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기

김대근 2006. 6. 24. 06:53


보물 121호 굴불사지 사방불

 

 

 

 

 

금강산과 닮아 있다고 해서 소금강산이라고 불리는 곳이 경주에
있는데 그 소금강산 아래 두절이 있었다.
소금강산의 정상에 가까운 곳에는 이차돈의 순교를 기념하기 위해
지었다는 백률사가 있고 굴불사(堀佛寺)는 백률사 아래에 있었던
신라 때의 절이다.
굴불사란 '부처를 땅에서 파낸 절'이란 뜻이다.


지금은 사면석불만 남아서 옛터를 지키고 있는데 소금강산이 나지막해서
근동 사람들이 운동삼아 한바퀴 휘~돈 다음에는 이 사면석불앞에
합장하고 바로밑 약수에서 물 한사발로 목을 추기는게 대부분의 사람들이
말없이 정해진 약속같이 되었다.


이 사면석불 앞에 가만히 앉아 있어보면 주변을 둘러산 대숲과 하늘을
에워싸고 있는 소나무들이 내는 자연의 노래소리가 들리는듯 하다.

 

 

신라때의 일이다.
생긴 이래 신라왕실의 특별한 보호아래 있던 백률사로 경덕왕(景德王)이
행차를 했다.
지금이나 별 다를것이 없었을 꼬부랑길을 오르고 있는데 어디선가 염불
소리가 땅속에서 들리는 것이였다.


"그대들 들리오? 저 염불소리 말이요!"
"저하~~ 솔가지가 바람에 흔들리고 댓닢이 서로 부닥는 소리 말이 오니까?"
"어허~~ 어찌...저건 염불소리가 분명하오"


세상의 모든 소리도 듣는 사람에 따라서 다르게 들리기 마련이다.
세계에서 제일의 미성이라는 오페라가수의 소리도 막귀인 반디불에겐
시끄러운 소음이 될수도 있음이기 때문이다.


그날도 아마 그랬나보다.
경덕왕의 귀에는 분명 낭낭청하한 염불소리가 들렸건만 주변의 사람들에겐
그냥 바람소리..그것 뿐이였던 모양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냥 지나칠수 없었던 경덕왕은 땅을 파보라고 했다.
불만이 들끓었지만 지엄한 왕명인데 어찌하랴.
지금이나 옛날이나 쫄따구가 까라면 까야지 별수 있나...


그런데 한참을 파들어가니 왠걸 부처님이 새겨진 바위가 떡하니 나왔다.
그래서 왕의 명으로 이곳에 절이 세워졌다.
그리고는 땅속에서 부처를 파내었다는 뜻으로 굴불사(堀佛寺)라고 했다.


모두 삼국유사에 전해져 오는 이야기다.
이야기를 그냥 곧이 곧대로 보면 안되는 것이다.
그래서 반디불이가 어줍잖게 따로이 해석을 붙여보면 이렇다.


소금강산은 사실 서라벌의 외곽이다.
이차돈이 순교를 하기전에 이미 묵호자를 통해서 불교가 신라땅에서
성행하고 있었는데 그때 누군가의 손에 의해 바위에 새겨졌는데
박해를 받아서 폐사를 당하고 석불은 땅에 묻혀버렸다.
그런데 세월이 좀 흘러서 이차돈의 순교를 통해 불교가 공인되었고
그를 기리는 절인 백률사(본이름이 자추사)가 세워졌고 사람들은
예전에 있던 절은 기억속에서 지워져 갔다.


그후로 한참의 세월이 흐른 후에 경덕왕이 즉위를 하고나서보니
태평성대라 왕으로서 무언가 대중적 인기를 위한 방편이 필요했다.


그 즈음에는 이미 불교가 나라의 모든 기준과 사상이 되었으므로
경덕왕은 자기이름으로 세운 사찰이 필요했다.
당시에는 서라벌에는 이미 사찰이 포화상태가 되어 있던 터라
굳이 새로운 사찰이 필요도 없었을뿐 아니라 새롭게 사찰을 만든다고
하여도 사람이 몰려줄지가 고민이였다.


왕은 마침내 謨士와 상의를 했고 그는 옛날일을 상고하여
불교가 공인되기 전에 박해를 받아서 묻어버린 절을 떠올렸다.
그리고는 이러저러하시오면..하고 왕에게 아뢰었다.
그리고는 그리 그리 되었다.


백성들은 땅속의 부처님으로 부터 감응받은 왕을 존경하게 되었고
왕은 백성들의 신임속에 자기이름으로 창건된 절을 가지게 되었고
모든 일을 기획한 謨士는 넉넉한 영지를 하사 받았다.
"에헤라~~~ 디여...."
부처님으로 인해서 모두가 좋아졌으니 노래가 절로 나올만 하다.

 

이 사방불은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121호로 지정되었다.
본존 높이 3.51m, 미륵보살상 높이 1.61m, 석가여래상 높이 1.36m,
동면약사여래상 높이 2.06m이다.
큰 석주(石柱)의 4면에 조각된 불상으로, 서면에 아미타여래, 동면에 약사여래,
북면에 미륵보살, 남면에 석가여래의 상을 새겼다


바위의 사면에 부처를 새긴 것이 사방불(四方佛)이라고 하는데 각각의 방위에
따라 인간의 길흉화복을 점치는 일은 고래로 우리의 습속이였기 대문에 자연히
이것은 삼국시대 이래로 우리나라에 널리 보급되었다.
원래 남북 사면에 불상을 조각하는 것은 사방정토(四方淨土)를 상징하는 것으로,
대승불교(大乘佛敎)의 발달과 더불어 성행한 사방불 신앙의 한 형태였다.
사방불 사면에 어떤 부처를 모시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지만, 신라의
사방불은 대체로 서방에 아미타불과 동방에 약사여래, 남쪽에 석가모니불,
북쪽에 미륵불을 모신다.


하나의 암석의 4면에 각각 불상을 조각한 것은 흔히 볼 수 있지만, 이 석불 조각은
그 규모가 웅장하고 아름다우며, 각법(刻法)의 소박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굴불사지의 사방불은 신라 초기의 유물 중에서 최고의 거작(巨作)이다.
또, 이렇게 사면석불에 십이면육비의 관음보살상이 표현되어 있는 것은 8세기
통일신라 시대에 신앙된 불상 중에 밀교적 성격을 띠는 불상이 섞여 있음을
보여주는 매우 귀중한 예이다.


이 사방불을 가까이서 요모조모 뜯어보면 한번에 만들어진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중에 깍아 만든듯한 불상도 보이고 초기에 급하게 선각으로 처리한 불상도
보이는 것으로 보아 초기에는 그냥 바위에 선각으로 조잡하게 조각되어 신앙의
표식으로만 역활을 하다가 통일신라기 이후에 섬세한 조각들이 이루어 진것으로
짐작이 된다.

 

 

굴불사지 사방불의 서쪽 면에는 미타삼존(彌陀三尊)을 새겼다. 본존(本尊)인
서방정토(西方淨土) 극락세계(極樂世界)의 부처님 아미타여래(阿彌陀如來)를
기준으로, 양편에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과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을 다른
돌로 두리새김하여 세웠다.
높이가 3.51m인 아미타여래는 바위면에 새긴 것이고, 좌우협시보살상은 다른
돌로 원각(圓角)하여 시립(侍立)하도록 하였다.


아미타여래는 극락세계 부처님으로 우리 인간 세상에서 48가지 좋은 점만 따서
서쪽에 극락세계를 이룩해놓고 "나무아미타불"이라는 이름만 불러도 죽은 사람의
영혼을 극락세계로 데려가 편하고 즐겁게 해준다는 부처님이다.


아미타여래의 왼편에 서 계신 관세음보살은 아미타여래의 사랑을 받들어 세상을
보살피는 보살이다.
관세음보살의 머리에 쓴 삼면관 중앙에 화불이 있어 이를 식별한다.
오른 편에 서 계신 대세지보살로은 아미타여래의 지혜를 받들어 세상을 보살피는
보살로, 보관 앞면에 지혜의 정병을 나타내었다. '지혜로운 사랑'을 베푸는 것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는다.


그래서 우리네 할머니나 어머니들은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같이
염하지 않던가.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은 인간의 현생에 있어서 가장 가깝고
친근한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동쪽 면의 약사여래(藥師如來)는 2.06m로 왼손에 약그릇을 들고, 오른손은 가슴
앞에 들어 시무외인을 하고있다.
약사여래의 결가부좌한 모습은 돋을새김을 하였다.
약사여래는 유리처럼 맑고 깨꿋한 동쪽에 12가지 소원을 모아 유리광세계(琉璃光
世界)를 이룩하셨다.
때문에 병을 치유하는 분야가 차지하는 비중은 크다.
약사여래는 대체로 왼손에 약그릇을 들고 오른 손은 시무외인을 하고 있다.

 

 

북면에는 좌우로 머리를 높게 틀어 올려 보관(寶冠)을 쓴 부각보살입상(菩薩立像)과,
6개의 손에 11면의 얼굴을 가진 관음보살의 입상이 새겨져 있다.


관세음보살은 우리 인간의 11가지 걱정거리를 없애고, 11가지 기쁨을 선사한다는
보살이다. 또한 팔(譬;비)이 여섯이나 되는데, 이것은 인간을 구제하는데 많은 팔이
있어야 된다는 표시다.
이는 관음상의 변화도나 형태는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다방면의 신통력을 보여주는
주술적(呪術的)인 성격을 띠고 있다.

 

 

남쪽에 현재 남아 있는 두 보살상과 불상은 몸체의 굴곡 표현이나 옷 주름 등을 볼 때
균형이 잘 잡혀 있다.
그러나 많이 파손되어 의제(衣制)로 미루어 여래상으로 본다.
이들은 모두 높은 돋을 새김으로 조각되었다. 불상의 광배는 1.6m가량 되는 주형신광
(舟形身光)과 두광(頭光)으로 구분된다.


남면 암석 서단(西端)에 한상을 완전히 떼어낸 자국이 남아있는데 이것은 보살상으로
이 면에 원래 삼존상을 이룬 것으로 추정된다.


매일같이 소금강산을 운동삼이 오르 내리는 이들은 백률사보다 이곳의 부처님들
앞에서 쉬기를 즐긴다.
그만큼 주변의 풍경이 사람으로 하여금 평온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