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국번(曾國藩)의 일생동안의 관직(官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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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증국번)

2012. 9. 19.

글: 욱연사요희(郁然思妖姬) 

 

가경16년(1811년)

  [십월 십일일(11월 26일, 양력)]: 해시출생(亥時出生)

  * 해시: 21:00-23:00

 

도광13년(1833년) 23세

  현시(縣試) 합격하여 수재(秀才)가 됨.

  * 현시: 현시는 과거시험이 첫단계 시험이다. 매년 음력2월에 시행한다. 지현(知縣)이 시험관이 되고, 현시합격자는 부시(府試)에 참가한다. 부시는 둘째단계 시험이다. 매년 음력 4월에 거행한다. 지부(知府)가 시험을 주재한다. 부시의 합격자는 원시(院試)에 참가한다. 원시는 셋째단계 시험이다. 원시는 제독학정사(提督學政使)가 시험을 주재한다. 원시에 합격하면 부학(府學), 주학(州學) 혹은 현학(縣學)에 입학하여 생원(生員)이 된다.

  * 수재: 별칭은 무재(茂才). 명청 양대에 생원을 통칭하는 말이다.

 

도광14년(1834년) 24세

 향시(鄕試)중 제삼십육명(第三十六名) 거인(擧人)이 됨

 * 향시: '대비(大比)'라고도 부름. 3년에 1회 개최. 자(子), 묘(卯), 오(午), 유(酉)년의 음력8월에 거행하는데 이를 '정과(正科)'하고 한다. 황제의 즉위나 황실의 경사가 있어 시험을 치는 경우에는 "은과(恩科)"라 한다. 향시는 성회도시에서 거행된다. 황제가친히 파견한 정부주고관(正副主考官)과 동고관(同考官)이 주재한다. 수재신분의 부,주,현학의 생원, 감생, 공생은 모두 참가한다. 본성의 순무가 "감림(監臨)"이 되며, 시험합격자를 거인이라 한다. 1등을 하면 "해원(解元)"이라 부른다.

 * 거인: 향시합격자를 부르는 명칭이다. 속칭은 효렴(孝廉)이다. 거인이 되면 관직에 오를 자격이 생긴다.

 

도광18년(1838년) 28세

 회시(會試)에 합격 제삼십팔명(第三十八名) 공사(貢士)

 전시(殿試)의 삼갑(三甲) 제사십이명(第四十二名), 사동진사출신(賜同進士出身)

 조고(朝考) 일등(一等) 제삼명(第三名). 도광은 제이명(第二名)으로 삼음.

 [오월 초이일(양력 6월 23일)]

 한림원(翰林院) 서길사(庶吉士)를 받음.

 

 * 회시: 공사를 뽑는 시험. 전국의 거인들을 모아서 시험을 친다는 의미임. 응시자는 각성의 거인 및 국자감의 감생이다. 향시후 다음 해 삼월 북경내성의 공원(貢院)에서 거행한다. 회시는 3장으로 나뉘고 삼일이 1장이다. 합격자는 공사라고 부르고 1등을 "회원(會元)"이라 부른다.

 * 공사: 회시에 합격하면 공사가 된다.

 * 전시: 과거시험중 가장 높은 단계. 어시(御試), 정시(廷試)라고도 한다. 즉 황제가 친히 출제하는 시험이다. 회시의 합격자들이 참여할 수 있다. 시험 전에 복시(復試)를 치르고, 복시후 사월하순에 전시를 진행한다. 전시를 통과한 자는 진사(進士)가 된다.

 * 동진사출신: 청나라때 매번 과거시험을 마치면 합격자수는 100명에서 400여명까지 서로 달랐는데, 삼갑(三甲)으로 나눈다. 제1명에서 제60명은 진사(進士)라고 부르며 1갑이 되고, 여기서 앞의 3사람을 장원(狀元), 방안(榜眼) 및 탐화(探花)라 부른다. 진사급제를 하사한다(進士及第); 제61명부터 제120명을 2갑이라고 하며, 이갑의 사람들은 진사출신을 하사한다(進士出身). 제121명부터 마지막까지는 3갑이 되며, 3갑의 사람이 가장 많다. 동진사출신을 하사한다(同進士出身). 동진사출신은 기실 준진사(準進士)인 셈이다. 진사의 예비인원이다. 진사보다 낮으나 거인보다는 높다. 선비들이 이부(吏部)에 등록되는 국가법률적 의미의 관원이 되려면 반드시 전시에서 최소한 '동진사출신'이 되어야 한다.

 * 조고: 과거에서 진사출신이 된 후, 예부는 명부를 한림원 장원학사(掌院學士)에게 보내고, 다시 황제에 주청하여 보화전(保華殿)에서 다시 시험을 친다. 이때 대신을 특별히 파견하여 시험답안을 검토하게 하는데 이를 조고(朝考)라 한다. 시험후 조고의 성적과 전시 및 복시(회시후의 복시)의 성적을 종합하여 가장 우수한 자를 서길사(庶吉士)로 삼고 나머지는 주사(主事), 중서(中書), 지현(知縣)등의 직을 받는다.

 * 한림원: 한림원은 국사의 편찬을 책임지고, 기거주(起居注)를 쓰고, 황제에 경서를 강연하고, 책립, 봉곡, 제문, 비문, 고의제도를 초안하고, 문서를 교정하며, 황제가 묻는 것에 자문을 한다; 장관은 장원학사이고 그 아래애 시독학사(侍讀學士), 시강학사(侍講學士), 시독, 시강, 및 수찬(修撰), 편수(編修), 검토(檢討)와 실습성격의 서길사가 있다. 모두 한림(翰林)이라 칭한다. 과거출신자가 아니면 맡을 수 없다.

 * 서길사: 서상(庶常)이라고도 한다. 한림원내의 단기적 직위이다. 진사 일갑(一甲)은 한림수찬, 편수를 제수받으며, 이갑, 삼갑 중에서 나이가 젊고 재능이 출중한 자를 뽑아서 한림원의 서길사를 제수한다. 목적은 그들이 먼저 한림원내에서 학습하고 다시 각종 관직을 받게 하기 위함이다.

 

도광19년(1839년0 29세

 관직에 변화없음.

 

도광20년(1840년) 30세

 [사월 십칠일(양력 5월 18일)]

 서길사 산관(散館), 한림원 검토(檢討)를 제수받음.

 [구월(양력 10월)]

 황명으로 순천부(順天府) 향시(鄕試) 마감관(磨勘官)에 파견됨

 

 * 서길사 산관: 서길사는 일반적으로 3년임기이다. 3년후 다음번 회시 전에 시험을 치는데 이를 산관이라고 한다. 성적이 뛰어나면 원래 이갑은 편수를 제수받고, 원래 삼갑은 검토를 제수받는다; 이때부터 정식으로 한림이 된다. 다음번때 각부이 주사 혹은 지현으로 간다.

 * 검토: 국사의 편찬을 관장하며, 한림원에 예속된다. 종칠품(從七品)이다. 삼갑 동진사출신의 서길사중 남아있게 되는 자가 맡는다.

 * 향시, 회시는 공고가 난 후, 시험지의 내용을 검사하고 확인하는 관직이다. 황제가 파견하여 이 일을 담당하게 한다.

 

도광21년(1841년) 31세

 [십월 이십칠일(양력 12월 9일)]

 충국사관협수관(充國使館協修官)

 

 * 한림원에는 국사관이 있다. 국사의 편수를 책임지는데, 총재(總裁), 청문총교(淸文總校), 제조(提調), 총찬(總찬), 찬수(찬修), 협수, 교대(校對)등의 관직이 있는데, 모두 겸관(兼官)이다.

 

도광22년(1842년) 32세

 관직 변화없음

 

도광23년(1843년) 33세

 [삼월 십사일(양력 4월 13일)]

 한림원 시강으로 승진

 [육월 십이일(양력7월 9일]

 사천향시(四天鄕試) 정고관(正考官)에 임명됨.

 [십일월 십이일(양력 1844년 1월 1일)]

 충문연각교리(充文淵閣校理)

 

 * 시강: 한림원 관직의 하나. 종오품(從五品). 임무는 문사를 수찬하는 것.

 * 사천향시 정고관: 향시는 3년에 1회씩 열린다. 황제가 정부주고관을 명하여 주재하게 한다.

 * 문연각 교리: 한림원 문연각은 궁내에 도서를 보관하는 장소이다. 영각사(領閣士), 직각사(直閣士), 교리, 내무부사원필첩식(內務府司員筆帖式)등이 있다. 모두 겸임이다.

 

도광24년(1844년) 34세

 [사월 이십일(양력 6월 9일)]

 충한림원교습서길사(充翰林院敎習庶吉士)

 [십이월 초칠일(양력 1845년 1월 14일)]

 전보한림원시독(轉補翰林院侍讀)

 

 * 교습서길사: 서길사는 서상길사라고 한다. 그래서 그 학관을 서상관이라 부른다. 서상관에는 만주어,한어교급 2명을 둔다. 속칭 총교습이라고 한다. 시독학사 이하 여러 명이 나누어 가르치는데 소교습이라 한다. 각각 서길사의 만주어, 한어과정을 훈련시킨다.

 * 시독: 한림원 관직의 하나. 시강과 함께 종오품(從五品)이고 시강보다 한단계 높다.

 

도광25년(1845년) 35세

 [삼월(양력 4월)]

 회시동고관(會試同考官)으로 파견됨

 [오월 초이일(양력 6월 6일)]

 첨사부우춘방우서자(詹事府右春坊右庶子)로 승진함

 [육월(양력 7월)]

 좌서자(左庶子)로 전보됨

 [구월 이십사일(양력 10월 24일)]

 한림원 시강학사로 승진함.

 [십이월 십이일(양력 1846년 1월 9일)]

 일강기거주관(日講起居注官)에 보임됨

 [십이월 이십이일(양력 1846년 1월 19일)]

 문연각 직각사가 됨

 

 * 동고관: 회시에서 주고관 혹은 총재를 도와 시험답안지를 검토하는 관직

 * 첨사부: 첨사부는 원래 태자의 궁내사무를 관리하는 아문임. 그러나 옹정이후 태자를 두지 않았으므로, 문학시종과 한림원관리들을 승진시켜 보내는 아문으로 경사문장의 일을 관장함. 정사논의에 참여할 수도있음. 주관은 첨사이고 부관은 소첨사임. 부내에는 좌춘방, 우춘방사경국으로 나뉘고, 좌우춘방에는 각각 대학사를 두고, 그 아래 서자, 중윤, 찬선등의 관직을 둠.

 * 좌서자: 우춘방과 동일한 직급. 다만 청나라때 좌(左)를 높게 쳤으므로 우춘방보다 좌춘방이 한단계 높다.

 * 시강학사: 한림원 관직으리 하나. 종사품(從四品). 전부(典簿), 시조(侍詔)등을 관할함. 주요임무는 문사수찬, 편수 및 검토이다.

 * 일강기거주관: 황제정무의 기거를 모시고, 조회, 어전, 어문청정, 전시, 어경연, 외번내조, 대열, 명절, 출사명장, 개선영로 및 세구중수등 중대사건을 기록한다: 황제의 황릉방문, 사냥, 주필원원(駐蹕園苑), 순수방악(巡狩方岳)때, 기거관은 모두 따라간다; 주로 황제에게 경사를 얘기하고 황제의 질문에 대답하며, 황제의 언행을 기록하는 관원이다.

 * 문연각 직각사: 문연각 관직의 하나로 겸임이다.

 

도광26년(1846년) 36세

 관직의 변화없음.

 

도광27년(1847년) 37세

 [육월(양력 7월)]

 내각학사(內閣學士)로 승진, 겸예부시랑함(兼禮部侍郞銜)

 고시한교습열권대신(考試漢敎習閱卷大臣)으로 파견됨

 [십월(양력11월)]

 무회시정총재(武會試正總裁)로 파견됨

 다시 전시독권대신(殿試讀卷大臣)으로 파견됨

 

 * 내각학사, 겸예부시랑함: 청나라때 내각은 황제이하의 정권중심이었다. 전국정무를 관장하는 최고관청이다. 주요관리는 대학사, 협판대학사, 내각학사, 시독학사, 시독, 전적(典籍)등의 관직이 있다. 내각학사는 관레에 따라 예부시랑의 관직을 겸직한다. 종이품(從二品)이다. 주로 조명과 주장을 전달하고 정사에 의견을 발표한다; 증국번은 종사품 시독학사에서 종이품 내각학사로 4급이나 뛰어서 승진했다. 37세에 관직이 종이품에 이르렀다는 것은 대청 이백년이래 호남출신 관리로서는 첫번째 인물이다.

 * 고시한교습열권대신: 열권관이다. 규정에 따르면 응시자의 시험지를 읽고 우열을 평가한다. 황제가 파견한다.

 * 무회시 정총재: 매 3년에 1번씩 경성에서 거행되는 무과고시이다. 정총재는 주고관이다. 황제가 친히 파견한다.

 * 전시에는 열권관이 8명이 있다. 열권일에 돌아가며 시험답안을 잃고 평정한다. 황제가 친히 파견한다.

 

도광28년(1848년) 38세

 관직에 변화없음.

 

도광29년(1849년) 39세

 [정월 이십이일(양력 2월 14일)]

 예부우시랑(禮部右侍郞)으로 승진함

 [팔월 초이일(양력 9월 18일)]

 병부우시랑을 겸임함.

 [팔월 이십오일(양력 10월 11일)]

 종실거인복시열권대신으로 파견됨

 [구월 십칠일(양력 11월 1일)]

 순천향시복시열권대신으로 파견됨

 [십월 초사일(양력 11월 18일)]

 순천무향시시교사대신(試較射大臣)으로 파견됨

 

 * 예부우시랑: 중앙6부는 이부, 호부, 예부, 형부, 병부, 공부로 나뉘어짐. 예부는 명목상 국가전례, 학교, 과거등 사무를 관장하고 있으나, 청나라때는 그저 전의(典儀)만을 관장하고 예교의 권한이 없었다; 예부는 만,한 상서 각 1인을 두는데 종일품(從一品)이다. 부직은 좌,우시랑인데 만,한 각 1인씩 두며 종이품이다. 예의절차와 학교공거등의 일을 관장한다.

 * 병부: 명목상 전국최고군사기구이다. 실제로 청나라때 병부의 권한은 한계가 있었다. 그저 녹영병적과 무관승직 전보등의 일을 관장했다. 군대지휘권은 없었다. 병부의 주관으 상서이고 부직은 좌,우시랑인데 증국번은 본직이 예부우시랑이고 병부우시랑의 직위는 겸직했다.

 * 시교사대신무향시에 교사를 나누어 관장하는 시험관.

 

도광30년(1850년) 40세

 [사월 십칠일(양력 5월 28일)]

 회시복시열권대신으로 파견됨.

 [사월 이십구일(양력 6월 9일)]

 조고열권대신으로 파견됨

 [육월 초사일(양력 7월 12일)]

 공부좌시랑을 겸직함.

 [육월 십사일(양력 7월 22일)]

 조고발공열권대신으로 파견됨

 [팔월 이십일일(양력 9월 26일)]

 고시국자감학정학록열권대신으로 파견됨

 [구월 십팔일(양력 10월 22일)]

 재궁전공봉책보대신으로 파견됨

 [십월(양력11월)]

 병부좌시랑을 겸직함

 

 * 공부: 전국의 수리토목공사를 관장함. 주관은 상서이고 부직은 좌,우시랑이다. 증국번은 좌시랑을 겸직했지만, 본직은 여전히 예부우시랑이었다.

 * 재궁전공봉책보대신:황제의 존소를 올려 칭송할 때, 자주 책보를 올린다. 이 직은 도광재 재궁을 무릉에 안장할 때 정국번이 봉보대신이었다.

 * 청나라때는 '좌'가 높았다. 그래서 좌시랑은 우시랑보다 한단계 높다. 증국번은 이전에 병부우시랑을 겸직했는데, 이제 좌시랑이 되었으니 관직이 더 올라간 것이다.

 

함풍원년(1851년) 41세

 [오월 이십육일(양력 6월 25일)]

 형부좌시랑을 겸직함

 [팔월(양력 9월)]

 순천향시수검대신으로 파견되고 겸섭형조(兼攝刑曹)

 [십월 십이일(양력 12월 4일)]

 순천무향시 대주고로 파견됨.

 

 * 형부: 전국의 형법사건을 관장한다. 매년 도찰월, 대리사와 여름과 겨울에 각 성이 보고한 대형형사사건, 중요사건을 심리한다. 주관은 상서이고 부관은 좌,우시라이며, 종이품이다.

 * 수검대신 겸섭형조: 향시에 응시하는 자의 과거장소 출입을 검사하고, 부정행위를 방지하며 위반자에게 형벌을 내리는 직이다. 황제가 직접 파견한다.

 * 무향시대주고: 무향시의 주고관이다.

 

함풍2년(1852년) 42세

 [정월 이십사일(양력 3월 14일)]

 이부좌시랑을 겸직함

 [삼월 초팔일(양력 4월 26일)]

 회시 수검대신으로 파견됨

 [육월 십이일(양력 7월 28일)]

 강서향시 정고관으로 임명됨

 강태부인(江太夫人) 사망.

 [칠월 이십오일(양력 9월 8일)]

 부고를 듣고 고향으로 장례식에 참여하기 위하여 돌아감.

 [십일월(양력 12월)]

 상유(上諭): 방동판리본성단련향민수사토비제사무(幇同辦理本省團練鄕民搜査土匪諸事務) 

 

 * 이부: 육부의 우두머리이다. 주로 문관의 선발, 고찰, 임면, 승진강등, 이동 및 봉훈(封勳)등의 사무를 관장함. 그러나 고급관원은 군기처에서 황제의 뜻을 받들어 임면함. 그래서 이부는 중,하급관리만을 관리함. 주관은 상서이고 부직은 좌,우시랑임. 종이품; 이제 증국번은 예부우시랑으로 병,공,형,이의 4부시랑을 겸직하게 되었다.

 * 증국번은 강서향시 정고관으로 임명된 같은 날, 모친 강태부인이 별세한다. 사십이일 후, 이미 안휘 태화현경의 소지역에 도착한 증국번은 모친의 사망소식을 듣는다. 즉시 길을 바꾸어 고향으로가서 장례를 치른다.

 * 법도에 따르면, 조정관리는 부모친이 사망하면 누구든지 여하한 관직이든지 그 소식을 들은 날 반드시 조적으로 돌아가서 27개월간 수제(守制)한다. 수제기간동안 과거를 보거나, 결혼할 수도 없고, 접대도 거절해야한다. 현직관리는 반드시 이직한다. 이를 정우(丁憂)라 한다. 증국번이 고향에서 모친의 수제를 할 때, 태평군이 상서(호남서부)를 치고 들어와서 장사를 포위하고, 악주를 함락시켜 호남을 교란시키고 있었다. 호남순무는 상유를 받들어, 증국번이 호남의 지방인정을 잘 알고 있으므로 그에게 태평군을 소탕하는 것을 도와달라고 한다. 처음에 증국번은 그저 집안에서 수제하고자 했으나, 나중에 곽숭도가 힘껏 권하여 나서게 된다. 장사로 가서 순무 장량기를 만난다. 그리고 정식으로 '방판단련"의 직을 받는다. 일생의 업적이 이 때부터 시작된다. 그 후, 증국번은 향용을 모집하여, 상군을 창건하고, 성을 나가서 작전을 벌인다. 십여년 후에는 금릉을 함락시키고, 태평천국을 소멸시킨다. 이리하여 '동치중흥'의 제일인이 된다; 상군은 용맹하고 사납기로 전국에 이름을 떨친다. 그리하여 나중에 '천하에 상군이 없으면 군대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말이 나오게 하였다.

 

함풍3년(1853년) 43세

 관직에 변화없음

 계속 태평군과의 전투와 향용을 훈련시킴

 

함풍4년(1854년) 44세

 [윤칠월 초구일(양력 9월 1일)]

 악주를 함락시키고 삼품정대(三品頂戴)를 하사받음.

 [팔월 이십삼일(양력 10월 14일)]

 무창을 함락시키고, 이품정대를 하사받고, 서리호북순무(署理湖北巡撫). 상대화령(賞戴花翎)

 [구월 초일일(양력 10월 22일)]

 상병부시랑함(賞兵部侍郞銜), 무용서리호북순무

 

 * 삼품정대: 관리등급을 구분하는 모자의 장식. 통상적으로 황제는 관직이 없는 사람에게 이를 달 수 있게 한다. 그리고 낮은 직급의 관직에 더욱 고급의 정대를 달게 하기도 한다. 증국번은 원래 정이품시랑이나, 수제로 이직하여, 관직이나 품계가 없다. 이번에는 태평군을 악주에서 이겼으므로 삼풍정대를 내린 것이다.

 * 서리호북순무: 향용을 이끌고 호북의 성성 무창을 함락시킨다. 황제는 증국번에게 서리호북순무의 직을 내린다. 즉 호북이 최고행정장관이 된 것이다. 순무(巡撫)의 직은 종이품이다. 그러나 관례에 따르면, 병부시랑과 우부도어사(右副都御史)의 관직을 겸임하므오, 정이품이 된다.

 * 화령: 청나라때의 예모(禮帽). 정주(頂珠)의 아래에 영관(翎管)이 있다. 여기에는 깃털을 꽂을 수 있다. 화령은 공작의 깃털로 만든다. "안(眼)"은 공작깈털상의 눈모양의 원을 말한다. 하나이 원은 1안이다. 화령은 청나라때 등급과 품계를 구분하는 표지이다. 일반 관원이 달 수가 없었다. 그 역할은 등급을 나타내고, 군공을 드러내는 것이다. 화령은 단안, 쌍안, 삼안으로 구분되는데, 삼안이 가장 존귀하다. 청나라초기, 화량은 고위직의 왕공귀족 특유의 모자장식이었다. 나중에 건륭제는 군공이 있는 자들도 달 수 있게 한다. 황제가 신하에게 화령을 내리는 것은 아주 신중하게 했다. 건륭에서 청말까지 삼안화령을 받은 대신은 부항, 복강안, 화림, 장령, 희은, 이홍장, 서동의 7명에 불과하다. 쌍안화령을 받은 자도 20여명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이는 당시로서는 천고의 은총이다. 이때 정국번은 일안화령을 받았다. 나중에 금릉을 함락시킨 후 쌍안화령을 받는다.

 * 서리호북순무의 조서를 받은 후, 증국번은 이 직이 태평군토벌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고, 모친상중이라며  사양한다. 중앙에서도 비적토벌의 임무가 중요하고 상군이 동으로 내려간 후에는 실제로 권한을 행사할 수도 없으므로 7일후에 명령을 거둔다. 그리고 증국번에게 병부시랑의 허직을 내린다. 직위나 직권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 실제로는 한족을 방비하는 점이 있었다. 증국번은 상군의 총사령관이므로 지방의 권력까지 장악하는 것은 바람직스럽지 않았다.

 

함풍5년(1855년) 45세

[구월 이십칠일(양력 11월 6일)]

병부우시랑을 제수받음

 

 * 병부우시랑: 수제가 이미 기간을 넘겼으므로 증국번에게 병부우시랑의 직을 내림. 그러나 그는 외부에서 군무에 종사하고 있으므로 심조림(沈兆霖)이 겸서(兼署)함.

 

함풍6년(1886년) 46세

 관직에 변화가 없음.

 

함풍7년(1857년) 47세

 [이월 초사일(양력 2월 27일)]

 죽정공(竹亭公)이 사망함.

 [이월 이십일일,(양력 3월 16일)

 동생 증국화(曾國華)가 서주병영에서 고향으로 돌아가서 장례를 치름.

 [육월 초육일(양력 7월 26일)]

 병부시랑의 직을 내놓고, 잠시 고향으로 돌아가 수제함.

 

 * 죽정공: 증인서(曾麟書). 자는 죽정. 아들을 5명 둠: 증국번, 증국황, 증국화, 증국전, 증국보.

 

함풍8년(1858년) 48세

 [육월 초삼일(양력 7월 13일)]

 병부시랑관방판리절강군무로 임명함.

 

 * 이해 오월, 태평군이 절강으로 들어간다. 상군은 명을 받들어 절강을 지원한다. 그러나 군대를 통솔할 장수가 적합하지 않아, 증국번에게 탈정(奪情)하고 절강의 군무를 맡게 한다. 정우인 연고로 여전히 병부시랑직을 내린다. 증국번은 명을 받들어 먼저 장사로 가고 나중에 무창으로 간다. 낙병장, 좌종당, 호림익등과 만나서 병력진공의 방책을 논의한다. 나중에 강서로 간다.

 

함풍9년(1859년) 49세

 관직에 변화가 없음

 군에서 군대를 지휘함.

 

함풍10년(1860년) 50세

 [사월 이십일(양력 6월 9일)]

 병부상서의 직을 내리고, 서리양강총독(署理兩江總督)을 내림.

 [육월 이십사일(양력 8월 10일)]

 양강총독을 내리고 흠차대신(欽差大臣)에 임명하여, 강남군무를 독판하게 함.

 [팔월 초일일(양력 9월 15일)]

 모든 안휘남부의 군무를 총지휘함.

 

 * 양강총독: 청나라초기에 전략적으로 분구하여 8대총독을 둠. 즉, 직예총독, 양강총독, 호광총독, 양광총독, 섬감총독, 민절총독, 사천총독, 운귀총독. 광서31년 동삼성총독을 추가함. 총독의 관할구역은 1개성 내지 수개 성이다. 총독은 도찰원 우도어사의 관직을 겸하여 정이품이다. 여기에 병부상서직은 종일품이다. 옹정제이후, 두 관직을 겸임하는 것이 관례가 된다; 양강총독의 정식관명은 총독양강등처지방제독군무,양향,조강,통할남하사무로 강소, 안휘 및 강서 3개성의 군민정무를 담당한다. 청나라초기 강소와 안휘 양성의 관할지가 모두 강남성에 속했으므로 이 총독이 관할하는 것은 강남과 강서이다. 그래서 양강총독이라고 불렀다. 이때, 청나라정부의 주력부대인 강남대영이 홍수전에게 격파당하여 상군이 태평군과의 전투에서 주력부대가 된다. 정국번이 양강총독을 맡은 것은 태평군과 전투를 벌이는 모든 무장부대의 최고총사령관이 되었다는 것이다. 2개월후 양강총독의 직을 실제로 받고, 흠차대신의 신분으로 강남군무를 독판한다.

 

함풍11년(1861년) 51세

 [구월 십구일(양력 10월 22일)]

 태자소보(太子少保)의 직을 내림.

 [십월 십팔일(양력 11월 20일)]

 상유: 강소,안휘,강서 삼성 및 절강의 모든 성의 군무를 통할하게 함. 4개성의 순무제진이하 각관리는 모두 그의 휘를 받게 됨.

 

 * 역대에 태사(太師), 태부(太傅), 태보(太保)를 '삼공(三公)'이라 부르고 정일품이다; 태자태사, 태자태부, 태자태보는 '삼사(三師)'라 부르며, 종일품이다; 소사, 소부, 소보는 '삼고(三孤)'라 부르며 종일품이다; 태자소사, 태자소부, 태자소보는 '삼소(三少)'라 부르며 정이품이다. 문무대신중 공헌이 뛰어난 자에 대하여 황제가 특별히 추가해주는 작위이다. 이는 특수한 영예이다. 그러나 이들 관직은 모두 추가되는 직위이고 허직이며 실질적읜 권한은 없다. 그리고 정원도 없이 그저 은총을 표시하는 것이다. 태자소보는 태자를 가르치는 관직이나, 태자는 항상 동궁에 있어서 '궁보(宮保)'로 간칭한다. 그러나, 청나라는 옹정이후 태자를 두지 않아서, 이는 영예직에 불과했다.

 

 * 통할강소,안휘,강서삼성, 병절강전성군무: 서태후는 양궁황태후의 명의로 양강총독 증국번이 정식으로 강남4성을 절제하도록 위임한다. 군사지휘대권을 내리고, 4개성의 순무, 제독, 총병이하 모든 문무관리는 그의 지휘를 받게 하였다. 1 사람이 4개성의 군무를 지휘하는 것은 청나라조정이 한족대신을 기용하는 첫 선례가 된다. 증국번은 양강총독으로 강소, 안휘, 강서의 3개성의 문무관리는 지휘했지만, 절강성의 군무는 이치대로라면 민절총독이 지휘해야 한다. 조정은 절강에서 민절을 빼내어 증국번에게 맡겼다. 이것은 특례이다. 동남4성은 당시 주요 전쟁터였고, 조정의 세금의 주요 공급지였다. 매년 중앙에 보내는 돈이 전국의 절반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중앙정부에 있어서건 동남의 전투에 있어서건 이것은 모두 비상한 조치이다. 이에 대하여, 증국번은 조정에 명령을 회수해줄 것을 청한다. 절강군무는 좌종당에게 넘겨서 처리하도록 요청한다. 증국번에 따르면, 지위가 높고 권력이 크면 하루도 편한 날이 없다는 것이다 조정은 허락하지 않는다. 증국번은 다시 사임한다. 그러나 황제는 군정이 중요하므로 더 이상 사임하지 말라고 하고, 증국번에 대한 신뢰를 보인다.

 

동치원년(1862년) 52세

 [정월 초일일(양력 1월 30일)]

 양강총독 협판대학사

 [칠월 초육일(양력 8월 1일)]

 겸서안휘순무(安徽巡撫)

 

 * 청나라의 내각에는 삼전삼각(三殿三閣) 대학사를 둔다. 만,한 각 2명으로 정일품이다. 협판대학사 2명을 두는데 만, 한 각 1인으로 종일품이다. 전각명칭은 부가하지 않느다. 대학사의 부관이다. 대학사의 직책은 명목상 황제를 보조하고 기요사무를 처리하는 것이나 건륭후기부터 군기처가 군정대권을 장악하여 진정한 국가최고기구가 된다. 내각은 관례에 따라 행정사무를 처리하는 기구가 되었다. 대학사는 황제를 위하여 조서를 초안하고, 주장을 처리하며, 사,지등 책을 편찬하고, 시험관을 맡는데 불과했다. 직위는 높지만 권한은 적었다. 그래서 입각하여 대학사가 되면 재상이라는 명칭은 얻지만, 재상의 실질은 없었다. 마찬가지 이유로 군기대신은 대학사의 직위가 없어도 재상의 실질이 있었고, 재상의 명목은 없었다. 군기처에 들어가고 다시 대학사의 직위를 받으면 바로 명실상부한 재상이다. 협판대학사는 일반적으로 육부상서중에 뽑는다. 증국번은 대외에서 군무에 종사하는데 협판대학사의 직을 내린 것은 특별한 총애를 나타낸 것이다. 총독에 대학사를 더하면, 정일품이다.

 * 안휘순무: 안휘순무 이속의가 모친상으로 정우하여, 증국번이 순무의 직을 겸임했다.

 

동치2년(1863년) 53세

 관직에 변화없음.

 

동치3년(1864년) 54세

 [육월 십육일(양력 7월 19일)]

 금릉을 함락시킴.

 {육월 이십구일(양력 8월 1일)]

 태자태보의 직을 추가함, 석봉일등후작(錫封一等侯爵), 세습망체(世襲罔替), 쌍안화령을 내림.

 

 * 금릉함락; 증국전이 병력을 이끌고 천경을 이년간 포위한 후, 1864년 7월 19일 함락시키고 3일간 수색살인한다. 이수성, 홍인달을 생포한다. 이 때 여전히 수십만의 태평군이 대강남북에서 저항하고 있었다. 그러나, 천경이 함락되어 18개성을 전전하며 14년간 토쟁하며 천경에 저도하여 11년간 집권하던 태평천국운동이 철저히 실패로 끝났다.

 * 태자태보, 석봉일등후작, 세습망체: 태자태보는 태자소보보다 높다. 종일품이다. 청나라의 직위는 왕, 공, 후, 백, 자, 남의 6등급이다. 삼번후, 왕, 공 작위는 황실친척, 만주, 몽골의 귀족에만 부여했다. 한족중에서 '후'에 봉해진 자는 전공이 뛰어난 무장이다. 후는 삼등으로 나뉘는데, 1등이 가장 높고, 증국번이 받은 것이 바로 일등후작이다. 대청2백년이래 문인으로 후작을 받은 첫번째 인물이다. 1등후는 연봉에 610냥이다. 세습망체는 세습과는 다르다 세습망체는 대대로 같은 작위를 물려받는다는 것이다. 세습은 매 1대마다 등급이 1단계씩 내려가서 나중에는 없어진다.

 

동치4년(1865년) 55세

 [사월 이십일일(양력 5월 15일)]

 후작에 "의용(毅勇)" 두 글자를 추가하여, "의용후(毅勇侯)"라 칭함.

 [오월 초삼일(양력 5월 27일)]

 상유: 산동으로 가서 염군을 소탕하도록 함

 [오월 초구일(양력 6월 2일)]

 직예, 산동, 하남 삼성의 기,녹 각영 및 지방문무관원의 절제 조견.

 

 * 의용후: 그 공로를 표창하고 작위를 받은 사람의 품격에 대하여 평정하여, 통상 작위의 앞에 두 글자를 붙임. 건륭조에는 4글자를 붙인 경우도 있었다. 예를 들어, 복강안은 건륭58년에 가용충예공이라는 작위를 받는다. 증국번은 "의용"을 붙여 1등의용후가 된다; 동시에 증국전은 "위의(威毅)"를 붙여, 1등위의백이 된다; 이홍장은 "숙의(肅毅)"를 붙여, 1등숙의백(사후에 1등숙의후로 추증된다); 좌종당은 "각정(恪靖)"을 붙여 1등각정백(신강을 수복한 후 2등각정후에 봉해진다); 관문은 "과위(果威)"를 붙여, 1등과위백이 된다.

 * 염군: 태평천국시기 북방의 농민의거군이다. 민간의 비밀조직은 함풍3년, 태평천국의 영향하에 대규모 의거를 일으킨다. 1868년에 멸망할 때까지 16년동한 활약한다; 그 동안 태평천국의 영도를 받고, 태평군과 협력하여 전투를 벌인다. 태평천국이 멸망한 후, 여전히 장강이북 황하일대에서 활약한다; 1865년 5월, 염군은 산동 조주 고루채에서 정예몽골기병을 섬멸시키고, 몽골친왕 승거린친을 전사시켜, 명성을 크게 떨친다. 조정은 증국번을 지병사로 하여, 상군,회군을 북상시켜 염군 총사령관을 소탕하게 한다. 증국번은 사양했으나, 허가하지 않는다.

 * 염군을 소탕하는 전쟁터는 주로 직예, 하남, 산동의 3개성이었다. 통일적인 지휘를 위하여, 3성의 군무를 증국번에게 맡긴다. 예전에 강남4성의 군무를 통할하던 것과 마찬가지의 이유이다. 전쟁형세의 필요도 있었고, 조정이 그를 특별히 믿은 것도 있었다. 증국번은 13일후 병력을 이끌고 북상하며, 양강총독은 이홍장이 잠시 대행한다.

 

동치5년(1866년) 56세

 [십월 이십오일(양력 12월 1일)]

 흠차대신관방은 이홍장이 잠시 대리.

 [십일월 초육일(양력 12월 12일)]

 양강총독의 본임으로 돌아감.

 

 * 증국번이 병력을 이끌고 염군을 소탕한지 1년여가 되도록 전승을 거두지 못하였다. 조야에 말들이 많았다. 그래서 조정은 이홍장으로 하여금 북상하여 흠차대신관방독병초비를 맡게 한다. 실제로 증국번의 염군소탕총사령관 직위를 박탈한 거이다.

 * 흠차대신관방을 넘겨준 후, 증국번은 군영에 남아, 3번이나 양강총독을 사임하고 다른 겸직들도 사임하나 조정은 허락하지 않고 양강총독으로 돌아가 부임하게 한다.

 

동치6년(1867년) 57세 

 [정월 십구일(양력 2월 23일)]

 양강총독관방, 양회염정인신, 통상대신관방의 직을 받다.

 [오월 이십일(양력 6월 21일)]

 대학사를 받고 여전히 양강총독의 직에 남다.

 [십이월 이십이일(1868년 1월 16일)]

 운기위(雲騎尉)의 세습직을 내림.

 

 * 양회염정: 도광연간에 도주가 양강총독을 맡을 때부터 양강총독의 직할이 되며, 이후에는 관레가 된다. 통상대신: <남경조약>을 체결한 후 설치한 오구통상대신, 처음에 양광총독이 겸임했다. 나중에는 강소순무가 겸임한다. 남양통상대신으로 이름을 바꾼 후, 당시 서리양강총독이던 이홍장이 겸임한다. 그 후 양강총독이 겸임하는 것이 관례가 된다.

 * 대학사: 증국번은 이전에 협판대학사를 받았다. 이는 대학사의 부관이다. 이제 대학사를 받았으니 진정으로 입각배상(入閣拜相)한 것이다. 그러나 북경으로 가서 부임하지는 않았고, 계속 양강에 머무른다.

 * 운기위는 무산관명(武散官名)이다. 1등후에 덧붙여서 세봉이 635냥이 되다.

 

동치7년(1869년) 58세

 [윤사월 초팔일(양력 5월 29일)]

 무영전대학사(武英殿大學士)의 직을 받는다.

 [칠월 이십칠일(양력 9월 13)]

 직에총독으로 옮기다.

 

 * 무영전대학사: 청나라의 대학사는 건륭제때 삼전삼각으로 제도화된다. 즉, 보화전, 문화전, 무영전, 문연각, 동각, 체인각이 그것이다. 보화전대학사가 가장 존귀하다. 건륭13년 부항이 보화전대학사를 맡은 후, 청나라가 망할 때까지 아무에게도 수여하지 않았다; 증국번이 이번에 받은 무영전대학사는 이미 높은 직급이다. 나중에 이홍장은 문화전 대학사를 받고, 좌종당은 동각대학사를 받으며, 명신 장지동은 체인각대학사를 받는다. 옹동화는 협판대학사를 받는다.

 * 직예총독: 정식명칭은 총독직예등처지방제독군무,양향,관리하도겸순무사로 직예, 하남 및 산동의 군민정무를 총괄하며, 직예성은 북경의 주변요지이므로 직에총독은 지방대신들 중 으뜸이다. 보정에 주재하고, 나중에 북양통상대신을 겸하여, 천진에 상주한다; 전임 직예총독은 만주족인 관문이다.

 

동치8년(1869년) 59세

 [이월 초일일(양력 3월 13일)]

 직예총독관방, 장로염정인신(長蘆鹽政印信)을 받다.

 

 * 장로염정: 함풍3년 장로염정은 직예총독의 직할로 들어간다.

 

동치9년(1870년) 60세

 [오월 이십오일(양력 6월 23일)]

 황제의 명을 받아 천진으로 가서 천진교안(天津敎案)을 처리하다.

 [팔월 초사일(양력 8월 30일)]

 양강총독으로 이동하다.

 [십월 십칠일(1871년 1월 7일)]

 판리통상사무대신이 되다.

 

 * 천진교안: 증국번은 직예총독으로서 천진교안을 조사하러 천진으로 간다. 이것은 원래 직책내의 일이다. 교안처리결과에 대하여 조정관리와 민중여론의 불만이 아주 컸다. 증국번의 명성을 바닥에 떨어진다. 심지어 매국노로 욕을 얻어먹는다. 민원이 비등하여, 조정은 이홍장에게 직예총독을 맡게 하고, 이 일을 수습한다; 증국번은 심신이 지친다. 그는 자주 사람들에게, '일생동안의 깨끗한 명성이 바닥에 모두 떨어져 버렸다.'고 말하였다.

 * 양강총독: 천진교안이 끝난 후, 마침 양강총독 마신이가 암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증국번이 양강으로 돌아가서 이 사건을 조사한다.

 * 남양통상사무대신: 이전에는 상해도가 잠시 겸임했었다.

 

동치10년(1871년) 61세

 관직에 변화없음.

 

동치11년(1872년) 62세

 [이월 초사일(양력 3월 12일)]

 사망.

 이때의 관직은 태자태보무영전대학사일등의용후병부상서함양강총독남양통상대신겸양회염정총판강남기기제조총국독판이다

 상유: 태부(太傅)에 추증하고, 시호를 문정(文正)이라 한다. 아들 증기택(曾紀澤)이 1등의용후를 세습한다.

 

 * 강남기기제조총국: 강남제조국 또는 강남제조총국이라고도 한다. 청나라말기의 가장 중요한 군수공장이다. 양무파가 개설한 최대규모의 근대군사기업이다. 이 기구는 1865년 9월 20일 상해에서 설립되었고, 증국번이 기획하고, 이홍장이 실제책임을 졌다. 제조국의 최고책임자는 독판(督辦)이다.

 * 태부: 삼공의 하나이고 정일품이다. 천자를 보필하는 임무이다. 그러나 청나라때는 모두 허직으로 실직이 아니었다. 청나라초기에는 태사(太師)에 봉해진 사람이 있지만, 그후에는 가장 높은 것이 태부였다: 이홍장, 좌종당도 죽은 후 태부에 추증된다.

 * 문정은 시호중 최고이다. 더 이상 덧붙일 수가 없다. 대청 260년동안 문정이라는 시호를 받은 사람은 탕빈, 유통훈, 주규, 조진용, 두수전, 증국번, 이홍장, 손가내 8명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