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인물과 역사/오늘의인물과역사

화상 2010. 8. 18. 23:04

오늘~ 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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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强力)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지금 인류에게 부족한 것은 무력도 아니오, 경제력도 아니다. 자연과학의 힘은 아무리 많아도 좋으나, 인류 전체로 보면 현재의 자연과학만 가지고도 편안히 살아가기에 넉넉하다.
인류가 현재에 불행한 근본 이유는 인의(仁義)가 부족하고, 자비가 부족하고, 사랑이 부족한 때문이다. 이 마음만 발달이 되면 현재의 물질력으로 20억이 다 편안히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인류의 이 정신을 배양하는 것은 오직 문화이다. 나는 우리나라가 남의 것을 모방하는 나라가 되지 말고, 이러한 높고 새로운 문화의 근원이 되고, 목표가 되고, 모범이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진정한 세계의 평화가 우리나라에서, 우리나라로 말미암아서 세계에 실현되기를 원한다."

- 백범 김구,「나의 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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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 [김대중 前대통령 서거] 전두환 대통령 “고생 많으셨다” 홍업씨 위로

빈소 이모저모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 이틀째인 19일 서울 신촌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의 임시 빈소에는 정치인과 학계·재계, 일반 시민들의 조문 행렬이 이어졌다. 조문객들은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평생 민주주의와 화해·통합을 향해 걸었던 DJ의 삶에 경의를 표하고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광주항쟁을 주동했다는 혐의로 DJ가 사형선고를 받은 1980년 당시 최고 권력자였던 전두환 전 대통령은 오전 10시쯤 굳은 표정으로 빈소를 찾았다. 전 전 대통령은 이희호 여사 대신 빈소를 지킨 차남 홍업(59)씨와 악수를 나눈 뒤 "사람 일이 다 그런 것 아니겠느냐. 고생 많으셨다"고 말했다.
이용훈 대법원장, 한승수 국무총리 등 현 정부 국무위원, 박희태 대표 등 한나라당 지도부가 빈소를 찾았다. 또 정정길 청와대 비서실장과 맹형규 청와대 정무수석, 이수성 전 총리, 이만섭 전 국회의장, 조순 전 한국은행 총재, 김운용 전 국제올림픽위원회(IOC) 부위원장, 김명곤·강금실 전 장관이 조문했다. 청융화 중국대사, 시게이에 도시노리 일본대사 등 주한 외교사절의 방문도 이어졌다.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과 강만길 고려대 교수 등 학계, 권오성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총무와 엄신형 한국기독교총연합회 대표회장 등 종교계 인사들을 비롯해 언론계 인사들이 빈소를 찾아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DJ 임기 중 신지식인으로 선정됐던 '네 손가락의 피아니스트' 이희아(25)씨는 "아직 통일도 안 됐는데 이렇게 가시면 어떻게 하느냐"며 영정 앞에서 오열했다. 이씨는 "통일을 이룰 수 있도록 천국에서 기도해주세요, 대한민국을 위해…"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정진석 추기경은 방명록에 "큰어른으로 신앙의 모범을 보여주시어 당신을 힘들게 하고 핍박한 사람들까지 모두 용서하고 포용하신 본보기를 많은 후배들이 본받을 것"이라며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시길 기원한다"고 남겼다. 한 시민은 "세계 평화의 대통령이여, 이제 영면하시어 평화를 이루도록 하나님께 기원하겠다"고 썼다.
DJ 정부에서 초대 여성특위 위원장을 맡았던 윤후정 이화여대 재단이사장은 "여성계는 DJ 정부 때 대통령이 여성 권익을 신장·확장시키신 기억을 갖고 있다"고 DJ의 업적을 회고했다. 광주 출신의 김길복(83) 할머니는 노구를 이끌고 빈소를 찾았다. 광주항쟁 당시 광주에 살았다는 김 할머니는 "김 전 대통령님과 동시대를 산 사람으로서 그가 평생 평화와 통일 운동을 한 데 존경을 표하고 싶다"고 말했다.
한편 고인이 입원 직전까지 쓴 노트 2권 분량의 일기를 이 여사로부터 전달받은 DJ측은 주요 내용을 곧 공개할 방침이다. 최경환 비서관은 "책을 열어본 순간 전율을 느꼈다. 박지원 전 비서실장과 내용을 검토해 언론에 제공할 내용을 선정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강주화 양진영 기자 rula@kmib.co.kr /쿠키뉴스 2009.08.19 21:54

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kmi&arcid=0921391889&code=11121100

 

 

2009 - 8월 19일날 발사될 나로호가 오작동으로 7분 56초를 남기고 긴급 중지됨 /위키백과

 

 

2007 - 유엔 인종차별철폐위원회(CERD)는 한국 사회의 다민족적 성격을 인정하고, 한국이 실제와는 다른 단일 민족 국가라는 이미지를 극복할 것을 권고하였음 /위키백과

 

 

2007 - ‘해리포터’ 작가 조앤 롤링, 추리소설 집필

“쓰고 싶은 것 쓰겠지만 ‘해리포터’만큼은 기대 안해”

최근 해리포터 시리즈를 마친 작가 조앤 롤링(사진)이 추리소설을 집필 중이라고 영국 일간 〈더 타임스〉 일요판이 19일 보도했다.

롤링이 최근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의 카페에서 추리소설을 쓰고 있는 모습이 지인들에게 목격되고 있다는 것. 무명시절 롤링은 에든버러의 카페에서 해리포터를 구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롤링과 친분이 있는 영국의 베스트셀러 작가 이안 랜킨은 〈더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내 아내가 롤링이 추리소설을 쓰는 장면을 목격했다”며 “롤링이 글쓰기를 그만두지 않아 다행”이라고 말했다.

추리소설 작가인 랜킨은 “개인적으로 롤링과 작품에 대해 의견을 나눈 적은 없다”고 덧붙였다.

롤링은 최근 해리포터 최종편인 〈해리 포터와 죽음의 성도들〉 출간 이후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정말 쓰고 싶은 것들을 쓰겠지만, 해리포터의 성공을 재현할 것으로 생각하진 않는다”고 말했다.

런던/AP 연합 /한겨레 2007-08-19 오후 06:10:48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america/229921.html 

 

 

2005 - 태평양전쟁희생자 유골인도식(부산 영락공원)

2005 - 태평양전쟁때 희생 유골 60년만에 유족에게

일제에 의해 태평양전쟁에 강제로 동원됐다가 이국만리에서 희생된 뒤 일본과 국내에 60여년간 사실상 방치됐던 3명의 유골이 19일 유족들의 품으로 돌아갔다.

일제강점하 강제동원 피해 진상규명위원회는 이날 오전 10시 부산 영락공원내 태평양전쟁 희생 한국인 위령비 앞에서 인도식을 갖고 고 김동근, 박헌태, 최관명씨의 유골을 유족들에게 인도했다.

인도식은 묵념에 이어 분향 및 헌화, 추도사, 유족 인사말 등의 순으로 진행됐고, 고인들의 유골은 유족들의 뜻에 따라 천안 `망향의 동산'에 안치됐다.

고인들의 유골은 일본정부가 1974년 12월 일본 도쿄 유텐지에 보관돼 있던 한국인 강제동원 희생자 유골 911위를 송환하면서 국내로 들어온 뒤 국내 유일의 무연고 납골당이 있는 부산 영락공원에 안치돼 왔다.

이들 유골함에는 이름과 본적 등이 상세히 기록돼 있었으나 정부의 무관심으로 사실상 방치돼오다 유족들의 끈질긴 노력과 진상규명위 유해팀의 도움으로 60여년만에 유족들의 품으로 돌아갔다.

고 박헌태씨의 외아들 원배(65)씨는 "네살배기 때 헤어졌던 아버지를 60여년만에 유골로 뵙게 돼 감개가 무량하다"면서 "선친의 유골이 국내에 있었는데도 일본 어딘가에 안치돼 있는 줄만 알고 백방으로 찾아다녔던 지난날이 참으로 안타깝다"고 말했다.

그는 또 "한국의 수많은 젊은이들을 끌고가 죽임을 당하게 한 일본정부가 유족들에게 사죄의 말 한마디 않는 것이 원통할 뿐"이라고 눈시울을 적셨다.

한편 부산 영락공원에는 아직도 연고를 찾지 못한 유골 271위가 안치돼 있고, 진상규명위는 유골함에 적힌 본적지 자치단체에 협조공문을 보내는 등 유족찾기 작업을 계속 진행할 계획이다.

(부산=연합뉴스) /한겨레 2005-08-19 오전 10:00:58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8435.html 

 

 

2004 - 삼성전자 차세대 반도체 64메가 P램 세계 첫 개발

삼성전자(대표 윤종용)가 현존하는 차세대 메모리 가운데 용량이 가장 큰 64메가비트(Mb) P램(Phase change RAM:상변화 메모리) 시제품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삼성전자는 세계 최초로 64Mb P램 시제품 확보에 성공, 오는 2006년께 상용화에 들어갈 계획이라고 19일 밝혔다. 이 제품은 지금까지 개발된 차세대 메모리 중 최대 용량으로 고집적화에 어려움을 겪어 왔던 차세대 메모리의 한계를 극복하고 대용량을 구현한 획기적인 모델이다.
삼성은 이 제품이 기존 설비로도 제조가 가능하고 제조공정도 기존 메모리 반도체에 비해 단순해 원가경쟁력이 뛰어나다고 설명했다.
또 △2.5V 저전압 동작 △쓰기속도 120나노초(ns) △읽기속도 60ns △플래시 메모리 대비 1000배 이상의 내구성 △섭씨 85도의 고온에서도 2년 이상 데이터를 보존할 수 있는 특성 등 동작속도와 신뢰성 측면에서도 우수하다고 강조했다.

삼성전자의 한 관계자는 “64Mb P램 시제품의 업계 첫 개발로 차세대 메모리 시장에서도 선두 위치를 고수할 수 있게 됐다”며 “앞으로 차세대 메모리분야 연구를 본격화해 신뢰성과 제품 특성 등을 개선, 상용화 시기를 앞당겨 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P램은 ‘게르마늄 안티몬 텔룰라이드(Ge2Sb2Te5)’라는 상변화 물질을 이용, 이 물질이 비정질 상태에서 결정질 상태로 변화될 때 1비트(bit)를 얻는 방식으로 동작하는 신개념 메모리 반도체다. 삼성전자 외에도 ST마이크로, 인텔, 오보닉스 등이 개발을 추진하고 있다.
P램은 올해 들어 삼성전자가 64Mb, ST마이크로가 8Mb 기술 개발에 성공했다고 발표한 바 있으나 P램 시제품을 선보인 것은 삼성전자가 처음이다.

/전자신문 2004/08/19 16:33:35

http://ibora.net/board/index.html?imode=view&D=11&c_id=

1423&my_mode=&search_1=&search_2=&start=84&where

 

 

2003 -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헌법재판소 재판관에 전효숙 부장판사 지명 /위키백과

전효숙(全孝淑, 1951년 2월 28일 ~ )은 전남 순천 출신의 여성 법조인으로, 2003년 8월부터2006년 9월까지 대한민국 헌법재판소의 재판관을 지냈다. 이른바 신행정수도 사건에서 다수 견해의 관습헌법를 유일하게 부정하여 널리 알려졌고 2006년 노무현 대통령에 의해 여성 최초로 헌법재판소장으로 지명되었으나, 야당이 제기한 헌법 및 관련 법규에 관한 논란 가운데 지명이 철회되었다.

약력

순천여자고등학교 졸업, 1973년 이화여자대학교를 졸업하고 1975년 제17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판사로 임용되었고 대법원 재판연구관, 수원지법 부장판사, 사법연수원 교수, 특허법원 부장판사 등을 거쳐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리고 2003년부터 대법원장의 지명으로 헌법재판소 재판관을 역임하였다.

2004년 10월 신행정수도의건설을위한특별조치법 위헌 확인 소송에서 9인의 재판관 중 유일하게 각하 견해를 내어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소수의견에서 전효숙 재판관은 다수견해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관습헌법 법리를 부정하였다. 전효숙 재판관은 서울대학교 근대법학교육 백주년 기념관에서 열린 강연에서, 국회가 고도의 정치적인 사안을 정치로 풀기보다는 헌법재판소에 무조건 맡겨서 해결하려는 자세는 헌법재판소에게 부담스럽다며 소회를 밝힌 바 있다.

헌법재판소장 지명

2006년 8월 16일 노무현 대통령으로부터 헌법재판소장으로 지명되어 여성 최초의 헌법재판소장이 될 것으로 기대받았다. 대통령의 지명이 있기 이전, 헌법재판소장 임기의 6년 보장을 위하여 청와대, 전효숙 그리고 대법원 간의 내부 조율을 거쳐 전효숙 재판관은 임기 중이던 재판관 직을 일단 사직하였다. 그런데, 2006년 9월 6일 새천년민주당의 조순형 의원이 헌법재판소장 인사청문회 도중, 대한민국 헌법 제111조 제4항 “헌법재판소의 장은 국회의 동의를 얻어 재판관 중에서 대통령이 임명한다.”는 조항을 근거로 재판관직 사임으로 민간인이 된 전효숙 전 재판관의 헌법재판소장 임명 절차에 문제를 제기하였다.

한나라당이 조순형 의원의 논리에 동조함으로 인하여 인사청문회에서 여야의 입장이 팽팽히 맞섰다. 결국 이 문제가 전효숙 사태로 정치 쟁점화가 되어 한동안 국회는 파행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새천년민주당, 민주노동당, 자유민주연합에서 절차 보완 후 국회 표결이라는 타협안을 제시했지만 채택되지 못하여 국회는 계속 공전하였다. 청와대에서 야당 측의 입장을 일부 수용하여 재판관 임명에서부터 절차를 보완하였지만 한나라당에서는 전효숙 전 재판관은 이미 재판소장으로서의 부적합한 인물이라며 반대하였고 일부 한나라당 의원들은 본회의장 단상 점거라는 실력행사를 하였다. 주선회 소장 대행이 소장 업무를 관장하였지만, 헌법재판소 소장직이 장기간 공백 상태로 방치되어 주위의 우려가 점점 커졌다. 한편, 학계에서는 절차 보완 후 국회 표결이 민주주의의 원리에 부합한다는 성명을 내기도 하였고, 다른 학자들은 사직 후 재임명이라는 편법은 후임 지명권자의 권한을 침해한다는 근거로 절차적 문제를 계속 제기하였다.

결국, 헌법재판소장직의 장기공백을 우려한 전효숙 전 재판관이 지명철회를 청와대에 요청하였고 결국 2006년 11월 27일 대통령의 지명이 철회되었다. 전효숙 전 재판관은 사퇴의 변에서 “일부 의원들은 독자적인 법리만이 진리인양 강변하면서 자신들의 요구대로 보정한 절차도 원천무효라고 주장했다”, “다른 의원들은 물리적인 의사진행 방해 행위를 수수방관하면서 동의안을 상정조차 하지 않고 정쟁만을 계속했다”며 정치권을 비판하였다.

이력 및 수상

1975년 제17회 사법고등고시 합격
1977년 서울가정법원 판사
1988년 서울고등법원 판사
1994년 사법연수원 교수
1997년 ~ 2003년 2월 서울지방법원 민사17부 부장판사
2003년 2월 ~ 2003년 8월 서울고등법원 형사2부 부장판사
2003년 8월 ~ 2006년 9월 헌법재판소 재판관
2001년 자랑스러운 이화법대인상
2004년 제10회 자랑스러운 이화인상
/위키백과

 

 

2003 - 이라크 바그다드 주재 유엔 본부 폭탄테러, 24명 사망 100여명 부상

2003 - 바그다드 유엔본부 폭탄테러(2003)
2003년 오늘 이라크 바그다드 주재 유엔본부가 있는 카날호텔에 폭탄을 실은 차량 한 대가 돌진했다.
이 차량폭탄테러로 유엔의 이라크 특사를 비롯한 유엔 직원 24명이 사망하고 백여 명이 다쳤다.
이날 테러는 미군이 아닌 유엔을 표적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국제사회에 큰 충격을 줬다.
9.11테러를 주도한 알 카에다 등 이슬람 테러조직의 공격으로 추정됐다. /YTN

 

2003 - 브라질의 외교관 세르지우 비에이라 데 멜루 사망 /위키백과

세르지우 비에이라 지 멜루(Sérgio Vieira de Mello, 1948년 3월 15일 - 2003년 8월 19일)는 브라질 외교관으로, 30년 이상 유엔에서 활동했다.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태생인 지 멜루는 파리 소르본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했으면, 모국어인 포르투갈어 외에도 영어, 프랑스어에 능통했다.

캄보디아, 동티모르, 보스니아 등에서 근무하며, 분쟁조정자로서의 명성을 얻었다. 마지막으로 이라크에 특별대사로 부임하여, 임무를 수행중 2003년 8월 19일 바그다드에서 일어난 차랑 폭탄테러에 희생되었다.

테러에 희생되기 전 그는 일부에 의해 코피 아난의 후계자로 거론되기도 했다. /위키백과

 


2003 - 전 온두라스 대통령 레이나(Reina, Carlos Roberto) 총기 자살

레이나 [Reina (Idiáquez), Carlos Roberto, 1926.3.13~2003.8.19]

레이나 온두라스 대통령 총기자살

카를로스 로베르토 레이나(77) 전 온두라스 대통령이 19일 총으로 자살했다고 온두라스 당국이 밝혔다.

레이나 전 대통령은 1994년부터 1998년까지 재임하면서 온두라스에 민간정부의뿌리를 내린 인물이다.

레이나 전 대통령은 그동안 담낭과 췌장, 간 등에 퍼진 암으로 고통받아왔다고그의 동생이 전했다.

그의 시신을 검시한 관계자들은 사망 원인이 스스로에게 가한 총격이라고 말했고 동생도 이를 확인했다.

(AFP=연합뉴스) /조선 2003.08.20

 

 

 

 

2001 - 국내 最古추정 태극기 찾았다
구한말 태극기의 창안자인 박영효(朴泳孝·1861∼1939)가 처음으로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태극기가 최근 미국에서 발견됐다. 
재미 사학자 김찬희 박사(미국 클레어몬트 신학대학원 명예교수)는 구한말 서울에서 활동했던 미국 북감리교 아서 노블 선교사 집안의 유품 중에서 이 태극기를 발견, 그 사진을 기독교대한감리회(회장 장광영 감독)에 보내왔다. 
이 태극기는 노블 선교사의 부인으로 한국 문화재를 상당히 많이 수집했던 마티 노블 여사가 박영효의 부인으로부터 직접 수집해 보관해 오던 것이다. 태극기 보관함에는 노블 여사의 필체로 ‘Princess Y.H.Park 박영효 부인’이라고 쓴 글씨가 뚜렷하게 남아 있다. 박영효의 부인은 철종의 딸 영혜(永惠) 옹주이다. 
정동제일감리교회 역사편찬위원회 김대구 권사는 “손수건 크기의 옥색 명주천에 태극문양과 사괘를 바느질로 덧붙인 이 태극기는 박영효가 1882년 고종의 지시로 제작해 고종에게 선보인 최초의 태극기임이 확실하다”면서 “다음달 1일 미국에 가서 이 태극기를 가져올 계획”이라고 말했다. 
그동안 현존하는 최고(最古) 태극기로 알려진 것은 1885년에서 1890년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독립기념관 소장 ‘데니 태극기’와 기독교대한감리회측이 4월 공개한 고종의 하사품 ‘노블 태극기’ 등이 있다. 
이번에 발견된 태극기의 태극문양은 ‘데니 태극기’나 ‘노블 태극기’의 회오리치는 듯한 모습과는 달리 오늘날 태극기와 비슷한 완만한 모습을 하고 있다.
<송평인기자>pisong@donga.com /동아일보 2001/08/19(일) 18:35
허동현 교수와 함께하는 한국 근현대사 산책

http://unsuk.kyunghee.ac.kr/jangmyun_2004/NZEO/bbs/view.php?id=gallery_km&page=

1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32

 

 

2001 -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인종차별에 맞서 싸운, 이스턴케이프 주 이스트런던 출신 도날드 우즈 사망

2001 - 남아공 언론인 우즈 하늘나라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유명한 반아파르트헤이트(인종차별 반대) 운동가이자 언론인인 도널드 우즈가 19일 영국 남부도시 서리의 한 병원에서 67살을 일기로 숨졌다.

과거 암 투병생활을 한 적이 있는 우즈는 남아공 동남부 도시 이스트런던에서 발간되는 신문 <데일리디스패치>의 창설자이자 편집인이었다. 그는 자신과 친구 스티브 비코의 반아파르트헤이트 활동을 그린 영화 <자유의 절규>를 통해 전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됐으며, 지난해에는 인권신장에 기여한 공로로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으로부터 대영제국 상급 훈작사에 임명되기도 했다.

우즈는 1977년 국민당 정부가 사회활동을 금지하자 가족과 함께 조국을 탈출한 뒤 12년간 미국 순회 강연을 통해 반아파르트헤이트 운동을 확산시켰고, 브뤼셀에 있는 유럽연합(EU)과 런던 영연방 사무국의 남아공 문제담당 고문관을 지냈다. 또 78년 민간인으로는 처음으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연설에 초청받아 서방 국가원수들에게 남아공 문제를 알리기도 했다.

이스트런던/외신종합 /한겨레 2001.08.20(월) 19:20

http://www.hani.co.kr/section-007030000/2001/08/007030000200108201920013.html

  

 

 

밀로셰비치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

하는 시위대 /조선

 

1999 - 유고슬라비아 베오그라드서 14만여 명의 군중,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연방대통령 사임 요구 시위 /위키백과  

1999 - 유고 최대규모 반정부 시위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유고연방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사상 최대 규모의 반정부 시위가 1999년 8월 19일 수도 베오그라드 중심부의 연방의회 건물앞에서 열렸다.

10만명 이상의 대규모 군중이 집결한 가운데 열린 집회에서 시위대는 당기와 세르비아 공화국 국기, 피켓 등을 흔들며 변화와 밀로셰비치의 사임을 요구했다. 시위가 시작된 직후 최루탄 1개가 터져 시위대 수십명이 몸을 피하는 과정에서 1명이 부상해 구급차로 병원에 옮겨지기도 했으나 시위는 별다른 사고 없이 일단 끝났다.

이날 집회는 정부의 갑작스런 조기 총선 제안으로 야당 연합전열에 분열 양상을 초래한 가운데도 가장 강력한 반 밀로셰비치 시위가 이뤄졌다는데 의미가 있다. 또 집회에 당초 불참 의사를 통보했던 `세르비아 혁신운동`의 부크 드라스코비치가 돌연 참석, 조기 총선을 `11월까지는 실시해야 한다`는 즉석 연설을 해 시위대로부터 야유와 환호를 동시에 받았다.

드라스코비치는 다른 주요 야당 인사들이 과도정부구성을 지지하는데 비해 정부측의 조기 총선안을 지지하는 이단적 재야 인사로서 이날도 과도 정부구성을 반대하며 합법적 틀안에서의 이성적 대응을 촉구했다. /조선

 

 

1998 - 시인 원희석씨 별세

 

 

1997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경수로 착공 /위키백과

1997 - 북한 경수로 착공

1997 - 북한 경수로 착공식(1997)
1997년 오늘 북한과 케도(KEDO) 즉, 한반도 에너지 개발 기구는 함경남도 신포의 경수로 건설 부지인 금호지구에서 부지 착공식을 열었다.
이날 착공은 지난 1994년 10월 북한과 미국의 제네바 기본합의가 체결된 이후 2년 10개월 만에 이뤄진 것이다.
경수로 건설 본공사에 앞서 시작된 부지 정리 작업에는 남북한 건설인력 2백여 명이 투입됐다. /YTN

 

1997 - 북한 원자력 발전소 경수로 착공
북한의 원자력 발전소의 경수로 건설공사 착공식이 1997년 8월 19일 오후 2시 함경남도 신포 금호 지구에서 거행됐다. 이 사업은 북한의 핵 동결의 대가로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가 지원하는 사업으로 분단 후 남북한이 최초로 국제기구를 통해 벌이는 공동사업이었다.

이철 동아닷컴 기자 kino27@donga.com /동아닷컴TV 2010-08-18 18:05:45 

http://etv.donga.com/view.php?category=002013

 

 

1997 - 국제연합 통계국, 세계 인구 57억 5천 1백만 명이라고 발표 /위키백과

 

 

 

라이너스 폴링 박사 /조선

 

1994 - 미국의 화학자 라이너스 폴링 사망 /위키백과
1994 - 미국의 물리화학자 폴링(Pauling, Linus) 사망

폴링 [Pauling, Linus (Carl), 1901.2.28~1994.8.19]

1994 - 노벨 화학상과 ­평화상 수상한 미국의 라이너스 폴링 박사 타계

노벨 화학상평화상 등 유일하게 2차례에 걸쳐 노벨상을 단독 수상했던 라이너스 폴링 박사가 1994년 8월 19일 캘리포니아주에 있는 자신의 목장에서 사망했다. 향년 93세였다.

폴링박사는 단백질과 항체의 구조를 이해하는데 필요한 분자의 화학적 결합에 관한 연구로 1954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했다. 그는 또 전 세계 1만1천명의 과학자들의 서명을 받아 유엔에 핵실험 금지를 청원하는 등 반핵운동에 헌신한 공로로 1963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오리건주 포클랜드 출신인 폴링은 60여년 간의 연구생활을 통해 1천 편이 넘는 논문과 여러 권의 저서를 내놓았으며 분자를 묶고 있는 화학적 결합의 원리를 이용해 비타민C를 암·감기 등의 질병에 대항하는 예방물질로 개발한 공로를 세웠다. /조선

 

 

1993 - 초고속정보통신망 기본계획 수립

1993 - 대한민국, 초고속정보통신망 기본계획 수립 /위키백과  

 

 

1993 - 국회, 김영삼 대통령의 금융실명제 승인

1993 - 대한민국 국회, 금융실명제 실시에 따른 대통령 긴급명령승인안 통과 /위키백과  

 

 

1991 - 한민족과학기술자학술대회 개막(중국 연길), 남북한및 해외동포 등 관계자 300며명 참석

 

 

 

소련쿠데타가 진압된 후 모스크바

시민들이 KGB본부 앞에 있는 KGB

설립자 제르진스키 동상을 넘어뜨

리고 있다. /조선

 

1991 - 소련에 쿠데타가 일어나고,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대통령직을 사임한다고 발표하다. /위키백과

1991 - 소련의 보수강경파, 반 고르바초프 쿠데타 감행(3일 만에 실패) /위키백과

1991 - 소련, 반개혁 쿠데타 발발(1991)
개혁과 개방정책이 한창 추진되던 소련에 1991년 오늘 반개혁 쿠데타가 일어난다.
야나예프 부통령과 군 수뇌부 등 보수강경파 세력이 일으킨 쿠데타이다.
야나예프 부통령은 이날 오전 6시 30분 '타스통신'을 통해 고르바초프 대통령의 사임과 6개월 동안의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정권을 장악했다고 발표한다.
이때 소비에트 연방국 가운데 러시아의 옐친 대통령이 쿠데타세력에 대항하는 데 선봉에 나선다.
그는 쿠테타 세력과 투쟁하기 위해 국민들이 총파업을 벌일 것을 촉구한다.
이튿날에는 수십만명의 시위대가 러시아공화국 의사당으로 몰려들어 쿠데타 세력을 규탄한다.
쿠데타 사흘째에는 시민들과 탱크부대가 충돌해 시민 5명이 숨지고 10여 명이 부상한다.
결국 쿠데타를 주도한 국가비상위원회 위원들이 모두 체포되고 KGB 고위 간부들과 군 장성들이 옐친에 대한 지지를 표명함으로써 보수강경파의 쿠데타는 사흘 만에 막을 내리고 만다. /YTN

 

1991 - 소련 공산당 보수파, 쿠데타 시도

소련은 혁명으로 시작해 결국은 쿠데타로 막을 내렸다. 1917년 레닌의 혁명으로 정권을 탈취한 때로부터 74년이 지난 1991년 8월 19일, 소련의 공산당 보수파 세력이 고르바초프 대통령의 실각을 획책했다.
공산당을 복권하고 소련의 분열을 막아보겠다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옐친 러시아공화국 대통령과 민주화를 요구하는 수만명의 모스크바 시민은 쿠데타를 용납하지 않고 저항했다. 이들이 러시아의회를 사수하기 위해 바리케이드를 쳤지만 쿠데타 세력은 시민들을 향해 발포하지 못했다. 결국 쿠데타는 실패로 끝나, 공산당보수파도 소련의 운명도 끝이 났다. 고르바초프의 개혁을 비판하며 내세운 보수파의 쿠데타 목적은 소련의 빈곤을 구하는 새로운 지도체제를 수립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그것은 명분일 뿐이었다. 진짜 의도는 25%나 감소되는 소련의 핵무기에 비해 15%밖에 감소되지 않는 미국의 핵무기 감소율을 규정한 미소전략무기제한협정(START)에 고르바초프가 서명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고르바초프는 연방을 구성하는 15개 공화국 모두에 과거 이상의 주권을 인정한 ‘연방조약’에도 서명할 예정이었다. 보수파는 공산당의 권력을 약화시키는 이들 정책을 저지하기 위해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었다.
쿠데타가 발발하고 80시간이 지나 크리미아 반도의 휴양지에 억류됐던 고르바초프가 매우 곤혹스런 표정으로 시민들 앞에 나타났다. 도로에는 파괴된 레닌의 흉상과 KGB 창설자 제루진스키의 거대한 상들이 어지럽게 쓰러져있었다. 고르바초프는 의연한 모습을 유지하려 했으나 실권은 이미 옐친에게 넘어가 있었다. 권력을 장악한 옐친의 압력으로 고르바초프는 공산당을 해산했고 각 공화국의 연방이탈도 승인했다. 12월 고르바초프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 국가 ‘소비에트 연방’ 대통령직을 사임한다. /조선
 

 

 

옐친 /브리태니커

 

1991 - 소련 쿠데타 발생

1991년 8월 19일 소련에서 공산당의 강경파 간부들이 주도한 쿠데타가 일어났다. 쿠데타의 목적은 신연방조약을 반대해 이를 이전 상태로 되돌리고 보수파의 시대로 회귀하려는 데 있었다. 그러나 충분한 준비 없이 실행된 쿠데타는 3일 만에 막을 내렸다. 그 결과 소련 공산당은 종말을 맞았으며,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 움직임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한편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정적으로서 러시아 국민들의 지지를 얻고 있던 보리스 옐친은 쿠데타가 일어나자 이를 기회로 삼아 자신의 입지를 더욱 공고히 했다. 당시 러시아 공화국은 1990년 6월 독립국임을 선포하고 러시아 법이 공화국에서 가장 우선임을 공고히 함으로써 소련을 유지하려는 고르바초프의 노력을 무산시켰다. 또한 옐친이 새로운 연방을 결성해 러시아가 주도적인 역할을 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냄으로써 공공연하게 소련의 해체를 유도했다. 이런 상황에서 보수 세력이 일으킨 쿠데타가 실패로 돌아가자 옐친은 러시아 공화국 내에서의 공산당 활동을 금지하고 영토 내의 소비에트 재산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는 등 연방 해체에 박차를 가했다. 마침내 1991년 12월 8일 러시아 연방, 우크라이나, 벨로루시가 새로운 독립국가연합(CIS)을 결성하는 데 서명함으로써 소련은 정식으로 해체되었다. /브리태니커

 

 

1989 - 동독시민, 헝가리 경유해 오스트리아 탈출 러시

 

 

평민당 서경원 의원이 19

89년 6월 28일 0시 35분

쯤 안기부 수사요원들에

의해 서울 중부 경찰서에

구속수감되고 있다. /조선
 

1988 - 서경원 의원 밀입북(8.19~8.21)

평민당 서경원 의원이 1988년 8월 19일부터 21일까지 북한을 밀입북했다. 서의원은 유럽여행중 성낙영 목사를 통해 접촉한 북한인사 정모씨의 주선으로 체코를 경유 방북했다. 북한체류중 허담이 배석한 가운데 김일성 주석과 면담, 통일문제 등에 관해 회담을 가졌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사실을 뒤늦게 안 공안당국은 서의원을 이듬해 1989년 6월 28일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했다. 공안당국은 이 사건을 전형적인 국회간첩단 사건으로 단정하고 서의원이 활동해온 정치권과 재야단체에 수사초점을 맞췄으며 특히 당시 김대중 총재의 사전인지 여부 등을 둘러싸고 조사과정에서 정국의 팽팽한 긴장을 초래하기도 했다.

이 사건으로 이길재 평민당 대외협력위원장, 방양균 비서관 등 9명이 국가보안법상 불고지죄 등의 혐의로 구속 또는 불구속 기소됐다. 서의원은 1심에서 실형을 선고받고 의원직을 상실했다. /조선

 

 

 

전대협 학생들이 1991년 경희대

천강당에서 열린 범민족대회 개막

에서 함께 노래를 부르고 있다. /조선
 

1987 - 대한민국, 전국 95개대 학생들, 충남대학교에서 전국대학생대표자회의(전대협) 결성 /위키백과  

1987 -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발족

1987 -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발족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약칭 전대협)가 1987년 8월 19일 정식 발족했다. 전국 각 대학 총학생회장이 1987년 7월 5일 연세대에 모여 故 이한열군 장례식 절차를 논의하던 중 전국적인 대중조직 결성의 필요에 따라 전대협을 결성키로 합의했다.

이후 3차례의 사전모임을 거쳐 이날 발족한 전대협은 주로 반독재ㆍ반미투쟁ㆍ학원민주화 등의 제반 운동에 힘써왔다. 특히 1988년의 남북학생회담 시도는 국민에게 통일문제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켰고 노태우 대통령의 7.7선언 등을 이끌어내는데 기여했다.

전대협은 이후 변화하는 학생들의 다양한 요구를 수용할 수 없다며 기구를 해체, 1993년 4월 한총련을 결성했다. /조선

 

1987 -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발족
1987년 8월 19일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가 발족했다.
전국 대학의 총학생회장들이 1987년 7월 5일 연세대학교에 모여 그해 6월 9일에 사망한 연세대생 이한열군의 장례식 절차를 논의하던 중 전국적인 대중 조직의 필요성이 부각됨에 따라 전대협을 결성하기로 합의한 것이다.
전대협은 주로 반독재 및 반미투쟁, 학원 민주화 등의 운동을 펼쳤다. 특히 1988년의 남북 학생회담 시도는 전 국민들에게 통일문제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키는 계기가 됐다.
그러나 전대협은 이후 투쟁 일변도의 정책으로 대중적인 학생들의 지지를 얻어내지 못해 기구를 해체한 후 1993년 5월 ‘한총련(한국대학생총학생회연합)’으로 재발족했다.

이철 동아닷컴 기자 kino27@donga.com /동아닷컴TV 2010-08-18 18:05:45 

http://etv.donga.com/view.php?category=002013

 

 

1986 - 대한민국의 프로게이머 노재욱 출생 /위키백과

노재욱(魯宰旭, 1986년 8월 19일~ )은 대한민국의 워크래프트 III 프로게이머였다. 아이디 Lucifer로 유명하며, 사용하는 종족은 언데드였다. 프로스트웜 유닛을 즐겨 사용하며, 창의적인 플레이와 상대방의 허를 찌르는 플레이 스타일로 '대마왕', '로재욱동무'라는 별명을 얻었다. MBC GAME의 Warcraft III World War등 수많은 프로리그에 참가했고, 덴마크 MYM 게임단 소속으로 NGL onE에서 세 번, WC3L에서 한 번 우승하는 등 전성기를 보냈다. 2009년 3월 군입대 문제로 사실상 은퇴를 결정하였으며, 동년 4월 14일 입대하였다.

주요 수상 경력 /위키백과

 

 

1983 - 대한민국의 미스코리아 금나나 출생 /위키백과

금나나(1983년 8월 19일 ~ )는 대한민국의 미스코리아이다.

대구광역시 출신으로 2002년 경북대학교 의대 재학중 미스코리아에 출전하여 제46회 미스코리아 진(眞)에 뽑힌다. 그 후 미국으로 유학, 하버드 대학에 진학 생물학을 공부하였다.

2007년 한국 로레알-유네스코 여성생명과학진흥상 특별상을 수상했다.

출신 학교

  • 경북과학고등학교
  • 경북대학교 의과대학 (중퇴)
  • 하버드대학교 생화학과

    저서

  • 《나나 너나 할 수 있다》
  • 《금나나의 공부일기》
  • 《나나의 네버엔딩 스토리》

    /위키백과

     

     

    1983 - 도미니카 공화국의 야구 선수 후안 세데뇨 출생 /위키백과

    후안 세데뇨(Juan Cedeno, 1983년 8월 19일 ~ )는 도미니카 공화국의 야구 선수이자, 한국 프로 야구 두산 베어스의 외국인 선수(투수)이다.

    2009년 4월 26일 두산 베어스와 계약금 2만 달러, 연봉 13만 달러의 조건으로 입단 계약을 맺었다. 이미 검증되었다기보다는 육성형 용병으로 조련한다고 하여 "산업연수생"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2009년 플레이오프 5차전의 부진으로 시즌 후 재계약하지 않았다. /위키백과

     

     

    1982 - 전두환 대통령 아프리카 4국(+캐나다) 순방 중 나이지리아 공식방문(19~22일) 

    전두환 대통령은 영부인 이순자여사와 함께 케냐, 나이지리아, 가봉, 세네갈 등 아프리카 4개국 대통령과 카나다 총독의 공식 초청을 받고 8월 17일부터 31일까지 이들 5개국을 공식 방문한다. 전 대통령은 5개국을 순방하면서 케냐의 모이 대통령, 나이지리아의 샤가리 대통령, 가봉의 봉고 대통령, 세네갈의 디우프 대통령 및 카나다의 트뤼도 수상과 정상회담을 통해 최근의 국제정세와 지역정세에 대해 의견을 교환하고, 상호 관심사와 양국간의 협력 강화 방안에 관해 협의하게 된다. 8월 17일부터 19일까지 케냐, 19일부터 22일까지 나이지리아, 22일부터 24일까지 가봉, 24일부터 26일까지 세네갈의 순서로 아프리카 순방을 끝내고 8월 28일부터 31일까지 카나다를 방문한다. 전두환 대통령의 아프리카 순방은 아프리카 제국과의 우호 관계 강화를 도모하고 경제적으로도 동 지역에 적극 진출하도록 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며, 또한 방문하게 될 4개국이 모두 남북한 동시 수교국이라는 점에서 우리의 외교적 행동 반경을 넓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체신부에서는 전두환 대통령의 케냐, 나이지리아, 가봉, 세네갈 및 카나다 방문을 기념하면서 이 우표를 발행한다.

    (우표발행안내) /minbs2000.com.ne.kr/kor 

     

    1982 - 전대통령 아주·加·순방

    전두환 대통령은 영부인 이순자 여사와 함께 8월 17일부터 31일까지 14박 15일간 아프리카의 케냐·나이지리아·가봉·세네갈 등 4국과 北 미의 캐나다를 순방, 정상외교를 폈다. 한국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아프리카」를 방문한 전대통령은 거대한 잠재력을 갖고 있는 검은 대륙의 정상들과 대좌, 우의의 새 장을 열었다. 전대통령의 방아는 비동맹에서의 대 북한 열세를 만회했고 그들과 자원 교류의 길을 터 놓았다. /everyoung.ne.kr/bbs  /Google

     

     

    1982 - 국방부, 북한주민 이현주 귀순을 발표

     

      

    1982 - 소련 우주선 소유즈-T 7호 발사

    1982년 5월 13일 소련의 우주 비행사 베레조보이(Anatoly N. Berezovoy)와 레베데프(Valentin V. Lebedev)가 탑승한 소유즈-T 5호(Soyuz-T 5)가 살류트 7호(Salyut 7)와 랑데뷰하기위해 발사된다. 이들은 우주 정거장에 머무는 첫 팀이 된다. 이들은 211일간 우주 정거장에 머문 후 12월 10일 소유즈-T 7호(Soyuz-T 7)로 지구로 돌아온다.

    소유즈-T 7호는 8월 19일 발사되어 살류트 7호와 랑데뷰한 후 12월 10일 귀환하였는데, 거기에는 여성 우주비행사 S. 사비츠카야가 동승하였다.

    살류트는 7호까지 발사되어, 소유즈와는 T 7호까지 도킹을 하였다.

     

    1982년 4월 19일 - 우주 정거장 살류트 7호(Salyut 7)가 발사된다. 살류트 7호는 아직까지도 궤도에 머물고 있다.

    1982년 5월 13일 - 소련 우주 비행사 베레조보이(Anatoly N. Berezovoi)와 레베데프(Valentin V. Lebedev)가 살류트 7호(Salyut 7)와 랑데뷰하기위해 소유즈-T 5호(Soyuz-T 5)로 발사된다. 이들은 우주 정거장에 머무는 첫 팀이 된다. 이들은 211일간 우주 정거장에 머문 후 소유즈-T 7호(Soyuz-T 7)로 지구로 돌아온다.

    http://bemil.chosun.com/brd/view.html?tb=BEMIL089&pn=8&num=54

     

    소련의 살류트는 7호까지 발사되어, 소유즈와는 T7호까지 도킹을 하였다. 이 T7호는 1982년 8월 19일 발사되어 12월 10일 귀환하였는데, 거기에는 여성우주비행사 S.사비츠카야가 동승하였다.
    http://chang256.new21.net/board/board.php?db=202&no=3613

     

     

    1981 - 대한민국, 한계령 도로 확장 포장공사 완공 /위키백과

     

     

    1980 - 국보위, 사학 운영쇄신책 발표

    1980 - 대한민국, 국가보위비상대책회의, 사학 쇄신책 발표 /위키백과  

     

     

    1980 - 사우디아라비아 여객기 리야드에 불시착 폭발. 301명 사망

     

     

    1980 - 대한민국의 가수 그룹 "신화"의 멤버 전진 출생 /위키백과

    전진(1980년 8월 19일(1980-08-19) (29) ~ )은 대한민국의 가수이다. 현재 소속사는 오픈월드 엔터테인먼트이다. 1998년에 음악 그룹 신화의 일원으로 데뷔하였다. 2009년 10월 22일, 논산 육군훈련소로 입소하였다.

    대표작 /위키백과

     

    신화(神話, SHINHWA)는 대한민국의 남성 6인조 댄스 그룹이다. 1998년 3월 24일 '해결사'로 데뷔했으며, 현재 9장의 정규앨범과 1장의 여름앨범, 4장의 겨울앨범, 1장의 베스트 앨범을 발매한 상태다.

    데뷔와 활동 /위키백과

     

     

    1980 - 대한민국의 배우 손태영 출생 /위키백과

    손태영 (1980년 8월 19일 ~ )는 대한민국의 배우이다.

    대구광역시에서 태어났으며 2000년 제44회 미스코리아 출신이다. 종교는 개신교이다. 가족으로는 1999년 제43회 미스코리아 출신인 손혜임이 있다. 2000년 KBS 야!한밤에로 방송에 데뷔하였다.

    출신학교 /위키백과

     

     

    1979 - 소련 우주선 소유즈 34호, 우주체재 175일 기록세우고 귀환

     

     

    1973 - 이탈리아의 축구 선수 마르코 마테라치 출생 /위키백과

    마르코 마테라치 (이탈리아어:Marco Materazzi, 1973년8월 19일, 이탈리아레체 ~ )는 이탈리아축구 선수이다. 현재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소속의 수비수이다. 장신을 바탕으로 거친 수비를 펼치는 것으로 유명하다.

    AC 페루자에서 활약할 당시 팀 동료였던 안정환이 한 TV프로그램에 출연해 그 당시 마테라치가 자신에게 마늘냄새가 난다고 하는 등 다소 불편한 관계를 유지했다고 밝혀 화제가 된 바 있다.

    선수 경력 /위키백과

     

     

    1971 - 대한민국, 서울대학교 문리대 교수들, 대학자유화 요구 선언 발표 /위키백과

     

     

    1969 - 사단법인 흥사단 설립

     

     

    1969 - 미국의 야구 선수 타이론 우즈 출생 /위키백과

    타이론 우즈(Tyrone Woods, 미국 플로리다, 1969년 8월 19일 ~ )는 미국의 전 야구 선수로, 본명은 타이론 윌리암 우즈(Tyrone William Woods)이다. 한국 프로 야구와 일본 프로 야구 외국인 선수로 활약했다.

    선수 활동 /위키백과

     

     

    1967 - 사우디아라비아의 전 축구 선수 사이드 알 오와이란 출생 /위키백과

    사이드 알 오와이란 (아랍어: سعيد العويران, Saeed Al-Owairan, 1967년 8월 19일 ~) 은 사우디아라비아의 전 축구 선수로, 선수 시절에 공격수로 활약하였다.

    오와이란은 과거 "사막의 마라도나" 라고 불리며, 1994년 FIFA 월드컵에서 사우디아라비아 대표팀의 16강전 진출에 크게 공헌하였다. 특히 그는, 그 대회 조별 리그의 벨기에와의 경기에서 상대 수비수 4명과 골키퍼를 제치고 골을 넣었는데, 이 골은 FIFA의 세기의 골 순위 6위 (FIFA's Goal of the Century rankings) 에 뽑혔다.

    하지만, 1994년 FIFA 월드컵에서의 활약 이후로 하향세를 탔으며, 오와이란을 결정적으로 실추시킨 것은 사우디아라비아의 국교로서, 이슬람교에서도 엄격하다고 여겨지는 와하브파의 계율 위반이었다. 그는 이 계율 위반으로 2년 남짓 사이에 출장 정치 처분을 피할 수 없게 되었고, 그 영향으로 1996년 AFC 아시안컵과 1998년 FIFA 월드컵에 출장이 금지되었다. 1998년 FIFA 월드컵에 출전하긴 했지만 왕년의 활약은 하지 못했고, 2001년, 1988년부터 뛰어오던 알 샤바브에서 은퇴하였다. /위키백과

     

     

    1964 - 한국, 국제의원연맹(IPU) 가맹

    1964 - 국제의원연맹(IPU)에 가입

    1964 - 대한민국, 국제의원연맹(IPU) 가입 /위키백과

    국제의원연맹 (Inter-Parliamentary Union, IPU) 이란 1889년에 설립된 국제적인 의회기구이다. 설립목적은 국제평화 및 협력 도모, 그리고 의회제도 정착이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그 활동을 정지했지만 1945년부터 재개하였다. IPU의 최초 목적은 국제재판 사상의 보급이었는데, 2차대전 후에는 평화와 전후 재건이 주안점이 되었다. 해당 연맹은 국제연합의 자문기구로써 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2010년 현재 총 회원국은 152개국이며 본부는 스위스 제네바에 위치하고 있다.

    한국과의 관계 

    대한민국은 1964년 8월에 스웨덴 코펜하겐에서 열린 제 53회 총회에서 정식 회원으로 가입하였다. 이후 1984년 제 70회 총회, 1997년 4월 제 97차 총회·제 160차 이사회를 서울에 유치하였다. 한편 평양에서는 1990년 85차 총회가 열렸다. /위키백과

     

     

     

    내각책임제하의 제2공화국

    9개월을 이끈 운석 장면 박

    사 /조선

     

    1960 - 장 면, 국무총리 인준
    4·19 혁명으로 국무총리가 된 장면을 국회에서 인준하다. 8.23 장면내각성립. /KBS

     

    1960 - 장면, 제2공화국 총리 피선(1960)
    4.19혁명 후 구성된 민의원 본회는 1960년 오늘 민주당 대표최고위원인 장면 의원을 제2공화국의 초대 국무총리로 인준한다.
    그는 민의원 재적 228명 가운데 117명으로부터 찬성표를 얻어 국무총리에 피선됐다.
    장면 의원은 하루 전 윤보선 대통령으로부터 국무총리 후보로 지명됐다.
    장면 총리는 이듬해인 1961년 5·16군사정변으로 총리 취임 9개월 만에 실각하고 만다. /YTN

     

    1960 - 장면, 제2공화국 총리에 피선

    장면 의원이 1960년 8월 19일 국회에서 찬성 1백17표, 반대 1백7표로 국무총리에 피선됨으로 제2공화국이 정식 출범했다. 이승만의 하야로 구성된 허정 과도내각은 내각제 개헌안 통과(6.15)와 민-참의원 선거(7.29)를 실시해 새로운 의회를 구성했다.

    민-참 양원은 8월 12일 합동회의에서 민주당 구파 지도자 윤보선을 제2공화국 대통령에 선출했다. 윤대통령은 당초 김도연을 국무총리에 지명했으나 김도연이 민의원 투표에서 부결되는 바람에 장면을 총리로 지명했다.

    장면 내각은 출발부터 순탄치 않았다. 분단으로까지 이어진 민주당 신구파간의 갈등은 2공화국의 주요 과제라 할 수 있는 반민주 잔재 청산과 반부패 개혁정책 추진을 지연 또는 좌절시켰다. 게다가 교사들의 전국교원노조 결성, 김일성의 남북연합 제의, 육사 8기생들의 숙군 주장 등 국내외의 도전도 만만치 않았다.

    국민들의 기대는 실망으로 이어져 결국 10월 11일에는 4.19부상학생들이 의사당에 난입하는 사태로까지 발전했다. 1961년에 들어서도 상황은 개선되지 않아 학생들의 남북협상론이 급물결을 타며 사회가 혼란스러워지자 장면 총리는 반공특별법과 데모규제법을 성안하는 등 남북협상 바람을 잠재우려 안간힘을 써야했다. 결국 5월16일 박정희 소장의 5.16군부쿠데타가 발발, 2공화국은 수립 9개월여 만에 종막을 고했다. /조선

     

    1960 - 장면, 제2공화국 총리에 피선
    1960년 8월 19일, 4·19혁명 후 구성된 민의원 본회에서 민주당 대표최고위원인 장면 의원이 제2공화국의 초대 국무총리에 피선됐다. 장면 의원은 하루 전 윤보선 대통령으로부터 국무총리 후보로 지명됐다.
    내각책임제하의 제2공화국 국무총리는 정부의 실질적인 권력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집권 후 내정과 사회 불안으로 어려움을 겪다가 이듬해인 1961년 5·16군사정변으로 총리 취임 9개월 만에 실각하고 말았다.

    이철 동아닷컴 기자 kino27@donga.com /동아닷컴TV 2010-08-18 18:05:45 

    http://etv.donga.com/view.php?category=002013

     

    1960 - 대한민국, 장면 제2공화국 총리에 피선 /위키백과

    8월, 의원 내각제로 권력 구조가 바뀐 제2공화국 국회에서 국무총리에 선출되어 제2공화국의 두 번째 국무총리를 지냈다. 민주당 신파에서는 그를 대통령 후보로 지목하고 있었으나, 그가 대통령 후보가 되면 내각책임제 하에서의 실권은 구파가 장악할 것을 염려하여 그의 경쟁자인 구파 출신 윤보선을 대통령으로 선출하는데 찬성하였다. 그러나 취임 초부터 윤보선은 총리 후보로 자파의 김준연을 지목했다. 그러나 8월 17일 부결되었다. 김준연이 인준부결된 뒤 장면은 총리후보자로 지명되었다. 1960년 8월 18일 미국 대통령 아이젠하워에게 서한을 보냈다. 아이젠하워에게 보낸 서한에서 장면은 정치 경제적 개혁이 긴요함을 역설하면서 경제성장은 새로운 정부의 핵심정책이 될 것이라 주장하였다.

    장면이 차기 총리로 유력시되자 그가 친일파였다는 소문이 다시 확산되었다. 8월 19일 국회에서 장면의 총리 지명동의안 표결이 있기 전 김두한이 나타나 장면의 친일경력을 문제삼았다. 김두한은 장면에게 역사적인 귀한 표를 던져서는 안된다는 내용과 장면의 창씨개명을 적은 문건을 뿌리고, 장면을 국무총리로 뽑는다면 의사당을 불살라 버리겠다고 외쳤으나 사전 제지당했고, 장면의 총리 인준안은 무난히 통과되었다. 총유효득표수 225표 중, 찬성 117, 반대 107, 기권 1로 정족수를 채우고 총리에 피선되었다.

    총리에 취임한 장면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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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면한 민족적 과제인 경제적 건설을 수행해야 할 중대한 책임을 통절하게 느껴 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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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고 연설하였다. 8월 1일 장면은 국무총리에 선출되어 20일부터 조각에 착수하였으나, 민주당 내 신·구파간 싸움에 휘말려 들게 됐다. 내각책임제하의 국무총리는 임명제 총리와는 다르게, 인사 임면권이 부여되었고, 신파 내에서도 소장파(少長派)는 노장파와 별도로 행동하여 주요 요직을 요구하기도 했다. ... /위키백과

     

     

     

    /위키백과

     

    1960 - 세계 최초로 러시아 인공위성 '스푸트니크5'에 실려 우주비행을 한 두마리의 개가 무사히 귀환함 /동아사이언스 

    1960 - 소련의 우주개 벨카와 스트렐카를 태운 스푸트니크 5호가 발사되어 궤도를 돌다. /위키백과

    1960 - 세계 최초, 개 두마리 우주비행 후 무사히 귀환
    1960년 8월 스푸트니크 5호가 두 마리의 개와 토끼, 생쥐, 파리 등을 싣고 발사됐다. 우주선에 실린 개 두 마리의 이름은 벨카(다람쥐)와 스트렐카(작은 화살)였다. 이들은 누워서 젤리 같은 우주식을 먹을 수 있는 캡슐에 실려 있었다. 이들이 탄 스푸트니크 5호는 지구를 17바퀴 돈 뒤 무사히 지구로 돌아왔다.

    (사이언스 시간여행 과거속으로)

    김상연 기자 /동아사이언스 2007년 08월 15일 
    http://www.dongascience.com/kids/contents.asp?mode=v

    iew&article_no=20070810131903 

     

    지구를 완전히 일주하는 궤도비행에 살아온 동물은 구소련의 우주견이었다. 1960년 8월 스푸트니크 5호에 탑승한 스트렐카와 벨카라라는 2마리의 우주견은 지구궤도를 17바퀴 돈 다음 귀환함으로서 지구궤도 비행 후 살아 돌아온 최초의 생명체가 되었다. 이것은 최초의 유인비행에 불과 8개월 앞서 이루어진 것으로 유인비행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몇 번 더 동물을 무사 귀환시켜야 했다.

    1960년 12월에는 다시 2마리의 개가 처음으로 위험한 방사능으로 가득한 반알렌대를 통과한 후 무사히 돌아왔다. 1961년 3월에는 한달 후에 있을 최초의 유인 비행에 관한 리허설로 개 한 마리와 실물크기 인형이 스푸트니크7호로 발사되어 무사히 귀환하였다. 한편 미국은 유인비행의 리허설이 되는 실험을 위해 개에 비해 초보적인 기계조작도 할 수 있을 만큼 영리한 원숭이와 침팬지 20마리를 선발하여 45명의 수의사와 전문가로 하여금 훈련을 시키도록 하였다.
    http://www.spaceschool.co.kr/academy/academy03_d_txt.html 

     

    사람보다 먼저 우주로 간 '동물 우주 비행사'
    러시아 '스푸트니크 5호' 동물 우주 귀환 실험 첫 성공
    1000 ℃ 대기 마찰열 견디는 우주선 보호 기술 고안
    '벨카'·'스트렐카' 무사히 돌아와

    미국 항공 우주국(NASA)은 설립되자마자 유인 우주 비행 계획인 머큐리(로마 신화의 ‘전령의 신’) 계획을 세우고 1959년 4월에 7 명의 전투기 조종사를 우주 비행사로 선발합니다.

    모든 것을 공개적으로 진행한 미국과 달리 러시아는 비밀리에 유인 우주 계획인 보스토크(‘동쪽’이라는 뜻) 계획을 준비하고 있었어요. 1960년 3월 전투기 조종사 20 명을 우주 비행사로 뽑게 됩니다.

    이들은 별과 우주 공간을 항해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미국에선 애스트로넛(Astronauts), 러시아에서는 코스모넛(Cosmonaut)으로 불렸습니다.

    그러나 미국과 러시아는 아직 이들이 타고 갈 우주선을 완성하지 못한 상태였어요. 그리고 유인 우주 비행에 앞서 사람 대신 다른 생명체가 우주 비행에서 무사히 돌아와야만 하기 때문에 미국과 러시아는 동물 훈련을 실시했습니다.

    미국은 원숭이와 침팬지를, 러시아는 개를 훈련시켰습니다. 먼저 동물 우주 실험을 시작한 쪽은 러시아였어요. 1960년 8월 스푸트니크 5호로 알려진 우주선 보스토크에는 2 마리의 개와 토끼, 생쥐, 파리 등이 실려 발사되었습니다. 벨카(다람쥐)와 스트렐카(작은 화살)라는 이름의 2 마리의 개는 전용 우주복을 입었습니다.

    이들은 누워서 젤리 형태의 음식을 먹을 수 있을 만큼의 좁은 캡슐에 넣어져 우주선에 실렸습니다. 스푸트니크 5호는 바이코누르 우주 기지에서 발사돼 지구를 17 바퀴 정도 돈 뒤 무사히 귀환했습니다.

    이 비행의 성공은 러시아 과학자들이 고안한 우주선 보호 기술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우주선이 지구 궤도를 돌고 나서 대기권에 진입할 때의 속도는 무려 초속 7 km에 이릅니다.

    특수한 보호 장치가 없다면 대기와의 마찰로 뜨거워져 우주선이 녹아버리거나 부서지고 말지요. 러시아 과학자들은 연구를 거듭한 끝에 우주선의 둘레에 타서 녹는 물질을 여러 겹으로 칠하는 방법을 고안했습니다.

    바깥 쪽에 칠해진 물질이 타 들어가면서 온도를 빼앗아 가기 때문에 우주선은 1000 ℃가 넘는 고온에서도 끄떡없게 되었지요. 이 기술로 인해 벨카와 스트렐카는 사상 최초로 우주 비행을 한 뒤 살아 돌아온 동물이 되었습니다. 물론 같이 탔던 나머지 동물들도 무사히 돌아왔어요.

    동물 우주 귀환 실험에서 첫 성공을 거둔 러시아는 같은 해 12월 2 마리의 개를 우주로 쏘아 올렸어요. 그러나 항법 장치가 고장나 탑승한 개들이 그만 우주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러시아는 이에 굴하지 않고 1961년 3월 2 차례에 걸쳐 개 1 마리와 우주복을 입은 나무 마네킹을 실은 로켓을 발사해 지구로 귀환시키는 데 성공했습니다.

    미국도 1961년 1월에 머큐리 우주선에 ‘햄’이라는 이름의 침팬지를 태웠어요. 비록 러시아에 비해 짧은 우주 비행이었지만 무사히 지구로 돌아왔습니다. 이들 동물들의 우주 비행 실험은 미국과 러시아가 우주선에 사람을 태울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되었습니다.

    <정홍철ㆍ스페이스스쿨(www.spaceschool.co.kr) 대표> /소년한국일보 2007-06-07 14:20

    http://kids.hankooki.com/lpage/edu/200706/kd2007060714195977360.htm 

     

      

    1954 - 이탈리아 총리(1945-53) 데 가스페리 사망

     

     

     

    이란 쿠데타 모습 /조선
     

    1953 - 이란에 친 팔레비 쿠데타가 일어나 모하마드 모사데그 총리가 축출되다. /위키백과

    1953 - 이란 `팔레비` 쿠데타

    1908년 이란에서 석유가 발견된 이래, 이란 원유를 독점한 것은 영국 자본 ‘앵글로ㆍ이라니안 석유회사(AIOC)’였다. 2차대전후 제3세계에서 민족주의가 고양되는 가운데 이란에서도 석유산업을 되찾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이런 국민적 감정을 타고 석유산업을 국유화시키는데 앞장선 사람이 무사데크다. 그는 영국은 물론 소련과도 일정한 거리를 둔 리버럴한 성향의 노(老) 정치가였다. 1951년 3월 국유화 법안이 상ㆍ하 양원에서 만장일치로 가결되자 무사데크는 일약 국민적 영웅으로 떠올랐고 곧 총리에까지 올랐다. 당시의 이란 왕은 팔레비였다.

    이 상황을 그냥 지나칠리 없었던 영국이 이란석유 불매운동과 경제봉쇄조치로 이란 경제에 타격을 가하자 어느덧 국민들 사이에서는 반(反)무사데크 목소리가 높아졌다. 팔레비는 기회를 틈타 무사데크를 파면했으나 오히려 무사데크를 지지하는 세력들의 힘에 밀려 로마로 쫓겨났다.

    그러나 1953년 8월19일, 미국 CIA 지원을 받은 친(親)팔레비 자헤디 장군이 쿠데타에 성공함으로써 사태가 역전된다. 무사데크 체포와 함께 이란의 탈(脫)제국주의 몸부림도 2년 만에 끝이 났다. /조선

     

     

    1951 - 영국의 대중음악가 존 디콘 출생 /위키백과

    존 디콘(John Richard Deacon, 1951년 8월 19일~)은 영국의 록 밴드 (Queen)의 베이시스트이다. 존 디콘은 영국 중서부의 레스터 지방에서 태어났다. 7세 때부터 기타를 배우기 시작하여 나중에 베이스로 전향했다. 첼시 칼리지(현재 킹스 칼리지 런던의 일부)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한 그는 2학년 때인 1971년 퀸에 가담했지만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는 중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퀸의 두 번째 앨범을 발표하기까지 교사 생활을 계속 병행했다고 한다. 1974년에는 퀸의 3집 엘범(Sheer Heart Attack)수록곡인 <Misfire>를 처음으로 작곡하였고, 후에는 〈I Want To Break Free>,〈Another one Bites The Dust〉, 〈Spread Your Wings〉,〈My Life Has Been Saved>등을 작곡하게 된다. 그는 영화 OST를 위한 프로젝트 밴드 더 이모탈즈(The Immortals)를 결성하여 싱글<No Turning Back>을 발매하기도 하였다. 그가 즐겨쓰던 베이스는 Fender Precision Bass라고 한다. 그는 손가락 주법과 피크주법을 모두 사용한 대표적인 베이시스트의 유형이다. 존은 다른 가수들과는 달리 노래를 부르지 않았으며, 무대 위에서도 상당히 조용한 인물이었다. 그는 결국 1997년에 발매한 〈Queen Rocks〉이후 은퇴하였다. /위키백과

     

     

    1950 - 파키스탄 정치인 무하마드 미안 숨로 출생 /위키백과  

    무하마드 미안 숨로 (1950년 8월 19일, 신드어:محمد میاں سومرو)는 파키스탄의 정치인이다.

    생애

    * 1950년 8월, 신드 주의 주도 카라치에서 태어났다.

    * 2007년 11월, 총리로 취임하였다.

    * 2008년 8월, 페르베즈 무샤라프 대통령이 사임하자, 임시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 2008년 9월, 아시프 알리 자르다리에게 대통령직을 넘겨주고 사임하였다.

    /위키백과

     

     

    1947 - 대동청년단 결성

     

     

    1946 - 이슬람교 이스마일파 대집회(1946)
    1946년 오늘 파키스탄 카라치에서 이스마일파 이슬람교도들이 집회를 연다.
    이스마일파의 영적 지도자인 아가칸 3세를 만나기 위해 신자들이 대규모로 몰려들었다.
    신자들은 아가칸 3세의 몸무게와 같은 양의 다이아몬드를 저울에 달아 그에 대한 존경심을 표현했다.
    이스마일파는 그리스철학과 그리스도교의 영향을 받은 이슬람교 시아파의 한 분파다. /YTN

     

     

    1946 - 미국의 제 42대 대통령 빌 클린턴 출생 /위키백과   

    1946 - 미국의 제42대 대통령 클린턴(Clinton, Bill) 출생

    클린턴 [Clinton, Bill, 1946.8.19~ ] 

     

      

    1945 - 베트남 8월 혁명

     

     

    1944 - 이스라엘의 전 축구 선수, 현 축구 감독 모르데차이 스파이글러 출생 /위키백과

    모르데차이 스파이글러(히브리어:מרדכי שפיגלר‎, Mordechai Spiegler, 1944년8월 19일 ~ )는 소치에서 태어난 러시아이스라엘 축구 선수였다. 그의 원래 이름은 모탈레흐 스파이글러였으나, 이스라엘로 가서 이름을 모르데차이 스페이글리어로 바꾸고 이스라엘의 축구 선수로 활약했다. 그는 이스라엘에서 골을 많이 넣은 선수로 유명했다. 모르데차이 스파이글러는 2007년7월 4일, 그의 고향인 소치2014년 동계 올림픽의 개최지로 선정되자 개최지인 소치가 고향인 사람들은 소치가 고향이었던 모르데차이 스페이글리어의 이름을 따서 '모르데차이 스파이글러의 기적'으로 부른다. /위키백과

     

     

    1944 -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활약한 독일의 군인 귄터 폰 클루게 자살 /위키백과  

    귄터 "한스" 폰 클루게 (Günther “Hans” von Kluge 1882년 10월 30일~1944년 8월 19일)은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활약한 독일의 군인이다.

    생애

    포젠(현재 폴란드령 포즈난(Poznań)에서 프로이센 왕국의 마르쿠스 클루게 소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사관학교 시절 지적능력이 매우 뛰어났기 때문에 동료들이 [영리한 한스(kluge Hans)]라고 불렀다. 그림 동화 중 그와 비슷한 등장인물 한스를 독일어로 [영리한, 현명한]을 의미하는 [Kluge]로 바꿔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그 때문에 그는 한스 귄터라고 불리게 되었다. 본명에 물론 [한스]는 붙지 않는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육군 대위로써 1916년 베르됭 전투에 종군했다. 전쟁 후 바이에른 공화국의 육군에 남아있으면서 1933년 소장으로, 1936년에는 중장으로 승진해 4군 사령관으로써 1939년 폴란드 침공에 종군했다. 1940년 5월에 개시된 프랑스 침공작전인 서방전격전에서는 4군을 이끌고 아르덴느 숲을 통과해 프랑스군을 격파했기에 그 전공으로 같은 해 7월 육군 원수로 승진했다.

    1941년 6월에 개시된 바르바로사 작전에서는 해임된 페도르 폰 보크 원수를 대신해 12월부터 중부집단군의 지휘를 맡았다. 그 시기 하인츠 구데리안의 2 기갑집단의 보급을 책임지고 있던 입장이었기에 두 사람은 작전 지휘를 둘러싸고 대립하여 후에 결투 사건까지 벌어졌었다.

    1943년 10월 교통사고로 병가를 보낸후, 1944년 7월부터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후임으로 프랑스에 전개한 서부전선군 사령관에 임명되어 서부전선을 맡아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쇄도해오는 연합군과 싸웠다. 독일국방군 내부에서 일어난 반 히틀러 활동의 주모자중 한사람인 헤닝 폰 트레슈코프 소장은 중부집단군에서 클루게의 작전참모을 맡았었다. 클루게는 반 히틀러활동에 대해 복잡한 심정을 갖고 있었다. 그는 트레스코우의 히틀러 암살계획을 알고 있었으나, 1944년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의 히틀러 암살 기도가 실패로 끝난 후, 반 히틀러세력에 대한 지원을 거절했다. 그러나 클루게가 연루된 것을 의심한 히틀러에 의해 사령관에서 해임되고 베를린으로 호출 명령을 받았다. 그는 베를린으로 오는 도중 히틀러에게 "희망없는 전쟁을 끝내길 바랍니다"라는 유서를 남긴 후 극약을 마시고 자살했다. /위키백과

     

     

    1942 - 연합군, 프랑스 디에프 상륙작전(1942)
    1942년 오늘 연합군이 독일군 점령지인 프랑스 북서부 항구도시 디에프(Dieppe)의 해안으로 침투한다.

    5천여 명의 캐나다 군과 천여 명의 영국군, 30대의 전차가 이 상륙작전에 투입됐다.
    연합군은 이 항구도시를 기습해 부두시설과 비행장을 파괴하고 포로들을 구출한 뒤 재빨리 퇴각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독일군은 해안 15km를 따라 지뢰와 철조망, 함정을 설치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갖춰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더구나 연합군의 일부 상륙정들이 진로를 벗어나 늦게 도착하면서 상륙작전은 새벽이 아닌 밝은 대낮에 시작되고 말았다.
    결국 연합군은 1179명이 사망하고, 2190명이 포로로 잡혔다.
    반면에 독일군은 311명 사망에 280명 부상으로 비교적 가벼운 손실을 입고 연합군의 상륙작전을 막아냈다. /YTN

     

     

    1939 - 독일 소련 통상협정, 베를린서 조인

     

     

    1939 - 영국의 수학자 앨런 베이커 출생 /위키백과

    앨런 베이커(Alan Baker, 1939년 8월 19일~)는 영국 런던에서 태어난 수학자이다.

    베이커는 정수론을 공부하며, 특히, 초월수론을 공부하여 그에 대한 뛰어난 업적을 인정받아 1970년 필즈상을 수상하였다. 수상 당시 나이는 31세였다. 현재는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트리니티 칼리지 소속의 수학 교수이다.

    그의 학생들 중 유명한 사람들로 존 코우츠(John Coates), 데이빗 메서(David Masser), 로저 히쓰-브라운(Roger Heath-Brown)등이 있는데, 이중 존 코우츠의 제자중 프린스턴 대학교 수학과의 앤드루 와일스 교수는 유명한 난제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해결한 유명한 사람이다. /위키백과

     

     

    1938 - 장개석, 공산당계 단체에 해산명령

    1938 - 중국 국민당 장제스, 중국 내 16개 공산계 단체에 해산명령 /위키백과

     

     

    1936 - 스페인의 시인 가르시아 로르카 사망

     

     

     

    1909년년의 디아길레프, 발렌틴 알    

    렉산드로비치 세로프 /위키백과              

      

    1929 - 러시아의 발레 프로듀서, 무대미술가 디아길레프(Dyagilev, Sergei) 사망  

    디아길레프(댜길레프) [Dyagilev, Sergei Pavlovich, 1872.3.31~1929.8.19]

     

     

    빌프레도 파레토 

     

    1923 - 이탈리아의 경제학자 빌프레도 파레토 사망 /위키백과

    빌프레도 페데리코 다마조 파레토(Vilfredo Federico Damaso Pareto, 1848년 7월 15일 - 1923년 8월 19일)은 이탈리아 출신의 정치학자, 사회학자, 경제학자이다.

    그는 이탈리아의 상위 20%의 인구가 80%의 부를 소유한다는 사실을 관찰해 낸 것으로 유명하다. 이는 나중에 조지프 주란(Joseph Juran)등에 의해 일반화되어 파레토 법칙, 파레토 분포로 발전한다.

    파레토 지수는 분배의 불평등을 나타내는 지수이다. /위키백과

     

     

    1911 - 프랑스-일본, 통상항해조약 조인

     

     

    1909 - 폴란드의 작가 예지 안제예프스키 사망 /위키백과

    예지 안제예프스키(Jerzy Andrzejewski, 1909년 8월 19일 ~ 1983년 4월 19일)는 폴란드의 작가이다.

    작품 /위키백과

     

     

    1907 - 대한자강회(大韓自彊會)에 해산령

     

     

     

    이남규 선생 /조선

     

    1907 - 독립운동가 이남규 사망

    항일투쟁상소를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시킨 수당 이남규 선생이 1907년 8월 19일 사망했다. 1855년 서울 미동에서 출생한 선생은 1875년 사마시에 합격한 뒤 승문원권지부정자·형조참의·영흥부사·안동관찰사 등을 역임했다.
    일제의 침략 책동시기인 1893년부터 1905년까지 명성황후 시해 및 친일정권 수립의 만행을 규탄하는 `청절왜소` 등 항일 상소투쟁을 통해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했다. 선생은 단발령에 반발해 예산으로 귀향, 충남 홍산에서 의병을 일으킨 민종식을 숨겨주다 공주감옥에 투옥됐다.
    선생은 1907년 군대 해산으로 의병활동이 확산되자 일본군에 체포돼 압송중 장남과 함께 일제에 의해 피살됐다. 국가보훈처는 선생을 1997년 `9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조선

     

    1907 - 독립운동가 이남규 사망
    항일운동가 수당 이남규가 1907년 8월 19일 사망했다.
    1855년 11월 3일 충남 예산에서 출생한 이남규는 1875년 사마시에 합격한 뒤 형조참의, 영흥부사, 안동관찰사 등을 역임했다.
    이남규는 명성황후 시해사건 및 친일정권 수립의 만행을 규탄하는 ‘청절왜소(請絶倭疏)’ 등 항일 상소투쟁을 통해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했다. 그는 1907년 충남 홍주에서 의병을 일으킨 민종식에게 은신처를 제공한 혐의로 공주감옥에 투옥됐다가 석방된 후 일본군에 의해 아들과 함께 피살됐다.

    이철 동아닷컴 기자 kino27@donga.com /동아닷컴TV 2010-08-18 18:05:45 

    http://etv.donga.com/view.php?category=002013

     

     

    1904 - 일본군, 여순(旅順) 총공격 개시

     

     

    1883 - 디자이너 가브리엘 샤넬 출생

    1883 - 프랑스의 패션 디자이너 코코 샤넬 출생 /위키백과  

    1883 - 프랑스의 패션디자이너 샤넬(Chanel, Gabrielle) 출생

    샤넬 [Chanel, Gabrielle Bonheur, 1883.8.19~1971.1.10]

     

     

     

    케손 /브리태니커

     

    1878 - 필리핀 연방공화국의 초대 대통령 케손(Quezon, Manuel) 출생

    케손 [Quezon (y Molina), Manuel (Luis), 1878.8.19~1944.8.1]

    케손은 필리핀 연방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을 지낸 필리핀정치가·독립운동가이다. 마닐라의 산토토마스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했으며, 1899년 에밀리오 아기날도가 이끄는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케손은 필리핀이 독립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미국과 협상하는 것이라고 확신하고, 1909년 미국 하원의 필리핀 상주 대표로 임명되자 미국 정부로부터 필리핀 독립을 승인받기 위해 투쟁했다. 그는 1916년 미국 의회에서 존스 법이 통과되기까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법안은 필리핀의 독립을 약속했으며 독립에 필요한 몇몇 사전 조치를 규정했다. 1916년 마닐라로 돌아와 새로 구성된 필리핀 상원에 진출해 상원의장이 되었다. 그는 또한 1934년 타이딩스-맥더피 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이 법안을 근거로 독립공화국 수립의 전단계인 연방공화국 정부가 수립되었으며, 필리핀의 완전독립 시기도 보장받게 되었다. 1935년 9월 17일 케손은 필리핀 연방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재임하는 동안 군대를 재조직하고 정부 내의 부정부패를 없애는 작업을 추진했다. 1941년 재선되었으나 1942년 일본이 필리핀을 점령하자 미국에 망명정부를 수립했다. 자서전 <위대한 투쟁 The Good Fight>(1946)을 썼으며, 필리핀의 완전독립을 보지 못한 채 결핵으로 죽었다. /브리태니커

     

    "미국인들에 의해 운영되는 천국 같은 정부보다는

    차라리 지옥 같더라도 필리핀인들의 손으로 직접 꾸려지는 정부가 낫다. "

     

    - 마누엘 케손

     

     

    1871 - 오빌 라이트 출생
    세계 최초로 비행기를 만든 라이트 형제 중의 아우인 오빌 라이트가 1871년 이날 태어났다. 오빌은 1903년 12월17일 인류최초의 동력비행기 '플라이어'호를 타고 세계 최초로 하늘을 나는데 성공하였다. /KBS

     

     

    1848  - 캘리포니아 골드 러쉬: 뉴욕 해럴드 지가 캘리포니아의 금광 발견을 미국 동부에 보도하다. /위키백과  

     

     

    1839 - 프랑스의 루이 다게르, 사진기의 원리 공개

    1839 - 루이 다게르가 사진기의 원리를 공개하다. /위키백과

    1839 - 프랑스 발명가 루이 다게르, 근대 사진술 개발 발표 /위키백과

    1839 - 프랑스, 다게레오타이프 발명 공식 발표

    다게르가 현상에서 정착까지의 프로세스를 완성하여 아름다운 영상을 영구적으로 고정하는데 성공한 것은 1837년이었다. 다게르는 자신의 스튜디오의 일각을 촬영했다. 이 사진은 ‘예술가의 스튜디오’라고 제목이 붙어지고 다게레오 타입의 싸인과 1837년의 년호가 기입되어 있으며 현재 피리의 프랑스사진협회에 소장되어 있다.
    다게르가 다게레오 타입을 완성했을 때 니세포르 니엡스는 벌써 4년전에 사망했지만 두 사람 사이에 맺어진 계약은 니세포르를 대신해서 아들인 이시돌에게 인계되었기 때문에 10년간의 기한부계약은 파기되지는 않았다. 그런데 다게르는 아들 이시돌을 감언이설로 계약의 일부를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개정했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사진술의 발명은 디세포르와 다게르의 약속으로 두 사람의 공동연구의 성과이기 때문에 완성의 공로는 당연히 두 사람이 똑같이 차지하여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다게르는 일방적으로 다게레오 타입으로 공표했던 것이다.
    당시 파리의 천문대장이며 저명한 물리학자인 아라고박사는 다게레오 타입의 발명의의와 그 성능을 인정하고 1839년 1월7일 과학 학사원에서 다게르의 사진술 발명에 대한 강연을 했다. 이 강연에서 아라고박사는 프랑스정부에게 사진술 발명의 권리를 매수하도록 권장했다.
    1월 14일에는 다게르와 이시돌 니엡스의 두사람과 당시의 내무장관 듀카딜과의 사이에 가계약이 체결되었다.
    그해 6월15일에는 다게르와 니엡스의 아들은 이 발명을 정부에 양도하고 그 댓가로 다게르는 종신연금 6천프랑, 니엡스의 아들에게는 동일하게 4천프랑이 지급되게 하고 두 사람이 죽은 뒤에는 그들의 미망인이 각기 그 반액의 연금을 받을 수 있게하는 내용의 법안이 기초되어 의회에 회부되었다. 이 법안은 프랑스 하원을 7월 3일 통과하고 7월30일에는 상원을 통과했다. 특히 아라고박사는 7월3일 하원에서의 강연에서 다게레오 타입의 특질과 효용성을 역설했다. 사진의 장래에 대해서 언급하기를 정확한 기록성, 신속성 그리고 진실성이라는 점에서 매스커뮤니케이션의 효용성을 예건한 사실은 높이 평가된다.
    법안이 상하양원을 통과한 1839년 8월19일 아라고박사는 과학학사원에서의 과학아카데미와 미술아카데미 합동집회 석상에서 다게르타입의 기술적인 요소를 상세히 설명, 발표하였다. 이 과학학사원에서의 아라고박사의 공식발표는 바로 사진술의 발명선언으로 인정되고 따라서 8월19일을 사진술 발명의 날로 기념하여 전해지고 있다.
    (사진은 누가 발명했는가?) 1989_05_7582
    출처:사진예술
    http://www.photoart.co.kr/community/bbs.php?table=series_03&query=view&uid=87

     

    사진술의 발명(요약)

    1. 1839년 1월 7일 프랑스의 루이스 다게르가  다게레오타이프( Daguerreotype, 은판사진)를 발명한 사실을 세상에 공표.

    2. 다게레오 사진술이 발명되고 3주도 채 지나지 않은 1839년 1월 25일, 영국의 아마추어 과학자인 윌리엄 헨리 폭스 탈보트가 자신도 카메라 옵스큐라의 상을 고정시키는 방법을 발명했다고 영국의 왕실 학회에 알렸다. 탈보트가 서둘러 준비한 자료를 발표했을 때, 그는 상당히 실망한 상태였다. 왜냐하면 사진을 발명한 최초의 인물이 되고자 했던 그의 희망이 다게레오에 의해 무참히 깨져 버렸기 때문이다.

    3. 프랑스 과학아카데미 종신회원 프랑스와 아라고박사가 과학학사원에서의 과학아카데미와 미술아카데미 합동집회 석상에서 다게레오타입의 기술적인 요소를 상세히 설명, 발표.

    이 과학학사원에서의 아라고박사의 공식발표는 바로 사진술의 발명선언으로 인정되고 따라서 8월19일을 '사진술 발명의 날'로 기념하여 전해지고 있다.
    4. 다게르는 수녀간은 니엡스와 함께 그리고 1833년 니엡스의 죽음으로 수년간은 혼자만의 연구 끝에 결국 그는 자신이 만족할 만한 다게레오타이프를 완성 시켰고 1839년 8월 19일 프랑스 정부에 의해서 공식적으로 사진이 세상에 공표 되었다.

     

    사진술의 발명

    1939.01.07 - 프랑스, 다게르에 의한 다게레오타이프 발명 사실을 발표

    1839.01.25 - 영국의 탈보트, 사진술의 발명을 왕실학회에 보고

    1839.08.19 - 프랑스 정부, 다게레오타이프 발명을 공식 발표

     

      

    1819 - 증기기관 발명가 제임스 와트 사망 

    1819 - 증기엔진을 발병한 스코트랜드의 엔지니어인 James E. Watt 사망 /동아사이언스

    1819 - 증기기관을 발명한 영국의 기계 기술자 와트(James Watt) 사망

    와트 [Watt, James, 1736.1.19~1819.8.19(8.25)]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 소년시절을 아버지 일터에서 보내는 동안 수세공()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래머 스쿨을 마친 뒤, 1755년 런던으로 가 수학기계공 견습이 되었고, 1757년 글래스고대학 수학기계공으로 임명되었다. 1763년 최초 발명인 투시화법기()를 만들어 낼 때까지 J.블랙, J.로벅 등의 과학자들과 교류하였다.

    1764년 와트는 대학으로부터 뉴커먼 배수기관() 모형의 수리를 의뢰받았다. 이 기관의 열효율이 좋지 못한 점을 발견하고 1765년 콘덴서를 분리하는 착상을 하였다. 이 착상을 로벅이 구체화하려고 하였으나 피스톤의 패킹 문제에 부딪쳐 개발은 진전되지 못했다.

    동료인 크레이그가 죽자, 1767년~1774년까지 스코틀랜드 운하측량사()로서 일하였다. 1768년 버밍엄의 업자 M.볼턴을 알게 되었고, 1769년 로벅의 원조를 받아 증기기관에 관한 최초의 특허를 받았다. 1773년 로벅이 파산하자 1774년 볼턴이 와트기관의 특허 소유권을 획득하였다.

    1775년 볼턴은 와트의 특허권을 25년간 연장함으로써 버밍엄에 공장을 경영, 볼턴과 와트의 유명한 공동사업 ‘볼턴-와트 상회’가 문을 열게 되었다. 그들 최초기관은 1767년 운전을 개시하였으나, 실용화되기까지는 다시 5년이 걸려 이 기업은 1780년대까지는 이익을 보지 못하였다. 1775년~1780년대까지 와트는 그의 기관을 완성시키기 위하여 전력을 기울였다.

    팽창작동() ·복동기관() ·유성기어장치의 회전기관(1782 특허) ·평행운동(1784) ·보일러의 매연방지장치(1785) ·원심조속기(調)(1788) ·압력계(1790) 등의 발명과 마력()의 단위에 의한 동력의 측정 등은 주요한 업적이다.

    또 버밍엄의 진보적 과학자 등의 모임인 ‘달의 모임’의 핵심 멤버가 되었고, J.프리스틀리와 만나면서부터 화학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1794년 새로운 기업 ‘볼튼-와트 및 가족상회’를 설립하여 점차 자녀들에게 사업을 이양해 가는 한편, 1795년 소호의 주조공장을 개설, 기관의 대량생산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1800년 최초 특허권의 기한이 만료됨으로써 볼턴과 공동사업도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는 여생을 조각기계의 발명에 바치다가 히스필드에서 죽었다.

    (와트의 사망일자가 브리태니커와 네이버에는 8월 25일로 , wikipedia와 BBC-biography, 과학동아, 조선-오늘의 역사 등 많은 자료에는 19일로 되어 있습니다. ^.@)

     

     

    1662 - 프랑스의 수학자 블레즈 파스칼 출생 /위키백과

    1662 - 프랑스의 철학자, 수학자 파스칼(Pascal, Blaise) 사망

    파스칼 [Pascal, Blaise, 1623.6.19~1662.8.19]

    파스칼은 프랑스의 수학자·물리학자이자 <명상록 Pensées>으로 유명한 그리스도교 사상가이다. 일찍부터 수학에 천재적 재능을 나타내어 17세에 <원추곡선론 Essai pour les coniques>으로 학계의 주목을 받았으며, 22세에는 최초의 계산기를 발명했다. 또한 물리학에도 관심을 가져, 1648년에는 수은 기압계를 만들어서 대기압에 관한 토리첼리의 가설을 증명했고, 6년 뒤에는 피에르 드 페르마와 함께 근대 확률이론의 기초를 확립하는 등 과학자로서 명성을 떨쳤다. 그러나 일찍이 얀센주의적 신앙을 받아들였던 그는 1654년 강력한 신앙적 체험을 한 뒤, 포르루아얄 수도원에 들어가 엄격한 신앙생활을 시작했다. 1656~57년에 쓰여진 <시골 친구에게 쓴 편지 Les Provinciales>는 예수회의 공격에 맞서 앙투안 아르노를 변호한 글로, 그리스도교의 진정성을 회복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나아가 그는 그리스도교 호교론을 집필하기 위한 단상들을 써 모으기 시작했고, 이는 사후에 <명상록>으로 정리·출간되었다. 인간의 실존적 비참과 신앙의 신비를 갈파한 이 작품은 그리스도교 문학의 정수로 꼽히는 동시에, 장 자크 루소, 앙리 베르그송 등 후세의 철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브리태니커 (6.18일치)

     

    "인간은 자연에서 가장 약한 갈대이다.

    그러나 그것은 생각하는 갈대이다.

    그것을 으스러뜨리기 위해 온 우주가 무장할 필요도 없다.

    한 줄기 바람, 한 방울 이슬로도 그것을 죽일 수 있다.

    그러나 우주가 그것을 으스러뜨린다 해도, 인간은 한층 더 고귀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죽는다는 것과 우주가 자신보다 강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우주는 그런 것을 전혀 알지 못한다."

     

    - 블레즈 파스칼

     

     

    1631 - 영국의 시인, 문학비평가 드라이든 출생

     

     

    1493 -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3세 사망 /위키백과

    프리드리히(1415년 9월 21일~1493년 8월 19일)은 1440년부터 독일 왕으로 선출되었고 1452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되었다.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문의 일원이다. 독일의 군주로는 프리드리히 4세로 부르기도 하며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는 프리드리히 3세가 된다. 그는 1452년 37세의 나이로 포르투갈의 엘리너 공주와 결혼을 했다. /위키백과

     

     

     

    배중손이 이끈 삼별초군이 대몽항

    쟁의 근거지로 삼았던 전남 진도군

    용장산성. /조선

     

    1270 - 삼별초, 진도 도착

    고종 18년(1231), 몽고가 고려에 침입하자 최우의 무신정권은 몽고가 수전(水戰)에 약한 점을 이용, 수도를 강화도로 옮겨 항전의지를 불태운다. 몽고가 개경환도를 요구하며 침략과 철수를 반복하던 중 최씨정권이 무너지자 고종은 1259년 개경환도를 약속하고 태자를 원나라에 입조하게 함으로써 고려와 원나라의 무력충돌도 29년만에 종지부를 찍었다. 실권은 여전히 최씨정권을 무너뜨린 무신들에게 있었지만 1260년에 즉위한 원종이 이들마저 제거함으로써 개경환도도 순조로워 보였다.

    이때 예상치 않은 복병이 등장했다. 최우의 사병(私兵)이었던 삼별초였다. 군사를 일으켜 새 왕을 옹립한 삼별초가 1000여척의 배에 몸을 싣고 강화도를 떠나 진도에 도착한 것은 1270년 8월19일이었다.

    삼별초 정부는 몽고의 침략에 시달렸던 영ㆍ호남 백성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제주도까지 점령, 한때는 남해안을 지배하는 사실상의 해상왕국을 이뤄냈지만 상대는 막강한 여ㆍ원(麗ㆍ元)연합군이었다. 결국 1273년 2월, 제주도로 옮긴 마지막 삼별초가 1만여명의 연합군에 패함으로써 장장 3년에 걸친 항쟁도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조선

     

     

     

    아우구스투스, 수

    단 메로에에서 발

    견된 청동상(AD

    1세기) /브리태니커

     

    14 - 로마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 사망

    14년 8월 19일 나폴리 근처 놀라에서 로마의 초대 황제인 아우구스투스가 사망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독재정치로 공화제가 무너진 뒤, 아우구스투스는 카이사르의 후계자로서 권력을 장악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황제가 되었다. 그가 추진한 공화정의 회복은 겉모습에 불과했고 사실상 독재정권이 수립되었다. 그러나 밖으로는 끝없는 정복전쟁을 벌여 제국을 팽창시켰으며, 안으로는 군사·치안·경제·행정 전분야에 걸친 개혁을 실시해 로마에 지속적인 평화와 번영을 가져다주었다. 로마에 의한 지배로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문화 유산이 후세에 전달되었고, 유대교와 그리스도교가 널리 퍼졌다. 걸작 건축물도 수없이 세워져 일부가 오늘날까지 전해지는데, 로마에 있는 마르켈루스 극장과 거대한 아우구스투스 광장 유적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아우구스투스는 개인적으로 드루수스 전기와 시·경구 등 많은 글을 썼던 것으로 알려졌으나 전해지지는 않는다. 그의 뒤를 이어 티베리우스가 로마의 제2대 황제가 되었다. /브리태니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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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화상이 매일 연재하고 있는 [오늘의 인물과 역사]는 [우표로 본 오늘의 인물과 역사]의 기초자료로 만드는 것입니다. 오로지 취미와 교육적 목적으로 만들고 있지만, 자료의 충실을 기하느라 본의 아니게 저작권에 저촉되는 일이 생기까 염려하고 있습니다. 혹시 문제가 있으면 미리 알려주셔서 고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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