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공간(隨筆空間)·칼럼

김대근 2014. 1. 7. 17:35

만년필로 보는 중국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두보

 

고등학교 시절 어느 여름날이었다. 만원버스는 부산 앞바다의 파도처럼 출렁거렸다. 사람들은 어망에 가득 찬 고등어처럼 서로의 몸을 의지 삼아 흐느적거렸다. 그래도 노선의 절반쯤 지나면 여기저기 엉성해지는 공간이 생기다가 3분지 1일 남겨놓은 즈음에는 자리마저 여기저기 생기게 된다. 이제 막 버스안의 공간이 느슨해지자 졸음도 몸의 구석을 타고 흘러 저절로 머리를 끄덕이게 만들었다. 젖 가슴께가 축축해왔지만 이 염천에 땀이 흐르지 않으면 그도 도리가 아니지 싶었다.

 

내가 서서 흔들리는 파도의 울렁거림을 몸으로 흡수하는 동안 재수 좋게도 자리에 앉은 서부경남 사람들 같은 얼굴 동그란 여학생이 손가락으로 내 가슴께를 가르쳤다. 아차 싶어 내려 보니 폼 나게 하복포켓에 꼽아 높은 중국산 영웅 만년필이 제 속을 모두 게워내 포켓에서 허리띠께 까지 거대한 중국영토를 까맣게 그려놓고 있었다. 어떠한 경로를 통해서 그것이 내손으로 들어오게 되었는지 기억이 아리하지만, 그 시절을 추측컨대 마도로스를 아버지로 두었던 친구 녀석이 그 연원인 듯하다. 여튼 그 시절 중국은 우리에게는 엄연한 적성 국가였으므로 최근 인기리에 상영 중인 변호인같은 영화의 내용을 기준으로 한다면 사상범으로 단죄 받을 만한 범죄를 저지른 꼴이 아닌가.

 

사실 국산 아피스를 중학교 때부터 애용했던 나는 당시 구하기 쉽지 않았던 영웅만년필을 한동안 애용했지만 자주 잉크가 막히거나 줄줄 흐르거나 해서 애를 먹이기 일쑤였다. 결국 버스 안에서의 영웅만년필 구토사건 이후로 당시 정말 필생이라고 해도 좋을만큼 절약을 거듭하여 남포동에서 중고 파카51”을 구해서 오랫동안 사용했다.

 

파카 만년필은 영국의 회사지만 USA가 찍힌 미국제품으로 당시 나에게는 경이적인 성능을 보여주었고, 국산과 중국산과 자연스레 비교하게 되었다. 솔직히 우리는 언제나 이런 만년필을 만들지 부럽기도 했다. 그후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수많은 만년필이 내손을 거치고 현재도 내손에 쥐어져 있지만 최근에는 국산만년필을 거의 자취를 감추어 몇 개의 제품만 시판되고 있다. 미국, 독일, 프랑스, 일본의 만년필들은 모두 그 나라의 공업기술 수준을 보여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정도로 만년필은 단순한 필기구를 넘어 수집의 대상이 될 만큼 높은 수준을 보여준다.

 

최근에 우연한 기회에 중국산 만년필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 “영웅을 만들던 국영회사는 아니지만 진하오라는 제법 만년필을 잘 만드는 회사로 정평이 나있다. 도자기로 몸체를 만들고 중국풍의 서예나 그림이 그려진 만년필은 글 쓰는 입장에서 제법 뽄대가 나는 물건이지만 과거 영웅만년필의 구토사건 이후 값싼 저가의 그저 그런 만년필이라는 선입견은 선사한 사람의 정성은 생각하지 않고, 그저 서랍 속 다양한 만년필에 더해진 아이템의 하나로 전락시키고 말았다.

 

받아만 두고 사무실 책상에 넣어두고 있었는데 마침 38년간 사용했다가 씻어서 서랍에 넣어두었다를 반복하던 파카51”을 완전히 분실해버려 임시방편으로 서랍 속 진하오만년필을 사용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 괜찮네정도에서 며칠 사용해보니 생각지 않은 월척이라도 건진 느낌이다. 그만큼 잉크의 끊어짐 없이 잘 써진다는 이야기다. 예전의 이미지에서 그야말로 상전벽해(桑田碧海)를 이룬 느낌이다. 가격은 아직 매우 저렴하달 정도이지만 품질은 기대이상이었다. 내가 가진 만년필중 최고가인 몽블랑에 비해도 사용감은 전혀 뒤지지 않는다.

 

이쯤이면 충분히 선물해도 욕은 먹지 않겠구나 싶어서 전문 수입선을 통해 글 쓰는 문우에게 선물할 생각으로 2개를 구입했다. 도자기 몸체에 말띠 해에 맞추어 힘차게 달리는 말이 그려진 만년필이었는데 막상 도착해서 살펴보니 뚜껑부분에 시성(詩聖)으로 추앙받는 중국의 시인(詩人) 두보(杜甫)의 시가 멋진 필체로 쓰여져 있다. 견물생심이라고 결국 애초에 선물하려고 했던 문우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오랫동안 내가 간직하며 쓰기로 했다. 쓰는 사람에게 두보의 싯귀만큼 의미 있는 것이 또 있겠는가 싶다. 미리 선물해준다 이야기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싶다.

 

사진은 이번에 구한 중국산 진하오만년필이다. 도자기 재질이 느껴지는 손맛이 좋다. 달리는 말과 함께 뚜껑부분에 쓰여진 두보(杜甫)의 시 西使宜天馬의 끝부분인 哀鳴思戰鬪 廻立向蒼蒼이 보인다. 이 시는 두보의 문학이 절정기였을 때 쓰여진 것이다.

 

다음은 이 시의 전문이다.

 

秦州雜詩二十首 /杜甫
 

西使宜天馬


西使宜天馬 서역 사신에겐 천마가 의당한 것
由來萬匹强 원래는 일만 마리나 되었었지
浮雲連陣沒 구름 같이 많은 말들 전쟁과 더불어 사라져
秋草徧山長 가을 풀만 산에 가득 자라고 있구나
聞說眞龍種 듣자하니 진짜 용마 중에서
仍殘老驌驦 늙은 숙상이 여전히 남아있어서
哀鳴思戰鬪 슬피 울며 전투를 생각하고는
廻立向蒼蒼 꼿꼿이 서서 푸른 하늘을 향하고 있다 하네

 

지내놓고 보아야 추억은 아름답고 사람은 떠난 후에야 그 사람의 진정한 보배로움이 드러난다고 하던가?

 

오늘날 우리가 시성(詩聖)으로 부르는 중국 당나라 때의 시인 두보(杜甫,허난 성[河南省] 궁 현[鞏縣]~ 770 후난 성[湖南省]. 중국 성당(盛唐) 시기의 시인.)는 세상의 복이 지지리도 없는 사람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중국에서는 능력보다 소중한 것이 꽌시라는 배경, 즉 빽이 좋아야 하는데 두보처럼 시골출신에다가 일찍이 조실부모하여 뤄양[洛陽]의 숙모 밑에서 자랐다. 그는 7살에 시를 지을 정도로 근동에서는 소문난 신동으로 그의 시에 대한 재능은 일찍이 뤄양의 명사들에게 인정을 받았다.

 

곤궁한 생활에서 벗어나기 위해 천보 5(746) 두보는 장안으로 갔다. 그 후 약 10년 동안 수도인 장안에서 과거시험을 준비했지만 번번히 낙방을 거듭하여 곤궁한 생활을 계속했다. 고관의 집에 들나들며 시문을 지어 조정에 바치며 인정받으려고 노력하다가 천보 10(751)에 마침내 삼대례부 三大禮賦를 바쳐 현종으로부터 칭찬을 받았으나 결국 임용되지 못했다.

 

천보 13(754)에 기근이 심해지자 식구들을 친척집에 맡겼는데 다음해 처음으로 우위솔부(右衛率府)의 주조참군(胄曹參軍), 즉 금위군(禁衛軍)의 무기고 관리로 정8(正八品) ()라는 가장 낮은 관직을 얻었다. 두보는 그래도 일단 굶주림을 면하게 되었다고 기뻐하며 서둘러 처자가 있는 곳으로 갔지만 식솔들은 심각한 굶주림에 고통받도 있었고, 자식은 이미 굶어 죽은 뒤였다. 두보는 비분강개의 울분과 마음을 무겁게 덮쳐 누르는 서글픔을 강렬하게 호소한 장편의 시 자경부봉선현영회오백자 自京赴奉先縣詠懷五百字를 지었다.

 

변변한 빽이 없었던 두보는 변변하지 못한 벼슬살이 마저도 순탄치못해 먼 지방으로 좌천되고 만다. 계속되는 기근으로 벼슬을 사직하고 가족을 데리고 유랑의 길을 나선다. 비옥한 땅을 찾아 헤메어 돌던 감숙성 진주(秦州)와 사천성 성도(成都)에 이르기까지 고난의 때에 지은 시들이 그의 작품 대다수를 점하고 있는데 그중 빼어난 것이 진주잡시20(秦州雜詩二十首)이다.

 

계속되는 고난으로 삶에 지친 두보는 대력 5(770) 겨울 탄저우에서 웨양[岳陽]으로 가는 도중 고난으로 점철된 59년 삶의 옷을 벗었다. 그의 가족들은 관을 운반할 여유가 없어 40년 동안 악주에 두었다가 손자 두사업(杜嗣業)이 뤄양 옌스 현[偃師縣]으로 운반하여 서우양 산[首陽山] 기슭에 있는 선조 두예(杜預)의 묘 근처인 할아버지 두심언의 묘 옆에 묻었다.

 

나는 이 중국산 만년필을 통해 예수 탄생이후 2000년간 1800년 동안 GDP 1위였던 중국의 저력을 다시 보는 계기가 되었다. 만년필은 필기구 중에서는 가장 정밀한 것이다. 이런 만년필을 싼값에 만들 수 있는 중국의 저력은 우리가 유의해야 한다. 지금 중국은 깨어난 정도가 아니라 달리기 시작하고 있다.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전 사무실에서 워터 맨과 파커를 쓰고 있습니다만
아직도 잘 나온 필기구들이 많다보니 조금은 소외된 듯한....

중국에서 이런 명문의 만년필을 만들고 있다하니 놀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