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인물과 역사/우표로 본 오늘~

화상 2016. 9. 14. 14:21

오늘~ 9/14  

 

 

"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2006 - 교황 “무함마드는 칼로써 교리 전파” 발언 파문

지하드 언급…이슬람권 “무책임한 발언” 발칵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이슬람 관련 발언이 이슬람권에서 큰 파문을 낳고 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지난 12일 고향인 독일 방문길에 한 대학에서 집전한 미사에서 14세기 비잔틴제국 황제인 마누엘 팔레올로고스가 했다는 말을 인용하면서 이슬람을 자극했다. 교황은 “팔레올로고스가 ‘이슬람 예언자 무함마드(마호메트)가 가져왔다는 새로운 것을 보라. 그러면 무함마드가 자신의 교의를 칼로써 전파하도록 명령을 내리는, 그런 사악하고 비인간적인 것들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교황은 “팔레올로고스는 지하드(성전) 문제에 관해 이야기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에 이슬람권은 이슬람과 지하드를 크게 왜곡했다며 들끓고 있다. 손꼽히는 이슬람학자인 자베드 가미디는 14일 <뉴욕타임스>에 “교황의 발언은 대단히 무책임하다. (특히) 지하드라는 개념은 결코 칼로써 이슬람을 전파한다는 게 아니다”라고 비판했다. 터키의 이슬람 고위성직자인 알리 바르다콜루는 “교황은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원한의 감정을 도덕적 가치들과 다른 종교에 대한 존경심으로 대체해야 한다”며, 이런 상황에서 오는 11월로 예정된 교황의 터키 방문이 무슨 의미가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교황의 터키 방문이 차질을 빚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교황은 추기경이던 2004년 터키의 유럽연합 가입을 반대해 터키인들의 미움을 산 바 있다. 일부에서는 아랍과 이슬람 국가들이 바티칸 주재 대사를 소환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편다.

파키스탄 의회는 15일 교황이 이슬람권에 파문을 일으킨 무함마드 관련 발언을 철회하도록 요구했다. 의회는 만장일치로 교황이 이슬람에 대해 ‘경멸적인 발언’을 했다고 비난하는 결의안을 채택하고, 무슬림들의 감정을 상하게 한 점을 사과하라고 촉구했다.

바티칸 당국은 사안의 심각성을 느끼고 교황 대변인 성명을 통해 교황 발언에 이슬람인들의 정서를 자극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었다며 진화에 나섰다. 베네딕토 16세는 보수적인 성향으로 전임자인 요한 바오로 2세에 비해 이슬람과의 관계에 회의적인 자세를 지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경 선임기자 /한겨레 2006-09-15 오후 07:30:07

http://www.hani.co.kr/arti/society/religious/157374.html 

 

 

  

 

2005 - 노무현 대통령 유엔총회 기조연설(뉴욕)

노대통령 “강대국 중심주의 경계해야”

노무현 대통령은 14일(한국시각 15일 오전) 제60차 유엔총회 고위급 본회의(유엔 정상회의) 기조연설을 통해, “세계 여러 분야에 남아 있는 제국주의적 사고와 잔재를 완전히 청산해야 하고, 일부에서 나타나고 있는 강대국 중심주의 경향을 경계해야 한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이날 유엔 개혁 방향과 관련해 “21세기 국제질서는 강대국과 약소국, 그리고 중견국을 포함한 모든 나라가 공존하며 함께 이익을 누리는, 공동번영의 질서가 되어야 한다”며 이렇게 말했다.

그는 특히 “오늘날 국제질서를 주도하고 있는 나라들이 먼저 자신들의 과거와 미래에 대한 각별한 성찰과 절제가 있어야 할 것”이라며 “이웃나라에 대한 존중과 국제적인 합의 창출, 대립 해소를 위한 노력을 한층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강대국들이 평화와 공동번영이라는 국제질서를 이루려고 노력할 때 ‘힘’과 ‘대의’ 간의 긴장은 해소될 수 있을 것”이라며 “우리는 그 가능성을 유럽연합(EU)에서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제 유럽은 힘의 논리에 기초한 질서, 반목과 대립의 질서를 극복하고, 평화와 공존, 화해와 협력의 공동체로 자리매김하고 있다”며 “동북아에도 유럽연합과 같은 질서가 실현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그는 또 “유엔은 회원국 모두의 의견이 존중되는 호혜적 공동체를 지향해야 한다”며 “안보리 개혁도 민주성, 책임성, 효율성의 바탕 위에서 도덕적 권위를 증대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어야 하고, 또 다른 강대국 중심주의가 아니라 국제사회의 화합을 촉진하는 개혁안이 도출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와 관련해 정우성 외교보좌관은 “이웃나라의 신뢰를 얻으려는 노력 없이 힘과 경제력 등 국력에만 의존하는 경향을 일반적으로 지칭해서 제국주의적 사고와 잔재라고 말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청와대 핵심관계자는 “대통령의 기조연설은 일본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뉴욕/김의겸 기자 kyummy@hani.co.kr  /한겨레 20050915 18:32

http://www.hani.co.kr/arti/politics/diplomacy/64753.html 

 

 

 

 

 

2005 - T-50 고등훈련기 품목 NATO에 등록

국내 최초의 초음속 항공기인 T-50 고등훈련기를 구성하는 품목 3천400개 가운데 2천700개가 북대서양조약기구, NATO에 등재됐습니다.
국산 무기와 장비 품목이 NATO의 품목등록 전담기관인 '남사'에 등재되면 50여 회원국과 비회원국이 '상호' 색인자료를 열람할 수 있게 돼 우리나라의 국제적 위상이 높아지고 방위산업 수출에도 도움을 줄 것으로 보입니다.
한국항공우주산업이 주도적으로 개발한 T-50 고등훈련기 품목에는 NATO 내에서 우리나라를 뜻하는 '37'이라는 재고번호가 부여됐습니다.

/YTN 2005-09-14 13:28

http://www.ytn.co.kr/news/theme_view.php?tidx=573&key=200509141326007566

 

 


 

2005 - 미국의 영화감독 로버트 와이즈(Wise, Robert) 사망

와이즈 [Wise, Robert, 1914.9.10~2005.9.14]

대학 졸업 후 바로 촬영소에 들어간 뿌리깊은 영화인. 1933년 형이 일하던 RKO에 편집조수로 취직하면서 영화계에 입문, 편집자로 출발해 41년 걸작 <시민 케인>를 비롯한 여러 작품에 참여했다.
그의 첫 연출작은 B급 영화인 <고양이 인간의 저주>를 절반 정도 진행했던 군터 폰 프리치가 스케줄 때문에 스튜디오와 불화가 생겨 편집자였던 로버트 와이즈가 연출을 떠맡게 되면서부터. 이 작품으로 연출력을 인정받은 그는 이어서 <마드모아젤 피피>, <신체강탈자> 등의 B급 영화를 연속으로 만들며 재능을 인정받기 시작했다.
현상금을 건 권투에 관한 영화인 1949년작 <셋업>은 칸영화제에서 비평가상을 수상하며 그를 최고의 감독으로 끌어올렸다. 51년의 명작 SF < The Day The Earth Stood Still >로부터 시작하여, <세가지 비밀>, <사막의 대진격>, <상처뿐인 영광>, <나는 살고 싶다> 등을 만들며 헐리우드 최고의 감독이라는 위치를 확고히 한 로버트 와이즈는 제롬 로빈과 함께 시작적, 동적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뮤지컬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와 <사운드 오브 뮤직>으로 아카데미 감독상을 수상하며 전성기를 구가했다. <스타 트렉> 이후 10년만인 89년에 뮤지칼 <루프캅(Rooftops)>를 연출 했으나 반응은 신통치않았다. 만년에는 미국 감독협회 회장 등을 역임하며 헐리우드의 원로로 활동해왔다.

/네이버 영화

http://movie.naver.com/movie/bi/pi/basic.nhn?code=1345

 

 

 

- Annapurna Mountain Range

 

2004 - 여성산악인 故 지현옥씨 추모 동상 만들어져

서원대 미술교육과 동문들이 직접 제작

14일 서원대학교 미래광장에서는 우리나라 여성 산악인으로는 최초로 에베레스트를 등정한 고 지현옥씨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흉상제막식이 열렸다. 이 자리에는 산악인 엄홍길씨, 지씨와 함께 등정길에 올랐던 여성산악인 오은선씨 등 유명 산악인들이 참석해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1961년 충남 논산에서 태어난 지씨는 서원대 미술교육학과를 졸업한 뒤 본격적인 산악활동에 나섰다. 1993년 국내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했고, 세계최초로 여성 단독 무산소 8,000m 고산 등정 기록을 수립한 바 있다. 그러던 중 지난 1999년 4월 안나푸르나 두 번째 등정에 나섰다 하산길에 실종돼 히말라야에 묻혔다.
한편 지씨의 흉상은 청동으로 제작됐으며 지씨가 다닌 미술교육과 선후배 동문들이 직접 제작을 했다. 흉상 건립에 필요한 비용은 동문회와 학교 선후배들이 십시일반으로 모은 1200만원으로 충당했다. 이날 제막식에서는 흉상제막과 함께 생전의 등정 사진 30여 점도 전시됐다.
오옥균 기자 oog99@cbinews.co.kr /충북인뉴스 2004년 09월 16일 (목) 00:00:00
http://www.cbi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1027#

 

 

 

 

1991 - 남아공 평화협정 조인
흑인에 대한 백인정권의 차별정책으로 인종분쟁이 끊이지 않던 남아프리카 공화국! 

1991년 오늘 남아공 백인정부와 양대 흑인세력이 분쟁을 종식시키기 위한 평화협정에 조인한다.
이날 조인식에는 드 클레르크 대통령과 넬슨 만델라 아프리카민족회의 ANC의장, 그리고 줄루족에 기반을 둔 인카타자유당의 망고스투 부텔레지 총재 등 3명이 참가했다.
이 평화협정은 1984년 이후 만천여 명의 희생자를 내며 악화돼 온 흑백분규와 흑인 단체 간의 분규를 종식시키기 위해 선동적 언동의 금지, 정치폭력 문제를 다루기 위한 특별법원의 설치를 규정했다. /YTN

 

 


 

1983 - 영국의 가수 에이미 와인하우스(Winehouse, Amy) 출생

와인하우스 [Winehouse, Amy Jade, 1983.9.14~2011.7.23] 

영국의 싱어송라이터

런던의 예술전문학교 브릿 스쿨을 졸업한 에이미 와인하우스는 2003년 앨범 <프랭크(Frank)>로 데뷔하며 주목받기 시작했다. 2006년 발매한 앨범 <백 투 블랙(Back to Black)>으로 2008년 그래미 시상식의 올해의 노래ㆍ레코드 부문을 비롯해 최우수 신인 아티스트 등 5개 부문을 수상하며 전성기를 맞았다.
하지만 마약ㆍ과음ㆍ폭력 등으로 물의를 빚어왔으며, 2008년 4월에는 술집에서 일으킨 폭력사건에 이어, 같은 해 5월에는 마약 소지 혐의로 각각 체포된 바 있다. 2008년 1월부터 런던의 한 재활원에서 마약과 알코올 중독 치료를 받아왔다. 와인하우스는 청소년기에 심각한 외모 콤플렉스에 시달려, 개성을 주기 위해 짙은 눈화장과 문신 등을 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와인하우스는 2011년 7월 23일 런던 북부 캠덴의 자택에서 27세의 젊은 나이에 숨진 채 발견됐으며, 경찰은 약물과다 복용으로 인한 사망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2012 박문각 /네이버

 

 


 

1982 - 제27회 세계야구선수권대회(서울)에서 한국 우승

[어제의 오늘]1982년 제27회 세계야구선수권 한·일 결승전

ㆍ김재박 ‘개구리번트’ 기억 생생

전설로 기억되는 결승 마운드. 우리나라 선수들의 얼굴에서는 비장함마저 배어났다. 일본의 교과서 왜곡문제로 국민감정이 무척 상해 있던 터라 만석의 잠실구장은 응원열기로 터질 듯했다. 하지만 신예 선동열이 등판한 가운데 한국팀은 2회 초 일본에 2점을 뺏긴 뒤 한 점도 기록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8회말. 일본팀 투수가 높이 뺀 공에 김재박 타자가 펄쩍 뛰어오르며 배트를 갖다대면서 ‘개구리 번트’를 성공시켰다. 2-2 동점! 그리고 한대화가 좌측 폴을 절묘하게 맞히는 3점 홈런으로 대역전극을 만들어냈다. 그날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얘기를 트위터에서 들어봤다.
“교복을 입은 나는 동네 분식집에서 TV로 봤다. 그 이름도 선연한 한대화. 타자명문 동국대학교 학생. 투아웃 상황에서 자칫하면 동점에 만족해야 할 상황인데 볼에 가까운 공에 한대화가 사정없이 배트를 돌렸다. ‘크다!’ 조마조마하는데 공이 폴대에 맞고 왼쪽 관중석으로 낙하. 홈런이었다. 아주 잠시 잦아든 함성이 대폭발.”(@sanha88)
“한대화의 그 타구 장면을 보던 많은 꼬마들의 로망이 포스트를 맞히는 홈런을 때리는 것이었다. 정작 현실에서는 애먼 전봇대나 옆집 지붕을 맞히고 말았지만.”(@cyberdoc73)
“9회 선동열이 일본타선을 막아내던 순간까지 관중은 한대화를 연호했고 게임이 끝난 뒤 대회 MVP를 발표하는 이가 선동열을 말한다는 게 분위기에 휩쓸려 한대화라고 해버렸죠. 다음날 바로잡기는 했습니다만.”(@v4k)
김재박의 ‘개구리 번트’는 사인 미스 여부를 놓고 공방이 벌어졌다. 그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내가 번트댈 때 사인은 안났다. 그냥 혼자서 ‘기습번트를 대야겠다’고 생각했고, 그 생각이 너무 강해 볼을 빼는데도 따라가며 방망이를 댄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군사정권이 아시아국가로는 처음 유치한 이 대회를 위해 잠실야구장을 건립했고, 아마추어만 참가할 수 있는 조건을 충족하려 국가대표는 그 해 출범한 프로야구에 진출이 금지됐다. 국위선양의 목적이 뚜렷한 대회였던 셈이다. 이 대회에는 야구강국인 쿠바가 정치적 이유로 참여하지 않았다.

최민영 기자 min@khan.co.kr /경향신문 2010-09-13 22:18:11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

201009132218115&code=100100&s_code=ap005

 

 


 

 

 

1982 - 모나코 왕비 그레이스 켈리(Kelly, Grace) 사망   

켈리 [Kelly, Grace, 1929.11.12~1982.9.14] 

그레이스 켈리 사망

미국 영화배우 출신의 그레이스 켈리 모나코 왕비가 전날 막내 스테파니 공주와 함께 타고 가던 승용차가 산길에서 전복되는 바람에 중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 치료를 받던 중 1982년 9월 14일 뇌출혈로 사망했다. 53세였다.
1928년 11월 12일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태어난 그레이스 켈리는 18세 때 배우가 되기 위해 뉴욕의 아메리카 연극아카데미에서 연기수업을 마쳤다. 브로드웨이 연극무대에서 단역으로 출연 중 영화기획자의 눈에 들어 1951년 영화 '14시간'으로 은막에 데뷔했다. 그가 주목받는 여배우가 된 것은 '하이눈'에서 게리 쿠퍼 상대역인 약혼녀 '아미'역을 맡은 후부터였다. 이후 '다이얼 M을 돌려다' '상류사회' 등에 출연했고 1954년 '갈채'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1956년 4월 모나코왕 레이니에왕과의 결혼으로 세상을 놀라게 하면서 왕비로 변신했다. 생전에 3명의 자녀 캐롤란인 공주, 알버트 왕자, 스테파니 공주를 두었다. /조선

 

[책갈피 속의 오늘]1982년 그레이스 켈리 사망

몇 년 전 미국의 여성지 ‘우먼스 저널’이 독자를 대상으로 역사상 가장 우아한 여성에 대한 투표를 실시했다. 1위는 그레이스 켈리(1929∼1982).
인기 절정의 배우에서 왕비로 신분이 바뀐 그녀의 이야기는 현대판 신데렐라 그 자체였다.
그는 미국 필라델피아의 부유한 아일랜드계 가톨릭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건축회사 사장이었고 큰아버지는 퓰리처상을 수상한 극작가였다. 그녀는 1951년 영화계에 데뷔해 불과 5년 만에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그녀가 게리 쿠퍼의 아름다운 신부 역으로 출연하는 서부영화 ‘하이 눈’은 지금도 올드 팬의 기억에 남아 있는 서부영화의 고전이다.
1954년 그는 영화 촬영을 위해 모나코를 방문했다가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된다. 바로 모나코공국의 영주인 레이니에 3세 대공과의 만남이 그것이었다. 대공은 당시 31세의 총각이었다.
이듬해 대공의 청혼을 받은 켈리는 1956년 ‘상류사회’에 출연한 것을 마지막으로 은막을 떠났다. 당시 그의 결혼은 전 세계적 뉴스가 됐으며 모든 사람의 가슴속에 한편의 동화로 아로새겨졌다.
인구 3만 명에 우리나라의 웬만한 시보다 작은 규모로 관광과 카지노가 주 수입원이었던 모나코는 그 결혼으로 세계적인 관심 도시가 되면서 관광 수입이 급증하기도 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만남은 우연한 것이 아니라 치밀하게 연출된 비즈니스라는 주장이 이후 제기됐다.
대공이 당시 이 나라의 실권자였던 그리스의 선박 왕 오나시스의 권고를 받아들여 결혼작전을 벌였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오나시스는 인기절정의 기품 있는 미국 배우였던 켈리가 왕비가 되면 관광객 감소로 재정난을 겪고 있던 모나코가 국제적 관심을 끌 것으로 보고 우연을 가장한 만남을 연출해 성공시켰다는 것이다.
켈리는 1남 2녀를 두었으나 1982년 9월 14일 둘째 딸 스테파니가 몰던 승용차가 벼랑으로 떨어지는 사고로 사망했다. 그녀의 나이 53세 때였다. 그녀는 왕비가 된 뒤 공식 행사 외에는 일절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조용하게 왕실 생활을 유지했다. 그 철저한 절제와 자기관리는 바로 그녀가 많은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받았던 비결이기도 했다.
정동우 사회복지전문기자 forum@donga.com
 /동아닷컴 2005-09-14 03:00:00
http://news.donga.com/Culture_List/3//20050914/8228508/1

 

 

 

 

1979 -  한국-적도기니 국교 수립

적도기니는 남북한 동시 수교국이다. 한국과는 1979년 9월, 북한과는 1969년 1월부터 국교관계가 시작되었으며, 1980년 2월 이후 한국의 겸임공관()이 설치되었다. 1992년 대한수입은 2만 7000달러, 대한수출은 9000달러였으나 교역이 많이 이루어져 2001년 현재 대한 수출은 84만 1000달러이다. 2001년 현재 교민은 2명이다. /naver

 

 

 

 

 

1978 - 일본 TV애니메이션 <은하철도 999> 후지 TV에서 첫 방영

원작         마츠모토 레이지

감독         니시자와 노부타카

제작사     도에이 애니메이션

방송사     후지 TV

방영시기  1978년 9월 14일 ~ 1981년 4월 9일

화수        113화(요약편 제외)

은하철도 999》(일본어:銀河鉄道999긴가테쓰도 스리나인)는 마츠모토 레이지(松本零士)가 창작한 만화 또는 이를 원작으로 하는 애니메이션이다. 제목의 숫자 '999'는 원작에서는 '쓰리 나인'(Three-Nine), 한국판에서는 '구구구'라고 읽는다.

만화는 1977년부터 1979년까지 소년화보사소년 만화잡지 《소년 킹》 에 연재되었다. 애니메이션은 후지 TV를 통해 1978년9월 14일 부터 1981년 4월 9일까지 2년 6개월에 걸쳐 요약편을 포함하여 모두 113화가 방영되었다. 1979년1981년에는 린 타로가 감독한 극장판이 제작, 상영되었다. 대한민국에서는 1981년10월 4일부터 1983년1월 16일까지 문화방송에서 일요일 아침시간대에 방영되었다.

개요

미야자와 겐지(宮沢賢治)의 《은하철도의 밤(銀河鉄道の夜)》에 등장하는 은하철도에서 영감을 얻었으나, 열차의 운행 체계의 세부 사항은 일본의 옛 철도를 본땄다. 원작자 스스로 은하철도의 밤과 증기기관차에 타고 동경에 갔던 젊은 시절의 체험이 기본이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우주해적 캡틴 하록(宇宙海賊キャプテンハーロック)》과 함께 애니메이션화가 될 예정이었으나 실현되지 않다가 마츠모토 레이지 원작의 《우주전함 야마토(宇宙戦艦ヤマト)》가 갑자기 인기가 높아져 두 작품 모두 애니메이션화되었다. 같은 시기에 《우주전함 야마토, 새로운 여행》도 TV로 방영되었다.

만화판은 1977년부터 만화 잡지 《소년킹(少年キング)》'에 연재되어 잡지의 대표적인 작품이 되었다. 1981년에 연재가 종료되어, 당시에는 이것으로 완전히 완결되어 속편은 없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1996년부터 소학관(小学館)의 잡지에 속편을 연재하기 시작하여, 해당 잡지를 거쳐 웹상에 불규칙하게 연재하여 999화까지 그리기로 하였다.

신작은 41화까지 그려진 상태이다. 여기에서는 극장판 2편의 설정이 들어가 있어 만화판으로부터의 속편은 아니다. 하지만 단행본으로는 만화판 연재로부터 계속되는 번호가 붙여져 간행되고 있다. 신작에서는 세계관이 확대되고 설정이 적극 변경되어 다른 작품인 《우주해적 캡틴 하록》, 《퀸 에메랄다스》, 《천년여왕》, 《니벨룽겐의 반지》와 이야기가 복잡하게 이어졌고, 메텔과 에메랄다스의 관계도 이전의 라이벌에서 자매로 바뀌었다.

줄거리

배경은 은하계의 각 행성이 은하철도라 불리는 우주공간을 달리는 열차로 연결된 미래 세계(TV 애니메이션에는 서기 2221년으로 설정)이다. 우주의 부유한 사람들은 '기계의 몸체'에 정신을 옮겨 기계화 인간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있었으나 가난한 사람들은 기계의 몸을 얻을 수 없는 데다가, 기계화 인간에게 박해받고 있었다. 그러다가 무료로 기계의 몸을 준다는 안드로메다의 별을 목표로 주인공인 호시노 데츠로(星野鉄郎,한국명 철이)가 신비의 여인 메텔(メーテル)과 은하초특급 999호에 탑승하게 된다. 각 편은 기차가 머무르는 역(별)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로 진행되고 마무리되며, 별도로 전체적인 이야기가 진행된다. /위키백과

 

 

 

  

 

1975 - 테니스 스타 나브라틸로바 망명 발표

1975년 오늘 체코슬로바키아 출신 테니스 스타 마르티나 나브라틸로바(Martina Navratilova)가 미국으로의 망명할 뜻을 발표한다. 당시 18살이던 나브라틸로바는 US오픈 테니스대회 준결승전에서 패한 뒤 곧바로 뉴욕시의 이민국으로 찾아가 망명의사를 밝혔다.
나브라틸로바는 정치적인 이유가 아니라 국제대회에 자유롭게 출전하고 싶어 미국 망명을 결정했다고 밝힌다.
망명요청은 한 달도 안 돼 받아들여졌다.
나브라틸로바는 국적을 바꾼 지 3년 만인 1978년 윔블던대회에서 우승하는 등 왼손잡이로서 강한 서브와 뛰어난 발리(volley) 기술을 구사하며 일약 세계를 제패하는 국제적 테니스 스타로 성장한다. /YTN

 

 

 

 

1973 - 국무회의, 해병대 해체하는 국군조직법 개정안 의결

대한민국 해병대 역사 - 사령부 해체와 시련기 

해병대를 해군에 통합
자주국방태세의 확립과 경제적인 군 관리운영을 위하여 국방부훈령 제157호(국기관 912-018호, 1973.7.10)및 국기관 912-92호(1973.10.8)에 따라 1973년 10월 10일부로 해병대를 해군에 통합운영토록 하였으며 국군조직법(법률 제2624호 1973.10.10)을 개정하였다. 따라서 지휘 · 행정 · 군수지원부대는 해체하여 해군의 유사기능을 가진 부대에 흡수통합하고 전투부대는 해군에 통합운영하게 되었다.
 

http://www.rokmcus.com/xe/?document_srl=314 

 

 


 

  

1969 - ‘3선 개헌안’ 날치기 통과

[어제의 오늘]1969년 ‘3선 개헌안’ 날치기 통과

ㆍ유신독재 장기집권의 길로

정치인과 정치를 향한 국민들의 불신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직업 신뢰도 조사에서 정치인은 늘 꼴찌이거나 꼴찌에서 1~2등 수준에 머무르는 실정이다.

정치 불신을 낳는 큰 이유 가운데 하나는 의회민주주의의 상징인 국회에서의 ‘날치기’다. 다수당을 차지한 여당이 정치적 이익의 극대화를 위해 대화보다는 힘으로 밀어붙인다. 야당은 이에 맞서 육탄전을 벌이거나 회의장을 점거한다. ‘날치기의 공식’이다. 날치기는 정치인들의 정치력 한계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국민들로 하여금 정치 혐오를 느끼게 한다.
우리 의정사상 대표적인 날치기의 하나가 1969년 9월14일 새벽에 벌어졌다. 이날 새벽 2시30분쯤 여당이던 민주공화당은 박정희 대통령의 3선 연임을 허용하는 헌법 개정안을 날치기로 통과시켰다.
당시 야당은 개헌안이 박 대통령의 장기집권을 위한 것이라며 회의장 점거 농성을 벌였다. 대학가는 물론 고등학생들까지도 ‘3선 개헌반대’ 투쟁을 벌였다.
전국적인 반발이 일자 여당은 야당 의원들을 피해 국회 3별관(지금의 서울시의회)에서, 그것도 심야에 찬성 122표, 반대 0표로 개헌안을 처리했다. 경찰의 철통 같은 경비 속에서 개헌안의 국회 통과는 5분도 걸리지 않았다. 특히 이효상 국회의장은 의사봉 대신 주전자 뚜껑을 두드려 개헌안 통과를 선언하기도 했다. 개헌안의 주요 내용은 대통령의 3선 연임 허용,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결의 요건 강화, 국회의원의 행정부 장·차관 겸직 허용 등이다.
날치기 통과 후 국내외에서는 규탄 시위가 벌어졌다. 정부는 경찰 병력을 동원하고, 대학가에 휴교령을 내렸으며, 언론과 어용 학자들을 동원해 여론선전전을 펼쳤다. 결국 개헌안은 국민투표에 부쳐졌고, 투표율 77.1%에 65.1%의 찬성으로 개헌은 확정되었다. 박 대통령은 이후 연임했고, 유신체제 구축으로 장기집권의 길에 들어섰다.
3선 개헌안 날치기 후 30년, 우리 정치권에선 지금도 날치기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헌법재판소는 민주당 등 야당이 지난 7월 한나라당의 미디어 관련법 날치기 강행처리와 관련해 제기한 권한쟁의심판 결정을 앞두고 있다. 최근 첫 공개변론에서 여야는 공방을 주고 받았고, 헌재는 다음달 말쯤 이에 대한 최종 결정을 내릴 예정이다.

도재기기자 jaekee@kyunghyang.com /경향신문 2009-09-13 17:37:21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

200909131737215&code=100100&s_code=ap005

 

  


 

1960 - 석유수출국기구(OPEC) 창설
OPEC, 즉 석유수출국기구가 1960년 오늘 결성된다. 

이날 이라크 정부의 초청으로 열린 '바그다드 회의'에서 이라크, 이란,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베네수엘라 등 5대 석유 생산·수출국 대표가 모여 만든 협의체가 바로 OPEC다.
1950년에서 60년 사이에 중동과 아프라카에서 대유전이 발견돼 원유의 공급과잉 사태가 일어남에 따라 국제석유자본이 원유 공시가격을 인하하자, 이에 대항하기 위해 이들 5개 산유국들이 힘을 모은 것이다.
실제로 OEPC는 공시가격의 회복과 인상을 주도하는 힘을 발휘하면서 회원국을 11개로 늘렸다.
결성 당시에는 '가격 카르텔' 성격의 기구였지만 1973년 제1차 석유위기를 주도해 석유가격을 상승시키는 데 성공한 뒤부터는 원유가의 계속적인 상승을 위해 생산량을 조절하는 '생산 카르텔'로 변질됐다.
오늘날 OPEC는 석유 이권의 국유화, 자연보호, 각종 석유산업 진출 등의 목표를 함께 추진하고 있다.
현재 OPEC의 본부는 오스트리아 빈에 있다. /YTN
 

 

 

 

    

- Landing of the Soviet rocket on the Moon, Sept. 14, 1959


1959 - 소련 무인탐사위성 루나 2호, 인류최초 달 표면에 도착

루나 2호소련 탐사선으로 루나 계획에 의해 1959년 9월 12일 06:39:42 UTCR-7 로켓에 의해 발사된 것으로 이것은 최초로 의 표면의 도착한 탐사선이기도 한다. 도착했을 때에는 1959년 9월 14일 22:02:24 UTC고요의 바다의 서부에서 충돌하였다.

구조

루나 2호는 루나 1호와 구조가 같으며 안테나 5개의 구성도 같으며 관측기기도 같다. 또, 방사 검출기, 자력계 등을 붙이는 것이 조금 다르며, 무게는 390.2 kg 이다. /위키백과

 

 


 

1956 - 국무회의, 국군의 날(10월 1일) 제정  

국군의 날[ 國軍 ─ ]

한국 국군의 발전을 기념하는 날.

10월 1일이다. 종전에는 육군기념일은 10월 2일, 해군기념일은 11월 11일, 공군기념일은 10월 1일 등 각 군별로 거행하였다. 이것을 1956년 9월 14일 국무회의에서 1950년 10월 1일 육군 3사단 23연대 병사들이 강원도 양양 지역에서 최초로 38선을 넘어 북진한 것을 기념하여 10월 1일을 국군의 날로 공포하였다.
이날에는 육군·해군·공군·해병대 및 육군사관학교, 해군사관학교, 공군사관학교, 육군3사관학교, 국군간호사관학교 생도들의 사열과 시가행진 등의 각종 기념행사가 열리기도 한다. /네이버

 

 

 

- 등대 설치 100주년 기념 


1950 - 팔미도 등대 탈환 작전 
KLO부대의 팔미도 등대 탈환

팔미도 등대는 인천상륙작전 시 불을 밝혀 작전을 성공으로 이끄는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흔히 ‘켈로부대’라고 알려진 KLO의 공로가 컸다. KLO는 1948년 무렵 대북한 정보수집과 북파공작 전문 첩보부대다. 정식명칭이 ‘미 극동군 사령부 주한연락처’(Korean Liaison Office)다. 창설 당시에는 미군정보팀에서 파견된 미국인 5명과 한국인 6명이 전부였고, 책임자는 미 24군단 공작과장 런치 대위였다. 한국인으로는 최규봉이 주도적 역할을 했다.
KLO는 조수간만의 차가 극심한 인천을 통해 연합군이 상륙할 수 있는 시기를 선택하는 정보를 수집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1950년 8월 10일 당시 대구에서 방어전을 펴고 있던 KLO부대원에게 “부산으로 가서 백구호를 타라”는 극비명령이 하달됐다. 덕적도에 도착할 때까지 이유를 몰라 궁금해 하던 부대원은 클라크 대위에게서 “인천상륙작전이 감행된다.”는 귀띔을 받았다.
하루에도 몇 m씩 높낮이가 바뀌는 인천항의 수심과 복잡한 섬 사이의 정황을 파악하기를 한 달쯤 지난 9월 10일 드디어 “팔미도 등대를 확보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소음총으로 무장한 KLO 부대원 25명은 그날 밤 북한군을 사살하고 등대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그 후 작전 개시 전까지 5일 동안 KLO 부대원과 북한군 사이에는 등대를 뺏고 빼앗기는 전투가 계속됐다.

D-1일인 14일 오후 7시 “15일 0시40분을 기해 불을 켜라.”는 최후명령에 따라 등대 탈환전에 나섰다. 수십 명의 적군이 쏘아대는 따발총 공세를 뚫고 등대를 되찾는 데 성공했지만 등대는 망가져 있었다. “막상 등대를 확보했는데 나사 하나가 없어 점화되지 않는 거예요. 모든 걸 포기하고 지쳐 떨어졌는데 뭔가 잡히더군요. 나사였습니다.” 라는 최규봉 대장의 증언은 아슬아슬했던 당시 상황을 실감나게 한다. 이 때문이었는지 북한군은 등대를 전혀 사용하지 못하고 있었다.
5일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KLO 부대원들이 팔미도 등대에 불을 밝힌 것은 정해진 시각보다 1시간 40분 늦은 2시20분이었다. 팔미도 등대를 애타게 바라보던 7개국 261척의 연합군 함대는 이것을 신호로 인천항을 향해 돌진했다. ‘팔미도작전’ 은 6·25 전쟁의 흐름을 바꿔놓은 업적으로 꼽히고 있다.

문상범(인천고등학교 교사) /기호일보 2008년 01월 21일 (월) 15:06:39 /인천사랑 역사사랑

http://blog.chosun.com/blog.log.view.screen?blogId=45683&logId=2784510

 

 



1941 - 독일군, 레닌그라드 교외에 돌입

레닌그라드 공방전: 나치 독일군이 소련의 레닌그라드 교외로 진격하다.

독일군의 빠른 진격과 소련 측의 혼란 때문에 레닌그라드 시민의 소개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8월 30일 독일군은 네바 강에 도달하였고, 레닌그라드로 통하는 최후의 철도선을 차단시켰다. 9월 4일 시내에 대한 포격이 시작되었다. 9월 8일 독일군은 라도가 호수에 도달하였고, 이윽고 라도가 호수 위를 통하는 경로를 제외한 모든 연결선이 완전히 차단되었다. 같은 날 공습을 받아 시내 178개 장소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레닌그라드 군관구 사령관에 임명된 주코프가 급히 만들었지만 뛰어난 방어 진지를 구축했기 때문에 독일군은 시가지에 대한 침공은 피하고 포위에 나섰고, 10월 7일 히틀러가 발령한 지령에는 일절 항복을 받지 말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연결선의 차단으로 인해 레닌그라드에 대한 보급은 완전히 끊어졌다. 9월 2일 시민에 대한 식량 배급이 줄어들면서 육체노동자는 하루 빵 600그램, 노동자는 400그램, 그밖에 시민과 아이는 300그램으로 정해지게 되었다. 9월 8일 공습을 받아 상당량의 곡물과 유지(乳脂), 설탕이 소실되었다. 9월 12일 식량의 남은 양은 아래와 같이 계산되었다.

* 곡물, 밀가루 35일분

* 귀리, 분말 30일분

* 육류, 가축 33일분

* 유지 45일분

* 설탕·과자류 60일분

같은 날 배급은 다시 조정되어 육체노동자는 하루 빵 500그램, 노동자와 아이는 300그램, 기타 시민은 250그램으로 바뀌었다. 육군과 발트 함대는 비축분을 갖고 있었으나 충분하지 못했다. 라도가 호수에 배치된 함대는 장비도 충분치 못했고, 여러 차례 독일군의 공습을 받아 9월에는 곡물 수송선이 격침되었다. 수송선은 나중에 인양되었고, 배에서 발견된 부패한 곡물도 빵을 만드는 데 사용하였다. 소맥분을 전부 사용한 후에는 셀룰로오스와 톱밥, 목화씨까지 식용으로 사용하였다. 말의 사료용이었던 귀리도 식용으로 돌렸다. 육류도 떨어지자, 내장 및 가죽도 요리하였다. 시내의 빈 공터에는 양배추 등의 야채를 심었다.

9월 말에는 석유와 석탄도 떨어졌다. 유일하게 쓸 수 있는 연료는 나무였다. (레닌그라드 포위전-포위전) /위키백과




 

 

 

- Czechoslovakia,  100 Korun (Banknote)

 

1937 - 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 토마시 마사리크(Masaryk, Tomas) 사망  

마사리크 [Masaryk, Tomas Garrigue, 1850.3.7~1937.9.14]

1937년 오늘 체코슬로바키아의 초대 대통령을 지냈던 토마슈 마사리크가 87살을 일기로 세상을 떠난다. 

원래 철학자인 마사리크는 체코 독립운동을 지도해 1918년 체코슬로바키아 독립과 함께 대통령에 선출됐다.

이후 1935년까지 17년 동안 네 차례의 임기를 수행하면서 민주주의의 아버지로서 존경을 받았다.
그는 또 미국, 영국 등 서방국과 중도 관계를 유지해 국제사회에서 외교관계를 안정시키고 체코의 경제 발전을 이끈 것으로 평가됐다. /YTN

 

 


 

1937 - 이탈리아 건축가 렌조 피아노(Piano, Renzo) 출생

피아노 [Piano, Renzo, 1937.9.14~ ]

렌조 피아노
본명 : Renzo Piano
직업 : 건축가
출생일 : 1937년 9월 14일
학력 : 밀라노공과대학
홈페이지 : http://www.rpbw.com
경력
피터 라이스와 공동건축작업 (1977년)
리차드 로저스와 공동 건축사무소 (1971년-1977년)
루이스칸 건축사무소 재직, 마코비스키 건축사무소 재직 (1965년-1970년)
http://people.nate.com/people/info/re/nz/renzopiano
 

렌조 피아노(Renzo Piano, 1937년 9월 14일~ )는 세계에서 저명한 이탈리아건축가이다. 그는 프리츠커 아키텍처 상, AIA 골드 메달, 교토 상, 소닝 상을 받았다. 어떤 옹호자는 "그의 최고의 건물들이 주는 평온함은 우리가 문명화된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을 일깨워준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위키백과

 

퐁피두 센터 [Centre Pompidou]

동의어 : 보부르 센터

(영)Pompidou Centre. 정식 명칭은 조르주 퐁피두 국립미술문화 센터(Centre National d'Art et de Culture Georges Pompidou).

보부르가(街)와 파리의 사적지인 마레 지구 주변에 있는 프랑스의 국립 문화 센터.

이 박물관이 지어질 당시의 대통령 조르주 퐁피두의 이름을 따서 이런 명칭이 붙었다. 1977년 1월 31일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 대통령이 정식으로 개장했다. 주변 건물들을 초라하게 만드는 공장과도 같은 위압적인 겉모습은 밝은 빛깔의 외부 파이프, 도관(導管), 그밖에 겉으로 드러나 있는 각종 공급시설 때문에 나쁜 평판을 얻었다. 이탈리아의 렌조 피아노와 영국의 리처드 로저스가 건축 책임을 맡았다. 개장초부터 사람들이 운집했으며 이후 세계 주요문화시설 중 사람의 발길이 가장 잦은 곳으로 손꼽히게 되었다.

주로 20세기 시각예술을 위한 박물관과 종합시설로서의 기능을 다하고 있지만, 그밖에도 여러 가지 공공사업과 활동을 하고 있다. 현대미술관은 이전에 파리의 여러 화랑에 흩어져 있던 국가 소유의 현대 미술품들을 한지붕 아래 모아놓았다. 이곳에서는 현대적인 주제로 임시 전시회도 자주 열린다. 그밖에 대규모 공공도서관, 산업 디자인 센터, 영화박물관, 프랑스의 지휘자이며 작곡가인 피에르 불레즈와 관련 있는 중요한 음악 센터인 '음악·음향 연구 센터'(Ircam)도 있다. 이 음악 센터는 연습실·스튜디오·연주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주로 현대음악 연주회를 열고 있다. /브리태니커 

 

 

 

 

 

1927 - 미국의 무용가 이사도라 덩컨(Duncan, Isadora) 사망

덩컨 [Duncan, Isadora, 1877.5.26(1878.5.27)~1927.9.14]

'20세기 모던 댄스의 어머니'로 불리는 미국의 무용가 이사도라 덩컨이 1927년 9월 14일 급사했다. 사인(死因)인 즉, 그녀의 목에 걸고 있던 스카프가 승용차 뒷바퀴에 걸리는 바람에 질식사한 것. 덩컨은 무용인들이 수백년 동안 무대에서 벗어 본 적이 없는 토슈즈를 벗고 무대에 오른 ‘맨발’의 무용인으로 유명하다. '맨발의 이사도라'는 전통무용을 배격하고 창작무용을 창조적 예술의 수준으로 끌어올린 최초의 무용가이다.

1877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난 덩컨은 어려서 제도교육을 팽개치고 독학으로 무용공부를 시작했다. 22세 때인 1899년 시카고에서 데뷔했지만, 이때는 인정을 받지 못했다. 그녀가 이름을 떨친 것은 20세 들어서였고, 미국이 아닌 유럽에서였다. 그녀는 자기 예술의 영감을 자연과 그리스 예술에서 찾았고 그때까지 무용에 도입되지 않았던 음악작품을 무용에 도입했다.

그녀는 러시아와도 인연이 깊었다. 그녀의 영향으로 현대 발레를 시도한 최초의 발레 단체 ‘발레 뤼스’가 결성된 곳도 러시아였고, 그녀의 남편 에세닌 역시 러시아인이었다. 이때까지 이사도라 덩컨은 자신의 예술에서 그리고 사랑에서 확실한 성공을 거두는 듯 했다. 그러나, 그녀의 사생활은 지극히 불행했다. 남편 에세닌은 자살로, 두 아이는 사고로 잃어버린 것이다. 그녀의 죽음 역시 그녀의 삶만큼이나 극적으로 장식돼 불우한 그녀의 인생의 점을 찍었다. /조선

 

 

 

    

 

1920 - 우루과이의 작가, 저널리스트 마리오 베네데티(Benedetti, Mario) 출생

베네데티 [Benedetti, Mario, 1920.9.14~2009.5.17]

우루과이의 소설가·시인·수필가.

초기에는 주로 몬테비데오에서 지내며 글을 쓸 만한 여가가 있는 여러 관직을 거쳤다. 첫번째 단편집 〈오늘 아침 Esta mañana〉(1949)은 도시 중산계층의 문제를 다루고 있고, 첫 장편소설 〈우리들 중 누구 Quién de nosotros〉(1953)는 서로 깊이 관련된 삶을 살아가는 세 인물의 좌절과 방황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우루과이에서 가장 권위있는 주간지인 〈마르차 Marcha〉를 3차례나 맡아 운영했다(1954~60). 소박한 구어체로 쓴 〈사무실의 시 Poemas de la oficina〉(1956)는 즉시 성공을 거두었다. 1957년에는 〈마르차〉·〈디아리오 El diario〉 특파원으로 처음 유럽을 방문했다.

도시의 일상생활을 그린 희비극적 이야기 〈몬테비데오 사람들 Montevideanos〉(1959)을 펴내 우루과이에서 가장 통찰력있는 작가라는 명성을 얻었다. 2번째 장편소설 〈휴전 La tregua〉(1960)은 자신보다 훨씬 어린 여인과 사랑을 하게 되는 어느 중년남자가 쓴 일기형식의 작품이다. 〈지푸라기 꼬리가 있는 나라 El país de la cola de paja〉(1960)는 우루과이의 몰락상을 갈파한 수필집이며, 〈불에 대한 감사 Gracias por el fuego〉(1965)는 공공연하게 혁명적인 메시지를 띤 소설이다. 1967~71년에는 쿠바에 살면서 쿠바의 국제문화기관에서 일했다. 쿠바 체류 당시 느낀 인상들은 〈쿠바 일지 Cuaderno Cubano〉(1969)라는 수필집에 실려 있다. 멕시코에서 출판된 자전적인 소설 〈후안 앙헬의 생일 El cumpleaños de Juan Ángel〉(1971)은 작가의 정치의식의 위기를 보여준다. 그당시 얼마 남지 않은 선거에서 좌익연합의 수립을 도우려고 우루과이로 돌아왔으나(1971) 군부가 정권을 장악하자(1973) 다시 쿠바의 이전 직장으로 돌아갔다. 그의 작품 〈향수를 느끼며, 느끼지 않으며 Con y sin nostalgia〉(1977)는 폭력·추방에 대한 단편집이다. /브리태니커

 

 

 

- Cascarita and Julio Cuevas

 

1920 - 쿠바의 가수 카스카리타(Cascarita) 출생

카스카리타 [Cascarita: Orlando Guerra, 1920.9.14~1975]

Cascarita

Orlando Guerra [gayr'-rah] was a popular Cuban singer specialized in native musical forms such as guaracha, pregón and son montuno. Affectively nicknamed Cascarita, he was born on September 14, 1920 in Camagüey, the third largest city of Cuba and the capital of Camagüey Province.

Guerra started his professional career in his native Camagüey and Havana in the early 1940s, and made his name singing in the orchestras of Hermanos Palau and Julio Cueva. Owner of a highly personal style of vocalizing, he had an interesting sense of ease and graceful fluency to improvise, particularly interpreting guarachas, which gained him an important place in Cuban popular music history. He also became popular for his extravagant costumes and tangled sayings.

In 1943, Guerra recorded with the Orquesta Siboney of Pepito Torres in Puerto Rico. Soon after, when fellow countryman singer Miguelito Valdés departed to the United States, Guerra replaced him in the Casino de la Playa orchestra. It was through his personal recommendation that Dámaso Pérez Prado obtained the job of arranger/pianist of the orchestra. For these years, Pérez Prado had been blacklisted in Cuba from working as an arranger because his charts were bizarre and weird, according to many local musicians. He had gone about as far as he could working for Casino de la Playa, as Cascarita was more popular than the band. The records no longer came out under the title "Casino de la Playa, singing Cascarita", but "Cascarita accompanied by Casino de la Playa".

Guerra recorded dozens of songs. Some of his greastest hits are El baile del sillón, El caballo y la montura, Estoy acabando, Llora timbero, La ola marina, La pelotica, Piru, piru, pirulí, Se murió Panchita, Ta' bueno ya, La última noche and Uampampiro, between others. He settled in Mexico after touring Colombia, Panama, Puerto Rico and Venezuela.

The popular Cascarita died in Mexico City in 1975 at the age of 55.

Selected discography

http://en.wikipedia.org/wiki/Cascarita

 

 


 

 

1909 - 영국의 조류학자 피터 스콧(Scott, Peter) 출생

스콧 [Scott, Peter Markham, 1909.9.14~1989.8.29]

Peter Scott

Sir Peter Markham Scott(14 September 1909 – 29 August 1989) was a British ornithologist, conservationist, painter, naval officer and sportsman.

Scott was knighted in 1973 for his contribution to the conservation of wild animals. He had been a founder of the World Wildlife Fund, a founder of several wetlands bird sanctuaries in Britain, and an influence on international conservation. He received the WWF Gold Medal and the J. Paul Getty Prize for his work.

Biography

http://en.wikipedia.org/wiki/Peter_Scott

 

 

 

 

1901 - 미국의 제26대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 취임

[오늘의 역사]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 취임

미국인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받았으며 획기적인 경제 개혁 정책을 펼쳤던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가 1901년 오늘 제26대 미국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1900년 윌리엄 매킨리 대통령 밑에서 부통령으로 당선됐던 그는 매킨리가 이날 암살당하자 후임으로 대통령에 올랐다.

당시 미국은 산업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새로운 기업들이 넘쳐났고, 이들은 이익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경쟁 상대를 물리친 기업들은 가격을 멋대로 조작했고 정치인들까지 돈으로 매수해 입법 과정에도 영향력을 행사했다.

루스벨트는 대통령으로 일한 7년 동안 혁신주의를 내걸고 독점기업 규제, 노동자 보호, 자원보존 등에 힘썼다.

외교적으로도 활발한 활동을 벌여 러·일 전쟁을 끝내고 정리한 포츠머스조약(1905.9)을 중재한 공로로 1906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충청투데이 2009.09.13 18:00  

http://www.cc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452846

 

 

 

 

- U S, 500 Dollars (Banknote)

 

1901 - 미국의 제25대 대통령 윌리엄 매킨리(McKinley, William) 사망

매킨리 [McKinley, William, 1843.1.29~1901.9.14]

미국의 제25대 대통령(1897~1901).

보호관세주의를 주장하고 은화 자유주조에 반대해 전국적 명성을 얻은 고집 센 공화당원으로, 미국-스페인 전쟁(1898) 이후 미국의 식민지 획득과 관련된 세계제국주의의 대명사로 꼽힌다.

미국 남북전쟁 때(1861~65) 매킨리는 헤이스 대령(1877~81년 미국 제19대 대통령을 지냄) 밑에서 복무했다. 헤이스는 매킨리를 자기 부관으로 삼아 나중에 그가 정치가의 길을 걷도록 도와주었다. 2년 뒤 매킨리는 오하이오 주 캔턴에서 변호사 자격증을 취득하고(1867), 군(郡) 검찰관으로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하원의원에 선출되어 14년간(1877~91) 의원생활을 한 뒤, 그는 미국 기업을 외국 기업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높은 관세를 주장해 매우 유명해졌다. 하원 세입위원회(Ways and Means Committee)의 위원장으로 1890년의 매킨리 관세법안을 주도적으로 발기했는데, 이 법은 많은 수입품목에 대해서 그당시로서는 사상 최고의 관세를 부과했다. 1890년 매킨리는 재선에 도전했으나 낙선했다. 그러나 공화당에서 활동하던 오하이오 주의 부유한 기업가 해나의 신임을 받게 되었다. 해나의 지원에 힘입어, 매킨리는 2번씩이나 오하이오 주의 주지사로 선출되어 봉직했으며(1892~96), 그동안 해나는 1896년 공화당 대통령후보 지명전에서 그를 승리시킬 계획을 세웠다. 그는 높은 보호관세와 금본위제의 유지를 강조하는 정견발표를 통해 쉽게 후보로 지명되었다. 이러한 입장은 금본위제를 주장한 민주인민당 후보 윌리엄 J. 브라이언의 입장과는 정반대되는 것이었다. 해나는 대기업들로부터 막대한 돈을 모금해 정력적으로 선거운동을 지휘했다. 매킨리는 집앞에서 기차를 타고 캔턴으로 줄지어 몰려드는 방문객들에게 매일 연설을 했다. 공화당은 선거인단 선거에서 271 대 176으로 승리했다.

매킨리는 대통령 집무를 시작하자 곧 관세율을 인상(딩리 관세)하기 위하여 특별회기 의회를 소집했다. 그러나 쿠바 반란, 그리고 반란자들에 대한 스페인 당국의 가혹행위에 관한 소문으로 미국 전역이 들끓었기 때문에 다른 내정에는 신경을 쓰지 못했다. 매킨리는 미국의 개입을 피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미국의 전함 메인호가 아바나 항에서 알 수 없는 이유로 침몰한 사건이 일어나자(1898. 2. 15) 미국의 여론은 점점 무력 개입을 요구하는 쪽으로 움직였고, 의회 지도자들은 행동을 보여주기 원하는 대중의 요구를 충족시켜주기를 희망했다. 스페인은 상당한 정도의 양보를 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증거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문제를 의회의 결정에 맡겼다. 그런데 의회는 그에게 쿠바의 독립을 확보하기 위해 무력개입을 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1898. 4. 20). 단기전으로 끝난 이 전쟁에서 미국은 쿠바 영토와 영해에서 스페인 군대를 격파했다. 7월말 스페인은 휴전을 제의했다(→ 메인호의 침몰, 미국-스페인 전쟁).

매킨리는 영토확장을 위해서 전쟁을 한 것이 아니었지만, 이전의 스페인 영토들을 어떻게 처분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부딪혔다. 그는 푸에르토리코, 필리핀, 그리고 전략적 위치에 있는 다른 섬들은 미국과 비우호적인 관계에 있는 세력에게 넘겨주어서는 안 되며, 따라서 그 영토들은 마땅히 미국의 보호령이 되어야 한다고 선언했다. 일부 공화당 의원들은 이러한 '제국주의'에 반대했지만, 매킨리는 단호한 입장을 가지고 평화협상에 임했다. 매킨리는 반대 없이 공화당 대통령후보로 재지명되었고, 1900년 대통령선거에서 큰 표차로 승리해 재집권했다. 전쟁이 끝난 상황이었으므로, 그는 전쟁 때문에 가려졌던 2가지 문제에 관해 역설했다. 하나는 기업연합(독점)의 통제였고 다른 하나는 외국과의 무역을 촉진하기 위한 상업적 호혜주의 원칙이었는데, 후자는 이전의 입장과는 다른 것이었다. 그는 1901년 9월 6일 버펄로에서 열린 범미국박람회에서 무정부주의자인 레온 촐고츠의 총격으로 중상을 입어 대통령직을 그만두어야 했다. 그의 뒤를 이어, 부통령으로 있던 진보공화당의 테오도르 루스벨트가 대통령직을 계승했다. 신빙성 있는 전기로는 M. K. 리치의 〈매킨리 시대 In the Days of McKinley〉(1959)를 들 수 있다. /브리태니커

 


 

 

1886 - 체코슬로바키아의 외교관, 정치가 얀 마사리크(Masaryk, Jan) 출생

마사리크 [Masaryk, Jan Garrigue, 1886.9.14~1948.3.10]

프라하 출생. 대통령을 지낸 T.G.마사리크의 아들로 1907년 미국으로 건너갔으나 제1차 세계대전 직전에 돌아와 전쟁 중에는 헝가리 연대에서 종군하였다. 1918년 체코슬로바키아의 독립과 함께 외무성에 들어가 1919년 주미대리공사(使), 1920년 주영참사관(), 1921년 외무장관 베네시의 비서, 1925년부터 주영공사(使)로 활약하다가 1938년 9월 30일 뮌헨회담에 항의하여 사직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런던 망명정부의 외무장관으로 런던에서 점령하의 체코슬로바키아에 방송을 계속하였고, 대전 후 1945년 7월 귀국, 대통령 베네시 밑에서 외무장관에 취임, 1948년 2월 25일 공산당 쿠데타(체코슬로바키아 2월혁명) 후에도 얼마 동안 외무장관에 유임되었으나, 3월 10일 시체로 발견되었다. 비밀경찰이 죽여 외무성 건물에서 투신자살한 것처럼 위장하였다는 설이 있다. /naver

(부친의 기일에 아들이 태어났네요.. *_@))

 

 

 

 

1883 - 미국의 여성운동가 마거릿 생어(Sanger, Margaret) 출생

마거릿 생어(Sanger, Margaret, 1883.9.14~1966.9.6]

[역사 속의 인물] 최초의 '산아제한' 운동가 생어

요즘 한국사회에서 '산아제한'을 외친다면 얼마나 눈총을 받겠는가. 가뜩이나 출산율이 떨어지는데 아이를 적게 낳자고 주장하다간 '매국노' 낙인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된다. 현재와는 상황이 다르지만, 100년 전 최초로 '산아제한 운동'을 벌인, 용기있는 여성 운동가가 있었다.

국제산아제한 운동의 창설자인 마거릿 생어(1883~1966)는 1883년 오늘, 뉴욕에서 태어났다. 11남매의 여섯째로 다자녀 가정에서 성장했다. 간호사로 일하다 무제한적인 출산과 빈곤, 유아와 산모의 높은 사망률을 목격하고는 충격을 받았다. 그 뒤로 '여성에게는 가족계획의 권리가 있다'는 유명한 구호를 앞세워 당시로는 법적으로 금지된, 피임 정보를 공개하는 운동에 평생을 바쳤다. 피임은 주창했지만 낙태는 절대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1917년 브루클린에서 산아제한 진료소를 열었다가 체포돼 30일간 감옥살이를 했다. 1936년 미국연방법원이 '환자의 생명을 구하거나 복지를 증진할 목적으로 의사들은 피임약을 처방할 수 있다'고 판결함에 따라 그녀의 오랜 투쟁이 마침내 결실을 얻었다. 인도와 일본에서도 운동을 벌였다. 그녀 자신도 아들 둘만 낳는 모범(?)을 보였다.

박병선(동부지역본부장) /매일신문 2011년 09월 14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52780&yy=2011

 

 


 

1878 - 폴란드의 시인 레오폴드 스타프(Staff, Leopold) 출생

스타프 [Staff, Leopold, 1878.9.14~1957.5.31]

폴란드의 시인.

리보프 출생. 폴란드의 모더니즘 운동인 '젊은 폴란드'의 영향하에서 문학을 시작하였다. 이어, 초기의 시에 현저한 세기말적인 우수와 번민을 뛰어넘어 인생을 긍정하는 희망이 찬 밝은 경지에 도달하였으며, 고전주의적인 균형이 잡힌 아름다운 시풍()을 개척하여 명상적인 철학적 시인으로서의 대가가 되었다.
후진 시인들, 특히 츠빔 등 스카만데르파()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처녀작 《권력의 꿈》(1901) 이래 《키 큰 나무》(1932), 《꿀빛깔》(1936) 등의 시집이 있다. 만년의 《버드나무》(1954)에서는 죽음에 임한 담담한 심경을 꾸밈없이 표현하고 있다. 이 밖에 희곡작품도 있다. /naver

 

 

 

  

 

1867 - 미국의 삽화가 찰스 다나 기브슨(Gibson, Charles Dana) 출생

기브슨 [Gibson, Charles Dana, 1867.9.14~1944.12.23]

미국의 삽화가.

그의 ' 기브슨 걸' 그림은 20세기로 들어설 무렵의 이상적인 미국 여성상을 그린 것이다.  뉴욕 시에 있는 '아트 스튜던츠 리그'에서 1년 동안 공부하고, 해학적인 주간잡지 〈라이프〉에 기고하기 시작했다. 그후 아내를 모델로 한 '기브슨 걸' 그림이 큰 유행을 낳았다. 까다롭고 섬세한 선을 펜과 잉크로 그린 그의 세련된 화풍을 많은 사람들이 흉내내고 모방했다. 그는 매우 인기가 높아 〈콜리어스 위클리 Collier's Weekly〉는 매주 2페이지씩 1년간 계약으로 당시 삽화가에게 지불한 최고 금액이라는 5만 달러를 그에게 주었다. 당대의 상황을 주로 웃음을 자아내거나 감상에 젖게 하는 삽화로 그려냈다.

1905년 삽화에서 손을 떼고 그 이전부터 해오던 유화 초상화에 전념했으나 몇 년도 못되어 다시 삽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또한 〈젠다의 죄수 Prisoner of Zenda〉를 비롯한 여러 책에도 삽화를 그렸으며, 자신의 그림을 여러 권의 책으로 펴냈다. 〈C. D. 기브슨이 본 런던〉(1895~97)·〈디킨스 집안 사람들〉(1897)·〈이집트 스케치〉(1899)는 여행하며 그린 그림들을 모은 것이다. '상류 사회'에 대한 그의 유명한 풍자화를 묶은 책으로는 〈핍씨의 교육〉(1899)·〈미국인들 Americans〉(1900)·〈과부와 그 친구들〉(1901)·〈사회적 지위 The Social Ladder〉(1902)·〈우리의 이웃들〉(1905) 등이 있다. /브리태니커 

 

 

 

 

- England, 5 Pounds (Banknote)

 

1852 - 영국의 군인, 정치가 아서 웰즐리 웰링턴(Wellington, Arthur Wellesley) 사망

웰링턴 [Wellington, Arthur Wellesley, 1769.5.1~1852.9.14]

영국의 군인이자 정치가.

아일랜드 더블린 출생. 이튼칼리지를 거쳐 1787년 앤저스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보병 소위에 임관, 1794~1795년 네덜란드에서 프랑스군과 싸우고, 1797년부터 8년간 인도에서 말라타동맹군과 싸우는 등 전전()하였다. 1809년 포르투갈원정군 사령관이 되어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에 대항하였고, 1812년 나폴레옹의 러시아원정을 계기로 프랑스군을 이베리아반도에서 몰아내었다. 그리고 프랑스로 추격하여 1814년 파리에 입성하였다. 그 후 빈회의에 참석하였으나, 나폴레옹이 엘바섬에서 탈출하자, 귀국과 동시에 연합군 사령관으로서 그와 대전할 책임을 지고, 워털루싸움에서 그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그 후로는 군인보다도 오히려 정치가로서 활약하였는데, 외교사절로서 여러 나라에 부임한 뒤, 1828년 보수당의 총리가 되었다. 총리로서의 최대의 공적은 1829년 가톨릭교도 해방령을 성립시킨 것이다. 하지만 선거법개정에는 반대하여 개정운동이 높아짐에 따라 1830년 사임하였다. /naver

 

 

 

 

1817 - 독일의 시인, 소설가 테오도르 슈토름(Storm, Theodor) 출생

슈토름 [Storm, (Hans) Theodor Woldsen, 1817.9.14~1888.7.4]

독일의 시인, 소설가.

독일 슐레스비히의 항구도시 후줌 출생. 변호사의 장남으로 태어나, 1837년부터 킬대학과 베를린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한 후, 1843년에 고향에서 변호사를 개업하였다. 학생시절에 괴테, 하이네, J.아이헨도르프, E.뫼리케 등의 세계에 접하여 문학적으로 눈을 떴고, 또 소녀 베르타와의 사랑의 체험이 그를 서정시인으로 출발하게 하였다. 이것은 학우 몸젠 형제와의 공동시집 《세 벗의 시집》(1843)으로 나타났다. 문학과 음악을 사랑하는 동료들과의 생활 속에서 우수()와 체관()의 시인으로서 그를 드높인 주옥 같은 단편 《이멘호 Immensee》(1849)를 비롯한 많은 작품이 나왔고, 《시집 Gedichte》(1852)도 나왔다. 이 무렵 덴마크 지배하의 슐레스비히 홀슈타인 문제가 격화되자 고향을 떠나 10여 년을 포츠담, 하일리겐슈타트 등지에서 재판소 배석판사를 지낸 후, 1864년 슐레스비히 홀슈타인이 독일에 귀속되자 고향으로 돌아가 지사()에 취임하였다.

1880년에는 관직에서 물러나 하데르마르센에 은거하여 창작에 몰두하였는데, 역작 《백마의 기수 Der Schimmelreiter》(1888)를 최후의 완성작으로 남겼다. 그의 문학적인 특색은 고향 슐레스비히 홀슈타인의 자연과 생활과 역사가 그의 작품 속에서 깊이 숨쉬고 있다는 점이다. 500여 편의 시, 50여 편의 단편소설과 동화는 모두 고향 땅에 뿌리박고 있으며,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하였다. 작품의 발전도 생활체험의 심화와 병행하여 초기의 애수가 서린 서정의 세계에서 서사적인 심리적 갈등으로, 그리고 최후에는 입체적인 비극적 세계로 이르는 시적 사실주의를 완성하였다. 앞에서 든 작품 외에 대표적인 작품으로 《늦장미 Spate Rosen》(1859) 《대학 시절 Auf der Universitat》(1862) 《3색 오랑캐꽃 ViolaTricolor》(1873) 등이 있다. /naver

 

 

 

 

1804 - 영국의 조류학자 존 굴드(Gould, John) 출생

굴드 [Gould, John, 1804.9.14~1881.2.3]

영국의 조류학자.

조류에 관한 크고 호화로운 그림이 들어 있는 그의 저서들은 장서가들 사이에 언제나 비싼 값에 팔리고 있다.

굴드의 아버지는 윈저 성의 수석 정원사였다. 굴드는 윈저 성에서 박제술(剝製術)을 배웠고, 1827년 런던 동물학회의 박제사가 되었다. 1830년 히말라야 산맥에서 잡은 진귀한 새들의 외피(外皮)가 도착한 덕분에, 뒤이어 나온 여러 권의 2절판 저서 가운데 첫번째 것인 〈히말라야 산맥에 사는 새들의 1세기 A Century of Birds from the Hymalaya Mountains〉(1831~32)를 발표할 수 있었다. 아내인 엘리자베스 콕슨 굴드는 남편이 스케치한 그림을 석판석(石版石)에 옮겼는데, 그녀의 예술적 재능은 굴드의 저서가 갖는 가치를 한층 더 높여주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녀는 1841년 세상을 떠났다. 5권으로 된 〈유럽의 새들 Birds of Europe〉(1832~37)과 〈큰부리새과(科)의 모노그래프 Monograph of the Ramphastidae〉(1834)가 큰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에, 굴드 가족은 2년 동안(1838~40)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지내며 새와 포유동물의 표본을 많이 수집할 수 있었는데, 이 수집품의 덕택으로 가장 유명한 저서인 〈오스트레일리아의 새들 The Birds of Australia〉(7권, 1840~48, 증보판 1851~69)과 〈오스트레일리아의 포유동물 The Mammals of Australia〉(3권, 1845~63)이 출간되기도 했다. 1843년에 영국 왕립학회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평생 펴낸 책은 40권이 넘고, 거기에 실린 삽화는 3,000개가 넘는다. 새로운 종(種)에 대한 과학논문을 많이 발표하여 주로 전문가로서의 평판을 얻었지만, 오늘날에는 그가 지은 2절판 책들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브리태니커 

 

 

 

 

- Norway, 1000 Kroner (1990, Banknote)

 

1782 - 노르웨이의 민족적 정치 지도자 팔센(Falsen, Christian Magnus) 출생

팔센 [Falsen, Christian Magnus, 1782.9.14~1830.1.13]

노르웨이의 민족적 정치 지도자.

헌법의 입안자로 간주된다. 덴마크가 노르웨이를 스웨덴에 양보한 키엘 조약(1814. 1. 14)을 무효화하고자 1814년 4월 10일 노르웨이의 에이츠볼드(지금의 에이츠볼)에 모인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이들은 독립선언과 헌법 및 스웨덴에 맞서 취할 조치들의 윤곽을 짜기 시작했다. 팔센은 완전한 독립을 이루고자 한 다수당인 독립당을 이끌고 스웨덴과 군사적으로 맞설 준비를 했다. 그러나 이중군주제를 통해 스웨덴과 연합을 이루고자 하는 소규모 통일당도 존재했다.

회합이 개최되기 전에 팔센은 한 동료와 함께 극히 자유주의적인 헌법을 기초해놓고 있었다. 그 초안은 팔센이 의장을 맡은 헌법위원회에서 길잡이 역할을 했다. 최종 초안(지금의 노르웨이 헌법)에서는 훨씬 과격한 조항들이 빠지기는 했으나 팔센은 '헌법의 아버지'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또한 독립선언서도 만들었다. 1814년 여름에 그의 당은 스웨덴에 대해 무익한 군사항쟁을 벌였다. 그러나 스웨덴은 합병을 고집하기보다는 대등한 자격으로서의 연합(1814~1905)을 수용하고 노르웨이 헌법을 일부 수정해 그대로 유지하는 데 동의했다. 팔센은 노르웨이 의회로 들어가 훨씬 보수적인 입장을 옹호하기 시작했다. 선거권을 크게 제한하는 그의 헌법수정안이 1824년 의회에서 부결된 뒤 그는 중상모략의 물결 속에서 은퇴했다. /브리태니커

 

 

 

 

 

1769 - 독일의 자연과학자, 지리학자 알렉산더 폰 훔볼트(Humboldt, Alexander von) 출생

훔볼트 [Humboldt, Alexander von, 1769.9.14~1859.5.6]

[역사속의 인물] 자연지리학의 시조 훔볼트 

1769년 오늘 독일 베를린에서 태어난 훔볼트는 지리, 광물, 천문, 생물, 화학, 해양 등 광범위한 자연과학 분야에서 탁월한 능력을 보이며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는 괴팅겐대학 재학시절 하르츠산맥과 라인강 계곡의 현무암 연구논문을 발표해 눈길을 모았다. 대학시절 지질학을 공부한 뒤 광산 감독으로 일했다. 1829년부터 빈대학교에서 자연지리학을 가르쳤다.

이후 베네수엘라 오리노코강과 아마존강 상류, 에콰도르 키토 인근 화산, 안데스 산맥, 페루 등 라틴아메리카를 주로 여행하며 지질 탐험조사를 벌였다. 이탈리아에서 지구자기(地球磁氣)를 조사했다. 중앙아시아 등지를 다니며 자연지리 조사도 벌였다. 세계 각국을 여행하면서 조사한 성과를 바탕으로 '코스모스' '우주' 등 저서를 남겼다.

그는 페루 앞바다 북쪽으로 올라가는 훔볼트해류 등 상당수 지역의 산, 강, 만 등에 자신의 이름을 부여했다. 국제적인 지자기 관측소, 프로이센 기상학연구소 등을 세우기도 했다.

김병구기자 kbg@msnet.co.kr /매일신문 2009년 09월 14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40100&yy=2009

 

 

 

 

1638 - 하버드대학의 기여자(확립자) 존 하버드(Harvard, John) 사망

하버드 [Harvard, John, 1607.11.26~1638.9.14]

뉴잉글랜드의 식민지 개척자.

그의 유증으로 하버드대학교 설립의 확고한 기반이 마련되었다. 아버지는 도살업자였으며, 어머니는 가축상인이자 스트랫퍼드온에이번 참사회원의 딸이었다. 1625년 유행한 흑사병으로 아버지와 형제자매 대부분이 죽었다. 재혼한 어머니와 의붓아버지는 1627년 그를 케임브리지에 있는 에매뉴얼대학에 입학시켰다. 1631년 졸업하고 1635년 석사학위를 취득했으며, 1637년 결혼해 이듬해 뉴잉글랜드로 갔다. 1637년 11월 2일 매사추세츠베이 식민지 찰스타운의 공민이 된 그는 이곳에서 곧 학식 있고 경건한 사람으로 인정받았다. 찰스타운 '제1교회'의 부목사로 봉직했으며, '자유 총람'(Body of Liberties) 편찬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영국에서 상당한 재산을 상속받았으므로 당시의 식민지 사람들보다는 분명히 부유했다. 그가 찰스타운에 온 지 1년도 채 안 되어 결핵으로 죽었을 때 1,600파운드에 달하는 재산을 남겼다. 그의 유언에 따라 재산의 절반이 그가 수집한 고전 및 신학 문헌과 함께 인근 뉴타운에 최근 설립된 학교에 기증되었다. 뉴타운은 이내 케임브리지로 명칭이 바뀌었다. 1636년에 설립된 이 학교는 하버드의 기부금으로 계속 유지될 수 있었다. 매사추세츠 입법의회는 1639년 최초의 거액 기금 헌납자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교명(校名)을 하버드대학교로 정한다는 것을 선포했다. 하버드대학교 동문들은 1828년 화강암으로 된 존 하버드 기념비를 건립했으며, 1884년에는 에드워드 에버렛이 붙인 호칭대로 '미국의 학문과 종교를 위해 영원히 기억될 후원자'의 좌상이 교정에 세워졌다. /브리태니커

 

하버드 대학의 3대 거짓말

입구를 들어서자마자 만나는 '하버드 동상'이 실은 3대 거짓말로 장식(?) 돼 있다고 한다.
동상엔 '설립자 존 하버드 1638년'이라고 새겨져 있으나 설립자는 하버드가 아니라 재정을 후원한 목사들이었다고한다. 때는 1636년이었고..., 동상 모습은 존재하지도 않았던 하버드씨 얼굴
동상의 얼굴은 하버드씨의 얼굴이 아니라 아무렇게나 선택된 학생을 모델로 한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하버드 학생들은 이 동상의 발끝을 만지면 행운이 온다고 믿는다고 한다. 하도 만지고들 다녀 발끝은 금빛으로 반짝일 정도라고...
헌데 공부벌레만 살아 남을 것같은 하버드지만 수영을 잘 해야 졸업할 수 있는 곳으로 또한 유명하다고... (대학의 명성과 실력을 지켜오는 책과 공부방은 와이드너부인이 기증한 것인데, 하버드대학에 다니던 아들이 영국에 갔다 돌아오다가 바로 그 유명한 타이타닉호가 침몰하는 바람에 물에 빠쪄 숨을 거두게 되었다고 한다. 다른 친구들은 수영을 잘 해 목숨을 구했으나 그녀의 아들은 수영을 할 줄 몰라 변을 당했으며 아들의 죽음에 한이 맺힌 부인은 도서관을 기증하며 유언을 '매주 의무적으로 수영 테스트를 하고 일정 기간내에 수영을 못하면 퇴학시켜라.'고 남겼다고 한다.)

gigaion 2004-08-25  /엠파스 지식
http://kdaq.empas.com/qna/view.html?n=4365941 

 

 

 

 

1547 - 네덜란드의 변호사, 정치가 요한 반 올덴바르네벨트(Oldenbarnevelt, Johan van) 출생

올덴바르네벨트 [Oldenbarnevelt, Johan van, 1547.9.14~1619.5.13]

네덜란드의 변호사·정치가.

침묵공 빌렘 1세 이후 독립 네덜란드의 제2의 창건자였다. 빌렘의 아들 마우리츠 밑으로 네덜란드 세력을 한데 묶고, 1596년 프랑스·영국과 반(反)스페인 삼국동맹을 맺었다. 12년 휴전조약(1609)에서는 공화국 내 홀란트의 지배적인 역할을 재확인했다. .

초기경력 /브리태니커 

 

 

 

 

 

 

 

1321 -  이탈리아의 시인 단테(Dante Alighieri) 사망  

단테 [Dante Alighieri, 1265~1321.9.14]

이탈리아의 가장 위대한 시인, 서(西)유럽 문학의 거장.

후에 〈신곡 La divina commedia〉으로 제목이 바뀐 기념비적인 서사시 〈희극 La commedia〉으로 널리 알려졌다. 이 위대한 중세문학작품은 인간의 속세 및 영원한 운명을 심오한 그리스도교적 시각으로 그리고 있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보면 이 작품은 피렌체에서 추방당한 시인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작품이지만 아주 포괄적인 차원에서 보면 지옥·연옥·천국을 여행하는 형식을 취한 우화(寓話)로 읽힐 수 있을 것이다. 이 시에 나타난 시인의 박학다식함, 당대 사회문제의 예리하고 포괄적인 분석, 언어와 시상(詩想)의 창의성 등은 놀라울 정도이다. 라틴어가 아닌 이탈리아어를 시어(詩語)로 선택함으로써 단테는 문학발달과정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 일상어). 그는 조국에서 태동하기 시작한 시가(詩歌) 문화에 표현능력을 빌려주었을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어가 수 백년 동안 서유럽에서 문학어로 쓰이게 되는 데 기여했다. 시 이외에도 중요한 이론적 저술들을 썼는데 그 범위는 수사론에서부터 도덕·철학 및 정치사상에까지 이른다. 고전전통에 매우 정통한 사람으로 자신의 목적을 위해 베르길리우스, 키케로, 보에시우스의 작품들을 인용했으나 비전문가로서는 아주 이례적으로 당대 최신의 스콜라철학과 신학을 매우 능숙하게 활용했다. 박학다식함과 당대의 뜨거운 정치논쟁에 개인적으로 연루된 사건들로 인해 중세정치철학의 주요 논문 가운데 하나인 〈제정론 De monarchia〉을 썼다. /브리태니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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