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기

김대근 2006. 6. 21. 21:09


이언적선생의 흔적-경주 양동마을 
2004-11-20 오전 1:11:45

 

 

며칠전에 올린 여행포스트중에서 회재 이언적선생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경주시 안강에 있는 자옥산 독락당을 돌아 보았다.
이번에는 이언적선생의 후손들과 사위였던 손씨들이 모여서 생활의 근거를 만든
양동마을을 들러보기로 하자.


우선은 양동마을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회재 이언적선생에 대하여 알아보는게
순서가 되겠다. 저번에 독락당에 대한 포스트를 일독하고 다시 돌아오자.


이언적 선생의 흔적-독락당(경주 안강)
http://blog.daum.net/roadtour/3311738


일단은 공부를 하고 다시 왔다면 이언적 선생이 우리나라의 성리학과 영남학파에게
미친 영향이 얼마나 되는지 알만할 것이다.


그럼 본격적으로 양동마을을 구경해보자.

 

 


날씨도 좋다. 늦가을의 하늘답게 엄청난 깊이를 보여주고 있다.
포항에서 영천으로 가는 길에 양동마을이라는 팻말을 만났다. 저번에 여기서 10여키로를
더 가면 회재 이언적선생의 모신 옥산서원이 있고 독락당도 있다.

 

 


늦가을도 지나서 초겨울이 다되어가는데도 아직 코스모스가 한들거리고 있는 시골길을
한참 들어가야 나오는 곳이다.
간이역...플랫폼도 없는 간이역이 있는 이 길을 지나쳐 가야한다.

 

 

 

양동 마을은 경상북도 경주군, 강동면, 양동리에 있는 지정민속마을이며, 하회마을과
더불어 양반들의 생활상과 주거양식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민속마을이다.
그러나 하회마을과는 여러가지 면에서 완전히 정반대로 대조적이다.
하회마을은 강물이 마을을 휘돌아가는 물에 의지하여 생활하는 마을이라면, 양동마을은
물이라고 해야 겨우 개울을 면한 강만 있을뿐으로 산을 의지하여 살아가는 마을이라는
점이 다른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하회마을은 풍산 류씨들만의 단일 집성촌이지만, 양동마을은 여주 이씨와 월성
손씨의 두 씨족이 사이좋게 몇백년을 생활하고 있는 집성촌이라는 점도 다른 부분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양동마을은 두 씨족의 집성촌인데,  조선시대 초기에 입향(入鄕)하여
지금까지 세거(世居)하여온 여주 이씨와 월성 손씨 양대 문벌을 이루며 그들의 동족집단
마을로 계승하여 오면서 두 집안에서는 각각 걸출한 인물을 배출했는데,


이씨 집안에서는 동국 18현의 한 분이시고 좌찬성(종1품)까지 오른 회재 이언적 선생를
배출했고, 손씨 집안에서는 벼슬이 정 2품 우참찬에 까지 이른 우재 손중도 선생이다.


손씨 집안에서는 이언적이 10세 때 손중도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하여, "우재의 학문이
회재에게 전수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씨 집안에서는 이를 부정하면서 두 가문 사이에 갈등이 일어났다고 한다.


양동마을에는 큰 규모의 양반주택들이 잘 보전되어 내려오고 있는데, 그러한 집들은 대개
ㅁ자형의 공간구성을 하고 있다. 이러한 양반주택들 중 많은 수가 보물 또는 중요민속자료
등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어서 양동마을은 하나의 살아있는 건축박물관이라고 할 수 있다.
양동마을에서 국가지정 문화재로 지정된 건물들은 다음과 같다.


1. 손동만씨가옥(孫東滿氏家屋)(서백당(書百堂) 또는 송첨, 중요민속자료 제23호)
2. 낙선당(樂善堂)(손영호씨가옥(孫濚鎬氏家屋), 중요민속자료 제73호)
3. 무첨당(無첨堂)(여강이씨 대종가(驪江李氏 大宗家), 이인식(李仁植), 보물 제411호)
4. 관가정(觀稼亭)(손씨대종중(孫氏大宗中), 보물 제442호)    
5. 향단(香壇)(향단파종가(香壇派宗家), 보물 제412호)
6. 심수정(心水亭)(향단파(香壇派), 중요민속자료 제81호)    
7. 수운정(水雲亭)(손승익(孫承翼), 중요민속자료 제80호)
8. 수졸당(守拙堂)(이종환(李宗煥), 중요민속자료 제78호)    
9. 이향정(二香亭)(이석천(李錫千), 중요민속자료 제79호)
10. 이원용가옥(李源鏞家屋)(중요민속자료 제75호)    
11. 이희태가옥(李熙太家屋)(중요민속자료 제77호)
12. 안락정(安樂亭)(손씨종중서당(孫氏宗中書堂), 중요민속자료 제82호)    
13. 이동기가옥(李東琦家屋)(중요민속자료 제76호)
14. 이원봉가옥(李源鳳家屋)(중요민속자료 제74호)    
15. 강학당(講學堂)(이씨종중서당(李氏宗中書堂), 중요민속자료 제83호)

 


마을의 안쪽 골에는 손씨와 이씨의 대종가인 서백당과 무첨당이 위치하고 있고
바깥쪽 골에는 손씨와 이씨의 파종가인 관가정과 향단이 위치해 있다.
이 마을의 가옥들의 형태는 'ㅁ'자 형태가 대부분이고 골짜기를 따라 집들이 위에서
아래로 자리잡고 있는데 가장 위쪽에는 대종가 또는 파종가가 자리잡고 있으며 아래로
그 자손들이 자리하고 있으며 가옥의 규모는 내려올수록 작으며, 맨 아래에는 노비가
살던 '가랍집'이라고 하는 집이 있다.


이것은 당시 문중의 위계와 유교적인 신분질서를 나타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러한 양동마을도  그수가 많이 감소하고 있다.

 

무첨당은 이언적 선생의 손자인 이의유가 지었다고 하는데 그의 호가 '무첨이었다고 한다.
보통 별당은 외부인의 눈에 잘 안 띄고 접근이 어려운 곳에 두기 마련인데 무첨당은 살림
채 입구에 있고 규모도 커서 별당이라기 보다는 큰 사랑채 격이다.'ㄱ'형의 건물로 몸채는
가운데가 6칸 대청이며, 좌우로 방이 하나씩 있고 앞으로 나온 부분은 누마루로 구성된
간단한 구조이다.

옛날 이곳에 대원군이 잠시 머물렀다고 하는데, 그 때 그가 쓴 '左海琴書'라는 글이 있는데,
여기에 '左海'는 왼쪽에 바다가 있다는 것으로 영남지방을 뜻하며, '琴書'는 거문고와 책을
뜻하는데, '무릇 선비란 풍류와 알고 책을 읽어야 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향단은 회재가 경상감사로 재직할 때 지은 것으로 중종이 지어준 것이라고 한다.
그가 전임하면서 그의 동생인 이언괄에게 물려주어 그의 손자인 이언관의 호를 따서
향단이라고 이름짓고, 그의 후손들이 살게 됨에 따라 여주 이씨의 파종가가 되었다.


향단은 일반 가옥과는 상이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몸채를 '月'자로 하고 여기에
'ㅡ'자형 행랑채와 칸막이를 둠으로써 전체 평면은 '用'자를 이룬다. 이것은 '用'자가
'日'자와 '月'자가 합쳐진 모양이므로 하늘의 해와 달을 지상에 있게 함으로써 생기를
북돋워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부귀공명을 누리게 된다는 풍수사상 때문이었다고 한다.

 

 

 

 

 

 

 


관가정은 손씨 집안의 파종가이다.
마을 입구의 첫번째 산등성이에 위치했으면서도 옆의 향단보다 눈에 띄지 않지만,
사랑채에서 마을 앞의 안강평야가 보이는 넓은 조망을 가지고 있다.

 

 

 

 

 


이언적의 4째 손자인 이의잠이 지은 집이다.
이의잠의 호가 수졸당이다. 양동마을에서 수졸당으로 올라가는 길은 제일 운치가 있다.

 

 

 

 

 


이언적 선생의 동생이였던 이언괄은 형을 대신하여 노모를 부양하며 집안을 살폈다.
그의 희생이 있었기에 잦은 정변으로 귀양살이를 자주했던 이언적은 물론이거니와
양동마을을 일군 초석이 되기도 했다.
이 누각에서 조망을 하면 북촌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만큼 조망이 좋은 정자라는 것을 직접 정자에 서보면 알수있다.

 

 

 


온양군수를 지낸 옛사람의 흔적을 보고 나니 반갑다.
내가 사는 온양의 옛 수령이였다고 하니 더욱 자세히 보게 된다.
이집은 참 특이하다. 산의 언덕을 그것도 30도쯤은 되어보이는 급한 경사를
그대로 정원으로 꾸며두었다.
자연에 순응하려는 주인의 마음자세가 보이는 듯 하다.

 

 


양동마을을 돌다가 목이 말라 음료 한캔을 사마신 동네 슈퍼...
아마도 관광마을로 만들려고 새로 한식으로 짖는데 정부의 예산이 나오는 듯하다.
그 혜택을 둘러 싸고도 뇌물이 있어야 되는 가 보다.


막걸리 몇잔을 들이켰는지 얼굴이 발그레해지고 내쉬는 숨결에 막걸리 냄새가 전해오는
슈퍼주인이 외지에서 온 객이 반가운 모양이다.


"여게..참 조치예? 산수도 조코..터가 조아서 양반들이 마이 살았는 기라예..
그래도 저 양반들 뒷바라지 하던 하중(下衆..아마 천한것들..종의 뜻인듯...)들이
얼마나 골수가 빠졌겠능교~~"


이언적 선생을 우리나라 유교의 성리학의 태두라고 말하긴 했지만서도 그 역시도 사대가
골수에 박혀있는 한계를 가진 조선의 선비일 뿐이였다.
불교도 그렇고 유교도 그렇고 기독교도 그렇고...그 분야의 세계적인 명성을 가진사람이
나오지 않는다. 우리사상이 아니기에 당연한 것이다.
정신도 풍토와 산천경계에 따라 변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농산물도 제 땅에서 제 철에
나는것을 먹어야 사람이 건강해 진다고 한다.


하화마을도 그렇고 양동마을도 그렇지만 양반들의 대궐같은 집들을 보노라면 늘
생각하는 것이 착취를 당한 또 다른 이면의 사람들인데 슈퍼집 아저씨가 툭~하고 던진
그 말이 오랫동안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돌아와서 하중이라는 말을 찾아보아도 사전에도 보이지 않는다..그

 아저씨가 요새사람들은
모를거라며 친절하게 해설을 해주시던데 소작인..백정..장사치..종등
천한사람과 천하지 않은 사람...또는 양반과 양반이 아닐 사람들만 살던
조선시대에 양반이 아니거나 천한쪽에 속하는 모든 사람들이 포함되는
용어인듯 하다.
특정 계급의 표식이 아니라 이분법적 계급의 한쪽을 나타낸다는 그런 느낌을
받았다.

 


그날 마침 허리마저도 구부정해진 80대 노인이 가게로 들어왔는데
기와집의 용마루 기술자라고 한다.


"예전에는 소작 붙여먹는 처지라 기와올릴때 몇날을 일해주고도 임금도
못받았고 달라고 하지도 못했다고...그땐 당연히 봉사하는걸로 생각했지..."


이런 요지의 말씀을 하셨다.


"아재요..탁배기 한잔 하실랑기요"


두분이 막걸리잔을 정겹게 기울이는 것을 보면서 가게를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