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인 잘루트(Ayn Jalut) 전투: 몽고군의 서방정벌중 최대의 참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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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원)

2008. 1. 31.

 

1260년 8월의 어느 날, 이집트의 마메루크(Mameluke) 술탄인 쿠두스(Kudus)는 12만 대군을 이끌고 카이로를 출발해서, 시리아로 향했다. 거기서 몽골군과 결전을 벌이고자 했다.

 

이전 몇년동안 몽골의 서방정벌군은 훌레구의 지휘하에, 추풍낙엽처럼 페르시아와 티그리스/유프라테스강유역을 석권했다. 2년전에 바그다드가 함락되었고, 압바스왕조(Abbasid Caliphate)의 마지막 군주이자, 이슬람세계의 정신적 지도자인 알 무스타심(al-Mustasim)은 몽골대군에 생포되어 죽임을 당하였고, 이로써 압바스왕조는 멸망했다. 7개월전에는 아랍인의 아시아 최후의 중요도시인 다마스커스가 함락되었다. 이제 이집트의 마메루크정권은 이슬람세계에서 유일하게 남은 군사력이 되었다. 쿠두스는 전체 이슬람세계가 절벽에 몰려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를 만회할 중책이 자신의 어깨에 달려 있다는 것도 알았고, 생사존망이 이번 결전에 달려있다는 것도 잘 알았다. 만일 실패한다면, 이 세상에서 더 이상 이슬람정권은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쿠두스의 이번 결전시기는 아주 잘 선택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몇 개월전에 몽골의 칸인 몽케가 서거했고, 훌레구의 형인 쿠빌라이와 아릭부케간에 칸의 지위를 놓고 내분이 벌어져 있었다. 훌레구는 십여만대군을 이끌고 이를 지원하러 갔다. 그저 부장인 체드부화가 이끄는 2만명의 병사가 다마스커스에 주둔하고 있었다. 쿠두스는 처음에는 훌레구가 동으로 이동했다는 소식을 듣고도 경거망동하지 못했다. 그는 다마스커스에 얼마나 많은 몽골군이 남아있는지 몰랐기 때문이다. 우연한 기회에 팔레스타인의 십자군 기사들이 군사행동을 벌여 체드부화의 군사력이 얼마인지를 알게 해주었다. 시돈(Sidon)의 루른백작과 베이루트의 성기사단의 존은 군대를 이끌고 몽골군 순찰대를 습격했다. 전투중에 체드부화의 조카가 피살되었다. 체드부화는 대노하여, 군대를 이끌고 반격했고, 존의 성기사부대를 철저히 무너뜰ㅆ다. 그 후에 시돈을 함락시키고, 철저히 약탈했다. 몽골인들의 이러한 징벌조치는 결과에 있어서 좋지 않았다. 십자군정권과 결렬하게 되었을 뿐아니라, 병력의 규모를 드러냈기 때문이다.

 

이집트의 술탄 쿠두스는 다마스커스의 몽골군 병력이 얼마되지 않는다는 소식을 듣고 이는 하늘이 준 좋은 기회라 여겼다. 그러나, 그의 수하에는 겨우 5만의 마메루크병사들이 있을 뿐이었다. 그는 즉시 몽골 사신의 목을 잘라 군중들에게 보여주고, 전국에서 이슬람병사를 모았다. 그리하여 12만대군을 이끌게 된 것이다. 이때 모여든 병사들은 이집트 내륙과 리비아 사막의 유목민족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몽골군이 얼마나 무서운지 전혀 몰랐고, 사기가 높았다. 그리고는 시리아로 가서 체드부화와 결전을 벌이고자 하였다. 출정하기 전에, 쿠두스는 사신을 파견하여 십자군의 팔레스타인 거점과 연락했고, 이전의 악감정을 버리고, 힘을 합하여 몽골의 침입을 막아내자고 건의했다. 십자군의 기사들은 막 체드부화의 군대에 패배를 당해서 투지를 잃고 있었으므로 쿠두스의 건의를 거절했다. 다만 마메루크대군이 팔레스타인을 지나가는 것은 방해하지 않겠다고 보증했다.

  

마메루크는 아랍어로 "노예"라는 뜻이다. 9세기부터, 압바스왕조의 칼리프들은 소아시아에서 코카서스까지 노예를 매입했다. 그리고 엄격히 훈련시킨 다음에 기병부대를 조직했고, 칼리프가 직접 지휘했다. 이들을 가지고 군대를 가진 아랍 각 부락의 수령들과 힘의 균형을 맞추었다. 나중에 아랍 각지의 술탄들은 칼리프를 모방해서, 자기의 마메루크부대를 결성했다. 마메루크병사는 비록 노예신분이지만, 주인으로부터 중시를 받았으므로, 대우도 괜찮고 수입도 많았으며, 마메루크 장군은 왕왕 정계의 고위직으로 진출하기도 했다.

 

13세기의 이집트는 원레 아유브왕조(Ayyubid)의 통치하에 있었다. 아유브왕조는 1174년에 그 이름도 유명한 살라딘에 의하여 창립되었다. 아유브왕조가 생존을 의지한 마메루크군대는 살라딘에 의하여 조직되었다. 살라딘의 자손은 내려갈수록 엉망이었다. 13세기초에 이르러는 압바스왕조의 속국이 되었다. 1250년, 아유브왕조의 술탄 아-살리흐(as-Salih)가 병으로 사망한다. 돌궐출신의 마메루크 장군인 아이바크(Aybak)는 나이어린 후계자를 죽여버리고, 아-살리흐의 미망인을 처로 삼고, 이집트 마메루크왕조를 세운다. 바그다드의 칼리프는 이 왕조를 승인하지 않고, 아이바크와 여러차례 무장충돌을 일으킨다. 1258년, 몽골정벌군이 압바스왕조를 멸망시키고, 바그다드는 참혹하게 유린당하게 된다. 그러자, 카이로는 이슬람세계의 새로운 중심으로 떠올랐다. 이집트의 마메루크왕조는 이때부터 당당하게 이슬람세계의 기둥을 자처하게 된다.

 

마메루크군대의 전투력은 이슬람세계에서는 최고였다. 원인은 병력자원과 훈련에 있었다. 매년 아랍 인신매매상인은 코카서스지역과 중앙아시아초원에서 수만의 아이들을 유괴하거나 납치해서, 그들을 바그다드, 다마스커스, 카이로의 노예시장에 팔았다. 아랍의 술탄들은 자질이 가장 뛰어난 아이들을 골라서, 군사학교에 보내고, 미래의 마메루크병사로 양성했다. 가장 환영받는 마메루크의 인력자원은 코카서스에서 온 그루지아와 투르크 부락에서 온 아이들이었다. 역사문헌의 기록에 따르면, 이 시기에 그루지아에서 매년 유괴되어 매매되는 아동이 2만명에 달하였다고 한다. 코카서스 산주민과 중앙아시아의 투르크인은 건장한 체격을 가지고 있고, 싸움을 좋아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리하여 병사로 삼기에는 가장 좋았다. 이집트 마메루크�오가 건립된 후 500년간, 마메루크 병사는 거의 모두 코카서스지역에서 왔다.

 

마메루크 군사학교는 아주 과학적인 훈련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아이들은 먼저 아랍어와 이슬람교의를 배우고, 주인에 대한 충성심을 심어준다. 14살이 되면 시스템적으로 신체와 군사기술훈련을 받는다. 여기에는 만도(彎刀)를 사용하는 법, 긴창과 활을 사용하는 법, 기마술이 포함된다. 궁술은 특히 중시되었다. 아이들은 먼저 땅 위에서 활쏘는 법을 배우고, 나중에는 말 위에서 활쏘는 법을 배운다. 나중에는 말을 채찍으로 치고 달리면서 활쏘는 법을 익힌다. 기본적인 군사기능을 장악하게 되면, 아이들은 기마술훈련(Hippodrome)을 받게 된다. 즉, 기병전술단위의 기동훈련이다. 이곳의 아이들은 전진 후퇴 우회등의 각종 전술과 기동중의 진형유지등을 배운다.

 

마메루크기병은 모두 중기병(重騎兵)이다. 머리에는 강철로 만든 투구를 쓰고, 몸에는 강사로 짠 갑옷을 입는다. 마메루크기병의 투구는 유럽기사의 것보다는 많이 가볍다. 그러나 방호효과는 크게 나쁘지 않았다. 무기와 장비에는 강궁, 긴창, 날카로운 다마스커스칼과 방패이다. 마메루크강궁의 길이는 몽골강궁보다 하나 더 길었고, 사정거리고 길었으며, 뚫고 들어가는 힘도 강했다. 다만 속도는 느렸다. 이들이 타는 말은 유명한 아랍의 써러브렛이다. 키가 크고 다리가 길었으며 달리는 속도가 빨랐고, 지구력도 괜찮은 편이었다. 몽골기병과 다른 점은, 마메루크기병은 기본적으로 1인1마였기 때문에, 기동성에서 몽골기병에는 미치지 못하였다는 점이다.

 

마메루크군대의 전술과 몽골군대의 전술은 차이가 많았다. 마메루크군대는 전투시에 수비에 치중한다. 기병들은 나란히 대형을 유지하고, 강궁으로 한 차례, 또 한차례 진격해오는 적군에 사격을 가한다. 마메루크기병의 궁술은 뛰어나서, 상당히 먼 거리의 적군도 정확히 맞출 수 있었다. 적군이 화살이 바닥날 때쯤, 마메루크기병은 돌격한다. 이때의 마메루크기병은 진형을 엄격하게 유지한 채 진격한다. 적에게 접근할 때는 먼저 화살을 날린 후, 전진을 돌파한다. 긴창과 다마스커스칼로 적과 백병전을 벌인다. 마메루크기병의 칼솜씨는 아주 뛰어났다. 말을 채찍질하면서도 공중의 대추를 맞힐 수 있는 수준이었다. 세계에 이름을 날린 다마스커스칼은 마메루크기병에게 날개를 달아준 격이었다. 근거리전투에서 이를 당할 것이 없었다.

 

마메루크군대는 장비와 전술에서 유럽의 기사와 중앙아시아 기병의 장점을 잘 결합했다. 여기에 엄격한 훈련까지 받고, 규율이 엄격하여, 확실히 중세의 가장 강한 군대중 하나라고 할 수 있었다. 이집트 마메루크왕조는 이들 우수한 군대에 의지하여 5백년간 지속되었다. 1798년 마메루크기병은 프랑스군대에 두번이나 패하면서 이집트의 마메루크왕조는 그 종말을 맞이한다.

 

1260년 9월 3일, 마메루크의 대군은 팔레스타인 북부의 아인 잘루트(Ayn Jalut)에서 체드부화가 이끄는 몽골대군과 맞부닥쳤다.

 

 

체드부화에게는 2만의 몽골기병이 있었고, 일부 시리아의 지방군대를 보유했다. 아르메니아의 국왕인 하이든은 이미 귀국했지만, 2천의 철갑기병을 남겨 두었다. 그리하여 아인 젤루트 전투에 참가한 몽골군대는 2만5천 정도였다. 아인 젤루트는 부근에 약 6킬로미터 넓이의 산골짜기가 있었다. 이곳은 쿠두스가 고민끝에 선택한 전투장소였다. 쿠두스는 대부분의 마메루크기병을 산골짜기 깊숙한 곳에 배치했다. 북아프리카의 경기병들은 양측의 산 속에 배치해서 거대한 U자형을 이루었다. 그 후에 쿠두스는 믿음직한 부하장수 바이바르(Baibar)에게 1만의 군대를 이끌고 골짜기입구에 진을 펼치게 하였다.

 

비록 몽골군대의 인원수는 마메루크대군보다 몇배나 적었지만, 체드부화는 여전히 자신만만했다. 반드시 이길 것이라는 자신감에 넘쳤다. 그리고, 그의 자신감은 모든 몽골전사에게 감염되었다. 몽골군대는 수십년간 무적이어서 이미 '승리병'에 도취되어 있었다. 그 증상은 교만함으로 나타났다. 몽골군대의 야전능력은 세계적으로 유명했고, 훌레구가 서방정벌을 할 때 파죽지세였고, 아랍인들은 몽골군대만 만나면 겁을 먹고, 그저 성을 지키기에 급급했고, 야전은 회피했다. 이리하여 몽골군대는 아랍군대 특히 마메루크기병의 야전능력을 아주 형편없게 평가했다.  결전은 드디어 시작되었다. 체그부화는 훌레구의 밑에 있는 최고의 장수였다. 그는 이번 전투에도 맹목적으로 이길 것이라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군대를 이끌고 선제공격을 감행했다.

 

바이바르의 임무는 패배하여 퇴각하는 것처럼 하여, 몽골군대를 쿠두스가 설치해놓은 함정에 빠트리는 것이었다. 이 1만의 마메루크기병은 약간 저항하다가 산골짜기로 도망갔다. 몽골군대는 바로 추격하며 산골짜기로 돌진했다. 만일 체드부화가 조금만 주의하였다면 그는 철수하는 마메루크군대가 질서정연하고 전혀 패퇴하는 군대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챘을 것이다. 그러나, 체드부화와 그의 부하들은 이미 계속된 승리에 취해 있었고, 쿠두스의 포위망으로 뛰어드는데 대하여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바이바르부대는 신속히 본진으로 되돌아갔고, 마메루크군대의 전모가 체드부화의 눈앞에 펼쳐지게 된다. 5만의 마메루크기병은 6킬로미터길이로 전선을 펼치고 있었고, 중간은 병력이 두텁고 양쪽은 얇았다. 요(凹)자의 초생달 모양이었다. 목적은 화살의 화력을 집중하기 위한 것이었다. 쿠두스는 중앙에서 전국면을 지휘했고, 바이바르는 우익을 지휘했다. 양측 산속에 있는 7만명으 ㅣ북아프리카 기병이 이때 돌진해 들어갔다. 그리하여 몽골군대는 3면에 적을 맞이하게 된다.

 

자기들이 포위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린 후에, 몽골군대는 잠시 혼란이 있었고, 따르던 시리아의 군대는 전장에서 도망쳐 버린다. 체드부화는 역시 오랫동안 전투를 해온 장수였다. 그는 신속히 전장의 형세를 파악하고, 즉시 몽골군대의 2만기병과 아르메니아의 철갑기병을 선봉에 서게 하고, 마메루크 진영의 약한 두 날개로 돌진했다. 체드불화는 친히 1만의 부대를 이끌고 마메루크진영의 좌익으로 부닥쳐 갔다. 몽골군대는 전방과 측면에서 하늘을 가리며 날아오는 화살을 마주하게 되고, 손실이 참혹했다. 몽골병사는 고도의 전술규율을 발휘하여, 죽거나 다친 자들을 내버려두고 앞으로 돌격했다. 마메루크진영의 양측 날개에 있는 병사들은 몽골기병이 생사를 도외시 하고 쳐들어오고, 몸에 수많은 화살을 맞으면서도 돌진하자 간담이 서늘해 졌다. 삽시간에 몽골군대는 이들 앞에 도달했다. 중기병은 다마스커스칼을 꺼내어 휘둘렀다. 원래 자신감이 없던 마메루크기병은 점차 투지를 상실한다. 바이바르가 이끄는 우익은 겨우 버텼다. 그러나 좌익은 체드부화가 직접 이끄는 몽골기병에게 큰 압력을 받고 있었고, 이미 궤멸되기 시작했다. 양익의 병사들의 전투의지가 동요되고 이는 전염병처럼 중앙에 번졌다. 전체 마메루크진영은 후퇴하기 시작했고, 아주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쿠두스는 절망속에 자기의 대군이 이미 궤멸되는 것을 목격했다. 아랍측의 사료에 의하면, 쿠두스는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고, 투구를 벗어 땅바닥에 내던졌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는 "이슬람을 위하여!"를 외치며 단기필마로 다마스커스칼을 휘두르며 전장터에 뛰어드니, 십여명의 몽골병사들이 그의 칼아래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쿠두스의 이러한 영웅적인 행동은 마메루크기병의 용기를 불러일으켰다. 그들은 잠시 주저한 후, 미친 듯이 돌진해 들어갔다. 만도로 몽골기병과 백병전을 벌였다. 마메루크기병이 잠시 주춤한 것은 심리적인 것이었다. 그들이 자신감을 회복하자 금방 놀랄만한 전투력을 발휘했다. 몽골기병은 근거리전투에는 익숙하지 못했다. 마메루크기병은 칼싸움에서 금방 우세를 점하게 된다.

 

이번 혼전은 새벽부터 오후까지 계속되었다. 마메루크대군은 사람수에서 우세했고, 이것이 점차 힘을 발휘했다. 몽골기병의 사망자는 점차 늘어나고, 패색이 짙어졌다. 체드부화의 부하들은 그에게 후퇴할 것을 권했다. 그러나 그는 오만하게 거절했다. 체드부화는 친히 자기의 호위병을 이끌고 돌격했다. 결국 그는 화살에 목숨을 잃는다. 지휘관을 잃은 몽골군대는 급격히 무너진다. 도망치는 자가 생기게 된다. 마메루크기병은 12킬로미터를 추격했고, 베이산(Beisan)이라는 곳에서 몽골의 잔여군을 겹겹이 포위한다. 몽골병사는 모두 말에서 내려, 방패로 둥글게 방어선을 치고, 강궁으로 정확히 적군을 사격했다. 이리하여 마메루크군대는 상당히 많은 자가 죽게 된다. 몽골병사들이 화살을 다 쏘자, 마메루크기병은 방패로 된 방어선을 뚫었고, 몽골병사는 전원 전사한다.

 

체드부화의 대군이 전멸했다는 소식이 다마스커스에 전해졌고, 다마스커스를 지키던 몽골병사들은 바로 도망친다. 며칠 지나지 않아 쿠두스는 대군을 이끌고 다마스커스에 진주한다. 성안의 무슬림들은 즉시 반격을 가하여 기독교도와 유태인들을 죽여버린다. 이리하여 다마스커스는 다시 피바람이 몰아친다. 이슬람의 구원자 쿠두스는 아쉽게도 승리의 과실을 며칠도 누리지 못하고, 그의 부하인 바이바르에게 암살당한다. 이리하여 바이바르는 이집트 마메루크의 새로운 술탄에 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