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왕조교체의 법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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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분석/중국역사의 철칙

2007. 11. 30.

1. 황염배와 모택동의 요동대(洞對).

 

진시황이 육국을 통일한 때로부터 청나라가 신해혁명으로 멸망될 때까지, 2천1백여년간 많은 왕조가 일어났다 망하곤 하면서, 주마등처럼 바뀌었다. 전체적인 인상은 왕조의 흥망에 마치 어떤 순환주기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역사의 순환론은 일찌기 서한(西漢)때부터 나타났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삼왕(夏商周)의 법칙은 순환과 같다"라고 적었다. 그 이유는 바로 전국이래로 음양가들이 전해내려온 "오덕종시설(五德終始說)"이 있다. 즉, 우주에는 금, 목, 수, 화, 토의 다섯 원소가 있는데, 서로 상생상극한다는 것으로 왕조의 운명과 교체에 이를 견강부회적으로 가져다 부쳤다.

 

1945년 황염배(黃炎培)는 연안을 방문한다. 요동에서 모택동과 얘기를 나누는데 이 모택동과 황염배의 대화를 사람들이 '요동대'라고 부른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60여년을 살면서, 귀로 들은 것은 빼고, 눈으로 본것만 하더라도, 정말 '흥하는 것도 순간이요' '망하는 것도 순간이다' 한 사람, 한 집안, 한 단체, 한 지방, 내지 한국가, 많은 단위들이 모두 이 주기율의 지배력을 벗어나지 못한다" 이것은 아마도 처음으로 왕조흥망에 대한 주기율문제를 제기한 것일 것이다. 역사상 존속기간이 비교적 길고, 판도가 컸으며, 국력이 강성했던 왕조를 꼽아보면 십여개에 불과하다. 어떤 왕조는 비교적 짧았지만 중요하기도 하다. 어떤 왕조는 존속기간이 길었는데, 예를 들면, 서한, 동한, 북송, 남송이 모두 200년에 가깝거나 200년이상이고, 당, 명, 청은 더욱 길어서 거의 300년에 이른다.

 

이들 왕조는 모두 유사한 과정을 겪었다. 흥성-정체-쇠망, 그리고 새로운 왕조로 교체. 각 왕조가 직면한 문제는 비슷한 점이 있다. 황염배의 말을 빌리자면, 왕조흥망주기율이다. 시간이 비교적 짧았던 왕조들 진나라, 수나라는 흥하는 것도 빨랐지만, 망하는 것도 발랐다. 아주 짧은 시간내에 모순이 격화되고, 폭발하였다.

 

2. 신왕조가 구왕조를 대체하는 세가지 경로

 

하나의 신왕조가 구왕조를 대체하는 데는 세 가지 경로가 있다:

 

첫째, 전쟁이다. 소위 "마상득천하(馬上得天下)"이다. 여기에도 두가지 유형이 있다. 하나는 구왕조말년에 농민의거가 일어나서 직접 구왕조를 무너뜨리고, 신왕조가 전란과정에서 새로 일어나는 경우이다. 그 중의 농민의거 우두머리가 새로은 봉건제왕으로 변신하는 것이다. 진나라말기의 유방, 원나라 말기의 주원장이 그런 경우이다. 어떤 경우는 농민의거가 실패한 후, 귀족군벌이 군웅의 혼전중에 새로운 왕조를 설립하는 경우도 있는데, 왕망의 신나라말년의 유수가 그런 경우이다. 또 다른 하나는 농민의거로 직접 구왕조를 전복시키지는 않지만, 구왕조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여 와해되는 경웅다. 진왕조는 농민의거후의 혼전중에 나타난다. 예를 들어 동한말년의 황건적의 난, 당나라가 수나라를 대체한 일, 당나라말기의 황소의 난등이 그것이다.

 

이런 두 가지 상황중에서 왕조말년의 농민의거는 구왕조를 전복시키는데 결정적인 작용을 한다. 농민의거의 결과가 어찌되었던, 정권은 결국 새로운 봉건왕조의 손에 들어가는 것이고, 봉건사회는 지속되는 것이다.

 

둘째, 비폭력수단이다. 신흥통치집단이 국가의 군사, 정치를 조종하다가 구왕조 통치자를 핍박하여 정권을 내놓게 하는 경우이다. 명목은 요순의 '선양'을 본뜨지만, 실제로는 찬탈이다. 왕망이 서한정권을 대체한 경우, 조비가 동한정권을 대체한 경우, 사마염이 조위정권을 대체한 경우, 양견이 북주를 대체한 경우, 조광윤이 '진교정변'으로 후주를 대체한 경우가 그것인데, 모두 '선양'이라는 명목으로 이루어졌다.

 

"선양"중에서 가장 희극적인 것은 북송의 송태조 조광윤이다. 그는 원래 군대의 장수였는데, 그는 후주의 황위를 찬탈하려고 했다. 나중에 후주의 세종이 전쟁중에 병사하고, 7살된 어린 황제가 즉위했다. 조광윤은 병권을 장악하고, 음모를 써서 여론조작한 후 후주의 황제가 제대로 못하니 사람을 바꿔야 한다는 말을 퍼뜨렸다. 나중에 거짓군사보고를 핑계로 북방의 요나라에 진공한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바로 병사를 모아서 출정하였는데, 개봉부근의 진교역까지 가서는 멈추고 술을 마시고, 한밤중에 정변을 일으켰다. 부하들이 모두 들고 일어나 조광윤의 잠을 깨우고 그에게 황제의 황포를 입혀서 황제에 즉위시켰다. 그 후에 급히 개방으로 돌아와서 황조를 바꿨다. "진교병변", "황포가신"은 중구격사상 평화로운 찬탈의 가장 희극적인 장면이었다.

 

셋째, 북방민족의 남하이다. 오대후기의 거란족이 요를 건립한 경우, 북송말에 여진족이 금을 건립한 경우, 남송후기 몽고족이 몽고칸국과 원을 건립한 경우(전체정복한 첫번째), 명나라말기의 만주족이 청을 건립한 경우(전체정복한 두번째)등이다. 북방민족이 건립한 왕조는 그들의 사회발전정도가 낙후되고, 농후한 민족압박과 민족차별적인 정책을 썼다.

 

3. 왕조교체의 3가지 경로를 어떻게 볼 것인가.

 

앞에 얘기한 것처럼, 농민의거가 구왕조를 타격하거나 전복하는 것은 왕조교체의 중요한 방식이었다. 역사연구에서 농민의거에 대한 평가는 서로 다르다. 이전에 사람들은 농민의거라면 모두 좋은 것이고 모두 영웅이라고 본 적도 있다. 이자성, 태평천국의 지도자들도 모두 영웅으로 보았다. 나중에는 서로 다른 견해가 나타났따. 농민전쟁은 대규모의 전쟁이고, 전쟁 자체는 잔혹한 것이며, 사람도 많이 죽이고, 경제도 심각하게 파괴한다. 그리하여 현재는 농민의거의 파괴작용을 과대하게 평가하는 경향까지 나타나고있다. 농민전쟁은 경제를 파괴하고, 인민에 해악을 끼치며, 생명을 위협하고, 경제를 후퇴시킨다는 것이다. 또 어떤 관점은 태평천국때 강남지역에 대한 파괴행위가 너무 지나쳐서, 중국근대화에 큰 영향을 미쳤고, 민족공업이 발전하지 못하고, 자본주의가 발전하지 못했다고까지 한다. 즉, 태평천국은 그저 파괴만 했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은 공정하지는 않다. 첫째, 농민이 억지로 최저한도의 생활을 유지할 수만 있다면 반란을 일으키지 않는다. 진짜 견딜 수가 없어서 반란을 일으키는 것이다. 농민반란의 규모가 크고, 군중성의 운동이 되는 것은 소수인들이 부추겨서 되는 것이 아니다. 실제 왕조말기의 사회모순의 폭발점이라고 보아야 한다. 만일 전쟁책임을 추궁한다면, 농민이 주요한 책임을 부담하여야 한다기 보다는, 착취자, 통치자가 더 큰 책임을 부담해야 한다.

 

둘째, 농민전쟁은 잔혹하다. 그러나 전쟁은 양방향이다. 반란을 진압하려는 통치자도 반란을 일으킨 농민에 비하여 '인자'하지는 않다. 어떤 경우는 더욱 잔호가다. 명나라말기의 전란중에 "도적이 오면 빗어가고, 병사가 오면 쓸어가고, 관료가 오면 깍아서 간다"는 말이 나올 정도이다.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하던 증국번의 별명이 "까까머리"였는데, 이처럼 하나도 남기지 않았다는 말이다.

 

셋째, 원래의 구왕조는 이미 노쇠하여 구할 방법이 없다. 그리고 스스로 역사무대에서 물러나고자 하지도 않는다. 그저 농민의거의 충격만이 암흑의 통치를 끝낼 수 있는 것이고, 새로운 세력에 길을 닦아주는 것이다. 여기에서 농민의거가 역사를 발전시키는 작용을 볼 수 있다. 당연히 농민은 새로운 생산력이나 새로운 생산관계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리고 참신한 새로운 사회제도를 건립할 수도 없다. 그저 전쟁중이나 전쟁후에 야심가들에게 이용당하고 그들을 위하여 왕조를 교체하는 도구로 활용될 뿐이다. 옛 봉건세력이 크게 타격을 입더라도, 이를 잇는 것은 새로운 봉건왕조이다. 이것은 농민의 비극이고, 역사의 필연이다.

 

다른 두 가지 경로로 황조가 교체되는 경로는 "선양"은 귀를 가리고 방울을 울리는 짓이고, 신황조는 암흑의 구세력을 심하게 타격하지 않는다. 많은 경우는 옛제도를 그대로 끌고 가고, 개혁되는 것은 적다. 그리고 새로운 피와 활력을 그다지 많이 수혈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북방민족이 남하하여, 구황조를 대체하면 그들은 강력한 무력을 바탕으로 압제를 가하여, 오랫동안 지속되지 못했다(청황조는 예외이다. 그들은 통치에서 상당한 수완을 발휘했다)

 

4. 3개의 모순을 잘 처리하면 성세가 도래했고, 그렇지 않으면 사회동란이 왔다.

 

신왕조건립초기에 일반적으로 3가지 주요한 모순에 부닥친다. 통치자가 잘 처리하면, 성세가 온다. 그렇지 않으면 동란이 발생한다. 장사소의 <<유문지요>>에서 <<유자후가 오늘날 태어나면 어떨까?>>라는 글, 백양의 <<중국인사강>>의 <<병경위기>>라는 대목에서 이 점을 잘 지적하고 있다.

 

예를 들어 백양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왕조와 상왕조의 건립초기에 치명적인 정치재난이 폭팔하였다. 하왕조의 네번째 다섯번째 군주와 상왕조의 세번째군주시대에 즉, 하왕조의 개국후 40여년후, 상왕조의 개국후 40여년후의 일이다. 하왕조정권이 후예와 한착에게 탈취당한다.상왕조의 정권도 이윤의 손에 넘어간다. 결과는 비록 전통적인 권력자의 후예가 승리하였지만, 이미 사람은 수천 수만 죽였고, 피가 흘러 강이 되었다. 그리고 이들 후예들도 반드시 승리한다고 볼 수 없었다.

 

중국역사상 매번 왕조정권에서는 모두 이런 유형의 장면이 연출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역사의 철칙을 발견할 수 있다. 어느 왕조이든 그들이 건립된 후 50년이 되면, 혹은 제2대, 제3대에 내려가면 병목시기가 있다는 점이다. 소위 몇년, 몇대는 그냥 인상을 강하게 하기 위한 것이니 기계적으로 해석해서는 안된다. 병목의 좁은 길로 들어서면, 통치계급의 고도의 지혜와 능력이 없이는 그들이 이전에 쌓은 공을 모두 잃어버리게 되고, 국가와 집안이 패망하게 되는 병목위기가 온다. 역사가 보여주는 것은 이 병목을 통과할 수 있으면, 장기간의 안정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며, 이 병목을 통과하지 못하거나 병목에서 헤메게 되면 필연적으로 와해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이런 "병목"을 통과할 수 있을까? 우리는 먼저 신왕조가 직면하는 세 가지 모순부터 얘기하기로 하자.

 

첫번째 모순은 농민과 신왕조, 농민과 지주간의 모순이다. 원래 농민은 구왕조, 지주와 첨예하게 대립하였다. 이 때는 완화되고 느슨해지는 중이다. 신왕조통치자가 만일 교훈을 받아들여, 일련의 모순완화정책을 취한다면, 즉, 세금과 요역을 완화시키고, 농민을 편안히 쉬게 하며, 유랑하지 않도록 해주고, 형벌을 낮춰주고, 관리를 잘 정돈하며, 절약한다면, 얼마되지 않아 생산이 회복되고, 경제가 번영하며, 인구가 증가한다. 사회가 안정되는 것이다. 유명한 서한의 "문경지치", 당나라의 "정관지치", "개원성세", 청나라의 "강옹건성세"가 바로 이렇게 생긴 것이다.

 

다만, 일단 신왕조가 이런 조치를 취하지 않고, 역조치를 취하여, 계속 긁어들이고, 낭비하고, 사치하고,돈을 쓰면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백성들은 안정되지 못하고 견디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면 다시 반란을 일으킨다. 원래의 왕조는 금방 멸망한다. 중국역사상 두 개의 중요한 왕조가 있다. 하나는 진나라, 다른 하나는 수나라이다. 시작은 괜찮았으나, 금방 멸망한다. 두번째 황제에 이르러 바로 멸망한다. "흥하기도 금방이고, 망하기도 금방이다" 그들은 폭정과 대형토목공사, 엄격한 형벌을 채택하였고, 바로 그 결과였던 것이다.

 

두번째 모순은 통치계급내부의 모순이다. 신왕조가 건립되어, 아직 안정되지 않았으면 인심이 아직 인정하지 않고 있다. 통치계급간의 모순이 첨예하면, 지방세력이 신황조에 반항하고 중앙내부에서도 각종세력이 대항하는 국면이 펼쳐진다.

 

가장 희극적인 것은 역시 송나라이다. 송나라의 개국황제인 송태조 조광윤은 "진교병변"에서 황제가 된다. 관습대로라면 그는 아들에게 황제위를 물려주어야 하나, 그의 동생인 조광의는 야심이 있었다. 송태조가 아픈 틈을 타서 조광윤을 핍박하고, 두 사람은 싸우게 된다. 왜 싸웠는지 외부사람은 모른다.

숨어서 멀리서 보니 그저 촛불에 그림자가 왔다갔다 할 뿐이고, 도끼머리로 땅을 찍는 소리만 들린다. 이것이 유명한 "촉영부성"이다. 얼마되지 않아, 송태종은 송태조가 죽었다고 선포하고, 임종의 유언으로 송태종이 즉위한다. "촉영부성"은 천고의 수수께끼이다. 현재까지 아무도 해석하지 못했다. 아마도 조광의가 무슨 음모를 꾸민 것일 것이고, 사전에 조치를 취해둔 것일 것이다.

 

명나라의 "정난지역"도 황위계승문제이다. 명태조는 25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태자가 죽었다. 그래서 황위를 손자에게 물려주었다. 이것이 건문제이다. 당시 그의 아들들은 이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중 명성조인 연왕 주체는 북경에서 난을 일으킨다. 쌍방은 3년간 싸웠고, 마지막에 남경이 무너진다. 건문제는 실종되었다. 어떤 주장에 의하면, 건문제는 당시 도망쳐서 중이 되었고, 명성조는 나중에 건문제를 잡으려고 도처에 사람을 보냈다고 한다. 하나의 소문은 무당산과 관련된다. 무협소설에 나오는 무당파이다. 무당파의 조사인 장삼풍이 건문제를 숨겨주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명성조는 죽어라 명을 내려 비밀리에 장삼풍과 건문제를 붙잡으려고 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저 주장중의 하나이다. 또 다른 견해는 건문제가 외국으로 도망쳤다는 것이다. 명성조는 도처에 건문제의 행방을 알아보았고, 심지어 정화를 7번이나 보내서 찾았다는 것이다. 그래도 행방을 알지 못했다. 현재 역사가들의 연구에 의하면, 건문제는 도망치지 못했고, 전란중에 죽었다고 본다. 그렇지만 구체적인 점은 "촉영부성"과 마찬가지로 수수께끼이다.

 

통치계급 내부투쟁은 하나의 병목일 수 있다. 아주 좁은 길이다. 잘 지나가면 좋지만, 지나가지 못하면 큰 문제가 발생한다. 전체 왕조가 전복되기도 한다. 서진은 얼마지나지 않아 "팔왕지란"이 발생한다 서로 싸우다가 결국 농민반란이 일어나고 오호십육국이 나타나면서, 서진은 멸망한다.

 

세번째 모순은 신왕조와 북방유목민족의 모순이다. 신구왕조의 교체기에 원래 압박받던 북방유목민족은 세력을 모으기 시작한다. 남하하여 신왕조를 핍박한다. 이때 신왕조는 국력상황에 따라 서로 다른 선택을 한다. 예를 들어, 서한초기에는 국력이 모자라고, 허약했으며, 통치가 안정되지 못하여, 북방유목민족인 흉노족에 화친의 방법을 사용한다. 70년후의 한무제에 이르러 국력이 충만하게 되자 비로소 흉노에 공세를 취한고, 결정적인 승리를 얻는다.

 

당태종이 즉위한 초기에 병력을 몰고 내려온 동돌궐에 먼저 화해를 구하고, 3년간 충분히 준비한 다음에 다시 전력을 다하여 공격했다. 명성조는 몽고에 대하여 공격적인 태도를 취하여 대거 정벌했다. 다섯 번이나 정벌에 나섰다. 그러나, 신왕조의 이러한 대책은 정확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라가 망할 수도 있다. 오대의 후진의 석중귀는 병사를 이끌고 거란에 항거하다가 멸망했다. 북송초기에 이차에 걸친 요나라공격에서 도무 대패하여 결국 '전연지맹'을 맺는 결과가 되었고, 매년 많은 돈을 바치고 굴욕적인 국면을 벗어나지 못했다.

 

이런 모순에 직면하여, 만일 역사적인 경험을 받아들이기 거부하면, 타당하지 않은 방법을 채택하면, 결과는 엄중하다. 북송은 당나라후기의 번진할거와 농민반란을 방지하고, 중앙집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문을 중시하고 무를 경시했으며, 내를 중시하고 외를 경시했다. 그리하여 나라가 허약해 졌다. 남송은 귀퉁이에 있으면서 남하하는 금나라군대에 계속하여 굴욕적인 화해를 구했다. 그래도 통치자는 계속 노래하고 춤추면서 태평성세처럼 굴었다. 그러다가 몽고에 망했다. 양송은 역사상 가장 허약한 왕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