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방의 여덟명 아들의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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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유방)

2008. 5. 5.

 

첫째아들: 제왕(齊王) 유비(劉肥)

 

유비는 유방의 큰아들이다. 유방이 아직 결혼하기 전에 조씨(曹氏)와의 사이에 유비를 낳았다. 서출이므로, 태자가 되지는 못했다. 유비의 모친은 일찍 죽었으므로, 유방은 생모가 없는 큰아들을 동정하고 아껴주었으며, 어느 정도 보상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모친을 잃은 아이에게 부친의 정을 느끼게 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유방은 이 큰아들에게 봉상(封償)을 내릴 때에는 매우 손이 컸다. 한고조 6년에 그를 제왕으로 봉하고, 그에게 70개의 성을 내린다. 이는 유방의 아들 중에서 가장 먼저 왕에 봉해지고, 점유지역이 가장 넓은 경우이다.

 

효혜2년, 입경하여 황제를 배알한다. 계모인 여치는 그에게 아무런 감정도 없었다. 그에게 그렇게 넓은 땅을 주었다는 것도 불만이었다. 그리하여, 여치는 유비에게 독주를 내린다. 그런데, 혜제(여치의 친아들)이 독주를 빼앗아 마시려고 해서, 여치는 깜짝 놀라 혜제의 손에서 술잔을 쳐 떨어뜨린다. 이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누구든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유비는 숙사로 돌아온 후 마음이 조급했다. 이제 끝장이다. 계모(태후)가 나를 싫어하니, 태후가 나를 죽이려고 한다. 그의 수하중에 아이디어가 뛰어난 자가 있었다. 그에게 성양군을 떼어내서 노원공주(여치의 딸)에게 헌납하라고 권한다. 이렇게 하고 나니, 계모가 기뻐하여, 그는 겨우 목숨을 부지한 채 제로 돌아갈 수 있었다.

 

제왕 유비는 13년간 재위하다가 효혜6년에 죽는다. 그의 봉국은 일찌기 여씨들에게 갈기갈기 찢겨져 있다가 효문제가 즉위하면서, 유비의 일곱 아들이 왕으로 되어, 제국은 7개로 나뉘게 된다. 나중에는 전부 중앙에 귀속된다.

 

둘째아들, 혜제(惠帝) 유영(劉盈)

 

혜제는 유방의 적장자(嫡長子)이고, 여치의 친아들이다. 한고조12년, 유방이 죽으면서, 17세된 유영이 즉위하고, 유치가 태후에 오른다.

 

유방이 재위하고 있을 때, 항상 유영이 자신을 닮지 않았다고 느껴, 그를 태자위에서 폐하고 동생을 세우려고 하였었다. 여치는 장량에게 의논했는데, 장량이 계책을 내서, "상산사호(商山四皓)"를 불러내서 그를 보필하게 한다. 이 "상산사호"가 어떤 인물인지는 구체적으로 사서에 나와 있지 않다. 그러나, 유방이 그들을 보고는 유영이 아주 재주가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청해도 나오지 않던 세외고인이 그를 청해서 하산하게 하였다는데 감탄한다. 그리하여 그를 폐위하려던 생각을 거두게 된다.

 

혜제가 즉위한 후, 비록 큰 업적은 못이뤘지만, 정치는 비교적 깨끗했다. 사회도 안정되었다. 혜제는 우유부단하였고, 연약하며 무능했다. 재위기간동안 계속 모친의 간섭을 받았다. 태후가 다른 아들들을 죽이려고 할 때, 큰 형인 유비는 잘 보호했다. 그러나, 셋째 동생인 조왕 여의를 보호하는데는 실패했다. 여태후는 조왕 여의를 독살하고, 여의의 모친인 척희를 "인치"로 만들었다. 그리고 고의로 유영을 불러 보게 했다. 유영은 피투성이의 괴물을 보고는 깜짝 놀라게 되며, 이후 그는 제대로 사람역할을 하지 못하게 된다. 매일 술이나 마시고, 결국 우울하게 죽어버린다. 겨우 24살을 살았을 뿐이고, 재위기간은 7년에 불과했다. 혜제가 죽은 후, 여후는 누구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고, 누구를 황제에 올려도 안심이 되지 않았다. 결국 손자를 괴뢰로 앉혀놓고, 자신이 8년간 명실상부한 여황제를 지냈다.

 

셋째 아들, 조왕(趙王) 여의(如意)

 

유방이 한왕(漢王)에 봉해질 때, 정도(定陶)에서 척희(戚姬)를 알게 된다. 척희는 수단이 뛰어난 여자였고, 금방 귀비에 오른다. 조왕 여의는 바로 척희의 아들이다.

 

유방은 유영이 연약하고 무능한 것을 보고는 마음 속으로 부모가 다 뛰어난데 왜 유영은 이렇게 형편없을까를 생각한다. 그런데, 여의는 부친을 닮았고, 그의 모친인 척희도 여의를 태자로 올리기 위하여 노력한다. 유방도 그런 생각을 가졌다. 그러나, 태자를 폐하는 것은 국가대사이다. 자기 혼자 말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대신들과 의논하다보니 주창(周昌) 등 대신들의 반대에 부닥친다. 장량은 게다가 여후를 도와 세외고인 '상산사호'를 모셔오게 하기도 한다. 결국 태자를 폐위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어, 할 수 없이 여의를 조왕에 봉하여 그의 모친인 척희와 함께 조나라로 가도록 한다. 유방은 죽을 때도 여치가 나중에 이들 모자를 괴롭힐까 걱정하여, 고의로 여치에 은혜를 베푼 적이 있는 주창을 조나라로 보내어 국상(國相)을 맡게 하였다.

 

유방이 죽은 후, 여치는 척희를 원수로 생각했고, 유여의를 정적으로 생각했다. 그리하여 기회를 잡아 조왕을 입조하게 한 후 참초제근(斬草除根)하고자 한다. 주창은 여치의 뜻을 잘 알아서, 세번이나 불러도 모두 거절한다. 여치는 방법이 없었다. 그리하여 우선 주창을 부른 후, 다시 조왕을 불렀다. 유여의는 이 계모의 명을 어길 수가 없어서 할 수 없이 장안으로 간다. 여태후는 악독했으나, 혜제는 마음이 선량했다. 그리하여 여러가지로 동생을 보호해준다. 여치는 성밖에서 손쓰려고 했으나, 유영이 친히 성밖으로 나가서 맞이하는 바람에 실패한다. 그 후에 동생과 함께 식사하고 함께 잔다. 그리하여 여치가 손을 쓸 수 없게 만든다. 그러나, 호랑이도 조는 때가 있기 마련이다. 유영은 일찍 일어나서 활을 쏘는 습관이 있었고, 14살된 동생이 아직 곤히 자고 있자 깨우지 않고, 동생을 황제의 침궁에 남겨두고 나갔다 돌아오니 이미 유여의는 칠공에 피를 흘리며 죽어 있었다. 유여의의 모친인 척희도 여후에 의하여 "인치"가 되어 죽는다.

 

넷째아들, 문제(文帝) 유항(劉恒)

 

대왕 유항은 유방의 넷째 아들이다. 모친은 박(薄)씨이다. 대신들이 여씨집단을 멸할 때, 그는 참가하지 않고, 그저 관망한다. 주발(周勃), 진평(陳平)등이 회의를 개최하여 토론할 때, 황제에 가장 적합한 사람은 대왕 유항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사람을 보내어 그를 부른다. 유항의 곁에는 모두 담이 작고 조심스러운 사람들 밖에 없었다. 이들 대신들은 모두 백전노장에 궤계가 많은 자들이라, 쉽게 믿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중 중위 송창은 대왕에게 장안으로 들어갈 것을 권한다. 대왕은 모친 박태후와 협의한 후, 마지막으로 점을 쳐 보기로 한다. 그리고 사람을 경성에 보내어 허실을 정탐한다. 확실하다는 것을 안 후에야 몸을 움직인다. 가는 도중에, 대왕으로 하여금 장안으로 가도록 권했던 송창은 유항과 함께 가마에 앉아서 가는 영광을 누린다. 송창은 이때부터 관운이 활짝 열리게 된다.

 

유항은 역사상 유명한 한문제이다. 재위기간동안 일련의 개혁개방정책을 취했다. 대내적으로 농업개혁을 시행하고, 두번에 걸쳐 세금감면을 시행해서 농민의 부담을 덜어주었다. 그리고 선전에 뛰어나서, 친히 농사를 지어 모범을 보였다. 당시의 농업생산을 증강시키는데 큰 역할을 한다. 법제개혁에 이써서, 육형과 비방요언죄등의 가혹한 형벌을 폐지한다. 조직인사개혁에서, 사람들을 잘 쓰고, 건의를 잘 받아들이며, 인재들을 많이 등용한다. 생활에 있어서는, 그는 근검절약하고, 스스로에 엄격했다. 자신은 자주 기운 옷을 입고 다녔고, 황후와 비빈들에게 치마가 땅에 끌리지 못하도록 하였다. 재정과 도시건설개혁에 있어서, 그는 비용을 절약하여, 아무렇게나 돈을 낭비하지 않았고, 이미지공사를 하지 않았다. 그는 장례제도개혁에 있어서 후장을 반대하고, 자기의 부장품은 모두 도기로 하도록 하였다. 금은등 귀금속은 일체 쓰지 못하게 하였다. 한문제는 유흥거와 유장의 반란을 진압하고, 가의가 제기한 대제후를 분할하는 건의를 받아들인다. 그리하여 중앙집권과 서한의 통일에 기여한다. 대외적으로, 그는 한나라와 남월 및 흉노의 관계를 잘 처리했다. 동시에 변방의 역량을 강화하였다. 한문제는 재위23년만에 미앙궁에서 병사한다. 그의 아들 유계가 즉위하니, 바로 한경제이다. 한문제와 한경제의 통치를 묶어서 '문경지치'라고 부르고, 태평성대의 대표적인 시기이다.

 

다섯째 아들, 양왕(梁王) 유회(劉恢)

 

유회는 처음에 양왕에 봉해 졌다가, 기원전 180년 유우(劉友)가 죽은 후, 조왕(趙王)으로 고쳐 봉해진다.

 

왕에 봉해질 때는 아직 어린 아이였지만, 이제 나이가 든 후에 돌연 조왕으로 고쳐 봉해지니 아주 기분이 좋지 않았다. 주요한 이유는 조(趙)가 그에게는 불길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앞의 두 조왕이 모두 비명에 갔다. 그는 흉다길소라고 느낀다. 태후는 다시 그에게 여산(呂産)의 딸을 왕후로 삼으라고 명한다. 이 여씨왕후는 태후를 믿고 함부로 행동했으며, 아예 양왕 유회를 무시했다. 유회로 하여금 다른 왕비를 가까이 하지 못하게 할 뿐아니라, 딸을 만나는 것까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 곳곳에 심복을 파견하여 유회의 행동을 감시했다.

 

유회는 참고 또 참았지만, 그도 남자였다. 결국 그녀와 한번 부닥치게 된다. 그녀는 고모 못지 않게 악독한 여인이었다. 몰래 유회의 첩과 딸을 죽여버린다. 그러나, 거의 드러내놓고 죽인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유회는 아주 비통해하며 절망한다. 그는 어느날 밤 자기의 허리띠를 풀어서 목을 걸고 죽음을 선택한다.

 

태후는 이 소식을 듣고는 아주 기뻐한다. 이는 바로 그녀가 원하던 결과였다. 유씨왕을 하나 죽여버리면, 왕위가 하나 더 나오고, 적수는 하나 줄어드는 것이다. 그리하여 바로 조카인 여록(呂祿)을 조왕에 봉한다. 그렇지만 조왕의 악운은 성씨가 바뀌었다고 달라지지 않았다. 여록도 앞의 조왕들과 마찬가지로 비참한 운명을 맞이한다.

 

여섯째 아들, 회양왕(淮陽王) 유우(劉友)

 

유우는 처음에는 회양왕에 봉해진다. 유여의가 독살당한 후에, 여치는 그를 조나라로 보내어 조왕이 되게 한다. 그리고 여씨집안의 여인을 그에게 보내어 왕후로 삼게 한다. 유우는 이 여씨왕후에 대하여 별다른 감정이 없었다.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싫다고 할 수는 없었다. 그냥 여씨왕후는 높은 집에 살게 하면서, 자기는 좋아하는 후궁들과 잘 지냈다. 결국 여씨왕후는 화가나서 친정으로 돌아가고, 여후에게 자기 남편이 모반을 꾀한다고 고자질하게 된다.

 

모반은 최대의 범죄이다. 여치가 어찌 그냥 놔두겠는가. 그리하여 유우를 장안으로 불러서 구금하고는 음식을 주지 않는다. 유우는 꼼짝없이 산채로 굶어죽었다. 임종시에 그가 지은 시가 있다.

 

제여용사혜유씨위(諸呂用事兮劉氏危)

박협왕후혜강수아비(迫脅王侯兮强授我妃)

아비기투혜무아이악(我妃旣妬兮誣我以惡)

참녀난국혜상증불매(讒女亂國兮上曾不寐)

아무충신혜하고기국(我無忠臣兮何故棄國)

자결중야혜창천거직(自決中野兮蒼天擧直)

어차불가회혜녕소자재(於嗟不可悔兮寧騷自財)

위왕이아사혜수자연지(爲王而餓死兮誰者憐之)

여씨절리혜탁천보구(呂氏絶理兮託天報仇)

 

일곱째 아들, 회남왕(淮南王) 유장(劉長)

 

유장은 유방의 하룻밤사랑의 산물이다. 이전에 조왕은 장오(張敖)였다. 유방이 조나라를 지나갈 때, 장오는 황제에게 잘 보이기 위하여, 비를 유방에게 헌상했다. 사실 당시는 잠시 빌려주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유방은 아주 능력있는 남자여서 하룻밤만에 명중시켜 하루의 경작으로 수확이 있게 되었다. 조비가 회임을 한 것이다. 바로 이때 조나라의 국상인 관고(貫高)가 모반을 일으키니, 장오도 연루되게 된다. 그리하여 온 집안 사람들이 구금된다. 조비는 여후의 총애를 받는 심이기(審食其)를 통하여 여후에게 그녀가 황제의 골육을 가졌음을 알린다. 여후가 어떤 사람인가? 그냥 묻어두고 말아버린다. 조비는 희망이 없다고 보고, 유장을 낳은 후에 목을 매달고 죽어버린다. 유방은 이 아이가 가련하게 생각되어, 여후에게 주어 양육하게 한다. 여후는 그에게 비교적 잘 한 편이다. 두 살때 바로 회남왕에 봉해진다.

 

여씨들이 유씨집안의 자손들을 없앨 때, 유장은 거의 유일한 생존자였다. 대체로 그의 모친이 여후와 싸우지 않았던 점도 있고, 여기에 어려서부터 여후의 곁에서 자랐던 탓도 있을 것이다. 여씨들이 아무리 독하더라도, 십여년간 기른 정을 무시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외에 유장은 나이가 어려서 여씨들에게 위협적이지도 않았다.  여씨들이 죽고, 그가 성장하게 되자, 그는 옛날 일들을 복수하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심이기를 때려죽여버린다. 그리고 심이기를 죽여야할 세가지 이유를 말한다. 한문제는 막 등극하였으므로, 그의 죄를 묻지 않고 흐지부지해버린다. 그리하여 그는 더욱 오만불손하고 무서운 것이 없게 된다. 그가 나이가 어려서일 수도 있고, 강호의 험악함을 몰라서일 수도 있다. 자주 문제와 함께 가마를 타고 가서 사냥을 하곤 했다. 봉국으로 돌아온 후에, 한나라의 법령과 제도를 받아들이지 않고, 천자의 예의와 위엄을 갖추고자 하였다. 나중에는 아예 흉노, 민월의 우두머리들과 연합하여 반란을 꾀하기도 한다. 한문제는 차마 그를 죽이지 못하고, 그냥 그의 왕위만 폐지하고, 촉의 땅으로 유배를 보낸다. 그런데, 그는 유배가는 도중에 죽게 된다. 그의 죽음에 대하여는 두 가지 설이 전해진다. 한가지 설은 병으로 죽었다는 것이고, 또 한가지 설은 조정에서 사람을 보내어 죽였다는 설이다. 어쨌던 24살짜리 유장은 이렇게 생을 마감한다.

 

여덟째 아들, 연왕(燕王) 유건(劉建)

 

유건은 태어나면서부터 총명하고 몸매나 얼굴모습이 아들들 중에서 가장 유방을 닮았다. 그리고 가장 막내아들이기도 하다. 유방은 그를 매우 사랑했고, 연왕에 봉한다. 그러나, 그는 부친처럼 운이 좋지는 못했다. 사냥도중에 미친 여우에게 긁히는데, 이 여우는 광견병 독을 지니고 있었고, 유건에게 전염시킨다. 나중에 그는 광견병으로 목숨을 잃는다.

 

연왕은 아직 어려서 정식으로 왕후를 맞이하지도 못했다. 그러나, 그도 부친처럼 결혼도 하기 전에 자식은 하나 두었다. 유건이 죽은 후, 여치는 여씨들로 하여금 천하를 나눠갖게 하기 위하여, 비밀리에 사람을 보내어 아직 강보에 쌓인 유건의 아들을 죽여버린다. 그리하여 유건은 후손이 끊긴다. 그러다보니 작위도 없어지고, 연은 여씨의 천하가 되고 만다.

 

 

유방의 여덟 아들중에서 두 명이 황제를 지내고, 6명이 왕에 오른다. 고귀하기 이를데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제왕 유비와 한문제 유항이 정상적으로 천수를 마친 것을 제외하고는 나머지는 전부 여씨들에 의하여 직접, 간접으로 죽임을 당했다. 유방과 여치의 사랑에는 동시에 불공대천의 원한도 맺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