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국번(曾國藩)은 자마안(刺馬案)을 어떻게 처리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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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증국번)

2010. 10. 13.

 

: 조염(趙焰)

 

 

 

 

1872 3 2, 초봄의 금릉성은 날씨가 우중충했다. 전날 밤부터 날씨가 바뀐 것같다. 처음에는 약간 무덥더니, 나중에는 봄비가 질척거리며 내렸다. 그리고는 안개가 끼었다. 하늘은 어둑어둑하여 얇은 구름이 한 층 덮인 것같았다. 그래서 분명하게 보이지가 않았다. 눈앞의 사람도 자세히 보이지는 않을 정도였다. 그저 윤곽만 가늠할 수 있었다.

 

이는 아주 이상한 날씨이다. 양강총독부의 앞 도로는 평소에 사람들로 가득 넘쳤다. 지금은 행인들이 거의 없었다. 아마도 날씨 탓일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 집안으로 들어가서 봄추위를 피하고 있는 것같다. 바깥을 바삐 걸어가고 있는 사람들도 질척거리는 봄비의 무서움을 잘 알았다. 그들의 온 몸은 다 젖어 있었다. 특히 머리카락이 그러했다. 줄줄이 떨어지는 빗방울은 마치 수정과도 같았다. 비가 언제 내렸는가? 손을 뻗어보면 비가 내린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정말 이상한 일이다. 비는 눈의 시체라고도 할 수 있다. 얼마전의 눈과 비교해보자면, 비는 더욱 음습했고, 잘 느껴지지 않는다. 비가 어찌 눈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눈은 하늘의 정령이고, 눈이 나타나면, 전체 세계는 마치 춤을 추는 것같다. 그후에는 구름을 뚫고 해가 비친다. 그러나, 지금 눈은 죽었고, 눈의 혼령이 나타났다.

 

오전, 양강총독부에 있던 증국번은 가슴이 꽉 막힌 느낌이었다. 숨쉬는 것조차 힘들게 느껴졌다. 요즘 들어 증국번의 몸 컨디션은 계속 좋지 않았다. 아니다 그저 좋지 않은 것이 아니라 아주 나빴다. 특히 요즘같이 음습한 날씨에는 할 수 없이 입을 크게 벌려서 육지에 올라온 물고기처럼 크게 숨을 들이쉬고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증국번은 1870 12 12일 금릉에 도착했다. 이전까지 그는 직예총독으로 있었다. 직예총독의 위치에서 양강총독으로 옮긴 연유는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바와 같다. 그것은 조정에서 증국번이 천진교안(天津敎案)을 처리한 방식에 불만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양강총독인 마신이(馬新貽)가 칼에 찔려 사망했다. 조정은 양강의 상황을 잘 알고 있는 증국번을 금릉으로 돌려보냈는데, 이는 괜찮은 생각이었다.

 

증국번은 당연히 조정의 생각을 다 읽고 있었다. 비록 증국번이 천진교안을 처리하면서 모든 것을 서태후에게 보고하여 동의를 받았고, 심지어 대부분은 서태후 자신의 생각이었지만, 이로 인하여 분쟁꺼리가 생기자 조정은 속죄양을 찾았다. 이번의 속죄양은 증국번이었다. 속죄양이 된 증국번은 이번에 정말 도마위에 오른 고기처럼 되어 버렸다. 1870 6 24일 증국번은 보정에서 천진으로 교안을 처리하러 떠난다. 8 28일 증국번이 조정의 성지를 받아 다시 양강총독으로 옮겨올 때까지 겨우 2개월이었다. 이 짧은 2개월동안 증국번의 일세영명은 바닥에 떨어지고, 증국번은 인생의 무상함을 철저히 깨달았다.

 

금릉과 양강일대의 많은 관리들은 모두 증국번의 옛날 부하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예전의 상군출신은 아니지만, 증국번에 대하여는 뼛속으로부터 존경심을 품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의 보스가 북방에서 그다지 잘 지내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증국번이 금릉으로 돌아온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이들 옛 부하들은 양강총독부를 수선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자신의 보스가 마음 편하게 있을 수 있도록 하고자 했다. 이번에 금릉으로 되돌아온데 대하여 증국번은 만감이 교차했다. 증국번은 항상 금릉을 좋아했다. 이 도시는 기세가 넘쳐서, 언뜻 보기에도 호거용반의 땅이다. 특히 배를 타고 장강에서 다가가노라면, 이 지방의 힘과 기운을 특히 느낄 수 있다. 증국번은 금릉에 도착한 후, 양강총독부가 수선중이어서, 잠시 강녕순도아문에서 일을 보았다. 마차에서 가마에서 내려서부터 증국번이 처리해야할 사건은 바로 마신이 사건이었다. 그런데, 기이한 점은 증국번이 마신이 사건에 대하여 그다지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와 반대로 사건의 범인인 장문상(張文祥)을 감옥에 가둬 두기만 하고, 증국번이 시간을 내서 심문조차 하지 않았고, 관련 사건기록도 그냥 덮어두었다. 1달후 형부상서 정돈근이 강녕으로 오고나서야 비로소 증국번이 이 사건을 심리하기 시작한다. 정돈근도 호남 사람이다. 그는 도광15년의 한림이므로, 따져보자면 증국번보다도 몇 년 앞서는 편이다. 정돈근은 관료생애가 순탄치 못했다. 그는 계속 외부를 떠돌면서 비록 업적은 괜찮았지만 승진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동치원년에 이르러 비로소 북경으로 가서 시랑, 상서에 승진한다. 그는 사건처리에 있어서는 아주 경험도 풍부하고, 철면무사한 것으로 조정내에서 명성이 자자했다. 증국번이 마신이 사건에서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은 이유도 아마 어쨌던 마신이 사건은 양강지역에서 일어났으므로 양강의 관리가 처리하기 보다는 북경의 관리가 처리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해서일 수도 있다. 아마도 증국번의 조심성은 자신의 혐의를 피하고자 하기 위함인지도 모른다.

 

정식으로 사건에 개입한 후, 증국번은 자신의 추측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사건은 복잡다단했다. 동치9년 칠월이십육일(1870 8 22) 묘시, 양강총독 마신이가 교장에가서 병사들의 훈련을 검열했다. 마신이가 병사들의 말타고 활쏘는 것을 구경하고 나서 마신이는 자신의 아문으로 되돌아가고 있었고, 호위들이 그의 좌우에 붙어 있었다. 이때 짧은 옷을 입은 청나라병사복장의 사람이 총독의 앞으로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서, 인사를 드렸다. 호위들이 미처 막거나 묻기도 전에 짧은 옷을 입은 사람이 신발에서 단도를 꺼내어 마신이를 찔러갔다. 호위들은 졸지에 멍해졌다. 자객은 원래 도망칠 시간적 여유가 있었는데도, 마신이의 목숨이 거의 넘어가는 것을 보고서는 칼을 버리고 그 자리에서 체포된다. 마신이는 상처가 너무 심해서 다음 날 죽고 만다. 자객은 스스로, 장문상이라고 이름을 밝힌다. 46세이며, 하남 여양 사람이다. 일찍이 태평군 장군 이시현의 부하였으며, 마신이를 죽인데에는 3가지 이유가 있다고 하였다:

 

첫째, 마신이는 절강에서 순무를 지낼 때, 업무처리가 공정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장문상의 처가 자살을 한다. 장문상의 말에 따르면, 그가 태평군을 떠나 영파의 고향집으로 돌아간 후, 오병섭이라는 사람이 자신의 처를 차지하고, 자신의 재산과 돈을 차지한 것을 발견한다. 사람과 재물을 모두 잃은 장문상은 당시 절강순무로 있던 마신이에게 찾아가서 공정하게 사건을 처리해줄 것을 요청한다. 그러나 마신이는 이를 처리해주지 않았다. 장문상은 할 수 없이 영파부에 고발한다. 나중에 처는 그에게 되돌아왔지만, 재물과 돈은 오병섭에게 나눠주게 된다. 장문상은 화가 머리끝까지 솟아 처를 한 대 치게 되고, 처도 화가나서 자살을 하게 된다. 집안도 망하고 사람도 죽었는데, 장문상은 이 모든 책임이 마신이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비극은 마신이 때문에 생겼다고 여긴 것이다. 둘째, 장문상의 친구중에 해적이 있었는데, 마신이에게 붙잡혀 죽은 바 있다. 이 사건은 더더욱 장문상으로 하여금 마신이에 대한 복수를 하도록 결심하게 한다. 셋째, 마신이는 명을 내려 장문상이 개인적으로 개업한 전당포를 금지시킨다. 그리하여 장문상은 살아갈 길이 없게 된다. 이리하여 마신이에 대한 원한이 더욱 깊어졌다. 여러가지 원한이 쌓여, 장문상은 살인을 결심하고, 청나라병사 복장을 하고서는 마신이를 찔러죽이는데 성공한다.

 

이것만 보면 사건은 결론이 난 것같다. 마신이는 복수를 당해서 죽은 것이다. 마신이가 양강총독으로 있으면서 여러 사람들에게 원한을 샀다. 그리하여 습격을 당한 것이다. 증국번과 정돈근은 이 사건의 인과관계와 사후처리에 대하여 조정에 보고를 한다. 그러나, 조정은 최종 의사결정을 계속 미루고 있었다. 오히려 증국번과 정돈근에게 더욱 상세히 조사하라고 지시한다. 사건결과의 공개를 계속 미루게 되니, 민간에는 여러가지 소문이 나돌게 된다. 심지어 마신이가 죽은 것이 도색사건과 연관이 있다는 말도 나오고, 마신이와 장문상이 원래 결의형제인데, 마신이가 장문상의 처를 빼앗아갔기 때문에 피살된 것이라는 말도 나왔다. 이런 소문에 대하여 증국번은 그다지 개의치 않았다. 중국의 시정문화가 원래 그런 것이다. 아무 것도 아닌 일을 대단한 것처럼 꾸미는 경향이 있다. 민간의 창조능력은 이런 분야에서도 충분히 발휘된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증국번은 소문이 점차 정치화하는 것을 느끼게 된다. 마신이의 죽음을 상군(湘軍)과 연결시키는 것이다. 마신의가 강소순무 정일창의 아들 정혜형의 부하인 정병의 폭행치사사건을 심리하면서, 총독 순무와 불화하게 되고 결국은 죽임을 당했다는 것이다. , 상군이 마신이를 죽였다는 말이다.

 

소문이 이 지경에 이르자, 증국번은 더욱 불안해하고 가시방석에 앉은 것같았다. 이 소문의 배후에 무슨 음모가 있지 않을까 우려했다. 심지어 누군가 배후에서 조종하는 것이 아닌가도 생각했다. 마침내 조정의 회신이 내려왔다. 장문상이 해적의 지시를 받아 사사로운 원한을 풀기 위하여 칼로 찔렀다 다른 주모자나 공무자는 없다 이런 결론을 얻자, 증국번은 마음을 겨우 놓는다. 1871 4, 장문상은 능지처참을 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