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성자료실/칼럼

마성 2020. 4. 30. 10:13

 

24. 봉축행사 없는 불탄절

 

예전 이맘때쯤이면 길거리에 부처님 오신날이라는 현수막이 펄럭이고, 봉축탑이 설치되는 등 초파일이 가까워지고 있음을 세상에 알렸다. 그러나 올해는 코로나19로 불탄절 봉축행사가 윤48일로 연기되었다. 불탄절 봉축행사가 한 달 연기된 것은 한국불교사에서 처음 있는 일이다. 625 전쟁 중에도 불탄절 봉축행사는 그대로 진행되었다. 코로나바이러스가 전쟁보다 더 무서운 전 지구적 재앙임을 실감하게 된다. 세계적 대유행(pandemic)이 가져다준 현상이다. 살면서 이런 일을 겪을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떠들썩한 축제 없는 초파일을 맞이하고 있다. 초파일이라고 하면 제일 먼저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연등 달기와 연등축제다. 연등 달기는 사찰에서 이루어지지만, 연등축제는 지역 단위로 대규모 행사로 치러진다. 비록 봉축행사 없는 부처님 탄신일을 맞이하지만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다. 사찰경제에는 치명적인 타격을 받겠지만, 이번 기회에 등 달기도 온라인으로 실시하는 풍토가 정착되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오히려 한국불교가 미래에까지 생존할 수 있는 자구책을 마련하는 좋은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제등행렬을 한 달 연기한 것은 부득이한 경우에 속한다. 그러나 궁하면 통한다고 궁즉통(窮則通)’의 묘책을 발휘한 것이다. 궁즉통의 철학은 난관이 있어도 주저앉지 않고 새 길을 찾고자 혼신의 힘을 기울인다는 뜻이다. 마침 올해에 음력 윤달이 4월에 중복되었기에 불교도들이 큰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다. 그렇더라도 어떤 특정 기념일을 환경과 상황에 따라 바꾸어 실시하는 것은 권장할 일이 못된다. 인위적으로 정해진 날짜를 바꾸는 것은 시간의 흐름을 역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현상계는 연기법에 따라 그냥 흘러갈 뿐이다.

 

종교의 구성 요소 가운데 제의(祭儀)가 차지하는 비중이 높다. 불교에서도 제의를 중시하지만 예외가 없지는 않다. 초기불교의 교리에 따르면 제의 없는 기념일을 기리는 것이 가능하다. 과도할 정도로 많은 공양물을 쌓아놓고 의례를 집전한다고 해서 부처님이 반가워하지도 않을 것이다. 형식적인 예배나 외형적인 행사는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의례에 불과하다. 보다 본질적인 측면에서 보면 붓다의 가르침을 바르게 이해하고 바르게 실천하는 것이 진정으로 붓다를 찬탄하는 것이다.

 

부처님을 회상하는 불수념(佛隨念, buddha-ānussati)만으로도 충분하다. 불수념이란 부처님의 위대한 위덕과 크신 공덕을 마음속으로 새기는 것이다. 불수념을 다른 말로 염불(念佛, buddha-manasikāra)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염불이란 불보살의 명호를 부르는 칭명염불이 아니라 부처님을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즉 부처님의 공덕이나 모습을 마음속으로 생각하여 잊지 않는 것을 붓다-마나시까라라고 한다. 한편 칭명(稱名)은 부처님의 이름을 부르는 행위이다. 이처럼 염불과 칭명은 원래 다른 것이었다. 그러나 나중에는 나무아미타불등 불명호(佛名號)를 외우는 칭명을 염불이라 일컫게 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2006년 4월 8일 진해 대광사에서 봉행된 부처님 오신날 봉축 행사의 한 장면


남방불교에서 행해지고 있는 불수념(부처님 회상) 의식은 대략 다음과 같다.

 

먼저 인도자가 이제 우리 모두 부처님, 그 존귀하신 분께 먼저 존경의 예와 더불어 바른 방법으로 부처님을 회상하는 방법에 대해 독송하겠습니다.”라고 말하면 대중들은 다음과 같이 암송한다.

 

전해 내려오는 기록에 따르면, 부처님의 명성이 다음과 같이 널리 전파되었습니다. 그분 존귀하신 분, 모든 번뇌 떠나신 분, 스스로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신 분, 지혜와 덕행을 함께 갖추신 분, 진리의 길을 보이신 분, 세상일을 모두 훤히 아시는 분, 어리석은 이도 잘 이끄는 위없는 분, 모든 천상과 인간의 스승, 깨달으신 분, 존귀하신 분입니다.”

 

그런 다음 부처님을 찬탄하는 찬탄송을 암송한다. 먼저 인도자가 이제 우리 모두 부처님을 진실로 찬탄하는 게송을 독송하겠습니다.”라고 하면, 대중들은 다음과 같이 암송한다.

 

부처님은 아라한의 훌륭한 덕행을 잘 갖추시어, 청정하고 뛰어나신 지혜와 자비 함께 지니셨고, 태양같이 밝히시고 연꽃처럼 활짝 열어, 중생들을 깨닫게 하셨으니 저는 번뇌의 승리자요, 평화로운 그 분께 머리 숙여 예경합니다.”

 

부처님은 중생들의 으뜸가는 의지처요, 가장 안정한 곳이니, 이와 같이 회상하며, 첫 번째로 머리 숙여 예경합니다. 저는 부처님의 시봉자요, 부처님은 저의 위대하신 인도자이니, 부처님은 괴로움의 해방자이며, 제 행복의 제공자입니다. 부처님께 저의 몸과 생명 다 바쳐 헌신하나니, 저는 부처님의 진실한 깨달음을 존경하며 살아가겠습니다.”

 

저에게는 다른 의지처가 없습니다. 부처님은 진실한 저의 의지처, 이와 같은 진실을 말함으로써, 깨달음의 길에 이르길 바랍니다. 제가 부처님을 이같이 예경하는 공덕으로, 어떤 위험도 저에게 다가오지 않기를 바랍니다.”

 

(오체투지한 채로) “몸에 의해서나, 말에 의해서나, 마음으로 인해서, 부처님께 어긋나게 제가 지은 크고 작은 나쁜 행위들, 부처님을 의지하여 그 모든 허물의 용서를 빕니다. 이후로는 부처님을 본받아 조심스레 행하겠습니다.”

 

이러한 형식으로 법과 승가에 대한 예경과 찬탄, 그리고 다른 경전 독송으로 이어진다. 그런 다음 설법이나 축원으로 이어진다면, 그분 오신 참뜻을 바르게 회상하는 훌륭한 기념식이 될 것이다. 실제로 남방불교에서는 그렇게 실시하고 있다. 외형적으로 화려한 축제보다는 내면적으로 부처님을 그리워하고 추모하는 행사로 진행된다.

 

이와 같이 부처님을 회상한다면 훌륭한 축제가 될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에 역행하는 삶을 살거나 부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참뜻을 알지 못한 채 공양이나 축제에 몰두하는 것은 크게 권장할 일이 못된다. 화려한 축제보다 그 분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들에게 가르쳐주고자 한 것이 무엇이었는가를 되새겨 보는 것만으로도 그 분 오심을 찬탄하는 거룩한 불사가 될 수도 있다.

마성/ 팔리문헌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