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기

김대근 2006. 6. 23. 22:49


서러운 두번째..최무선 장군 추모비

 


우리나라 사람들은 1등..첫번째..최초 지향성 민족이다.
그래서 항상 1등은 최고의 대접을 받는 반면에 2등은 꼴찌나 다름없이 취급을
받게 마련이다.
그러나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사람이 어찌 1등만 하고 살수가 있겠는가 말이다.
1등이 있으면 2등도 있게 마련인데 과정보다는 결과에만 집착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일은 아니리라.


최무선(崔茂宣)

우리 역사의 중요한 한 기점을 개발한 이 분도 마찬가지의 이유로 역사의
중요한 인물로 대접받지 못하고 있다.
이 분이 있었기에 이성계의 여진족 정벌도 가능했고 이순신이라는 대영웅의
탄생도 가능하게 했다.
그러나 화약을 세계에서 두번째로 만들었기 때문에 2번째라는 것에 가려져서
역사의 그림자에 숨어 지내게 되었다.

 

 

아침에 동대구역에서 빌린 렌트카를 반납할 시간이 2시간이상 더 남았다.
일찍 반납을 한다고 해도 돈을 깍아주는 것도 아니라고 한다.


늘 마음에만 두고 있던 사람이 있다.
최무선과 장영실...
내가 기술자라서 인지 막연하게 동류의식을 느끼는 옛사람 이기도 하다.


우리나라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기술자가 대접을 별로 잘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그나마 세종대왕덕에 측우기를 만든 장영실은 많이 알려져 있는데 화약을 세계에서
두번째로 중국사람에 이어 독자적으로 생산해낸 최무선에 대해서는 국사책에서나
잠깐 볼수 있는 현실이 되어 버렸다.
그나마 이제 학교수업에서 역사도 뺀다고 하니 우리아이들은 이제 역사에서도
아주 멀어질 실정이 되어버렸다.


경상북도 영천...
제3사관학교가 있는 곳으로 널리 알려졌지만 신라때는 영주라고 해서 서라벌을
지키주는 최전방의 요충지로 그 중요성이 대단했다.


그 영천의 금호읍 원기리라는 곳이 최무선의 출생지이다.


몇년전에 영천에 최무선 기념비를 세웠다고 했던 기억이 살아나서 영천시청의
문화관광 공무원에게 전화를 넣어서 물어보니 공설운동장에 있다고 한다.
곧 바로 차를 몰아서 찾아서 참배하고 왔다.

 

 


최무선(崔茂宣)


그는 1325(충숙왕 12)에 지금의 영천에서 태어나 1395(태조 4)에 세상을 떠났다.
그를 한마디로 표현을 하자면 고려말의 무기발명가라는 용어가 가장 잘 어울린다.
본관은 영주(永州:현재의 영천)이고 광흥창사(廣興倉使) 동순(東洵)의 아들이다.
우리나라에서 화약과 화약을 이용한 무기를 처음 제작, 사용하였다.


무관인 그는 고려 말기에 한창 기승을 부리던 왜구의 노략질을 막기 위하여서는
칼싸움에 능한 왜인들과의 백병전보다는 멀리서 상대를 제압할 수 있는 것을 찾다가
화약과 총을 만들기로 결심하고 연구를 거듭하였으나 진척이 없었다.
그러나 연구의 결과, 화약을 만드는 세 가지 재료, 즉 초석·유황·분탄 중에서 유황과
분탄은 쉽게 구할 수 있으나 초석을 만드는 것이 가장 어렵고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냈다.


이미 화약을 만들어서 사용하고 있는 중국으로부터 배우기로 하여 중국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무역항 벽란도에 가서 중국으로부터 오는 상객들 중에서 초석(염초)의
제조방법을 알고 있는 사람을 찾던 중 중국의 강남지방에서 온 이원(李元)을 만나게
되었다.


후한 대접 등 그의 정성과 화약을 만들어 국가를 살리겠다는 집념으로 감동시켜
흙으로부터 추출(抽出)하는 방법을 배우고, 드디어 화약을 만드는 데 성공하였다.
간단한 화약을 이용한 무기, 즉 화전(火箭) 등을 만들어 실험하여 본 그는 마침내
자신을 얻어 화약과 각종 화약을 이용한 무기를 연구하고 만들 화통도감(火筒都監)의
설치를 몇 번의 건의 끝에 허락받아 우리나라에서의 화약과 화약무기의 본격적인
연구를 1377년 10월부터 시작하였다.


화통도감에서 제조된 각종 화기들은 모두 18가지로, 이 중에서 총포의 종류는
대장군(大將軍)·이장군(二將軍)·삼장군(三將軍)·육화석포(六火石砲:완구의 일종)·
화포(火砲)·신포(信砲)·화통(火筒) 등이며, 화전(火箭)·철령전(鐵翎箭)·피령전(皮翎箭)
등은 발사물, 그밖에 질려포(疾藜砲)·철탄자(鐵彈子)·천산오룡전(穿山五龍箭)·
유화(流火)·촉천화(觸天火)와 로켓무기로 주화(走火)가 있다.


1380년(우왕 6)에 왜구가 500여척의 선박을 이끌고 금강 하구의 진포로 쳐들어왔을 때
원수(元帥) 나세(羅世)와 함께 각종 화기로 무장한 전함을 이끌고 나아가 싸워
격파시키는 큰 공을 세웠다.


고려에서는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라는 벼슬까지 올랐으며, 조선 초에는 나이가 많아
등용되지는 못하였으나, 죽은 뒤에는 그의 공을 생각하여 의정부우정승(議政府右政丞)·
영성부원군(永城府院君)을 추증하였다.
아들 해산(海山)과 손자 공손(功孫)도 화약과 화기의 연구에 참여하였다.
저서로는 《화약수련법 火藥修鍊法》을 남겼으나 전하지 않고 있다.

 

 

 


임진왜란의 전쟁에서 그나마 나라를 보전하게 된 계기를 들자면 바로 이순신 함대의
눈부신 활약일 것이다.
왜적들은 배를 돌격시켜 백병전을 하거나 조총을 이용하는 전술이 대부분 이였으나
이순신 장군은 조총보다 사거리가 긴 대포를 이용하여 원거리에서 화력을 이용하여
타격을 입히는 전술로 백전백승 할 수 있었다.


만약에 우리들에게 최무선 이라는 앞선이가 없었더라면 영웅 이순신도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가 중요한 것이고 제2의 최무선..제3의 최무선이 끝임없이 나와야 한다.


우리는 언제쯤이면 반도의 좁은 울타리를 벗어나는 눈들을 가질 수 있을런지....


그래도 열심히 자기길을 걸었던 이런 분들이 우리 역사에 많았음은 이 땅을 사는
우리들의 크나 큰 복이다.


後人이 잠깐 지나는 바람같이 스쳐지나며 목례 올리고 왔다.
마음이 한 결 가벼워 진다.
나도 청상 이 좁은 땅덩이에 사는 기름쟁이가 틀림이 없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