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기

김대근 2006. 6. 24. 07:07


보물 517호 영천 청제비(菁堤碑)

 

 

 

識者憂患...

아니 이 말보다는 차라리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더 어울릴런지 모르겠다.
포항으로 출장이 자주있는 탓에 자주 들리는 곳이 영천(永川)인데 항상 경유지
로서의 가치 이외에는 생각이 미치지 않았다.


그나마 지금은 포항-대구간 고속도로가 새로이 개통이 되면서 오가는 길에
영천을 경유지로 하는 빈도도 거의 전무해지고 말았다.


출장으로던 마음먹고 하는 관광이던지 장거리 운행이 많은 나는 지나치는 길에서
밤색으로 표시된 관광지나 문화재 표시는 여간해서 잘 놓치지 않는다.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달리다 영천나들목을 빠져나오면 처음 마주치는 문화재의
표시간판이 "청제비"라는 간판이다.


솔직히 창피한 이야기이지만 나는 이것을 靑帝碑로 이조때에 사대사상에 빠진
왠 미친넘의 조상중에 하나가 청나라 황제를 위해 세운 비로 착각을 해서
일부러 외면을 해온게 사실이다.
그래서 서두를 식자우환으로 잡았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하던가..흐흐..참 부끄러운 고백을 했다.


포항 출장을 마치고 귀로에 오르면서 이번에는 어디를 둘러볼까 하면서
답사여행의 길잡이 책을 넘기면서 숨어있었던 곳들을 찾다가 영천의 청제비에
이르러 내가 생각했던 그런곳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영천은 예로부터 물좋고 산좋은 곳으로 불리워 졌다.
"동문선"을 펴낸 성종대의 학자 서거정이 진주 촉석루와 밀양의 영남루와
더불어 영남 삼루중의 하나로 이야기한 조양각이 있는 곳이다.
조양각은 워낙이 근동에서는 유명하여 다음에 들러보기로 하고 오늘은
그동안 숨어있었던 보석같은 청못에 얽힌 이야기나 풀어보려 한다.


아득한 부족국가 시대에 영천은 변진 24국 가운데 하나였던 골벌국이 있었던
만큼 뿌리가 깊고 역사가 있는 고장이다.
지금에는 3사관학교만을 떠올리기 십상인데 삼국시대에는 신라의 외곽을
방어하는 요충지로서의 역활을 톡톡히 해내었고 후삼국시대에는 견훤과
왕건이 패권을 서로 다투기도 했던 곳이다.


이곳 영천에서 배출한 인물도 많다.
고려말의 충신 정몽주, 화약을 발명한 최무선, 대마도 정벌의 공신 이순몽,
가사문학의 대가 박인로등이 모두 이곳 영천을 고향으로 둔 사람들이다.


그런 역사가 오랜 이 곳 영천은 일찍부터 벼농사가 발달했다.
그러다보니 관개사업도 다른곳보다 발전을 했을 터인데 그 중요한 유적이
바로 이곳에 있는 청못(菁池) 또는 청제(菁堤)라고 불리는 인공못이다.

 

 

 


청못을 찾아가는 길은 만만치 않았다.
마침 비가 내린뒤라서인지 4륜구동 차량이 그리워지는 좁은 산길과
진흙길이 계속 되었다.


ABS..
사실 차에 장착되어  있는 이 제동시스템을 느껴보지 못했는데 미끄러운
진흙길을 내려가다가 브레이크에 발을 올리자 드드득~~ 하는 ABS가 반응하는
둔탁함이 바로 전해진다.

 

 


청제비가 있는 배수로 부근..즉 물을 내보내는 곳 부근에는 대낮에도
은근히 걱정이 될만큼 숲속깊이 들어 있고 인적도 없다.


삼한시대대부터 벼농사를 위한 수리시설이 있었는데 그동안 우리들이 역사서를
통하여 배워온 바에 의하면 3대 수리시설이 주로 언급이 되고는 했었다.
김제의 벽골제(碧骨堤), 밀양의 수산제(守山堤), 제천의 의림지(義林池)가
바로 그것인데 이곳 청못도 그에 버금가는 오랜역사를 가진 곳이다.

 

 

 

채약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모아 논농사에 이용하고자 두개의 야산을
막아서 만든 청못은 제방의 길이가 약 240미터, 높이가 12.5미터로 전체 둘레가
2킬로미터쯤 된다.
저수면적이 11만 입방미터로 저수량이 59만톤 정도라고 한다.
청못아래 펼쳐진 30만평의 구암들 일대가 아직도 이 청못을 중요한 용수원으로
유지되고 있다.
이 청못덕에 구암들은 가뭄을 거의 타지 않는다고 한다.

 

 

못의 서북편 얕은 산기슭에는 청못을 쌓은 내력과 고친 연유를 새긴 비석이 있다.
이 비석에 의하면 청못을 처음 만든 것은 536년 경이라고 한다.
비석은 두개가 있는데 하나는 청제비(菁堤碑)라고 하고 다른 하나는 청제중립비
(菁堤重立碑)이다.
청제비는 못을 쌓은 내력을 새긴 비이고 청제중립비는 후일 수리를 하고 그 내력을
새겨둔 비석이다.
이 두비는 일괄해서 보물 제 517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이 비석은 삼국시대의 비석들이 보이는 공통적인 모양대로 자연석을 간단히 가공하여
글씨를 음각했으며 받침돌이나 지붕돌은 처음부터 없었던 듯하다.
자연석이다 보니 두께나 높이가 부분에 따라 일정하지 않으나 대략 높이는 1미터30센티,
두께는 30에서 50센티 정도 되어 보였고 아랫부분의 일부는 땅에 뭍여있다.
석질이 단단한 화강암을 사용해서 인지 1500년의 세월에도 불구하고 새겨진 글자의
마멸이 적어서 대부분 육안으로 판독이 가능해 보였다.


문체가 이두를 넣은 신라 속한문체라 일반인이 그 내용을 해독하기 어렵다고 하는데
자료에 따르면 공사기간,규모,동원된 인원,공사를 지휘한 관원의 직책과 이름등이
실려있다고 한다.
비문에 따르면 법흥왕 23년(536년)에 법당(法幢)이라는 신라의 군사조직을 통해
1만4천의 인원이 농한기인 2월12일부터 4월13일까지 일을 했다고 한다.

 

 

청제중립비는 절단되어 땅에 묻혀있던 청제비를 다시 세우고 그 사연을 새겨
1688년에 새로 세운 비석이다.
원래는 청제비에서 5미터 정도 떨어져 있던 것을 지금은 비각안에 나란히 있다.


청제중립비에 새겨진 내용중에 우리가 다시 새겨할 대목은 이렇다.


"지난 순치(順治) 계사년(1653)에 비석이 누군가의 손에 절단되어 땅속에 파묻혀
버리니 이 고적(古跡)이 전해지지 않음을 안타까워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에 비석을 고쳐 세우고 그 일을 기록하는 바이다.
아, 훗날 사람들이 이 비로 말미암아 이 제방을 허물지 말아야 할 까닭에 생각이
미친다면 비가 제방에 도움이 없지 않다 할것이다."

 

 

옛사람의 가슴속에도 우리 문화유산을 지켜서 온전히 내리물림 해야한다는
절절함이 묻어나지 않는가 말이다.
그런 마음에도 아랑곳없이 경부고속도로를 내면서 청제비가 절단되듯이
유서깊은 청못도 두동강을 만들어 버렸다.


대...한...민...국~ 철밥통 공무원들의 무지함....
아~~ 서글픔이여...오늘도 청못은 말이 없다.

 

 

 


나름대로 그리는 약도는 좀은 허접하다.
그러나 제대로 격식있게 그린 약도보다는 찾아가기 쉽게 그렸다.
내가 직접 찾아가보니 이렇게 가는게 편하더라식의 약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