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성자료실/칼럼

마성 2019. 6. 24. 13:09

정적포교와 지적포교

 

붓다의 가르침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가르침을 전하는 방법은 변한다. 만일 붓다의 가르침을 전하는 방법, 즉 포교방법이 변하지 않으면 불교의 교세는 점차 약화되고 말 것이다. 이를테면 한글세대에게 한문경전으로 교육시키는 것은 교육의 목표를 달성하기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종단에서는 끊임없이 새로운 포교방법을 모색해야만 한다.

 

불교포교는 크게 둘로 구분된다. 하나는 인간의 감성에 호소하여 붓다의 가르침을 전하는 정적포교(情的布敎)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의 이성에 호소하여 붓다의 가르침을 전하는 지적포교(知的布敎)이다. 전자가 방편(方便)이라면 후자는 실제(實際)라고 할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적포교를 통해 지적포교로 나아간다.

 

정적포교는 불교문화나 불교예술 등을 통해 불교와 가까워지도록 하는 것이다. 훌륭한 불상이나 불화, 불교음악이나 불교의 유형무형문화를 통해 불교와 친근해지도록 하는 일체의 행위가 이에 속한다. 외국인이 템플스테이나 연등축제, 불교의 전통의례인 영산재 시현 등을 보고 불교에 호기심을 갖는 것이 대표적인 정적포교의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의 사회관계망 서비스(SNS)에 올라오는 불교 관련 게시물의 80-90%가 정적포교에 관한 것이다. 정적포교는 불교에 전혀 관심이 없던 사람이 불교문화를 접하고 불교와 가까워지게 하는 효과는 분명히 있다. 특히 불교에 대한 적대감이나 나쁜 선입견을 제거하는데 크게 도움이 된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곧바로 불교도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 다음 단계인 지적포교로 연결되지 않으면 불교포교의 본래 목적을 달성할 수가 없다. 이것이 정적포교의 한계이자 단점이라고 할 수 있다.


사진은 인터넷에서 가져온 것임 


또 정적포교를 통해 불교에 어떤 사람을 입문시켰다 할지라도 상황이 바뀌면, 그 사람은 불교를 떠나거나 아니면 불교교리를 보다 체계적으로 공부하기 위해 그 사찰을 떠난다. 이처럼 정적포교는 종착지가 아니라 지나가는 경유지에 불과하다. 결국에는 지적포교가 아니면 한 사람의 완전한 불교도로 교화시키지 못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복신앙으로 불교에 입문한다. 그러나 그 기복신앙에 염증을 느끼고 불교신앙을 포기하거나 아니면 보다 높은 단계의 신행으로 나아간다. 후자의 경우에는 불교를 체계적으로 공부해 신심 돈독한 불자로 성장하게 된다.

 

현재 불교단체나 사찰에서 실시하는 불교대학에서 체계적으로 불교교리를 공부하는 것은 대표적인 지적포교에 해당된다. 지적포교는 교육자와 피교육자 모두에게 많은 시간과 노력이 요구된다. 이와 같이 교육을 통해 불교의 바른 인생관과 세계관이 형성되어야 진정한 의미의 바른 포교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불교도가 된 사람은 외부의 어떠한 유혹이나 영향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그런 사람이야말로 비로소 참다운 불자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정적포교의 무용론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정적포교가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할 뿐이다. 불교포교란 붓다의 가르침을 통해 그 사람의 인생관과 가치관이 변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붓다의 가르침에 의해 자신의 생각이 바뀌어 불교적 가치관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으로 변해야 한다. 그때 비로소 완전한 불교도라고 할 수 있다. 그저 불교문화를 접하고 한때나마 불교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고 해서 그가 진정한 불교도가 되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서 정적포교는 불자로 성장해 가는 하나의 과정에 불과하다. 그런데 그 정적포교로 불자의 사명을 다했다고 자부하거나 정적포교에 목숨을 거는 것은 권장할 일이 아니다. 물에 빠진 사람이 물에 빠진 사람을 구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남을 교화하기에 앞서 자기 자신부터 붓다의 가르침에 대한 확신을 갖는 것이 급선무이다. 자기 자신도 불교에 대한 확신이 없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을 제도할 수 있겠는가?

2019. 6. 24.

마성


스님의 말씀에 절대 동의 합니다
앞으로도 좋은 말씀 ㆍ글 올례주기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