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코만취 2009. 3. 11. 00:47
손장원
    인천의 근대건축물사진(1907년 발행 책자)




1. 욱옥(旭屋)여관 인천항 축지(築地)에 있었던 여관 건물이랍니다. 그런데 건물 구조를 보니 4층같은 3층이네요. 1907년 당시 인천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였는지를 보여주는 건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창문을 열어 놓고 밖을 내다보고 있는 사람들이 보이는데 어느 나라 사람인지는 알 수 없네요.



2. 일본우선주식회사 인천지점 건물 현존하는 건물이죠. 우리나라의 연안항운업을 장악하였던 일본우선주식회사의 인천지점 건물입니다. 어느 홈페이지에 보면 건축연도를 1933년이라고 했는데 1907년에 발행된 책자에 수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그 내용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죠.



3. 일본제18은행 인천지점 건물 이 건물도 지금까지 남아있는 건물이죠. 그런데 현재 주차장으로 사용되는 공간에 사택으로 보이는 건물이 있죠.



4. 일본제일은행 인천지점 건물 이 건물은 너무나 유명한 건물로 더 이상 설명이 필요없겠죠. 그런데 지붕에 있는 굴뚝의 위치가 지금과 다르네요. 현재는 건물을 보면서 우측에 있는데 이 사진에는 좌측에 있네요. 언제 어떻게 옮겨진 것인지 우리 모두 고민에 빠져보죠.



5. 村谷本店 이 건물은 村谷吉藏이라는 일본사람이 세운 것으로 배에서 사용하는 물건을 파는 가게(船具商)였답니다. 위치는 대불호텔 바로 옆입니다. 사진 오른쪽으로 대불호텔이 약간 보이죠. 지금도 벽의 일부가 남아 있답니다. 현장에 가시는 분은 꼭 확인해 보세요. 그런데 인천발전연구원에서 발간된 책자에는 현재 남아있는 벽이 대불호텔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어요.



6. 팔판루(八坂樓) 이 건물은 팔판루라는 요리집 건물인데요. 인천항 일본공원지에 있었다고 하는데 일본공원지가 어딘지 아직 확인을 못했습니다.

출처 : 인천도시환경연대회의
글쓴이 : null 원글보기
메모 :

 
 
 

카테고리 없음

코만취 2009. 3. 11. 00:37
 

바다 보며 꿈꾸던 송학동 층층대길

 

/흐르고 싶은 인천-길에서 묻다/ 흔적들3
◀카페 '흐르는 물'. 조병화 시인의 부인 이준 여사가 50년대 중반 인천을 떠나기까지 이곳에서 '이준 산부인과'를 운영했다.
공립병원이 있던 자리는 연립주택이 들어서서 멋없이 변했다. 대문도 없이 적벽돌 담에 아치까지 세워 참 운치를 더했던 정원도 있어 병원이었다기 보다는 어느 고관대작의 공관과도 같은 모양새, 후로는 '인천원'이라는 화식과 한정식을 겸한 방석 깔고 앉는 집으로 변했건만, 참 그런 곳이 자그마한 박물관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내친김에 층층대길을 좀더 올라가보자 맞은편에 자리 잡은 철조망이 높았던 집을 지나치려면 좀 움찔했다 싶은 인천경찰서장의 공관, 사복입은 경찰들이 도열한 것을 가끔 보던 어린시절 공연히 발걸음이 빨라져 층계를 서너 개씩 뛰어넘던 길 삐죽집은 참으로 멋있었다. 후에 역사에 조금이나마 길들여진 후 오례당 하우스를 알았지만 군사정권 방첩대가 난데없이 들어와 왜 불질러 먹었는지 지금까지도 이해가 안 된다. 아쉽다. 그 건물이 어떤 건물인지 몰랐단 말인가. 썩을 놈의 인간들….

오례당(吳禮堂)의 포르투갈 처와 조카사이에 재산분쟁 후 30년대 상공회의소장(일본인, 吉田秀次郞)의 주택으로 사용타가 미군 장교숙소, 방첩대가 점유하던 중 소실되어 빌라가 들어선 지금 품새 없는 길이 되어 버렸다.
개항기 외교관, 사업가들의 저택이 즐비했던 송학동 그러나 이 층층대길은 꿈을 보여준 길이기도 하다. 오르내리며 계단에 앉아 바다 쪽을 보며 길게 들이마신 숨, 품어내며 말끔히 가신 마음의 상처. 그렇다. 상처받은 건 살아 있음의 징표 아닌가.
▲ 배인철 시인의 집. 인천문학사에도 기록되고 있으며, 흑인시만을 썼던 배인철의 집. 정확한 이야기론 배인철 시인의 맏형(배인복, 작고)이 살았던 집.

그 길의 끝 좌측 집, 인천의 문학사에 언급이 됐고 흑인시만을 썼던 배인철의 집(?), 정확한 이야기론 배인철 시인의 맏형(배인복, 작고)이 돌아가시기까지 살았던 집이며 '우련통운'(배씨 가문에서 운영하는 통운업체, 현 신포동 사무소 뒤 소재)을 운영하는 현 회장(배인흥)은 바로 배인철 시인의 동생, 그리고 인하대 법대 교수를 역임한 배경숙씨는 여동생이다. 예술 문화의 터전을 일구기 위하여 쏟아냈던 정열의 시인, 그도 경제적 뒷받침이 없다면 택도 없는 일. 그런가보다 '부자가 망해도 3년을 버틴다'는 말이 아직도 '우련통운'을 가솔들이 경영, 굳건하다면 이해가 가고 남는 일.

걸을 때 다가오는 모든 사람은 그의 리듬에 의해 내 몸으로 체감된다.

근대화를 속도의 문제로 환원시켜 가는 길을 우리는 어떻게 기억해야 할까. 되돌아오는 길은 인문(人文)이며 인문(人紋)으로 그래도 사람의 무늬를 살피고 헤아리는 공부도 흐르는 역사이며 옆으로 선 집들은 바뀌어온 주인의 의식 속에서 관심을 낳고 느끼면 그 자체가 하나의 완성된 또 다른 역사이다.

다리의 힘이 풀려 내려오는 송학동, 존재론적 차원에서 본다면 소외(疎外)되었다 소내(疎內)되는 듯하여 그나마 다행스런 동네지만, 역사복원의 노력은 좋으나 정확한 고증과 연구검토없이 실행한다면 그 또한 아니 감만 못한 짝퉁을 만드는 것 아닐까.

옛날 옛적에는 정말 소나무와 학이 있었으며 노닐던 곳일까만 한줌 그늘을 줄 수 있는 가로수 한그루 없는 그 곳을 일인(日人)들은 왜 산(山)의 손(手)이라 했을까.

다비다모자원(인천좌 혹은 대실러의 저택, 현 인성학원 터)이 있던 홍예문 길로 들면 육풍과 해풍이 낮 밤으로 지나며 지계(地界) 바깥쪽 우리 민(民)들을 시원하게 하던 응봉산 길, 아니구나. 홍예문 2길 관동2가, 예총경기도 회장(68, 69년도)을 역임한 서예가 동정 박세림 선생의 생전 자택을 지나니 향을 사르고 싶구나. 맞은편 인천일보(사동시절) 편집 부국장을 역임한 조한길 선생의 제씨집을 보니 답동 육교에서 있었던 불미스런 비명횡사, 눈에 선하여 슬프구나.

선구지길 옛 번지로 말하면 관동3가 3번지 길, 전편에서 언급이 됐던 편운 조병화 시인의 집, 산부인과 병원을 지나보자.

'흐르고 싶은 인천', 과거의 샘물에서 현재의 옥수를 떠 올려 미지의 문화 세계를 만들고자 뉘앙스를 떠올린 본란의 끈적끈적한 흔적들 흐르는 물에 헹궈보자. 삼각형 지붕을 받치고 있는 이층 목조건물 '흐르는 물'이란 이름의 카페, 지금도 중년의 문인들과 젊은 문화인들이 자주 들러 담소하며 고전 음악에 심장고동을 가라앉히는 집이 "이준 산부인과"로 편운 선생의 부인이 50년대 중반 인천을 떠나기까지 운영했던 곳으로 까맣게 잊고 있음이 부끄럽고, 듣는순간 생경한 맛까지 있었으니 초기 인천문단을 이룬 편운 선생에게 참으로 죄송할 뿐, 난망 이었습니다. 왜정때 건물로 1층을 병원으로 쓰고 2층을 살림집으로 쓰였던 것 같은 이집은 아직도 원형을 그대로 안고 앉아 있으니 흔적 찾아 옮기는 발길 보람이 있구나.

2층 창문에서 내다보이는 골목길 풍경을 보며 차창 같다고 (홍명희 시인 구술에 의함) 했던 님은 "인생합승" 시편을 낳았는가.

"활짝 개인 하늘 아래/경인가로 팔십 여리 잔잔한 기복/과수원 가지들이 손목을 흔들고/보리 밭 양지에 풀물이 든다"라고.
 
/김학균 시인
 
출처 : 형과니의삶
글쓴이 : alza 원글보기
메모 :

 
 
 

카테고리 없음

코만취 2009. 3. 11. 00:32
돌집과 벽돌집의 아름다움
사람 온기 불어넣어야 건물로서 생명
<공동기획-‘우리문화유산 바로 알고 지키기’>

⑨ 돌집과 벽돌집의 아름다움

글 · 문경숙

성공회성당
근대문화유산지킴이 활동을 하면서 몇 곳의 현장을 직접 조사할 기회가 있었다. 그 대상은 답동성당, 성공회성당, 유항렬 주택이었다. 이들은 답동과 내동지역에 위치한 건축물로 답동성당과 유항렬 주택은 붉은 벽돌을 주재료로 아름다운 건축미를 자랑하는 근대문화유산이며 성공회성당은 벽돌과 돌을 적절히 사용해 빛의 효과를 극대화한 건축물이다. 주로 언덕 중간이나 언덕 위에 세워진 이들 건물은 지금은 다른 건물들 속에 파묻혀 잘 보이지 않으나, 세워질 당시만 해도 어디서든 잘 보였으며 건물 자체가 인천사람들에게는 엄청난 문화적 충격을 주었을 것이다.

지난 1981년 국가지정문화재가 된 답동성당(사적 제287호)은 인천에 서양 종교의 씨앗이 뿌려진 곳 가운데 하나로 1897년 7월 제3대 서요셉 신부 때 단층벽돌 구조의 성당으로 지어졌다. 처음에는 고딕양식으로 건축되었다가 후에 로마네스크 양식이 절충되었다. 적절한 관리로 양호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답동성당과 달리 성공회성당과 유항렬 주택은 체계적인 관리가 이루어지지 않아 많은 아쉬움을 주고 있다. 1890년 이 땅에 온 청년의사 랜디스 박사가 교회 뜰에 성누가병원을 개원해 10여년간 헌신적으로 환자를 돌보다 숨진 일로도 유명한 성공회성당은 1955년 화강암으로 새로 건축한 건물이다. 하지만 이러한 사연을 아는지 모르는지 성당 앞을 막고 서 있는 고층아파트는 문화재 관리의 현주소를 그대로 드러내는 것 같아 씁쓸하기만 하다. 신포시장 방향에서 성당 쪽을 보면 아파트에 가려져 성공회성당의 모습을 전혀 볼 수 없는 상황이다. 아파트 건축허가를 내어줄 당시 이러한 조건이나 상황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지고 일을 진행했더라면 현재와 같은 상황은 아니었을 것이다.

다음은 유항렬 주택이다. 충남 공주 출신인 유항렬은 한국 최초로 인천항 도선사 자격을 취득한 인물로 1947년 인천항으로 상륙하는 미국의 리퍼브릭선단을 입항시키는데 큰 공헌을 세우기도 했다. 이 주택은 지금 당장 사용한다 해도 될 만큼 견고하게 건축되었으며 보존상태도 비교적 양호한 편이다. 그러나 얼마 전부터 사람이 살지 않은 채 방치되어있는 상황이고 주민들도 이 주택의 정체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다. 인천시나 중구청이 매입해 이곳을 주민들을 위한 사랑방 같은 문화공간으로 활용한다면 문화재 보존은 물론 지역문화 활성화의 거점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몇 곳에 대한 조사활동을 통해 느꼈던 아쉬움들은 건물 자체의 관리와 활용뿐만 아니라 기록의 체계가 통일되어있지 않다는 점도 문제였다. 명칭도 제각각, 기록내용도 서로 다른 경우가 있었다. 보다 체계적인 관리와 기록이 시급한 상황이다. 건물도 생명이 있기 때문에 사람이 함께하면서 온기를 불어넣어주어야만 비로소 건물로서 생명을 얻는 것이다.

올해부터 문화재청이 ‘1문화재1지킴이’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고 있다. 국민 모두가 문화재지킴이의 주인공으로 나서서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감시할 때 문화재는 바르게 보존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문화재는 우리의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살아갈 모두의 것이기에 우리는 바르게 관리하여 후손에게 물려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 경제논리에 밀려 지금 이 시각에도 많은 문화재들이 몸살을 앓고 있다. 앞으로 더 이상의 훼손이 없도록 우리 모두 스스로가 나서서 우리지역의 문화재를 지켜내야 할 것이다.
유항렬 주택

* 본 기사는 인천시 인터넷신문과 해반문화사랑회가 인천의 근대문화유산을 바로 알고 지키기 위해 공동기획한 글로 필자인 문경숙 님은 인천근대문화유산지킴이로 활동하고 계십니다.

 

 

출처 : 형과니의삶
글쓴이 : alza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