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詩集

김대근 2006. 3. 3. 01:45

내연산 보경사 탱자나무앞에서..

 


호로롱~ 호로롱~
참새보다 더 작은
굴뚝새가 생각이 났습니다.


세멘보록쿠 학교담에다
살살 문대면
고단한 아버지 이마의 땀처럼
베어 나오던
새콤달달한 탱자즙이
굴뚝새의 양식이라 생각했습니다.


탱자나무 가시는
하늘도 찌르고
땅도 찌르고
스레트 지붕도 찌릅니다.
보름달이 떠도 찌르고
목덜미 뜨거운 가을볕도 찌릅니다.
들녘에서 쫓겨난
가을바람의 누런색도
가시에 찔려서
맑아진 겨울바람이 되고맙니다.


탱자나무 가시는
세상에 단 두가지
아이들의 배고픔 열망의 돌덩이와
굴뚝새의 날개짖은
어쩌지 못하고 맙니다.


몇 십년
몇 백년 세월을 먹어서
나이테도 사그라지면
탱자나무도 득도를 할까요?
아니면
굴뚝새 주검에 탱자나무로 다비를 하면
노랑 파랑 보라빛 영롱한
사리라도 나올까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이면
굴뚝새의 사리라고 할까요?
탱자나무의 사리라고 할까요?


탱자나무 가시끝에는
탱자나뭇집 큰아들로 불리던
아릿하게 뼛속을 우리는
발가벗은 가난이 있습니다.
추억이라는 이름의 가난이 있습니다.


400백년을 먹었다는
내연산 보경사 탱자나무에는
양파껍질처럼 벗겨도 벗겨도
늘 같은 빛깔의 추억들이
가시마다 걸려있습니다.


400년을 먹었다는
내연산 보경사 탱자나무로
흑백사진첩같은 내 추억을 다비하면
아마 까맣거나 하얀
아니면 회색의
광택없는 사리가 나올겁니다.


탱자나무에는
올 가을에도 추억만 물들어 갑니다.


              (2004. 10. 29. 내연산 보경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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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이틀간의 포항출장에서 돌아 오는 길입니다.
잠깐의 틈을 내서 가을이 깊어가는 길목을 가로막고 있을 내연산의
보경사에 잠깐들었다가 왔습니다.
보경사보다는 내연폭포까지의 계곡길의 내연산의 백미이기는 하지만
짜투리 1시간을 정해놓고 보니 보경사만 휘~익 지나가는 바람처럼
스칠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들의 삶이란게 늘 이렇게 시간에 쫓기고 도망가고 하는것 같습니다.
결국은 시간에 잡혀 생을 마감하게 된다는 명제의 답을 알고는 있지만
도한 늘 그 답을 부정하면서 살게 되는게 우리 인간들인것 같습니다.
하긴 우리 인간의 지적능력이 미치지 못하는 어던 세계에 영원히 살고
있는 사람도 있는지 모르겠지만....


보경사의 가을은 따로이 포스트로 올리겠지만 이번 보경사 여행에서
정말 가슴을 아리게 하는 나무 한그루가 있었습니다.
포항에 살면서 계절이 바뀔때마다 들리곤 했던 곳인데 거의 10년만에
다시 찾아온 이곳에서 예전에 지나쳐버렸던 나무 한그루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저번에 한번 유년의 추억에서 언급을 했던적이 있을겁니다.
제가 어렸을때 동네 어른들이 저를 가르켜서 "탱자나뭇집 큰아들"이라고
불렀는데 그 이유가 학교의 세멘브록담과 우리집사이에 동네길이 있고
그 길과 면한 우리집의 담장이 탱자나무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지요.

 


길보다 집이 낮아서 가을이 되면 아이들이 노랗게 익은 탱자의 유혹에
견디지 못해서 주먹만한 돌을 줏어서 팔매질을 하고는 했지요.
우리집의 지붕은 골탕이라 부르던 타르를 입히고 모래를 흩뿌린 두터운
종이와 파형의 굴곡을 가진 스레트로 이루어진 지붕이였지요.

 


이 지붕은 강도가 약해서 돌을 맞으면 깨어지거나 금이 가서 나중에
비가 새게되는데 아이들의 눈에는 오로지 노란 탱자가 자극하는
달콤새콤한 혀의 자극에 대한 조건반사의 행위로 탱자를 향해서 돌팔매를
하고는 했지요.


"에라이~~ 이 새가 만발이나 빠질 소상이...어데다가 돌을 떤지쌓노"
지금의 표준말로 직역하자면 "에라이~~ 혀가 10000걸음이나 빠질놈이...
어디다 돌을 던지는 게야" 이렇게 되겠지요.
부엌에서 밥을 하다가도 돼짓간에 돼지죽을 주다가도 돌을 던지는 아이들은
으례 우리엄마의 걸쭉한 욕지꺼리를 듣고는 줄행랑을 치게 마련이였지요.


그래도 탱자나무는 구포를 통털어서 제일 크고 숫자도 많아서 누구나
학교앞 탱자나뭇집하면 어디를 지나 어디를 돌아서 하며 초행자들에게
가르쳐줄 정도가 되었지요.


봄에 꽃을 피워서 초여름에 봉긋하게 열매를 맺는데 이때가 약효가 있는지
두어되 정도를 따서 한약방에 가져가면 30원정도를 받았지요.
그때 영화 한푸로를 보는데 어른 입장료가 5원이였으니 6000원정도하는
요즈음 시세로 따진다면 3만원을 조금 넘는 돈이였으니 그 시절 얼마나
그 값어치가 큰지 아시겠는지요.


가을에 노랗게 익은 이 탱자를 대나무 장대로 털어서 모으면 제법 몇자루가
되는데 해마다 한자루씩 얻어가는 어저씨가 있었습니다.
무슨 지병인가에 좋다고 술을 담아먹는 용도로 얻어가셨는데 원래 탱자술이
독해서 코끝이 빨개진다고들 했는데 진자로 그 아저씨는 코끝이 뭉툭해지고
빨개서 탱자술때문이라고 생각을 하기도 했지요.


이 수확의 틈바구니에서 나도 비료포대를 하나 구해서 삼분의 일쯤의
탱자를 챙겨서 창고 한곁에 잘 숨겨둡니다.
학교갈때마다 서너개를 주머니 넣고 가서는 한개는 세멘트 블록담에다가
살살문대면 얇아진 껍질을 뚫고 탱자즙이 흘러 나오는데 쪼~옥 빨면
새콤하고 달짝지근한 맛이 혀를 자극시키고 목젖을 온통 흥분하게 하지요.
정말 행복한 순간입니다.

 


호랑이같던 선생님이 돌아서서 칠판에 판서를 하는 동안 낡은 유리창을
통해 전해지는 따듯한 가을볕과 달짝한 탱자즙의 맛....
몇십년이 지난 지금도 입속으로 침이 고입니다.

 


새가 있었습니다.
참새의 절반크기 밖에 안되는 굴뚝새가 있었습니다.
이 굴뚝새는 아침에 일어나 돼지죽을 주고 꿀굴거리는 소리를 들어며
탱자나무 사이로 해가 드는 모습을 바라볼때나 어떤 연유인지는 모르지만
탱자나무에 걸린 고무물총을 바라모여 어떻게 저걸 건지나에 골몰할때나
어느때나 탱자나무에는 항상 굴뚝새가 있었습니다.
굴뚝이 탱자나무밑쪽으로 나있었던 탓이기도 하지만 내 유년의 기억의
가장 뚜렷한 몇중에 하나가 굴뚝새입니다.

 


정호승 시인의 "새"라는 시가 갑자기 생각나는 겁니다.
정말 새도 다비를 하면 사리가 나올것같은 느낌을 주는 시였는데
400백년이라는 만만찮은 세월을 살아온 탱자나무인데도 몸통은 겨우
20년먹은 소나무 등걸보다 빈약해 보이니 아마 탱자나무는 나이테를
먹고사는 듯합니다.
세월을 나이테로 나타내기 보다는 차라리 삼켜버리는 탱자나무...

 


갑자기 탱자나무에서도 사리가 마구 쏟아질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