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생활

이재봉 2009. 1. 7. 06:27

유언: 사랑하는 아내 재옥에게

 

100살까지 살겠다고 장담하던 내가 40 중반에 유서를 쓴다는 게 참 어색하구려. 이 글을 읽으면서 놀라지 말게. 곧 죽으리라 생각하고 쓰는 것은 아니니까. 자살을 계획하며 쓰는 것은 더욱 아니고. 건강하게 오래 살겠다고 오래 전에 담배와 커피까지 끊었고, 요즘은 생식을 하며 운동 삼아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하는 사람 아닌가. 논문 발표나 강연 또는 자료 수집을 구실로 여기 저기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니 비행기나 차 사고로 죽을 수도 있고, 혼자서도 산과 바다를 즐겨 찾으니 미끄러져 죽거나 물에 빠져 죽을 수도 있으며,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하니 오가는 길에 차에 부딪혀 죽을 수도 있겠지. 그래서 언제 닥칠지 모를 죽음에 대비해 가끔 삶을 되돌아보며 이렇게 주변을 정리해두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 걸세.

 

먼저 세 가지를 사과하네. 첫째, 당신에게 경제적으로 고생 많이 시킨 게 가장 미안하군. 부잣집 딸이 가난한 집 아들과 결혼하는 바람에 별 일을 다 해보았지? 유학생 시절의 비참한 생활이야 남들도 겪는 고생이라 칠 수 있겠지만, 교수가 되어서도 빚더미 위에서 살고 있는 것은 당신이 견디기 어려우리라 짐작하네. 가진 것도 없는 터에 돈 욕심도 별로 없는 사람을 만난 게 당신 팔자려니 생각하게.

 

둘째, 통일운동을 이끈답시고 가정에 소홀히 했는데, 가정을 통한 소박한 행복보다는 시민운동을 통한 명예를 더 추구해온 점 미안하네. 사회 여러 분야의 사람들을 만나면서, 당신과 아이들에겐 무관심하고 무뚝뚝하면서도 다른 사람들 특히 여자들에게는 과잉 친절을 베푼다는 당신의 불만 섞인 지적에 좀 더 신경을 써야 했는데 말이야. 운동의 발전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측면도 있지만, 당신 말대로 이른바 ‘끼’가 다분한 탓도 있다는 점을 분명히 인정하거든.

 

셋째, 당신은 우리가 천국에서도 꼭 만나야 한다면서 내가 진정한 기독교 신자가 되어 주기를 그토록 간절히 바랐는데, 굳이 거부해온 점도 마음에 걸리네. 물론 내가 힘쓰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신앙심이란 게 억지로 생기는 것도 아니잖은가. 한 때는 별 죄책감도 없이 바르지 못한 일을 더러 저지르기도 했지만, 그래도 기독교인들 못지않게 바르고 착하게 살려고 힘써왔다는 점은 알아주기 바라네. 당신도 알다시피 나는 1970년대 후반에 천주교를 받아들였고, 1980년대 전반에는 불교를 공부했으며, 1980년대 후반부터는 개신교회에 나가는 한편, 1990년대 후반부터는 원불교에도 들어가 있지 않은가. 그리고 2001년 2월 인도네시아를 방문해서는, 평화학을 공부하면서 가져온 힌두교에 대한 호감을 직접 느낄 수 있었다네. 이렇듯 나는 무턱대고 어느 한 종교에 매달리지 않고 어떠한 종교든 좋은 면은 모두 받아들이고 따르고 싶은 걸세.

 

이제 네 가지를 부탁하네. 첫째, 내가 죽은 것을 다음 사람들에게만 알리게: 우리 양쪽 집안 식구들, 이우정 교수님 (016-239-6584), 최준수 목사님 (019-602-0252), 김 택 (011-321-6087), 이중선 (019-681-6580). 내가 일해온 대학과 이끌어온 통일운동 모임, 몇 몇 가까운 친구들과 아끼는 제자들만 알면 되겠지.

 

둘째, 당신이 꺼려하는 것 알지만, 내 몸뚱이에서 눈이든 장기든 쓸모 있는 부분은 뭣이든 필요한 사람들이 쓸 수 있도록 해주게. 사회에 돌려줄만한 돈이 없으니 시체라도 내놔야지. 그리고 불에 태워 남은 재는 내 아버님 어머님 묘 앞에 뿌려주고. 그까짓 죽은 몸뚱이가 좀 흉하게 파헤쳐진들 어떻고, 아이들이 찾기 힘들 무덤을 만든들 뭐하겠는가.

 

셋째, 당신과 아이들에게 가난을 안겨주고 가는 처지에 염치없는 부탁이지만, 내 퇴직금과 생명 보험금에서 빚 갚고 남는 게 있으면, 그 가운데서 20% 정도는 사회에 내놓기 바라네. 당신은 언젠가 고아원을 운영하고 싶다는 꿈을 가졌으니 10%는 남한의 고아들에게 건네고, 나는 지금까지 통일운동에 조금이나마 힘써 왔으니 10%는 북녘 동포 돕기 성금으로 한상렬 목사님 (011-9695-3131)에게 전해주는 게 어떨까? 한편 유학 시절에 학자금으로 미국에서 융자받은 돈은 떼먹기로 작정했었지만, 언젠가는 갚으리라 계획하고 있었다는 것을 고백하네. 내가 미국 사회에 빚진 게 얼마나 많은가? 정말 엄청나지. 우리 아이들 병원비를 포함한 의료 보조는 물론 주택과 식량 보조까지 받았으니 말이야. 그런 보조를 받지 못했다면 내가 공부를 제대로 마칠 수 없었을 테고, 당연히 이렇게 교수가 될 수도 없었을 것 아닌가. 많은 사람들이 나를 반미주의자라고 하지만, 난 미국 정부의 폭력적이고 제국주의적인 대외정책을 비판해왔을 뿐이지 미국 사회를 반대한 것은 결코 아니었네. 그리고 난 “땅 한 줌 물려받은 것 없이 가진 것이라곤 책 보따리 몇 개뿐”이라는 말을 즐겨 써왔는데, 집과 연구실에 몇천 권 되는 책들 가운데 당신이나 우리 아이들이 꼭 간직해서 읽고 싶은 것 빼놓고는 모두 원광대학교 도서관에 전해주기 바라네. 나에게 일자리를 마련해준 곳에 조금이나마 보답하는 길이니까.

 

넷째, 당신은 아이들을 위해 그리고 천국에서 나를 떳떳하게 만나기 위해, 내가 먼저 죽어도 재혼을 절대 하지 않겠다고 했지? 그러나 나는 당신이 꼭 재혼하기를 바라네. 그게 당신은 물론 아이들을 위해 더 바람직할 것 같아. 심리적으로든 물질적으로든 말이야. 당신이 꿈꾸는 대로 우리가 천국에서 만나더라도 서로 어색하거나 내가 섭섭해할 일이 뭐 있겠어? 오히려 내가 베풀지 못했던 정과 사랑을 가정에 충실하고 자상한 남자로부터 당신이 받게 된다면 내가 아주 흐뭇해할 걸세.

 

아무쪼록 내가 먼저 가는 것 슬퍼하거나 안타까워 하지만 말고, 아이들과 건강하고 행복하게 잘 살기 바라며,

2001년 11월 남편 재봉.

 

* 이것은 진짜 유언이라기보다는 ‘예비 유언’ 같은 것인데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쓰는 동안 상당히 많은 눈물이 쏟아지는군. 정말 죽음을 눈앞에 둔 것처럼 말야. 아무튼 며칠 동안 고민한 내용을 정리한 것인데, 가끔 과거를 돌이켜보고 미래를 준비하며 지속적으로 고치고 다듬어야지. 이렇게 죽는 연습을 하다보면 조금이라도 더 값진 삶을 추구하게 되고, 언제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더라도 의연한 모습으로 숨을 거둘 수 있으리라 기대하니까. 2001년 3월 처음 썼는데, 미국에서 가장 위험한 지역으로 보이는 플로리다와 뉴욕 그리고 와싱턴에서 1년을 보낼 계획을 세우며, 2001년 11월 고쳐 썼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