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차 세계대전 비사 WW2

슈트름게슈쯔 2020. 12. 5. 02:29

다카르 해전 당시 프랑스 해군의 쉬르쿠프 잠수순양함 - 1940년 9월 

 

 

서아프리카 해전은 제 2차 세계대전중 발생한 서아프리카 전역에 진행된 해전으로서 크게 프랑스령 서아프리카의

다카르 전투(또는 메너스 작전)와 프랑스령 적도 아프리카의 가봉 전투 2가지 전투로 나뉜다.

이 당시 연합군은 비시 프랑스가 점령하고 있는 프랑스의 식민지 지역을 공격하기로 하였다.  

그것은 나치 독일에 항복하여 강화를 맺은 비시 프랑스에 대한 아니꼬움과 프랑스령 아프리카 

식민지를 점령하기 위한 영국의 야심이기도 했다.

가봉 전투 이후 자유 프랑스가 프랑스령 적도 아프리카을 점령하였지만, 프랑스령 서아프리카는

북아프리카에서토치(횃불) 작전이 진행되어 연합군이 아프리카에 상륙하게 되는 1942년 11월까지

비시 프랑스 통치하에 있었다.  

프랑스 전함 리슐리외가 프랑스령 서아프리카의 세네갈, 다카르의 항구를

1940년 7월 10일에 함포 사격을 가하자 아프리카에서의 반영국 정서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같은 해 8월에는 자유 프랑스의 장군인 샤를르 드골이 프랑스령 기니의 코나크리로 상륙하며 제한된 육로를 통해

진군했다. 그는 점차 유명세를 얻기 시작하는 자유 프랑스 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다카르에서 자유 프랑스군에

합류하라는 제안을 하였다. 하지만 드골의 이 제안은 다카르에서 영국군의 행동으로 인해 막혀 버리게 되었다.  

9월 18일에는 세 척의 프랑스 경순양함 프랑스 순양함 조르주 레이구스, 프랑스 순양함 글로레,

프랑스 순양함 몬트켈림이 리브르빌로 가는 도중에 연합군 선박이 가로채 갔다.

그 과정에서 연합군의 중순양함인 영국 순양함 오스트레일리아가 격침되었다.

그리고 프랑스 경순양함 3척은 연합군에게 강제로 해체당했다. 

비시 프랑스의 저항은 프랑스 함선에 대한 공격의 결과로 굳어졌다.

다카르 전투(1940년 9월 23일 ~ 25일)에서 연합군은 그들이 편안히 도시를 점령할 수 있도록

다카르의 비시 프랑스군의 수비수를 설득하는 것에 실패했다.

연합군은 처음 비시 세력을 설득하기 위해 선전을 하였다.

또 그들은 무력으로 다카르를 점령하는 것을 시도했지만 그러한 두 시도는 모두 실패로 끝났다.

1940년 9월 23일, 다카르 해협에 도착한 영국함대는 항공모함 아크 로얄의 함재기를 이용해 투항을 권고하는

삐라를 살포하였다.  다카르의 비시 프랑스군은 항복을 거부하고 10시 51분에 마뉴엘 포대(28cm포 9문 외)에서

격렬한 포격을 가하며 대응했다.  그에 영국함대도 반격을 시작했는데 비시 프랑스군 잠수함 페르세는

영국 전함에게 어뢰를 발사했지만 빗나가 도로 격침당했다. 영국측도 중순양함 쿰버랜드, 구축함 잉글레필드,

포사이트가 포격에 의해 파괴되었다.  그 때문에 이 날은 상륙작전을 할 수 없어 일몰과 함께 영국함대는

다카르 만 바깥으로 후퇴했다. 다음날 24일 이른 아침에 영국 해군 항공모함 아크 로얄의 함재기가

비시 프랑스군의 전함 리슐리에를 폭격했지만 대공포화에 의해 명중시키지는 못하고 도로 항공기 3대만

격추당하고 말았다. 영국전함 버햄, 리솔루션 등은 프랑스 전함 리슐리에와 마뉴엘 포대에  함포사격을 개시하자

비시 프랑스함대도 응전했다. 영국군 중순양함 데본셔와 오스트레일리아 해군 함선의 공격에 의해

비시 프랑스함대의 구축함 로더슈가 대파되었고  영국 구축함 포튠에 의해 잠수함 어잭스가 격침되었다.

10시 10분, 비시 프랑스함대의 구축함 르 아르디가  연막을 치자 영국함대는 일시후퇴하였다.

오후에 다시 교전이 시작되었지만 이 날도 자유 프랑스군은 상륙하지 못했다.

이러한 다카르 교전으로 인해 자유 프랑스군 수반 드골과 영국 해군의 작전은 다카르 점령을 달성하지 못하는 바람에

프랑스 비시 정권의 영국에 대한 불신감만 더욱 심어 주고 말았다. 

 이후에도 비시 프랑스 해군, 아프리카의 프랑스 식민지군은 중립을 유지했지만 2년 후 미군은 북아프리카에

추축국 병력을 몰아내기 위한 첫 상륙작전인 토치작전을 개시한다. 

미군은 프랑스 비시 정권의 감정을 생각해 토치 작전에는 드골의 자유프랑스 군을 참가시키지는 않는다.

 

제 2차 세계댜전 발발 5년전이었던 1934년 5월에 취역한 프랑스 해군의 쉬르쿠프급 잠수순양함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함선이었다. 쉬르쿠프급 잠수순양함 유도어뢰가 없어서 직주 어뢰만으로 작전해야 하던

잠수함의 한계를 뛰어넘어 강력한 주포를 중심으로 하여, 잠수함에 의한 통상파괴전의 수준과

성격을 바꿔버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후 제 2차 세계대전 발발후 강대국들의 급속한 기술의 발달은

프랑스 해군의 쉬르쿠프급 잠수순양함의 의미를 무참히 퇴색시켰다.

강대국 해군의 어뢰 기술의 급속한 발달은 잠수함이 주포를 장착시키고 돌아다니며 전투를 해야 할

이유를 사라지게 만들었던 것이었다.

오히려 함상에 장착된 무장은 적 해군의 소나에 쉽게 발각될 우려만 높였다.

물론 건조될 당시엔 소나의 개념이 매우 부실해서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았었다.

실제로 쉬르쿠프 잠수함같은 극단적이지 않더라도 당시 잠수함들은 갑판에 덱건 주포를 장착하는 것이 기본이었다.

그러한 형태가 사라지게 된것은 기술의 발달로 인하여 잠수함에 있어 덱건 주포가 무의미해지고

오히려 잠수함 생존성만 떨어트리는 애물단지로 전락했기 때문이었다. 잠수함의 함재기 운용 역시 마찬가지였다.

잠수함으로서 표적 탐색에 제약이 많았던 당시로서야 괜찮은 방안이었지만, 기술의 발달로 인해

잠수함이 육안으로 확인하지 않더라도 원거리에서 그 항적을 포착하는게 가능하게끔 되었던 것이다

 

 

프랑스 해군 쉬르쿠프 잠수함의 주무장 어뢰발사관은 550mm 6문 (어뢰 14기)과

400mm 4문 (어뢰 8기)과 함재기는 베송 MB.411 쌍발 수상기 1기였다.

그리고 부무장으로 1924년형 203mm포 2련장 트윈 포탑은 600발의 탄약을 적재했다.

203mm 트윈 포는 60발의 장착 용량을 가지고 있었고, 5m (16ft) 거리계로 포 감독이 조종했으며,

수평선에서 11km (5.9nmi / 6.8 마일)를 볼 수있을 만큼 높이 장착되었다.

쉬르쿠프의 승무원은 부상 후 3 분 이내에 트윈 포를 작동시키고 발사 할 수 있었다.

배의 잠망경을 사용하여 주 함포의 발사를 지시하는 쉬르쿠프는 이 범위를 16km (8.6nmi / 9.9 마일)까지

늘릴 수 있었다. 승강 플랫폼은 원래 15m (49ft) 높이의 전망대를 들어 올리도록 되어 있었지만

이 설계는 롤링으로 인해 재빨리 폐기 되었다.

그외에 2문의 트윈 37mm 호치키스 대공포와 13.2mm 대공기관총 2연장 2기가 격납고 상단에 장착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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