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독일의 티벳탐험대

댓글 3

중국의 정치/중국의 티벳

2007. 2. 14.

글: 성월주(星月珠)

 

제2차세계대전을 전후하여, 티벳지구는 전쟁터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으므로 전쟁의 포화를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티벳도 나치독일의 시선을 벗어나지는 못하였다. 1938년과 1943년 히틀러의 비준을 받아, 나치의 SS두목인 히믈러는 친히 두 번 탐험대를 조직하였고, 그들은 티벳을 깊숙히 탐험하며 "게르만민족의 조상" -- 아틀란티스신족(神族)이 존재하는 증거를 찾으려고 하였고, 시간을 변경시키고 불사군단(不死軍團)을 만들 수 있는 지구축심(地球軸心, ZPM, Zero Point Module)을 찾고자 하였다. 1945년, 소련군이 베를린을 함락시킨 후, 내무인민위원회(KGB의 전신)의 장교는 독일제국빌딩의 지하실에서 총살당한 티벳의 라마 1명을 발견했다. 이 것이 나치독일이 티벳에서 한 비밀작전에 관련한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의 시작이었다.

 

히믈러는 신족부대(神族部隊)를 만들고 싶어했다.

 

1933년, 히틀러는 독일에서 정권을 장악한 후, 대대적으로 종족우월론을 고취시켰다. 인류는 700년마다 한번씩 진화하는데, 최종목적은 아리안족(나치언어에서 아리안족은 어떤 때는 비유태혈통의 백인종을 의미하며, 더 많게는 게르만족을 의미한다)이라는 우수한 인종이 진화하여 초능력을 가진 신인류로 진화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하였다. 히틀러 수하의 SS 우두머리인 히믈러도 철두철미한 인종주의자였다. 그는 SS를 조직하면서 명확히 규정했다. 단지 키5피트9인치, 금발벽안, 양호한 교육을 받은 순수아리안혈통의 젊은이를 뽑았다. SS장교를 뽑을 때에는 가장 기본적인 하나의 조건이 피선발자는 자기의 가족이 1750년이래로 다른 인종과 결혼하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해야 했다. 원수의 이론을 인증하기 위하여, 히믈러는 1935년, 나치교조를 따르는 "조상유산학회"를 조직했으며, 의학자, 탐험가, 고고학자 심지어 강호의 술사, 정신병환자를 포함한 각종 '전문가'를 조직하여 인종, 혈통, 고대종교, 고대유적지, 신화전설등에 대하여 연구를 시작했다. 전쟁말기에 이 학회는 이미 40여개 부서를 지닌 방대한 기구로 성장했다. 이 기구는 유태인에 대하여 생체실험을 하였을 뿐아니라, 점성술, 점복술등의 수단으로 독일군의 군사작전을 지휘하기도 하였다.

 

유럽에서 오랫동안 전해진 아틀란티스에 대한 전설이 있다. 전설에 따르면, 아틀란티스대륙은 아주 부유하며, 그곳의 사람은 초인적인 능력을 가진 신족이라는 것이다. 그들에 관한 기록으로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고대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이 기원전350년에 저술한 <<대화록>>이다. 그는 "1.2만년전에, 지중해의 서쪽으로 먼 대서양상에, 하나의 놀라운 대륙이 있었다. 그것은 무수한 황금과 백은으로 장식되어 있고, 빛나는 금속--산동(山銅)을 캘 수 있다. 그곳에는 설비가 잘 갖추어진 배와 항구가 있고, 사람을 태우고 날 수 있는 물체도 있다" 아틀란티스의 세력은 멀리 아프리카 대륙에도 미친다. 대지진이 있은 후, 이 대륙은 바닷속으로 가라앉았다. 일부 아틀란티스인들은 배를 타고 도망쳤으며, 최종적으로 중국의 티벳과 인도에 정착하였다. 이들 아틀란티스인들의 후손은 일찌기 중앙아시아에서 찬란한 문명을 꽃피웠고, 나중에 그들의 일부는 서북과 남방으로 이전했으며, 각각 아리안족과 인도인의 조상이 되었다. 일부 나찌전문가들은 아틀란티스문명은 확실히 존재했고, 아리안인은 나중에 보통사람과 결합하면서 조상의 신적인 능력을 상실했다고 믿었다. 히믈러는 이런 신화전설을 깊이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는 일단 아리안인의 조상이 신이라는 것을 증명하면, 이후 선택적인 번식등으로 종족을 정화(淨化)하는 수단을 취함으로써 초능력을 지니고, 무적인 아리안 신족부대를 창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티벳족들의 신체특징을 상세히 조사하다.

 

조상의 유민을 탐방하기 위하여 1938년, 히믈러는 명을 받아 박물학자인 잉스터 사이퍼와 인류학자인 부르노 벨거를 대장으로 한 "독일친위대사이퍼고찰대"를 만들어 티벳으로 보냈다. 이 팀의 다른 구성원에는 식물학자, 곤충학자와 지구물리학자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 나치분자들이 찍은 다큐멘터리 <<티벳비밀>>에는 그들의 진정한 목적을 모르는 현지의 영주들이 매우 환대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딴 마음을 품고 있던 친위대원들은 그들의 원래 임무를 잊지 않았다. 벨거는 많은 티벳인들의 머리의 크기를 측정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의 모발과 다른 인종의 모발을 비교하기도 했다. 그들은 또한 피조사자의 안구의 색으로 종족의 순도를 평가했다. 데이타를 보류하기 위하여, 이 나치분자들은 생석고로 십여명의 티벳인에 대하여 얼굴과 손의 본을 떴고, 이 사람들의 머리, 얼굴, 귀와 손의 석고모형을 만들었다.

 

이번 고찰에서, 대원들은 현지 사람들로부터 '샴발라(Shamballa)'라는 동굴에 대하여 듣고, 그곳에는 무궁한 능력을 지닌 '지구축심'이 있다는 말을 듣는다. 그 것을 찾을 수 있다면, 생물장의 보호를 받게 되고 '도검불입(칼이나 검으로 다치게 할 수 없는)'의 경지에 이르게 되며, 임의로 시간과 사건의 변화를 콘트롤할 수 있게 된다고 하였다. 1939년 8월, 고찰대는 독일로 돌아가서 히믈러의 성대한 환영을 받는다. 히믈러는 사이퍼에게 '친위대명예검'을 하사한다. 1943년 1월, 나치는 뭰헨대학에 스웨던 고고학자 스원 허딩의 이름을 딴 고고및인류학학원 즉 스원 허딩학원을 만든다. 사이퍼는 히믈러의 추천을 받아 제1기 원장으로 임명된다. 사이퍼와 동행하였던 벨거도 히믈러에 의하여 친위대고급장교가 된다. 이로써볼 때, 제1차 티벳탐험활동은 나치고위층으로부터 아주 높은 평가를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구축심"을 찾아서.

 

1941년 12월말, 소련전쟁터에서 독일군대는 50만명의 병사, 1300량의 탱크, 2500문의 대포를 잃어버리는 참혹한 대가를 치르면서 모스크바전투에서 참패했다. 같은 해 겨울, 백만의 독일군은 또 다시 스탈린그라드전투에서 곤경에 처했다. 이런 나쁜 소식 앞에서 히틀러와 그의 총참모부는 아무런 방법도 취할 수가 없었다.

 

이 때, 히믈러는 어떻게 군사적인 불리한 국면을 빠져나갈 수 있을지에 대하여 깊이 고심하였다. 그는 한편으로 강호술사들을 통하여 대서양지도에 추를 거꾸로 다는 황당한 방법으로 동맹군의 함대를 찾았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멀리 동방에 있는 '지구축심'을 생각해냈다. 그후 히믈러는 히틀러를 만나서, 특별행동소분대를 파견하여, 티벳의 샴발라동굴로 가서, 전세계를 통제할 수 있는 '지구축심'을 찾게 할 것을 제안했다. 그후 수천명의 낙하산부대를 그 곳에 떨어뜨려, '불사군단'을 만든다는 것이었다. 이와 동시에 '지구축심'을 뒤집어 독일을 1939년으로 되돌아가게 하여 당초 범한 잘못을 고치고, 다시 전쟁을 일으킨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하여 히믈러와 히틀러는 6시간을 밀담하고, 또한 히틀러에게 2000페이지에 달하는 보고서를 제출했다. 그 중의 1장의 지도에는 샴파라의 대체적인 위치를 표시하고 있었다.

 

1943년 1월, 하인리히 할러가 이끄는 나치 5인탐험대는 비밀리에 티벳으로 떠났다. 일찌기 직업등산가였던 할러는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난 골수 나치친위대원이었다. 일찌기 1933년에 나치당에 가입했다. 1938년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합병이후, 그는 다시 친위대에 가입했다. 스위스에서 진행된 등산대회에서 할러는 1위를 차지했고, 그는 아리안족의 '우수한 자질'을 유감없이 발휘했었으며, 히틀러가 직접 그를 접견하고 사진까지 찍었다. 할러등의 사람등의 여정은 순탄치 못했다. 1943년 5월, 그들은 인도에서 영국군에 체포되었다. 여러번의 탈옥실패를 거쳐, 할러등은 마침내 포로수용소에서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처음에 그들은 일본군에 투항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나중에 계속 '지구축심'을 찾는 사명을 수행하기로 결정한다. 당시의 영국인도총독이 티벳에 파견한 관리인 리차드슨은 독일인에 대하여 매우 관용적인 태도를 보였으므로, 독일제품판매원으로 위장한 할러는 티벳에서 7년간의 여행을 시작한다. 아무도 할러와 그의 탐험대가 어느 지방으로 갔었는지를  자세히 말할 수 없다. 황당한 전설에 따르면, 그들은 최종적으로 '지구축심'을 찾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그것을 조종해야할지를 몰랐다. 그리고 아무도 할러 수하의 3명의 동료가 어디로 갔는지를 모른다. 왜냐하면 전쟁이 끝날 때, 할러의 탐험대는 겨우 그와 히믈러의 심복인 피터 우프스나터만이 남았다. 1948년, 할러는 라싸에서 달라이라마의 개인교사 겸 정치고문이 되었다. 1951년 티벳이 평화적으로 중국에 합병될 때, 할러는 황급히 인도로 도망쳐서 재판을 피한다. 그는 리히텐시타인에 정착한다. 이후, 할러와 달라이라마는 오랫동안 밀접한 관계를 유지한다. 1977년, 일부 인사들이 할러의 나치분자라는 신분을 폭로한 후에도 달라이라마는 여전히 기자회견에서 공개적으로 이 '스승'을 변호해주었다. "나는 당연히 하인리히 할러의 독일배경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독일은 제2차세계대전에서 참회자로 전세계의 앞에 섰다. 그러나, 우리는 항시 '패배한 개'에 감동을 느낀다. 그래서 독일인들은 40년대말부터 동맹군으로부터 충분한 징벌을 받았다" 나중에 할러는 자기의 회고록 <<티벳에서의 7년>>을 발간했다. 이 책에서는 그가 히믈러의 명을 받아 비밀리에 '지구축심'을 찾으러 갔다는 것은 밝히지 않았고, 그가 나치분자라는 진실한 신분도 밝히지 않았다.

 

현재, 독일의 공식적인 입장에 따르면, 나치의 제1차 티벳탐험시의 다큐멘터리는 1945년 가을의 쾰른대화재에서 소실되었다고 한다. 1951년 라싸로부터 오스트리아로 돌아올 때 휴대한 대량의 자료는 영국군에게 몰수되었다. 할러 본인도 이미 죽었다. 나치가 티벳에 진입한 자료는 아주 극비자료로 취급되었었다. 독일, 영국, 미국의 규정에 따르면 아마도 2044년이후에 비밀해제될 것이다. 아마도 영원히 역사속에 묻힐 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