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글,영화,책

김대근 2006. 2. 19. 22:50

<장면 1>


"나 여기 있고 너 거기 있어?
너 거기 있고 나 여기 있어!"


장생이 꼭두쇠에게 곤경에 처했을때 공길이 낫으로 꼭두쇠를 죽이고 둘이서
떠돌면서 장님놀이를 하는 장면이다.
이 장면은 나중에 영화가 끝나고 스텝자막이 오를때도 나온다.


나와 너...
사실 이것만큼 극명하게 다르면서도 같은 것도 없을 것이다.
나라는 존재가치도 너라는 것이 없으면 무의미 해지는 것일 것이다.
너라는 객체로 인해서만이 비로소 나라는 주체가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가장 우선 알아야 될것은 바로 "나"라는 주체적 존재의 확인이다.


불교(佛敎)는 나라는 존재가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작용하는지 어떻게 조정을
하면 되는지 그것을 알아차리는 공부를 하는 종교다.
종교라는 이름을 불교에 붙일수 있는지 의문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교주와
교단과 신도가 있으니 그도 종교라고 해야 할것이다.
사실 종교란 "나"라는 존재의 부존재(不存在)를 증명하는 과정이다.
나를 온전히 버리고 그 자리에 절대자나 신을 넣는 과정이다.
그런면에서 불교(佛敎)에 종교라는 용어가 조금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팔만사천가지의 불교경전들이 따지고 보면 모두가 마음의 문제에 대한 것이다.
업..카르마..윤회..선..수행...참회...수많은 용어들이 있지만 근본적으로 마음으로
표현되는 나를..그것도 참다은 나를 발견하는 방법에 대한 것이다.


너라는 존재가 그곳에 있을려면 나를 필요로 한다.
나라는 존재로 인해서 너라는 존재가 있기 때문이다.
나의 입장에서 보면 상대방은 분명 너이지만 그 상대의 입장에서 보면 나라는 존재도
바로 너의 존재로 남는 것이다.


분명 나라는 존재는 하나뿐임에도 주체도 객체도 되는 것이다.
살아가다 보면 하루에도 수없이 생기는 너라는 객체와의 관계에서 다툼없이 즐거히
사는 방법은 스스로 객체가 되는 길뿐이다.
우선은 나이기 이전에 너가 되어 보는 것이다.
너가 되어보면 비로소 너라는 존재에 대해서 이해가 생기고 비로소 나도 보일것이다.


<장면 2>


"어떤 인생이건 그것은  줄타기에 불과하다."


줄을 타는 광대에게 허공을 가로 지른 한가닥의 줄은 이승과 저승의 경계이다.
긴장하지 않으면 바로 낙상하여 죽음을 맞이하거나 평생을 다른 광대의 줄타기를
구경하거나 해야만 한다.
그에게는 비록 한가닥 줄이지만 자신의 모든것을 걸어야 하는 것이다.
그에게는 한가닥 줄이 환호와 탄식의 구분점이 되기도 한다.
그 줄은 하늘과 땅의 호흡점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왕이나 현대적 이름의 대통령에게는 민심이 그 경계선이다.
정치인으로 이름붙여진 그들은 권력이 바로 그 한가닥 줄과 같은 것이다.
서민이라 불리는 대다수의 피지배자들에게는 그저 하루를 사는게 한가닥 줄이다.


감정적인 줄타기를 보면 남과 여는 극명하게 다르다.


출장지 여관에서 아침에 일어나 출근을 준비하다가 본 텔레비젼에서 CF가 눈에
문뜩 눈에 들어왔다.
오른발 왼발에 각각 다른 색깔의 스타킹을 신은 여자 모델이 이렇게 말한다.


"여자는 열정 반, 냉정 반...여자는 반반이다."


참 적절한 표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십이 가까워 오도록 사는 동안 수많은
여자들이 나를 스치고 지나가기도 했고 아직 머무르고 있기도 하다.
가까이는 와이프와 딸래미들..어머니..할머니..이모..고모부터 멀리는 추억속
에서나 겨우 보이는 이름도 모르는 그녀들까지 수많은 여인들과 부대껴 왔지만
항상 그랬다.
그들은 어떤땐 열정적인듯 또 어떤땐 차가울 정도로 냉정했다.
여자들의 열정은 냉정을 가장할때도 있고 반대로 그녀들의 냉정이 열정을 감추기
위한 방편일때도 있다.


남자들은 단순하다. 너무 단순해서 차라리 담백하다고 표현해야만 한다.
이쪽이 아니면 저쪽이다. 남자들의 인생은 재미가 없다.
재미있고 긴장되는 줄을 타는 것이 아니라 줄의 이쪽에 있거나 아니면 줄의 저쪽에
그렇게 있을 뿐이다.


<장면 3>


"戀心(연심)은 남과 여의 전유물이 아니다"


왕의 남자에 나오는 주인공중의 하나인 장생은 영화적 가공의 인물이며 남자이다.
우리 인식범위로 굳어있는 우락한 남성상과 보호본능을 가지고 강단과 리더쉽을
지닌 그야말로 전형적인 남자의 모습과 내면이다.


잠깐 생각을 돌려보자.
남자로 태어났다고 해서 사회적인 관습과 편견이 없는 어떤 고립된 공간에서
성장을 했다면 우리 사회의 통념이 규정한 그런 남성상을 갖출수 있었을까?
그것은 참으로 어려운 문제이기는 하지만 요즈음 남자아이들의 여성화 현상을
일부에서는 초등학교를 온통 점령한 여교사의 탓으로 돌리는 것을 보면 환경에
따라 남성적으로도 여성적으로 정체성을 가질수도 있으리라 생각이 든다.


영화의 초반에 공길의 몸을 뻑적지근 잔칫상 한상으로 탐하던 부잣집 주인도
역시 우리 관습이 규정지어논 남자의 모습이다.


공길의 입술을 훔치던 군왕 연산도 역시 남자다. 그는 여태껏 공길이 만났던
다른 남자들이 가지지 못했던 절대적 권력도 소유하고 있다.
아니 절대적이진 않았다. 결국 빼앗겼으므로..
그래서 절대에 가까운 권력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오히려 어울리겠다.


이들의 공통점은 같은 남자인 공길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연심..즉 사랑하는 마음은 상대적이어야 비로소 가치를 가진다.
장생과 공길의 연심은 같은 처지라는 위치적 가치공유에서 출발했을 것이다.
그들은 늘 형제애 같은 장면만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서 아침안개
처럼 흐르는 연심(戀心)을 감출수는 없다.


연산과 공길의 사이는 연산의 일방적 입맞춤으로 극적인 상징성을 가진다.
장생이 "비럭질"이라고 지칭하는 그런 관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공길도 거부한 기색도 없다. 연산의 공허한 눈빛과 눈물에 공길도 마침내
인간적인 면에서 연심을 느낀 때문일 것이다.


공길은 남자다.영화에서는 분명히 그가 맡은 역활은 남자였지만 영화감독은
공길에게 남자에게 내재한 여성을 드러내도록 했다.
아무리 강인한 남자에게도 어느정도의 여성이 존재한다고 한다.
남자의 몸을 지키고 있는 여성 호르몬의 역활때문만은 분명히 아닐 것이다.
연산에게 절대적 갈증이던 모성애를 공길에게서 느꼈을 것이고 아마도
장생에게선 선왕이라 부르는 부성에 대한 강한 거부를 느꼈을지 모르겠다.


다만 분명한 것은 사랑한다는 것이 남자와 여자 사이에만 오고가는 것이 아니라
남자와 남자..여자와 여자 사이에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다름과 틀림의 명제에서 우리는 동성애를 늘 틀림에 가져다 놓았다.
그러나 나는 그들을 우리와는 틀린것 보다는 다른...단지 나와는 다른 그런
개체로 보아주고 싶다.

 

<장면 4>


"도둑질도 본인이 떳떳하면 도둑질이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역사적으로 단 한번도 혁명이 없었다. 내가 이렇게 단언을 하면 많은
사람들이 반론을 펼것이다.
그러나 내가 정의하는 혁명이라고 한다면 피지배자와 지배자간의 역활바꿈이
그것이다.
신라..고려..조선을 통털어도 그런적은 없었다. 그저 왕이 바뀌고 왕조가 바뀌었어도
그것은 지배계급간의 투쟁의 산물이였다.


지배계급은 늘 피지배계급을 착취했고 남아있는 피 한방울도 짜내려고 안달을 했다.
자기들끼리 벼슬도 팔고 싸고 했다. 집안에 한 사람이 출사를 하면 덩달아 식솔들도
위세가 드세어져서 착취의 대열에 섰다.
그런것이 조선의 열번째 왕인 연산의 시대에는 극에 달했다.


또 그들은 자기들끼리 소위 코드가 통한다는 이유로 뭉쳤다. 그들이 뭉친데에는
어쩌면 권력을 지켜는데 촛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사람들은 역사의 기록에서 당파라는 이름으로 기록한 이 떼거리 약탈은 자신의
잘못을 감추고 떳떳함으로 가장하기에 적합했다.


지금의 딴나라당..열린즈그당..민주후루꾸당...등등도 역시나 조선의 그들로부터
물려받은 기회주의,비양심,인면수심을 가진 떼거리들일 뿐이다.


왕의 내관인 처선(장항성 분)이 왕의 정적을 제거하여 왕권을 강화하려던 계획의
일환으로 광대패들을 시켜서 대신들의 비리를 폭로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 중에서 소심해서..스스로 양심이 찔려서..어쩔줄을 모르다가 결국 왕이 하사한
술잔을 떨어트린 불경죄로 파직을 당하는 대신이 있다.
사실 그 자리에 있는 수많은 대신들 그 시절의 벼슬아치들은 누구 할것없이 모두
하나같이 냄새가 진동할 정도로 썩고 썩었었다.


비단 혼자만 그런것도 아니고 떼거리를 따라 같이 그랬지만 가난하게 자란 한이
있었다는 그 대신은 죄를 받고 양반의 착취는 당연한 것이라는 다른 사람들은
남의 이야기를 듣는듯 덤덤하다.
결국 그들은 자신들의 착취와 지배를 유지하기 위해 왕(연산)을 몰아낸다.


올해도 얼마지 않아서 선거라는 이름의 제도에 의해 도둑놈을 뽑아야 한다.
그 놈이 결국 내 주머니를 노릴것임을 뻔히 알면서도 말이다.

 
<장면 5>


"인과는 분명 거부할 수 없는 진리다"


우리민족의 정신을 오랫동안 지배해온 것중의 하나가 인과(因果)라는 것일 것이다.
인(因)은 어떤 일에 있어서 그 원인이 됨을 말하는 것이고 과(果)라고 한다면
그 원인으로 인하여 생겨난 결과를 말한다.


여기서 사람들은 대부분 착각하는 것이 하나가 있다.
그것은 하나의 인(因)이 하나의 과(果)를 만들것이라는 착각을 하는 것이다.
우리들 삶에서 인(因)이라고 하는 것은 호수에 돌멩이 하나가 던져지는 것과 같다.
그러면 호숫물이 둥글게 파도를 만들면서 사방으로 퍼져 나가게 될것이다.
어떤 파도는 중간에서 사그라지기도 하겠지만 대개는 水草라도 흔들것이다.
수많은 水草들이 흔들리거나 바위에 철썩대거나 언덕의 흙을 깍아내거나 물가의
모래를 어디론가 운반하게 될것이다.


인과가 서로 일대일로 대비되지 않음을 알았을 것이다.
농사에서도 마찬가지가 아니던가 말이다. 한알의 볍씨가 수백알의 나락을 열리게
만들며 한 알의 감나무 씨앗이 수십년에서 길게는 수백년 동안 수많은 감들을 열리게
만드는 것처럼 지금 이 순간 심는 인(因) 하나가 나중에 수많은 과(果)를 만들게 된다.


사람들은 어느 순간 자신앞에 생각치 않은 일이 생겼을때 현재의 상황이 자신에게
주는 괴로움에만 매달리려고 한다.
그 괴로움의 근원인 인(因)에 대해서는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어떠한 질병도 그 원인을 알아야 약도 바로 쓰고 치료도 잘되는 것처럼 현상에 대한
원인을 바로 보면 괴로움에 대한 치료도 쉬워진다.


연산군이 선왕의 후궁..즉 아버지의 첩..따지면 어머니의 반열인 그들을 살해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들은 대비에게 붙어서 연산의 어머니를 폐비시키고 결국엔 사약을 내리도록
만들었던 인(因)에 대한 과(果)를 받은 것이다.
연산군 어머니에게 내리는 사약을 들고간 어쩌면 타인에 의해 인(因)을 심게된
금부도사는 공길을 죽이려고 꾸민 인간사냥 놀이터에서 연산의 손에 비참한 죽음으로
자신이 심은 인(因)에 대한 과(果)를 받게 되는 것이다.


왕의 남자의 시대적 배경은 조선의 열번째 왕이지만 그 시대적 상황은 당파정치가
극에 달하던 때였다.
정비나 후궁이 임신을 하고 안하고에 따라 당파의 운명이 좌우지되기도 하고 또는
왕자를 낳느냐 공주를 낳느냐에 따라 당파의 흥망이 결정되던 그런 때였는데
그 환경도 하나의 인(因)이 되었다면 되었을 것이고 연산군의 아버지인 성종의
지극한 효심도 결국에는 인(因)이 되어서 연산이라는 아들의 불행한 과(果)를 남겨
준 셈이 되고 만것이다.


기억하라!
세상의 모든 일들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다는 것을 말이다.
하나의 원인이 수많은 결과를 각각 다르게 파생시킴도 분명하게 기억하라.
지금 현재 내 주위에 있는 모든 현상은 지나간 과거에 심겨진 인(因)의 과(果)이며
오늘의 과(果)는 새로운 미래에 인(因)이 된다는 사실도 깊이 새겨두라.


새삼 발걸음이 무거워 진다.


<장면 6>


"욕심의 늪에서는 좀체로 헤어 나올 수 없다"


장생과 공길..그리고 광대패들은 우여곡절 끝에 왕의 웃음을 얻어낸다.
그리고 그들은 궁궐안에서 지내게 되고 걸판진 궁중음식 한판을 받게 되는데
장생이 하는 말이 이렇다.
'광대는 배만 부르면 되지~'


그렇게 배만 불리웠고 그 배부름에 만족을 했다면 영화적인 요소로서 부적격한
스토리가 되었을 것이다.
장생은 그곳에서 욕심의 늪..그 심연쪽으로 한발 다가간다.


고려의 왕은 누런 금색옷을 입었다. 우리들이 태조왕건등에서 보듯이 말이다.
누렇다는 색깔명인 황(黃)색은 황제의 색이였기 때문이였는데 스스로 중국의 속국이
되어버린 조선의 왕은 뿕은 색옷을 주로 입었다.
곤룡포라는 옷은 자줏빛나는 붉은 색이다. 따라서 붉은 색은 지배의 나타냄이고
청색은 피지배의 색인 것이다.
그런데 묘하게도 감독은 왕에게 청색옷을 입혔다. 반대로 광대에게는 붉은 옷을
입힘으로써 단 한번도 성공하지 못햇던 계급혁명을 완수하려고 했음일까?


장생도 결국에는 궁궐안의 권력에 한발 더 다가가고 싶었고 한번 빠져들게 되버린
욕심의 늪에서 빠져 나오지 못했다.
마치 부나비가 자신의 몸이 타들어가는 줄 알면서도 불에 뛰어드는 것처럼 말이다.


욕심의 늪은 깊고도 깊다.

 
<장면 7>


"자유는 남으로 부터 받는게 아니다."


왕의 내관 처선은 옥에 갖혀있는 장생을 놓아준다. 아마도 자신이 심은 인(因)을
그렇게라도 제거하려고 했을지 모르겠다.
그러면서 장생에게 해주는 말이 있다.
'공길을 버려라'


공길은 이미 왕의 남자가 되었다. 왕의 모든것을 지켜야 할 운명에 놓여있는 처선은
공길에게 집착을 보이는 한 결국 왕으로부터 죽임을 당하게 될것이다.
왕의 관심 바깥에 있는 처지인 탓으로 어쩌면 장생에게 동료의식 같은 것을 느꼈는지
모르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장생에게는 천우신조였을 것이다. 그대로 모른체 떠났더라면 그는 목숨을 부지하면서
자신이 좋아하는 줄타기도 계속 했을 것이다.


그러나 장생은 결국 공길을 택했다.
장생에게 있어서 공길은 거칠고 힘들었던 광대패로서의 삶을 그동안 이나마 감내해온
안식처같은 것이였다. 마음의 안식처 같은 것이기도 했을 것이고 보호해야할 최종의
목표같은 것이였는지도 모르겠다.


안식이라는 것은 마음이 자유를 얻은 가장 평온한 상태일 것이다.
마음의 자유를 가지고 못가지고는 결국 자신의 몫이기도 하다. 마음이라는 것이 결국
자유로움과 자유롭지 못함을 만드는 근원이 되는 것이다.
결국 인식의 모든것은 마음이 좌우하는 것이라는 이야기다.
그러나 대개의 사람들..아니 어쩌면 전부의 사람들이 자신의 마음이라는 존재를 인식
조차하지 못하고 의미없이 살다가 가는 것일 것이다.


달마라는 이가 있었다.
인도 사람으로 중국으로 마음을 전하러 왔다. 토굴에서 수행중인데 소문을 듣고
혜가(慧可)라는 스님이 찾아 왔다.
제자가 되기를 청했으나 달마는 묵묵부답이였다. 결국 혜가스님은 팔 한쪽을 잘라서
자신의 마음공부에 대한 의지가 얼마나 강한지를 증명했고 마침내 제자로 받아졌다.


어느날 수행중이던 혜가가 달마를 찾아 왔다.
"괴로운 마음을 어찌하면 편안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달마는 무심하게 말했다.
"내가 네마음을 편안케 해줄터이니 마음을 가져오너라"
혜가는 스승의 말대로 아무리 마음을 찾아보려고 했지만 찾을수 없었다.
"마음을 찾을수 없었습니다"
"이미 내가 네 마음을 편안하게 만든 것이구나."


우리에게 마음이 있지만 막상 찾으려하면 찾을 수 없는것이 마음이기도 하다.
자신과 세상의 관계도 실제로는 마음에 기인하는 것이다. 모든 것이 눈을 통해서 또는
촉감을 통해 그리고 청각을 통해 때로는 냄새를 통해서 마음의 자극으로 비로소
외부를 인식하게 되는 것이 그것이다.


너에게 마음을 준다.
너는 내 마음속에 있다.
너는 늘 내마음에 같이 있어..


이런 말들은 연인들 사이에서 쓰이는 말일 것이다.
세상의 연인들이 24시간 같이 있을 수는 없을 것이다. 같이 있을수 있다고 하드라도
잠이 들면 각각 다른 꿈을 꾸게 될것이다.
엄밀하게 이야기 한다면 마음속으로 같이 있는다는 것은 틀린 말이라고 할수 있을
것이다.
차라리 서로에게 길이 든다라고 표현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어린왕자가 여우를 만났다. 어린 왕자가 여우에게 이렇게 부탁을 한다.
"이리 와 나하고 놀자.난 정말 외롭단다...."
"난 너하고 놀수가 없단다. 난 길들여지지 않았거든."
"길들인다는게 무슨뜻이니?"
"그건 너무 잊혀져 있는 일이지. 그건 '관계를 맺는다'라는 뜻이야."
"관계를 맺는다고?"
"그래.넌 아직까지 나에게는 다른 수많은 꼬마들과 똑같은 꼬마에 불과해. 그러나
나에겐 네가 필요 없지.그리고 너에게도 내가 필요 없겠지. 네 입장에서는 내가 다른
수많은 여우와 똑같은 여우에 지나지 않을 테니까. 그러나 만일 네가 날 길들이면 우린
서로를 필요로 하게돼. 나에게는 네가 세상에 하나밖에 없게 될 것이고,너에게는 내가
하나밖에 없게 될거야"


우리의 마음은 늘 그렇게 길들여 지는 것이다.
아주 오랫동안 길들여진 마음은 마침내 안식을 찾게 되는 것이다.


마음은 참 어려운 놈이다.
진흙속의 미꾸라지 같은 놈....미끄덩~ 미끄덩~ 나는 늘 놓치기만 한다.

 
<장면 8>


"책임은 늘 가혹하다"


혼자 살때 없어도 되는 것을 꼽으라면 책임이라는 것이다.
나라는 절대적 존재와 또 다른 나라는 절대적 존재의 공동추구가 사회의 기본단위다.
절대적 존재들의 관계이다 보니 조금씩 자신의 것들을 버려야 한다.
그래서 서로의 불만을 없애기 위해서 만든 것이 법칙과 규범이다.
태어나면서 부터 이 법칙과 규범에 충실하도록 학습되고 반복세뇌 되어서 습관화해
가는 것이다.
이 정해진 법칙과 규범을 어겼을때 가해지는 벌칙이 책임이라는 것이다.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사람들은 권태라는 것이 있다.
오랫동안 똑같은 일을 계속하다가 보면 싫증을 느끼게 되는데 우리는 그것을 일러서
권태라고 말하는 것이다.
사회의 정체가 오랫동안 계속되면 사람들은 권태를 느끼게 되고 점점 법칙과 규범을
어기는 사람들도 늘어나게 되다가 당연한 것으로 되면 책임질 사람도 책임지울 사람도
애매해지게 되는데 그럴때 사회는 자연 붕괴를 맞이하게 된다.


민족은 오랫동안 보존되지만 국가는 끝없이 바뀌어지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다.
국가라는 사회가 오래 지속되다보면 권태에 의한 책임의 느슨함이 원인이 되어서
결국 사회의 붕괴를 가져 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책임은 늘 가혹해야 한다.


이 영화에 나오는 처선이라는 인물은 역사적 실존 인물이다. 그의 죽음은 영화적
재미를 위해 가공의 설정이 되었지만..


그는 궁중의 내시로 연산을 어릴쩍부터 보살펴 왔다. 연산이 세자로 책봉되면서부터
늘 같이 삶을 살아왔다. 어쩌면 그는 연산의 불행함에 대하여 자신의 피붙이보다
더 가슴아픈 연민을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연산이 왕이 되자 그는 자신의 손으로 왕을 튼튼하게 만들고 싶어 했다.
그래서 그가 택한 책략중의 하나가 장생과 공길의 광대패를 들여오는 일이였다.


처음에는 그저 장녹수의 치맛폭에 쌓여있던 연산을 깨우치고자 했을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연산이 새로운 재미에 빠져 들었고 권력의 대부분을 쥐고 있었던
대신들의 반발에 부딪치게 된다.
그래서 처선은 왕을 보호하기 위해서 광대들로 하여금 대신들의 비리와 불합리를
풍자케하여 몇몇 정적을 제거하는데 성공하기는 한다.


점점 깊어지는 마약의 중독처럼 이제 처선은 왕의 아킬레스건 같은 한을 풀어서
왕이 제자리로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왕의 복수심을 부추기게 된다.


그러나 그 모든 일들이 결국에는 왕의 자리를 위태롭게 만들었다는 것을 알고
그는 가혹한 책임을 진다.
그는 그의 목숨을 책임을 지는데 바쳤다.


어떤 일을 할때는 목숨을 내놓을 각오로 해야만 한다. 책임은 가혹해야 한다.
책임을 비켜가려고 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비겁한 일이다.

 
<장면 9>


"예나 지금이나 정치인은 그놈이 그놈이다."


마침내 그들은 칼을 높이 들었다. 거사날을 정하고 군사를 모으고 군비를 준비해서
그렇게 그들은 궁궐로 쳐들어가서 역사의 물꼬를 바꾼다.


우리들이 알고 있는 역사는 연산이 포악해서 도저히 왕으로써의 자격이 없으므로
민심에 등떠밀려서 큰일을 했다고 적혀있다.
과연 그런가? 나는 늘 역사를 봄에 있어서 정사보다는 그늘에 감추어진 역사를
생각한다. 기록으로 남은 정사는 늘 승자만을 위한 기록이기 때문이다.
연산군은 후궁의 몸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연산이 세자에 책봉이 되고나서 정실의
몸에서 왕자가 태어난 것이다.
연산의 비극은 여기서부터 잉태되기 시작한 것이다.


두개의 파가 생겼다.
하나는 비록 정실은 아니지만 이미 세자로 책봉된 연산군의 지지파이고 다른 하나는
정비의 몸에서 태어난 왕자가 있으니 물꼬를 바르게 돌려야 한다는 세력들이다.
결국 그 두파는 서로 부딪고 죽이고 피를 흘리는 한판 싸움을 벌린다.
연산군은 패했다. 역사는 그런 것이다.
패배자는 온갖 더러운 오물을 뒤집어 쓰고 손가락질 받으며 사라져 가는 것이다.


거사를 이룬 그들은 깨끗한가? 결코  그렇지 않았다.
그 당시 사회적으로 양반층이 얼마나 부패했는지는 역사가 증언하고 있는 바다.
벼슬을 팔고 뇌물을 받고 힘없는 백성들의 것들은 짓밟아 빼앗고 그랬다.
단지 그들이 거사라는 이름으로 칼을 빼어든 것은 좀더 많은 벼슬을 팔고 좀더
많은 뇌물을 받고 좀더 많이 백성의 것을 착취하기 위해서 그들편을 최고의 자리에
올려놓고 싶었을 뿐이다.


제법 오래전이다. 아마도 오륙년은 되었을 것이다.
둘째가 현장학습을 가는데 국회의사당으로 간다고 자랑을 했다.
큰 아이가 일갈 했다.
"재섭는 새꺄들 있는데 뭐하러.."
재수없는 새끼들이 있는 곳이라고 한다. 국회의사당이 그렇다고 말하는 것이다.
딸래미 입에서 나온 말치고는 너무 과격해서 그냥 넘기기 뭐해서 한마디 했다.
"말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다..사람 일은 알수가 없어서 나중에 네 신랑이 정치를
할수도 있는 것이고 아빠도 할 수 있는 것인데.."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엄청난 톤으로 반발해왔다.
"난 정치하는 새끼들이 제일 싫어..나중에 남편이 한다면 이혼할꺼야..아빠도
정치만 해봐..온 식구들이 힘을 합쳐서 쫓아 내버릴 꺼야"


나는 그래서 정치쪽은 쳐다 보지도 않는다.


지금도 옛날이나 다르지 않다. 평양감사로 제수되어 임지로 가게되면 친형제는
물론이고 사촌에 사돈의 팔촌까지 족히 몇백의 식솔들이 따라가서 평양일대를
아예 토악질을 하고 오는 것이다.
지금도 주변에 누구 국회의원 되었다하면 빌붙어 뭔가 해먹으려고 혈안이다.
주변에서 정치자금을 대고 하는 것도 반대급부를 요구하기 위한 투자인 것이다.
정치인을 통한 반대급부는 힘없는 다른 사람의 피와 땀을 착취하는 일이된다.


좀 있으면 시도지사 뽑는 선거다.
알면서도 도둑놈을 뽑아야 한다.
이 기막힌 민주주의라는 선거제도..하자니 뻔하고 안하자니 회피가 되고...
탈출하고 싶다..이 모순된 사회의 법칙에서...

 
<장면 10>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


처선이 몰래 놓아 주었지만 공길을 포기 할수 없었던 장생은 왕의 침소앞에서
왕과 공길의 부도덕한 '비럭질(男色을 가르키는 비속어)'을 질타한다.
남자와 여성간에 벌어지는 삼각관계의 질투처럼 장생의 이 질타는 연산으로
하여금 장생의 눈을 읽게 만든다.


영화의 초반에서 장님연기를 하던것처럼 이번에는 진짜로 장님이 되어버린 몸으로
그렇게 줄타기를 하는 것이다.
우리의 오감은 색성향미촉(色聲香味觸)이다. 눈으로 보는 색..귀로 듣는 성..코로
느끼는 향..혀로 느끼는 미..피부으로 느끼는 촉이 그것이다.
그중에서도 눈으로 보는 색(色)이 9할의 영역을 차지하고 있다. 어떤 감각기관보다
가장 중요한 것이 눈이다.
눈이 없다는 것에 적응을 하게되면 마음의 문이 열린다고 한다.


세상의 본질은 그대로 이다.
화려하고 예쁜 꽃이 가득한 화병이 눈앞에 있다고 가정해보자.
"음~ 정말 화려하고 예쁜 꽃이네.." 누구나 이렇게 말하게 될 것이다.
그때 누군가가 뒤에 살금 살금 다가와서 두손으로 눈을 가렸다고 가정해보자.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될것이다. 그러면 꽃은 아름다움을 잃어 버린 것일까?
우리 눈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것뿐이지 꽃의 아름다움은 사라진것이 아닌 것이다.


물 한그릇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대접에 있던 물을 접시에 담는다고 한다면
그릇에 따라 물의 형태가 변하기는 했지만 물 자체가 변한것은 아닐것이다.
또 그 물을 긴 대롱에 부어도 역시나 물이라는 본질이 변한건 아니다.


눈으로 보던 빨간색..노란색..파란색..하늘색..하얀색같은 여러가지 빛깔들이
눈을 잃어버리면서 마침내 검은색 하나로 흡수가 되었다.
그러나 세상의 빨간색은 그대로 빨간색이고 파란색은 역시나 파란색일 뿐이다.
장생이 눈이 멀어도 세상은 그래로 인것이다.


세상을 향해 마음이 열리면 색깔도 필요없는 경지...空의 세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