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연대기

무적위연 2008. 2. 16. 18:56

청류와 탁류

 

당시에는 정치인들을 청류와 탁류로 구분하고 있었습니다. 탁류란 엄당과 척당을 합쳐 부르는 말입니다. 엄당이란 환관 집단을 가리키고, 척당이란 외척 일파를 가리킵니다. 청류란 것은 이들 탁류와 결탁하지 않은 사인들이 스스로를 이들과 구분지어 스스로 고고함을 자청하며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럼 사인들은 누구냐고요? 당시에는 일반 사람들은 정치에 참여할 수도 없었고, 당연히 관직에도 나아갈수가 없었습니다. 이들 관직에 올라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들이 바로 사인들입니다. 쉽게 생각하면 귀족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당시의 백성들은 아무런 발언권이 없었으며, 당시의 여론이란 것은 바로 이들 사인들의 생각이었습니다. 후한 말엽에는 엄당이 척당을 누르고 독주하게 되면서 두무와 하진으로 대표되는 척당이 사인들과 연합하여 함께 엄당에 대항하는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바로 삼국시대를 앞두고 나타난 시대적 배경이 되겠습니다. 그럼 동탁은 청류의 인물일까요, 탁류의 인물일까요?

 

청류파 동탁

 

고故 미야자키 이치사다는 『구품관인법의 연구』에서 당시 사士 신분이 될 수 있는 사람에는 4가지 부류가 있었다고 합니다. 하나는 양가자 출신, 둘째는 공경의 자식, 셋째는 돈으로 신분을 사는 사람, 넷째는 대유학자의 제자가 되던지 효렴에 천거되어 시험에 합격하는 이른바 학문에 의한 경우입니다. 이 중 양가자良家子라는 것은 이른반 6군 양가자로 불리는데 농서ㆍ천수ㆍ안정ㆍ북지ㆍ상군ㆍ서하 6군 상류 계급의 자제들을 가리킵니다. 동탁은 바로 이 육군양가자로서 우림랑에 임명되었으니 그는 신분적으로 분명 청류에 속하는 인물입니다. 다카시마 도시오의 『삼국지 오디세이』에 따르면 여기서의 '양가'는 '명족', '사족'과 마찬가지로 유서깊은 가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동탁은 당당한 유서깊은 명문가의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물론 동탁이 청류인이긴 했지만 정통 청류파로 볼 수는 없습니다. 황건난이 있기 여러 해 전에, 당고지화라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 당고지화를 1차와 2차로 구분짖는 사람도 있고, 둘을 하나의 사건으로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아무튼 이 당고지화라는 것은 사인 관료와 환관이 충돌하여, 환관 세력이 자신에게 적대적인 사인 관료들을 금고禁錮에 처한 사건입니다. 쉽게 말해 관직에서 모두 쫓아내고, 유배 보내고 한 사건인데 조선시대에 있었던 4차례의 '사화'와 비슷한 구석이 있는 듯 합니다. 아무튼 이 당고지화를 입었던 사람을 소위 정통 사대부로 보기도 하는데 후에 형주를 다스린 유표와 같은 인물이 여기에 속하는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그런데 보면 알겠지만, 청류라고 해서 착하고 탁류라고 해서 나쁜 것은 아닙니다. 단지 당시 여론을 주도했던 사인들이 스스로 그렇게 분류한 것일 뿐입니다. 당시 당고의 화가 일어났을 때, '경고'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 사람은 당시 당인의 '명부'에 이름이 적혀 있지 않은 것 때문에 대단히 창피해 했다고 합니다. 이외에도 스스로 자신이 당인이라고 부득불 우겨대서 처벌을 받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으니 당시 사람들의 허례허식과 위선이 이정도였으니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동탁과 청류 사대부 

 

이처럼 동탁이 청류인이라면 한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당시 동탁은 정권을 잡는 즉시, 채옹이나 순상을 비롯한 당대의 대학자들과 당고지화를 입었던 수많은 청류파 인사들을 대거 발탁함으로써 민심을 안정시키고 정권의 위상을 높이려 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채옹을 비롯한 대다수의 사대부들은 동탁정권에 상당한 거부감을 나타내며 부름에 응하지 않았고 이에 동탁의 협박에 못이겨 어쩔 수 없이 동탁의 부름에 응했다는 것이 정사(제가 사용하는 정사라는 것은 『후한서』『삼국지』『자치통감』을 가리킵니다)의 기록입니다.[1]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생기는 것입니다. 동탁은 분명 그들과 같은 청류인으로서의 동질감이 있었습니다. 비록 당고지화를 입은 정통 청류는 아닐지라도 탁류인 조조나, 거지 유비, 백정 하진보다는 훨씬 동질감이 컸을 것입니다. 더구나 당시 사인들의 꿈은 관직에 나아가 정치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엄당의 견제로 인해 막혀있던 그 꿈을 동탁이 실현시켜준다는데 거부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더구나 채옹의 경우는 자치통감에 따르면 동탁이 황제를 교체하기 이전에 불러들였으니 더욱더 거부할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당시 동탁에 대한 평가가 나빴기 때문일까요? 물론 그렇게 보는게 아주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확실히 설득력은 낮습니다. 왜냐하면 동탁은 나름대로 젊은 시절 중망이 있었고 새로 조정에 출사했으니 일단 그 속내를 파악한 연후에 행동을 정하는 것이 순서일 것입니다.

 

신동준은 『삼국지 통치학』에서 채옹이 동탁의 부름에 거절했다는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동탁이 황제를 교체한 이후에 불러들인 순상, 진기, 한융들까지 모두 채옹과 마찬가지로 이들이 자발적으로 동탁의 부름에 응했으며 동탁 정권에 적극적으로 협조했다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동탁의 강압에 의해 마지못해 출사했다는 사서의 기록은 왜곡된 점이라는 것입니다.

 

동탁에 대한 왜곡된 기록이 어디 이뿐이겠습니까. 어찌되었든, 이처럼 동탁 정권이 처음부터 사인들의 반대에 직면했던 것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심지어 황제교체를 단행하여 관동의 반군이 결성된 이후에도 여전히 상당수의 사인들이 동탁정권을 지지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동탁을 달가워하지 않는 이들 또한 있었습니다. 같은 청류라 할지라도 어디까지나 동탁은 굴러들어온 돌이고, 이미 박혀있던 돌인 원소 등을 밀어내고 대권을 차지했으니 어찌 달가워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대다수의 사인들이 동탁에게 등을 돌렸다는 기록은 분명 믿을게 못된다는 것은 확실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1]제가 보고 있는 1차 자료는 『삼국지』와 『자치통감』입니다. 김원중이 번역한 『정사삼국지』(전7권)과 신동준이 번역한 『자치통감 - 삼국지』(전2권)입니다. 『후한서』의 경우, 국내에 번역되어 출판된 것이 없는 관계로 2차 자료를 활용하고 있습니다. 그 외에 『정사삼국지』에 미처 번역되어 실리지 않은 배송지주 역시 2차 자료를 활용하고 있습니다.

 

                                                                                          2008년 02월 16일

                                                                                        written by 무적위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