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성자료실/칼럼

마성 2020. 10. 25. 21:39

마성 스님의 법담법화(33)

 

33. 명상에 대한 오해

 

요즘 명상에 관한 서적들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오고, 정체불명의 명상들이 범람하고 있다. 인터넷 검색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명상의 종류만도 다 헤아리기 어렵다. 이를테면 힐링 명상, 마음 명상, 마음챙김 명상, 호흡 명상, 자비 명상, 휴심 명상, 죽음 명상, 평화 명상, 다도 명상, 놀이 명상, 춤 명상, 달리기 명상, 잠자는 명상, 이완 명상, 바디스캔 명상 등이다. 그러면 이처럼 많은 명상들이 유행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현상인가?

 

명상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증가하고 있는 것은 현재의 사회현상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첫째는 기성 종교에서 위안을 얻지 못한 사람들이 탈종교화 현상으로써 명상 쪽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 둘째는 현대인이 겪고 있는 극심한 스트레스와 우울증과 같은 상처받은 마음을 치유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명상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이른바 기성 종교에서 얻지 못하는 것을 명상을 통해 얻을 수 있다는 기대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최근에 유행하고 있는 명상은 불교의 수행법에 기반을 둔 것도 있지만, 전혀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특히 종교와 전혀 상관없이 누구나 실천 가능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또 우울증과 같은 정신질환과 상처받은 마음의 치유를 목적으로 실시하기도 한다. 이처럼 명상을 실시하는 목적이 각기 다르기 때문에 진위나 우열을 가리는 것도 쉽지 않다.

 

결론부터 말하면 초기불교의 수행론에 근거한 이론 체계에 바탕을 두지 않은 명상은 불교명상이라고 할 수 없다. 경전이나 교리에 근거하지 않고,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이해와 체험에 바탕을 둔 것은 올바른 불교의 수행법이라고 볼 수 없다. 조준호 박사는 그의 저서 󰡔불교명상: 사마타 위빠사나󰡕에서 불교명상의 이해는 어느 날 갑자기 명상 센터 몇몇을 경험했다고 수행이론과 실천방법이 터득되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마찬가지로 특정 기관이나 특정 지도자에게 이론과 지도방법을 배웠다고 해서 바로 지도가 가능한 일도 아닐 것이다.”(위의 책, p.4)고 지적한다.

 

불교수행은 사마타(samatha, )와 위빳사나(vipassanā, )라는 두 축으로 이루어져 있다. 둘 중에서 어느 하나라도 결핍되면 올바른 불교수행법이라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사마타()와 위빳사나()를 함께 닦는 지관겸수(止觀兼修)야말로 불교수행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선불교에서는 정혜쌍수(定慧雙修)라는 부른다. 또한 사마타와 위빳사나를 통해 얻게 되는 결과도 서로 다르다. 현재 유행하고 있는 명상들은 명상을 통해 얻게 되는 이익을 과장한 측면이 강하다. 처음부터 세속적 이익을 목적으로 삼는 명상은 불교수행이라고 보기 어렵다. 불교수행의 궁극적 목적은 열반증득에 있기 때문이다.

 

스리랑카의 고대 도시였던 폴론나루와(Polonnaruwa)에 위치한 바위 사찰인 갈 위하라(Gal Vihara)에 새겨진 선정불(禪定佛)이다. 이 불상은 12세기에 빠라끄라마바후 1세(Parakramabahu 1)왕 통치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삼매에 든 붓다의 모습을 잘 묘사한 세계적인 불상 가운데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앙굿따라 니까야>에서는 사마타와 위빳사나를 통해 얻게 되는 이익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사마타를 닦으면 어떤 이익이 있는가? 마음이 계발된다. 마음이 계발되면 어떤 이익이 있는가? 욕망이 제거된다. 위빳사나를 닦으면 어떤 이익이 있는가? 지혜가 계발된다. 지혜가 계발되면 어떤 이익이 있는가? 무명(無明)이 제거된다.”(AN..61)

 

사마타는 심일경성(心一境性)을 얻기 위한 수행이고, 위빳사나는 지혜를 얻기 위한 수행이다. 따라서 사마타를 통해 삼매를 얻게 되고, 위빳사나를 통해 지혜를 얻게 된다. 한마디로 마음의 동요나 들뜸을 가라앉힌 평온의 상태가 아니면 지혜가 나올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정 없이도 위빳사나 수행이 가능하다거나 위빳사나를 통해 정신적 질병도 치유할 수 있다고 장담하는 것은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위빳사나는 만병통치약이 아니기 때문이다. 임승택 교수는 수행에 처음 입문한 사람에게는 일단 사마타를 통해 마음의 동요를 가라앉히는 절차가 권장된다. 탐욕이라든가 분노 따위에 흔들리는 상태에서는 정신적 진전을 기대할 수 없다. 따라서 마음을 비우고 가라앉히는 과정이 우선적으로 요구된다. 붓다 역시 출가한 이후 처음 얼마 동안은 사마타 수행에 전념했던 것으로 전해진다.”(MN..163-167; 임승택, 초기불교, pp.253-254)고 지적한다. 그런데 하물며 춤이나 달리기 등을 통해 명상이 가능하겠는가?

 

사마타나 위빳사나 수행보다 더 중요한 것은 수행에 앞서 계행(戒行)이 청정해야 한다. 도덕적으로 허물이 없어야 얽매임에서 벗어나 집중과 평온을 유지할 수 있게 된다. 도덕적으로 청정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그 어떤 명상의 효과도 기대하기 어렵다.

 

실제로 수행을 해보면 사마타와 위빳사나의 경계가 불분명하다. 즉 사마타와 위빳사나가 동시에 이루어진다. 그렇게 고안된 것이 바로 사념처(四念處)이다. 이른바 몸에 대한 지속적인 관찰(身隨觀)과 느낌에 대한 지속적인 관찰(受隨觀)은 사마타 수행에 가깝고, 마음에 대한 지속적인 관찰(心隨觀)과 법에 대한 지속적인 관찰(法隨觀)은 위빳사나 수행에 가깝다. 이처럼 사마타와 위빳사나를 함께 닦아야 한다.

 

불교수행에서는 앉음 명상(坐禪)’걷기 명상(行禪)’을 병행하고 있다. 둘 중에서 좌선이 주된 것이고, 행선은 부차적인 것이다. 행선은 좌선으로 경직된 육체의 근육을 풀어주고 졸음을 쫓기 위한 보조 수행이다. 그런데 걷기 명상을 너무 강조하는 것은 주객이 전도된 것이다. 붓다도 보리수 아래에서 좌선을 통해 깨달음을 이루었다.

 

동아시아불교 전통에서도 남방불교의 행선에 해당되는 경행(經行)이 있다. 경행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좌선으로 경직된 육체와 정신을 이완시키기 위한 걷기 명상이고, 다른 하나는 승려와 신자들이 거리를 다니면서 경전을 암송하는 가구경행(街衢經行)이다. 가구경행은 붓다에서 비롯된 것으로, 전염병과 같은 국가적 재난이 있을 때 실시되었다. 또 불가에서는 포행(匍行)’이라는 전통도 있다. 이것은 수행이라기보다는 육체의 건강을 위해 일정한 거리를 걷는 걷기 운동으로써, 지금의 산책이나 산행과 같은 개념이다.

 

위빳사나 수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띠(sati, 正念)와 삼빠잔냐(sampajañña, 正知)의 차이에 대한 이론적 체계가 확립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요가와 같은 길을 걷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웃음 요가나 다이어트 요가와 같은 것이 유행하면서 요가수트라에 나타난 요가의 본래 목적을 잊어버리고, 웃음거리가 되어 버렸다. 명상의 범람은 한때 유행했던 요가와 같은 길을 걷지 않을까 염려스럽다.

마성/ 팔리문헌연구소장

―≪법보신문1555, 2020930,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