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성자료실/칼럼

마성 2019. 5. 2. 00:20

  佛敎無神論이다

 

元 義 範

 

이 글은 원의범 동국대 교수께서 19755월에 佛敎지에 기고한 것인데, 힌두교와 불교의 차별성은 물론 불교라는 종교의 특징을 밝힌 것이다. 그러나 19755월에 발표한 이 글을 과연 한국의 불자들이 몇 명이나 읽었으며, 또 읽은 독자 중에 그 뜻을 정확히 파악한 사람이 몇 명이나 되었겠는가. 만일 이 글의 참뜻을 이해하는 불자들이 많았더라면 지금의 한국불교는 좀 더 차원 높은 종교로 발전하였을 것임은 분명하다. 불교학이 크게 발전한 오늘날에도 불교의 무아설(無我說)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다소 난해하면서 매우 깊이 있는 이 글을 읽고 그 의미를 정확히 파악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일독을 권하는 것은 이 글에 불교의 핵심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 摩聖註 -

 

불타(佛陀)가 탄생하기 전에 이미 인도에는 베다(吠陀)에 근거한 종교와 범서(梵書)와 오의서(奧義書)에 의한 철학이 있었다. 베다의 종교와 오의서의 철학은 계속 발전하여 바라문교(婆羅門敎)와 인도교(印度敎, 지금의 힌두교를 말함. 摩聖註)가 되었다. 베다의 종교에서 이미 다신교(多神敎), 단일신교(單一神敎), 교체신교(交替神敎), 유일신교(唯一神敎)의 성격을 모두 갖추고 있었고 그런 여러 신()들 가운데에서도 최고의 위치를 차지하게 된 신이 범신(梵神, Brahman)이었는데, 범신은 이미 유일신(唯一神), 창조신(創造神), 법률신(法律神) 노릇을 하였고, 범신은 만유(萬有)를 만든 자(Visvakarman)로 간주되었으며, (, Sat)의 개념만으로도 파악될 수 없고, 또 무(, Asat)의 개념만으로도 파악될 수 없는 초자연적 존재자였고, 또한 모든 것이 무()와 암흑 속에 쌓여 있으면서 아직 생겨나기도 이전에 이미 범신은 살아서 숨을 쉬며 의욕(思欲, kama)을 가진 유일자(唯一者, tedekam)이었고, 세계와 모든 신()들도 그의 의욕에 의하여 생겨난 자였다.

 

범신은 또한 언어(言語, Vac)를 가진 최고 원리적 존재자였고 그의 말이 모든 신들과 세계를 지배하면서 편재(偏在)하였다. 그는 인간이 사악(邪惡)한 짓을 하면 처벌하지만 회개(悔改)하면 용서하며 선인(善人)들이 사후(死後)에 가서 즐겁게 살 낙원(樂園)과 신국(神國)을 미리부터 마련해 놓고 있었다. 그렇게 의()롭고 힘이 있고 자비(慈悲)스러운 신()에게 전아적(全我的)으로 귀의(歸依)하는 신애(信愛)의 종교도 이미 인도인들은 불타 이전에 가지고 있었다.

 

구미의 유명한 불교철학자로 알려진 에드워드 콘즈(Edward Conze)씨는 인도를 ()을 사랑하는 나라(God loving Country)”라 하였고, 함부르그대학교 교수이며 동양학자이며 종교학자인 윌헤름 군대르트(Wilhelm Gundert)씨는 인도를 일체(一切)가 신() 안에 있는 가르침(Alles in-gott-Lehre)”이라고 하였는데, 인도는 사실상 옛날부터 만신당(萬神堂) 같은 나라였다.

 

인도교나 바라문교에서는 그들의 신() 이상의 다른 어떤 신이 있을 수도, 발견될 수도 없으리만큼 신이란 신은 모두 다 그들의 종교 안에 포섭하였다. 그래서 인도교가 있는 곳에서는 인도교나 바라문교가 아닌 다른 어떤 형태의 유신론(有神論)도 있을 수도 발견할 수도 없었다. 바라문교나 인도교가 있는 곳에서 누가 어떤 새로운 종교나 철학을 주장하면 결국 그런 새로운 종교나 철학이 유신론인 경우에는 기성 바라문교나 인도교의 일파로 낙찰될 수밖에 없었고, 만약 그렇지 않다면 무신론(無神論)으로서 바라문교나 인도교 이외의 외도(外道)의 일파로 전락될 뿐이었다.

 

바라문교나 인도교가[20] 아닌 종교나 철학들에서는 그들 자신의 독립적인 신()을 도저히 내세울 수는 없었고,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영혼불멸(靈魂不滅)을 말하는 경우에도 영혼을 물질적으로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사상적 환경 속에서 바라문교를 반대하면서 일어난 불타(佛陀)의 사상은 무신론 이외의 다른 것은 될래야 될 수가 없었다.




 

불교의 근본 교리인 삼법인(三法印)이 모두 부정적으로 무상(無常), 무아(無我), 적정(寂靜)으로 표시된 까닭도 바라문교의 유신론적 긍정적 절대적 교리를 무엇보다도 먼저 부정하려는 데에 있었다. 또 사성제(四聖諦), 팔정도(八正道), 십이인연설(十二因緣說)도 역시 그런 뜻에서 바라문교의 신본주의적(神本主義的) 사상을 타파하기 위하여 인간과 세계의 모든 길흉화복(吉凶禍福)의 원인이 신()에게 있지 않고 오직 인간 자신과 세계 내에 그 원인이 있음을 밝히는 교설(敎說)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인간 자신에게 차안적 절대성(此岸的 絶對性)을 인정하고 인간 자신을 신격화(神格化)하고 절대시(絶對視)하는 그런 현대적 그릇된 인본주의사상(人本主義思想)을 불교사상(佛敎思想)이라고 할 수도 없다.

 

불교(佛敎)에서의 인간의 위치는 항상 가변적(可變的)이고 과정적(過程的)이고 상대적(相對的)이다. 노장학(老莊學)의 무()의 근저에는 무위면화(無爲面化)하는 자연적 원리가 놓여있고, 유물변증법적(唯物辨證法的) 모순(矛盾)의 근저에는 굶주린 삶이 놓여있고, 실존주의(實存主義)의 불안의 근저에는 필연적 죽음을 향한 단일회적(單一回的)인 하나하나의 인간이 놓여있고, 기독교의 종말론적(終末論的) 신앙의 근저에는 인격적(人格的) 절대적(絶對的) 심판자(審判者)가 놓여있다고 한다면, 불교의 공사상(空思想)의 근저에는 인연(因緣)에 따라 항상 변화하는 인간과 세계가 놓여있다.

 

따라서 불교에서 말하는 인간의 자성(自性), 불성(佛性), 일심(一心) 등 그것들이 다만 종자(種子, diza)적 가능성을 뜻할 뿐이어서 그것들은 인연(因緣)과 수행(修行)에 따라서 선악(善惡), 진속(眞俗), 미추(美醜) 등 그 어떤 것에로도 전개되고 성장될 수 있다. 자성, 불성, 일심 따위는 결코 유일불변(唯一不變) 하는 고정적(固定的) 절대성(絶對性)이 아니다. 불교에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고 할 경우에도 그 마음은 결코 기독교의 하느님과 같은 그런 유일(唯一) 절대적(絶對的)인 인격적(人格的) 존재(存在)가 아니라는 것은 화엄(華嚴)의 심불급중생무차별설(心佛及衆生無差別說), 원각경(圓覺經)의 가명위심설(假名爲心說), 천태(天台)의 일심삼관설(一心三觀說), 유식(唯識)구사(俱舍)의 심요소설(心要素說) 등에 의하여서도 충분하게 증명될 수 있다.

 

결국 불교는 인간 밖에도 인간 안에도 어떠한 절대자(絶對者)도 신적존재자(神的存在者)도 인정하지는 않는다. 더욱이 인신적 절대자(人神的絶對者), 예컨대 과거 일본천황설이나 기타 그런 따위는 일체 인정하지 않는다. 불교는 바라문교를 부정함에 의하여 이미 수 천 년 전에 불교가 다신론도, 단일신론도, 교체신론도 유일신론도, 인격신론도 아님을 단번에 밝혔고, 또 인간 안에 내재(內在)한다고 생각되는 어떠한 차안적 절대자(此岸的絶對者)도 이를 무아설(無我說)에 의하여 부정함으로써 인만천적 유신론(人萬天的有神論)도 이미 아니었다. 결국 불교는 피안적 인격신론(彼岸的人格神論)도 결코 아니다.

그러면 불교는 자기 자신의 교리 혹은 진리(眞理, dharma) 또는 법신불(法身佛, dharmakāya)을 절대신성시(絶對神性視)하는 이신론적(理神論的)이고 범신론적(汎神論的)인 유신론이 아닌가 하는 문제가 어떻게 부정될 수 있을까?

 

앞서 말한바와 같이 삼법인(三法印)의 무상(無常)과 무아(無我)와 적정(寂靜)은 불교의 대전제적(大前提的) 원리(原理)이다. 그러나 승만경(勝鬘經)세존견제행무상시단견비정[21](世尊見諸行無常是斷見非正見)”라고 있음을 위시하여 다른 모든 대승적경론(大乘的經論)들에서 아공법유(我空法有)의 사상이 잘못임을 법아양공설(法我兩空說)에 의하여 밝혀 있고, 또 열반적정(涅槃寂靜) 역시 어떤 절대적인 것이 아님을 역시 승만경에서 세존견열반상주시상견비정견(世尊見涅槃常住是常見非正見)”이라고 있음을 위시하여 여러 대승경론(大乘經論)에서 생사열반(生死涅槃)이 불일불이(不一不二)하며 무유정법아뇩다라삼먁삼보리(無有定法阿耨多羅三藐三菩提)”라고 밝혀 있는 것 등으로 미루어 보아 불교가 결코 내용적으로 고정불변의 절대적 진리나 교리를 고집하고 있지 않음을 역역히 알 수 있다.

 

만약 불교에 어떤 추상적 개념적 진리가 있다면 그것은 전혀 인식방법론적(認識方法論的)인 것이며, 그것도 부정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불교의 공사상(空思想)은 존재론적(存在論的)으로는 무()로 언표(言表)되고, 인식론적으로는 부정으로 언표되고, 초월적인 언표로서는 묘유(妙有)로 표현된다. 삼론팔부(三論八不)의 파사현정적(破邪顯正的) 부정의 논리가 그런 내용을 잘 말하여 주고 있다.

 

불교 이외의 일반철학에서의 변증논리(辨證論理)는 무()에 근거한 유()의 논리이며, 구성적(構成的) 개념적(槪念的) ()의 진()임을 고집지양(固執止揚, aufheben)하는 논리이지만 불교의 변증논리는 유()에 근거한 무()의 논리이며, 구성적 개념적 유()의 가()임을 논파(論破)하고 기각하는 파기적(破棄的) 변증법(辨證法)이다. ()에서 무()로 향하는 파기적 변증법에는 잠시라도 어떤 절대적 개념이 형성되고 유지할 틈이 없다. 이와 같이 불교교리에는 어떠한 절대적 개념도 허용될 여지가 없고 보면 결국 불교는 이신론(理神論)도 범신론(汎神論)도 될 수 없음이 원리적으로 명백하다.

 

그러면 끝으로 그것들이 없이는 오늘날의 역사적 불교를 거의 생각할 수 없으리만큼 그만큼 많은 불상(佛像), 탱화(幁畵), 위패(位牌) 등에 대한 예배 등은 무엇을 뜻하는가. 한말로 하여 그것들은 다만 불타의 설법(說法)의 연장이요 응병여약식(應病與藥式) 포교방편(布敎方便)과 그 재료들에 지나지 않는다. 언어도단(言語道斷)의 경지에서 염화시중(拈花示衆) 곽시쌍부(槨示雙趺)가 있듯이 경()과 논()에 의한 지적포교(知的布敎)가 다하는 곳에서 불상, 탱화 등 불기구(佛器具)에 의한 정적포교(情的布敎)가 있다.

 

외적색경(外的色境)에 지배받기 쉬운 중생심(衆生心)을 외적색경에 의하여 교화하기 위하여 외적색경의 완벽을 기한 곳이 곧 극락장엄(極樂莊嚴)이요, 사찰도량(寺刹道場)의 청정장엄(淸淨莊嚴)이다. 울리는 범종(梵鍾)과 두들기는 목탁의 소리는 울리고 치는 자의 음율적(音律的) 자기도취(自己陶醉)를 위한 것이 아니라 듣는 중생(衆生)들에 대한 경종이듯이 경과 논은 평면적(平面的) 시각적(視覺的) 포교방법(布敎方法)이고, 불상, 불탑, 범종, 목탁, 탱화 등은 입체적(立體的) 시청각적(視聽覺的) 정적(情的) 포교방법(布敎方法)이다.

 

경론을 독송(讀誦)함과 불상 등에 대한 예배와는 본질적으로 아무런 차이도 없다. 모두가 불교를 깨닫는 하나의 방법과 그 재료들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라는 문자나 음성에서 어떤 신()을 발견하는 사람은 관세음보살상 앞에 배례 드리면서도 역시 그런 신을 발견하고 느낄 것이니 그런 사람은 마치 포에르바흐가 이미 인간은 자신의 모습대로 신을 그린다라고 갈파하였듯이 자기 자신의 모습대로 신을 만드는 사람이며, 그런 사람은 불교를 깨닫고 관세음보살의 진신(眞身)을 보는 사람이 아니라 문자(文字)나 목석(木石)에게 자기 자신의 우상(偶像)을 불어넣는 마술사(魔術師)와 다름이 없는 사람이다. 불교는 어떤 면으로 따져도 알쏭달쏭한 종교가 아니라 확실한 무신론이다.

- 佛敎53(19755월호), pp.19-21. -


스님 감사합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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