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강동원 2010. 12. 23. 18:29

1.성립과정

 

골품제도는 왕족을 대상으로 한 골제(骨制)와 왕족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한 두품제로 구분되며

골품제는 이를 합쳐 부르는 말입니다.

원래 신라는 경주에 자리잡은 사로국의 6부를 중심으로 주변 작은 나라들을 복속시키며 성장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복속된 소국의 지배층 가운데, 일부를 경주로 이주시켜, 지배층인 6부에 편입시키고,

다른 일부는 원거주지의 촌주로삼아 복속지역 통치에 이용하기도 했습니다

한 예로, 가야국출신의 왕족을 진골로 편입시키기도 햇습니다. 김유신이 바로 가야왕조 후예라고 할 수 있죠.

 

쉽게 말해서, 주변국을 점령해가면서, 그 수준에 맞는 계급을 주었습니다.

 

 

 

2.구성

 

성골:

골족 중에서 왕이 될 수 있는 최고의 신분입니다.

원래는 진골만 존재하였는데,진흥왕의 태자인, 동륜계 후손들이 자신들을 다른 진골들과 구분하기 위해

성골이라 부른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성골은 그 신분을 유지하기 위해, 근친을 하였고, 결국 멸종하게 됩니다.

선덕여왕도 성골 남자가 없어서 왕이 된걸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진골:

골족으로서 진골 역시 왕족입니다.

신라의 지배계층의 핵심을 담당하였습니다.

 

6두품:

두품수가 높을 수록 상위 신분입니다.

이 신분 역시 경위에 진출할 수 있는 상위 신분입니다.

이 가운데 6두품은 진골에 비해 신분상승에 특히 제한이 있었지만,

전체적으로는 득난으로 불릴정도로 귀성이었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6두품도 엄청난 귀족이라 할 수 있습니다.

 

 

5두품~4두품:

기록은 거의 전해지지 않으나, 국가의 잡다한 실무를 담당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신분은 정해진 게 아니라서, 진골의 경우에도 강등되어 6두품이 되는 사례도 있었습니다

 

 

 

3.관등표

 

 

 

 

 

 

 

 

4.골품제의 영향

 

-골품제는 신라에만 있는 독특한 신분체계로서, 초창기에는 신라 중앙집권체계의 큰 역할을 했지만,

후대에 와서는 그 신분의 폐쇄성 때문에, 하위계층에서 많은 불만이 있었습니다.

또한 상위 계층인 진골의 부패와 폐단등, 나라의 망국적인 형태가 일어나자, 신분에 불만을 품은

6두품들은 지방의 호족들과 결탁하여, 후삼국시대를 열게 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고,

신분제로 인한 폐쇄성과 고위층의 부패로 인해 신라가 망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성립과정

신라는 경주에 자리잡은 사로국(斯盧國)의 6부를 중심으로 주변의 작은 나라들을 복속시키면서 성장하였다. 그 과정에서 복속된 소국의 지배층 가운데 일부를 경주로 이주시켜 지배층인 6부에 편입시키고, 다른 일부는 원거주지의 촌주(村主)로 삼아 복속지역 통치에 이용하기도 하였다. 6부체제를 특징짓는 이와 같은 신라 초기의 정치체제는, 지증왕대 이후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하는 6세기 초반에 해체되었다. 법흥왕 7년 (520)의 율령반포는 6부체제가 해체된 뒤 왕을 중심으로 하는 일원적인 관료제를 지향하는 과정에서 나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즉, 율령을 반포할 때 원래의 신라인과 경주 지역으로 이주해온 지배층에 적용한 신분제가 골품제로, 관직에 진출할 수 있는 관등제와 직결되어 있었다. 신라의 관등제는 경위(京位)와 외위(外位)의 이원적 체제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골품제의 적용을 받은 경주인들은 중앙관직에 진출하여 경위를 지급받았다. 반면에 지방인들은 골품제 적용대상에서 제외된 채 중앙정계에 진출하지 못하고 외위만을 받았다. 법흥왕대에는 정비된 골품제는 삼국통일 전쟁을 겪으면서 크게 변화하여, 문무왕 14년(674년)에 경위와 외위의 상등관계를 정하고 양자간의 공식적인 교류를 인정하는 단일 관등체제를 형성함으로써 경주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골품제에 많은 변화가 나타났다. 또한 통일신라시기의 사회경제적인 변화는 신라 정치의 운영원리인 골품제를 변화시키는 커다란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그러나 진골 귀족간의 왕위계승 다툼이 치열해지는 신라 하대에는 골품제가 변화된 사회현실을 수용하지 못한 채 폐쇄적으로 전개되었다. 그 결과 골품제의 한계에 회의를 지닌 계층의 불만이 누적되고, 계속된 자연 재해와 수취체계의 모순으로 농민들의 생활이 극도로 불안정해짐에 따라 골품제의 사회경제적 기반이 붕괴 위기에 처하였다. 사로국(斯盧國)의 6부를 중심으로 주변의 작은 나라들을 복속시키면서 성장하였다. 그 과정에서 복속된 소국의 지배층 가운데 일부를 경주로 이주시켜 지배층인 6부에 편입시키고, 다른 일부는 원거주지의 촌주(村主)로 삼아 복속지역 통치에 이용하기도 하였다. 6부체제를 특징짓는 이와 같은 신라 초기의 정치체제는, 지증왕대 이후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하는 6세기 초반에 해체되었다. 법흥왕 7년 (520)의 율령반포는 6부체제가 해체된 뒤 왕을 중심으로 하는 일원적인 관료제를 지향하는 과정에서 나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즉, 율령을 반포할 때 원래의 신라인과 경주 지역으로 이주해온 지배층에 적용한 신분제가 골품제로, 관직에 진출할 수 있는 관등제와 직결되어 있었다. 신라의 관등제는 경위(京位)와 외위(外位)의 이원적 체제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골품제의 적용을 받은 경주인들은 중앙관직에 진출하여 경위를 지급받았다. 반면에 지방인들은 골품제 적용대상에서 제외된 채 중앙정계에 진출하지 못하고 외위만을 받았다.
2. 계급 구성과 운영

골품제는 모두 8개의 신분층으로 구성되었다. 먼저 골족은 성골(聖骨)과 진골(眞骨)로 구분되었으며, 두품층은 6두품에서 1두품가지 있었는데 숫자가 클수록 신분이 높았다. 그러나 이 가운데 3두품에서 1두품가지는 기록에 전혀 보이지 않는데, 아마도 율령 반포 초기에 일반 평민을 3등분하였다가 현실적으로 구분할 필요성이 거의 없게 되자 곧 소멸된 것으로 보인다. 성골은 골족 가운데서도 왕이 될 수 있는 최고의 신분이었다. 진골 역시 왕족으로서 신라 지배계층의 핵심을 이루면서 모든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진골 역시 왕족으로서 신라 지배계층의 핵심을 이루면서 모든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런데 성골과 진골은 원래부터 독립적으로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성골과 진골 모두 왕족 출신으로 원래는 진골 존재하였다. 그러던 것이 진흥왕의 태자인 동륜(銅輪)계의 후손들이 자신들을 다른 진골들과 구분하기 위해 성골이라 부른 것으로 보인다. 동륜의 손녀이자 진평왕(26대)의 장년인 선덕여왕(27대)이 여자로서 왕위에 오를 때, 왕위계승의 그거를 "성골의 남자가 없기 때문" 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진골 출신 가운데 처음으로 왕위에 오른 태종무열왕(29대) 김춘추는 진지왕(25대)의 손자였다. 그리고 김춘추의 아버지이자 진지왕의 아들인 용수(龍樹)는 선덕여왕이 왕위에 오를 때 생존해 있었다. 똑같이 진흥왕의 후손인 용수와 선덕 중 선덕만이 성골이었다는 점은, 용수와 구별되는 선덕여왕 계열에서 동륜을 시발점으로 하여 다른 가계와 구분하기 위해 자신들의 가계를 신성화시킨 결과인 것으로 추정된다. 불교에서의 진종설(眞種設)과 전륜성왕(轉輪聖王) 이념은 이와 같은 성골의식이 대두될 수 있는 사상적 배경을 제공하였다. 진골 아래의 6두품은 진골에 비해 관직 진출 및 신분상의 제약이 다소 강했지만, 전체적으로는 '득난(得難) '으로 불릴 정도로 귀성(貴姓)이었다. 5두품과 4두품에 대한 기록은 거의 전하지 않으나, 국가 기관의 잡다한 실무는 이들에 의해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골품에 따른 신분 등급은 고정된 것이 아니어서, 진골의 신분이었다가도 경우에 따라서는 한 등급 강등되어 6두품이 되는 사례도 있었다. 골품제도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신분에 따라 맡을 수 있는 관등의 상한선을 규정한 것이다. 신라 17개 관등 가운데 제1관등인 이벌찬(伊伐 )에서 제5관등인 대아찬(大阿 )까지는 진골만이 할 수 있었고, 다른 신분층은 대아찬 이상의 관등에 올라갈 수 없었다. 신분에 따른 관직 임명시 제기되는 하급 신분층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해 상한 관등에 몇 개의 관등을 더 세분해서 두는 중위제가 실시되었으나 골품제 자체의 근본적인 한계를 극복하지는 못했다. 이 밖에도 골품제는 공복(公服)의 빛깔, 착용할 수 있는 옷감의 종류, 관(冠)의 재질, 요대(腰帶) 및 신발의 재질, 수레에 사용하는 장식품의 종류, 일상생활의 용기까지도 골품에 따라 차등있게 구분하였다.

●진골
신라 때 혈통의 높고 낮음에 따라 관직 진출, 혼인, 의복, 가옥 등 사회 생활 전반에 걸쳐 규제를 한 신분 제도인 골품제도를 구성하는 신분 계급의 하나. 골품제는 모두 8개의 신분층으로 구성되었는데 먼저 골족은 성골과 진골로 구분되었으며, 두품층은 6두품에서 1두품까지 있었는데 숫자가 클수록 신분이 높았다. 성골은 골족 가운데서도 왕이 될 수 있는 최고의 신분이었는데 진골 역시 왕족으로서 성골과 함께 최고 계급으로 부계와 모계 가운데 한쪽은 왕족이고 한쪽은 귀족일 때 성립한다. 태종 무열왕부터 혜공왕 때까지의 왕이 진골 출신이었는데, 진골 신분은 제5관등 대아찬 이상의 최고 관등으로 오를 수 있으며, 6두품에 비하여 사용하는 기물, 복색, 집의 크기에 대한 제한이 적었다. 중대에 오면서 이들은 장관직, 장군직을 독점하고 국가로부터 식읍이나 녹읍을 받았으며 사병을 양성하고 사원을 경영하여 재산을 도피시키는 등 호사스러운 생활을 하였다. 하대 진골 귀족의 비대는 왕권의 약화와 진골 귀족간의 왕위 쟁탈전을 불러 일으켰다.

●성골
신라 시대의 으뜸가는 신분계급. 엄격한 신분제인 골품제에서 성골은 가장 높은 신분으로 왕족 중에서도 일부나 차지하였다. 부계(父系)와 모계(母系)가 모두 순수한 왕족이다. 이에 관한 기록은 문헌에 따라 달라서 <삼국사기>에는 시조인 박혁거세로부터 진덕여왕에 이르는 왕들이 모두 여기에 속하는데, 처음의 박씨 7왕, 석씨 8왕, 김씨13왕으로 서로 혈족 결혼을 하며 순수한 성골을 지켜 왕위를 독점하였다. <삼국유사>에는 23대 법흥왕에서 28대 진덕 여왕에 이르는 왕들만이 속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삼국유사>의 기록이 보다 믿을 만한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태종무열왕 때부터는 성골 출신의 왕은 없어지고 마지막 경순왕까지 진골 출신의 왕으로 세습되었다.

●두품
4두품 이상은 모두 지배층으로서 관직 진출의 권리를 부여받았고, 1-3두품은 백성 또는 평민으로 간주하였다. 9세기 초엽에 1~3두품은 소멸되었으며, 이 시기 천신분은 대부분 노비신분의 세습, 전쟁, 포로, 형벌, 채무, 빈곤으로 인한 인신매매 등으로 노비가 되었다. 노비는 재산이어서 매매, 상속, 증여의 대상이었으며, 인격이 부인되었다. 국역을 부담하지 않았으나 주인에게 노동력 수탈을 당하는 말하는 도구였을 뿐이다.

 

골품제의영향

 

골품제도의 정치적 기능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일정한 관직에 오를 수 있는 자격을 규정한 관등에 관한 규제이다. 이 관등제도는 신라에 있어 신분제도와 표리의 관계를 이루고 있었다. 본래 관등은 성읍국가시대 부족회의에 있어서의 석차, 계층에서 원류한 것인데, 연맹왕국의 단계에 이르자 각기 다른 관제가 그대로 중앙 정부의 관제 속에 중첩되어 관직제와 관등제는 서로 구별할 수 없게 되었고 그 자체가 다원적인 성격을 띄게 되었다. 그러나 신라가 연맹왕국 단계에서 중앙 집권적인 귀족국가로 형성되어 가는 과정에서 연맹왕국시대의 다원적인 관료 조직을 청산하고 국왕을 중심으로 한 일원화된 관등체계가 정비되었다. 520년에 정비된 신라의 17등 관등제도는 골품제도와의 상관관계가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는데, 이에 의하면 진골은 최고관등인 이벌찬까지 승진할 수 있으나, 6두품은 제6관등인 아찬까지, 5두품은 제10관등인 대나마까지, 4두품은 제12관등인 대사까지로 승진의 한계가 정해져 있었다. 이와 같은 관등의 신분계급적인 구분은 자색, 비색, 청색, 황색의 네 가지 복색의 구분과 일치하고 있다. 물론, 신라는 삼국통일 직후에 6두품이하의 신분에 속한 사람들에게 중위제도라고 하는 일종의 특진의 길을 개방하기도 하였다. 즉, 6두품에게는 그 상한선인 아찬에 중위를 설정하여 4중 아찬에까지 오를 수 있도록 하였으며, 5두품에게는 제 10관등인 대나마의 경우 9중 대나마까지, 제 11관등인 나마의 경우 7중 나마까지 승진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 특진제도로서도 신분계급에 따라 제한된 관등의 상한선을 넘을 수 없었다. 또한 6정을 비롯한 주요군부대의 경우에도 그 최고지휘관인 장군은 급찬 이상이면 될 수 있었으나, 진골에 한한다는 별도의 규정이 있었으며, 지방관직 또한 예외는 아니다. 주의 장관직인 도독이나 소경의 장관인 사신은 급벌찬 이상이면 가능하게 되어 있어 관등만을 본다면 6두품출신의 취임 가능성은 배제되지 않으나, 주의 차관직인 주조나 군의 장관직인 태수에 취임할 수 있는 최고의 지방관직이었으며, 도독이나 사신 모두 진골만이 할 수 있는 관직이었다. 골품제도는 관직뿐만 아니라 사회생활에도 많은 제약이 가해졌다. 그 중 혼인에 관한 제약인데 이는 같은 신분 안에서만 혼인이 허가되었다. 그러므로 수가 적은 최고신분에 속하는 사람들에게는 배우자를 얻는 일이 쉽지 않았다. 진덕여왕이 혼인하지 않은 이유가 실은 왕실 안에서 성골신분의 남성을 구하지 못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같은 진골신분인 경우에도 김씨 왕족은 뒤에 경주로 이주하여 온 신라에 병합된 군소국가의 왕족 후예와의 혼인을 꺼리는 관습이 강하였다. 신분에 따른 사회적인 제약은 혼인 이외에도 가옥의 크기에도 적용되는데, 이는 834년(흥덕왕9)의 규정에 따르면 진골의 경우라도 방의 길이와 너비가 24척을 넘지 못하며, 6두품은 21척, 5두품은 18척, 4두품과 평민은 15척을 각각 넘지 못하게 규정되어 있으며, 복색에 있어서도 제 5관등인 대아찬 이상, 제 9관등인 급벌찬 이상, 제11관등인 나마 이상, 그리고 제 17관등인 조위 이상이 각기 자색, 비색, 청색, 황색의 복장을 하였는데, 이는 신분에 따른 관등상한선으로 볼 때 진골· 6두품 · 5두품· 4두품에 각기 상응하고 있다. 이밖에도 우마차의 자재 및 장식, 기타 일상생활 용기들이 골품에 따라 각기 다르게 규정되어 있었다. 이와 같은 신분 계급적인 신라사회에서 주도권을 행사하고 있던 것이 최고의 특권을 누리고 있던 진골이었으므로, 골품제도는 결국 왕족의 일반 귀족과 평민에 대한 지배권을 합법화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이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