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이야기

슈트름게슈쯔 2015. 11. 8. 17:28



대한민국의 수필가이자 철학박사 김태길 선생님과 연세대학교 안병영 명예교수 - 2007년 11월 3일 부산 누리마루 





글을 쓴다는 것 - 김태길(金泰吉) 




사람은 가끔 자기 스스로를 차분히 안으로 정리(整理)할 필요를 느낀다. 

나는 어디까지 와 있으며, 어느 곳에 어떠한 자세(姿勢)로 서 있는가? 

나는 유언무언(有言無言) 중에 나 자신 또는 남에게 약속(約束)한 바를 

어느 정도까지 충실(充實)하게 실천(實踐)해 왔는가? 

나는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있으며, 앞으로 어떤 길을 걸을 것인가? 

이러한 물음에 대답함으로써 스스로를 안으로 정돈(整頓)할 필요를 느끼는 것이다. 

안으로 자기를 정리하는 방법(方法) 가운데에서 

가장 좋은 것은 반성(反省)의 자세로 글을 쓰는 일일 것이다. 
마음의 바닥을 흐르는 갖가지 상념(想念)을 어떤 형식으로든 
거짓 없이 종이 위에 옮겨 놓은 글은, 자기 자신(自己自身)을 비추어 주는 자화상(自畵像)이다. 
이 자화상은 우리가 자기의 현재(現在)를 살피고 앞으로의 자세를 가다듬는 거울이기도 하다.
글을 쓰는 것은 자기의 과거(過去)와 현재를 기록(記錄)하고 
장래(將來)를 위하여 인생의 이정표(里程標)를 세우는 알뜰한 작업(作業)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엉클어지고 흐트러진 감정(感情)을 가라앉힘으로써 
다시 고요한 자신으로 돌아오는 묘방(妙方)이기도 하다.
 만일 분노(憤怒)와 슬픔과 괴로움이 있거든 그것을 종이 위에 적어 보라. 
다음 순간(瞬間), 그 분노(忿怒)와 슬픔과 괴로움은 
하나의 객관적(客觀的)인 사실(事實)로 떠오르고, 
나는 거기서 한 발 떨어진 자리에서 그것들을 바라보는, 마음의 여유(餘裕)를 가지게 될 것이다.
안으로 자기를 정돈(整頓)하기 위하여 쓰는 글은, 쓰고 싶을 때에 쓰고 싶은 말을 쓴다. 
아무도 나의 붓대의 길을 가로 막거나 간섭(干涉)하지 않는다.
 스스로 하고 싶은 바를 아무에게도 피해(被害)를 주지 않고 할 수 있는 일, 
따라서 그것은 즐거운 작업이다. 

스스로 좋아서 쓰는 글은 본래 상품(商品)이나 매명(賣名)을 위한 수단(手段)도 아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이 읽기 위한 것이요,

 간혹 자기와 절친한 가까운 벗을 독자(讀者)로 예상(豫想)할 경우도 없지 않으나,

 본래 저속(低俗)한 이해(利害)와는 관계(關係)가 없는 풍류가(風流家)들의 예술(藝術)이다. 

따라서, 그것은 고상(高尙)한 취미(趣味)의 하나로 헤아려진다.
모든 진실(眞實)에는 아름다움이 있다. 

스스로의 내면(內面)을 속임 없이 솔직(率直)하게 그린 글에는 

사람의 심금(心琴)을 울리는 감동(感動)이 있다. 

이런 글을 혼자 고요히 간직하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복된 일일까. 

그러나, 우리는 그것으로 만족(滿足)하지 못한다. 

누구에겐가 읽히고 싶은 충동(衝動)을 느낀다. 

가까운 벗에게 보인다. 

벗도 칭찬(稱讚)을 한다.
“이만하면 어디다 발표(發表)해도 손색(遜色)이 없겠다.”하고 격려(激勵)하기도 한다.
세상에 욕심(慾心)이 없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칭찬(稱讚)과 격려를 듣고도 자기의 글을 ‘발표’하고 싶은 생각이 일지 않을 만큼 욕심이 없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래서 노트 한 구석에 적었던 글을 원고 용지(原稿用紙)에 옮기고, 

그것을 어느 잡지사(雜誌社)에 보내기로 용기(勇氣)를 낸다. 

그것이 바로 그릇된 길로의 첫걸음이라는 것은 꿈에도 상상(想像)하지 못하면서,

 활자(活字)의 매력(魅力)에 휘감기고 마는 것이다.
잡지(雜誌)나 신문(新聞)은 항상(恒常) 필자(筆者)를 구하기에 바쁘다. 

 한두 번 글을 발표한 사람들의 이름은 곧 기자(記者)들의 수첩(手帖)에 등록(登錄)된다. 

조만간(早晩間) 청탁서(請託書)가 날아오고, 기자의 방문(訪問)을 받는다. 

자진 투고자(自進投稿者)로부터 청탁(請託)을 받는 신분(身分)으로의 변화(變化)는 

결코 불쾌(不快)한 체험(體驗)이 아니다. 

감사(感謝)하는 마음으로 청탁을 수락(受諾)하고, 정성(精誠)을 다하여 원고(原稿)를 만들어 보낸다. 

청탁을 받는 일이 점차(漸次)로 잦아진다.
이젠 글을 씀으로써 자아(自我)가 안으로 정돈(整頓)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밖으로 흐트러짐을 깨닫는다. 

안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생각을 정열(情熱)에 못 이겨 종이 위에 기록(記錄)하는 것이 아니라, 

괴지 않은 생각을 밖으로부터의 압력(壓力)에 눌려 짜낸다. 

 자연히 글의 질(質)이 떨어진다.
이젠 그만 써야 되겠다고 결심(決心)하지만, 그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먼 길을 내 집까지 찾아온 사람에 대한 인사(人事)를 생각하고, 

내가 과거에 진 신세를 생각하여, 또는 청탁(請託)을 전문(專門)으로 삼는 

기자의 말솜씨에 넘어가다 보면,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가 없다.”
쓰겠다고 한번 말만 떨어뜨리고 나면 곧 채무자(債務者)의 위치(位置)에 서게 된다. 

돈 빚에 몰려 본 경험(經驗)이 있는 사람은 글빚에 몰리는 사람의 괴로운 심정(心情)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젠 글을 쓴다는 것이 즐거운 작업이나 고상한 취미(趣味)가 아니라, 

하나의 고역(苦役)으로 전락(轉落)한다.
글이란, 체험(體驗)과 사색(思索)의 기록(記錄)이어야 한다. 

그리고, 체험과 사색에는 시간(時間)이 필요하다. 

만약, 글은 읽을 만한 것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면, 

체험하고 사색할 시간의 여유(餘裕)를 가지도록 하라. 

암탉의 배를 가르고, 생기다 만 알을 꺼내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따라서, 한동안 붓두껍을 덮어 두는 것이 때로는 극히 필요하다.

 하고 싶은 말이 안으로부터 넘쳐 흐를 때, 그 때에 비로소 붓을 들어야 한다.
일단(一旦) 붓을 들면 심혈(心血)을 기울여 써야 할 것이다. 

거짓 없이 성실(誠實)하게, 그리고 사실에 어긋남이 없도록 써야 한다.

 잔재주를 부려서는 안 될 것이고, 조금 아는 것을 많이 아는 것처럼 속여서도 안 될 것이며,

 일부(一部)의 사실을 전체(全體)의 사실처럼 과장(誇張)해서도 안 될 것이다.
글이 가장 저속한 구렁으로 떨어지는 예는, 인기(人氣)를 노리고 

붓대를 놀리는 경우(境遇)에서 흔히 발견(發見)된다.

 자극(刺戟)을 갈망(渴望)하는 독자나 신기(新奇)한 것을 환영(歡迎)하는 

독자의 심리(心理)에 영합(迎合)하는 것은 타락(墮落)을 지나서 이미 죄악(罪惡)이다.
글 쓰는 이가 저지르기 쉬운 또 하나의 잘못은, 현학(衒學)의 허세(虛勢)로서 자신을 과시(誇示)하는 일이다. 

현학적(衒學的) 표현(表現)은 사상(思想)의 유치(幼稚)함을 입증(立證)할 뿐 아니라, 

사람의 허영(虛榮)스러움을 증명(證明)하는 것이다. 

글은 반드시 여러 사람의 칭찬(稱讚)을 받을 필요는 없다. 

그러나, 되도록이면 여러 사람이 읽고 알 수 있는 것이 바람직하다.
글을 쓴다는 것, 그것은 즐거운 작업이어야 하며, 진실의 표명(表明)이어야 한다. 

그러기 위하여 우선 필요한 것은 나의 자아(自我)를 안으로 깊고 크게 성장(成長)시키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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