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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여행 2019. 12. 31. 16:26


[문화] 지식카페 문화일보 : 2020년 04월 22일(水)
태양·하느님이 단군신앙으로 통합… 흉노·투르크 國敎로도 발전
▲  고조선 시기 진국 지역 농경문 청동기(뒷면)에 새겨진 ‘솟대’와 그 끝의 ‘새’(대전 괴정동 출토, 왼쪽 사진의 원). 오른쪽 사진은 현대에 복원된 솟대. ‘단군신앙’은 우주를 하늘과 땅, 지하의 3차원 세계로 나누었고, ‘나무’와 ‘새’는 이 3세계를 소통하는 통로로 여겼다. 자료사진


■ 신용하의 인류 5대 ‘古朝鮮문명’ - (15) 고조선 문명권 종교

- 한민족 문명학

단군·환웅·환인 숭배 3신교 형성… ‘삼위일체’로 여기며 사실상 인류 최초의 일신교
신성한 ‘소도’에 ‘솟대’세웠는데 끝에 나무로 만든 새 부착… 단군·인간 이어준다고 여겨


고조선문명은 인류 최초의 단립벼·콩 재배와 농업경작을 시작했고, 농업경작은 처음부터 ‘햇빛’(태양광선)과 기후·기온에 크게 좌우되었기 때문에 자연히 ‘태양 숭배’가 매우 일찍 형성됐다. 고조선문명의 태양 숭배는 태양이 있는 ‘하늘’ 숭배에 연결되어 ‘태양=하느님’ 숭배의 사상과 양식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BC 30세기∼BC 24세기 고조선국가를 건국한 후에는 개국시조 ‘단군’이 고조선 사람들의 숭배의 대상이 됐다. 고조선문명권에서는 단군을 자기 민족의 조상임과 동시에 개국시조로 신앙하는 ‘단군 숭배’가 형성됐다. 개국시조 단군이 서거하자 고조선인들은 단군(의 영혼)이 그의 조부(환인), 부모(환웅)가 계신 하늘로 승천했다거나, 신성한 산의 산신으로 됐다가 승천한 것으로 설명하고 또 믿었다. 여기서 기존의 태양=하느님 숭배와 단군 숭배는 하늘 세계에서 구심점이 합쳐져서 하나로 통일됐다고 해석할 수 있다.

고조선에서는 본래 제왕을 ‘한’이라고 호칭했고, 그 초대 제왕이 단군이었으므로, 한족 계열의 고조선 남방에서는 조상신이 된 개국시조 ‘한’(단군)이 승천하여 계신 하늘을 ‘한울’(‘한’의 집·전당)이라고 사유하여 ‘한울=하늘=하느님’을 숭배하는 신앙이 형성됐다. 북방(예·맥 계열)에서는 단군이 승천하여 계신 하늘을 아예 ‘단(하늘, 天)이라 했고, 시조신 ‘단군이 계신 전당·굴=단굴’이라고 생각하여 ‘단굴 숭배’ 신앙이 동일하게 형성됐다. ‘태양=하느님(天)=단군=단굴’ 숭배가 하나의 ‘단군신앙’(Tengrism, Tangrism) 체계로 통합되어 고조선문명의 신앙의 특징으로 형성된 것이다.

이에 고조선문명권에서는 ①단군과 ②그의 조상 환웅 및 ③환인(하느님)의 3신을 숭배하는 고조선 신앙인 삼신교(三神敎 또는 神敎)가 형성 보급되어 종교와 신앙의 공동성을 형성하게 됐다. 박은식은 고조선의 종교는 바로 삼신교이고, 단군신앙이라고 하였다.

▲  불가리아 제1제국의 깃발(8세기, 위 사진)과 카즈흐스탄의 국기(21세기 초반, 아래). 신용하는 ‘단군신앙’ 상징이 들어 있다고 주장한다.

단군신앙에서는 하느님(환인)·환웅·단군은 삼위일체의 하나로 통합되어 ‘단군이 곧 하느님’이오 ‘하느님이 곧 단군’으로 신앙된 것이었다. 그러므로 고조선문명권에서는 아예 ‘단(Tan, Dan)’을 ‘하느님’ ‘한’과 동일한 용어로 사용하였다. 즉 고조선 건국 후 성립된 단군신앙은 밝은 태양과 함께 푸른 하늘 세계의 하늘 궁전에 계시는 ‘환인’ ‘환웅’ ‘단군’의 3신을 통합하여 대표적으로 ‘단군’을 조상신으로서 숭배하는 신앙이다.

단군신앙에 의하면, 환인은 ‘하느님’(上帝)에 해당한다. 환웅은 하느님(환인)의 아들로 하늘 궁전에서 태어나서 홍익인간(弘益人間)하고 재세이화(在世理化)하라는 소명을 갖고 지상으로 내려왔기 때문에 신인(神人, 天王)이다. 단군은 지상에서 ‘곰족’과 혼인한 환웅의 아들로 태어나서 나라를 세워 ‘홍익인간’ ‘재세이화’의 원리로 백성을 교화시킨 지상의 직계 조상인 인간 왕검(王儉, 天帝)이다.

단군신앙의 우주관은 우주를 3차원 세계로 나누었다. 하나는 ‘하늘’(天) 세계이다. ‘하느님 단군’은 푸른 하늘(靑天) 가장 높은 곳 하늘궁전(天宮)에서 만물을 창조하시고 지상의 후손들(고조선·고조선문명권 사람들)과 모든 인간을 굽어살피시면서 후손과 모든 인간을 항상 보호하고 도와주시며 치유해 주신다. 삼신뿐만 아니라 삼신의 부인이신 ‘삼신할머니’는 후손의 잉태·출산·양육·건강을 점지하고 보살펴 주신다고 단군신앙은 생각하였다.

다음 세계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지상(地上) 세계다. 사람들이 가족을 이루고 생업을 하며 단군의 가르침에 따라 다른 사람들과 조화롭고 올바르게 살아가는 곳이다. 지상 세계에서 국왕과 황제도 단군의 후손으로서 단군신(檀神, 天神)에 의하여 백성을 도와주도록 소명을 받고 국왕이나 황제가 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동이족 지역 산동반도에서 출생, 성장한 공자(孔子)의 천명(天命) 사상의 기원은 고조선 이주민(동이)의 단군신앙의 천명사상에 기원한 것일 수 있다. 사람이 죽으면 몸은 흙에 묻히지만 정신은 분리되어 살아서 조상신인 단군신이 계신 곳으로 받아들여 주시면 승천할 수 있다.

그다음 세계는 지하(地下) 세계이다. 지하 세계의 사람은 ‘얼’이 없으며, 체온이 따뜻하지 않고, 숨도 쉬지 않는다. 그러나 생활양식은 지상 세계와 동일하다고 생각하였다. 지하 세계를 관리하는 ‘신’(神)도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 3세계를 소통하는 통로는, 지상과 하늘을 연결하는 것이 ‘나무’와 ‘새’이다. 신성한 ‘나무’인 신단수(神壇樹)와 신성한 ‘새’(새 토템)가 영적으로 하늘 세계 조상신인 단군신과의 통로가 된다. 또한 지상 세계와 지하 세계를 소통하는 것은 ‘나무’와 ‘물’이다. 신성한 나무의 뿌리와 신성한 강물은 지하 세계와의 통로가 된다.

지상 위 산·강·성스러운 사람·성스러운 동물·나무도 신(神)이 될 수 있어서 山神·水神·地神·木神 등이 있으나 그것은 아주 작은 신으로서 유일한 천신(天神, Sky God)인 ‘단군신’의 절대적 지배를 받는다. 단군신(天神)이 최고의 유일한 절대신이다. 그러므로 단군신앙은 사실상 인류 최초의 일신교(一神敎, monotheism) 신앙이었다.

지상 세계에서 사람들이 올바르게 살기 위해서는 단군신(하느님이면서 동시에 조상신)의 가르침·교화를 잘 받아야 한다. 단군신앙의 교화 원리는 ①‘홍익인간’ ②‘재세이화’ ③‘단군8교’에 특징이 요약되어 있다. 홍익인간은 문자 그대로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한다”는 원리 원칙이다. 홍익인간의 내용을 분절해서 보면, 여기서의 ‘인간’은 자연에 대한 인간 우선, 인간 중심과 함께 신분과 성별, 종족을 초월한 ‘모든 인간’을 의미한다. 홍익인간의 ‘인간’은 신분 차별·남녀 차별·부족 차이를 초월한 ‘모든 인간’을 모두 한 가지 하나로 보아 보편적으로 이롭게 한다는 뜻이었다. 현대어로 표현하면, 짙은 인본주의·휴머니즘이 정립 관철되어 있었다.

‘재세이화’는 문자 그대로 “세상에 있으면서 이치로 교화한다”는 원리 원칙이다. 재세이화의 내용을 분절해 보면, ‘이화’는 폭력과 무력, 전쟁, 억압, 강제로 교화하지 않고, “‘조화’ ‘화합’ ‘평화’ ‘이치’ ‘교육’ ‘설득’으로 교화한다”는 의미다. 재세이화를 때로는 ‘이화세계’(理化世界)로 표현한 경우도 있었는데, 이 경우에도 주변 환경인 세계에 ‘조화’롭게 ‘이치’로 교화한다는 동일한 의미였다. ‘홍익인간 재세이화’를 합쳐보면, 이것은 단군의 정치이념일 경우에는 “모든 백성을 차별 없이 모든 부문에서 필요한 것을 공급해주고, 도와주며, 폭력과 강제가 아니라 이치와 조화, 설득, 동의로 백성을 교화시킨다”는 원리 원칙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  상형문자 한자의 기원인 갑골문에서 최초의 ‘聖’(성) 자는 나무 위에 새가 앉은 글자이고, ‘桑’(상)은 나무 위에 세 마리의 ‘새’를 올려놓은 글자라고 신용하는 주장한다.

단군신앙은 고조선의 국교(國敎)가 되었을 뿐 아니라 고조선문명권 전체에 전파 보급되어 고조선문명권의 보편적 신앙과 국교가 됐다. 그러므로 고조선에서는 특정 지역에 소도(蘇塗)라는 별읍(別邑)을 설치하여 신성시하면서, 단군신앙의 종교의식을 담당하고 백성을 교화시키는 직책으로 천군(天君)을 두었다. 중국의 고문헌 ‘삼국지’ ‘후한서’ ‘진서’ 등에는 진(辰)과 삼한(三韓) 지역에서는 국읍(國邑)에 각각 천신에 대해 제사를 주재하는 책임자를 두는데 이를 천군이라 한다고 기록하였다. 여기서 ‘天神’(천신)은 ‘檀神’(단신)과 동일하며, ‘단군=하느님’을 한문자로 의역한 것이다. 이것은 고조선 후국들에서 단군신앙이 제도화되어 있었음을 알려주는 기록이다.

소도는 내용을 볼 때 “큰 나무를 세우고”라고 했으니, ‘솟대’의 한자 음역으로 추정된다. 여기서 ‘큰 나무’는 신단수와 같은 신성한 나무다. 솟대 끝에는 나무로 만든 ‘새’를 부착해 놓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 새는 토템으로 존중된 영매조(靈媒鳥)로서 단군신(天神, 단군)과 인간(人間) 사이의 뜻을 전달하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한반도와 만주, 동몽골, 연해주 등 고조선문명권의 고조선 사람들은 단군신앙을 공유하고 있었고, 단군신앙의 교화처인 솟대별읍과 솟대문화를 갖고 있었다. 고조선·진국(辰國)의 소도(솟대)별읍의 성역 특징은 고조선 이주민의 후예인 (고중국) 상(商) 지식인들이 갑골문 한자를 처음 만들 때 ‘성’(聖) 문자의 고안에 적용됐다. 허진웅에 의하면, 갑골문 최초의 ‘聖’ 자는 나무(솟대) 위에 새(鳥)가 앉은 그림이었다.

필자는 고대 동양에서 고조선을 가리켜 ‘해가 떠오르는 나라’(land of sunrise)의 의미로 사용한 ‘부상국’(扶桑國)의 ‘桑’(상)도 ‘솟대’의 상형문자(그림글자)라고 본다. 이 글자는 “나무 위에 세 마리의 ‘새’(鳥)를 올려놓은 글자”이다. 진국의 ‘솟대’를 형상화한 것이다. ‘扶’(부)는 ‘밝음’ ‘불’ ‘부여’의 음차 표기이다. ‘檀’(단) 자도 ‘밝달나무’를 표시한 것이 아니라 ‘밝달’족을 표시한 것이고, ‘桑’ 자도 뽕나무를 표시한 것이 아니라 동쪽 ‘솟대나라’를 표시한 것이다. ‘회남자’(淮南子)에서는 “扶桑(부상)이 아침 햇살을 받고 해가 우주를 비추면 소소한 빛은 사해(四海)를 비추게 된다”고 하였다. 부상국을 ‘아침 햇살을 맨 먼저 받고 우주를 비추는 아침의 나라’로 기록한 것이었다. 부상국은 ‘고조선’을 가리킨 것이었다.

고조선 연방제국의 서변 후국들이었다가 BC 108년 고조선 국가 해체 후 서방이동을 감행한 흉노(Huns)족, 마자르(Magyars)족, 아발(Avars, 柔然, 大檀)족, 불가르(Bulgar, 불도하, 불령지)족, 투르크(丁零, 突厥)족들은 중앙아시아에 이동하여 장기간 정착한 시기에 단군신앙을 국교로 갖고 생활하며 발전하였다. 그들은 발칸반도 및 중부 유럽에 들어간 후 기독교와 이슬람교 등 다른 종교로 개종하기 전까지 모두 단군신앙을 국가종교로 신앙하면서 발전하였다. 중앙아시아의 투르크족은 대체로 13세기까지는 단군신앙을 국가종교로 갖고 있다가 셀림 1세가 이집트까지 정복하여 오토만 제국이 거대한 제국으로 발전하자 아랍민족들의 통치와 통합을 목적으로 14세기에 이슬람교로 개종하였다. 판노니아 평원을 점령한 훈족과 마쟐족의 국교도 단군신앙이었다. 아틸라를 포함한 훈족의 족장들은 모두 단군신앙의 신봉자였다.

발칸반도에 들어가 불가리아 제1제국을 세운 불가르족의 국교도 단군신앙이었다. 불가리아 제1제국의 막강한 오므르타그 칸은 비잔틴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거액의 조공을 받기로 하고 30년간 평화조약을 체결했는데, 이때 동로마 황제 레오 5세는 불가리아의 전통에 따라 불가리아의 유일신인 ‘단군신’(Tangra)에게 평화협정 준수를 맹세했다. 라인강 양안을 200년간 통치한 아발족(Avars)의 국교도 단군신앙이었다. 몽골족도 단군신앙을 국교로 신앙했으며, 12세기 칭기즈칸도 단군신앙을 신봉한 대칸이었다. 단군신앙의 발상지인 한반도·만주 지역에서는 고구려가 소수림왕 2년(AD 372년) 불교를 용인 권장하기 이전까지는 단군신앙이 역시 국교였다. 백제·신라도 동일하였다. AD 4세기 말부터 지배층에 의해 단군신앙이 ‘불교’ 등으로 교체됐다.

단군신앙과 ‘샤머니즘’은 다른 것이다. 단군신앙은 투르크족의 오르혼 비문에 쓰여 있는 바와 같이 국왕과 온 국민이 신앙하는 정치 통합과 도덕 교육의 체계적 원리를 갖춘 ‘국가종교’였다. 반면에 샤머니즘은 단군신앙이 국가종교의 지위를 상실한 후, 퇴화된 민속으로서의 ‘당굴’(일종의 무격)들이 행하는 질병 치유 등의 ‘굿’을 지칭한 것이었다. 19세기에 서양 문화인류학자들이 이 만주 몽골·시베리아 등지의 단군신앙 해체 후 퇴화된 유제를 샤머니즘이라고 호칭한 것이 일반화되어서, 이제는 단군신앙과 샤머니즘을 혼동하기에 이른 것이다.

단군신앙은 소련 지배 시대 중앙아시아에서는 금압당했다. 현재는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등에서는 민족 전통의 하나로 부흥운동이 일고 있다고 한다. 옛 고조선문명권 후예의 후손이 세운 카자흐스탄의 국기는 단군신앙을 그들의 민족 전통으로 상징화한 것으로 보인다.

인류 초기 문명은 모두 독자적 신앙·종교를 창출했는데, 수메르문명·이집트문명은 모두 다신교(多神敎)였다. 반면에 동방 고조선문명의 ‘단군신앙’은, 지금은 거의 잊혀버렸지만, 거대한 고조선문명의 정신적 통합과 생활 도덕의 교화를 담당했던 인류 최초의 일신교 세계 종교였다. (문화일보 3월 25일자 15면 14 회 참조) 

서울대 명예교수

■ 용어설명

소도(蘇塗)와 신단수(神壇樹) : 소도는 ‘큰 나무를 세운다’는 의미를 가졌는데, 솟대의 한자 음역으로 추정된다. 여기서 ‘큰 나무’는 신단수와 같은 신성한 나무다. 솟대 끝에 새를 부착해 놓는데, 이 새는 토템으로 존중된 영매조(靈媒鳥)로서 단군신과 인간 사이의 뜻을 전달하는 것으로 ‘단군신앙’에서는 생각했다.





[문화] 지식카페 문화일보 : 2020년 03월 25일(水)
고조선도 ‘독자적 문자’ 사용했다… 훈민정음에도 영향 끼쳤을 듯
▲  고조선시대의 토기·청동기·암벽 등 유적·유물에는 해독되지 않는 신석기 기호문자인 ‘신지문자’들이 남아 있다. 이것이 한문자(漢文字)나 훈민정음에도 영향을 미쳤을지는 학계의 연구과제이다. 사진은 요서지역 소하연문화(BC 3000∼BC 2000) 토기 그림문자의 탁본.


■ 신용하의 인류 5대 ‘古朝鮮문명’ - (14) 고조선의 ‘神誌문자’

- 한민족 문명학

토기·청동기·암벽 등서 유사한 문자 발견… 삼국유사·용비어천가 등 고문헌에도 실재 흔적
세종실록엔 ‘훈민정음이 옛 전자 모방했다’고 기록… 남은 자료 적고 해독 어려워 연구 필요

 

고조선문명에서는 지배층 지식인만이 사용하던 고조선 말을 표기하는 ‘신지(神誌)문자’라는 글자가 있었다. 그러나 유물이 적게 발견되어 아직 해독하지 못하고 있다. 고조선 황화 유역에서 이주민 밝족이 商(상=殷·은)을 건국한 후 고중국어를 표기하는 ‘한문자(漢文字)’를 발명하여 오늘날의 한문이 되었다. 고조선문명의 후예들은 민족별로 여러 가지 문자를 차용한 간이문자를 만들어 사용했다. 15세기 전반기에 들어와서 드디어 조선에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는 새로운 알파벳이 발명되어 모든 우랄·알타이어족 언어와 세계 모든 언어를 쉽고 정확하게 표기할 수 있는 세계 문자가 창조되었다. 고조선문명의 시작부터 간략히 살펴보기로 한다.

고(古)한반도 초기 신석기인은 최초에는 노끈이나 ‘새끼에 매듭’(結繩·결승)을 만들어 의사소통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태호(太호)족이 고한반도에서 중국 산동반도로 건너가서 원주민에게 ‘새끼 매듭’(결승)에 의한 의사소통 방법을 전수해 주었다는 기록은 태호족이 떠나기 전 고한반도에서는 ‘새끼 매듭’에 의한 의사소통 방법이 실행되고 있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또한 고한반도 신석기인은 ‘나무에 새김’(算木, 佃木)을 만들어 의사소통했다는 기록(續博物志(속박물지))도 있다. 이러한 새끼줄이나 나무는 모두 썩어버렸으므로 오늘날 그 기호나 부호를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바위 또는 토기에 새긴 ‘그림문자’ ‘기호’ ‘부호’는 현재도 남아 있다.
 

▲  위의 그림문자가 새겨진 요서지역 소하연문화의 토기.

그러나 현 단계에서는 무엇을 기록했는지 알지 못하고 있다. 앞으로 관련 학계의 연구과제라고 할 것이다. 고조선에는 신지(神誌)문자라는 문자가 창제되어 실재했다. 고중국에서는 고조선의 신지문자를 ‘창힐(蒼힐)문자’라고 호칭하기도 했다. 한국에는 고조선시대에 신지(神誌)가 창제한 문자가 사용되었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고문헌에 ‘신지’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고려시대 일연(一然)의 ‘삼국유사’에는 ‘신지비사(神誌秘詞)’라는 서책이 암자에 남아 있었음을 기록했다. 세종 때 편찬된 ‘용비어천가’에서는 ‘구변지국(九變之局)’의 ‘局’을 주석하면서 ‘구변도국(九變圖局)’을 신지(神誌)가 편찬한 도참서(예언 서적)의 이름으로 설명했다.

‘세조실록’에서는 신지비사를 ‘고조선비사(古朝鮮秘詞)’라고 기록하면서, 민간이 소장하고 있는 ‘고조선비사’ 등을 관에서 회수하여 다른 원하는 서적으로 교환해주도록 유시했다. ‘예종실록’(1472년 편찬)과 ‘성종실록’(1495년 편찬)에도 유사한 유시가 발령되고 있는 것은 신지의 ‘고조선비사’가 당시까지는 민간에 꽤 널리 보관되어 있었는데 조정에서 모두 몰수하여 소멸시킨 것을 알려주고 있다.

조선왕조 선조 시기의 권문해(權文海)가 편찬한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에서는 “神誌는 단군시대 사람으로 호는 스스로 선인(仙人)이라 했다”고 기록했다. 임진왜란 직전인 1590년(선조 23년) 윤두수(尹斗壽)가 편찬 간행한 ‘평양지(平壤誌)’에는 “평양 법수교(法首橋)에 옛 비석이 있는데 언문도 아니고 범(梵)문자도 아니며 전(篆) 자도 아닌 글자로서 사람들이 능히 알 수가 없었다”고 기록했다. 또한 “계미년(선조 16년) 2월 법수교에 매장되었던 멱석비(石碑)를 파내어 본 즉 3단으로 나누어졌는데, 비문은 예(隷) 자도 아니고 범서(梵書) 모양과 같았으며, 어떤 이는 이것을 단군(檀君) 시기 신지(神誌)의 소서(所書)라고 말하였는데, 세월이 오래되어 유실된 것이라고 했다”고 기록했다.

‘해동역대명가필보(海東歷代名家筆譜)’와 ‘영변지(寧邊誌)’에는 신지문자 16자가 채록되어 있다.

이 밖에 고조선 시대의 토기·청동기·암벽 등 유적·유물에는 위의 문자와 유사한 문자들이 간혹 조각되어 있어서 고조선의 신지문자가 실재했음을 알려주고 있다.

한편 고중국에서는 신지(神誌)문자를 창힐문자(蒼힐文字)라고 부르면서 기록을 남겼다.
 

▲  창힐문자의 비석 탁본(사진 왼쪽). 해독되지 않는 고조선문명 지역의 신석기 기호문자가 새겨진 경남 남해군 양하리 바위와 경북 영일군 칠포리 바위.


중국 고문헌 ‘포박자(抱朴子)’에는 하(夏)나라를 건국한 황제(黃帝)가 靑丘(청구)에 도착하여 풍산(風山)을 지나다가 자부(紫膚) 선생을 만나 ‘삼황내문(三皇內文)’을 받아왔다는 기록이 있다. 이에 대해 ‘청구’는 조선의 옛 이름이며, 3황은 ‘환인·환웅·단군’으로서, 황제가 고조선의 풍산을 지내가다가 고조선의 ‘자부’라는 학자로부터 고조선의 문자(삼황내문)를 받아왔음을 기록한 것이라는 해석이 있다. 이때 황제가 받아간 ‘삼황내문’이 고중국이 창힐문자라고 호칭했던 신지문자라는 것이다.

중국 송나라시대 서기 992년(송 순화 3년)에 간행된 옛 붓글씨 첩책 ‘순화각첩(淳化閣帖)’에는 한문자로 해독되지 않는 글자로 새겨진 비문 28자를 창힐문자라는 이름을 붙여 수록했다. 또한 청나라시대에 세운 중국 섬서성 백수현 사관향(白水縣 史官鄕)에 있는 ‘창성묘(倉聖廟)’라는 사당에 ‘창힐조적서비(蒼힐鳥迹書碑)’와 서안(西安)시 비림(碑林)에 있는 ‘창힐서비(蒼힐書碑)’는 역시 ‘순화각첩’의 창힐문자 28자를 모사하여 세운 것이었다.

신지문자와 창힐문자가 동일한 이유는 신지문자가 고중국에 전수된 것이 창힐문자이기 때문인 것으로 해석된다. 그 근거는 우선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는 위에서 든 ‘포박자’에 고중국 황제가 조선에 간 적이 있을 때 고조선의 학자 ‘자부’ 선생으로부터 고조선 문자(신지문자)를 받아왔다고 풀이되기 때문이다. 둘째는 ‘蒼힐’은 ‘푸른나라 사람 힐’의 뜻으로 그 자체 ‘靑丘’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중국에서는 ‘창힐’을 황제의 사관(史官)이라고 하면서 글자를 반포했다고 하여, ‘힐황(힐皇)’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힐’이 사관 이름이며 ‘蒼’은 ‘靑丘’(조선)를 의미함을 시사하는 것이다. 즉 창힐문자란 ‘고조선 사관 힐’에서 받아온 문자의 뜻이 되는 것이다.

고조선의 신지문자는 BC 108년 고조선 국가가 한(漢) 무제(武帝)의 침공으로 멸망하고 한 4군이 설치된 이후 한문자가 본격적으로 들어옴에 따라 급속히 소멸하기 시작했으나, 고려시대까지는 일부 수공업자 계급 사이에서 잔존했던 흔적이 보인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국어학자, 사학자였던 권덕규(權悳奎)는 단군 고조선 시기부터 고려 시대까지 신지문자를 비롯하여 고유 문자가 존재했으며, 조선왕조에서 1443년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한 것은 이를 토대로 크게 계승·발전시킨 것이라는 주장을 일찍부터 강력하게 주장했다. 고조선 신지문자는 초기 소박한 문자 체계의 상태에서 BC 1세기부터 한문자가 보급되기 시작하고, 고구려·백제·신라의 조정에서 AD 4세기∼AD 6세기경 한문자가 공식 문자로 채택됨에 따라 급속히 쇠퇴하기 시작하여 소멸 단계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고려시대까지는 민간에서 구속용문자(舊俗用文字)로서 잔존했다가, 조선왕조 세조 때 마지막 잔존한 신지문자 관련 몇 종 서적까지 조정이 강제 수집하여 최종적으로 소멸시킴으로써 없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신지문자는 현재 충분히 수집되어 있지 않고, 또한 해독되지도 않고 있다. 고조선문명 연구가 매우 부족하기 때문이다. 앞으로 다수의 연구자에 의해 신지문자가 풍부하게 수집된 다음에 언젠가는 해독될 날이 있으리라고 예견할 수 있다. 신지문자는 앞으로 학계가 연구해야 할 과제다.
 


조선왕조 세종은 1443년(세종 25년) 마침내, 다음 표와 같은 훈민정음 28자를 제정하여 1446년에 반포했다. 초성(자음) 17자와 중성(모음) 11자로 구성된 알파벳인데, 조립하면 세계 어떠한 언어도 능히 표현할 수 있는, 세계 문자들 가운데 가장 우수한 과학적 문자이다.

주목할 것은 세종이 훈민정음을 제정한 ‘세종실록’ 기사에 훈민정음이 ‘옛 전자(古篆)’를 모방했다고 기록한 사실이다. 또한 정인지의 ‘훈민정음해례(訓民正音解例)’에서도 “글자는 옛 전(篆)자를 모방했다”고 기록했다. 주의할 것은 여기서 고전(古篆, 옛 전자)을 반드시 한문자의 ‘옛 전자’로만 해석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다. 이 표현은 훈민정음 반대파에게는 한문자의 ‘옛 전자’로 해석되게 했지만, 동시에 신지문자의 ‘옛 전자’의 의미도 포함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훈민정음의 글자 꼴이 한문자의 옛 전자와 동일한 것은 몇 개 없는 반면에, 그 정도의 닮은 수는 아직 50여 자밖에 수집하지 못한 신지문자에도 실재하기 때문이다.(표 참조)

물론 훈민정음은 완벽한 표음문자이고, 신지문자는 표의문자인지 표음문자인지조차 알지 못하는 미지의 문자이기 때문에, 훈민정음이 신지문자를 계승 완성한 문자라고는 추정할 수 없다. 필자는 신지문자와 ‘훈민정음’은 별도의 문자체계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필자는 역사·사회학도이고 언어·문자학자가 아니므로, 이것은 필자의 생각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종이 훈민정음 창제 도중에 모든 기존 문자를 참조했고, 요동에 와 있는 명의 언어학자 황찬(黃瓚)에게 성삼문(成三問) 등을 13차례나 파견하면서 서면 토론한 것을 고려할 때, 세종이 고려시대까지 민간의 일부에서 존속했고 세종의 후대 왕들 시대까지도 존속하여 그 수거를 명령했던 신지비사와 신지문자를 참작했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고 볼 수 있다.

신지문자와 훈민정음의 관계 역시 학계의 앞으로의 연구과제 중 하나라고 할 것이다. 명백히 할 것은 고조선문명에서 지배층은 독자적 신지문자를 제정하여 사용했으며, 한문자가 들어와 그것을 대체한 AD 4세기까지는 신지문자가 지배층 사이에서 사용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신지문자를 계승했든지 또는 별도의 문자체계로 창작했든지 간에, 고조선문명 창조자의 직계 후예가 15세기에 세계의 모든 문자 가운데서 가장 과학적 문자인 ‘훈민정음’을 창제하여 평민층까지 모든 백성이 세계에서 가장 알기 쉽고 배우기 쉬운 과학적 문자를 사용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문화일보 2월 26일자 17면 13 회 참조) 서울대 명예교수


■ 용어설명

신지문자(神誌文字) : 고조선문명 지역에서는 해독되지 않는 신석기 기호문자의 흔적들이 남아 있는데, 이를 고조선 지배층이 자신들의 말을 표기했던 ‘신지문자’라고 일부에서는 추정한다. 고중국에서는 ‘창힐(蒼힐)문자’라고 불렀다. 주류 고고학계에서는 고조선의 문자로 인정하지는 않고 있다.





[문화] 지식카페 문화일보 : 2020년 02월 26일(水)
유라시아 분포한 우랄·알타이어족은 고조선語 쓰던 기마민족에 기반
▲  고조선 해체 후 부여·고구려·백제·신라 다국시대에 그들의 언어는 이미 고조선어를 공통조어로 계승했기 때문에 서로 통역 없이 소통했다. 이를 입증하는 중국 고문헌 기록은 적지 않다. 사진은 단군이 천제를 올렸던 곳이라 전하고 있는 인천 강화군 마니산 정상의 참성단. 자료사진


■ 신용하의 인류 5대 ‘古朝鮮문명’ - (13) 우랄·알타이어족 기원

- 한민족 문명학

고조선 세운 한·예·맥 부족 모두 ‘밝’족 언어에 기초… 제후국 부족들도 공통 언어로 사용
유럽까지 대이동한 훈족·튀르크족·위구르족, 현지인과 융합하며 고조선語 기반한 우랄·알타이어족 형성

 

인류의 언어는 사회학적으로 인간이 집단을 이뤄 생활할 때 의사소통을 위해 발명한 도구다. 그러므로 인류의 언어는 이미 구석기인 무리(bands)에서 발명됐음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고대 고(古)한반도 사람들을 한 ‘민족’ 공동체로 결합시킨 가장 기초적 결합요소는 ‘고대 한국어’라는 ‘언어의 공동’이었다. 민족은 일차적으로 ‘언어공동체’인 것이다.

한국어는 언제 어떻게 형성됐을까? 언어학자들은 미시적으로 현대언어의 구조적 친연성을 탐구해 소급해서 어족을 분류하고 기원을 찾아 큰 성과를 냈다. 결론부터 말하면 한국어는 ‘우랄·알타이어족’에 속한다. 언어학자들이 밝혀낸 우랄·알타이어족의 특징은 ①주어(S)+목적어(O)+동사(V)의 어순 ②후치사 ③교착어 ④모음조화 ⑤두음법칙 ⑥부동사의 중요한 역할 ⑦모음교체 및 자음교체의 없음 ⑧관계대명사 및 접속사의 없음 ⑨어휘의 성별이 없음 등이다. 한편 역사사회학자들은 반대로 먼저 ‘민족형성과 이동’을 거시적으로 탐구해 한국어 및 한국민족의 기원과 우랄·알타이어족의 기원을 동시에 찾아낼 수 있다. 이에 의하면 고조선 문명의 고조선어(고대 한국어)가 ‘우랄·알타이어족’의 공통조어(共通祖語)이고 그 기원임이 밝혀지게 된다.

‘고한반도 초기 신석기인들’은 기후가 온난화돼 북위 40도 이북에서도 인간의 상주와 농경이 가능하게 되자, 약 9000년 전부터 북위 40도선을 넘어서 이동하는 씨족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고한반도의 북위 40도선 이남에 그대로 남아서 농경 등을 영위한 초기 신석기인들은 ‘한’부족을 형성하고 동시에 언어도 ‘한’부족 언어를 형성하게 됐다. 북위 40도선을 넘어서 북상해 요동반도·대요하 동쪽 태자하·북류 제2송화강·눈강·목단강·수분하·흥개호·혼강 일대를 중심으로 이동해 정착한 신석기인들은 ‘예’(濊)부족을 형성해 역시 ‘농경’을 시도하면서, 태양을 숭배하며 ‘범’(虎)토템을 갖고, 언어도 ‘예’부족 언어를 형성하게 됐다. 북위 40도선을 넘어서 북상해 대요하 이서의 대릉하·소릉하·노합하·시라무렌강 유역에 이동해 정착한 신석기인들은 ‘맥’(貊)부족을 형성, 역시 ‘농경’을 시도하면서 태양을 숭배하며, ‘곰’(熊)토템을 갖고 언어도 ‘맥’부족 언어를 형성하게 됐다.

‘한’ ‘예’ ‘맥’부족이 각각 언어를 달리 분화해서 형성했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모두 ‘고한반도 초기 신석기인 유형’(‘밝’족)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 근저에는 고한반도 초기 신석기인 시대의 ‘원시 공통어’(‘밝’족 언어)의 통합적 기초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부족과 ‘맥’부족과 ‘예’부족의 3부족은 연맹해 기원전(BC) 30세기∼BC 24세기에 동아시아 최초의 고대국가인 ‘고조선’을 건국했다. 따라서 ‘고조선 언어’는 우선 ‘한족 언어’와 ‘맥족 언어’와 ‘예족 언어’의 3부족 언어의 통합으로 형성됐다. 고조선어 형성에서도 제왕을 배출한 ‘한’족의 언어와 왕비를 낸 ‘맥’족 언어의 비중과 영향력이 더욱더 컸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특히 정치적 지배용어의 어휘들은 그러했을 것이다.

예컨대, ‘한’족은 ‘해’(태양) 숭배의 ‘새’ 토템 부족이었으므로 족장을 ‘한’으로 호칭했는데, ‘맥’족은 ‘곰’토템 부족이었으므로 족장을 ‘님검(검, 곰)’(임금)으로 호칭했다. 고조선어에서는 제왕의 어휘에 ‘한’과 ‘님검, 검’이 병존했다. 그러나 공식적으로는 대부분 ‘한’(Han)이었다.

고조선 문명권에서 처음에 ‘한’(Han)은 제왕이었고, 제후나 지방장관은 ‘가’(Ga)였다. 그러나 고조선의 발전과정에서 제후가 제왕이 되거나 자칭했을 때에는 ‘가한’(Ga+Han), ‘간’(Gahn), ‘칸’(Kahn)이라고 호칭하기도 했다. 인류사에서 제왕을 ‘한’(Han), ‘간’(Gahan), ‘칸’(Kahn)으로 호칭한 국가와 민족은 모두 원래 고조선 문명권의 포함된 국가나 민족뿐이었다.

고조선이 후국(侯國)제도를 채택해 고대연방제국으로서 여러 부족과 원민족들이 고조선 연방국가에 포섭되고 고조선 문명권이 형성되자, 고조선 문명권에 속한 후국 부족들과 원민족들은 고조선어를 분유해 자기 부족어 또는 원민족어를 통합시켰으므로 고조선어는 고조선 문명권의 공동의 언어가 됐다. BC 108년 고조선 해체 후에 그 후예들이 유라시아 대륙 각지에 흩어져 민족이동을 했어도 그들의 언어는 고조선어를 조어(祖語)로 해서 변동해 고조선어와 매우 밀접한 친연성을 갖게 됐다. 즉 고조선 문명권에 속했던 민족들의 언어와 그 후예들의 언어는 ‘고조선어’를 그들 언어의 공통 조어로 공유하게 된 것이었다.

우선 한국역사에서도 고조선 해체 후 부여·고구려·백제·신라 다국시대에 그들의 언어는 이미 고조선어를 공통조어로 계승했기 때문에 서로 통역 없이 모든 나라와 지역들에 고조선어가 공동으로 통용됐음을 단편적 고문헌으로도 논증할 수 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고구려전에서는 동이의 옛말에 의하면 “(고구려는) 부여의 별종이라 하는데, 언어와 풍속 등은 부여와 같은 점이 많다”고 했다. ‘후한서’ 동이열전 고구려조에서도 “(고구려는) 부여의 별종이라고 하는데 그러한 까닭으로 언어와 법칙이 많이 동일하다”고 기록했고, 이어서 구려조에서는 “구려는 일명 맥(貊)이라 부른다”고 했다. 즉 맥족인 부여·구려·고구려는 언어가 동일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양서’ 백제조에서는 “백제는(…) 지금 그 언어와 복장이 대개 고구려와 동일하다”고 했다. 백제의 지배층이 부여계임은 여러 곳에 기록돼 있다. 백제와 고구려는 언어가 동일한 것이었다.

그러면 신라는 어떠한가? 신라 지배층은 ‘한’계이므로 이 점이 특히 주목된다. ‘양서’ 신라조에서는 “(신라) 언어는 백제를 기다린 이후에 통했다”고 기록했다. 고중국인들은 언어가 다른 신라인과는 언어소통을 못 하고, 신라인과 언어가 동일한 백제인을 기다려서 통역을 시켜서야 소통할 수 있었다. 즉 신라와 백제는 언어가 동일해 소통되고, 고중국인만 소통되지 않은 것이었다.

그러면 ‘예’족 계열의 언어는 어떠한가? 옥저(沃沮)가 바로 ‘예’족의 국가였는데, ‘후한서’ 동옥저조에서는 “(동옥저는) 언어·음식·거처·의복은 구려(句麗)와 비슷하다”고 했다. ‘삼국지’에 동옥저전은 “그들의 언어는 구려와 크게는 같지만(大同) 때때로 작게는 다른 부분도 있었다(小異)”고 했다. 즉 ‘한’족·‘맥’족·‘예’족의 언어는 이미 고조선 시기에 고조선어로 통합돼 하나의 민족언어로서 고조선어가 형성됐고, 잔존한 부족언어들은 방언(사투리) 정도로 남은 것이었다. 그러므로 고조선 해체 후 삼한·삼국시대에 들어가서도 이미 동일한 고조선어를 공통조어로 분유했기 때문에 삼한·삼국 등 나라는 나뉘었지만 언어는 하나의 민족어를 사용하면서 의사소통에 불편이 없었던 것이다. 주시경 선생은 고조선(단군조선) 시기에 자연스럽게 조선어가 형성됐다는 견해를 일찍이 갖고 있었다.

그러면 고조선 문명권을 구성한 고조선 후국(侯國)들의 언어는 어떠했을까? ‘위서’ 실위전에서는 “실위어(室韋語·원몽골어)는 고막해(庫莫奚), 거란, 두막루(豆莫婁) 나라와 동일하다”고 했다. 또한 ‘위서’ 두막루 전에서는 “두막루는 옛 북부여(北夫餘)이다”라고 했다. 위의 두 자료를 합해보면, 북부여어(北夫餘語·즉 부여어)와 원몽골어(실위어)와 고막해어 그리고 거란어가 동일했음을 알 수 있다.
 


박은식 선생은 선비(鮮卑)는 북부여의 별종이라고 했다. 따라서 ‘부여어’와 ‘선비어’는 동일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통전’(通典)은 “고막해는 그 선조가 동부선비(東部鮮卑)의 별종이다”라고 했다. ‘북사’(北史) 해전(奚傳)에서는 “해(奚)는 본래 고막해로 그 선조는 동부호(東部胡)로서 우문(宇文)의 별종이다”라고 했는데, 우문씨는 동부선비의 지배씨족의 하나였다. 고조선 후국들인 실위(원몽골)·선비·고막해의 언어는 부여어와 동일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오환(烏桓)은 선비와 고막해와 함께 동호(東胡)를 구성했던 3대 맥족계열 고조선 후국들이었으므로, 오환어(烏桓語)가 선비어·고막해어와 동일했을 것임은 충분히 알 수 있다. 정령(丁零, 원돌궐, 철륵·鐵勒, 고거·高車)과 유연(柔然)은 스스로를 고조선계(古朝鮮系)·단군계(檀君系)라고 주장했으므로, 그들이 고조선어를 분유(分有)했을 것임은 물론이다.

일본은 고조선 후국은 아니었으나 고조선 국가 해체 전후 고조선 계열 사람들이 규슈(九州) 등 일본열도에 건너가 정착해서 고조선어를 공통조어로 한 언어를 사용하면서 최초의 일본 고대국가를 수립해 운영했기 때문에, 언어의 구조와 형태에서 일본어는 선주민 어휘를 흡수하면서 고조선조어의 한 갈래 흐름으로 형성됐고, 한국어와 함께 우랄·알타이어족의 하나로 형성된 것이다.

고조선 연방국가가 BC 108년에 해체되자, BC 2세기부터 기원후 1세기에 고조선 후국들의 민족이동에 의한 동아시아에서의 ‘민족대이동’이 일어나게 됐다. 고조선 연방제국의 후국들 가운데서 서변후국이었던 유목기마민족인 훈(Huns·산융), 불가르(Bulgar·불령지, 불도하), 아발(Avar·유연), 마자르(Magyar), 튀르크(Turks·정령, 돌궐), 위구르(uyghurs)족 등은 서방으로 ‘말’을 타고 마차를 끌며 ‘민족대이동’을 감행해 카프카스 지방 등 중앙아시아에 정착했다. 이 고조선 문명권의 서변 유목기마민족의 중앙아시아로의 민족이동과 정착 활동으로 중앙아시아의 대부분이 고조선어를 공통조어로 한 우랄·알타이어족이 된 것이다.

수세기 후에 훈족, 불가르족, 아발족, 마자르족, 위구르족, 튀르크족 일부는 다시 서방이동을 감행해 발칸반도, 중부유럽, 북유럽으로 민족대이동을 계속했다. 그들이 정착을 원한 곳은 이미 선주민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사이 온갖 갈등과 전쟁과 타협의 역사가 있었다. 그들이 민족이동을 감행해 정착한 곳에서 선주민들의 어휘들을 대폭 채용, 융합시켰다 할지라도, 그들의 언어 구조(문법)가 ‘고조선 언어’였다면 고조선 언어를 조어와 문법으로 한 우랄·알타이어족이 형성되게 되는 것이다.

발칸반도의 불가리아와 헝가리, 중·북부 유럽의 바스크, 에스토니아, 핀란드, 갈레리아, 러시아의 수많은 타타르 공화국 언어가 우랄·알타이어족에 속하게 된 연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오늘날 유럽과 중앙아시아에서 우랄·알타이어족의 분포는 BC 2세기경부터 시작된 ‘고조선어’를 사용하는 민족들의 ‘세계사적 민족대이동’의 최후의 정착결과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고조선 문명에 속했던 다수 민족의 이러한 거대한 ‘민족대이동’을 가능하게 한 동력은 그들이 ‘말’(馬)을 사용하는 ‘기마민족’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고조선어 사용 후국 민족들의 민족대이동의 경로를 세계언어지도에 그려보면 <그림>과 같다.

‘민족대이동’의 경로에서도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서유럽까지 들어갔던 고조선 어족 사용 기마민족들은 인도·유럽어 사용 선주민들과 타협해 지금은 헝가리와 불가리아(제1제국)를 제외하고는 북방으로 밀려 핀란드, 에스토니아, 갈레리아 지방에 집약, 정착했다. 또 아발족 일부는 피레네 산맥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저항세력이 약했던 광대한 시베리아 일대는 대부분 우랄·알타이어족권이 됐다. 오늘날 언어학자들은 우랄·알타이어족의 개념을 세분해 우랄어족과 알타이어족과 추크치·캄차카어족으로 분류하고 있음을 본다. 또 언어학자에 따라서는 한국어, 일본어, 핀란드, 헝가리어, 튀르크어를 각각 독립한 언어유형으로 분류하고자 하는 경향도 있다. 21세기 현재의 극도로 분화 변용된 언어생활만 횡적으로 보면 이러한 주장에도 근거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역사적으로 기원을 찾아보면, 19세기 말까지는 위의 언어들이 모두 ‘우랄·알타이어족’으로 개념화하는 것이 정확했으며, 더 소급해 ‘우랄·알타이어족’의 기원을 더 찾아보면 그것이 바로 고조선 문명의 ‘고조선어’임을 알 수 있다. ‘우랄·알타이어족’의 기원은 고조선 문명의 ‘고조선어’이고, 이것이 현대의 우랄어족, 알타이어족, 추크치·캄차카어족의 ‘공통조어’인 것이다. (문화일보 1월 29일자 16면 12 회 참조) 서울대 명예교수

■ 용어설명

조어(祖語) : 하나의 언어가 장기간에 걸쳐 둘 이상의 다른 언어로 분화됐을 때 그 근원이 되는 언어를 이르는 말이다. 유라시아 대륙의 극동인 고(古)한반도와 만주·연해주 일대에서 발전한 고조선 문명의 ‘고조선 조어’가 기원전 2세기쯤 연방국가의 해체를 기점으로 서방으로, 동남방으로, 북방으로 민족대이동을 감행, 정착해서 ‘우랄·알타이어족’이 형성되고 그 후에 분화되고 있는 것이다.




[문화] 지식카페 문화일보 : 2020년 01월 29일(水)
고대제국 기본틀이었던 신분제… 고조선도 ‘4개 세습계급’ 사회였다


■ 신용하의 인류 5대 ‘古朝鮮문명’ - (12) 고조선의 사회신분

- 한민족 문명학
‘왕족-귀족-평민-노비’로 이루어져… 거울·칼·옥 유물들은 ‘천부인’ 왕족의 상징
관료·장군 역할 귀족 ‘수레’ 소유하기도… 생산담당 평민은 부의 정도에 따라 다시 3개층으로 구분


인류에게 구석기시대는 사회학적으로 서열(rank)만 있었지 신분(estate)과 계급(class)은 없었다. 구석기인 무리는 능력이 뛰어난 사람을 우두머리(Head, Chief)로 뽑아 그의 향도에 따라 사냥과 식료 채집을 하러 유랑하면서 겨우 생존을 유지했고, 무리의 나머지는 모두 평등했다.

그러나 신석기시대에 농경사회가 시작되고 잉여생산물이 발생하여 축적되기 시작하자, 이를 분배하는 과정에서 우두머리를 비롯하여 그의 측근들이 서열의 상위를 기득권화하고 잉여생산물 분배에서 특권을 세습적으로 설정하고자 하여 ‘신분’이 발생했으며, 신석기 말기에는 제도로서의 사회신분제도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우두머리(chief)는 자기의 지위를 자기 자손에게 세습시키는 군장사회(chiefdom, 君長社會)를 형성해 나갔으며, 측근에게 특권을 나누어 주어 세습 ‘귀족’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군장사회가 고대국가·고대사회 형성으로 진전됨과 동시에 사회신분도 완전히 제도화되었다. ‘신분’과 ‘계급’의 가장 큰 차이는 신분은 대대로 ‘세습’되는데 비하여, ‘계급’은 세습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신분은 세습되는 계급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인류의 모든 고대사회는 신분제 사회였다. 신분제 사회에서는 ‘능력’이 아니라 출생 ‘신분’이 지위와 직책의 범위를 결정했다. 인류사회의 신분제도가 폐지된 것은 18∼19세기 때였다. 영국은 아직도 신분제를 농노제 폐지 이외는 유지하고 있다. 인류는 약 4000∼5000년간 신분제도 속에서 생활한 것이다.

고조선이 약 5000년 전 동아시아 최초의 고대국가로 건국되고 고대연방제국으로 발전됨에 따라 고조선 문명권의 세습적 사회신분제도가 발전되었다. 고조선은 한국역사 최초의 신분제 사회였다. 고조선문명권의 사회신분제도는 기본적으로 4개 큰 신분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①왕족(제왕 및 후국소왕의 왕족) ②귀족 ③평민 ④노비의 4신분이 그것이다.

고조선 제왕의 지위와 역할은 국가 최고통치자의 지위를 갖고, 통치에 필요한 모든 자원을 사용처분할 특권을 가지면서, 국가와 국민을 외부의 적으로부터 보호하고 국민의 생존을 유지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고조선 왕족은 혈연적 씨족공동체를 형성하여 여러 가지 신분적 특권을 누리면서 제왕의 통치를 엄호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삼국유사’ 고기에는 환웅이 환인(하느님)으로부터 지상으로 내려가 사람을 통치하라는 천명의 증거로서 ‘천부인’(天符印·하느님이 만들어 주신 증명) 3개의 통치권 증거물 관련 기록이 있다. 출토되는 고고유물에서 보면 천부인 3개는 ①거울 ②칼 ③옥이었다. 이 세 가지 보물이 한 벌로 발굴되면 왕족무덤인 것을 알 수 있다. 고조선의 왕족 표징의 하나인 ‘청동거울’은 왕족 자신들이 하느님(환인·桓因, 천신·天神)의 아들과 자손이라고 생각하고 그 증거로 사용했다. 고조선의 청동거울(다뉴조문경과 다뉴세문경)이 다른 문명과는 달리 언제나 둥근 형태인 것은 ‘하늘’(천원·天圓)과 ‘해’(태양)를 상징한 것이었다고 해석된다. 둥근 청동거울의 뒷면에는 ‘햇빛살’ 무늬를 도안하고, 왕족, 무장(武將)인 경우에는 ‘번개’ 무늬를 도안했다.

고조선 왕족 표징의 하나인 ‘청동검’은 부계인 ‘한’족과 적대세력을 제압하는 ‘힘’을 상징한 것으로 해석된다. 고조선 왕족 표징의 하나인 ‘옥’은 모계인 ‘맥’족과 부드러운(곡선적) 선정(善政)의 문화를 상징한 것으로 해석된다.

고조선문명권의 청동기시대 고고유적·무덤들 가운데 부장품으로 ①청동거울 ②청동칼 ③곡옥(또는 환옥)이 한 벌(한 세트)로 출토되는 무덤들이 가끔 있다. 이것은 일단 고조선의 단군계 왕족의 무덤이라고 볼 수 있다. 고대연방국가는 변방에 왕족 무장을 파견하여 주둔시킨 경우가 많았다. 예컨대 중국 요령성 심양 정가와자 6512호 목곽무덤은 이러한 무덤으로 추정된다. 이 무덤에서는 42종 797점에 달하는 부장품 가운데서 ①청동거울(다뉴세문경) 1개 ②비파형동검 3개 ③옥 목걸이 1개가 한 벌로 나와서, 이 무덤 주인공이 고조선 단군계 왕족 출신 무장임을 알려주고 있다. 이 무덤의 주인공은 4필의 말이 끄는 수레를 탔으며, 수레를 화려하게 치장했다. 이것은 말머리에 새 깃털을 화려하게 꽂아 붙이는 나팔형 청동기가 4개이고, 모든 마구가 4벌씩인 데서 알 수 있다. 화려한 수레와 치장은 일종의 신분재(身分財)였다.

고조선 후국의 군장·족장들 가운데 단군왕검의 직계혈통 후손이 아닐지라도, 고조선 왕족의 성씨를 하사받은 ‘단’(檀), ‘한’(韓), ‘한·간’(汗), ‘해’(解), ‘아사나’(阿史那) 등 성씨의 다음 후국군장들은 일단 고조선문명권의 일종의 ‘왕족’이라고 볼 수 있다.

①부여의 왕족 -‘해’(解) 씨 ②선비의 왕족 -‘단’(檀) 씨 ③유연의 왕족 -‘대단’(大檀) 씨 ④산융(원흉노) 왕족-‘단’(檀) 씨 ⑤철륵(정령, 원돌궐) 왕족-‘아사나’(阿史那) 씨

대동강 유역에는 고조선 왕족의 무덤들이 다수 있는데, 문헌이 없어서 어느 왕족의 것인지 판별할 수 없다. 이 가운데 1958년 건축공사 중 우연히 발견된 무덤의 출토 유물 중에 ‘부조예군(夫租예君)’이라는 인장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부조예군묘’라고 통칭하는 무덤이 발굴되었다. 이 무덤의 출토품을 통하여 고조선 말기(BC 2세기) 고조선 후국인 예족 군주 말단 왕족의 생활실상의 극히 일부를 들여다볼 수 있다.

‘부조예군묘’의 부장품으로는 먼저 무기류로 ①고조선식 세형동검 1개(조립식 세형동검으로 손잡이를 제외한 검 몸체의 길이 39.6㎝·그림 1)를 비롯하여 ②다수의 청동제 마구류 ③청동제 수레부속품 ④무기류 등이 출토되었다.

고조선 후국의 몰락왕족도 화려한 무장을 하고, ‘기마’를 했을 뿐 아니라, ‘수레’도 애용하였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었음을 알 수 있다.

고조선 후기와 말기·민족이동기에는 후국민족의 족장 또는 군장들이 ‘가’(加, Ka, Ga)의 명칭에 머물지 않고 ‘한’(Han, 제왕·왕)을 칭하여 ‘가한’(가+한) ‘칸’ ‘간’(Kahan, Gahan, Khan, Gan)이라고 호칭한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후국민족 ‘칸’ ‘간’들도 신분이 왕족으로 상승된 경우라고 해석해야 할 것이다. 세계사에서 왕 또는 제왕을 ‘칸’(Khan), ‘간’(Gan), ‘한’(Han), ‘가한’(Gahan)이라고 호칭한 왕족의 부계는 모두 고조선 후예계통이라고 볼 수 있다. 유럽중세사를 읽으면, 군주국들 가운데, ‘칸 군국(君國)’(‘Khanate’)이라는 군주국들이 10여 개 나오는데, 이들은 고조선 연방제국 해체 후 기마부대를 이끌고 서방이동한 고조선 문명 후예들이 유럽에 세운 중세국가들이다. 오직 고조선문명에서만 왕을 ‘한’ 또는 ‘칸’으로 호칭했기 때문이다.

고조선의 사회신분제도에는 왕족의 바로 아래 ‘귀족’ 신분이 형성되어 있었다. 특권적 행정관료 또는 부하 무장(武將)이 되어 위로는 제왕의 통치를 보좌하면서 아래로는 평민지배를 담당하고, 전쟁이 일어나면 군사의 장군·장교 또는 지휘관의 일부가 되어 국방을 담당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고조선 사회의 귀족신분은 ①관료귀족과 무장 ②일반귀족 ③천군(천군·天君, 산군·神官)의 세 집단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고조선에서는 최고위 관료귀족을 ‘가’라고 불렀다. 한자 발음표기에는 加, 伽, 可, 柯 등의 여러 가지 한문글자로 ‘가’ 발음이 표기되었다. 후국 부여에서는 관직명으로 ‘가’를 붙여서 ‘마가’(馬加)·‘우가’(牛加)·‘저가’(저加)·‘구가’(狗加) 등과 같이 ‘가’(加)가 장관직 명칭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고조선의 도읍 아사달 주변과 후국들의 수도 국읍들의 주변에는 ‘소도’(蘇塗)라는 별읍(別邑)을 설치하고, 여기에 ‘단군신’(檀君神, 天神, 단굴, Dangun, Dangur)의 제사를 담당하는 제사장인 ‘천군’(天君)이라는 호칭의 ‘신관’(神官)을 두었다. 이 소도별읍의 ‘천군’은 특수한 귀족신분의 하나였다.

권세 있고 부유한 귀족(大加)은 ‘수레’를 소유했으며, 거의 모든 귀족이 ‘말’을 기마용으로 소유했다. 고조선의 요서지역 영성현 남산근 102호 귀족무덤에서 출토된 뼈에 두 마리의 말이 끄는 수레의 그림(그림 3)이 새겨져 있어서 ‘고조선식 수레’를 복원할 수 있게 되었다.

귀족신분의 특징은 생산노동에는 종사하지 않고 정치·행정·군사(장교)에만 참가하여 활동하는 데 있었다. 부여의 경우와 같이 전쟁이 일어나면 고조선의 귀족 남자는 모두 군인으로서 전쟁에 참가했다. 고조선사회 인구의 절대다수를 점했던 기본신분은 평민이다. 평민신분의 지위와 역할은 제왕과 귀족신분의 지배 아래에서도 일종의 ‘자유민’으로서 고조선사회를 지탱하는 모든 ‘생산활동’ 담당 역할을 수행한 것이었다. 평민신분의 생산활동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농경과 목축이었고, 다음 보조적인 것이 수공업과 상업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평민신분은 조세, 군역, 부역의 의무도 담당했다. 마을에 남아 있는 공유지경작, 수로시설, 고인돌축조, 대건축·제단·성곽 등의 토목공사들도 두레를 편성하여 주로 평민신분이 담당했다.

평민은 ‘소가족제도’의 독립가족 생활을 했다. 고조선 시대의 집자리 발굴 결과를 보면, 한 집자리는 평균 약 5명이 거주할 수 있는 공간이어서 고조선의 가족제도는 평민의 경우 ‘소가족제도’였다고 볼 수 있다. 고조선사회의 평민은 3개 층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①호민(豪民) ②소민 ③하호가 그것이다. ‘호민’은 부유한 평민을 가리킨 것이다. 소민(小民)은 평민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자유민이었으며, 농업 종사의 경우 자영농민(그림 2)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고조선시대에는 인구에 비해 개간가능한 미간지가 많았으므로 소민(小民)은 가족노동력을 활용하여 미간지를 ‘개간’해서 경작하여 농민적 토지소유를 정립하고 얼마든지 ‘자영농민’이 될 수 있었으리라고 추정된다.

고조선 사회의 ‘소민’은 인구 구성에서 절대다수를 점했으며, 신분은 ‘자유민’이었으나, ①조세납부와 ②병역의무와 때로는 ③부역의 의무가 있었다. 조세는 생산물의 20분의 1인 이십취일세(二十取一稅)가 기준이었다. 고중국 맹자는 이 세율이 가볍다하여 ‘맥도’(貊道)라고 호칭했다.

‘삼국지’ 위서 부여전에서 (소민이) “활·화살·칼·창을 병기로 사용하며, 집집마다 자체적으로 갑옷과 무기를 보유했다”고 서술한 것은 ‘소민’이 전쟁시기에는 모두 스스로 무장한 ‘병사’가 되는 ‘전민개병(佃民皆兵)’ 신분이었음을 쓴 것이다. ‘소민’은 스스로 무장할 수 있었다는 면에서 명백히 ‘자유민’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하호’는 평민 신분층 가운데서 최하위층에 있던 가난한 평민을 가리킨다. 그들은 사회신분은 평민이고 자유민이었으나, 경제적으로 영락하여 노비신분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는 빈곤한 평민이었다.

고조선사회에서는 ‘천민신분’으로서 ‘노비’신분이 형성되어 있었다. 고조선 노비신분의 사회적 지위는 주인(노비주)의 재산으로 규정되어 자유와 권리가 전혀 없는 예속된 천민으로서, 우마처럼 사역당하고 매매되는 최하층 신분이었다. 고조선 노비신분의 역할은 주인의 지시에 따라서 ①가사노동을 주로하고 ②생산노동 ③기타 온갖 잡역 노동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고조선의 ‘범금8조’의 한 조항에, “도둑질한 남자는 가노(家奴)로 삼고, 여자는 비(婢)로 삼는다. 단 재물로 죄를 면하여 속량하고자 할 때에는 1인당 50만을 배상하도록 한다”는 조항은 고조선사회에 ‘노비제도’가 실재했었고, 노비는 우마처럼 매매되었으며, 속량가격은 약 50만이었음을 잘 알려주고 있다. 고조선사회 전체의 신분 구성에서 수적으로 대부분을 점유하면서 생산을 담당한 것은 ‘평민’이었고, 왕족과 귀족이 그들을 지배하면서 4신분이 함께 고조선 문명을 만들어 나갔다고 볼 수 있다.

(문화일보 12월 31일자 16면 11 회 참조) 서울대 명예교수


■ 용어설명

부조예군(夫租예君) : 대동강 유역에서 1958년 건축공사 중 발견된 고조선 왕족의 무덤. 출토 유물 중에 ‘부조예군’이라는 인장이 포함돼 있어 ‘부조예군묘’라고 통칭한다. 이 무덤의 출토품을 통해 고조선 말기(BC 2세기) 고조선 후국인 예족 군주 말단 왕족의 생활상 일부를 들여다볼 수 있다. 고조선식 세형동검, 다수의 청동제 마구류와 수레부속품, 무기류 등이 출토됐다.







[문화] 지식카페 문화일보 : 2019년 12월 31일(火)
고조선과 古중국 경계선 이어서 쌓은 것이 만리장성이었다
▲  만리장성은 연의 진개에 의해 고조선 후국 고죽국이 멸망한 직후 고중국 측(연·진)이 축성한 고조선과 고중국의 국경선이었다고 할 수 있다. 오른쪽 작은 지도는 중국사회과학원이 그린 지도.


■ 신용하의 인류 5대 ‘古朝鮮문명’ - ⑪ BC8세기 조중전쟁과 국경선

- 한민족 문명학 
고조선, BC 10세기 燕·晉과 국경 맞대고 교류·갈등…BC 8세기엔 古중국군 격파뒤 산동반도까지 세력 확장  
古중국, 고조선 기병 막으려 요수 동쪽서부터 축성…‘압록강 단동이 만리장성 시원’동북공정 주장은 허위
 
 

오늘날 국경선의 영향 때문에, 과연 고조선의 영역이 지금의 중국 베이징(北京) 부근에까지 이르렀는지 의문시하는 한국인과 중국인이 다수 있다. 그러나 중국 역사에서 말하면 하(夏)나라(BC 2070∼BC 1600)와 상(商)나라(BC 1600∼BC 1046)까지는 지금의 베이징 부근을 관통해 톈진(天津)에 이르는 큰 강인 영정하(永定河)가 고중국(夏, 商)과 고조선의 국경선이었다. 이 사실은 중국 고문헌 및 출토유물들과 함께 유명한 ‘만리장성(萬里長城)’이 이를 잘 증명해준다. 

지금 만리장성의 남과 북에서 출토되는, 고고학에서 말하는 ‘하가점상층문화’(夏家店上層文化)가 BC 14세기∼BC 7세기경의 고조선문명 서변문화유적이다. 대체로 노노아호산(努魯兒虎山) 이서로부터 영정하·간하(干河) 양안까지가 동일한 하가점상층문화권이라고 볼 수 있다. 매우 선진한 청동기 문화가 특징이고, 출토품목의 대종은 기마문화와 기마부대의 청동무기·마구·의기가 중심이다. 비파형동검도 대부분 조립식이 아니라 칼에 자루를 붙여 만들고 곡선도 약화시켜서 전투 실용성을 높였다. 고조선 후국별로는 고죽·불령지·불도하·산융(원흉노) 등 당시 고중국족이 말한 호맥·동호·예맥조선(濊貊朝鮮)의 유물이다. 

상(商)은 고죽국(孤竹國)과 마찬가지로 고조선 사람들이 건국한 나라였기 때문에 고조선과 매우 우호적이었고, 상호 교류가 활발했다. 상(商)시대에는 많은 고조선 사람이 영정하를 넘어 남하해서 자치 마을공동체를 만들어 평화적으로 함께 거주했다. 그러나 주(周)가 상(商)을 멸망시킨 후에는 고조선인의 남하에 대한 견제가 본격화됐다.

BC 11세기경 후반 고조선 사람들이 계속 서남쪽으로 내려오므로 주(周)는 소공석(召公奭)을 연(燕)에 봉하고, 당숙(唐叔)을 진(晉)에 봉해 이를 막게 했다. 연(燕)은 당시 황하 이남의 소국이었으며, 지금의 베이징 지구는 연(燕)의 영역이 아니라 고죽국의 영역으로서 고조선의 변경지역이었다. 고중국 주(周)나라 후국 연(燕)이 북방을 확보하려고 노력하자, 고조선의 서변 후국들은 BC 10세기경부터 주(周)의 후국 연(燕), 진(晉)과 국경을 접하게 됐고, 자연히 교류와 함께 갈등도 일어나게 됐다.

BC 8세기 말(BC 707년, 동주 환왕(東周 桓王) 13년)에 고중국 사가들이 호맥(胡貊)이라고 기록한 고조선 서변 후국이 연(燕)을 공격해 격파하고 산동반도에 있는 제(齊)를 공격한 일이 있었다. 이때 고조선 후국(산융)의 공격력은 주로 고조선 기마문화의 선진성과 우월성에 의거하고 있었다. 고조선 후국 기병부대의 민첩한 기동성이 연(燕)을 격파하고 순식간에 산동반도의 제(齊)에까지 이른 것이었다. 

이때는 고중국 측이 패전해 막대한 공물을 내고 화친을 맺어 간신히 돌려보냈다. 그로부터 43년 후인 BC 664년(동주 혜왕 13년)에 고조선 후국 산융이 또 연과 진을 공격해 들어왔다. 위급해진 연(燕)이 제(齊)에 긴급 구원을 요청했다. 연(燕)이 패망하면 전례에 비춰 제(齊)를 공격할 것이라고 판단한 고중국 패권자 제(齊)의 환공은 재상 관중(管仲)을 대동하고 고중국 제후국들의 수십만 연합군을 편성해 이번에는 북으로부터의 ‘기구’(騎寇: 기마를 한 침략군)를 격퇴하려고 출병하게 됐다. 이때 고중국 연합군의 편성을 보면 주(周)나라의 북변 후국들을 알 수 있다. 그에 대응해서 편성된 고조선의 연합군을 보면 고조선 서변 후국들을 알 수 있다.  
 

▲  비파형 동검

△고조선(후조선) = 고죽(孤竹), 불도하(弗屠何 또는 屠何), 불령지(不令支, 또는 令支), 산융(山戎, 원흉노, 일명 무종(无終), 또는 북융(北戎) 

△고중국(東周) = 제(齊), 조(曺), 허(許), 노(魯), 연(燕), 진(晉: 그 후 한(韓)·위(魏)·조(趙) 3국으로 분화) 

이때 고조선 후국들(고죽·불도하·불령지·산융)과 고중국 후국들(제·조·허·노·연·진)의 지리적 전쟁터를 찾아보면, BC 8세기∼BC 7세기의 고조선과 고중국의 국경선을 대체로 알 수 있게 된다. 전쟁터의 지명은 대부분 영정하 이남 지역들이었다. ‘관자’(管子)에는 환공의 연합군이 고조선 연합군을 물리쳤다고는 기록돼 있으나, 반년 이상 걸린 이 전쟁에서 환공이 큰 승전은 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고조선 연합군은 모두가 기병(騎兵)부대였는데 비해, 고중국 연합군은 주력이 보병(步兵)부대였기 때문이었다.  

이 전쟁에서 제(齊)나라 환공의 목표는 산융 등 ‘동북이’를 영정하 이북으로 밀어내는 것이었다. BC 664년 제(齊)나라 환공의 연합군 원정 이후의 상태를 보면, BC 4세기까지 고죽·불도하·불령지·산융의 이동은 없고 연(燕)의 이동도 없는 것으로 보아, 제(齊)나라 관중의 연합군은 산융·불도하·불령지·고죽을 멸망시키지는 못했지만, 연(燕)나라를 그 자리에 존속하도록 보호해 주고 돌아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지도)에서도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고조선 전성기의 고중국과의 경계선은 고조선 서변 후국들인 고죽, 불도하, 불령지, 산융(무종) 등이 고중국의 후국 연(燕)나라와 동으로는 영정하, 북으로는 간하를 경계로 국경을 접해서 연(燕)나라를 대체적으로 동·북·서방에서 둘러싸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제(齊)나라의 출병과 귀환 후의 고조선과 고중국의 변경 양상을 보면, BC 7세기 후반부터 BC 4세기 말까지에도 이 국경선은 변동이 없고, 고조선 후국 동호와 고죽 등이 연(燕)을 압박해 연(燕)은 존망의 위기가 계속됐다. 신채호 선생에 의하면(‘조선상고문화사’), 이때 고조선 측(동호와 고죽)이 연(燕)보다 군세가 우세하고 군제가 발달해 연(燕)을 공격했으면 고조선의 승리가 확실했다. 그러나 동호의 대신 예(禮)가 개전(開戰)을 극력 반대하고 화친을 추구하므로 그의 주장이 채택됐다. 이에 긴장과 공포 속에 있던 연(燕)은 환영해 동호에 진개(秦開)를 인질로 보내어 화친을 약속했다. 동호(고조선 후국)의 왕은 진개를 매우 신임했으므로, 진개는 수십 년간 동호의 군사시설과 군사무기, 군사기술을 관찰하고 습득하게 됐다. 

연(燕)의 진개는 수십 년간 동호를 거울같이 잘 알게 된 후 탈출해서 연(燕)에 귀환해 군사령관이 됐다. 진개는 고조선의 철기문화와 철제병기를 수입해서 무기를 고조선식으로 개혁하고, 기마부대를 편성해서 징병제를 실시해 강군으로 훈련시킨 후, BC 3세기 초엽에 동호를 기습했다. 진개는 동호의 강점과 약점을 잘 알고 탈출해 본국에 돌아가서 치밀한 전쟁 준비를 한 후에 동호를 기습한 것이므로, 결국 동호는 대패하고 연(燕)의 진개가 크게 승리해 동호의 많은 영토를 빼앗게 됐다.

진개가 승리한 후 연(燕)이 행정구역을 상곡(上谷), 어양(漁陽), 우북평(右北平), 요서(遼西), 요동(遼東)의 5군(郡)으로 편성했는데, 이때 연·진 당시에는 지금의 난하(롼허강)를 ‘요수(遼水)’라고 호칭했다. 그러므로 연(燕)이 이때 말한 요동·요서는 난하(당시의 요수)의 동쪽과 서쪽 양안을 가리킨 것이었다. 중국 고대사에서 요하, 요수는 중국의 동북 국경지대 ‘멀리 있는 강’의 호칭이어서 여러 차례 변동했다. 신채호 선생이 잘 밝힌 바와 같이 진(秦)나라 때까지는 요하가 지금의 난하였다.(‘조선상고문화사’) 그 후 고중국의 영역과 인식이 동북쪽으로 이동·확대됨에 따라 대능하(大凌河)를 요하로 불렀다가, 한(漢)나라 이후에야 지금의 요하를 요하로 호칭하기 시작했다.
 

▲  고조선의 청동투구

요컨대 연(燕)의 장수 진개의 공격 때 BC 3세기 초엽에 이르러서 요동·요서(난하의 동·서)에 걸쳐 있던 고죽국·불도하·불령지는 패퇴했으며, 고조선은 서변 1000여 리의 영토를 상실한 것이었다. 고조선은 BC 3세기에 이르러 연(燕)의 장수 진개의 공격과 뒤이은 진시황의 만리장성 수축으로 이전의 영정하·간하 계선에서 후퇴해 이 단계에서는 만리장성을 고조선과 고중국의 국경선으로 삼게 됐다. 

BC 3세기 초, 연(燕)이 고조선 후국 동호를 공격해 고조선 영토 1000리∼2000리를 빼앗은 전성기 이후, 연(燕)은 중국의 전국시대(BC 403∼BC 221) 이른바 ‘전국7웅’(戰國七雄)의 하나가 됐다. 연(燕), 제(齊), 한(韓), 위(魏), 조(趙), 초(楚), 진(秦)의 7국은 패권을 장악하려고 치열한 쟁투를 벌이게 됐다. 이 가운데서 진(秦)이 가장 강성해 한·위·조를 차례로 멸망시키고, 마침내 BC 222년에는 연(燕)도 멸망시켰다.

진의 왕 정(政)은 열국을 통일하자 BC 221년에 황제를 자칭해 ‘시황제’(始皇帝)라고 불렀다. 진시황은 통일을 성취하자마자 기존 열국의 성들을 연결해 이른바 만리장성의 수축을 시작했다. 그 가운데서 고조선과 접경한 나라가 연(燕)나라였으므로 만리장성은 연(燕)의 장성을 동북 방면의 한계로 했다. 즉 진시황의 만리장성은 연·진과 고조선의 경계선으로 된 것이었다.  

만리장성의 역사를 3기로 나누어 본 신채호 선생의 연구를 요약해 보면 그 실상을 정확히 알 수 있다. 첫째는 진시황 이전의 연(燕) 장성이다. ‘사기’에 “연(燕)이 흉노를 막으려고 장성을 조양(造陽)에서 양평(襄平)까지 쌓았고, 그 안에 상곡(上谷), 어양(漁陽), 우북평(右北平), 요서(遼西), 요동(遼東) 군(郡)을 두었다”고 했는데, 이것이 진시황 이전의 연(燕)의 장성이다. 둘째는 진시황의 장성이니, 진시황은 연(燕)의 장성을 그대로 활용한 위에 북방과 경계를 이뤘던 한·위·조(본래 진(晉)에서 분화)의 성곽을 북서변으로 연결했다. 이것이 진시황의 이른바 만리장성이다. 셋째는 진시황 이후의 장성인데, 오늘날 남아 있는 만리장성은 명(明)나라 때 서달(徐達)이 진시황의 장성을 그대로 보수해 축성한 것이다. 신채호 선생에 의하면 연(燕)의 장성이나 진시황의 장성이나 또는 명의 장성이나 모두 그 동남쪽 끝은 난하 유역의 구 영평부(永平府) 안에 있었고, 지금의 난하 하류 동쪽 갈석산(碣石山) 부근에서 끝나는 것이다. 이것을 통칭해 만리장성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연·진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만리장성은 연(燕)의 진개(秦開)에 의해 고조선 후국 고죽국이 멸망한 직후의 고중국 측(연·진)이 축성한 고조선과 고중국(연·진)의 국경선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를 중국사회과학원이 그린 지도 위에 그려보면 위의 작은 사진과 같다. 고중국(연·진)의 입장에서 보면, 만리장성은 고조선 후국들(산융·동호 등)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연(燕)과 진(秦)이 축성한 방어선이었다. 고조선의 입장에서 보면, 만리장성은 그 이전 영정하까지 남하 진출했다가 BC 3세기 초엽에 연(燕)에 기습당해 패전해 고죽국 등 1000여 리를 잃고 후퇴했다가, 진의 만리장성 수축으로 회복하지 못하게 경계선이 축성된 고조선의 서변 ‘국경선’이었다.

필자는 즉 만리장성은 고중국 측(연·진)이 축성한 BC 3세기경의 고조선과 고중국의 마지막 단계의 국경선이었다고 보고 있다. 왜 고중국(연·진)은 만리장성을 축성했으며, 왜 고조선(동호·산융)은 잃어버린 만리장성 이남의 영토를 회복하지 못했을까? 고조선의 후국 동호와 산융(원흉노) 등의 질풍노도 같은 막강한 기병(騎兵)부대가 만리장성을 넘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만리장성은 고조선 후국들 가운데 유목기마민족(遊牧騎馬民族)의 막강한 기병부대의 남하를 막기 위한 길고 높은 성벽이었다. 보병부대는 만리장성을 기어서 넘을 수 있었으나, 인간의 손이 성문을 열어주지 않는 한, 손이 없는 말은 만리장성을 넘을 수 없었다. 
 

오늘날 중국의 일부 소위 ‘동북공정’ 추진 인사들이 고조선과 고중국의 국경선 만리장성의 시원을 역사적 진실 그대로 난하(당시 호칭 요수) 동쪽 강안 갈석(碣石)에서 구하지 않고, 지금의 요령(遼寧)성 요하의 동쪽 압록강 대안 단동(丹東)에서 구하는 것은 완전히 허위다. 일부 ‘동북공정’ 인사가 단동의 고구려 성인 호산산성(虎山山城)을 중국식으로 개수해 ‘장성(長城)의 시원(始原)(만리장성의 시작)’이라고 새겨넣은 것을 답사갔다가 목격했다. 그러나 이것은 역사 왜곡 날조이며, 결코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 2300년 전 고조선과 고중국의 국경선인 난하 하류 갈석산 아래에서 시작하는 만리장성이 고조선 유민을 포함한 연·진 사람들의 가혹한 부역 노동으로 쌓아놓은 역사 유물로 달에서도 보이도록 길게 우뚝 서 있기 때문이다. (문화일보 12월 4일자 14면 10 회 참조) 서울대 명예교수


■ 용어설명 

진개(秦開) : 중국 전국시대 연(燕)나라의 장군이다. 진개는 본래 호(胡·북방 이민족)에 인질로 보내져서 그곳 사람들에게 신임을 얻었다. 이후 연나라로 돌아가 군대를 거느리고 동호(東胡)를 습격해 패주시켰다. 진개의 정확한 활동 시기는 알기 어렵다. 다만 ‘사기’ 흉노열전에서는 진개가 조 무령왕이 운중(雲中)·안문(雁門)·대(代) 등의 3군을 설치한 후에 활동했다고 쓰여 있다. 이는 대략 무령왕이 재위 26년(BC 300년)에 운중을 차지한 이후이다. 그의 손자 진무양(秦舞陽)의 활동 시기가 BC 227년인 것으로 미뤄 볼 때 대략 BC 3세기 초에 활동한 것으로 짐작된다.





▲  고조선 첫 이주민 태호족의 족장(왕) 복희와 여와의 상징 벽화.
[문화] 지식카페 문화일보 : 2019년 12월 04일(水)
고조선 이주민, 5800년전 산동반도 개척… 古중국에 선진문명 전수


■ 신용하의 인류 5대 ‘古朝鮮문명’ - ⑩ 中에 세운 고조선 분국

- 한민족 문명학 

해수면 낮아져 생긴 동쪽 해안 간척지에 정착… 東에서 온 큰 활 가진 ‘동이’족이라 불려  
결혼·화식·선진농경법 등 가르쳐… 고조선 상징 ‘아사달 문양’ 토기도 곳곳서 출토

 

▲  <그림 1> 산동반도와 중국 동해안의 지형 변화(기원전(BC) 5500~BC 1300). 황색은 후에 간척지. BC 5500년경 산동반도가 2개의 섬으로 돼 있다가 BC 1300년경 연륙이 끝나 간척지가 만들어지고, 현재(완신세·完新世)의 지형이 됐다.

중국 산동반도와 황하 및 회수 하류 유역 등 중국 동해안에는 약 5800년 전부터 2400년 전까지 고조선 이주민들과 그 후예들이 들어가 세운 다수의 자치적 소분국(小分國)들이 형성돼 고조선 문명권의 서남부 일대를 이루면서 발전하고 있었다. 신채호 선생은 이들을 고조선 ‘식민지’라고 표현했는데, 필자는 ‘分國’이라고 바꾼다. 

고조선 사람들의 이 시기 이주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지역의 환경변화를 먼저 알 필요가 있다. 중국의 장광직 교수가 1986년경부터 아날학파의 방법론을 적용해 그린 산동반도와 중국 동해안의 지형적 환경 변화를 보면, 고조선 사람들의 산동반도와 중국 동해안에의 연속적 대폭 이주 정착의 배경을 알 수 있다.  

최후의 빙기가 끝나고 지구온난화가 진행돼, 약 1만2000년 전의 지구 기후가 대략 오늘날처럼 된 후, 온난화가 최고로 진전된 약 7500년에는 해수면이 올라가서 (그림 1-1)과 같이 산동반도는 대륙에서 분리된 ‘2개의 섬’이 돼 있었다. 후에 고조선 이주민이 이주해 들어가 거주한 박(박)·상구(商邱)·개봉(開封) 지역은 바닷물에 잠겨 있는 해수면 아래의 대륙붕이었다. (그림 1-2)와 같이, 약 3300년 전에는 해수면이 다시 내려가서 산동의 2개 섬은 대륙과 연륙돼 산동반도가 됐다. 그 결과 이전 바닷물에 잠겼던 지대는 새로운 저지대 간척지가 됐다. 산동과 황하 하류 늪지대도 완전히 평원이 돼 오늘날과 같은 지형이 됐다. 중국 동해안에도 해수면이 내려가서 긴 줄의 간척지가 자연적으로 조성됐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산동반도와 황하 하류에서 회수유역 및 양자강 하류유역에 이르는 중국 동해안의 새로 조성된 직선 띠는 새로운 해안 ‘간척지’로서 토착인의 연고 점유권과 소유권이 없는 주인 없는 개척 가능한 새 땅이었다는 사실이다(그림 1-3 참조). 

필자는 상대적 과잉인구에 시달리던 고(古)한반도 ‘밝’족과 ‘한’족, 그리고 한발을 만나 남하하던 ‘맥’족 일부와 고조선 건국 후 고조선 이주민들은 이 주인 없는 산동반도와 중국 동해안의 주인 없는 새 간척지를 농토로 개척하면서 고조선 이주민의 자치적 ‘마을공동체들’을 형성했고, 이들이 결합해 고조선 이주민의 자치적 소분국들을 형성했다고 본다.

산동반도 및 중국 동해안의 간척지 분포와 고조선 이주민의 정착지 및 분국의 분포는 거의 완전히 일치하고 있다. 그들은 이주할 때 ‘큰 활’을 갖고 들어왔으며, 토착인들은 이 특징을 보고 후에 고조선 이주민들은 ‘동이’(東夷: 동쪽에서 온 큰 활을 가진 사람들)족이라고 표현하게 된 것이라고 해석된다. 고조선 계통 이주민 중에서 가장 먼저 이 지역에 이주해 들어온 씨족은 고조선의 ‘태호’(太호)족이었다. 이들은 古한반도의 ‘밝’족의 한 씨족이었다.  

‘태평어람’(太平御覽)과 ‘예기정의’(禮記正義)에 인용된 ‘제왕세기’(帝王世紀)에서는 ‘태호’는 동방(東方)의 ‘진’(震)에서 나왔고 밝은 태양을 상징으로 삼기 때문에 태호(太호)라 한다고 기록했다. 호(호)자는 좌변과 상단에 ‘白’(‘밝’의 뜻)자를 2개나 쓰고 하단에 ‘本’자를 붙여 그들이 ‘본래 밝족’임을 표시했다. 太(태)자는 맨 처음의 뜻이다. 중국 고문헌은 태호족을 ‘복희’(伏羲)씨 또는 ‘포희’(포犧)씨라고도 기록했는데, ‘伏’ ‘포’는 모두 ‘밝’의 한자 차음표기라고 필자는 해석한다. 또한 여기서 震(진)은 방향과 지역을 모두 가리키는데, 중국 고문헌이 쓰인 시기의 관용대로 古한반도 진국(震國, 辰國) 지역을 가리킨 것이다. 

중국학자들은 태호족이 동이족의 선두로서 중국에 들어온 시기를 5800년 전~4800년 전으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고조선 건국 무렵에 고(古)한반도에서 밝족(고한반도 초기 신석기인 유형)의 한 씨족이 선진 농경문화를 갖고 산동반도 지역에 이주해 들어간 것으로 볼 수 있다. 태호족은 농경에 적합한 진(陳·지금의 하남성 회양현) 지역에 정착해 농경생활에 들어갔다. 

고조선 건국과 고조선 문명 형성기에 이주한 태호족은 선진 고조선 문명을 고중국에 전수해 줬다. 필자의 설명보다 근대 중국 석학 부사년(傅斯年)의 ‘이하동서설’(夷夏東西說)에서 지적한 태호족이 당시 고중국에 전수한 다음의 선진문명 항목을 들면 더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여기에는 태호족이 △결혼(가취·嫁娶)제도 △화식(火食) 방법 △태호족 신농(神農)씨는 보습과 가래를 만들고 농경(農耕)을 가르침 △태호족 포희씨는 새끼의 매듭에 의한 의사소통법(결승·結繩)과 그물 짜는 법을 만들어 가르침 △포희씨는 비파(거문고의 일종) 36줄을 만듦 △포희씨는 역(易)의 8괘(卦)를 만들어 만물의 이치를 알게 했고, 신농(神農)이 이를 제곱해 64괘(卦)를 만듦 등이 기록돼 있다.
 

▲  <그림 3> 고조선 두 번째 이주민 소호족의 산동반도에서 출토된 ‘아사달’ 문양의 토기. <그림 5> 양저문화 유적 출토 옥기에 새겨진 ‘아사달’ 문양과 소호족 상징인 ‘새’.

신농씨는 고대부터 중국인들이 염제(炎帝), 적제(赤帝) 등으로 높여 부르면서 사마천이 ‘사기’(史記) 삼황본기(三皇本紀)에서 3황의 하나로 넣었던 씨족이었다. 사마천은 신농씨가 “나무를 쪼개어 보습을 만들고 나무를 휘어서 보습자루를 만들어, 보습과 가래의 사용법을 만민에게 보여서 비로소 농경을 가르쳤다. 그래서 신농씨라 했다”고 기록했다. 즉 고대 중국에 농경을 전파한 부족을 고대 중국에서는 고조선(동이족) 신농씨로 보아온 것이다. 선진 농경뿐만 아니라 악기 ‘비파’와 주역 8괘, 그리고 현재도 중국인들이 토템으로 사용하는 ‘용’(龍)도 고조선의 ‘태호’족이 중국에 가져가 전파한 태호족의 토템이었다. 즉 태호족이 이주할 때 갖고 간 선진 고조선 문명의 전수가 고중국 문명의 기원의 하나가 된 것이었다.  

태호족에 뒤이어 약 5000년 전~4000년 전에 산동반도의 간척지에 이주해 들어간 고조선 이주민은 ‘소호’(少호, 少昊)족이었다. 그들도 선진 농업경작과 태양숭배와 새 토템을 갖고 들어가서 산동반도의 곡부(曲阜)지방에 정착했다.

소호족의 산동반도 대문구(大文口)문화 유적 상층에서는 약 5000년 전~4400년 전의 고조선족임을 밝혀 ‘아사달 문양’을 새긴 고조선식 뾰족밑 팽이형 토기 술잔이 11개(파손품 포함)나 출토됐다.  

태호족과 소호족의 이주 이후 연달아 고조선 이주민들이 산동 반도와 중국 동해안에 정착해 간척지를 새 농토로 개척하면서 고조선에서 간직해 온 농경생활을 시작했다. 그들은 정착지에 자치적 마을공동체를 만들었다가, 마을공동체들이 연합해 자치적 소분국들을 형성하고, 고조선어를 사용하면서 고조선 문화를 갖고 생활했다.

그 결과 산동반도와 중국 동해안의 이전 간척지대는 양자강 하류 남안까지 이주해 들어온 고조선 사람들과 그 후예들의 크고 작은 ‘분국들’의 생활 터전이 됐고 고조선 문명권의 일부가 됐다. 중국인들이 후에 관내의 동이(東夷)라고 부른 진(秦)나라 이전의 선진동이(先秦東夷)는 바로 고조선 이주민들이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산동(山東), 산서(山西), 하북(河北) 발해안, 하남(河南)성 동부, 강소(江蘇)성 북부, 안휘(安徽)성 동북각 지방의 이른바 동이족은 조선족(朝鮮族)이라고 보았으며, 기원전(BC) 1000~BC 600년경까지 고조선족이 매우 강성했음을 지적했다. 신채호 선생은 ‘조선상고문화사’에서 독립된 장으로, 서국을 고조선 이주민의 식민부락 가운데 하나인 소국으로 출발해 한 시기 주(周)와 어깨를 나란히 겨루면서 주나라에 매우 관대했던 고조선 식민지 국가였다가, 주의 선왕(宣王)의 공격을 받고 패망했다고 설명했다. 

산동반도와 중국 동해안 지역 동이족의 기원이 고조선 이주민인가의 끊임없는 질문에 대해, 청동기 유물도 있지만, 여기서는 고조선 이주민들의 무덤인 ‘고인돌’로 증명해 보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운반불능인 고인돌 무덤이 이주민의 사실을 명료히 증명해주기 때문이다. 

산동성 등주(登州)의 치박(淄博)에는 1930년대까지 대형 개석식 고인돌과 탁자식 고인돌이 남아 있었다. 산동반도와 회수 유역의 ‘동이’지역에는 이 밖에도 다수의 고인돌 무덤이 있었는데, 지금은 유적으로 보존돼 있는 것이 별로 없다.
 

▲  중국 산동성 치박(淄博)에 남아 있는 탁자식 고인돌 사진.(캐나다 고고학자 하가 시메이즈, 1936년 촬영)

그러나 고조선식 고인돌의 중국 호칭인 석붕(石棚) 이름을 가진 지명은 아직도 다수 남아 있어서 고조선 이주민 공동체 분국들과 고인돌 무덤이 존재했던 사실을 증명해 주고 있다. 

필자는 동이족의 하나인 우족(우族)이 고조선으로부터 청동기를 처음으로 고중국 지역에 가져와 전파했음을 이미 밝힌 바 있다. 양자강 하류 북안에 중국 고고학자들이 양저문화(良渚文化) 유적이라고 호칭하는 고대 유적이 있는데, 그 상층유적(BC 2300년경)은 ‘동이문화’ 유적이라고 해석되고 있다. 양저문화 상층유적 출토 옥기들 가운데 고조선의 상징인 ‘아사달’ 문양과 그 문양 위에 고조선 이주민 ‘소호’족의 상징인 ‘새’를 새긴 (그림 5)와 같은 옥기가 출토됐다. 

또한 양자강 하류 절강성 일대에는 고조선 이주민 무덤인 고조선식 고인돌이 지금도 50여 기가 남아 있다. 이들 고인돌의 축성 연대는 청동기 시대인 BC 11세기~BC 400년경(중국 편년 상말 주초~춘추 말기)으로 편년되고 있다. 이것은 고조선 시대에 해당한다. 주목할 것은 중국 양자강 하류 남안의 고인돌들의 형태 및 축성 구조가 고조선·진국 지역(전라남도 지역) 고인돌들의 형태 및 축성 구조와 거의 동일하다는 사실이다.
 

산동반도 등에 이주한 고조선 사람들은 회수 유역부터 산동반도 이북 해안 지역에 걸쳐서 자치적 소분국을 세워 활동했다. 그들은 고조선 중앙정부의 통치를 받지 않았고, 또한 물론 고중국 계열 어느 소왕국의 통치도 받지 않았다. 그들은 이주할 때 가지고 간 고조선 문화 양식을 변용·발전시키면서 자치생활을 했다. 중국인 학자 장광직(張光直) 교수가 상(商)시대 중국에 대한 정밀한 연구 끝에 동이족의 분포 지역을 지도로 그린 것이 있는데, 동이족의 영역을 객관적으로 알아볼 수 있다.
 

산동반도와 중국 동해안의 고조선 이주민 분국들은 진시황이 BC 221년경 북으로는 만리장성을 수축해 고조선 기마부대와 고조선 이주민의 월경을 차단하고, 동으로는 ‘동이족’을 고중국인들과 섞여 살도록 강제이주 정책을 실시해 급속히 해체돼갔다. 그러나 고조선 이주민이 갖고 들어간 선진 고조선 문명이 그 후 고중국 문명의 기원과 형성에 끼친 영향과 도움은 실로 막대했다. 중국 상(商)나라도 고조선 이주민이 세운 나라였으며, 고중국 문명의 중핵인 상(商)문명도 바로 선행 고조선 문명을 고중국 지역에서 계승한 문명이었다. (문화일보 11월 6일자 15면 9 회 참조) 서울대 명예교수


■ 용어설명 

신농(神農)씨 : 신농씨는 고대부터 중국인들이 염제(炎帝), 적제(赤帝) 등으로 높여 부르면서 사마천이 ‘사기’ 삼황본기(三皇本紀)에서 3황의 하나로 넣었던 씨족이었다. 고대 중국에 농경을 전파한 부족을 중국인들은 고조선(동이족) 신농씨로 보아 기렸다.

[문화] 지식카페 문화일보 : 2019년 11월 06일(水)

고조선의 중국식 표기 ‘고죽’ … 中 청동 술단지에 또렷이 새겨져 있었다

▲  1973년 중국 요령성 객좌현 북동촌 매장지에서 발굴된 청동기의 일부. 상(商)나라의 은허(殷墟) 청동기보다 더욱 앞선 청동 제기들 중 하나에 ‘父丁孤竹亞微(부정고국아미)’라는 명문이 있어서 고죽국(孤竹國)의 청동기라는 사실이 증명됐다.(큰 사진) 상나라 시대 고죽국이 있던 위치.(중국 사회과학원 지도를 바탕으로 국경은 당(唐) 시대 자료에 의거해 필자가 추가·작은 그림)


■ 신용하의 인류 5대 ‘古朝鮮문명’ - ⑨ 새로 찾은 고조선 연방 고죽국

BC 21세기 건국해 조양~천진 이르던 고조선의 후국 … 공자도 도덕·예의 있는 ‘군자국’ 칭송 
‘아사달’문양 청동화폐로 상업·무역 발달 … BC 3세기초 燕의 장수 진개 침공 받고 멸망
 
 

1973년에 중국 요령성 객좌현 고산(孤山) 북동촌(北洞村) 산기술 제1호 매장지 구덩이에서 상(商)나라 후기 수도 은허(殷墟)에서 발굴된 청동기보다 시기도 앞서고 더욱 선진한 청동예기 6점이 발굴됐다. 그중에 청동·술단지 제기 하나에 ‘父丁孤竹亞微(부정고국아미)’라는 명문이 있어서 이 청동기들이 고죽국(孤竹國)의 청동기라는 사실이 증명됐다. 이어서 부근의 제2호 매장지에서 또 6점의 청동기가 출토됐다.

고죽국 청동기가 12점이나 발견되자, 중국 학계에서는 고죽국을 상(商)의 제후국으로 만들려는 시도가 일어났다. 이웃인 하북성(河北省) 당산(唐山)시 대성산(大城山) 유적에서 구멍 뚫린 자연동(紅銅·홍동) 장식물 2점이 1959년에 출토됐는데, 중국에서는 이것을 BC 2000년경의 중국 최초의 동기(銅器)로 설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중국의 가장 오래된 고문헌들이 ‘고죽국’을 중국의 조상국가가 아니라 ‘동이족’의 국가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에서 맨 처음 ‘고죽국’이 조선사람의 조상국가라고 주장한 학자는 성호 이익(李瀷)이다. 이익은 명나라 지리서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에 조선성(朝鮮城)이 북경에 가까운 영평부(永平府) 경내 있다는 글을 읽고, “고죽국은 영평부에 있었다. 고죽국 세 임금의 무덤과 백이(伯夷) 숙제(叔齊)의 묘(墓)도 그곳에 있다”고 했다.(‘성호사설’) 이익은 고죽국이 고조선 후국임을 잘 인지하여, “고죽의 옛터가 오늘의 요심(遼瀋)에 있으면서 북해(北海, 발해)의 바닷가로 일컬어지는 것이다. 단군(檀君)…시대에 이 고장은 조선(朝鮮)에 통합됐다”고 기술했다. 이어 신채호 선생이 중국 고문헌 ‘수문비고(修文備考)’에 “고죽국은 ‘조선종(朝鮮種)’”이라 하였고, “고죽은 9족(九族, 조선족의 별칭)의 하나”라고 했다.(‘조선상고문화사’) 
 

▲  ‘孤竹亞微(고국아미)’ 명문이 새겨진 객좌현 북동 1호 출토 고죽국 청동기(위). 객좌현 소파태구 출토 고죽국 청동예기(아래).

필자도 신채호 선생을 따라 추적해보았더니, 중세 중국학자들도 ‘고죽국’이 동이족 고조선 국가임을 알고 있었다. ‘일주서(逸周書)’ 왕회편에서는 ‘고죽’을 불령지, 불도하, 산융 등과 함께 들었는데, 공영달은 이들은 모두 동북이(東北夷)라고 했다. 북경대 도서관에 수장된 ‘황명수문비사(皇明修文備史)’의 ‘구변고(九邊考)’는 ‘고죽국을 조선과 함께 동이족’이라고 공식적으로 밝히고 있다. 이에 필자는 확신을 갖고 ‘고죽국’의 실체를 탐구하여 2013년 연구논문을 발표했다. 

고죽국은 명칭부터 고조선의 후국이었다. 고대 중국에서 고죽국은 ‘孤竹’ 또는 ‘고주(孤廚)’로 표기했다. 고조선 호칭을 음차 기록한 것이다. ‘孤竹’이란 한자 명칭은 고조선이 왕족 지방통치자에게 붙이는 ‘고추가(古鄒加)’에서 나온 것으로서, ‘고추가가 다스리는 나라’의 의미로 성립된 것이었다. 고조선은 중요한 후국에 대해서는 ‘가(加)’ 가운데서도 ‘고추가’를 파견하거나, 또는 후국의 제후를 왕실 혼인을 통해 ‘고추가’의 최고 ‘가’ 칭호를 주었다. ‘古鄒’의 고중국어 방언(客話) 발음도 ‘Kutseu’이고, ‘孤竹’의 고중국어 방언 발음도 ‘Kutsu’이며, ‘孤廚’의 고중국 방언 발음도 ‘Kutshu’로서 거의 완전히 동일하다. ‘고추가’의 ‘고추’를 고중국에서 ‘孤竹’ 또는 ‘孤廚’ 등으로 달리 표기한 것은 원래의 고죽국 이름은 고조선 언어로 된 명칭이었고, 그 고조선 말 이름을 여러 가지 유사발음의 다른 한자를 선택해서 표기했기 때문이었다.  

BC 7세기경 고죽국의 후왕은 ‘답리가(答里呵, 고대음 다리가·Tariga, Dariga)’로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답리+가’로서, 이때의 ‘가’는 ‘고추가’인 것이다. 여기서 ‘고죽국’(Kutsu국) 명칭 그 자체가 고죽국은 고조선의 고추가가 통치하는 ‘후국’임을 나타낸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고조선 후국 고죽국은 언제 설치되었을까? 고죽국은 고조선이 건국 후 난하를 건너서 고중국 관내 지역으로 진출하던 시기에 난하 양안에 설치되었던 고조선 최서변 후국의 하나였다. 고죽국의 설치시기는 BC 21세기경의 매우 이른 시기에 성립됐다. 중국 고문헌들은 하(夏)나라를 건국한 선주민 장수 헌원(軒轅)이 동이족 장수 치우(蚩尤, 고조선 이주민 장수)와 대결하여 탁록(탁鹿) 대결전에서 승리하여 하(夏)를 건국하고 국왕이 됐는데, 후에 중국인들이 헌원을 황제(黃帝)로 추존하여 중국 고대국가 건국 시조로 삼는다고 설명해 왔다.  

‘탁록’은 난하를 건너 지금의 북경의 서쪽 120㎞ 지점에 있는 벌판이다. 지금의 하북성 탁록현에 속한다. 최근 중국의 고대사학자들은 헌원과 치우를 실재인물이며, ‘탁록벌 전투’도 사실로 인정한다. 중국은 하(夏)의 성립 시기를 BC 2070년(BC 21세기)으로 추정했고, 하왕조의 존속기간을 BC 2070년∼BC 1600년으로 추정했다. 하(夏)의 건국연대 BC 2070년대 설을 받아들인다면, 고죽국 설치는 하(夏)의 건국보다 약간 먼저였으니, 고조선의 고죽국 설치는 늦어도 BC 21세기경이 된다. 

고죽국의 위치는? 당(唐) 시대의 ‘통전(通典)’ 북평군 평주조에서 “평주는 지금의 노룡현(盧龍縣)이다. 은(殷) 시대에는 고죽국이었다”고 기록했다. 또한 ‘통전’ 영주(營州)조에서는 “영주는 지금의 유성현이다. 은(殷) 시대에는 고죽국지(孤竹國地)였다”고 기록했다. 이것은 상·은(商·殷) 시대에 고죽국이 매우 강성하여 지금의 대릉하 유역 조양(朝陽) 지구도 영유했음을 기록한 것이었다.  

중국 사회과학원이 편찬한 ‘중국역사지도집’에서는 ‘고죽국’을 난하 하류 유역에 표시했다. 그러므로 ‘고죽국’ 영역은 당(唐) 시대의 유주(幽州)·계주(계州)·평주(平州)·영주(營州)로 구성되어 있었다. 유주가 서쪽이고 영주가 동쪽이었다. 고죽국의 도읍은 난하의 동쪽 강변 노룡(盧龍)이었지만, 고죽국의 서변은 난하를 건너 서쪽으로 지금의 천진(天津)까지였다. 백랑수(지금의 대릉하) 유역과 지금의 조양(朝陽) 지역은 영주(營州) 지역이므로 고죽국의 통치를 받던 고죽국의 영지였다. 고죽국은 난하를 가운데 두고 그 동쪽은 ‘조양’과 서쪽은 ‘천진’까지에 걸친 고조선의 후국이었다. 즉 고조선 시기에 발해만 북쪽 해안에 고조선 후국 고죽국이 있었으며 중국인들은 고죽국과 고죽국 수도 ‘고죽성’을 ‘조선’이라고 인식했었고, 명나라 시대에는 영평부 소속 ‘조선성(朝鮮城)’으로 편제했었음을 알 수 있다. 중국이 소위 ‘동북공정’을 시작한 전후부터 고죽국을 고중국의 상(商) 또는 연(燕)의 후국이라고 주장하는 견해가 나오는데, 전혀 사실이 아닌 억설이다.
 

▲  영성현 소흑석구 출토 고조선 번개무늬 다뉴조문경.

고죽국은 발해만 연안에 설치된 고조선의 후국으로서 고조선에서 파견된 고추가가 통치했다. 그 역사적 증거로는 BC 7세기 중엽에 고조선과 고중국이 국경 전쟁을 하게 됐는데, 중국 측 산동반도의 제(齊) 환공(桓公)은 노(魯)·연(燕)·진(晉) 등과 연합국을 편성했다. 이에 대항하여 고조선 측은 고죽(孤竹)이 중심이 되어 불리지(弗離支, 또는 영지·令支)·산융(山戎)·도하(屠何) 등이 고조선 연합군을 편성하여, 고중국(周, 齊, 燕…등) 연합군에 대항하여 고조선을 방어했다. 이때 고죽국은 고중국 연합군에 대항해 고조선의 중심세력이었음이 고중국 측 문헌 ‘관자(管子)’에 기록돼 있다. 이때 제의 환공에 대항해 싸운 고죽국 장군이 황화(黃花)였고, 고죽국 군주의 성씨는 묵(墨) 씨였으며, 호칭은 고조선 고추가인 답리가(고대발음 다리가)였다. 

BC 3세기에 편찬됐다는 ‘산해경(山海經)’, 해내경에는 ‘조선(朝鮮)’이 나오는데, “동해의 안 북해의 모퉁이에 나라가 있는데, 조선과 천독이라고 한다”고 기록했다. 또 ‘산해경’ 해내북경에서도 “조선은 열양(列陽)의 동쪽에 있는데, 바다의 북쪽이고 산의 남쪽이다”고 서술했다. 여기서 중국의 동해를 황해로, 북해를 발해로 해석하면, ‘산해경’의 ‘조선’은 ‘통전’의 ‘고죽국’과 일치함을 알 수 있다. 즉 고중국에서는 ‘고죽국’을 ‘조선’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고죽국은 어떠한 정치를 하던 고조선 후국이었는가? 고죽국은 매우 이른 시기에 율령을 제정하여 통치한 율령국가였다. ‘서경’에 고죽국 왕자 백이(伯夷)의 업적으로 “법령을 제정하여 백성들을 (자의적) 형벌로부터 막았음”을 든 것은 고죽국에서는 매우 일찍 ‘율령’에 의한 통치 행정이 시행되었음을 기록한 것이다.

고죽국에서는 청동기문화가 크게 발전했다. 현재 중국의 가장 오래된 황동(黃銅) 2점도 당산(唐山)에서 출토됐는데, 고죽국 청동기였다. 1973년에 고죽국 영토였던 요령성 객좌현 북동촌의 두 매장지에서 출토된 12개 청동기 가운데 한 예기(禮器)에는 “고죽국의 아미(亞微)”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어서 고죽국의 청동기임을 알려주는데, 당시로서는 최고수준의 청동기였고 상(商)의 청동기의 원류가 된 것이었다.

고죽국에서는 청동기수공업과 함께 고조선지역과 고중국지역을 소통 교류하는 상업과 무역도 매우 발전했다. 상거래에는 청동 주조화폐로 ‘고죽명도전(孤竹明刀錢)’과 ‘명화폐(明化幣)’ ‘일화폐(一化幣)’가 사용됐다. 필자는 중국 산동반도 대문구문화유적에서 1979년 발견된 11점 토기 술잔의 문양이 고조선 민족을 상징하는 ‘아사달’ 문양임을 이미 밝힌 바 있다. 고죽국이 고조선 고죽국 청동 화폐에 ‘아사달’ 문양을 주조하여 조선화폐임을 표시한 것인데, 1928년에 일본학자들이 이 문양을 ‘명(明)’자로 잘못 해석하여 ‘명도전(明刀錢)’이라고 호칭하고 중국 학자들이 연(燕)나라 화폐로 잘못 분류해서 지금까지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소위 명도전과 명화폐 및 일화폐는 고죽국 화폐였다.

특히 이 중에서도 고죽국 ‘명도전’은 고조선 연방 전역과 고중국에서 고죽국의 왕성한 상업·무역에 병행하여 국제화페로 널리 사용됐다. 

고죽국은 기본적으로 농경국가이면서도 목축을 병행하여 발전시켰으며, ‘말’을 대대적으로 사육하여 ‘기마문화’를 발전시켰다. 고죽국은 ‘기마문화’에 기반하여 기병부대를 창설해서 고조선 후국이 된 다른 기마유목민족들과 함께 때때로 연합군을 편성하여 작전했다. 고죽국은 고중국의 어느 한 후국이 고조선을 침노하게 할 때는 사전에 막아 방어해주는 서번(西藩)의 지위와 역할을 잘 수행했다.

고죽국은 이미 고대에 도덕과 예의가 확립된 선진적 문화국가였다. 일찍이 공자(孔子)는 고죽국을 예의와 도덕이 확립 발전된 ‘군자국’이라고 보았으며, 노(魯)나라에서 도덕이 바로 서지 못하면 구이(九夷)의 나라에 가서 살고 싶다고 말했다. 여기서 ‘구이’는 ‘고조선’ 전체를 가리키는 용어이기는 하지만, 구체적으로는 노나라에서 가장 가까운 ‘고죽국’을 가리킨 것이었다.  

고죽국에서 성인에 버금하는 ‘백이’ ‘숙제’가 나와 역사에 영구히 기록된 것은 우연한 돌출이 아니라 고죽국의 확립 발전된 예의와 도덕에 기반한 것이었다. 사마천도 ‘사기(史記)’에서 ‘백이열전’을 쓰면서 고죽국이 효(孝)와 인(仁) 등 도덕과 예의가 확립된 나라임을 확인했다. 

고죽국은 BC 3세기 초기에 연(燕)의 장수 진개(秦開)가 고조선을 침공하여 1000여 리의 땅을 빼앗을 때, 진개의 침공을 받고 멸망했다. 그 바로 뒤에 고조선 후국 동호(東胡)가 반격을 가하여 지금의 조양(朝陽) 지구 등(唐 시대의 營州지역)은 회복했으나, 고죽국의 본래 영지(唐 시대의 유주·계주·평주지역)는 회복하지 못했다. BC 206년경에는 산융이 동호를 공격하여 멸망시키고 고죽국의 ‘영주지역’은 산융의 영지가 됐다. 연에 뒤이어 진(秦)의 시황(始皇)이 고죽국의 옛 영지 가운데 난하 하류 유역(당 시대의 평주 지역 일부)을 진나라 안으로 포함해 넣어 갈석산(碣石山) 부근에 이른바 ‘만리장성’을 수축했기 때문에, 산융의 기병부대도 고죽국의 ‘유주·계주·평주지역’을 회복하지 못했다. (문화일보 10월 8일자 17면 8 회 참조) 
 

서울대 명예교수


■ 용어설명

고죽국(孤竹國) : 백이·숙제(伯夷·叔齊)로 잘 알려진 고죽국은 현재 중국에서 은(殷)나라의 제후국으로 기록돼 있지만, 많은 사료·유물은 고조선의 후국(侯國)임을 말하고 있다. 고죽국은 발해만 연안에 설치된 고조선의 후국으로서 고조선에서 파견된 고추가가 통치했다. BC 7세기 중엽 고조선과 고중국이 국경 전쟁을 할 때 중국 측 연합국에 대항하여 고조선 측은 고죽(孤竹)이 중심이 돼 연합군을 편성해 방어했다. 이는 고중국 측 문헌 ‘관자(管子)’에 기록돼 있다.




 

[문화] 지식카페 문화일보 : 2019년 10월 08일(火)
고조선 ‘8방의 후국들’ 통해 고대 연방제국 발전 기반 다졌다
▲  고조선 문명의 천군(天君)이 의례·의식에서 사용하던 의기(儀器)인 ‘8주령’. 고조선과 8방 후국들의 관계를 상징한다.


■ 신용하의 인류 5대 ‘古朝鮮문명’ - ⑧ 고조선의 발전과 영역확대

지역 부족장들, 자신들 지위 유지한 채 선진적 정치조직 편입되는 ‘후국제’ 환영
봉건제와 유사하나 봉토 하사 없이 통치권 승인… 2000여 년간 지속되다 위만 정변으로 해체 

- 한민족 고고학
 
 

약 5000년 전 고조선이 한·맥·예 3개 부족의 연맹 결합으로 동아시아 최초의 고대국가로 건국될 때 ‘한’족과 ‘맥’족은 혼인 동맹으로 결합하고, ‘예’족 군장에게는 자치권을 줘 처음부터 ‘후국’(侯國) 제도를 채택했다. 후국은 고조선 제왕이 제후(諸侯) 또는 후왕(侯王)을 통해 복속 국가 또는 지역을 간접 통치하는 것이다. 고조선의 단군은 처음부터 왕인 동시에 황제인 ‘제왕’이었고, 예족은 고조선 제왕의 간접통치를 받는 동시에 예족 후왕(濊君)의 직접 지배 아래 있었다. 예족의 후국 지위는 고조선이 BC 108년에 멸망할 때까지 지속됐다. 

동아시아 최초의 고대국가 고조선은 한반도에서 건국된 후 만주의 요동·요서·연해주 일대로 진출해 나가면서 후국 제도를 활용함에 따라 고대 ‘연방 국가’로 발전하게 됐다. 이 지역 부족장 다수가 간접통치 방식인 후국 제도를 환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조선 고대 연방 제국은 현대 연방 제국처럼 치밀하게 잘 조직된 것은 아니었다. 당시의 교통·통신·사회정치 조직기술 수준에 따라 약간 느슨하게 묶인 ‘연맹적’ 성격의 고대 연방 제국이었다. 고조선의 후국 후왕의 임명 방식에는 ①기존 부족장의 후왕 임명 ②고조선 제왕의 왕족 파견 ③기존 부족장에게 제왕의 왕족 여자를 출가시켜 ‘고추가’(사위 후왕)로 삼는 방법 ④점령지에서 공훈이 큰 지역의 ‘대인’ 임명 등 여러 방식이 있었다.  

고조선의 후국 제도는 여러 요인으로 비교적 단기간에 영역을 확대했다. 먼저 각 지역 부족들이 이미 소통 가능한 동일 계통의 ‘고(古) 한반도 초기신석기인 유형’(‘밝’족)의 사람들이었을 뿐만 아니라 고조선 건국에 처음부터 참여한 맥족과 예족의 거주지역이 만주 요동·요서, 연해주 지역이었으므로, 이 지역 잔류 주민과 부족을 고조선 후국으로 통합하기가 용이했다. 고조선이 동아시아 최초의 고대국가로서 선진적 정치조직이었기 때문에 국가형성 단계 이전인 부족들을 후국으로 편입하기도 보다 용이했다. 이와 함께 고조선의 후국 제도는 각 부족 지역의 기존 통치 질서를 인정한 ‘간접 통치’였으므로 고조선 영역 확대에 대한 저항을 최소화할 수 있었다.
 

▲  <그림 1> <그림 2>는 고조선 영역의 제1단계와 제2단계. <그림 3>은 제3단계 최전성기. <그림 4>는 제4단계 위만조선 시기(BC 194∼BC 108).

후국 제도에서 고조선 중앙정부와 후국의 관계는 간접 통치였지만, 본질적으로 ‘지배·종속’ ‘중앙과 주변’의 관계였다. 다만 그 통치 유형이 ‘직접 지배’가 아니라 ‘간접 지배’였을 뿐이었다. 고조선 후국들의 중앙 본국에 대한 의무는 ①전쟁 시 군사 동원 ②군사 장비 공납 ③군량 제공 ④생산물 교환과 교류 ⑤특산물 공납 ⑥전국대회 참가 ⑦신앙·종교의식 참가 같은 것이었다. 반면 후국들이 본국으로부터 받는 혜택은 ①군사적 보호 ②후국 제후의 지배질서와 권위 보장 ③특산물의 교환 ④재난 시 긴급원조 ⑤선진적 경제와 기술 전수 ⑥선진적 문화 전수와 지원 ⑦각종 정당성과 명분 제공 등이었다. 

고조선 중앙 본국과 후국의 관계를 그림으로 그리면, 입체적으로는 고조선 제왕(단군)이 정상에 있고, 그 아래 각급 후국들이 피라미드형으로 종속돼 있는 형태였다. 고조선 본국을 중심에 놓고 후국들을 방위별로 재분류해보면 대체로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①고조선의 중앙본국: 조선(직령지·밝달조선·發朝鮮·고조선) ②남부 후국: 진(辰·震)국 ③ 동부 후국: 옥저(沃沮)·읍루(읍婁) ④북부 후국: 부여(夫餘) ⑤요동지역 후국: 양맥(良貊)·구려(句麗)·비류(沸流)·개마(蓋馬)·구다(句茶)·행인(荇人)·임둔(臨屯) ⑥요서지역 후국: 고죽(孤竹)·불영지(弗令支)·불도하(不屠何)·청구(靑丘)·진반(眞潘)·동호(東胡)·원오환(原烏桓)·선비(鮮卑)·고마해(庫莫奚)·원정령(原丁零, 원 투르크족)·오손(烏孫) ⑦동부 내몽골지역 후국: 산융(山戎, 원 훈족)·원유연(原柔然, 원 아발족)·실위(室韋, 원 몽골족). 이를 평면으로 그리면, 고조선 본국이 정중앙에 있고, 다수의 후국이 그 지배와 영향을 받으면서 주변에 연결돼 있다. 

고조선의 후국 진국 지역의 ‘천군’(天君)이 사용했던 의기에 고조선과 후국 간의 관계를 평면으로 도안한 것이 있다. 천군의 8주령에서 중앙의 ‘해’(태양)는 고조선 본국과 ‘단군’을 상징하는 것이고, 중앙의 ‘햇빛’을 받으며 주변에 연결된 8방의 작은 ‘해’들은 고조선의 지배를 받는 8방 후국들을 상징한 것으로 해석된다(위 사진 참조). 한국에는 고조선이 1개 중앙 본국과 8방의 주변 소국 9개국 체제로 돼 있었다는 전통적 의식이 존재해 왔다. 또 고(古) 중국에서는 동이(東夷)가 9개 종족으로 구성돼 있어서 ‘구이’(九夷)라는 별명이 있는 것으로 의식해 왔다. 고조선의 4대 후국으로서는 남으로 진국, 북으로 부여, 동으로 옥저, 서로 고죽을 들 수 있다. 이 밖에도 수십 개의 후국이 있었다. ‘고려사’에는 단군조선의 후국이 약 70개국이었다고 시사했다. 이는 앞으로의 연구 과제이다. 

고조선이 고(古) 한반도에서 건국돼 고대 연방제국의 최전성기에 이를 때까지의 과정을 3단계로 나눠 볼 때, 제1·2 단계의 영역을 <그림 1>과 <그림 2>와 같이 대강 그려 볼 수 있다. 고조선 국가 조직의 연맹적 연방제국의 강점은 중앙 본국이 비교적 안정적이게 된다는 것이다. 중앙 본국이 강력해 후국들을 통제할 수 있을 때는 문제가 없지만, 중앙 본국이 쇠약해지고 지방 후국이 강성할 때에는 후국의 분리독립이 용이해진다는 것이 약점이다.  

고조선의 후국 제도는 ‘봉건제도’와 유사하지만, 다른 측면이 있었다. 봉건제도는 군사적 점령지 또는 복속지의 토지를 봉해 주는 영주의 ‘봉토’(封土) 하사가 핵심이다. 하지만 후국 제도에서는 봉토는 거의 없고, 기존의 지역 ‘지배·통치권’을 승인하는 ‘정치·군사적’ 성격이 강한 것이 특징이다. 따라서 고조선 연방제국의 최고통치자 ‘단군’은 직령지의 ‘임금’인 동시에 전체 고조선 연방제국의 ‘황제’였다.

필자는 한자 ‘皇’ 자체가 상나라 사람들이 한자를 만들 때 ‘박달(白)+임금(王)’이 바로 황(皇)제임을 나타낸 조립문자라고 앞서 지적한 바 있다.

고조선의 통치 영역에 반드시 후국들을 포함해야 한다고 본 선학은 신채호 선생이었다. 그는 “단군조(檀君朝)의 정치통일구역이 그와 같이 넓어, 북으로 흑룡강을 지나며, 남으로 현해(玄海)를 건너며, 서로 지나(支那)의 연해안과 동몽고(東蒙古)를 포내(抱內)했다”(‘조선상고문화사’)고 썼다. 실제로 고조선 연방제국의 최성기 영역은 북으로는 흑룡강 계선, 남으로는 제주도와 대마도, 서로는 요서의 난하를 건너서 북경 부근의 영정하(永定河), 동으로는 연해주 오호츠크해안까지에 이르는 광대한 것이었다. (<그림 2> 참조) 일찍이 신채호 선생은 초(楚)나라 시인 굴원(屈原·BC 343∼BC 277)이 ‘동황태일’(東皇太一·동쪽의 황제가 가장 첫째다)이라는 노래를 ‘초사’(楚辭)의 첫머리에 수록해 단군왕검을 동방의 최초·최고의 ‘황제’로 기렸음을 시사한 바 있다(‘조선상고사’).

2000여 년간 장기 지속되던 후국 제도에 의한 고조선 연방국가는 BC 194년 대사건으로 해체됐다. 위만(衛滿)이라는 장군이 군사정변을 일으켜 고조선(후조선) 준왕(準王)을 내쫓고 고조선 왕이 된 것이다. 이른바 ‘위만조선’의 시작이다. BC 3세기 초에 연(燕)의 장군 진개(秦開)가 고조선의 서변을 침공해 1000여 리를 빼앗은 일이 있었는데, 위만은 그때 남은 조선족의 후예였다. BC 209년 위만이 조선인 등 피난민 1000여 명을 이끌고 후조선 준왕에게 투항했다. 준왕은 위만을 신임해 고조선 서변 국경 지역에 정착시켰다. 위만이 탁월한 장수로서 서변 국경을 잘 지키자, 준왕은 위만을 크게 신임해 이 지역 후왕에 임명했다. 지금의 창려(昌黎), 옛 험독(險瀆)이 위만의 주둔 도읍지로 추정된다.  

BC 195년 연 왕 노관(盧관)이 한(漢)에 저항해 흉노로 도망한 사건이 일어나서 한의 중앙군이 노관을 잡으러 출병하자 위만은 이것을 기회로 잡아 “한나라가 대군을 이끌고 10로로 나눠 쳐들어오고 있으니 내가 가서 왕궁을 지키겠다”고 후조선 준왕에게 거짓 보고해 승낙을 받고, 준왕이 있는 요동 개평 부근의 고조선연방 왕검성(王儉城)에 입성, 군사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해 버렸다. 준왕은 황급히 뱃길로 한반도 마한 지역으로 피란했다. 위만은 새 왕조의 이름을 ‘조선’으로 이어 사용했으나, 정당성이 전혀 없는 위만의 정변에 고조선 연방 후국 중 어느 한 곳도 이를 수용·복종하지 않았다. 불과 1년 사이에 고조선 연방국가는 해체돼 모두 독립하게 되고, 위만조선은 준왕의 직령지만 승계한 ‘작은 고조선’이 됐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직령지 내에서도 예족이 불복해 예족 후왕 남려(南閭)가 28만 구(口)의 예족을 이끌고 한에 투항해 버렸다. 한 투항에 반대한 예족은 동으로 이동해 ‘동예(東濊)’가 됐다. 한은 남려를 맞아 창해군(滄海郡)을 설치해 줬다가 2년 후에 폐지해 버렸다. 

위만조선은 BC 194년∼BC 108년 87년간 존속했지만, 그 이전 고조선 연방국가의 ‘대 고조선’이 아니라, 직령지만 통치한 ‘소 고조선’이었다. 즉 ‘고조선 연방제국’(대 고조선)은 BC 194년에 위만의 불법 군사정변으로 해체됐고, 그로부터 87년 후 BC 108년에 위만조선(소 고조선)도 해체된 것이었다. 한 무제의 위만조선 정복 출병에 맞춰서 옛 중국의 ‘조선’에 관한 관심과 정보수집이 실행됐다. ‘한서’(漢書), ‘사기’(史記) 등의 ‘조선’ 기사는 모두 ‘위만조선’을 가리킨 것이다.  

그러므로 중국 고문헌에서 ‘조선’이 언급되면 그것이 ‘고조선 연방’인지 ‘위만조선’인지를 먼저 판별해야 한다. ‘관자’(管子), ‘산해경’(山海經), ‘전국책’(戰國策) 등의 ‘조선’은 ‘고조선 연방’ 또는 그 일부를 지적하고 있지만, ‘사기’ ‘한서’ ‘후한서’(後漢書), ‘삼국지’(三國志) 등과 그 이후의 고문헌은 ‘위만조선’을 고조선으로 기록하고 있음을 주의해야 한다. 국내 학자 일부가 이 중국 고문헌 기록으로만 고조선 역사를 보는 것은 전체 고조선이 아니라 ‘위만조선’을 고조선으로 보는 것일 뿐이다. (문화일보 9월 11일자 17면 7 회 참조) 서울대 명예교수 
 


■ 용어설명

위만조선 : 위만조선은 BC 194년~BC 108년의 87년간 존속했지만, 그 이전 고조선연방 국가의 ‘대 고조선’이 아니라, 직령지만 통치한 ‘소 고조선’이었다. 즉 ‘고조선 연방제국’(대 고조선)은 BC 194년에 위만의 불법 조사정변으로 해체됐고, 그로부터 87년 후 BC 108년에 위만조선(소 고조선)도 해체됐다.

후국제도 : 고조선의 ‘후국’ 제도는 봉건제도와 유사하지만, 약간 다른 측면이 있었다. 봉건제도는 제왕이 영주에게 ‘봉토’(封土)를 하사하는 것이 핵심이다. 후국 제도에서는 봉토는 거의 없고, 기존 지역 ‘지배·통치권’을 승인, 하사하는 ‘정치·군사적’ 성격이 강한 것이 특징이다.




[문화] 지식카페 문화일보 : 2019년 09월 11일(水)
요령성 출토 새·곰·범 청동장식… ‘고조선=한·맥·예 연맹’ 증거
▲  요령성 평강지구에서 출토된 ‘새’ 토템족이 ‘곰’ 토템족, ‘범’ 토템족, ‘이리’ 토템족을 휘하에 거느린 동안의 청동장식.

■ 신용하의 인류 5대 ‘古朝鮮문명’ - ⑦ 고조선 태동과 정치적 기반

- 한민족 고고학 

한족·맥족 혼인동맹 통해 출생한 단군이 건국… 예족은 자치권 가진 제후국으로 결합
도읍 ‘아사달’은 원래 나라 이름… 아침 뜻하는 ‘아사’·나라 뜻하는 ‘달’ 한자로 의역해 ‘朝鮮’
 
 

▲  산동반도 대문구문화 유적에서 출토된 ‘아사달문양’이 새겨져 있는 팽이형 토기.

‘새’ 토템 ‘한’족의 군장국가 군장 환웅(桓雄)이 ‘곰’ 토템 ‘맥’족의 여군장(부족장)과 혼인동맹으로 그 사이에서 후손 ‘단군’(檀君)이 태어나 성장하자, 단군은 ‘아사달’(阿斯達)에 도읍을 정하고 ‘조선’(朝鮮)이라고 호칭한 고대국가(나라)를 개국했다.  

‘삼국유사’에 인용된 중국 고문헌으로는 “‘위서’(魏書)에 이르되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에 단군(壇君)왕검이 있어, 도읍을 아사달에 정하고 나라를 개창해 이름을 조선이라 하니 高(堯)와 같은 시기이다”라고 역사적 사실만을 간단히 기록했다. 한편 삼국유사에 수록된 ‘고기’(古記)는 ‘단군설화’를 수록하면서 환인의 아들 환웅과 웅녀(熊女:곰 토템 부족 여족장)의 혼인에 의한 한·맥의 혼인동맹 사이에 출생한 아들인 단군왕검의 ‘조선’(朝鮮, 古朝鮮) 개국을 기록했다. 

중국 고문헌들에 나오는 ‘한맥’(한貊)도 새 토템 한족과 곰 토템 맥족의 결합에 의한 ‘고조선’과 한국원민족의 형성을 인지한 기록의 한 사례다. 범 토템 ‘예(濊)’족은 다른 방식에 의해 한·맥족과 결합했다. 예족의 고조선 국가에의 결합양식은 일정의 자치권을 가진 ‘후국’(侯國)제도에 의거한 것이었다. 예족에 관한 최초의 고문헌 기록인 ‘일주서’(逸周書) 왕회해(王會解)편에 ‘예인’(穢人)이 나오고, 그 주에는 “예(穢)는 한예(韓穢)이니 동이(東夷)의 별종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여기서 ‘韓穢’는 한과 결합한 예 또는 한의 예 의미를 포함한 것으로 해석된다. 

한·맥·예 3부족 결합의 증거는 고고 유물에서도 보인다. 고조선 강역이었던 만주 요령성 평강지구에서 고조선 후기 커다란 새(독수리, 삼족오)의 지휘와 보호 아래서 곰과 범이 순종하고 있고 그 옆에 이리가 따르는 금도금 장식으로 조각 유물 2점이 출토됐다(왼쪽 위 사진 참조). 이 장식물의 동물은 부족 토템 상징으로서, 커다란 새는 한족의 토템이고, 곰은 맥족, 범은 예족의 토템이며, 이리는 후에 고조선 후국족이 된 ‘실위’족 등 유목민족의 토템이었다. 이 유물은 한족의 중심적 지휘 아래서 고조선이 한·맥·예 3부족이 연맹해 형성되고, 후에 이리 토템 족이 참여했음을 잘 증명해 준다.

고조선의 건국 시기는 언제인가? 종래 여러 가지 견해와 조사연구가 진행돼 왔다.
 

▲  단군조선의 탁자식 고인돌들. ① 한반도 강동 문흥리 2호 고인돌 ② 요동반도 해성 석목성 고인돌 ③ 요동반도 개주 석붕산 고인돌 ④ 요동반도 대석교 석붕옥 고인돌

(1)삼국유사에서 인용된 위서에서는 고조선의 건국 시기를 고중국의 ‘요’(堯)임금과 동시기라고 했다. 중국에서는 요임금의 즉위년에 대해 무진(戊辰)년설과 갑진(甲辰)년설이 병존했다. ‘동국통감’(東國通鑑, 서거정 편찬)은 무진년설을 택했는데, 구한말에 이를 서기 BC 2333년으로 환산했다. 고조선 건국 시기를 BC 2333년, 즉 BC 24세기로 보는 문헌학적 견해가 정립된 것이다. 

(2)고고 유물에서 보면, 고조선 건국 직후 고조선 이주민(중국학자들의 동이족) 소호(少호 또는 少昊)족의 유적인 산동반도 ‘대문구(大汶口)문화’ 유적 상층 유물에서 ‘아사달문양’이 새겨져 있는 고조선 ‘뾰족밑 팽이형(변형) 민무늬토기’ 11점(파손분 포함)이 출토됐다. 이 11개 토기 술잔은 형태가 고조선 특유의 뾰족밑 팽이형 민무늬토기일 뿐 아니라, 토기 위의 잘 보이는 위치에 아사달문양까지 새겨 넣었으니(오른쪽 위 사진 참조), 이것은 고조선 건국 후 산동반도에 이주해간 고조선 이주민의 토기임이 명백한 것이다. 아사달문양 토기의 편년을 취하면, 고조선 건국 시기는 BC 3000년∼BC 2400년 이전으로 볼 수 있다. 

(3)북한 고고학자들이 1993년 강동읍의 단군묘를 발굴해 보니 남녀 한 쌍의 인골 잔편이 출토됐다. 두 기관에서 24∼30차 측정한 평균치는 bp 5011±267년(bp는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법에 의거해 1950년을 기준으로 역산한 고고학의 연대)이었으니, 이 뼈를 단군의 유골로 본다면 BC 30세기경 건국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중국 사회과학원은 1996년 5개년 계획의 ‘하상주단대공정’(夏商周斷代工程)의 결과, 중국 최초의 고대국가 하(夏)나라의 건국 연대를 BC 2070년이라고 발표했다. 이것은 고조선 건국 연대 BC 30세기보다 9세기 뒤늦은 것이며, 가장 낮은 연대인 BC 2333년보다 263년 뒤늦은 것이다. 종합해 보면, 환웅 족의 ‘군장국가’ 시기를 제외하고서도, 단군의 고대국가 고조선 건국 시기는 BC 30세기∼BC 24세기라고 보면 틀림이 없을 것이다. 고조선은 BC 30세기∼BC 24세기에 건국된 동아시아 최초의 고대국가인 것이다.

고조선의 원래 나라 이름은 ‘아사(시)달’이었다. 일연의 삼국유사에 인용된 위서와 고기는 고조선의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고 기록했다. 일연은 이것이 삼국(고구려·백제·신라) 이전의 ‘옛 나라’임을 나타내기 위해 ‘古’(고)자를 붙여서 ‘고조선’(古朝鮮)이라는 항목 이름을 사용했다. 그러나 ‘朝鮮’은 한자 이름인데, 고조선의 건국 시기에는 한자가 아직 없었으므로, 순수한 고조선말 원래 나라 이름이 있었을 것임은 틀림없다.

위서와 고기에서 고조선의 도읍이라고 기록한 아사달이 바로 고조선의 나라 이름일 것으로 본 기존 학설에 필자는 찬동한다. 고대 역사에서는 도읍 이름과 나라 이름이 동일한 경우가 종종 있는데, ‘아사’는 현대 일본어에서도 ‘朝’를 아사(아침)로 읽으며, ‘달’은 ‘땅·나라’의 뜻이니, 아사달을 뒤에 한자로 의역한 것이 ‘朝鮮’이라고 본 것이다. 고조선의 고조선말 고유의 나라 이름은 ‘아사달’(Asadar)이었다.

고조선의 서변지역과 고중국에서는 ‘사’(sa)가 ‘시’(si)로 변음돼 ‘아시달’(Asidar)이라고도 했다. 여기서 ‘달’은 ‘땅’(land)·‘나라’의 뜻이고, ‘아사’·‘아시’는 ‘태양이 맨 처음 솟는 아침’의 뜻이다. ‘아사달’·‘아시달’은 ‘태양이 맨 처음 뜨는 나라’(land of the sunrise), ‘태양이 맨 처음 뜨는 아침의 나라’(land of morning)라는 뜻이다.

고조선의 수도 아사달은 ‘밝달 아사달’(대박산 아사달)이라고도 했다. 이것은 상징적으로 고조선 나라의 대명사로도 사용됐다. 고중국에서는 밝달 아사달을 ‘發朝鮮’(발조선)으로 번역해서 사용하기도 했다. ‘밝달’이 ‘發’로 음차표기되고, 아사달이 ‘朝鮮’으로 의역표기돼 합쳐진 것이다. 고조선 첫 도읍지 밝달 아사달의 밝달은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고조선 민족의 상징적 호칭 대명사로서도 의미가 확대됐다. 그리하여 고조선 사람들을 밝달 사람, 고조선 민족을 밝달 민족으로 호칭하기도 했다. 후에 밝달을 한자로 번역할 경우에는 ‘倍達’(배달)로 음차표기되기도 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고조선의 ‘아시(사)달’(land of the sunrise, 태양이 맨 처음 뜨는 나라)이 ‘아시아’(Aisa: land of the sunrise)와 동일한 뜻을 가진 나라 이름이라는 사실이다. 고조선 서방후국들 사이에서 아사달은 상고음으로는 아시달로 발음되고 있었다. 왜 유럽 사람들은 ‘아시(사)달’이 있는 동방을 ‘아시아’로 이름 붙였을까? 서양인들도 그리스문명 시대에 유라시아대륙의 동방 끝에 태양이 처음 뜨는 곳 ‘아시(사)달’이라는 나라가 있다는 정보를 알고 있지 않았을까? 

삼국유사, 고기에서는 고조선의 첫 도읍지가 아사달이라 하고, 옮긴 도읍을 ‘백악산 아사달’(白岳山 阿斯達)이라고 했다. 아사달이 밝달(백산, 白山)과 중첩 사용돼 왔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밝달은 한자로 ‘白山’(백산), ‘白岳’(백악), ‘朴山’(박산), ‘朴達’(박달), ‘北岳’(북악), ‘檀’(밝달나무 단) 등 여러 가지 한자로 음차표기돼 왔다. 삼국유사에 고조선의 초기 도읍을 단지 아사달로만 기록하지 않고 ‘백악산 아사달’이라고 기록한 것은 고조선의 첫 도읍지를 비정하는 데 매우 중요한 참고가 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평안도 강동현(江東縣)조에 ‘대박산’(大朴山)과 ‘아(사)달산’(阿達山) 이름의 연속된 산이 있다. ‘강동군읍지’의 지도를 보면, 대박산의 비탈이 거의 끝나는 기슭 옛 현청 동헌의 뒤에 ‘아달산’이 그려져 있다. 대박산이 ‘큰 밝달’(太白山·태백산의 뜻)과 동일한 것이고, 아달산이 아사달임은 바로 알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강동현조에는 왕릉으로 ①단군묘(檀君墓) ②고황제묘(古皇帝墓)의 2개 고대왕릉이 이 책이 처음 편찬된 15세기까지 남아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단군묘’가 15세기에도 둘레가 410척(약 123m)이라고 했다. 이 거대한 규모는 이 무덤이 왕릉임을 알려준다. 단군묘 등 옛 왕릉이 2개나 15세기까지 남아 있는 곳은 옛 왕조의 도읍지가 아니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또한 ‘강동군읍지’에는 강동현에 조선 후기까지 ‘황제단’(皇帝壇)이라는 제천(祭天)용 거대한 ‘제단’이 남아 있었는데, 둘레가 607척(약 182.2m), 높이가 126척(약 37.8m)이라고 기록했다. 이러한 거대한 제단은 여러 계단의 피라미드형 큰 제단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강동현조를 자세히 검토해 보면, ‘왕궁터’(대궐터)까지도 찾을 수 있다. 이 고문헌은 강동현의 마을들 가운데서 특히 6개 마을을 별도로 구태여 ‘고적’(古跡)으로 분류했는데, ①잉을사향(仍乙舍鄕) ②기천향(岐淺鄕) ③반석촌(班石村) ④박달관촌(朴達串村) ⑤마탄촌(馬灘村) ⑥태자원(太子院) 등이다.  

이 6개 마을 가운데, ‘이두’로만 읽히는 마을이 ‘잉을사향’(王宮里의 뜻)이다. 이것을 이두식으로 풀어 읽으면, ‘임금집마을’=‘왕궁리’(王宮里)가 된다. 이곳이 고조선의 왕궁이 있던 ‘터’임이 명칭으로 남겨져 전해온 것이다. 잉을사향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15세기에는 ‘용흥리’(龍興里)로 호칭됐다. 그 주변 문흥리에는 고조선 왕의 무덤으로 보이는 거대한 탁자식 고인돌도 남아 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고조선은 개국 후 2번 천도했다가 다시 아사달로 돌아왔다고 했다. 천도는 부수도와 관련돼 있는 것으로 보이며, 이 경우에도 ‘강동(江東) 아사달’은 ‘원도읍’으로서 계속 존속됐다고 추정된다. 요컨대 고조선의 첫 도읍은 대동강 중류 동쪽 ‘강동 아사달’이었고, 그다음 천도한 두 번째 도읍은 요동의 ‘개주(蓋州) 아사달’이었다고 본다. 개주지구 주위에 거대한 왕릉인 탁자식 고인돌이 지금도 10여 개 남아 있고, 그 주변에 다시 또 다수의 탁자식 고인돌이 남아 있기 때문에 이를 알 수 있다. (문화일보 8월 28일자 28면 6 회 참조)  

서울대 명예교수 


■ 용어설명  


아사달·아시달
고대 역사에서는 도읍 이름과 나라 이름이 동일한 경우가 종종 있다. 고조선 고유의 나라 이름은 ‘아사달’(Asadar)이었다. 고조선의 서변지역과 고중국에서는 ‘사’(sa)가 ‘시’(si)로 변음돼 ‘아시달’(Asidar)이라고도 했다. 여기서 ‘달’은 ‘땅’(land)·‘나라’의 뜻이고, ‘아사’·‘아시’는 ‘태양이 맨 처음 솟는 아침’의 뜻이다. ‘아사달’·‘아시달’은 ‘태양이 맨 처음 뜨는 나라’(land of the sunrise), ‘태양이 맨 처음 뜨는 아침의 나라’(land of morning)의 뜻이다. 고조선의 ‘아시(사)달’은 그리스문명 시대에 유라시아대륙의 동방 끝에 태양이 처음 뜨는 곳 ‘아시아’의 어원이 아닐까. 

檀君 
단군(檀君)은 박달임금의 뜻이며, 음가만으로는 ‘天王’의 뜻이다. ‘단군’은 고조선 건국 왕(임검)일 뿐 아니라 ‘황제’(皇帝)였다. 뒷날 상(商)에서 만든 한문자 ‘皇’ 자 그 자체가 ‘박달임금’(白+王)을 합해서 단자·단음화한 것이라고 본다. 고조선은 동아시아 최초의 고대국가였으므로, 건국 무렵에는 오직 ‘단군’만이 ‘皇’이었다.




[문화] 지식카페 문화일보 : 2019년 08월 28일(水)

환웅, 예·맥족 포용… 부족공동체→고대국가 발전 터 닦았다 

■ 신용하의 인류 5대 ‘古朝鮮문명’ - ⑥ 고조선 태동시킨 ‘환웅의 군장국가’

고대국가 형성前 準국가형태 
과도기적 정치체제가 군장國 
군장(chief)이 여러 고을 통치 

‘최고의 예술품’ 무계리 석검 
‘제사용 술잔’ 조동리 간토기 
당시 군장들 권력·삶 보여줘 

6000~7000년前 대동강 유역 
한족 ‘환웅 군장국가’가 지배 
기후변화로 예·맥 이동·유입 

강대했던 환웅, 홍익인간 실천 
예·맥족 제압 않고 정착 도와 
곰 토템 맥족과 혼인동맹까지
 
 

고조선 국가는 선행한 ‘환웅’족의 군장국가(君長國家·chiefdom)를 한 단계 더 지양·발전시킨 고대국가였다. 여기서 군장국가란 스펜서와 서비스 등 진화론적 사회학자·문화인류학자들이 정립한 개념인데, 고대국가 형성 직전에 군장들(chief)이 자기 고을에 일종의 준국가(準國家)로 볼 수 있는 통치조직과 질서를 만들어서 고을과 주변 일대를 통치하는 정치체를 의미한다. 군장국가는 부족공동체로부터 고대국가로 가는 과정의 과도적 정치체다. 군장국가의 특징은 동일한 큰 부족 안에서도 크고 작은 다수의 군장국가가 출현해, 처음에는 상호 대등한 관계에서 협동 또는 경쟁하면서 자기의 통치세력을 점차 더 확대해 가는 데 있었다. 

한반도에서 ‘한’(韓)의 군장국가 실태를 보면, ‘삼국지’ 위서 ‘한’조에 주로 한강 이남 진(辰)국 지역의 이름만 나온다. 마한에 속하게 된 것이 월지국(月支國) 등 54국, 진한에 사로국(斯盧國) 등 12개국, 변한에 미오야마국(彌烏耶馬國) 등 12개국이 있다.  

고고유물로는 ‘한’족 무덤양식인 고인돌의 크기가 비교적 크고, 부장품 중에서 생산용구와는 별개의 전투용 또는 위신용 석검(石劍·특히 손목 방패 장치가 있는 전투용 석검)과 제천(祭天)용 특수 토기들의 출토는 군장국가 존재의 증거가 될 수 있다. 예컨대 전북 진안군 모정리의 경우, 상당히 큰 A-1 고인돌 1기에서 ‘붉은 간토기’(磨硏紅陶)와 함께 10개의 석검이 출토됐다. 같은 지역 모정리 망덕 고인돌에서는 붉은 간토기와 함께 역시 7개의 석검과 다수의 돌화살촉이 출토됐다(③, ④ 참조). 붉은 간토기는 태양(하늘)에 제사하는 용구이고, ‘검은 간토기’(磨硏黑陶)는 지신(地神)과 강물(水)에 제사하는 용구다. 이 지역을 통치하는 ‘한’족의 ‘군장국가’가 형성됐음을 추론할 수 있다.

충북 충주 조동리 부근 군장국가의 군장의 제사용 붉은 간토기(약 6200년 전) 등을 보면(② 참조), 오늘날의 술잔에 비해서도 손색이 없다. 경남 김해 무계리 군장국가의 군장의 석검은 그 시대 세계 최고의 예술적 석검이다.(① 참조) 한강 이남 군장급 고인돌 무덤 출토품들의 편년이 대부분 6000년 전~7000년 전임을 보면, 고한반도에서는 적어도 약 6000년 전~7000년 전에 다수 ‘군장국가’들이 출현했다고 필자는 보고 있다.

‘한’족 대군장들 가운데서 ‘환웅국’은 고한반도 가장 북변에 위치한 군장국가로서, 역시 적어도 약 6000년 전~7000년 전에 지금의 대동강·청천강 유역에 형성돼 발전되고 있던 군장국가였다고 본다. ‘삼국유사’와 ‘제왕운기’의 ‘단군설화’에서 보면, 단군왕검에 의한 조선(고조선) 개국 과정을 설명하면서 분량의 거의 4분의 3을 ‘환웅’ 이야기에 배정하고 있다. 

인류 모든 역사에서 고대 개국시조의 역사는 ‘신화’ 또는 ‘설화’로 돼 있다. 시조 신성화를 위해 신(神)·하느님(天)을 빌린 것이다. 그러므로 과학적 역사는 개국신화 속에서 신화적 요소와 사실적 요소를 구별해 내어 사실만으로 역사를 정립해야 한다. 그런데 ‘단군설화’에는 신화적 요소는 ‘환인(=하느님)’ 설명의 단 한 번이고, 모두 사실 이야기로 돼 있다. 단군 ‘신화’(神話)가 아니라, 단군 ‘설화’(說話)이고 ‘사화’(史話)이다. 단군설화의 ‘곰’과 ‘범’도 진화론적 사회학·인류학의 토템이론이 잘 설명해 주는 것처럼, 신석기시대 부족명칭이다. 그러므로 ‘단군설화’를 신화라고 버리는 것은 이 시대 유일한 문헌사료를 버리는 어리석은 일이다. 단군설화에서 ‘사실’의 줄거리를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1)“환인(하느님)의 여러 아들 가운데 환웅(桓雄)이 항상 지상에 내려와 인간 세상을 다스리고자 하는 뜻이 강하므로, 환인(하느님, 아버지)은 지상의 삼위(三危)산과 태백(太伯)산을 내려다보니, 태백산이 가히 홍익인간(弘益人間)하기 적합하므로 아들 환웅을 천부인(天符印:하느님이 붙인 징표) 3개를 주고 무리 3000명을 이끌고 지상에 내려가게 했다.” 

여기서 ‘삼위산’은 중국 감숙성 돈황(敦煌) 부근의 산이고, 태백산은 고한반도에 있는 산이다. 환인(하느님)은 고‘한반도 태백산’을 선택해 아들을 내려보낸 것이다. 하느님이 선택한 땅 고한반도 ‘태백산’의 신성성이 함축돼 있다.

(2)초대 “환웅은 무리 3000을 이끌고 태백산(太白山)의 신단수(神壇樹) 아래 내려와 여기를 신시(神市)라고 말하니, 이 분이 환웅천왕(桓雄天王)이라는 분이다.”

여기서 ‘태백산’ ‘신단수’ ‘신시’에 대한 여러 가지 해석과 학설이 제시돼 있다. 필자는 인류의 하늘에서 내려온 신화(및 설화)의 서술양식에 따라, 이들을 모두 ‘건국 부족 거주 지역’에 연결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태백산’은 ‘밝’족의 제천하는 신성한 ‘큰 밝달’이다. 즉 ‘밝’족 거주지역인 고한반도의 제천하는 산이다. ‘신단수’는 태백산(‘밝’족 거주지역) 내의 신성한 숲이 있는 한정된 지역을 가리킨다. ‘神市’는 ‘(신성한) 왕검의 도읍지’의 한자 뜻 표기로서, ‘왕검성’과 같은 뜻이다. 

(3)환웅이 처음 3000명을 이끌고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것은 또한 환웅은 고한반도 북변에서 자생한 족속이 아니라 하늘(실제 역사에서는 고한반도 중부)에서 이동해 들어온 족속이 수립한 군장국가의 군장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4)환웅의 하강(이동) 후의 치세의 목표에 하느님(환인)으로부터 받은 홍익인간(인간을 널리 이롭게 함)과 재세이화(在世理化·세상을 이치로 교화시킴)의 설화가 기록돼 있는 것은 환웅 군장국가의 통치이념이 정립돼 있었음을 시사한다.

고한반도 각지에서 군장국가들이 형성·발전돼 고대국가 형성 직전에 있던 약 5000년 전에 요서 지역에, 갑자기 기후변화가 일어나서 강우량이 급감하고 장기간 기후 건조화가 진행됐다. 요서지방 대릉하와 시라무렌강 유역에서 홍산문화를 만든 농경부족인 ‘맥’족은 더 이상 이곳에서 농경을 지속하기 어려워 남방 이동을 감행하게 됐다. 우하량 유적지를 중심으로 ‘홍산문화’ 유적을 남긴 ‘맥’족은 약 5000년 전에 여족장의 지휘 아래 남방으로 부족 대이동을 감행했다. 홍산문화 출토 유적·유물이 5000년 전에 갑자기 뚝 그치고, 그 대신 요동반도 압록강 유역, 요서의 하가점 하층문화유적 지역에서 홍산문화를 계승한 ‘맥’족의 유적·유물이 발견·발굴된 데서 이를 알 수 있다. 당시 ‘맥’족의 이동은 4갈래로 나누어졌다. 

첫째 갈래는 여족장(우하량 지역)의 지휘 아래 압도적 다수가 동남쪽 요동반도와 압록강을 건너 한반도 북부로 이동했다. ‘맥’족의 원래 기원은 ‘고한반도 밝족’이었으므로 고한반도의 온난한 기후와 강우량을 아는 맥족은 기원지인 역사적 고향 방향으로 진로를 택했다고 볼 수 있다. 또 요동반도와 한반도는 농업경작에 적합한 토지가 있는 지역이기 때문이었다. 

둘째 갈래는 어떠한 사정으로 ‘맥’부족 내의 소수 일부 씨족이 주류에서 이탈해 바로 남방의 발해만 연안 해안으로 내려와 새 정착지를 개척한 경우다. 발해만 연안은 해수면이 낮아져서 해안선은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맥’족 이동의 이 갈래가 서요하 발해만 연안지역에 정착 후 고조선 건국 후에 통합돼 남긴 유적이 ‘하가점 하층문화’다.

셋째 갈래는 어떠한 사정으로 ‘맥’부족 내의 극소수 씨족이 서남방으로 이동해 중국 동해안에 정착한 경우다. 당시 중국 동해안은 해수면이 약간 내려가서 주인 없는 새 간척지가 조성되고 있었다. 그들은 중국 동해안 새 간척지에 정착해서 고대 중국인들이 말한 ‘동이’(東夷)의 일부가 됐다. 

넷째는 기후 건조화 후에도 이동하지 않고 요하 상류 양안과 시라무렌 강·노합하 유역에 남아서 후에 조성된 수초지·목초지에서, 목축으로 생업을 바꾸어 유목민이 된 경우다.  

필자는 동북아시아 유목민은 약 4000년 전~5000년 전 건조기에 부족 이동을 감행하지 않고, 그대로 예족과 맥족 지역의 거의 말라 가는 강가에 남아서 수초지·목초지를 따라 유목생활을 시작한 원 실위(室韋)족과 원 산융(山戎)족에서 기원한다고 보며, 그들도 원래 ‘밝’족의 후예들이었고, 맥족·예족의 남겨진 갈래였다고 본다. 필자는 이 동아시아 유목민 기원의 발견을 매우 중시한다. 그들은 유목민이 되자 ‘이리(늑대)’를 토템으로 정해 자기 정체성을 구별했다. 
 

‘맥’족뿐만 아니라 ‘예’족 중에서도 농경씨족들의 일부는 기후 건조화 시기에 씨족이동을 감행해 농경에 적합한 남방으로 이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남방 이동 ‘예’족은 ‘맥’족보다는 소규모였다고 추정된다. 왜냐하면 ‘예’족의 다른 일부는 삼림지대와 큰 강·호수지역 환경에 잘 적응해 수렵과 어로를 농경과 균형적으로 발전시키면서 정착했기 때문에, 농경이 어려워져도 수렵·어렵 등 다른 생존수단이 여전히 일부 남아있었기 때문이었다. ‘예’족은 요동반도와 압록강·두만강 양안 및 청천강 이북의 고한반도에도 이미 분포해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북상해 정착했던 ‘예’족 일부의 남하는 이 지역의 인구밀집에만 작용했지 큰 교란을 일으키지는 않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같은 시기 ‘맥’족 주류의 큰 규모의 동남방 이동은 이 지역에 상당히 큰 충격과 영향을 주었다. 약 5000년 전 이제 요동반도는 ‘예’족 지역에 새로 ‘맥’족이 들어와서 ‘예’족과 ‘맥’족이 섞여서 거주하는 지역이 됐다. ‘맥’족이 고한반도에 이동해 들어오자 이번에는 청천강 일대까지 군장국가를 형성하고 있던 ‘한’족의 ‘환웅’ 군장국과 접변하게 됐다.  


인류 초기역사에서 취약한 부족집단이 찾아와 복속하면 강대한 부족은 대개 전쟁과 폭력으로 노예화시키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런데 환웅 군장국가의 마지막 군장 ‘환웅’은 그렇게 하지 않고, 찾아온 곰 토템 맥족과 범 토템 예족을 자기 영토에 정착시켜 선진농경을 가르쳐 주고 도와줬다. 곰 토템 맥족의 여족장이 한족 환웅군장국의 마지막 군장 ‘환웅’에게 ‘혼인동맹’을 요청하자 ‘환웅’ 군장은 이것도 수용해 ‘한’족(환웅국)과 ‘맥’족의 혼인동맹에 의한 두 부족의 결합이 이루어졌다. 필자는 환웅국의 마지막 군장 ‘환웅’은 ‘홍익인간, 재세이화’의 통치 이념을 잘 실천한 큰 시야를 가진 군장이었다고 생각한다. 

환웅이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 평화적으로 ‘맥’족을 포용해 정착시키고 혼인동맹으로 한·맥 2부족의 결합을 성취했기 때문에 환웅의 군장국가는 그 자리에서 즉각 매우 강대하게 됐다. 이것만이 아니다. ‘맥’족이 ‘한’족 환웅국가의 왕비를 내는 부족으로 대우받게 됐음을 알게 된 제2갈래의 발해만 연안 ‘맥’족과, 중국 동해안 간척지에 들어간 제3갈래의 ‘맥’족과 옛터에 잔존해서 유목민이 돼 가는 ‘맥’족 등 광범위한 지역에 흩어진 모든 ‘맥’족들이 모두 환웅의 군장국가 정치체에 순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문화일보 8월 7일자 28면 5회 참조)   
서울대 명예교수  


 

 

[문화] 지식카페 문화일보 : 2019년 08월 07일(水)
‘밝음’ 숭배한 밝족 후예가 ‘한강·대동강·요하문명’ 꽃피웠다
▲  ① 천손 사상을 상징하는 옥천 안터 1호 선돌 ② 한강 유역 암사동 뾰족밑 햇빛살무늬 토기 ③ 우하량 제2지점 1호총 제21호묘 출토 거북 모양 옥기 ④ 대전 괴정동 출토 농경문 청동기 ⑤ 신락하층문화 유적의 석탄정제품 ⑥ 충북 단양 소재 현대에 복원된 솟대 끝의 새

신용하의 인류 5대 ‘古朝鮮문명’ - ⑤ 밝족의 한·예·맥 3부족 분화

신석기 혁명으로 농업 시작되자 
古한반도에 태양숭배 밝족 형성 

한강·대동강 뻗어 나간 ‘한족’ 
풍요기원 햇빛살무늬토기 사용 
우리에겐 ‘빗살무늬’로 알려져 

요동 반도로 이동한 ‘예족’은 
호랑이 토템 삼고 철광석 활용 

요서 평야지대 정착했던 ‘맥족’ 
玉器 쓰며 제의문화 발전시켜 

3부족이 결합해 ‘고조선’ 건국 
인류 최초 독립 문명 탄생 원천
 

고(古)한반도 중부 남한강·금강 유역에서 시작된 신석기 농업혁명은 식량공급을 일거에 증가시켰으나, 인구증가도 뒤따랐으므로 식료부족 문제를 다 해결하지 못했다. 이에 고한반도 초기 신석기인들은 농업경작의 새로운 방법과 기술을 간직한 채 고한반도의 북위 40도선 이남의 농업경작이 가능한 크고 작은 모든 강변과 해안으로 이동을 감행했다. 농업경작은 ‘햇빛’의 은혜에 직결되므로, 고한반도 초기 신석기인들은 매우 일찍 공통으로 ‘태양(해)숭배’ 사상을 갖게 됐다. 그들은 ‘밝음’(光明)을 숭상했으며, ‘태양’이 있는 ‘하늘’을 숭배하고, 태양이 있는 하늘을 나는 ‘새’를 토템으로 정해 애경했다. 후에 그들의 후예들은 태양의 ‘밝음’을 의미한 ‘밝’족, 후대의 고대중국인의 차음표기로는 발인(發人), 백족(白族)이라고 호칭했다. 

주목할 것은 약 1만2000년 전∼9000년 전 고한반도 초기 신석기인들이 서로 교류하면서 농업경작·사냥·어로·식료채집을 하고, ‘태양’ 하늘숭배, 천손의식, ‘밝음’ 애호 사상, ‘새’ 토템을 공통으로 형성해 오래 교류하며 생활하는 동안에 사람과 문화에 ‘공동 유형’을 형성하게 됐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이들을 ‘밝’족이라고 통칭하면서도 학술용어로 ‘고한반도 초기 신석기인 유형’, 그들의 문화를 ‘고한반도 초기 신석기 문화유형’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다.  

‘고한반도 초기 신석기인 유형(밝족)’은 성립 후 처음 단계에서 크게 3갈래로 분화·발전했다. 첫째는 지구기후 온난화 이후에도 고한반도의 북위 40도 이남의 강변과 해안에 그대로 계속 남아 정착해서 ‘고대’를 맞은 신석기인들이다. 이들은 스스로 자기들을 ‘밝’족이라고 호칭했으나, 후에 ‘밝’대족 기원의 다른 부족들과의 구별을 위해 그들이 ‘남한강’을 거쳐서 ‘한’강 유역 등에서 유래했다는 특징이 파악돼 ‘한’족이라는 호칭도 갖게 됐다. 이때의 ‘한’은 ‘큰’ ‘하나’ ‘하늘’의 뜻을 가진 고한반도 신석기인들의 고유어라고 해석된다. 즉 그들은 ‘밝’족 또는 ‘한’족으로 호칭되다가 ‘밝’대족의 분화 진전에 따라 ‘한’족으로 점차 호칭이 확정돼간 것이다. 

‘한’족 신석기문화의 가장 큰 특징은 당시 세계 최선진 신석기 농업혁명의 성취와 그에 인과관계를 가진 모든 문화항목이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태양’ 숭배, 태양이 있는 푸른 하늘 숭배, 천손의식, ‘새’ 토템 등이었다. 현재도 충북 옥천에 세계 유일의 태양을 잉태한 신석기시대 여성상이 남아 있다. 햇빛살(태양광선)이 토템 ‘새’에 집중해 비쳐서 잉태해 ‘알’에서 천손 영웅이 탄생했다는 유형의 ‘난생설화’도 밝족·한족의 설화다.

한족은 약 1만2000년 전부터 토기를 사용하기 시작했는데(문암리 유적 제10층), 약 1만 년 전부터는 햇빛살 무늬를 그린 뾰족밑 토기가 출토돼 나오기 시작한다. 이 무늬를 일본 학자들이 머리 빗는 ‘빗살무늬(櫛目紋)’ 토기라고 이름했는데 잘못된 호칭이다. 머리 빗는 ‘빗살’을 그린 것이 아니라, 농업생산을 풍요롭게 해 주는 ‘햇빛살’을 그린 것이다. 그러므로 이 아래가 뾰족한 독특한 형태의 ‘한’족 토기 명칭은 ‘빗살무늬(줄목문)’ 토기가 아니라 ‘햇빛살무늬(태양광선)’ 토기, ‘빛살(광선)’ 토기로 호칭돼야 할 것이다.

‘한’족은 ‘밝’족을 본터에서 계승해 하늘을 나는 ‘새(鳥)’를 토템으로 애경했다. 필자가 2013년 고조선문명 세미나에서 처음 발표한 “밝족과 한족의 토템은 ‘새’다”라는 명제는 콜럼버스의 달걀처럼 쉬운 것이다. 사회학·인류학적으로 토템 장대(totem pole)인 한족의 ‘솟대’ 꼭지에 세우는 ‘새’를 보면 바로 알 수 있다. ‘삼국지’ ‘후한서’ 등 중국 고대문헌들이 이 ‘새’를 써놓지 않고 ‘蘇塗’(소도)라는 귀신 제사하는 곳으로 써 놓았기 때문에 이를 몰랐을 뿐이다. 

한민족은 고조선·고구려·백제·신라·가라·탐라 모두 ‘새’ 토템이었으며, 모자에도 두 귀 위에 새털 깃을 세우고, 왕관에도 새털 깃 도안을 했으며, 죽으면 무덤에도 새털 깃을 넣었다. 지금도 한국 대통령의 상징 도안은 ‘봉황새’다. ‘한’족은 ‘밝’족과 마찬가지로 10진법과 자(尺度)를 사용했으며, 천문지식과 기하학적 도안을 크게 발전시켰다. 햇빛을 그림으로 나타내기 위해서 특히 기하학적 도안이 크게 발전한 것으로 해석된다. 한족은 죽으면 상층은 ‘고인돌’ 무덤을 썼다. 고인돌은 ‘한’족의 무덤양식이었다.

둘째 갈래는, 지구 기후 온난화로 동토(凍土)가 녹아 북위 40도선 이북도 농경이 가능하게 되자, 고한반도 ‘밝’족의 일부가 북위 40도선 이북의 요동지역에 이동·정착해 형성된 ‘예(濊)’족이다. 이들은 자기들을 개척지의 큰 강 ‘요하’의 ‘東(동,쇠)’쪽으로 이동한 ‘밝’족의 일부라고 자부해 ‘쇠’(東)족이라고 차별화해서 호칭했다. 후대에 고대 중국지식인들은 ‘쇠’를 ‘濊’ ‘예’ ‘예’ ‘穢’ 등으로 음차 표기했다가, 후에 남방음으로 변음돼 ‘예’(Ye)로 발음하게 됐다. 

‘濊’족은 약 9000년 전∼6000년 전에 한반도에서 압록강을 건너서 또는 동해안을 따라 북상해 요하 동쪽으로 이동해서 지금의 요동반도·태자하·목단강·제2북류 송화강·두만강 하류 일대를 중심으로 널리 분산해서 정착한 신석기인들이었다. ‘예’족은 요하 이동지역에서 고한반도와 동일 기초의 문화를 가지면서도 요하 이동 새 정착지에서 독자적 신석기문화를 창조해 생활했다. 심양 부근의 신석기 ‘신락(新樂)문화’는 현재 발굴된 ‘예’족의 대표적 신석기문화 유적이라고 판단된다. ‘후한서’ 예전에서 “(예족은) 해마다 10월이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데, 주야로 술 마시고 노래 부르며 춤추니 이를 무천(舞天)이라 한다. 또 범(虎)을 신(神)으로 여겨 제사 지낸다”고 했다. ‘예’족은 환경의 영향을 받아 맹수의 왕인 ‘범’을 주토템으로, ‘새’를 부토템으로 정해 외경했던 것으로 해석된다. 예족은 부근에 풍부한 무순광산의 노천 철광과 노천 석탄광이 있으므로, 7200년 전의 신락문화 유적에서는 이미 석탄정제품과 적철광석 덩이가 출토됐다.

셋째 갈래는 고한반도 초기 신석기인(밝족) 일부가, 북위 약 40도 이북의 과거 동토였던 지역이 인간거주와 농경 가능지역이 되자, 약 9000년 전∼6000년 전에 여러 차례에 걸쳐 서북방이동을 감행해 지금의 요서 대릉하 및 시라무렌강 사이 평야지역·내몽고자치구 동부지역 일대에 정착한 ‘貊(박)’족이다. 그들은 새 환경에 적응해 토템을 ‘곰(熊)’으로 정하고, 고한반도에서 가져온 ‘새’는 부토템으로 했다. ‘후한서’에서도 “맥이(貊夷)는 웅이(熊夷)다”라고 했다. 이들은 자기들을 ‘밝’대족의 일부로서 서북방 이동을 감행했다고 ‘북밝족’으로 자부했는데, 후대에 고대 중국인들은 그들에게 한자로 ‘북발’(北發) 또는 단음으로 ‘貊’(박, 백, 맥)족이라 이름을 붙이고 ‘박’ ‘백’이라고 발음하다가 후에 남방 발음으로 변음돼 ‘맥’이라고 읽게 됐다. 

종래 일부 고대사학자가 ‘貊’(맥)을 ‘곰’과(科)의 짐승의 표기로 해석하고, 또 시베리아 또는 중앙아시아 또는 바이칼호 부근 북방 부족 ‘예’ ‘맥’족이 빈 공간의 고한반도에 이동해 들어왔다고 해석한 것은 지구 기후변화를 모르던 시기의 낡은 가설이다. 그러한 북방은 동토가 돼 당시 부족과 문명의 기원 형성지가 될 수 없었다. ‘맥’족은 원래 고한반도에서 ‘밝’족 일부가 서북방으로 이동해 요서지방 대릉하와 시라무렌강 유역에 정착해서 형성됐으며, ‘맥’족이 그곳에서 만든 신석기문화가 홍산문화(紅山文化)이고, 그 가장 발전된 중심이 우하량(牛河梁) 유적이다. 우하량 유적 제1지점에는 제단과 신(神)을 모시는 신성한 묘당(廟堂)이 있고, 그 묘당에서 진흙으로 만든 여신상과 곰의 조각상, 새의 날개 등이 부서진 상태로 출토됐다. 이 부족은 ‘여신’을 숭배하고 ‘곰’을 주토템과 ‘새’를 부토템으로 한 부족이었음이 증명됐다. 우하량 유적 제2지점에는 여신을 위해 제사하는 제단 다음에 족장급의 무덤들이 있는데, ‘족장’을 나타내는 맨 앞의 중앙 대묘의 유골은 여성이었다. 이 곰 토템 부족의 족장은 여성이었다.
 

홍산문화의 족장급 무덤들에서는 오늘날의 눈으로 보아도 당시 세계 최선진의 찬란한 옥기(玉器)들이 쏟아져 나왔다. 중국 일부 고고학자는 홍산문화의 찬란한 옥문화와 제의문화를 놓고 ‘요하문명’이라는 개념과 학설을 정립해, 심양 요령성 박물관에서 장기 전시하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고중국문명의 시작은 황하문명에서가 아니고 그보다 1000여 년 앞서 ‘요하문명’에서 시작된다고 주장하면서, 홍산문화의 창조자는 하(夏)를 건국한 황제(黃帝, 軒轅)의 ‘황제족’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홍산문화와 우하량 출토유물은 그들이 고한반도의 ‘밝’족과 동일한 ‘북밝’족이며 ‘맥’족임을 출토유물이 매우 명료하게 증명하고 있다. 신성한 묘당에서 여신상과 함께 맥족의 토템인 ‘곰’ 상과 ‘밝’족 및 ‘한’족의 토템인 ‘새’ 상이 출토되지 않았는가? 중국 문헌 역사 25왕조사의 어디에도 ‘황제족’이라는 족속은 아예 없었다. ‘곰’ 토템과 ‘새’ 부토템을 가진 것은 貊(맥, 박)족뿐인데, 그들은 고한반도 계통이며, 고조선에 통합된 부족의 일부였다.  


고중국은 명나라 초기 이전까지는 이 홍산문화 지역에 발도 들여놓은 적이 없다. 역대 고중국학자들은 그들이 모두 東夷(동이) 또는 北狄(북적)이어서 자기들의 조상이 아니라고 한결같이 강조, 주장하고 배척해 왔다. 홍산문화는 고한반도 밝족 계열인 맥족(貊族)의 신석기시대 문화이며, 후에 고조선문명의 선행요소의 일부로 고조선문명에 통합된 신석기문화다. ‘고조선문명’이 탄생한 것은 약 5000년 전에 앞에서 고찰한 ①‘한’족의 한강문화와 ②대동강문화 ③ ‘맥’족의 요하 이서 홍산문화(일부 중국학자의 ‘요하문명’)와 ④ ‘예’족의 요하 이동 신락문화 등 크게 4대 신석기문화가 하나로 통합되고 한 단계 지양·승화·발전돼서 탄생한 것이다. ‘고조선문명’을 큰 강과 연관해 표현하면, 신석기시대 ‘한강문화’ ‘대동강문화’ ‘요하문화’(중국 고고학자들의 ‘요하문명’)가 하나로 통합되고 한 단계 더 발전해 탄생한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동아시아 3대강(한강·대동강·요하) 문화가 밝족과 그 후예에 의해 하나로 통합되고 한 단계 더 발전돼 ‘고조선문명’이 탄생한 결정적 계기는 약 5000년 전에 고한반도에서 ‘한’ ‘맥’ ‘예’ 3부족이 결합해 동아시아 최초의 고대국가 ‘고조선’을 건국한 대변혁에 의거한 것이었다. 

중국 고고학자들과 사회과학원은 맥족의 요서 지방 ‘홍산문화’ 하나를 갖고서도 ‘요하문명’론을 정립하고 있는데, 그보다 선진한 고한반도 한강문화와 대동강문화, 그리고 요동의 예족문화와 요서의 맥족 홍산문화(요하문명)를 모두 통합해 한 단계 더 발전시킨 ‘고조선문명’을 인류 최초 독립문명의 하나로 정립하지 못할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다. (문화일보 7월 17일자 28면 4회 참조) 서울대 명예교수




 

 

[문화] 지식카페 문화일보 : 2019년 07월 17일(水)
동아시아 金문화의 원류… 三國금관 기원은 스키타이 아닌 고조선

■ 신용하의 인류 5대 ‘古朝鮮문명’- ④ 발달된 기술의 금문화와 철기문화

BC 25세기에 이미 도금기술 
청동·금 활용 金銅장식 제조 
金 양산하며 순금장식도 발전 

고조선 상징물 태양·새깃털 
삼국 금관에도 그대로 계승 
스키타이 기원설 틀렸단 증거 

BC 12세기엔 철기시대 열어 
철검·철거울·쇠뇌 잇단 출토 
BC 7세기엔 ‘강철’까지 진화 

고조선은 당대최고 금속기술 
같은 문명권인 부여의 철 장검 
日 전파돼 일본刀 원형 된 듯
 

고조선문명은 동아시아에서 최초로 ‘금(金)’ 문화를 창조해 발전시킨 문명이었다. 고조선문명의 금 문화는 BC 25세기에 금을 청동기에 도금한 금동기로 시작됐다. 평양시 강동군 순창리 글바위 5호무덤에서 출토된 BC 25세기(bp 4425년·bp는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법에 의거해 1950년을 기준으로 역산한 고고학의 연대)의 금동 귀걸이, 강동군 송석리 문성당 8호무덤에서 출토된 BC 24세기(bp 4384년)의 금동 귀걸이, 강동군 순창리 글바위 2호무덤에서 출토된 BC 24세기(bp 4376년)의 금동 귀걸이 등이 이러한 금동 장식물이었다. 

고조선의 수도 지역에서는 적어도 BC 25∼BC 24세기에는 왕족과 귀족들에 의해 금동 귀걸이가 제조돼 사용됐음을 확인할 수 있다. 금동은 청동과 순금을 전제로 하고 후에 도금하는 것이므로 청동과 순금 기술보다 한 단계 더 높은 과학 기술을 요했다. 고조선문명에서 금은 매우 일찍 발견돼 사용됐으나 순금은 매우 귀중하고 소량이어서, BC 25세기에 이르러 도금기술이 발명되자 청동기에 금을 도금한 ‘금동’(金銅) 장식품 형태로 금 문화가 시작됐다. 

자연과학자들이 주목한 대로, 글바위 5호 무덤에서 나온 금동 귀걸이는 과학기술상 아말감법으로 순동에 금을 도금한 것이었고, 글바위 2호 무덤에서 나온 금동 귀걸이는 판금법으로 순동에 순금박판을 씌운 것으로서, 이러한 금속공예 기술이 이미 BC 25∼BC 24세기 고조선에서 사용됐다. 한반도의 강들, 특히 고조선 수도 아사달이 위치한 대동강 유역에는 사금이 매우 많았으며, 운산 금광 부존에서 볼 수 있듯이 금광이 풍부했다. 고조선이 건국된 한반도 자체가 금이 많이 나는 지역으로 고대 중국인에게도 알려졌었다. 이미 신석기시대 사람들까지도 강가에서 사금 채집과 판금 제작을 시작했다고 추정된다. 강동군 강동읍에는 한말∼일제강점기 초기까지 ‘생금동’(生金洞·금이 나는 고을)이라는 이름을 가진 큰 마을이 남아 있었다.

‘순금’의 경우를 보면, 고조선 수도지역에서 BC 12세기의 ‘순금’으로 제조한 장식 패물들로 순금 귀걸이와 순금 목걸이도 출토됐다. 이것은 순금 장식품이 이때 처음 제조된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기술적으로 순금 장식물 제조가 금동 장식물 제조보다 쉽기 때문에, 금동 귀걸이를 제조한 BC 25∼BC 24세기에 순금 귀걸이, 순금 목걸이도 동시에 제조할 수 있었지만, 아직 발굴되지 않았을 수도 있고, 순금이 매우 값비싼 것이어서 재료를 절약하기 위해 순금 장식물을 제작했다가도 녹여서 금동 장식물에 재활용했을 수도 있다. 순금 패물이 BC 12세기경부터 다수 나오는 배경은 이 시기부터 금광 채굴에 의한 금의 대량생산이 가능했던 데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고조선문명의 이른 시기의 금 문화는 고조선 후국 부여를 비롯해 전 문명권에 전파됐다. 부여의 풍속에 대해 ‘삼국지’ 위서 부여전은 “부여에서는 아름다운 구슬이 산출되는데 크기가 대추만 하다”고 했고, “나라 밖에 나갈 때는 비단옷·수놓은 옷·모직 옷을 즐겨 입고, 대인(大人)은 그 위에다 여우·살쾡이·원숭이·희거나 검은 담비 가죽으로 만든 갓옷을 입으며, 또 금·은으로 모자를 장식했다”고 서술, 모자의 금·은 장식이 관습이었음을 기록했다. 

이 기록을 증명하는 유적·유물이 1985년에 발굴됐다. 부여족 유적인 길림성 유수노하심(楡樹老河深) 묘지 유적에서 화려한 마노 구슬 목걸이와 금귀걸이 장식이 출토된 것이다. 목걸이는 마노 구슬 266개를 줄에 꿰고, 6돈의 금으로 만든 네모 모양의 장식을 달아 길이가 98㎝나 되는 화려한 것이었다. 금귀걸이도 <사진 2>에서처럼 장식 금잎을 많이 붙인, 매우 화려한 것이었다. 부여에서는 금 문화와 함께 금동 문화도 발전했다. 널리 알려진, 길림 동단산(東團山)에서 출토된 부여인의 청동 가면도 금도금한 금동 가면이었다. 

부여·고구려·백제·신라·가야의 찬란한 금 문화와 금동 문화는 멀리 스키타이 금 문화와의 교류 훨씬 이전에 이미 고조선에서 먼저 계승·발전된 것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고조선의 이러한 금·금동 문화를 직접 계승해 고구려·백제·신라·가야에서는 금관(金冠) 문화가 초기부터 발전했다. 고구려에서는 초대 동명왕(재위 BC 37∼BC 19년) 때부터 금관을 사용했다. 지금의 평양에 있는 고구려 동명왕릉은 일제강점기인 1940년에 일본인들이 도굴, 부장품들을 반출해 갔다. 광복 후 북한 고고학자들이 발굴조사를 한 결과 ‘금제관식(金製冠飾)’들이 109점이나 출토됐다. 그 다수가 금관에 매다는 금 및 금동제 날개 장식들이어서, 동명왕이 금관을 의례용으로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 금관은 최근 몇 개의 실재가 보고됐다. 신라 금관과 백제·가야 금관은 이미 잘 알려져서 더 설명이 필요치 않다. 

필자가 여기서 구태여 고구려·백제·신라·가야의 금관까지 거론한 것은 이 금관들의 원류가 고조선문명의 금 문화임을 알지 못하고, 학계 일부에서 스키타이 기원설 또는 시베리아 기원설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금관은 왕권의 상징이기 때문에 반드시 ‘사상’이 상징화돼 있다. 고조선문명에서는 태양과 단군(하느님)을 숭배했고, 하늘을 나는 새를 토템으로 상징화했다. 그러므로 고조선 사람들은 평민까지도 모자에 새 깃털을 꽂았었다. (농경문 청동기 참조) 

고구려·백제·신라·가야의 금관들이 공통적으로 고조선문명의 금 문화·금관을 직접 계승한 자생적인 것임을 증명하는 요소는 다수 있다. 예컨대 ①금관의 양 옆면에는 고조선의 도안 모형인 새 깃털을 불꽃 등과 함께 다양하게 조합·변형하면서 표시했다는 점 ②금관의 앞면 꼭지 또는 중앙 정면에 넣은 태양을 상징하는 도안 ③금관의 테 둘레에 있는 몇 줄의 점선 ④고조선의 새 깃털과 불꽃 문양을 한 세움 장식 ⑤금관에 동반된 금귀걸이가 고조선의 금동 귀걸이를 직접 계승한 점 ⑥금관의 곡옥 달개가 고조선의 곡옥을 직접 계승한 점 등이 주목된다. 

필자는 고조선문명 후예들의 이러한 금관들의 자생성과 특징은 특히 ①정면 중앙 또는 상단의 각종 원형 해(태양) 상징과 ② 옆면(귀 위)의 각종 새(鳥) 깃털 도안과 불꽃에 명백하게 표현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고조선문명의 태양숭배와 새 토템의 발전된 사상을 왕관에 표현한 것이라고 본다. 이것은 고조선 전통이지 스키타이나 시베리아와는 상관이 없다. 학계 일부에서 한국 고대 왕관의 북방기원설을 제시하면서 왕관 앞·옆면의 도안을 기원후 5세기 스키타이 금 문화와의 교류 과정에서 얻은 나무와 나뭇가지에서 구했다는 시베리아 기원설을 주장하는 것은 ‘국왕이 사용하는 귀중한 금관’의 사상성과 전통 계승성을 파악하지 못한 빗나간 견해라고 본다. 고구려·백제·신라·가야의 금관은 스키타이 금 문화와 교류하기 훨씬 이전에 고조선문명 금 문화를 직접 계승한 것이다. 

이런 찬란한 금관은 고조선문명의 후예들만이 썼다. 막강한 권력과 권위를 가졌던 이웃 중국의 역대 왕과 황제들도 이런 금관을 쓰지 못했다. 일본의 어떤 역대 왕들도 이런 금관을 쓰지 못했다. 오직 고조선문명의 후예들만이 이런 금관을 썼다.

또한 고조선문명은 동방에서 가장 앞서서 BC 12세기에 철기시대를 열기 시작했다.

고조선문명권은 두만강 유역 함경북도 무산(茂山) 지역과 만주 무순(撫順) 지역에 세계 최대 철광산 중 하나가 부존돼 있을 뿐 아니라, 한반도 만주지역 도처에 철광석이 부존돼 있는, 혜택받은 지역이었다. 특히 무순 지역엔 노천철광(露天鐵鑛)도 있어서, 이미 BC 70∼BC 49세기 ‘예’족의 신석기시대 신락(新樂) 문화 유적에서는 족장의 집 자리에서 석탄 정제품과 함께 모아놓은 적철광석(赤鐵鑛石)들이 출토되기도 했다.

현재 철기 발굴의 초기 단계에서는 우선 고조선 수도권 지역에서 주목되는 철기 출토품으로서 평양시 강동군 송석리 1호 석관무덤에서 철거울(鐵鏡)이 인골과 함께 출토됐는데, 인골의 연대가 BC 12세기로 측정됐다. 또 강동군 향목리 1호 고인돌에서 철창과 쇠줄, 철촉이 출토됐는데 BC 7세기로 측정됐다. 이 지역에서는 연속되는 그 후 편년의 철검(鐵劍·쇠장검), 철칼, 철제 기계활인 쇠뇌(鐵弩·석궁)들이 출토됐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송석리의 BC 12세기 철거울이 순도가 높고 단조해 제작한 쇠거울이라는 사실이다. 이것은 철기 생산이 이미 시작됐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향목리의 BC 7세기 철창·쇠줄·철촉은 ‘선철’ 단계를 넘어 이미 ‘강철’ 단계로 들어서기 시작한 순도의 것이어서, 제철기술이 제강기술 단계에 이르렀음을 알려준다. BC 7세기에 강철이 생산됐다는 사실은, 해면철과 선철 생산은 훨씬 전에 이뤄졌으며 늦어도 BC 7세기에는 철제 무기와 농구 생산이 가능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한편 만주 무순 부근 지역 유수노하심 중층유적의 고분 129좌에서 무려 540여 점의 철기가 출토됐는데, BC 331년경의 것으로 측정됐다. 한편 태래평양(泰來平洋) 묘지의 철기는 BC 412년경, 조동동팔리(肇東東八裏) 묘지의 철기는 교정치가 BC 481년의 것으로 보고됐다. 또 무산 철광산을 배경으로 한 함경북도 무산군 범의구석에서 출토된 쇠도끼 2개 가운데 1개는 BC 7∼BC 5세기 것이었고, 다른 1개는 BC 4∼BC 3세기 것이었다. 평안북도 영변군 세죽리 출토 쇠도끼·쇠과·쇠끌·쇠칼·쇠낫 등의 측정연대는 BC 4∼BC 3세기였다. 평양시 토성동 목곽무덤에서도 장검·쇠칼·극·활촉 등 철기가 세형동검·세형동과 등과 함께 출토됐는데, BC 3세기경의 것으로 측정됐다.

고조선문명은 종래의 청동 무기를 철제 무기로 바꾸기 시작했다. 철제 장검과 단검, 비수, 철창, 철제 화살촉과 쇠뇌, 철제 갑옷이 출현해 발전하기 시작했다. 고조선문명의 철기 문화에서 철검이 출현해 세형동검과 함께 사용됐다. 고조선문명의 부여 철검이 길림성 유수노하심 유적에서 다수 발굴됐는데(<사진 4> 참조), 우수한 ‘장검’이었다. 부여식 장검은 충북 청주시 오송읍 정방리 토광묘에서도 1개 출토됐는데, 칼은 철이고 자루는 동으로 제작해 조립한 ‘동병철검’(銅柄鐵劒)이었다. 제주 용담리 유적에서도 85㎝의 부여식 장검 2자루가 출토됐다.  

부여식 철제 장검은 부여족 무사 집단의 이동에 따라 가야·탐라 지역에 전파됐으며, 말과 함께 일본 열도에도 전파된 것으로 해석된다. 필자는 부여 장검이 일본에 건너가 초기에는 왕과 장수의 신분재와 ‘쓰루기’라는 제사용 철검으로 사용되다가, 무사의 ‘일본도’로 발전하게 된 것이라고 본다. 즉, 일본도의 기원은 부여 장검이라고 본다.

이상의 철기 출토품과 고조선문명권 각지에 산재한 철기 출토품을 종합해 볼 때, 고조선의 철기시대는 약 BC 12세기부터 세형동검 출현 직후에 동반해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 또한, 강철제 농구와 무기 생산은 약 7세기부터 시작된 것으로 관찰된다.
 

일본 학계와 한국 학계 일부에서는 과거 일제 식민주의 사관의 설명과 유사하게 BC 3세기 초엽 연(燕)의 진개(秦開)가 고조선을 침공해 1000여 리의 고조선 영토를 빼앗은 후 철이 고조선에 도입된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연의 철기 문화에 고조선이 패전한 것으로 추측한 것이었다. 그러나 BC 12∼BC 3세기의 고조선문명권 안에서 자생적으로 제조된 각종 우수한 철기들이 다수 출토됐으므로, 연의 철기 문화에서 고조선의 철이 전파돼 들어왔다는 가설은 허구에 불과했음이 증명됐다.  


일찍이 단재 신채호 선생은 반대로 연의 진개가 고조선 후국 동호(신조선)에 인질로 오자 동호왕이 진개를 과신해 군사기밀까지 모두 알게 해 주었기 때문에, 진개가 고조선의 철기·철제 무기를 포함한 선진문물을 배우고 군사상태를 잘 파악해 귀국한 다음 고조선(동호 지역)을 기습해 패전시킨 것으로 설명했다. (‘고조선상고문화사’) 고대 중국인들은 동북(만주) 지역 철물이 중원 지역보다 더 발전해서, 동북에서 중원으로 들어왔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고조선문명의 큰 특징 중 하나는 청동·금동·금·철기를 망라해 당시 최고 수준의 찬란한 금속기술과 금속문화에 있었다. 이것은 고조선문명의 후예에게 계승돼 중앙아시아에 들어가 지배한 투르크족, 유럽에 들어가 라인강 양안을 거의 200년 동안이나 통치한 아발(大檀)족 모두 원래 우수한 ‘대장장이’들이었다. 본토에 남은 고조선문명의 후예들도 고조선·고구려·신라의 쇠뇌, 부여의 철장검, 신라의 금관과 종, 백제의 금동대향로, 가야의 갑옷·투구·장검, 고려의 금속활자 등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세계 최고, 최선진 금속문화의 전통을 계승했다. (문화일보 6월 26일자 27면 3회 참조)
서울대 명예교수



 

 

[문화] 지식카페 문화일보 : 2019년 06월 26일(水)
대동강유역서 출토된 세밀한 청동공예품… 中문명보다 1000년 앞서

■ 신용하의 인류 5대 ‘古朝鮮문명’ - ③ 동아시아 최초 청동기문화

한반도 서북 평남 성천군서 
BC31세기 첫 청동조각 발견 
용곡리지역 비파형 청동창끝 
고조선 성립 BC26세기 추정 

특유의 청동거울 ‘다뉴조문경’ 
세계유일 조립식 ‘비파형동검’ 
아름다운 기하학도안 ‘팔주령’ 
한반도·요동·요서 고루 분포 

광석 녹여 합금하는 청동기술 
문명 고도화의 중요한 지표 
中, 빨라야 BC20~BC16세기 
日은 BC4세기 들어서야 개막
 

인류는 신석기 시대 후기·말기에 자연동·자연금·운철(隕鐵: 운석 속의 타고 남은 철) 등 자연 광석을 채집·단조해서 금속을 도구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자연 광석들을 녹여 ‘합금’을 만들면 더 견고한 도구를 제작할 수 있음을 알게 됐다. ‘합금’은 고도의 과학기술의 응용을 알려주기 때문에, 문명 형성의 중요한 지표가 된다. 인류가 최초의 합금을 제조한 부문은 동(순동·자연동(自然銅))과 주석과 아연 등을 녹여 합금해서 제조한 ‘청동기’의 생산이었다. 청동기의 생산과 청동기 시대의 시작은 인류가 과학적 문명의 시대에 들어섰음을 알리는 것이었다.  

고조선문명권에서 신석기 농업혁명이 시작된 것은 고한반도 중부지방 ‘한강문화’였지만, 최초의 청동 유물이 나온 것은 BC 31세기경 청동합금 조각이 출토된 ‘대동강문화’였다. 대동강 중상류인 평안남도 성천군 용산 무덤에서 5069년 전(1995년 기준 BC 3074년)의 것으로 측정된 청동(靑銅) 조각들이 팽이형 토기, 돌도끼, 돌도끼 조각과 함께 출토됐다. 이것은 청동 무기나 도구를 제조하기 직전의 준비된 중간재 청동 조각이지만, 이미 자연동(銅)과 석(錫)과 연(鉛)의 세 광석을 합금시켜 제조한 합금 조각이기 때문에, 청동기 시대가 한반도 서북지방에서는 BC 31세기에 시작되고 있었음을 강력히 시사하는 것이다.  

이어서 고조선(단군조선) 성립기인 기원전 26세기의 것으로 측정된 비파형 청동 창끝이 강동군 용곡리 5호 고인돌 무덤에서 나왔다. 기원전 26세기(4593±167년 bp)의 것으로 측정된 청동 단추와 청동 창끝도 발굴됐다. 또한 상원 장리에서 BC 3000년기 전반기의 큰 규모 고인돌(오덕형) 무덤의 무덤 칸에서 청동 교예 장식품 1개, 청동 방울종 2개, 청동 끌 1개를 비롯한 청동 제품들이 나왔다. BC 26세기의 유적·유물로 측정됐다. 이 가운데서 청동 2인 교예 장식품은 서로 어깨를 끼고 발목을 합친 2인의 교예사가 각각 1개씩의 둥근 고리(環)를 들고 또 다른 2개의 둥근 고리 위에 올라서 재주를 부리는 형상을 제작한 것이다. 옷의 몸통과 팔 소매, 바지에 고조선 문명 특유의 굵은 기하학적 번개무늬가 돋쳐 있고, 얼굴에는 입·코·눈·귀가 잘 묘사돼 있는, 작지만 매우 숙련된 기술의 우수한 청동 공예품이다(<그림 1-3> 참조). 

또한 청동 방울종은 원추형의 종처럼 아가리가 넓고 꼭대기가 좁은 형태로, 울림통·고리·추로 이뤄진 작은 방울종이다. 역시 고조선 문명 특유의 굵은 기하학적 번개무늬가 돋친 것으로서 숙련된 기술로 어려운 구조를 만든, 매우 뛰어난 청동 공예품이다(<그림 1-4> 참조). 고조선 문명의 대동강문화에서 BC 31세기 청동기 시대의 시작은 동아시아 최초다. BC 31세기의 청동 합금 조각이 아직 청동기는 아니라고 불안해하는 경우에는 BC 26세기의 비파형 청동 창끝 2점, 청동단추, 청동 교예장식품, 청동 방울종 2점, 청동 끌, BC 25세기∼BC 24세기의 금동귀고리 3점 등 청동기 유물이 발굴돼 시계열이 완벽하게 형성됐으므로 이때 청동기 시대가 시작됐음은 명백한 것이다. 고조선은 BC 31세기∼BC 26세기에 초기 청동기 시대로 진입했다.  

요하 서편 홍산문화의 우하량 유적에서도 BC 30세기경의 순동(純銅)귀고리 1점과 거푸집이 발굴됐다. 이를 두고 중국 고고학자 일부는 홍산문화를 금석병용기로 설정하고 있으나, 이것은 자연동이지 아직 주석 및 아연과의 ‘합금(合金)’이 아니므로 청동기라고 볼 수 없다. 동아시아에서는 고조선 문명의 대동강문화에서 BC 31세기∼BC 26세기에 처음으로 청동기 시대가 성립돼 주위로 전파된 것이다. 서방 수메르 문명에서는 BC 33세기∼BC 30세기의 청동기 유물이 출토되기 시작해 이 시기부터 청동기 시대에 들어서게 됐다고 보고 있다. 

고조선문명 청동기 문화의 특징적 유물 중 하나는 청동거울인 다뉴조문경(多粗紋鏡)과 다뉴세문경(多細紋鏡)이다. 보통 뒷면 무늬그림의 줄의 섬세한 정도에 따라 다뉴조문경과 다뉴세문경으로 구분한다. 고조선식 청동거울은 모두가 둥근 태양 모양에, 뒷면에 붙은 꼭지가 2∼3개의 ‘다뉴’(多, 여러 꼭지)이고 중심부의 약간 위에 꼭지를 붙여 제조돼 있다. 무늬는 ①햇빛(태양광선) 무늬와 ②번개 무늬가 대종을 이루고 있다. 이에 비해 그 훨씬 후의 고중국식 청동거울은 둥글거나 사각형 모양에 뒷면에 붙인 꼭지가 중심부에 한 개뿐인 단뉴(單, 한 개 꼭지)로 제조돼 있으며, 무늬는 각종 동식물 등 구상물이 대종을 이루고 있다.  

고조선문명의 다뉴조문경과 다뉴세문경의 완전하게 둥근 형태는 해(태양)를 상징한다고 본다. 고조선 사람들은 천손의식을 갖고 하늘과 해(태양)를 숭배했으므로, 청동거울을 항상 해와 같이 둥근 모양으로 만들고, 뒷면의 무늬는 햇빛(태양광선)을 기하학적으로 형상화했다. 고조선문명에서 다뉴조문경과 다뉴세문경의 뒷면에 동심원을 1∼3개 그리고 햇빛을 삼각형 또는 별무늬 모양으로 나눠 그린 것도 사실은 모두 햇빛(태양광선)의 기하학적 무늬다. 종래 이것을 별무늬 또는 삼각무늬, 톱니무늬로 이름 붙여 설명해 온 것은 해(태양) 숭배 사상과의 관련을 간과한 정확하지 않은 설명이라고 본다.(<그림 2-1> 참조) 

이 고조선 다뉴조문경의 지역적 발굴 분포를 큰 강을 경계로 가정해 지도에 옮겨보면 <그림 3>과 같다. <그림 3>에서도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고조선 다뉴조문경은 한반도 전역과 만주의 요동·요서 및 연해주지역에도 분포돼 있다.

고조선문명의 청동기문화 유물들 가운데 독특한 청동기로 ‘비파형동검’이 있다. 이 청동단검은 그 모양새가 고대 악기 비파(琵琶)와 비슷한 곡선으로 도안돼 있으므로 붙여진 명칭이다. 고조선문명의 비파형동검은 고중국의 직선으로 도안된 동검이나 또는 북방 오르도스식 구부러진 도안의 동검과는 확연히 모양새가 달라서 누구나 쉽게 구별할 수 있다. 

고조선 비파형동검의 큰 특징으로는 첫째, 비파형 청동단검은 중간 부분의 양날에 돌기를 만들고, 그 돌기를 중심으로 검 끝과 검 아랫부분을 부드러운 곡선 모양새로 만들어서 마치 고대 악기 비파 모양처럼 도안했다는 점이다. 전 세계 청동검 양식에서 비파형 도안은 오직 고조선 청동단검과 비파형 청동 창끝만 가진 매우 독특한 도안이다.

둘째, 비파형 청동단검은 검몸과 검자루를 별도로 주조해 조립하는 세계 유일의 ‘조립식’ 청동단검이다. 두 개 부품을 별도로 주조해 조립하는 것이므로 청동기 주조 기술이 상당히 높은 수준에 도달해야 제작할 수 있는 동검이다.

셋째, 비파형 청동단검은 검몸의 한가운데 ‘등대’가 검의 거의 끝에서부터 검자루 이음매까지 세로로 곧게 만들어져 있다. 이것은 동검을 견고하게 하면서 조립을 정확히 하기 위한 것이다.(<그림 2-3> 참조) 주목할 것은 고조선의 비파형 청동단검은 ①한반도 ②요동 ③요서 지역에서 출토되는 비파형동검의 형태와 구조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사실이다. 

고조선문명의 세형동검은 철기 시대의 동검이다. 고조선에서 BC 12세기경에 철기 시대가 시작돼 철제무기, 특히 철 장검과 철 단검이 점차 비파형 청동단검을 대체하기 시작하자, 이와 관련해 비파형 청동단검에도 아름다운 곡선의 실용적 직선으로의 변화가 일어나서 세형동검이 출현·발전했다. 세형동검도 조립식 동검이다.(<그림 2-4> 참조)

비파형 청동단검과 병행해 성립한 청동무기로 ‘비파형 청동 창끝’이 있다. 비파형 청동 창끝은 손잡이에 긴 나무막대를 끼워 긴 창으로 사용한 것인데, 나무막대는 삭아 없어지고 청동 창끝(銅矛)만 출토된다. 가장 오래된 출토 비파형 창끝은 덕천 남양유적 집자리에서 나온 BC 26세기의 비파형 창끝이다. 모든 금속문명권에서 청동 창끝을 사용했으나 이러한 비파형 청동 창끝은 고조선문명에만 있었고, 이웃 고중국 계열에는 없었던, 고조선의 독특한 청동무기다. 고조선문명에서 청동도끼도 많이 출토되는데, 부드러운 곡선을 넣어 도안한 ‘부채꼴’(扇形) 청동도끼다. 이것은 이웃 고중국의 직선도안 ‘책꼴’(冊形) 청동도끼와 쉽게 구별된다. 

고조선문명에서는 각종 의례·의식에서 의기(儀器)를 청동기로 제조해 사용했다. 고조선에서는 특히 제천의식을 담당하기 위해 국읍(國邑)에는 천군(天君)이라는 담당자를 두고 그의 제천 제사 지역을 소도(蘇塗)라고 해 신성시했다. 소도는 단군신앙을 담당한 성스러운 곳이었으므로, 여기서 고조선 시대에 사용한 제의용 청동기들은 단군신(檀君神) 숭배와 관련이 있다고 해석된다. 
 

여기서 사용한 청동의기들은 방울종과 방패형 의기가 대종을 이루고 있다. 청동방울종은 동령(銅鈴: 작은 청동 방울종)과 동탁(銅鐸: 큰 청동 방울종)이 발굴되고 있다. 동령 가운데 팔주령(八珠鈴)은(<그림 2-2>) 8각형 구도의 중앙 몸체의 중심에 1개 태양(해)과 태양광선(햇빛살)을 도안하고 8각의 끝에는 동그란 종방울을 달아 두 개 타래머리무늬(雙頭渦紋)를 조각한 청동기다. 팔주령은 단군신앙의 소도의 제의기이므로, 중앙의 태양은 단군, 그 둘레의 원(圓)은 단군의 밝달조선의 상징이고, 8각 끝의 8방의 작은 종방울들은 단군의 8방의 후국을 상징하는 8개의 작은 태양으로 해석된다. 이러한 고조선문명의 청동기는 당시 세계 최고 기술과 아름다운 기하학적 도안의 예술품으로도 세계 정상의 것이었다. 

고중국의 청동기는 고조선 후국 고죽국 지역 당산(唐山)에서 출토된 BC 20세기의 홍동(紅銅) 조각 2점과 용산문화 유적에서 출토된 BC 18세기의 작은 청동 추가 있다. 상(商) 시대의 하남성 이리두문화 유적에서 나온 삼족기 청동 술잔, 향로, 청동 칼, 추, 끌은 BC 16세기∼BC 13세기의 것이었다. 중국 고고학계는 일찍 잡아도 중국에서는 BC 20세기∼BC 16세기 초기 청동기 시대가 시작됐다고 설명했다. 고조선 아사달지역의 BC 31세기∼BC 26세기보다 약 1000년 뒤의 일이다. 일본 청동기 시대의 개막은 야요이 시대(BC 4세기 중엽∼AD 3세기 후반)이므로 다시 이보다 훨씬 후의 일이다. 


고조선문명에서 최초의 청동기가 나왔다는 사실이 한자(漢字) 만들기에도 반영돼 있다. ‘鐵’(철)의 옛 글자(상·서주 시대)는 ‘철’(철, 쇠, 금속)이었다. ‘철’(철)은 ‘동이의 금속’이라는 뜻이다. 즉 고대 중국 지식인들은 동·금·철 등 금속이 동이(고조선)에서 중국으로 들어온 것임을 당시에는 잘 알고 있었다.

유럽 고고학자들은 1928년 상(商)의 청동기(BC 16세기∼BC 13세기)를 발견하고 경탄해 이때부터 ‘황하(고중국)문명’의 개념을 정립하기 시작했다. 고조선이 그보다 1000년이나 앞서 찬란한 청동기를 만들고, 상나라 사람 자체도 고조선의 청동기술을 갖고 간 고조선 이주민이었는데, 우리가 ‘고조선문명’론을 정립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문화일보 6월 5일자 29면 2회 참조)   서울대 명예교수


 


[문화] 지식카페 문화일보 : 2019년 06월 05일(水)
1만2500년前 한강유역서… 인류 최초 ‘쌀·콩·깨 재배’ 시작됐다
▲  <그림 1> 한강 유역 출토 신석기 벼·탄화미.
▲  <그림 2> 한강문화의 신석기시대 재배 농경의 발상지역.
▲  <그림 3> 옥천 남곡리 1호 농경기념 선돌(왼쪽)과 수북리 선돌.
▲  <그림 4> 단립벼의 재배 기원지와 보급 경로도.


■ 신용하의 인류 5대 ‘古朝鮮문명’ - ② 농업혁명과 기마문화의 형성

古한반도 중부는 인구밀집지역 
사냥·채집만으로는 ‘식량 부족’ 

남한강·금강유역 경작에 적합 
‘밥+콩장+깨양념’ 食문화 형성 
밀 재배한 서양은 빵문화 생겨 

벼, 기원전 28세기경에 中으로 
기원전 7 ~ 5세기엔 日에 전파 

부여, 동방 첫 ‘말 가축화’ 성공 
전체 고조선 문명에 목축 전파 
앞선 기마문화 덕에 영토 넓혀
 

약 1만2000년 전(일설 1만2500년 전) 지구 기후가 오늘날처럼 온난화되자, 고(古) 한반도 구석기인들은 동굴에서 나와 인접 강변과 해안에 ‘움막’을 짓고, ‘마제석기(磨製石器)’와 토기를 사용하면서 새로운 신석기 시대를 열었다. 고한반도 중부 초기 신석기인 인구밀집 지역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식료 부족’이었다. 사냥·어로·채집만으로는 과잉인구의 부양이 불가능했다. 식료 부족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우선 야생식물의 종자와 뿌리를 채용해 식료 생산을 위한 ‘농업경작’을 시작하는 것이었다. 고한반도 중부 제1동굴지역의 동굴 밖 최근접한 남한강과 금강 상류 유역은 ①석회암 동굴 최근접 하천 유역에 비옥한 충적층 평야가 있었고 ②세계적으로 식물 종류가 매우 많아 온대작물 농업경작의 발생에 매우 적합한 지역이었다. 이러한 유리한 조건에서 식료 부족 문제의 대책으로 ‘남한강’ 유역과 ‘금강 상류’의 저지대에서는 실제로 신석기 시대의 시작과 동시에 1만2000년 전쯤부터 오곡, 특히 단립벼의 재배가 시작됐다.

남한강 유역과 금강 상류 사이의 충북 청원군 소로리에서 볍씨 18톨이 충북대 박물관(관장 이융조)에 의해 발굴됐는데, 농과학자들의 조사 결과 초기 재배벼임이 확인됐다. 서울대 기초과학연구소에서 소로리 볍씨가 포함된 토탄층 윗부분을 탄소측정한 결과 1만2500년 전으로 측정됐다. 이 소로리 단립벼 볍씨와 토탄층을 분리해 볍씨 8톨을 미국 애리조나대 고고연구소에서 탄소측정한 결과 토탄의 연대가 1만2552±90년 전, 고대벼가 1만2500±150년 전으로 측정돼 나왔다.  

이 사실은 한반도의 남한강 유역과 금강 상류 유역에서는 신석기 시대가 시작되자마자 즉시 ‘단립벼’의 경작이 시도됐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그 후 <그림 1>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한강·금강 유역을 비롯해 고한반도의 크고 작은 강변에서는 강 하류에까지 곡물 출토 시계열이 성립되고 5000년 전쯤까지 재배 공간이 대폭 넓어지면서 단립벼·콩·팥·밀·보리·조·기장·수수·깨 등 곡물이 출토되고 있다. 신석기 시대 고한반도 ‘단립벼’ 경작의 발생 기원 지역을 지도에서 그려 보면 <그림 2>와 같다. 이 지역에서 동시기에 오곡이 농기구들과 동반 출토되므로, 이 지역이 동방 신석기 농업혁명의 기원지로 판단된다.  

국립문화재연구소가 고한반도 출토 신석기 시대 토기 몇 점에 박힌 식물들의 압흔을 탄소측정했더니, 신석기 시대 ‘조기’ ‘전기’부터 조·기장·콩·들깨를 재배해 식용하고 있었다. 특히 주목할 것은 ‘콩’ ‘콩과 작물’이 신석기 초기부터 재배됐다는 사실이다.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오산리 출토 신석기 초기 토기에 박힌 ‘콩’과 압흔 토기에 부착된 탄화물을 연대측정한 결과 절대연대 7175∼7160년 전과 절대연대 7000∼6940년 전으로 측정돼 나왔다. 즉 고한반도에서는 콩과 팥이 기원전 53세기(7175∼7160년 전)경에 이미 재배됐음이 확인된다. 이것은 인류 문명사에서 획기적인 것이다. 중국에는 ‘콩’이 기원전 7세기 고조선 후국 산융에서 도입됐다. 서양에는 ‘콩’이 18세기 초엽 동방에서 들어왔다고 기록돼 있다.  

출토 곡물들로 종합해 보면, 고한반도의 신석기 시대 한강 문화에서는 약 1만2000년 전부터 신석기 농업혁명이 시작돼 약 5000년 전까지 단립벼·조·기장·콩·팥·수수·밀·보리·깨(들깨와 참깨) 등의 농업경작이 크게 발전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중에서 고한반도 신석기 농업혁명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것은 ‘단립벼’와 ‘콩·팥’과 ‘깨’의 경작이다.  

당시 고한반도 신석기인들은 첫 ‘농업경작’의 큰 성공을 스스로 인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금강 상류에 신석기 시대 ‘농업혁명(농경 성공) 기념 선돌’이 2개나 남아 있다. 충북 옥천군 남곡리 개미재에 밭고랑을 새긴 1개의 선돌(남곡리 1호 선돌)과, 수북리 동정마을에 있는 다른 1개의 선돌(수북리 선돌)이 그것이다.(<그림 3> 참조) 문자가 없던 시대이므로, 농업혁명(농업경작)의 위대한 업적을 ‘논밭고랑’ 그림으로 표시한 기념비 선돌이었다. 대전 괴정동 출토 ‘방패형 농경문 청동기’(약 2600년 전)에 새겨진 밭 가는 농부 그림을 보면, 이 선돌의 줄그림이 논밭고랑임을 확인할 수 있다.

고한반도의 중부에서 시작된 신석기 농업혁명(농업경작)은 모든 한반도 강변과 해안에 주민 이동과 함께 전파됐다. 농업경작은 태양의 ‘햇빛’과 ‘따뜻한 온도’의 은혜에 직결돼 있으므로, 고한반도 초기 신석기인들은 매우 일찍 ‘태양(해) 숭배’ 사상을 더욱 갖게 됐다. 그들은 ‘태양’(해)이 제공하는 ‘밝음’(광명·光明)을 숭상했으며, ‘태양’이 있는 ‘하늘’을 숭배하게 됐다. 그들은 또한 족장과 자기들을 ‘태양’의 후손, 즉 하늘(天)의 후손으로 생각해 ‘천손의식’을 갖게 됐다. 또한 그들은 태양이 있는 하늘을 나는 ‘새’를 토템으로 애경했다. 후에 그들과 그 후예들은 자신들을 태양의 ‘밝음’을 의미한 “‘밝’족”으로 자처했고, 고대 중국인들은 이를 차음해 ‘발인(發人)’이라고 표기했다.

인류 문명사에서 최초의 신석기 농업혁명은 두 곳이 구심지가 돼 일어났다. 그 하나가 약 1만2000년 전부터 고한반도 중부 남한강과 금강 상류 지역에서 고한반도 초기 신석기인인 ‘밝족’이 단립벼(쌀)·콩·수수·조·기장·깨 등의 농경에 성공해 주변 지역으로 전파한 농업혁명이었다. 다른 하나는 약 1만1500년 전에 비옥한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유역에서 수메르족이 밀·보리 농경에 성공해 주변 지역에 전파한 농업혁명이다. 실증적으로 발굴 보고서들을 읽어 보면, 단립벼 재배는 고한반도에서 기원해 기원전 28세기경에 중국 산둥반도와 중국 동해안 일대로 전파됐다. 남쪽 일본 열도로는 기원전 7∼5세기경 한반도에서 일본 규슈 지방 등으로 전파됐다(<그림 4> 참조).

중국 학자들도 농업경작을 고조선(이때는 동이(東夷)족으로 표현)에서 도입했음을 기록들에 남겼다. 중국에 농경을 처음 가르쳐 준 것은 동이족인 신농(神農)족이며(‘사기(史記)’ ‘부사년(傅斯年)’), 역시 동이족인 백익(伯益)이 쌀 농경과 목축을 가져와 가르쳐 줬다(‘사기’). 동이족인 근모(根牟)족은 밀·보리 재배를 가르쳐 줬다(중국학자 장푸샹(張富祥)). 가장 질긴 고급 명주와 그 직조 방법도 동이족이 전수해 줬다고 기록돼 있다(‘상서정의(尙書正義)’). 

인류 최초 5대 독립 문명은 모두 독특한 농경문화를 문명의 기초로 해 시작됐다. 고조선 문명은 ‘단립벼(및 밀·보리)+콩+깨’ 재배의 농경문화 유형과, 이에 의거한 ‘쌀밥(및 밀·보리 식료)+콩장(간장+된장)+깨 양념(향료)’의 독특한 식문화 유형을 형성했다. 이와 달리 수메르(메소포타미아) 문명은 ‘밀’(및 맥류) 재배와 ‘빵’ 식문화를 형성해 이집트문명과 그리스·로마를 거쳐서 서양에 전파됐다. 인도 문명은 ‘장립벼’ 재배와 장립벼 쌀밥 식문화, 중국 문명은 ‘잡곡’ 재배와 만두·국수 식문화, 아널드 토인비가 뒤에 독립 문명으로 추가한 마야·아즈텍 문명은 ‘옥수수’ 재배, 잉카 문명은 ‘감자’ 재배와 그에 따른 식문화 유형들을 각각 형성했다.  

고조선 문명의 식문화는 단립벼 ‘쌀’로 ‘밥’뿐 아니라 무려 200여 종의 떡(이종미 교수)과 과자 등 온갖 파생 음식을 만들었고, 설탕(조청·엿)과 각종 술도 쌀로 빚어냈다. 염분을 소금 가루로 직접 섭취하지 않고 매우 독특하고 현명하게 콩 식물단백질과 융합시켜 섭취하는 콩장(간장·된장) 식문화도 창조했다. 깨(참깨·들깨)는 지금도 주로 한국인이 애호하는 독특한 향료·양념이다. 중국과 일본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이와 유사한 식문화는 사실은 고조선 문명의 식문화가 전파된 것이다.

고조선 문명의 농경과 관련된 또 하나의 큰 특징은 인류 문명사에서 매우 이른 시기에 기마문화를 형성·발전시킨 것이다. 고대의 순화된 말(馬)은 크게 나누면 고조선 문명의 ‘동북아시아종 말’(속칭 ‘몽고말’, 키 약 130㎝)과 수메르 문명의 ‘서남아시아종 말’(속칭 아랍말, 키 약 150㎝)의 두 종류다. 동북아시아종 말은 키가 작지만 추위에 매우 강하고 장거리 선수다. 서남아시아종 말은 크지만 추위와 병에 약한 단거리 선수인데, 장거리를 달리면 쓰러져 죽는다.  

동북아시아종 말은 고조선 후국 부여가 최초로 가축화해 ‘말’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부여는 야생동물의 가축화가 선진적으로 진행된 농목(農牧) 국가였으며, 심지어 관직 명칭까지 마가(馬加·加는 장관 또는 지방 제후 호칭), 우(牛)가, 구(狗)가 등 가축 이름을 사용했다. 현재 한국 민속놀이의 하나로, 가축들 이름(모=말, 윷=소, 걸=양, 개=개, 도=돼지)에서 딴 윷놀이도 부여의 민속이다. 18세기 증기기관 발명에 의한 기계동력 사용 이전까지, 인류 문명 교통·운수의 주동력은 ‘말’의 동력, 즉 마력(馬力)이었다. ‘마력’을 가진 자는 심지어 세계 정복에 나설 수도 있었다. 이 인류 최초의 자연 동력 ‘마력’의 발견·발명자가 동방에서는 고조선 문명(몽고말)이었고, 서방에서는 수메르 문명(아랍말)이었다. 
 

부여에서 가축화된 ‘말’은 전체 고조선 문명권에 전파돼 목축을 선도했다. 특히 실위족(원몽골족) 등 유목민족들은 ‘말’을 도입해 양·염소 등 가축몰이에 더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부여와 실위는 기마민족 국가의 면모를 갖췄다. 고조선의 첫 도읍지 강동 아사달 지역 읍지인 ‘강동군읍지(江東郡邑誌)’에는 군 주위의 대박산(大朴山)과 묘운대(墓雲臺) 위에 각각 ‘철마(鐵馬)’가 세워져 있어, 아래를 압도하듯 내려다봤다고 기록돼 있다. 또 강동현 만달산(蔓達山) 산정에도 수철마(水鐵馬)가 세워져 있었다고 기록돼 있다. 한반도와 만주의 수많은 고을 가운데 산마루에 마상(馬像)이 3개나 세워져 있던 곳은 강동 아사달이 유일하다. 이것은 이미 고조선 시대에 ‘말’의 비중이 매우 높았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또한 이 지역 전설 가운데, 단군이 기마연습을 많이 해 푸른 산이 흙이 파여 붉은 산이 됐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마산(馬山)이 실재하고 있다.

고고 유물로는 약 4025년 전의 것으로 연대측정된 랴오둥반도 남단 대취자(大嘴子) 1기 유적에서 기마병 무기인 청동꺾창 1개, 석제꺾창 1개가 고조선 번개무늬 채색 도기 등과 함께 출토됐다. 이후의 고조선 기마문화의 직접적 증거로 예컨대, 선양시 정가와자 6512호 무덤에서 출토된 청동 마구들처럼 다수 유적의 마구(馬具) 증거유물들이 넘치고 있다.  


고조선 문명의 선진적 기마문화는 고조선 문명권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고조선의 기병부대는 발전된 기사법(騎射法)의 전술과 질풍노도 같은 신속성으로 국방에 효율적이었을 뿐 아니라, 국가의 영역을 급속히 확대시켰다. 또한 기마문화가 확대된 고조선 고대연방국가의 교통과 통신에도 결정적 역할을 수행했다. 고조선 문명은 일찍이 기마문화를 발전시킨 결과, 북부 연해주와 흑룡강까지 고조선 영역을 확보했다. 또한 고조선 기마문화는 고조선 서변 후국들이 고중국을 제압하면서 난하, 조백하를 건너 영정하(永定河)에 도달하고, 지금의 산시성 깊숙이 들어갈 수 있게 한 동력이 됐다. ‘만리장성’은 고조선의 막강한 기병부대들이 넘어올 수 없도록 고중국 측이 쌓은 고조선과 고중국의 국경선이었다.

중국에는 처음 고조선 이주민 백익(伯益)족이 고조선 ‘말(馬)’을 전수했으나, 기마(騎馬)는 할 줄 모르고 주로 수레를 끄는 데 사용했다. 중국에서 처음 기마제도가 시작된 것은 기원전 307년 조(趙)나라 무령왕(武靈王)이 스스로 동호의 기마복을(胡服騎射) 입어 모범을 보이면서 고조선 후국 동호로부터 처음 기마제도를 도입해 소규모 기병대를 창설한 것이 효시라고 중국 고문헌들에 기록돼 있다. 일본에는 기원후 4∼5세기경 한반도 가라국에서 말과 기마제도가 처음 도입됐다. 일본 도쿄(東京)대 에가미(江上波夫) 교수가 ‘기마민족 일본열도 정복설’을 주장한 바, 이 경우의 ‘기마민족’은 고조선 문명의 부여족과 그 후예라고 필자는 보고 있다.  서울대 명예교수

 



[문화] 지식카페 문화일보 : 2019년 05월 15일(水)
동굴 많은 한반도서 빙하기 견딘 인류, ‘동아시아 문명’ 창조하다
▲  최후 빙기 때 동아시아 해안선과 구석기인의 이동 방향. 최후 빙기에 서해가 얼어 없어졌고 북위 40도 이북의 연해주는 동토였다. 고한반도는 유라시아 대륙 동쪽 끝의 유일한 동해안이었으며, 구석기 신인이 태양이 솟는 동쪽을 향해 이동해 오다가 바다에 막혀 정착한 종착지였다. 신용하 교수 제공

■ 신용하의 인류 5대 ‘古朝鮮문명’ - ① 인류 초기 ‘고조선문명’의 발견

해 가장 먼저 뜨는 동아시아로 
인류 선구자들 대장정끝 정착 

옛 한반도 한강·대동강 일대 
사람들 모여드는 곳으로 부상 

농업 발달·인구밀집·지적집단 
세 조건 갖춘 한반도 문명 발생
 

우리는 학교에서 인류 최초의 독립 문명으로서 ① 수메르 문명(약 5500년 전) ② 이집트 문명(약 5100년 전) ③ 인더스 문명(약 4200년 전) ④ 고중국(황하) 문명(3600년 전)의 4대 문명을 가르치고 있다. 예컨대, 아널드 토인비는 인류 초기에 독립 문명으로서 이 4대 문명이 주변으로 파급돼 그 후 인류 고대 위성(衛星) 문명들을 형성·발전시켜서 인류가 문명 생활을 시작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것은 낡고 너무 부족한 학설이다. 유라시아 대륙 가장 동쪽에, 고중국 문명 형성의 기원이 된 것으로, ‘고조선 문명’(약 5000년 전)이라는 거대 문명이 하나 더 있었다. 이것은 태양이 가장 먼저 솟는 땅을 찾아 동방 끝으로 이동해 왔다가 정착한 고(古) 한반도 출신 신석기 말기·고대 초기인들이 신석기 시대 ① 한강 문화 ② 대동강 문화 ③ 요하(遼河) 문화를 하나의 인과적 체계로 묶어서 규모가 큰 찬란한 문명을 창조한 것이다. 이것은 세계사를 바꿔 써야 할 새로운 문명이다. 이것이 ‘고조선 문명’이다. 토인비도 6개의 유산된 초기 문명이 더 있었다고 유보해 뒀었다. 이번 문화일보 연재에서는 이 새 인류 문명을 탐구해 나가기로 한다.  

고인류학자들의 통설에 의하면, 최초의 인류 종(種)은 약 500만 년 전에 아프리카에서 출현해 진화하면서 먼저 유라시아 대륙으로 퍼져나갔다. 약 250만 년 전에 손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손 쓴 사람(homo habilis)’이 됐으며, 약 170만 년 전에 꼿꼿하게 걷게 된 ‘곧선 사람(homo erectus, 原人)’이 됐고, 약 20만 년 전에 돌을 깨 불을 사용하는 ‘슬기 사람(homo sapiens)’이 됐으며, 약 10만 년 전에는 지혜가 더욱 발전한 ‘슬기슬기 사람(homo sapiens sapiens, 新人)’도 출현하게 됐다. 이 ‘슬기슬기 사람’의 두뇌 용량이나 사고 능력은 현대인과 완전히 동일한 것으로 설명돼 있다.

인류가 유라시아 대륙으로 건너와서 각지로 이동하기 시작한 것은 ‘곧선 사람’ 단계부터다. 그러나 활발한 이동은 ‘슬기 사람’과 ‘슬기슬기 사람’ 단계라고 설명되고 있다. 진화고고학에서는 ‘곧선 사람’부터 이들을 모두 합쳐서 ‘구석기인’이라고 호칭한다. 이 시기는 지구 전체가 더워서 시베리아에서도 아열대 식물 열매가 열리고 매머드와 공룡이 살았다. 어디에서나 식료를 얻을 수 있었으므로, 구석기인들은 한곳에 정착하지 않고 인간 무리(bands)를 이뤄 유라시아 대륙의 여러 방향으로 분산 이동했다.

구석기인들에게 가장 두려운 것 중 하나는 맹수들과 함께 매일 찾아오는 밤의 어둠이었다. 그러므로 가장 용기 있고 호기심 많은 구석기인 무리는 태양이 맨 먼저 솟아올라 어둠을 사라지게 하고 밝은(光明) 아침이 먼저 찾아오는 해 뜨는 동방을 향해 천천히 이동하는 형세를 이루게 됐다. 고한반도와 연해주는 유라시아 대륙의 가장 동쪽 끝이고 그 동쪽은 깊은 태평양 바다(동해와 오호츠크해)다. 그러므로 이곳은 해(태양) 뜨는 동쪽을 향해 수만, 수십만 년에 걸쳐 동쪽으로 이동해 온 구석기인 무리의 인류사적 대장정이 누적된 ‘종착역’(terminal) 같은 지역이었다.
 

▲  빙기 때 해안선과 슬기 사람의 주 이동 경로(20만∼5만 년 전).
▲  인류 최초 4대 독립 문명에 고조선 문명(그림의 A 부분)을 첨가했다. B는 수메르 문명 지역.


유라시아 대륙 동단 고한반도와 연해주 지역에 구석기인이 처음 도착한 것은 100만∼70만 년 전 무렵으로 추정된다. 한반도의 가장 오래된 구석기 유적으로, 평안남도 상원군 흑우리 검은모루 유적(약 100만∼70만 년 전)과 절골 유적(약 93만 년 전), 충북 단양군 도담리 금굴 유적(약 70만 년 전)이 이미 발굴돼 있기 때문에 이를 알 수 있다. 이 밖에 한반도·만주·연해주 일대에서 발굴 보고된 주요 구석기 유적이 50개가 넘는다.

그러나 약 5만3000년 전 구석기 인류에게 대재앙이 닥쳐왔다. 지구 기후의 급격한 변화로 혹한의 ‘최후 빙기’가 닥쳐온 것이다. 태양광선의 95% 이상이 먼지에 가려져 5% 이하만 지구 표면에 닿았다. 이 시기에는 유라시아 대륙의 북위 40도 이북 지역은 긴 겨울에는 모두 얼어붙은 동토(凍土)가 돼 생물이 생존할 수 없었다. 예컨대 우랄 지역의 1월 평균 온도는 영하 30도였다. 수마트라 섬 적도의 평균 온도는 8도에 불과했다. 그러므로 유라시아 대륙 구석기인들은 북위 40도 이남의 생존 가능한, 따뜻한 지역의 동굴을 찾아 이동한 소수 구석기인을 제외하고는 거의 사멸했다.

동아시아에서도 최후 빙기에 북위 40도 이북 지역에서는 인류가 상주(常住)하지 못했다. 물론 여름에는 사냥감을 뒤쫓아 북위 40도 이북에서 사냥하면서 계절적 일시 거주는 했다. 그러나 북위 40도 이북에 집단 상주지를 형성하고 문명을 만들지는 못했다. 동아시아의 북위 40도선은 한반도 신의주와 중국 베이징(北京)을 지나간다. 그러므로 고한반도의 압록강 최하류와 고중국의 베이징 이북은 최후 빙기 약 4만 년 넘게 인류가 상주할 수 없는 얼어붙은 동토였다. 그러므로 한국민족이 시베리아 고(古)아시아족에서 기원했다거나, 톈산산맥 또는 바이칼 호수에서 기원해 내려왔다는 학설은 기후변화를 모르던 시절의 낡은 학설에 불과하다.  

동아시아의 북위 40도 이남 지역에서 구석기인들이 혹한을 피해 들어갈 수 있는 동굴이 가장 많은 지역이 바로 산지가 비교적 많은 고한반도였다. 한반도의 자연 동굴 총수의 90% 이상이 석회암 동굴이다. 한반도의 북위 40도 이남의 카르스트(Karst) 지형 석회암 지대는 한반도 중부 차령산맥·소백산맥 일대에 가장 잘 발달해 있다. 이 지역이 고한반도 ‘제1동굴지대’다. 그다음이 멸악산맥 일대의 ‘제2동굴지대’다. 중국에서는 남방 양쯔강 유역과 광시(廣西)성·구이저우(貴州)성·윈난(雲南)성 지역에 가야 석회암 동굴 지대가 나온다. 고한반도는 최후 빙기 겨울철 동토에 연접한 북방한계선의 매우 추운 지역이었다. 그럼에도 동아시아 최대 석회암 동굴 밀집 지역이었기 때문에, 기존 고한반도의 구석기인과 유라시아 대륙 동남부 해안을 따라 남방에서 꾸준히 이동해 올라온 구석기 신인(슬기슬기 사람)이 합쳐져서, 이 기간에도 종착지 고한반도는 세계 인구밀집 지역의 하나가 됐다.  

또한 최후 빙기에 서해가 얼어 없어져 고중국 관내와 이어졌고, 대만과 중국 본토와도 이어졌으며, 북위 40도 이북의 연해주는 동토였기 때문에, 고한반도는 전체 유라시아 대륙의 가장 동쪽 끝 유일한 동해안이었다. 최후 빙기에도 구석기 신인이 태양이 솟는 동쪽을 향해 꾸준하게 이동해 들어오다가 바다에 막혀 더 동쪽으로 갈 수 없어서 정착하는 종착지가 고한반도였다. 약 1만2000년 전(일설 1만2500년 전), 인류는 최후 빙기의 대재난 시대를 견뎌내고 새 시대를 열기 시작했다. 지구 주변의 먼지가 걷혀 태양광선이 모두 땅에 닿으면서 기후가 대체로 오늘날처럼 온난해졌다. 지구 기후가 온난화되자 유라시아 대륙의 동토에 인접해 있던 구석기인들은 모두 동굴에서 나와 부근 강변과 해안에 움막을 짓고 새로운 용구로 마제석기(磨製石器)와 토기를 만들어 사냥·어로·식료 채집을 하면서 신석기 시대를 열었다. 구석기인이 신석기인으로 진화하게 된 것이다.  

신석기 시대에 인류 최초 문명 탄생의 첫째 조건이 된 것은 신석기인들의 농업경작(agriculture) 시작이었다. 종래 사냥과 채집으로 한 가족을 부양하는 데 수천 에이커의 토지가 필요했던 데 비해, 농경을 시작하면서 약 25에이커의 토지로 충분해졌다. 그러나 농업경작이 어느 곳에서나 가능했던 것은 아니었다. 비옥한 토지, 온난한 기후, 풍부한 물과 함께 야생종(野生種)을 인공적으로 재배하고 육성하려는 의지를 가진 현명한 인간 집단이 필요했다. 농업경작은 신석기인을 특정 지역에 장기간 정착시켰다. 인간의 유랑 시대를 정착 시대로 바꾼 것이다. 농경 마을과 읍락이 형성되고 이것은 대대로 전승됐다. 신석기인의 토지에 결부된 농업경작의 장기 정착은 인류 사이 수천 개의 상호 소통되지 않는 언어족을 만들어 냈다.  

사회학적으로 신석기 농업혁명은 완전히 새로운 혁명적 사회변동을 가져왔다. 식량 생산 공급의 잉여 증가는 인구 증가를 결과했다. 잉여 생산물의 축적은 분배 과정에서 갈등과 투쟁을 자주 발생시켰다. 갈등과 투쟁을 해결하기 위해 권력을 위임받은 우두머리와 그 집단이 출현했다. 가족들이 집합해 씨족이 형성되고, 씨족들이 통합해 부족이 형성됐다. 부족들 사이에 갈등과 투쟁이 일어나면, 패배한 부족의 포로는 노예가 되고 승리한 부족장과 그의 무장들은 노예를 소유하는 세습 귀족이 돼, 신분과 계급이 발생했다. 부족장들은 다른 부족들을 통합해 대부족장 또는 군장(chief)이 되고 준(準)국가인 군장사회(chiefdom)를 형성했다. 강력한 군장은 다른 군장을 통합해 고대 국가를 형성했다.   


또한 잉여 생산물의 축적은 농업에 통합돼 있던 수공업을 분리시켰고, 농산물과 수공업 제품의 교환을 중심으로 한 상업이 분화됐다. 수공업의 발전으로 강한 생산용구와 무기를 만들기 위해 자연동과 주석의 합금인 청동기를 발명·제조하기 시작했고, 이어서 철기 제조가 시작됐다. 이 최초의 고대국가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인류는 최초의 문명을 탄생시켰다. 인류 최초 문명 탄생의 첫째 조건이 바로 신석기 농업혁명, 청동기와 철기 제조, 고대 국가의 형성, 신앙의 통일, 언어의 통일과 문자 발명, 초기 과학과 문화예술의 성립 발전 등이었다.

따라서 인류 최초의 문명은 말기 신석기인이 거주한 모든 지역에서 균등하게 탄생한 것이 아니라, 매우 일찍 농업경작이 성립 발전하고, 인구가 밀집되고, 지적 성능을 활용한 과학적 수공업 기술이 성립되고, 고대 국가가 형성된 특정 지역에서 형성되고 탄생했다. 이 최초의 특정 지역 구심점이 유라시아 대륙의 두 곳에 뚜렷이 출현했다. 그 하나가 동방 고한반도의 한강과 대동강 유역에 성립돼 전파되기 시작한 ‘고조선 문명’이다. 다른 하나가 서방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초승달 지역에 성립돼 전파되기 시작한 ‘수메르(메소포타미아)’ 문명이다. 서울대 명예교수

 





■홍산문명의 주체가 상나라로 단군조선을 말하며 

상나라 천간이 단군을 말한다.■

홍산문명 여신상은 간적(韓族)의 비(웅녀)로 상나라로 알고있는 단군조선 청동유물 곰이 한웅(헌원)을 품고있습니다.


한글은 왜정때 국문을 날조한 식민사학 용어로


《말씨》의 의미를 담아 그느씨 그어느씨 그릇 《글씨》가

바른표기입니다.


English(잉글리쉬,은 글씨,상나라글씨,단군조선 문자)

제자원리는?


A는 단군조선 글씨 ㅏ ㅣ를 기울여 제작한것이고

아를 잇는다는게 어원이며 아새끼를 새가 내리기에

소문자a는 새를 형상화한 것입니다.

아새끼란? 아를 새가 껴내린다는 의미입니다.


B는 여성 머리와 임신한 배를 그린것이고


C는 배에서 씨앗이 떨어져 나온, 탄생한 조선말

씨를 의미합니다.


E는 드리어진 씨를 의미하며 조선 글씨 ㄷ 안에 ㆍ알에 아를 의합니다.



파생되어 조선 글씨 ㅌ과 같으며

소문자 e는 움추리고있는 배아를 의미합니다.

이와같이 잉글리쉬는

모두 조선말 사투리(소리,스토리,이야기,얘기)로 되어있습니다.

전세계 언어와 문자는 모두 조선 말씨 와 글씨에서

분파해 나갔으며

조선(chosen)은 인류 금속문명의 창시자입니다.

전세계인의 아버지 조상은 현재 한국인의 조상이며

그지역 모계혈통에 의해 형질이 복원된것입니다.

전세계 사람들은 배다른 형제입니다.

https://story.kakao.com/mepssi/jZOsdi3l9kA


■etymology=어원■


《ety》=애텨,애를텨서

《mol》=말,마을

《ogy 》=오겨,오지

애터말오지

생명알이 터져서 탄생해 터, 지구에

오다.

어원의 용어 자체가 생명이 내짐을 어원으로

하고 있으며 시작부터 조선말 사투리(소리)입니다.

잉글리쉬《English 》는 상나라로 알고있는 단군조선의 문자로

범어 천자문 글씨 잉글리쉬가 함께 사용되다 분리됩니다.

은그리스 은그려스

은이란 정신인 령,녕,영이 넣어지다.

천자가 내진곳이 수도인 은입니다.

홍산문명부터 상나라 기자조선 까지가 단군조선이며 성탕시기부터 건국시기로 인식하는것은 식민사학에 근거한것으로 성탕이전의 윗대조의 역사를 떼어 한단고기로 날조한것입니다.

상나라 천자의 칭호가 천간이며 천간의

쳔은 1980년대 이전까지 천자문은 텬자문 , 트럭은 추럭,

트레일러는 추레라,추레일러로 천자문 하늘쳔은 텬으로

발음하였으며

천간은 텬가니 탄구니 단구니 단군으로 같은 발음이자

단군을 의미하는것입니다.

천간의 갑을병정... 육십갑자는

한인 단군부터의 계보로 성탕으로 이어집니다.

성탕이전의 천간 즉 단군을 십간으로 음만 달리 취한것입니다.

십간의 십은 열십자로 텬,톈을 말하며 탄군,단군과

쳔,텬,십은 같은 것입니다.

서세동점시기 와 왜정때 대륙의 역사를 식민지 지배권을 정당화 하기위해 하나의 역사를 쪼개 이식시켰습니다.

우리는 현재 왜곡된 식민사학에 세뇌당해 암기해 배워온것으로

지금도 식민사학을 가르치고 있는것입니다.


https://www.gelssi.com


세종대왕시대에 문자는 창조되지 않았습니다.

옛 여러 운서를 참고해 편찬하였다 기록되어있으며

천자문은 태초 소리 글씨 하나의 음에 여러의 미가 중복되어 동일한 음을 분리해 의미를 보완하기 의해 만들어진 문자가 천자문으로 천자문은 그림을 그려 의미를 분리해 담은 사전문자입니다.



스스로 발음될수없는 문자가 천자문입니다.

고로

소리 글씨가 없으면 존재할수없으며 소리 글씨로

음을 규정시킨 문자가 천자문입니다.


글씨는 상나라로 알고있는 단군조선 의 문자입니다.


말리장성은 간적(韓族)들이 대재앙이후

히말라야(해가말아진곳,해마루)에서 빙하기가 도래하며 빙하지역으로 변하며 따듯한 곳을 찾아 남하합니다.

여러 방향으로 남하 하였으나 주종족이 타클라막한 지역으로 이동한후에 동진해

지금의 홍산문명지역으로 이동합니다.

이때 능선을 타고 동천한길이 말리장성이며

모국인 어머니 태장을 잇은 태장길이라하여

말리장성이라 한것입니다.

즉 간적(한족,칸족)한인 과 간적의 비인 웅녀가 낳은 한웅(=헌원)이 내려오신길이며

이분이 호족인 치우와 싸워 치우족은 아메리카로 뿔뿌리 흩어집니다.

말리장성 끝자락은 ㅅ자형태로 끝나며

ㅅ자의 한줄기가 산해관이고 다른한줄기가

천리장성입니다. 본래 ㅅ자로 붙어 있었으며

그안에 홍산문명 과 고죽국이 존재했으며

왜정때 하나의 대륙역사를 쪼개어 식민지

지배권을 정당화 하기위해 이식시킬때 역사를 분리하는 과정에 훼손한것입니다.


한민족은 모두 난생신화로 간적의 비가 시조 어머니 입니다.

모두 한조상에서 분파된 천자의 후손이나

식민사학에 콩깍지가 씌워지다보니 서로가 남이라는 식민관념으로 계속해서 왜곡된 역사를 창작해내는것입니다.


한반도 중공대륙 만주 아메리카 서아시아 유물은 모두 상나라로 알고있는 단군조선 유물에서 유래된것으로 조선인이 주체입니다.

서세동점시기 와 왜정때 조선사편수회 주도로 왜곡시켜 놓은것입니다.

이것을 중공 농노반란군 과 나눠가졌습니다.

서세동점시기에 서구의 지원을 받은

조선의 농노반란군이 지금의 인민해방군입니다.


서세동점시기 와 왜정때 사대주의, 중화사상이라는 용어를

세뇌시고 반도사관을  콩깍지 씌워 놓은것입니다.



《삼가 차려 서와 드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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