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기

김대근 2006. 6. 24. 06:41

블로그앤 사이트가 없어지면서 옮기는 글


이차돈과 백률사 
2005-03-24 오전 10:59:45

 

 


지금으로 부터 1500년전인 서기 500년경에 한반도에 새로운 사상인
불교가 중국을 통해 전파되었다.
지정학적으로 중국과 가까운 고구려와 백제는 이미 불교가 사회의
통합을 이루는 중심사상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을 즈음에 고구려의
묵호자라는 승려가 당시 적국이렸던 신라로 잠입하여 선산 모례장자의
도움으로 포교를 시작함으로써 마침내 불교가 신라땅이 그 모습을
보이기 시작을 했다.


그러나 신라는 한반도의 외진곳에 자리잡았던 탓에 외래사상에 대하여
상당히 배타적이였으므로 불교는 그냥 민간신앙으로 치부되어 나라로
부터 공인을 받지 못하고 있을 즈음이였다.


이러하던 시대적 배경을 가지고 우리민족의 사상사에 있어서 중요한
자리매김을 할 사람이 탄생하게 되는데 그가 이차돈이다.
그는 단순히 한국불교 최초의 순례자라기 보다는 민족 최초의 사상적
순례자라는 것이 더 어울리는 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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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차돈(異 次 頓 ) - 506 ∼ 527


성은 박씨. 이름은 염촉, 이차돈은 신라가 차츰 고대 국가로 자리를 잡아가던
506년에 왕족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이차돈은 일찍부터 새로 도래한 사상인 불교를 믿었으나 신라에서 법으로
불교를 허용하지 않았으므로 늘 안타까워 했다.


지증왕의 뒤를 이어 법흥왕이 왕위에 올랐는데 나라의 법을 새롭게 제정하고
병부를 설치하여 군사를 기르는 등 고대 국가의 기틀을 갖추어 가기 시작하였다.


법흥왕은 또 나라의 구심점이 될 정신적 사상의 통일을 절실히 필요로 하였으므로
불교를 백성들에게 널리 퍼트리고자 했다.
그러나 부족연맹 출신의 신하들의 반대로 법흥왕은 불교를 인정할 수 없었다.
당시 신라에는 이미 눌지왕 때부터 고구려에서 온 묵호자에 의해 불교가 전파되어
있었다. 그 때 사인 벼슬에 있던 이차돈은 법흥왕의 뜻을 헤아리고 왕에게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은 신하의 큰 절개요, 임금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은 백성의 올바른 도리'라고 아뢰었다.
그러면서 자신이 왕명을 잘못 전달한 것처럼 꾸며 자신의 목을 베면 모두 굴복하여
왕명을 따를 것이라고 했다.


법흥왕은 말렸으나 이차돈은 '모든 것 중에서 가장 버리기 어려운 것이 목숨이지만,
이 몸이 저녁에 죽어 아침에 불교가 행해지면 부처가 하늘에 오르고 임금의 길이
편안할 것'이라며 왕에게 허락해 줄 것을 청  하였다.
법흥왕의 허락을 얻은 이차돈은 마침내 천경림이란 곳에 절을 짓기 시작하였다. 


이차돈이 왕명을 따라 절을 짓는다는 소문이 퍼지자 신하들이 법흥왕에게 따져
물었다. 이에 법흥왕은 자신이 시킨 일이 아니라며 이차돈을 불렀다.
이차돈은 법흥왕과 신하들 앞에서 부처님의 뜻에 따라 지신이 혼자서 절을 짓는
일을 시작했으며 왕명을 받은 것처럼 속였다고 당당하게 말했다.


이차돈과 미리 약속한 법흥왕은 왕명을 속인 죄로 이차돈의 목을 베었다.
죽기전에 이차돈은 '만일 부처님이 있다면 내가 죽은 뒤 반드시 기이한 일이
있을 것'이라 말했다.
이차돈의 목을 베자 머리는 멀리 날아가 금강산(경주 북쪽에 있는 산) 꼭대기에
떨어졌고, 목에서 흰 피가 나왔다.
이에 깜짝 놀란 귀족들은 마음을 돌려 불교를 나라의 종교로 받아들이는 데 더
이상 반대하지 않았다. (야후백과사전 일부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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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차돈의 순교와 밀접한 관련을 지니고 있는 백률사(栢栗寺)는
불국사(佛國寺)의 말사이다.
위의 야후사전에서 찾아본 이차돈의 이야기와 같이 법흥왕 14년(527)에
불교의 전파를 위하여 이차돈(異次頓)이 순교를 자청했을 때, 그의 목을
베자 흰 우유가 솟았고, 잘린 목은 하늘 높이 솟구쳐 올랐다가 떨어졌는데,
바로 그 떨어진 곳이 지금의 백률사 자리였다고 한다.


이를 본 사람들이 슬퍼하여 다음해인 법흥왕 15년(528) 그 자리에 절을
세우니, 그 절이 자추사(刺楸寺)로서 훗날 백률사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한다.
신라에서 처음에는 단순히 음에다 글자를 차용한 이두를 사용하다가 점차로
한자가 통용화 되면서 이름이 바뀌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백률사도 그렇다.
자(刺)는 '잣'이니 백(栢)과 같고, 추(楸)는 '밤'이니 율(栗)과 같은
의미인 것이다.


그러나 잣은 경부 부근에서는 식생상 보기 힘든데 왜 절이름에 잣이 들어
가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헌덕왕 9년(817) 이차돈을 추모하여 석당(石幢)을 세웠으며, 임진왜란으로
폐허가 된 이 절을 1600년경에 경주 부윤(府尹) 윤승순(尹承順)이 중건하고
대웅전을 중창한 기록이 있다.


삼국유사등의 기록에는 관음보살상이 있었다고 하나 166년경에 중수시에는
빠진것을 본다면 아마도 임진왜란때 노략질을 당한것으로 짐작된다.
이 절에 있던 관음보살상은 아마 지금쯤 일본의 어느 사찰에서 일본사람들의
소원을 듣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일본인들은 노략질 유전자가 다른 민족보다 많이 있는 모양~ 반디불이 생각~

 

 

대웅전 동쪽 암벽에 삼층탑이 음각되어 있으나 상륜부만 희미하게나마
흔적을 느낄수 있고 탑신부는 눈에 힘을 주어도 보이지 않는다.
세월도 세월이려니와 마멸이 쉬운 재질의 바위에 그나마 얕게 조각되어
그런듯 하다.
신라시대의 작품이며 대웅전 앞에 탑을 건립할 자리가 없어 소금강산 암벽에
만들었다고 한다.

 

대웅전에 봉안되었던 금동약사여래입상(金銅藥師如來立像:국보 28)과
이차돈의 석당은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이곳에는
마애삼존좌상(磨崖三尊坐像)·마애탑(磨崖塔)·굴불사지석불상(窟佛寺址石佛像:
보물 121), 기타 선원(禪院) 1동과 석탑·석등재(石燈材) 등이 있다.

 

 


법흥왕도 경덕왕도..어쩌면 김춘추도 김유신도 밟고 올랐을 돌계단...
후~~~ 심호흡...
그리고 느껴지는 1500년의 세월.....

 

 

 

 


백률사에 찾아 온 봄....
누구는 봄이 남해안 다도해의 섬들사이로 반짝이는 銀波를 타고 온다고 하고
어떤 사람들은 길바닥의 아지랑이를 타고 온다고 하지만
정작 봄은 매화나무 가지 끝으로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