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도지전(官渡之戰)의 수수께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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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삼국)

2012. 8. 15.

 

글: 불감왕언(不敢枉言) 

 

관도지전은 유명한 전투중 하나이다. 조조가 북방을 통일하는데 기념비적인 전투이다. 이것이 유명한 이유는 소수로 다수를 이겼고, 약한 군대를 이끌고 강한 군대를 이겼기때문이라는 것이 보편적인 견해이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이런 견해는 검토해볼 점이 있다. 조조가 승리를 취한 것은 인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혁신적인 무기에 있었다. 과학기술에 있었다.

 

<삼국연의>를 보면 원소는 70만의 병력을 동원하여 동서남북의 주위에 군영을 설치하고, 구십여리를 연결시킨다. <삼국지>에는 그러나, 당시에 원소가 공손찬을 병합하고, 사주의 땅을 편입시킨 후, 10며만의 무리를 이끌고 허창을 공격하러 갔다고 되어 있다.

 

<삼국연의>에는 조조가 병력 7만을 이끌고 나아가서 응전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삼국지>에는 명확히 기록하고 있다. 당시 조조의 병력은 1만이 되지 않았고, 그중 부상자가 열에 둘,셋이었다. 1만도 안되는 병력에 20-30%의 부상병이 있는데, 어떻게 싸운단 말인가? 설사 원소의 부대가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움직이지 않고 있다고 하더라도, 조조의 군대가 치고 들어가서 이기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그러나, 조조의 군대는 완승을 거둔다.

 

배송지(裴松之)가 <삼국지>에 주석을 달면서, <세어>의 기록을 인용했다: "진류(陳留)의 효렴(孝廉)인 위자(衛玆)는 집안재산을 태조(조조)에게 내주어 거병할 수 있게 해준다. 무리가 5천명이었다." 조조는 경성을 떠나(동탁암살미수후), 고향으로 돌아가서 거병할 때 인원이 오천명이었다. 나중에 황건적을 격파하고 청주병(靑州兵)을 얻는다. 그리고 여포, 장막, 장수등을 병합한다. 그들의 병력도 소수는 아닐 것이다. <삼국지>에서는 투항한 병졸이 삼십여만이고, 남녀백여만명이라고 하였다. 그중 정예들을 추려서 청주병이라 하였다. 비록 삼십만에서 일부 정예만 봅았다고 하더라도, 그 수는 적지 않을 것이다.

 

배송지는 '관도지전'을 고증하면서 진수의 원문에 3가지 의문점을 제기한다: 첫째, 조조가 거병할 때 5천명이었고, 황건적의 투항한 병졸이 삼십여만이며, 그 후에 많은 수의 부대를 병합했는데, 비록 전투에 손상이 있다고 하러도 이렇게 적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하물며 서로 대치하는 것은 예봉을 꺽는 결전과는 다르다. 원소의 군대 십여만이 동서로 군영을 맞붙여 수십리나 이어져 있는데, 조조의 군이 군영을 나누어 대치하였다면 그 병력도 적은 수는 아니었을 것이다. 둘째, 만일 원소의 군대가 조조의 10배였다면, 적의 포위망은 물샐 틈이 없어야 한다. 그런데 조조는 서황을 파견보내 원소의 식량운반수레를 탈취하고, 조조는 친히 병력을 이끌고 순우경의 본거지를 공격한다. 오가는데 자유로웠고, 원소의 원군을 만나지도 않는다. 원소의 병력이 이런 소규모의 전투조차도 제대로 신경쓰지 않았다면, 이는 원소가 마음은 있으나 힘이 미치지 못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조조의 병력이 소수는 아니었을 것이다. 셋째, 여러 책에서 모두 말하는 바와 같이, 조조군이 원소군 7만 혹은 8만명을 갱살한다. 그러나, 8만명이 산지사방으로 흩어져 도망친다면 8천명 정도의 인원으로 포로로 잡고 제어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만일 8만명이 모두 목을 빼서 칼로 쳐달라고 하더라도 8천명이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배송지의 3가지 의문점이외에, 필자는 한 가지를 추가하고 싶다. 관도에서 대치할 때, 조조는 장패를 빼내서 청주를 공격하여 함락하게 하였다. 우금을 강위에 주둔하게 한다. 조조는 다시 관도에서 대치하는 틈을 타서 친히 병력을 이끌고 유비를 정벌하고 관우의 항복을 받아내며, 창희(昌豨)를 격파한다. 만일 <삼국지>에서 얘기하는 것처럼 조조의 '병력이 1만명이 되지않았다"면 유비를 정벌하는 것만도 승리를 얻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것은 또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삼국지>의 작자 진수는 서진의 사학자이고, 진은 위를 승계하여 천하를 차지한다. 그래서 위나라를 정통으로 취급하고, 촉한과 동오를 번진으로 보았다. <삼국지>를 편찬할 때, 진수는 많은 서적과 이야기를 참고하였을 것이다. 그중에 '병력이 만명이 되지 않는다"는 내용도 있었을 것이다. 사서는 정치를 위하여 봉사하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하자가 없을 수 없다.

 

전쟁의 실제상황을 분석하면, 필자의 생각으로, 조조의 승리는 주로 그가 연구개발한 신식무기 발석거(發石車)에 있었던 것같다. 기실 발석거는 이전부터 있었다. 이것을 새로운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정확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조조는 이 무기를 개선한다(연의에서는 개선한 사람이 유엽이라고 하나, 고증할 수 없다). 그리고, 대규모로 배치하여 진지에 돌연 공격을 가한다. 그 효과는 대단했을 것이다. <삼국지>에서는 "격소루, 개파(擊紹樓, 皆破)"(소루를 치니 모두 부서졌다)라고 하였다. 칼,창,검,극의 육박전 시대에, '발석거'는 첨다무기라 아니할 수 없다. 통사적인 무기레 있어서 그 위력은 엄청나다. 적이 이름만 들어도 간담이 서늘해져 도망쳤을 것이다. 제갈량이 연노도 이에는 비견할 수 없다. 그래서 원소군은 이를 "벽력거(霹靂車)"라고 불렀다.

 

관도지전에서 조조는 병력에서 원소만 못했을 수 있다. 그러나, 무기에서는 원소보다 뛰어났다. 이는 한 사람은 창을 들고 한 사람은 아무런 무기도 들지 않은 것과 같다. 근육이 아무리 발달되었더라도, 무공이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결과는 일목요연하다. 마지막 결론은 배송지가 관도지전에 대하여 평가한 말로 대신하겠다:  

 

"기술자욕이소견기, 비기실록야(記述者欲以小見奇, 非其實錄也)"

기록하는 사람들이 적다고 하여야 기이하다고 여겨서 적게 기록한 것이다. 이것은 사실을 기록한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