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사소저(趙四小姐)와 장학량(張學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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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민국 후기)

2007. 1. 18.

 

 

출처: 삼진도시보(三秦都市報)

 

장학량 장군의 홍안지기(紅顔知己)인 조사소저는 일생동안 여러개의 아름다운 이름들을 사용했었다.

 

조사소저의 조적(祖籍)은 절강성 난계시의 영동향 동원촌이다. 그녀는 1912년 홍콩에서 태어났는데, 이로 인하여 "조향생(趙香笙)"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녀가 태어날 때 하늘에 노을 빛이 한가닥 출현했다고 하여 그녀는 또 다른 이름 "조기하(趙綺霞)라는 이름도 얻었다. 그녀는 어릴 때 영문이름이 "Edith"였는데, 그 발음이 비슷한 이름으로 "일획(一獲)"으로 부르기도 했다. 그녀는 또한 두개의 다른 이름도 있는데 하나는 조제(趙제)이고, 다른 하나는 조다가(趙多加)이다. 집안에서는 넷째딸이므로 집안 사람들이나 친구들은 모두 조사(趙四)라고 불렀다. 나중에 사교계의 인사들도 따라서 그녀를 "조사소저"라고 부르게 되었다.

 

조사소저는 키가 약간 크고, 체격이 날씬하다. 비록 여자들 중에서 미모로 따지자면, 중상등에 해당하겠지만, 그녀의 기질이나 풍모는 아주 뛰어났고, 화장하거나 꾸미는 것도 매우 좋아했다.

 

개략 1928년경, 그녀의 나이 16살때, 바로 고등학교에 다니던 조사소저는 천진의 댄스파티에서 당시 30살이 되지 않았던 젊은 장군 장학량을 만나게 된다. 두 사람은 그 자리에서 의기투합하며, 1년후에 조사소저는 심양으로 장학량을 따라 도망치고, 장학량의 집 옆에 있는 작은 집에 들어갔다. 그리고 결혼도 하지 않은 상태로 아이를 낳았다. 그녀는 사랑에 집착했고, 용기있게 하고 싶은 일을 했다. 명분도 바라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녀는 당시 상류사회에서 자주 거론되는 화제가 되었다.

 

오늘날의 각도에서 보면, 우리도 느껴볼 수 있다. 많은 여자들이 분명히 이 젊은 풍류장군을 좋아할 것이다. 그러나, 아무런 명분도 없이 실의에 빠진 사람과 수십년간 적막하고 유폐된 생활을 지낸다는 것은 아마도 조사소저 하나 뿐일 것이다. 그녀는 장학량이 세상을 질타할 때 같이 있었을 뿐아니라, 그가 산속에서 전전반측하며 잠못이루고 살던 때에도, 그저 책이나 읽으며 유폐되어 있을 때에도, 그에게 따뜻함과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장학량이 항상 토박이 동북말로 다른 사람들에게 조사소저를 친근하게 소개할 때면 "이쪽이 내 여자입니다"라고 했다는 것오 이해할 만하다.

 

조사소저의 부친은 조경화(趙慶華)이며 호는 수산(燧山)이다. 청나라 말기의 감생출신이고, 구광철로의 독판, 교통은행상해분행 경리, 진포철로 및 경호,경항용 양로국의 국장을 역임했다. 그는 북양정부시절 교통계라는 하나의 파벌에서 양사이, 조여림, 섭공탁등과 함께 주요 구성원이었다. 교통계는 청나라말기 및 민국초기에 철로건설과 더불어 형성된 하나의 금융재벌집단이다. 철로건설을 당시 돈되는 업무였다. 조경화는 여러 철로국의 일을 하면서 많은 돈을 끌어모았다. 북경과 천진에 부동산을 샀고, 북경교외의 팔대처에 서양식의 서산반점과 두 곳의 별장을 지었다.

 

그러나, 좋은 시절이 오래가지는 못했다. 1925년에 철도부서를 탄핵하는 "오로대참안"이 발생한다. 이유는 철로국에 존재하는 부패문제때문이었다. 이 때부터 조경화의 관운은 막혀버린다. 1927년, 그는 사직하고 천진으로 간다, 해하철교부근의 오호로 교통은행영업빌딩 뒤에 있는 4층집에서 산다.

 

조경화는 조사소저가 자주 댄스파티에 간다는 것을 듣고, 장학량이 보내는 선물을 많이 받는다는 말을 듣고는 매우 불만을 나타냇다. 그리고 조사소저가 집을 떠나 장학량과 도망쳤다는 것을 듣고는 극도로 분노했다. 그래서 신문에 알림글을 내고 자기의 태도를 표명했다. 이 글은 "난계조연익당계사(蘭溪趙燕翼堂啓事, 난계의 조씨 연익당에서 알리는 글)"인데 다음과 같다. "우리 가족의 세조는 청헌공이다. 즉 남송의 후예에 속한다. 관직에 있으면서 청렴하고 정직했고, 집안도 가지런히 다스렸다. 가보에는 집안의 격언이 있고, 가사(家祠, 집안사당)에는 가규가 있다. 천여년동안 후손들은 이를 지켰고, 파괴한 적이 없다. 역대왕조의 황제가 내린 문련을 내렸고, 봄가을로 제사를 지냈다. 즉 민국의 전대총통, 총리도 편액을 준 바 있다. 얼마나 영광스러운가! 그런데 넷째딸 기하가 최근들어 자유평등에 현혹되어, 감히 사사로이 도망을 쳐서 행방을 알지 못하게 되었다. 집안의 가규 제19조에서 32조에 읙하여 그녀를 족보에서 삭제하여야 한다. 본당은 가사의 임무를 맡은 사람으로써 당연히 가법을 따라야 한다. 이에 사장에게 보고하고 집행한다"

 

이 알림글은 1929년 9월 25일 - 29일까지 신문에 연속 5회 등재되었다. 이 알림글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조사소저가 사당에서 제명되었다는 것이고, 그녀의 이후의 언행에 대하여 집안에서는 책임지지 않겠다는 것이다. 비록 부녀관계를 단절한다는 말이 직접적으로는 없었지만, 뜻은 명확했다. 강직했던 조경화는 1952년 북경에서 병사할 때까지도 이 넷째딸을 용서하지 않았다.

 

그러나, 교묘하게도 바로 이 넷째딸로 인하여, 조경화는 천하에 이름을 알리게 된다. 사람들이 지금 조경화를 기억하는 것은 바로 조사소저때문이다. 조경화가 알림글에서 언급한 '영광'은 바로 조사소저의 신분내력에 대한 주요한 방증자료가 되었다. 이뿐아니라 조경화의 북경묘지가 대대적으로 수선되었다. 조경화가 생전에 북경서부교외에 있는 위가촌에 묘지를 하나 잡아놓았고, 묘원은 제법 넓었다. 1970년대에 묘지는 이미 황폐해졌는데, 나중에 도시가 확대되면서 다른 기관에 점거되어 버렸다. 1980년대후반기에 정협이 돈을 내서 수리하였고, 다시 묘비를 세웠다. 묘비에는 파격적으로 모든 자녀의 이름이 들어갔는데, 여기에는 넷째사위 장학량의 이름도 새겨져 있다. 목적은 조경화가 바로 장학량의 장인이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함이었다.

 

조사소저의 생모는 여보정(呂보貞)인데, 조경화의 둘째부인이다. 1878년에 태어났다. 그러나 조사소저로 인하여 조경화는 그녀에게 화풀이하여, 여보정은 어쩔수없이 진황도로 가서 셋째아들 조장(趙薔)과 생활해야 했다. 조사소저는 자주 셋째오빠가 있는 곳에 찾아가서 모친을 뵙곤 하였다.

 

서안사변후, 장학량은 장개석에 의하여 연금되었다. 조사소저는 매우 외로었고, 장학량과 만날 수도 없었으며, 천진의 조씨집안으로 되돌아갈 수도 없었다. 그녀는 홀로서 아들 여림(閭琳)을 데리고 홍콩과 상해에서 상당한 기간을 살았다. 1940년 2월, 우봉지(于鳳至)가 병이 들어 미국으로 치료받으러 떠났고, 정착했다. 조사소저는 10살이 되지 않은 아들을 미국으로 보내어, 다른 사람에게 부양을 부탁하고, 자신은 홍콩에서 귀양으로 돌아가서 수문현 양명동에서 장학량과 같이 생활했다. 이때부터 두 사람은 다시는 헤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조사소저는 이 때부터 다시는 모친을 보지 못했다. 모친 여보정은 1953년에 별세한다.

 

1964년 7월 4일, 조사소저와 장학량은 결혼식을 거행하며, 백발의 신랑신부가 된다. 7월 21일, 대만의 <<연합보>>는 표제로 <<밤비와 가을의 등불, 이화와 해당화가 서로 짝이되어 늙어간다. 작은 집과 동쪽바람. 지난 일을 차마 되돌아볼 수 없다>>라고 하여 그들의 결혼을 소개했다. 장개석 부자가 차례로 사망하자, 장학량부부의 활동공간도 넓어졌다. 마침내 대만을 떠나 미국으로 가게 되었고, 하와이에 정착했다. 조사소저의 몸상황은 장학량보다도 나빴다. 그녀는 일찌기 홍반랑창을 앓았고, 골절당한 적도 있었으며, 오랫동안 담배를 피워 폐암이 나타나 대수술을 받기도 하였고, 폐의 절반을 잘라냈다. 이후 호흡에 계속 곤란하여 그녀의 말년 건강에 나쁜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조사소저로 하여금 안위하게 한 것은 그녀와 셋째올케 일가가 연락이 되었고, 모친의 마지막 10년간의 일을 듣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녀는 서신에서 자기의 모친을 20여년간 모셔온 올케에게 감사의 뜻을 전달했다.

 

2000년 6월 22일, 조사소저의 셋째 올케의 아들은 미국 하와이의 스트로비병원으로 왔다. 그러나, 조사소저는 이미 몇분 전에 세상을 떠났다. 향년 88세이다. 조카가 고향에서 가져온 붉은 색 면이불은 조사소저를 저세상까지 따라갔다.

 

장학량과 조사소저에 얽힌 여러 글 중에서 장학량과 조사소저가 알게 된 것은 조사소저의 큰언니인 조강설(趙絳雪)과 큰형부 풍무월(馮武越)이 중간에서 소개한 것으로 쓰고 있다. 조사소저의 외조카이며, 풍무월과 조강설의 아들인 80여세된 풍건룡(馮健龍) 선생도 그렇게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 부분에 대하여는 반드시 확실히 집고 넘어가야 한다.

 

풍무월은 외교관 집안이고 해외에서 여러해 공부했다. 그래서 서양적인 맛이 있는 장학량을 좋아했다. 일찌기 장학량의 아래에서 동북항공공서의 설계주임과 동북문화사의 주임등을 지낸 바 있다. 즉, "문관소장(文官少將)"이었다. 1921년에 조사소저의 큰언니 조강설과 결혼한다. 1929년 병으로 심양에서 천진으로 돌아오고, 장학량의 자금지원하에 북경 천진의 뉴스를 주로 다루는 <<북양화보>>를 발간한다. 조사소저의 사진도 자주 이 화보에 등장했다. 조사소저와 장학량이 처음에 알게 된 때에 풍무월의 척추결핵은 이미 아주 중했었다. 심지어 허리를 펴지도 못할 정도였다. 기본적으로 무슨 댄스파티에 갈 상황이 아니었다. 조강설은 조경화의 본부인 소생이고, 조경화가 아주 아꼈다. 그러나 댄스파티에는 참석하지 않았다. 풍무월과 조강설은 조경화를 아주 존경했고, 조경화가 조사소저와 장학량과 교분이 있는데 대하여 불만인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조사소저와 장학량의 일이 성사되도록 도왔을 리는 없다.

 

풍건룡 선생은 조가는 절강 난계에 집이 있는데, 원래 조경화의 소유였다고 한다. 1993년, 혀지정부가 돈을 내어 당시의 사용부서로부터 회수하였고, 수리하였으며, 조사소저의 이름을 따서 "기하원(綺霞園)"이라고 지었다. 이것도 중부에서 조사소저라는 이 전기적인 인물을 존경하는 하나의 표시였다. 2000년 6월 22일, 조사소저가 미국 하와이에서 별세한 후, 절강 난계의 현지정부는 "기하원"을 다시 수리하였고, 조사소저의 해외와 북경의 친척들은 <<조가가보>>를 편찬중이었는데, 가보가 만들어진 후 난계시의 옛집에 놓아두어 기념으로 삼았다.

 

심양에서는 요녕성정부가 200만위안을 들여서 원래의 <<조사소저루>>인 심양시 문사관을 옮겼으며, 400여평방미터를 점하는 중외건축문화가 융합된 '조사소저루'가 다시 만들어졌고, 대외개방되었다.

 

조사소저의 묘지는 하와이에 있다. 화강암으로 쌓은 묘장에 조사소저가 생전에 새겨달라고 부탁했던 싯구가 새겨져 있다. 바로 성경중에서 요한복음 제11장 제25절에 나오는 싯구이다. "부활은 나에게 있다. 생명도 나에게 있다. 나를 믿는 자는 비록 죽더라도 다시 부활할 것이다"

 

2001년 10월 15일, 장학량 장군도 별세했다. 일주후에 조사소저와 합장되었다. 신화사는 10월 23일자 뉴스송고에서 "장학량장군이 영원히 잠들 곳은 녹지가 펼쳐진 언덕위이다. 작년 5월, 두 노인은 일찌기 동시에 100세와 88세의 생일을 축하했었는데, 올해는 그들이 다시 여기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다" 이렇게 하나의 시대는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