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Photo/옛 서울의 모습

역마사(驛馬使) 2010. 7. 10. 23:26

독립문(獨立門)송재 서재필이 발의한 독립협회가 중심이 되어 1896년(건양 1년)에 명나라와 청나라 사신을 영접하였던 영은문(迎恩門)을 무너뜨리고, 그 터에 전 국민을 상대로 모금운동을 하여 세웠습니다. 독립문은 당시 독일 공사관에 근무하던 스위스 기사가 (일설에는 러시아인 사바틴(士巴津)이) 설계했으며, 공역은 건축기사 심의석이 담당하였고, 노역은 주로 중국인 노무자들을 고용하였습니다. 1896년에 공사를 시작해 1897년에 완공되었으며, 높이는 14.28m, 폭이 11.48m, 두께가 6.25m입니다. 약 1,850개의 화강암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을 모델로 삼아서 만들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 독립문의 현판 글씨는 매국노 이완용이 썼다고 하며, 현판 바로 아래에는 대한제국 황실의 문양인 오얏꽃무늬가 장식되어 있습니다. 구조는 중앙에 홍예문이 있고, 왼쪽 내부에서 정상으로 통하는 돌층계가 있습니다.

 

문 앞에는 옛날 영은문의 주초였던 두 돌기둥이 남아 있는 데 1979년 성산대로를 개설하면서 원래 독립문이 있던 자리에서 북서쪽으로 70m 떨어진 곳인 서대문독립공원 내로 영은문의 두 돌기둥과 함께 이전하여 복원하였고, 예전 자리에는 '독립문지'라는 표지판을 묻어놓았습니다.

 

송재 서재필 동상 앞으로 보이는 독립문

 

매국노 이완용이 썼다는 '독립문' 글씨옆에 태극기가 있고 밑에 대한제국의 문양인 오얏나무가 있음.

 

송재 서재필 동상

 

독립문앞에 무너진 영은문의 주초가 보임(두 개의 돌기둥)

 

대로변 앞 쪽에는 한글로 뒷쪽에는 한자로 '독립문'이라고 씌여있고 밑에 오얏나무 문양이 보임

 

 

아래 높이 솟아 보이는 영은문(迎恩門)

조선왕조 초엽부터 중국(명나라, 청나라)에서 오는 사신을 맞이하던

모화관(慕華館) 앞에 세웠던 문이다.

1896년에 독립협회가 이 문을 헐고 그 앞에 독립문을 세웠다. 워낙 높고 불안정하여 끈으로 고정시켜

놓은것이 보인다. 지금은 위의 지붕과 목조물은 다 헐리고 주춧돌만 2개 남아있다.

주초석은 방형의 배흘림 장초석(長礎石)인데 4방의 모를 죽여 8각같이 보이고

위에는 가구구조(架構構造)를 고정시켰던 홈이 있다.

 

 

헐리고 남은 영은문 주초(주춧돌)은 사적 33호로 지정되어 있다.

 

 

 헐리기 전 그 당시 모습으로 뒤에 모화관이 보이는 듯하고 영은문 옆에는 무슨 긴 장대같은 것이 보이는 데

아마 중국 사신과 무슨 신호를 주고 받는 것이 아닌 지 모르겠다. 

 

지붕과 목조 건축물이 헐리고 난 뒤의 영은문 주초만 남은 광경

 

주초앞에 독립문이 서 있는 모습

 

영은문에는 약소국인 조선의 설움이 배어 있었습니다. 당시 중국의 횡포가 이만저만이 아니어서 조선의 처녀들까지 조공으로 바치게 강요합니다. 평민뿐만 아니라 벼슬아치의 딸도 선발을 합니다. 태종 8년(1408) 중국으로 보낼 처녀를 뽑는 자리에 평성군 조견의 딸이 중풍에 걸린 것처럼 입을 실룩거리고, 이조참의 김천석의 딸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으며, 전 군자감 이운로의 딸은 절름발이처럼 절룩거려 선발을 모면해 보려고 합니다. 화가 난 중국 사신 황엄은 아버지들을 귀양 보내고 파직하도록 합니다. 이렇게 선발된 처녀들이 영은문에서 가족과 생이별을 할 때 부모형제들의 울부짖는 소리로 영은문 주위는 온통 울음바다가 되었으니 사신의 배웅을 나온 조선 국왕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청일전쟁이 끝난 뒤인 고종 32년(1896) 영은문은 사라지고 대신 독립문이 들어섰습니다.

이때 영은문의 주춧돌을 남긴 것은 치욕을 기억하고 자주를 위해 국력을 키우자는 뜻이었을 것입니다.

 

'화냥년'의 유래

이후 끌려갔던 조선 여인들 중 일부가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는 데 그 여인들을 '환향녀(還鄕女)' 즉 고향으로 돌아온 여인들이라 불렀는 데 대부분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하고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들을 차별해서 부른 욕이 '환향년'에서 '화냥년'으로 발전하여 이제는 '남편이나 정인을 버리고 도망나가 바람난 못 된 여자'의 표현으로 굳어지게 되었다고 하니 슬픈 일입니다.

 

 

1979년 성산대로 건설로 이설하기 전에는 주초가 독립문앞에 없었다. 

 

모화관(慕華館)

1407년(태종 7) 송도(松都 : 개성)의 연빈관(延賓館)을 모방하여 서대문 밖에 모화루(慕華樓)를 세웠다가

1430년(세종 12) 모화관으로 개칭하고, 1433년 개축했는데 남쪽에는 연못이 있고 주위에는 버드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중국 사신이 오면 원접사(遠接使 : 2품 이상)를 의주에 보내고 선위사(宣慰使 : 2품 이상)를 5곳에 보내어 연회를 베풀어

위로했다. 사신이 모화관에 들어가면 왕세자가 그 앞에 나아가 재배례를 행하고 백관도 재배례를 행한다.

그리고 백관은 반을 나누어 먼저 관(館)에 가서 기다린다. 사신이 돌아갈 때는 백관이 모화관 문 밖 길의 왼쪽에 순서대로

늘어섰다가 일시에 재배례를 행하고 전송했다. 청일전쟁 이후 폐지되었다.

1896년 모화관은 사대사상의 상징물이라 하여 독립관(獨立館)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는데, 이때 영은문을 헐고

독립문을 세웠다.

 

 

조선시대에 조선의 국왕이 중국 사신을 모화관에서 영접하는 모습

 

 

 

 

 

 

 

 

 

 

 

 

 

 

태평관(太平館)

 

조선 시대에, 중국 사신이 한양 숭례문안에 들어와서 머무르던 숙소. 지금의 서울 태평로에 있었다.

태평관의 위치를 본다면 태평관은 한양천도 이전까지 개경에서는 서소문밖에 위치하고 있었으나 한양천도후의 위치를 보건대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考)』에 의하면 '태평관은 숭례문 안의 양생방(養生坊)에 있다'는 것을 보면 현재 남대문

대한상공회의소 근처 일대라고 합니다 『한경지략(漢京識略)』에는 태평관은 숭례문내에 있는데 건립의 목적은 중국사신의 접대처라 하고 태평관의 뒤쪽에 누(樓)가 있는데 명나라 사신 동월(董越)이 지은 조선부(朝鮮賦)에는 태평관의 구조까지 설명되어 있다.현재 서울의 가로명으로서 불리고 있는 태평로 역시 태평관에서 유래되었다.

 

이 태평관은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파괴되었기 때문에 의주로부터 환도후 한때는 남별궁(현재 조선호텔 자리)을

태평관 대신에 사용한 때도 있었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