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설암(胡雪巖): 황음하고 간사한 홍정상인(紅頂商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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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청 후기)

2013. 9. 14.

글: 왕묘지(王淼之) 

 

호설암은 청말의 유명한 휘상(徽商, 휘주상인)이다.  많은 패스트푸트식 책에서 그는 경상능력이 있으며 처세철학을 가진 전설적인 인물로 그리고 있다. 그리하여, "관직에 나가려면 증국번을 배우고, 장사를 하려면 호설암을 배워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이다. 호설암의 창업과 발전의 역사를 살펴보면 그는 확실히 총명하고 근면하며 공부를 좋아하고 검박하며 베풀기를 좋아한다는 좋은 인상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역사는 자세히 보면 안된다. 자세히 살펴보면 그에게서는 돈냄새가 풀풀나는 '졸부'라는 이미지가 머리 속에 떠오르고, 역겨움마저 느껴질 정도이다.

 

호설암은 자산이 근 3천만냥백은에 이르는 가업을 보유하고, 전답이 만무(畝)에 이르렀다. 사업에 성공한 후 '졸부'의 천박함과 황음함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는 생황에서 극히 사치했으며, 처첩이 무리를 이루었고, 호색하였는데, 왕후(王侯)보다도 심했다.

 

호설암은 아주 호색했다. 그는 자주 길거리에서 각양각색의 미녀를 찾아다녔다. 자색을 갖춘 아름다운 여자만 보면 사람을 보내어 몸값이 아무리 높더라도 따지지 않았다. 그는 돈과 권세를 가지고 그를 거절한 여자들을 취해서 집으로 데려간 후 일부러 모욕을 준 후에 다시 버렸다. 여인의 육체를 가지고 놀았을 뿐아니라, 여인의 심리와 감정까지도 가지고 놀았다. 그는 민간여인을 강제로 매수한 다음 통상적으로 3,5일 혹은 1,2달이 지나서 신선감이 떨어져 좋아하지 않게 되면 수백냥의 은자를 주고 개가하도록 해주었다. <견문쇄록>에 따르면, 그의 희신염구로 버려진 여자가 "수백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오옥요의 <이십년목도지괴현상>에는 호설암의 독특한 장사방법이 적혀 있다. 63회에는 이렇게 쓰고 있다: "그의 그 경영수단은 실로 대단하다. 각 부두에는 그의 상점이 있었다. 그는 사람을 잘 회유했다. 그가 어느 한 항구에 가서 점포를 열면 작은 마누라를 하나 얻고, 집을 얻는다. 점포에는 지배인을 두는데, 집에 오더라도 그 작은마누라는 자리를 피하지 않는다. 몇 달간 머무르다가 그는 떠나버린다. 그러면 작은 마누라와 지배인이 놀아난다. 그 지배인은 일을 하는데 아주 열심히 하게 된다. 그래서 어느 곳이든 돈을 벌지 않는 곳이 없었다." 유가를 존중하던 국가에서 호설암은 '삼강오륜'을 신경쓰지 않았다. 도덕적으로 후안무치함이 극한에 이르렀다.

 

<월만당필기>에는 작자가 호설암은 "자잘한 장삿꾼으로 천한 인물에서 관직이 강서후보도에 이르고, 직함이 포정사에 이르렀으며, 계급이 두품정대에 이르고, 복식은 황마괘를 입을 정도가 되었으며 여러번 어서(御書)를 하사받았다." 이를 보면, 호설암은 조정관료에 의탁하여 큰 돈을 번 관상(官商)일 뿐이다. 호설암이 가장 크게 돈을 번 것은 좌종당을 도와서 군수물자를 판매한 것과 외국상인이 중국에 설립한 은행대출로부터이다. 만일 군수물자판매로 이득을 얻는 것이 상인의 본분이라고 한다면, 호설암이 자신의 상인신분을 이용하여 조정이 국외은행에서 대출받게 함으로써 거기에서 크게 커미션을 얻은 것은 국난재(國難財, 나라의 어려움을 이용하여 번 돈)이다. 인정해주기 어렵다.

 

국외은행에서 대출받는 과정에서 호설암은 저리대출을 받은 후, 고리로 청나라조정에 빌려준다. 그 자신은 중간에서 이자차익을 얻었다. 비록 당시에 증국번의 아들이자 당시 청나라 주영대사를 지낸 증기택까지 그가 나라의 헛점을 노려서 개인적인 돈을 벌었다는 것을 눈치챘지만, 조정중신이 그를 비호해주어서, 호설암은 위기를 넘길 수 있었고, 자신의 개인재물이 청나라정부의 국고준비금보다 많아졌다. 호설암의 축재는 청나라정부 부패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고, 관상결탁의 전형적인 사례이다. 지금이라면, 그는 국가에서 중대하게 단속해야할 '관상'일 뿐이다.

 

관상이면, 관리가 무너지면 장사도 끝난다는 문제가 있다. 좌종당이 조정에서의 세력이 약화되고, 외국자본이 국내에 충격을 가하면서, 호설암은 전성기를 지나 쇠퇴기로 접어든다. 이것은 불가피했다. 그는 전성기에서 파산에 이르기까지 겨우 10여년이 소요되었을 뿐이다.

 

광서9년(1883년), 호설암은 경영실패로, 전장이 도산하고, 집안재산을 모조리 잃는다. 부채는 산더미처럼 쌓이고, 도원의 관직도 삭탈당한다. 그후 1년여만에 그는 우울하게 죽어간다.

 

전쟁터에는 항상 이기는 장군이 없다. 장사에서도 마찬가지로 불패의 상인은 없다. 호설암의 파산은 당시의 사회환경 및 문화전통과 관련이 있다. 다만 만일 호설암이 거안사위하고, 수신제가했다면, 그리고 "화복상의(禍福相依)"라는 교훈을 알았다면, 졸부심리를 극복하고, 부귀해도 음탕하지 않고, 돈을 버는데도 도리를 따졌더라면, 아마도 그렇게 참담하게 실패하지는 않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