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기

김대근 2006. 6. 23. 17:04


미당 서정주 생가..

 

 

서...정...주...
우리는 단순히 서..정..주..라는 이름보다는 미당 서정주라고 해야 오히려
아~ 그분...이라고 하게 된다.
우리 시단에 그 만큼 큰 족적과 영향을 미친 사람이 또 있으랴..
그의 유명한 시들은 따로 언급할 필요조차 없을 정도로 누구나 한 두편씩은
알고 있을 터이니 생략한다.


대신에 그에 대해 잠깐만 알아보고 가자.
그는 시인이다. 우리나라에서 詩를 써서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싶지만 그는 시인이다.
호는 미당(未堂)인데 이 미당이라는 호는 서정주라는 본이름보다 오히려 세간에
더 알려져 있다.


그는 전라북도 고창(高敞) 에서 출생하여  1936년 중앙불교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동국대학교 교수,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예술원 회원 등을 지냈다.
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벽>이 당선되어 등단한 뒤 김광균(金光均)·
김달진(金達鎭)·김동리(金東里) 등과 동인지 《시인부락》을 발간하면서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하였다.


첫 시집 《화사집》에서 인간의 원죄의식과 전율·통곡·형벌·비원(悲願) 등 운명적
업고를 시화하였는데, <문둥이> <자화상> <화사(花蛇)> 등이 대표작품이다.
이어 <만주에서> <살구꽃 필 때> <민들레꽃> <귀촉도(歸蜀道)> 등의 작품을
발표하였고, 제 2 시집 《귀촉도》를 간행하였다. 이 시기부터는 초기 원죄적 형벌과
방황에서 벗어나 동양사상으로 접근하여 화해를 주제로 삼았다.


56년 간행된 《서정주시선》에서는 <풀리는 한강가에서> <상리과원(上里果園)> 등
한민족의 전통적 한과 자연의 화해를 읊었고, <학> <기도> 등에서는 원숙한 자기
통찰과 달관을 보여주고 있다.


이와 같은 달관적인 세계는 《신라초(新羅抄)》에 이르러 새로운 질서로 확립되었고
68년에 나온 시집 《동천(冬天)》에서는 불교의 상징세계에 대한 관심이 엿보인다.
이 밖의 저서로는 《한국의 현대시》 등이 있다. (엠파스백과사전 참조)

 

 

 


2005년 2월 20일 동백꽃이 피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선운사로 가다가
고창읍내에서 시인의 흔적 꼬투리를 발견하고 찾아간 곳이 서해의 바다가 보이는
곳에 자리잡은 "미당 서정주 생가와 그의 문학관"이였다.

 

 


먼저 찾은 곳이 시인의 생가...
그야말로 옛정취가 물씬 풍기는 초갓집이다.
윗채와 아랫채 사이에는 작은 우물도 있었는데 그래도 마당이 넓어서 좋았다.
이 집에서는 그다지 풍치가 좋은 것은 아니였다.

 

 

 

 

 


생가에서 불과 백미터쯤 떨어진 곳에 세워진 未堂詩文學館이다.
폐교된 학교를 개조해서 만든듯 했는데 아기자기하게 꾸며놓았다.
한사람의 삶과 정신을 이 한자리에서 다 불러보고 느끼고 갈수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르는 일이다.

 

 

 

선운사 고랑으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았고
막걸릿 여자의 육자백이 가락에
작년것만 상기도 남었읍니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었읍니다.

 


선운사를 유명하게 만든 미당의 선운사 동백꽃에 대한 시다.
이번 여행도 그랬다.
동백이 피었겠거니 하면서 갔더니 아직 일러서 인지 그저 몇송이가
몽우리를 붉히고 있을 뿐이다.
바닥에는 작년의 씨앗들이 입을 벌린체 바싹 말라있고...
변한것은 육자백이..그것도 목이 쉰 육자백이만 없을 뿐이다.

 

 

 


시인의 유품들...
저 호롱에다 불을 키고 시를 쓰는 정경이 눈에 선하지 않는가 말이다.
시인이 자주 즐겨매던 나비 넥타이다.
넥타이는 몇가지가 있었는데 이게 가장 마음에 들어서 이것만 카메라에 담는다.

 

 


시인은 마음이 맑아야 한다.
마음이 맑지 못하면 절대로 서정시를 쓸수가 없다.
따스한 시인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육필이다.


"아내과자"
아마 읍내라도 나갔을때 장볼것들인 모양이다.
아내과자.....
나도 늘 시인처럼 따뜻한 마음을 간직하고 싶다.

 

 

 

 

 


이 미당시문학관이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미당의 기념관이기는 하지만
항상 친일논쟁에 휘말려 살았던 시인의 친일 시와 그의 변명도 또한 같이
전시를 했다는데 있다.


모든 것은 이렇게 되어야 한다.
한 개인의 일생을 돌아보자면 잘한 것과 못한것을 항상 같은 저울에 놓고
평가하고 판단해야 한다.
미당 서정주 역시 친일시를 썻고 친일수필을 기고하기도 했다.
또 창씨개명도 했다.
이런 행위에 대해서는 우리는 냉엄한 비판을 가해야만 한다.


몇개의 잘한 부분을 가지고 모든 나쁜것들을 덮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우뚝 솟은 건물은 전망대인데 위로 올라가면서 층마다 유물이며 육필 원고며
쓰시던 도장이나 사진들을 전시해 두었다.
전망대에서 서해바다가 한폭의 그림처럼 보이는 창문에서 잠시 생각에 잠긴다.

 

 

방명록에 흔적 하나를 남기고 왔다.
시인이 바라 보았을 눈시리게 푸른 하늘을 보며 어쩌면 부질없을지 모르는
그런 흔적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