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역사(歷史)

김대근 2006. 12. 9. 10:45

 
12월 9일 오늘의 역사


국내
  1636(조선 인조 14)  병자호란 일어남
  1925  충남 홍성에 진도3의 지진 발생
  1941  상해 임시정부, 일본에 선전포고
  1964  한국 최초의 TV일일연속극인 '눈이 나리는데' 방영
  1968  무장공비, 이승복 가족 학살
  1971  파월 국군 제1차 철수부대가 파월 6년만에 귀국
  1976  조치훈 7단 일본 왕좌전 타이틀 쟁취
           미국의 청와대 도청사건, 정부 미국 비난
  1991  한국, 국제노동기구(ILO)에 정식 가입
  1991  웅진여성 12월호 '에이즈 복수극' 허위기사로 판명되어 파문
  1991  SBS TV개국. TV 3국 시대 개막
  1992  경남 거창군 덕유산 상공서 훈련 중이던 F4D팬텀기 추락


해외
  1357  이븐 바투타의 <여행기> 완성
  1608  영국 시인 존 밀턴 태어남
  1842  러시아의 무정부주의자 크로포트킨 태어남
  1868  일본 천황제 수립
  1955  서독, 할슈타인 독트린 발표
  1961  탕가니카 독립
  1975  유엔총회, 고문금지선언 채택
  1982  소련 두 우주인, 211일의 우주체공기록을 세우고 귀환
  1990  노동운동가 출신의 바웬사, 폴란드 대통령 당선
  1991  소비에트연방 소멸 선언
  1992  미군 해병대, 유엔평화유지군으로 소말리아 첫 상륙
  2000  이스라엘 바라크 총리 사임


-------------------------------------------------------------------------------



"화냥년" 이라는 욕이 있다. 주로 바람을 피운 여자에게 하는 욕인데 여자를 극히 비하하는
이 욕은 환향녀(還鄕女)에서 변한 것으로 "고향으로 돌아온 여자"라는 뜻이다.


이 환향녀라는 새로운 용어를 만든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사실 병자호란은 일어나지 않아도
되었을 전쟁이였으며 몇몇 모화(慕華) 사대학자들의 명분과 국제정세의 무지함에서 스스로
자초한 전쟁이였다.


조선중기 광해군은 똑똑한 군주였다. 그는 임진왜란을 통하여 이미 명나라의 국력이 급격히
기울고 후금이 점점 국력이 강성해져 조만간 중원의 주인이 될것을 내다보고 명과 청나라의
사이에서 외교적 중립정책을 폈다. 그러나 국제정세에 백치이면서 무조건 중국은 상국이며
문화의 선진이며 우리의 주인이므로 오랑캐였던 청과 국교하는 것을 수치로 여기던 몇몇의
신하들은 쿠테타를 일으켜 인조를 옹립하고 반금친명 전책을 썼다.


금나라는 고구려와 친한 관계에 있던 민족이였으므로 고구려를 계승한 조선에 호의적이였다.
따지고 보면 돌궐,여진,몽골등과 더불어 우리와 같은 민족이이기도 하다. 그래서 처음에는
상당히 호의적으로 서로 동등한 관계를 유지하고자 했었다. 그러나 명과 일전을 앞두고 있던
후금(청)은 계속적인 배금정책으로 자신들의 배후를 위협하자 1627년에 칩입하여 마침내 형제의
의를 맺고 불러갔다.


마침내 청(후금)은 1632년 만주일대를 석권하고 명나라 서울인 북경을 공격하게 되었다.
후방을 공고히 하려는 청에게 마침 명으로 보내는 청의 후방을 치겠다는 국서가 발각되어
형제국에서 군신관계로, 군대의 파견등을 요구하게 되었다. 1636년 2월 용골대,마부태등을
사신으로 보냈지만 인조는 사신의 접견마저 거부하고 팔도에 선전문을 내려 청(후금)과의
일전을 준비하게 했다.


당시 조선은 주화론자와 척화론자로 갈라졌는데 척화론자가 훨씬 강하였고 배금친명 모화
사상가들에 의해 왕위에 오른 인조는 척화론자의 의견에 따를 수 밖에 없었다.


1636년(조선 인조 14)에 마침내 태종은 10만 군을 거느리고 스스로 친정에 나서 9일 압록강
을 건너 쳐들어 왔다. 당시 조선의 명장으로 불리던 임경업장군은 백마산성을 굳게 지키고
있었으나 청나라 군대는 이 길을 우회하여 서울로 진격하였다. 조정은 수전에 약한 청나라에
대항하기 위해 강화도로 임시수도를 옮기려고 했으나 너무 빠른 청나라의 진격에 당황하여
강화도로 가지 못하고 소현세자와 백관을 거느리고 남한산성으로 피신한다.


청나라는 남한산성을 완전히 봉쇄하였고, 성내에서는 혹독한 추위와 모자라는 식량에 의한
굶주림으로 13,000명의 군사들 중에서 죽는자들이 속출했다. 게다가 왕비등 여자들을 먼저
피신시켰던 강화도가 점령되자 마침내 주화론자의 대표였던 최명길 등을 보내 항복조건을
교섭하기에 이른다.


결국 인조는 1월 30일 세자등 500명의 신하를 거느리고 삼전도의 수항단에서 청 태종에게
국욕적인 항복의 례를 하고 서울로 환도하였다.


그후 이 굴욕적인 관계는 1895년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일본에 패할 때까지 계속되었고
전후에는 많은 고아문제와, 수만에 이르는 납치당한 이들의 속환문제가 대두되었습니다.
특히 청나라 군은 납치한 양민을 전리품으로 보고, 속가(석방의 대가)를 많이 받을 수 있는

종실·양반의 부녀를 되도록 많이 잡아갔다.


잡혀간 포로에 대하여는 은(銀)으로 속환할 수 있었는데 너도 나도 속환을 위한 은을 구하는
통에 나라의 은이 바닥나기도 했다. 그러나 속환은 되었으나 이미 정절을 잃고, 또는 청인의
아이를 임신한 여인들은 돌아갈 곳이 없었다. 정절을 생명과 같이 여기던 조선이였기 때문에
청에서 돌아온 여자들의 이혼문제가 사회와 정치적으로 심각한 문제로 대두 되었다.


대부분의 돌아온 여자들은 자결을 강요당했고 그나마 자결을 해야만 열녀라는 이름과 함께
열녀문이라도 세워져 명예를 지킬 수 있었다. 모진 목숨을 이어갈 여인들은 시가에서도
친정에서도 쫓겨나서 평생을 "환향녀"라는 굴레를 쓰고 살아야 했다.


조선은 온전히 공자로 인해 망했다. 공자왈~ 맹자왈~ 외우는 것만을 지상 최고의 선이라
여기며 살아온 그들이라 여자들 하나 스스로 지켜내지 못했음에도 부끄러움을 몰랐던 그들...
조선의 선비들이다.

 



1941년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하며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상해의 임시정부는 일본을 상대로
대일(對日) 선전포고를 발표했다. 진주만 기습이 벌어진 다음 날 김구 주석과 조소앙 외교부장
명의로 일본에 전쟁을 선포한 것이다.


2차 대전이 종전되고 1951년 9월에 48개국 연합국과 일본간 강화조약이 샌프란시스코에서
체결되었는데 이때 이승만 대통령이 이 선전포고를 근거로 “우리도 연합국 일원으로 조인에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일본의 격렬한 반대로 조인 참여는 실패하고 말았다.


이는 1940년 9월 17일 창설된 광복군이 나름대로 체계를 갖추어 가고 있는 시점에서 나온것으로
광복군이라는 무력자원이 갖추어 졌기에 가능한 일이였다. 1943년 인도와 버마 전선에 광복군을
파견하여 활약하였고 1945년에는 미국전략정보기구(OSS)와 연합하여 유격전 준비를 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