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성자료실/칼럼

마성 2020. 10. 25. 17:44

마성 스님의 법담법화

 

28. 복을 구하는 사람

 

오래 전에 증일아함경(38:5)에 나오는 붓다와 아누룻다(Anuruddha, 阿那律) 존자 간에 있었던 일화를 읽고 큰 감동을 받은 적이 있다. 이른바 복을 구하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인데, 오늘날의 출가자와 재가자 모두에게 유익한 가르침이다.

 

한때 세존께서는 사왓티의 기수급고독원에서 많은 대중들을 위해 법을 설하고 계셨다. 그때 아누룻다는 붓다의 설법 도중에 졸고 있었다. 붓다는 아누룻다에게 무엇 때문에 출가한 것이냐고 힐난하고, “여래가 직접 설법하는데 어떻게 졸고 있느냐?”고 꾸짖었다. 이를 계기로 아누룻다는 지금부터는 몸이 부셔지는 한이 있어도 다시는 세존 앞에서 졸지 않겠습니다.”라고 명세했다.

 

그때부터 아누룻다는 잠을 자지 않고 정진했다. 그 때문에 그는 눈병이 생겼다. 그래도 그는 잠을 자지 않고 정진했다. 그래서 붓다는 아누룻다에게 너무 지나치게 정진하면 들뜸과 후회라는 조바심과 어울리고, 너무 게으르면 번뇌와 어울리게 된다. 그러므로 너는 그 중간을 취하도록 하라고 타일렀다. 그러나 아누룻다는 붓다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계속 잠을 자지 않고 정진하여 실명할 위기에 처했다. 붓다는 의사 지와까(Jīvaka)에게 아누룻다의 눈병을 치료해 주라도 간곡히 당부했지만, 그는 잠시도 잠을 자지 않고 정진함으로써 결국 완전히 시력을 잃어버렸다.

 

한때 아누룻다는 낡은 옷을 깁다가 비록 육안은 허물어졌지만, 천안을 얻게 되었다. 아누룻다는 옷을 기우려 하였으나 실을 바늘귀에 꿸 수가 없었다. 그는 이 세상에서 도를 얻은 아라한은 나를 위해 바늘을 꿰어다오라고 생각했다. 붓다는 천이통으로 그 소리를 듣고 아누룻다에게 다가가 너는 그 바늘을 가져오라. 내가 꿰어 주리라.” 아누룻다는 아까 제가 말한 것은 세상에서 복을 구하려는 사람은 저를 위해 바늘을 꿰어달라는 것이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세존께서는 세상에서 복을 구하는 사람으로 나보다 더한 사람은 없다. 왜냐하면 나는 여섯 가지 법에 만족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무엇이 여섯인가? 첫째는 보시(布施), 둘째는 교계(敎誡), 셋째는 인욕(忍辱)이요, 넷째는 법다운 설명과 이치에 맞는 설명(法說義說)이요, 다섯째는 중생들을 보호하는 것이요, 여섯째는 위없는 바르고 참된 도를 구하는 것이다. 아누룻다여, 이것이 이른바 여래는 이 여섯 가지 법에 만족할 줄 모른다는 것이다.”

 

아누룻다는 여래의 몸은 진실한 법의 몸이신데, 다시 무슨 법을 구하려 하십니까? 여래께서는 이미 생사의 바다를 건너고 또 애착을 벗어나셨는데, 지금 또 애써 복을 구하십니까?” 세존께서는 그렇다. 아누룻다여, 네 말과 같다. 여래도 이 여섯 가지 법에 만족할 줄 모른다는 것을 안다. 만일 중생들이 죄악의 근본인 몸과 입과 뜻의 행을 안다면 끝내 세 갈래 나쁜 곳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저 중생들은 죄악의 근원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세 갈래 나쁜 곳에 떨어지는 것이니라.” 그때 세존께서는 다시 게송을 읊으셨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힘 중에(世間所有力)

천상과 인간에서 노닐게 하는 것(遊在天人中)

복의 힘이 가장 훌륭하나니(福力最爲勝)

그 복으로 불도를 성취하네.(由福成佛道)(T2, 718c-719b)

 

이 경의 핵심 내용은 붓다일지라도 중생들을 위해 끊임없이 복을 지어야 한다는 것이다. 복의 힘은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것이며, 이 복의 힘으로 깨달음도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불멸 후 아프카니스탄에서 최초로 불상이 조성되기 이전에는 붓다를 상징하는 불탑이나 불족적(佛足跡), 보리수 등이 예배의 대상이었다. 사진은 스리랑카 고대 수도 아누루다뿌라에 있는 이수루무니야(Isurumuniya) 사찰 바위에 새겨진 불족적이다.

 

이 경과 대응하는 니까야는 발견되지 않는다. 그런데 나가르주나(Nāgārjuna, 龍樹)가 지은 대지도론(大智度論) 10에서 이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비록 증일아함경의 내용과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지만, 복덕 혹은 공덕의 중요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대지도론에서는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부처님 당시에 어떤 눈이 먼 비구가 있었는데, 아무것도 보지 못하면서 옷을 꿰매다가 바늘의 실이 빠지고 말았다. 그러자 이렇게 말했다. “누가 복덕을 사랑하시어 내 바늘귀를 꿰어주시겠습니까?” 이때 부처님께서 그곳에 가셔서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복덕을 좋아하는 사람이니라. 내가 그대의 바늘귀를 꿰어 주러 왔느니라.”

 

그러자 그 비구는 부처님의 음성임을 알아듣고는 얼른 일어나서 옷을 걸치고 부처님의 발에 절한 뒤에 이렇게 말씀드렸다. “부처님께서는 모든 공덕이 이미 만족하신데 어찌하여 또한 복덕을 사랑한다 말씀하십니까?” 부처님께서 대답하셨다. “나는 비록 공덕이 이미 충만하지만, 공덕의 은혜와 공덕의 과보와 공덕의 힘을 깊이 아노라. 나로 하여금 모든 중생 가운데서 가장 으뜸감을 얻게 한 것은 바로 이 공덕 때문이니라. 이런 까닭에 나는 공덕을 좋아하느니라.”

 

부처님께서 그 비구를 위해 공덕을 두루 찬탄하시고 이어 알맞게 설법해 주시니, 그 비구는 법의 눈이 맑아졌으며 육안도 밝아졌다. 또한 부처님께서 공덕이 이미 충만해서 더 필요치 않으시지만 제자들을 교화하시기 위한 까닭에 나도 공덕을 짓거늘 너희들이 어찌 짓지 않느냐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마치 광대의 집안에서 백 살 먹은 노인이 춤을 추는데, 옆의 사람이 늙은이가 나이 이미 백 살인데 무엇 때문에 이런 춤을 추는가?”라며 질책해서 말한다면, “나는 춤이 필요치 않지만 다만 자손들을 가르치기 위해서이다라고 대답하는 것과 같다.(T25, 129a)

 

이상에서 보듯이 붓다는 이미 공덕을 갖추었지만 제자들에게 공덕 짓는 법을 가르치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사실 이 세상에서 복덕이 제일이다. 비록 약간의 지혜를 가졌다할지라도 지은바 복덕이 없으면 빈궁고를 면할 수 없다. 경에서 복의 힘이 가장 수승하다고 찬탄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이제부터라도 목숨을 마칠 때까지 복을 지어야겠다.

마성/ 팔리문헌연구소장

―≪법보신문1545, 2020713,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