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나라 재상의 명언 6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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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당)

2007. 11. 30.

글: 독서삼미(讀書三味)

 

이덕유(李德裕)의 명언

 

조정의 고위관리는 마땅히 공경귀족의 자제들이 맡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어려서부터 교육을 받아, 조정의 예의범절에 대하여 아주 잘 알아서, 따로 가르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문(寒門) 출신의 사람들은 비록 재주가 아주 뛰어나다고 하더라도, 과거급제해서 관리를 시작한 후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 하므로, 익숙해지는 것이 아주 어렵다.

 

이 말은 정말 그와 같은 사람이니까 할 수 있는 말이다. 이덕유는 집안이 좋았다. 그의 할아버지인 이서균(李棲筠)은 어사대부를 지냈고, 부친인 이길보(李吉甫)는 당헌종때 재상을 지냈다. 아마도 가정조건의 영향이었던지, 이덕유는 어려서부터 과거를 싫어했고, 과거시험에 참가하지도 않았다. 비록 부친과 마찬가지로 나중에 재상을 지내기는 했지만, 처음에 관직에 나아갈 때는 모두 문음(門蔭)에 의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과거에 급제하고 관직에 나선 동료들을 아주 무시했다.

 

그렇지만, 그가 이러한 편견을 지니게 된 데에는 아마도 그와 우승유(牛僧孺)와의 당파싸움의 영향이 가장 컸을 것이다. 당나라때, 이덕유와 우승유의 당파싸움은 지속된 기간의 길이에서나 서로 물과 불처럼 용납하지 못했던 점에서나 실제로 전무후무한 정도였다. 이덕유와 비교하자면, 우당(牛黨)의 영수인 우승유는 조상, 부친이 무슨 큰 벼슬을 지낸 적이 없었다. 그는 순수히 '과거급제자' 출신으로 관리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관직에 나선 것은 모두 개인적인 노력의 결과였다. 이에 대하여 이덕유가 공격할 빌미를 잡은 것이다.

 

그러나, 이덕유의 이 말은 이치에 맞는 점도 있지만, 논리적으로는 말이 되지 않는다. 조정의 예의범절에 익숙한 것은 관리로서 갖추어야 할 기본자질의 하나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유일한 조건은 아니다. 당나라제도에 의하면 관리의 선발은 "덕행(德行), 재용(才用), 노효(勞效)"의 "삼실(三實)"이 기준이었다. 제도는 제도이지만, 관리임용 특히 재상을 누가 맡느냐는 점은 한마디로 말하면 황제의 말한마디에 달린 것이 아닌가? 황제가 누구를 좋아하느냐 싫어하느냐가 중용되는 유일한 기준이었던 것이다. 이 점에 대하여, 이덕유가 홀연 올라갔다가 홀연 밀려났다가 결국은 타향에서 객사한 것이 가장 좋은 사례라고 할 것이다.

 

소미도(蘇味道)의 명언

 

관료사회에서의 일처리는 너무 확실하게 해버리면 안된다. 일단 잘못 처리한 것이 되면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다. 모든 일은 두리뭉실하고 이렇게도 저렇게도 빠져나갈 수 있도록 하는 것(模兩可 左右逢源)이 가장 좋다.

 

무측천이 황제를 지낼 때, 조정내의 고위관료들 중에서 숙청을 당하지 아니한 사람이 거의 없었는데, 소미도는 바로 그 중의 한 명이었다. 소미도의 능력은 보통이었다. 그러나 그는 역대재상이 어떻게 일처리를 하며 관직을 유지했는지에 대한 연구는 뛰어났다. 관직의 보신에 명수였다. 그가 관직을 유지한 비결은 아주 간단했다. 즉, 두리뭉실이었다. 이 점에 대하여 표면적으로 보자면 정판교(鄭板橋)의 유명한 난득호도와 별 차이가 없는 것처럼 보이기는 한다. 당시의 사람들이 소미도에게 붙여준 별명은 "소모릉(蘇模)"이었다.

 

이 점에 대하여 좀 이해하기 어려운 점은 있다: 무측천은 아주 총명하였는데, 어떻게 이런 자를 재상으로 삼았단 말인가? 이것은 멍청한 짓이 아닌가? 사실, 이것이 바로 무측천이 총명한 부분이다. 무측천이 막 용상에 올랐을 때는 "여러 사람들이 아직 그녀를 따르지 않았다" 그리하여 사람을 씀에 있어서, 그녀는 두 가지 방책을 사용했다. 한편으로는 혹리(酷吏)와 심복을 써서 자기에 반대하는 자들에 타격을 가하면서 위신을 세우고, 다른 한편으로, "좋은게 좋다"는 식의 인물을 임용하여 보좌하도록 해서, 모순을 완화시키고 국면의 균형을 이루도록 하였다. 무측천이 소미도를 임용한 것은 바로 그의 장점을 높이 산 때문이다.

 

의미심장한 것은 이처럼 아무런 원칙도 없고, 아무런 주장도 없는 것같은 사람이지만, 동생에 대한 요구사항은 아주 엄격했다. 재상의 직위에 있었으므로, 실권이 있었고, 동생이 자주 그를 찾아와서 이것저것 요구했다. 그러나, 소미도는 이때는 아주 엄격하게 거절했다. 동생이 면전에서 욕을 하기도 하였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고 평상시처럼 대했다. 이는 깊이 생각할 점이 있다. 이처럼 "경위가 분명한" 소미도와 어느 것이 진실한 소미도일까? 사람이라는 동물은 정말 복잡한 동물인 것같다.

 

이의염(李義琰)의 명언

 

큰 벼슬을 하고, 또 큰 집에 들어가 사는 것을 내가 생각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두려운 것은 잘못하다가 일신에 화를 부르고, 재앙을 맞이할지 모르는 것이다.

 

사람은 칠정육욕이 있고 이것은 정상적이다. 핵심은 모든 일에 정도가 있다는 것이다. 이 도를 지나치면 물극필반(物極必反)이 된다. 이의염이 재상으로 있을 때, 당고종이 두풍병을 앓았고, 조정상의 일상업무는 모두 무측천이 처리했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이성(二聖)"이라고 불렀다. 바로 이로 인하여 무측천의 야심은 날로 팽창했고, 크고 작은 신하들이 모두 그녀의 편으로 돌아섰다. 그러나, 이의염은 무측천의 회유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한번은, 고종이 정식으로 조서를 내려, 무측천이 당당하게 조정을 관리하도록 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의염은 이치를 내세워서 반대했고, 고종은 그 생각을 접게 되었따. 고종이 죽은 후, 무측천은 태후의 명의로 임조칭제(臨朝稱制)했고, 이미 은퇴한 이의염을 회주자사로 임명했다. 그러나, 이의염은 이리저리 생각하다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왜 받아들이지 않았던가? 왜냐하면 그는 무측천이 보복할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과연, 무측천이 정권을 잡자 그녀에 반대하던 자들을 모두 숙청했다. 그러나, 이의염은 아무 일이 없이 지낼 수 있었다.

 

또 한번은, 그의 동생이 그에게 나무재료를 사줘서, 그에게 집을 크게 지으라고 했다. 그는 뭐라고 해도 동생의 말을 듣지 않았다. 나중에 그 나무는 오랫동안 그냥 놔두다 보니 비를 맞고 햇볕에 쏘여 썩고 말았다. 그는 왜 큰 집을 짓지 않았던가? 바로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가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그가 두려워했던 것은 사람들의 질시와 미움을 불러올 수 있고, 비난할 꺼리를 마련해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보기에 사람이 편안하게 살려면 이의염처럼 해야 한다. 마음 속에 약간의 "두려움"을 가지고 살야아 한다. "두려움"이 있어야 스스로 경계할 수 있다. "두려움"이 있어야 자족할 줄 안다, "두려움"이 있어야 맛있게 먹고, 편안히 잠잘 수 있다.

 

최일용(崔日用)의 명언

 

나는 평생 일처리를 하면서, 모두 구체적인 상황에 따라 임기응변했다. 한번도 처음에 생각했던 바를 고집한 적이 없다. 이 점을 생각하니, 그 맛은 가시로 등짝을 찌르는 것같다.

 

관료사회는 살아남기 쉽지 않다. 그 안의 달콤한 맛과 쓴 맛은 겪어본 사람만이 안다. 당중종 이현이 복위에서 예종을 거쳐 현종이 즉위했을 때, 이 기간은 당나라황실의 최고권력집단내부에서 세력이 교차하고 명쟁암투가 있으며, 갈등이 겹겹이 겹쳐 있고, 위기가 사방에 매복되어 있는 때였다. 줄을 잘못서고, 엉뚱한 사람을 따르다가는 바로 패가망신하고 만다. 그러나, 역사서에서 평가하는 바와 같이 최일용은 "매번 조정에 일이 있을 때마다 화를 복으로 바꾸고, 여기에서 부귀를 취했다"도 한다. 이것은 그가 총명했다는 것이고 바로 그가 원만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최일용은 처음에는 무삼사(武三思)에 붙었다. 그런데, 무삼사가 주살당하고, 중종이 죽고, 위후(韋后)가 칭제하자 최일용은 시세를 살펴서 즉시 당시 태자이던 당현종에게 붙었다. 최일용은 왜 당현종을 주목했는가? 당시의 몇몇 세력중에서 예종은 분명히 허수아비였으니 논할 바가 못되었다; 위후는 비록 임조칭제하고 있으나, 덕행에 문제가 있어서 인심이 그녀를 떠나 있었다; 태평공주는 비록 세력이 하늘을 뒤덮을 정도이지만, 그는 겉으로는 강하나 가운데가 비어있었다; 그가 당현종 이융기를 중시한 것은 이처럼 사람들을 하나하나 배제하다보니 남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떻든간에 이 결정은 최일용이 가장 잘한 선택이었다. 그는 마침내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지위와 영예를 얻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대가는 몸도 피곤하고, 마음도 지치게 된 것이다. 그는 하루종일 머리를 굴려야 했고, 계속 계산해야 했고, 잠시라도 졸면 다른 사람들이 역공을 펼쳐 함정에 빠질 지도 몰랐다. 어떻게 밥을 먹고, 어떻게 힘을 써야하는지를 그는 잘 알았던 것이다.

 

이임보(李林甫)의 명언

 

사람을 하나 쓰는데, 관건은 그의 재능이다. 그의 문장 수준을 중시할 필요는 없다. 황제가 사람 하나를 쓰는데 또 무슨 이유가 필요한가?

 

역사는 사람이 만드는 것이고, 역사를 기록한 전적도 사람이 쓰는 것이다. 이는 작자 개인의 사상과 감정이 개입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의미한다. 재미있는 일은, 어떤 사서에서 작자는 아주 직업정신이 투철하여, 그의 평가기준에 따라,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을 확실히 나누어, 일찌감치 구분해둔다. 목록을 한번 살펴보면 바로 알 수 있게 해두었다. 예를 들어, 이임보는 <<신당서>>에서 바로 <<열전, 간신>>에 들어있다. 그렇지만, 이것이 객관적인 평가라고 할 수 있는가?

 

황제시대에, 황제는 바로 한손으로 하늘을 가릴 수 있는 오너이다. 오너의 밑에서 일을 할 때, 일을 잘하면 칭찬을 받는 것이고, 일을 잘못하면 쫓겨나는 것이 아주 정상이다. 오너의 존엄과 지위를 보호하고, 오너의 뜻에 따라 일을 처리하는 것이 "직원"의 가장 기본적인 "직업도덕"이다. 이 점에 있어서, 이임보는 아주 뛰어났다. 당현종이 그렇게 이임보를 신임한데에는 이것이 아주 중요한 원인이다.

 

그러나, 그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은 것도 좋고, 다른 사람을 해치고 자기도 다쳤다는 것도 좋다. 어쨌든 이임보에게는 간신배라는 모자가 씌워져 있었다. 그는 이 모자를 천년간이나 쓰고 있었다. 그에 대한 평가는 사람들이 말하는대로 흘러온 천년이었다. 그러나, 이임보의 이 말에서, 확실히 그의 "독특"한 점을 느낄 수 있다. 이임보가 재상을 20여년이나 했는데, 절대로 "간(奸)"이라는 한마디로 개괄할 수는 없을 것이다.

 

위징(魏徵)의 명언

 

폐하께서는 간하는 것에 대하여 잘 들어주십니다. 그래서 제가 감히 폐하께 직간(直諫)하는 것입니다. 만일 폐하께서 직간을 싫어하신다면, 제가 감히 그럴 수 있겠습니까?

 

철학적인 용어로 말하자면, 어떤 사물도 우연중에 반드시 필연이 있다. 위징이 직언하고 직간한 것은 거의 아무도 따를 수 없을 정도였고, 일찌기 충성심이 뛰어난 것으로 역사책에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우연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연중에는 반드시 필연이 있다. 위징의 당태종에 대한 이 말에서, 진실은 분명히 드러나는 것이다.

 

모든 일은 두 사람이 맞아야 �다. 위징은 바보가 아니었다. 그는 강직했고, 큰 지혜를 감추고 있었다. 상대방의 반응에도 불구하고, 아무렇게나 일을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의 직언, 직간에 대하여 여러가지 에피소드들을 한번 살펴보라. 거기서 드러나는 것은 그의 예지와 이성이지만, 잘 드러나지는 않지만 원만함과 세상물정을 잘 아는 점도 들어있다.

 

사람과 사람의 교분에서 특히 보스와의 내왕에서는 확실히 따져야 할 것이 많다. 총명한 부하라면, 시간을 잘 잡아서, 적당한 장소에서, 알맞은 말로, 보스에게 자기의 의견과 건의를 제시할 것이다. 가장 멍청한 행위는 가장 난감한 결과를 불러온다. 비록 합리적인 건의의 깃발을 달았지만, 보스는 네 말을 귀에 담아두지 않을 것이고, 조금만 듣기 싫은 소리를 하면 개가 짖는 것만큼도 여기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