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과 곤충 이야기

김대근 2010. 5. 9. 01:00

봄은 늘 아날로그다. 비단 봄에 한정 된 것은 아니고 모든 계절이 실상 아날로그적 진행으로 우리의 곁을 스쳐간다. 그러므로 봄이다 여름이다 하는 계절의 구분이 모호하다. 봄이라고 하지만 겨울도 공존하고 여름이라 하지만 봄이 어느정도 섞여 있다. 마치 회색의 공간처럼 정확하게 경계를 구분할 수 없는 시간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스스로의 편의에 의해 자연을 구분하는 방법을 개발했다. 그런 것중 가장 기본이 하루의 구분과 날짜의 구분이다. 자연현상을 관찰해 반복되는 현상들을 발견했고 그 반복되는 현상들을 구분해 절기를 만들었다. 이 절기들은 농경이 보편화되면서 우리 삶의 아주 익숙하고 중요한 것이 되었다. 절기에 따라 농사 준비를 하고 씨를 뿌리고 수확을 준비하는 것이다. 농경을 바탕하여 문명을 이룬 인간에게 절기란 굉장히 비중이 높은 부분이 되었다.

 

봄을 구분하는 절기에는 입춘(入春)이라고 하지만 실상은 경칩과 우수가 더 봄에 가깝다. 경칩은 개구리 같은 겨울잠을 자는 양서류가 겨울잠에서 깨어나 세상으로 나오는 날이다. 그래서 정확히 봄을 이야기 하려면 이 경칩이라는 절기가 가장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5월 5일 어린이날 창원 성주사에 들렀다. 어버이날을 앞두고 장모님을 찾아 뵙고 같이 모시고 간 곳이다. 절 앞 연못에서 개구리가 여기 저기서 울었다. 아마 얼마전 경칩에 잠을 깨어 이곳에 자리를 잡은 녀석들 일 것이다. 자신의 영역이 이곳임을 알리는 것인지, 짝을 찾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오랫만에 듣는 개구리 소리는 청량감마저 들게 만들었다.

 

 

개구리는 내 유년의 기억중 많은 부분을 차지 하고 있다. 그 탓일까?. 그동안 모아온 개구리 인형이 300개를 넘기고 있다. 거실의 유리장식장 하나 전체를 3층으로 가득 채운 것도 모자라 화장실에도 냉장고에도 개구리를 모티브로 한 생활용품들이 넘쳐난다. 집을 방문하는 사람은 누구나 첫 질문이 개구리 인형을 모으는 동기에 관한 것이다. 대개는 그냥 웃음으로 때워 넘기고 만다.

 

내가 초등학교 다닐때 대부분이 천수답인 들판에서는 물꼬 다툼이 심했다. 그러다보니 농민들끼리 차례를 정해 논에 물을 대어야했다. 아버지는 낮에는 농사를 짓고 밤에는 밀가루 공장에 다니셨다. 엄마는 어린 동생들 때문에 집을 비울수 없었으므로 결국 장남인 내가 적임자였다. 밤에 물을 대야할 때는 논이 면한 둑방에 모기자을 치고 밤을 세워야 했다. 공허한 벌판에 아까시아 나무 가지에 의지한 모기장안에서 어둠의 무서움을 온 몸으로 체득해야 했다. 울어대는 개구리만 유일한 친구였다.

 

뚝~

갑자기 개구리 울음이 거치면 모골이 송연해진다. 공포가 극에 달하면 등에서부터 시작해 온 몸으로 퍼지던 털이 곤두서는 느낌은 느껴보지 않으면 실감하지 못한다. 개구리가 울음을 멈춘 것은 천적의 출몰이거나 누군가의 인기척 뿐이다. 뱀같은 것은 어차피 눈둑이나 논 안에서 개구리를 사냥할 것이니 겁날 것은 없는데, 가장 무서운 것은 사람이었다. 당시 물꼬 싸움 때문에 동네 어른들끼리 싸워 살인사건까지 일어난 터라 사람만큼 무서운 것은 없었다. 눈을 모기장에 바짝 가져다대고 어둠의 저쪽을 노려본다. 삽을 잡은 손에는 바짝 힘이 들어가게 된다.

 

개굴개굴~

다시 개구리가 울면 비로소 바짝 서있던 터럭은 힘을 잃고 두팔은 기운이 빠져 축 늘어진다. 삽을 잡았던 손에는 땀이 그득했다. 개구리가 울어대는 동안에는 평화가 유지되었다. 어린 시절 이런 경험이 드세게 각인된 탓일까? 지금도 개구리는 내 마음을 편하게 한다.

 

농경지의 축소, 수질의 악화, 농약의 과사용으로 개구리도 자꾸 줄어든다고 한다. 내 마음속의 평화가 조금씩 개구리의 숫자가 줄듯 줄어들고 있다. 늘 그리운 개구리 울음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