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기

김대근 2006. 6. 21. 20:02


이언적 선생의 흔적-독락당(경주 안강) 
2004-11-13 오후 11:01:00

 

 

이언적...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이라는 인물과 연관된 유적이 두군데가 생각난다.
하나는 오늘 여행의 목적지인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에 있는 자옥산 독락당이고
다른 하나는 역시 경주시와 포항시의 경계부근에 있는 양동민속마을이다.


독락당이 회재 이언적선생이 벼슬을 물러나와서 별장을 겸해서 지어 산 곳이라면
또 다른 양동민속마을은 회재 이언적의 자손들이 모여사는 집성촌이다.


이쯤에서 이언적이라는 인물에 대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여행을 함에 있어서 그냥 보거나 즐기기만 한다면 직접 가 볼 필요는 없다. 그냥
신문이나 사진만으로도 충분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여행지는 역사를 간직하고 있으므로 관련된 정보를 연구하고
어느 정도 숙지하는 것이 훨씬 여행의 깊이를 만들어 준다.

 

이언적(李彦迪 1491∼1553 성종 22∼명종 8)은 조선 중기 문신이며 동시에 학자이다.
조선조 유교철학사에서 晦齋 李彦迪의 철학이 점하는 위치는 뚜렷한데 이는 그의 철학적
사색이 주자학자로서의 충실성과 순수성에서 남달리 뛰어 나다고 하겠다.
그렇다고 해서 회재 이전의 유학자들에게 순수성이 없었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정도전
같은 이는 변절자의 학눔이라는 이유로 무시되었고 매월당 김시습의 학문은 주자의 이론을
벗어날 뿐만 아니라 불교도 섭렵하고 있기 때문에 인정을 받지 못하였다.
우리나라 성리학은 크게 2개의 학파가 존재하는데 서경덕이 기호학파의 기반이 되었다면
회재 이언적은 영남학파의 기반이 되는 인물이라고 설명할수 있을 것이다.


이언적의 초명은 적(迪), 자는 복고(復古), 호는 회재(晦齋)·자계옹(紫溪翁)등 이였으며
본관은 여주(驪州)다.  1514년(중종 9)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정랑·장령·밀양부사 등을 지냈다.

1531년 사간원에 있으면서 김안로(金安老)의 중임을 극렬히 반대하다 파직되어 경주(慶州)
자옥산(지금의 독락당이 있는 곳)에 들어가 성리학연구에 전념했다.
37년 김안로가 죽자 다시 관직에 올라 전주부윤을 역임하며 조정에 <일강십목소(一綱十目
疏>를 올려 정치의 도리를 논하였다.
45년(명종 즉위년) 좌찬성에 오르고 을사사화 때 추관(推官)을 지낸 뒤 관직에서 물러났다.
47년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에 무고하게 연루, 강계(江界)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2004년 11월 10일..포항에서 일이 조금 빨리 끝이 났다.
역시 일찍 일어난 새가 많은 먹이를 얻는 다고 했다. 새벽 5시에 출발을 해서 새벽길을
달리고 달려서 그 만큼 일찍 일을 끝냈으니 여유가 두시간정도나 생겼다.

포항에서 영천을 거쳐서 경부고속도로를 태워야하기 때문에 넓은 안강뜰을 지나다가
자옥산 옥산서원으로 들어가는 간판이 보여서 차안의 시계를 보니 오후3시를 절반정도
넘긴 시간이다.
옥산서원은 다음으로 미루고 이언적 선생이 직접 짓고 살다간 독락당을 보기로 했다.

 

 

 

독락당으로 들어가는 길에 만난 두그루의 소나무...
우리나라 성리학의 초석을 놓은 두사람..서경덕과 이언적의 모습과 같다는 느낌이 언뜻
스쳐지나 간다.

가운데를 두고 양쪽으로 따로 벌린 가지를 보면서 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두사람의 제자로 각각 기호학파와 영남학파의 거두로 학문적인 마찰과 경쟁을 이루어
학문적 대립각을 만들어 나갔고 성리학을 완성했다고 할수있는 율곡 이이와 퇴계 이황의
두 거목과도 자꾸 대비가 되는 소나무다.

 

가을이다.
쓸쓸한 가을이 되면 비로소 사람들은 세월이 감을 아쉬워 한다.
따지자면 세월이란게 어디 가을에만 가는 것인가. ~것인가라는 몇글자를 자판으로
치는 그 순간에도 이미 세월이 흘러가고 있지를 않는가.
우리가 유독 가을에 세월이 가고 있음을 느끼는 것은 아무래도 나뭇닢이 떨구어내는
탈색되어 빨개진 또는 누러스럼해진 낙엽들 탓은 아닌지 모르겠다.

 


독락당을 들어가는 길에 만난 또 하나의 풍경이다. 질곡의 세월을 지나온 저 세분의
발걸음이 유난히 단풍나무와 대비되어 빗방울에 젖은 아스팔트에 선명하다.

 

 

독락당이다.
마침 후손들인지 버스를 대절해서 참배를 왔다가 간다.

 

 

 

독락당은 지금도 후손이 살고 있는 곳이다.
이언적 선생의 후손들이 살고 있는 종갓집이다.
그래서 곳곳을 일일히 다 둘러볼수는 없다.

 

고... 스톱....
가야할때 가야하고 멈추어야 할때 멈추어야 하는게 인생인데 어리석은 우리들은
가야할때 가지 못하고 멈추어야 할때 멈추지 못한다.


고스톱도 인생의 큰 공부다.
고스톱 삼매에 빠져 계시는 이집의 종부어른도 지금 공부중이시다.

 

 


옥산서원(玉山書院) 서북쪽 700m 지점에 독락당(獨樂堂)이 있다. 독락당(獨樂堂)은
보물(寶物) 제413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1516년(조선 중종 11년)에 건립(建立)되었다.
이 곳은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선생(先生)이 1532년에 조정에서 물러나 고향에
돌아와 지은 집의 사랑채이다. 처음에는 초려삼간(草廬三間)을 지어서 이 곳 산수(山水)와
자연(自然)을 사랑하며 공부하고 사색(思索)에 잠긴 곳이다. 정면에는 옥산정사(玉山精舍)란
현판이 걸려 있는데 '옥산정사(玉山精舍)' 현판은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친필이고,
'독락당(獨樂堂)' 현판의 글씨는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 선생이 썼다.


현재의 건물(建物)들은 후에 증축(增築)한 것이 많으며 이름모를 사람들이 많이 찾아와서
선생의 학덕을 사모(思慕)하고 사당에 참배한 이가 무수히 많았다고 한다.
선생이 심은 산수유와 천연기념물(天然記念物) 제11호로 지정된 중국 주엽나무(독락당의
중국주엽나무) 및 죽림과 강계약숙이 지금도 있으며 독락당(獨樂堂) 내에는 보물(寶物)
제524호인 정덕계유사마방목(正德癸酉司馬謗目)과 보물 제526호인 해동명적(海東名蹟)과
보물(寶物) 제586호인 이언적수필교본(李彦迪手筆橋本)이 보관되어 있다.

 

 

 

 

 

 

독락당(獨樂堂)의 오른쪽으로 돌아서 작은 일각문을 지나면 계정, 계곡 쪽으로 개방되어 있는
계정의 마루에 올라앉으면 계곡의 빼어난 풍치가 한눈에 들어온다.
그러나 이 정자는 개울 건너편에서 바라다볼 때 그 진면목이 확연하게 드러난다.


이 계곡에 조금 높은 언덕은 산으로 높은 바위는 대로 명명했는데 대표적인 것으로 사산오대
(四山五臺)가 있고 그중 하나인 관어대(觀魚臺)라는 암반 위에 올라앉아 있는데, 작고 아담한
정자(亭子)인데도 마치 2층 누마루처럼 당당하고도 의젓하다.


특히 인공을 초월해 주변의 바위, 나무, 물과 아주 조화롭게 어우러졌다는 점에서 한국 전통
정자의 표본이라 해도 무방할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