신학교 학장이신 송창근 박사가 당신을 비난하는 소리를 들으며 하신 명언이지요. 나도 악의적으로 나를 비난하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於我如浮雲]으로 살고 있습니다."

 

 

송창근 박사


선생님의 말씀에 분하던 생각은 사그라지고 평안이 찾아왔다. 그 후 나는 어떤 억울한 비난이 와도,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자세로 나를 바라보며, [於我如浮雲]으로 살기로 했다.


1993년 10월 21일 선생님이 갑자기 돌아가시자, [목우회의 삼총사]는 삼각형의 한 변을 잃고 힘을 잃어버렸다. 깨어진 삼각형은 평행선이 되고 만 것이다. 선생님이 안 계신 지금, 소파(小波) 선생의 [형제별] 노래가 생각난다.



날 저무는 하늘에 별이 삼형제

깜빡깜빡 정답게 지내이더니

웬일인지 별 하나 보이지 않고

남은 별이 둘이서 눈물 흘린다.

선생님을 먼저 보내고 우리 두 아우는 이 노래처럼 많은 눈물을 흘렸다. <끝>


 

 

<덧붙임>


1990년 8월 14일, 서울 수유리 크리스천아카데미하우스에서는, 한국찬송가위원회 주최, 한국찬송가공회와 기독교방송 후원으로 한-중-일 3국의「아세아찬송가 국제세미나」가 열렸다. 세미나 둘째 날인 8월 15일 정오 12시, 발제 강연을 하기 전 나운영 장로는 이렇게 입을 열었다.

 


  “발제 강연을 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과, 한 ・중 ・일 세미나 강사와, 모든 참가자들 앞에서, 저의 잘못을 회개하는 말씀을 드리려 합니다. 한 때 잘못인 줄도 모르고 찬불가를 작곡한 것을 회개합니다. 다시는 이런 죄를 짓지 않고, ‘이 손에 피가 마르기까지’ 오직 하나님을 찬양하는 찬송가만 작곡하겠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국제 세미나 자리에서 회개하는 그의 모습을 보며, 200 여명 참가자들도 눈시울을 적셨다. 이 자리에는 찬불가 문제를 집요하게 문제 삼는 인사들도 함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