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추백(瞿秋白)은 왜 <다여적화(多餘的話)>를 썼는가?

댓글 0

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민국 후기)

2013. 11. 10.

글: 정만군(程萬軍) 

 

 

 

만일 그 글을 쓰지 않았더라면, 그의 열사(烈士) 이미지는 만대에 빛났을 것이다. 중국 홍색혁명의 두차례에 걸친 최고지도자로서, 그는 이 점을 분명히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차라리 '반도(叛徒)"로 보이기를 원했지, 사람들에게 "영웅"으로 존경받기를 원하지 않았다.

 

공산당원에 있어서, 그는 당연히 반도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고순장(顧順章), 향충발(向忠發)처럼 죽음을 두려워해서 전우를 팔아먹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는 철두철미한 소비에트전사도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는 옥중에서 '호언장담'을 하지도 않았고, 심각하게 자신을 반성하였기 때문이다.

 

구추백과 <다여적화> 이것은 역사의 수수께끼가 아니다. 소비에트혁명에 종사했던 '순수한 문인'의 진실한 고백이다. 이 번역가의 여러 저작과 비교하면, 이것이 아마도 그의 유일하게 세상에 남긴 오리지날작품일 것이다.

 

이번 달에 필자는 김안(金雁) 선생의 신작 <거꾸로 돌아가는 붉은 수레바퀴: 소비에트지식분자심로역정>을 읽은 후, 구추백의 이 유작을 같이 읽었다. 소비에트지식분자의 심로역정과 비교하면 중국의 현대혁명사의 대인물 구추백의 피를 토하는 고백은 더더욱 가슴이 아프다.

 

진독수(陳獨秀)로부터 구추백까지 그리고 다시 베르자예프까지, 이들 지식분자 및 순수문인은 왜 소비에트홍색혁명과정에서 속속 '대오를 떠났을까?' 이 역사문제의 진실한 답안을 찾으면 아마도 오늘날 우리가 국가정치의 전도에 관심을 가진 각 지사들에게 더욱 진실한 사상적 돌파구를 마련해줄 수 있을 것이다. 

 

구추백의 <다여적화>는 국민당 감옥에서 쓰여진다. 1935년 5월 23일 완성되었다. 이 책을 쓴지 1달이 되지 않아, 즉 6월 18일 그는 총살형이 집행된다. 국공양당의 사료에는 모두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구추백은 형이 집행될 때, "담소자약(談笑自若), 신색무이(神色無異)"(얘기하고 웃으면서 태연자약해서 평상시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었다)했다고 적혀 있다. 그는 담담하게 행형장으로 갔고, 아주 시원스럽게 "이 땅은 아주 좋다"는 말을 남긴다.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용사였따.

 

그러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가, 왜 후세에 논쟁이 될만한 마음의 독백을 남긴 것일가? 그는 알지 못했을까? 이 책이 그의 '영웅적인 희생"의 빛나는 역사에 '오점'을 남기게 될 줄을. 자신의 후손들에게 불필요한 골치거리를 남기게 될 줄을.

 

<다여적화>를 읽어본 사람들은 여러가지 서로 다른 평가를 내린다. 문혁기간동안, 일부 '굳건한 혁명가"들은 이것을 '반도자백'으로 규정하고, 구추백을 멸시했다. 오늘날 필자가 읽은 후의 느낌은: 이 책으로 인하여, 구추백에 대한 존경의 생각이 더 늘었다. 이런 존경의 마음은 그의 혁명사적보다도 더욱 큰 역사적 생명력이 있다.

 

이 책의 첫부분에 구추백은 직접적으로 말한다: "나를 배우지 말라" -- "지금까지, 외부에서는 여러 사람들이 내가 어떠어떠하다고 말하곤 한다. 나는 사람들의 질책, 문책은 두렵지 않다. 나는 오히려 사람들이 나를 '숭배'할까봐 두렵다. 다만 이후의 청년들은 나의 모습을 배우지 말라. 내가 이전에 쓴 것이 무슨 주의를 대표한다고 생각하지 말라. 그래서 나는 이 여생이 아직 끝나지 않은 기회에, 최후의 가장 솔직한 말을 쓰고자 한다."

 

"나와 같은 성격, 재능, 학식으로 중국공산당의 영수가 된 것은 확실히 역사의 하나의 오해이다."

 

많은 사람들 구추백 자신도 부정하지 않는다. 두번이나 당중앙을 맡으면서, 그는 그저 명목상의 영수였다. 그래서 "계속하여 연극을 했다" "아주 웃기는 일이다". 소련이 장악한 코민테른이 중공의 최고권력을 원격조종했다. 당시에 구추백의 곁에 파견되어온 코민테른의 대표는 소련사람인 미프(중국명 米夫)였다. 미프의 배후에는 스탈린이 있다. 서생고집이 있는 구추백은 진심으로 중국문제에 대하여 모르면서 아는 척하는 '외국인전문가'를 믿고 따르지 않았다. 이것은 당연히 미프를 불쾌하게 했다. 구추백은 더이상 참지 못하고 코민테른에 미프를 교체해달라고 요청한다. 이 요청은 당연히 스탈린에 의하여 거부된다. 그저 미프의 구추백에 대한 반감만 키웠을 뿐이다. 미프는 구추백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그는 '이화제화(以華制華)"의 수법을 써서, 자신의 중산대학 학생인 왕명(王明), 박고(博古)등을 내세워 구추백을 대체한다.

 

이때의 구추백은 일찌감치 이런 왜곡된 인성, 가면을 쓰고 연기하는 정치에 염증을 냈다. 그는 코민테른의 대변인, 왕명, 박고와 같은 자들과 '소외감'을 느낀다고 인정했다. "나의 완벽하지 않은 마르크스주의 지식은 일찌기 당시에는 어느 정도 작용을 했다. 좋고 나쁜 영향이 있었다는 것은 사람들이 모두 아는 일이다. 나 자신이 판단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현재, 나는 이미 정치적으로 죽었다. 더 이상 마르크스주의의 선전자가 아니다."

 

구추백의 최후운명을 보면, 그가 당내권력투쟁의 희생양이라고 불러도 지나치지 않다. 1934년 10월, 홍군은 '장정'을 결정한다. 코민테른의 대변인은 그가 군대를 따라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에게 곧 함락될 '소비에트구'에 남아서 계속 '전투'하라고 한다. 구추백은 '부득이 남을 수밖에 없었다' 당내에 발언권이 있고,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중에서 유일하게 장문천(張聞天)이 나서서 구추백을 데려가야한다고 말하지만, 결국 '박고의 반대'로 성사되지 않는다. 이렇게 하여 일찌기 지도자였으나 닭잡을 힘조차 없으며, 고도근시이며, 폐병으로 각혈을 하는 서생은 국민당 대군의 앞에 버려지게 된다.

 

국민당군대에 체포되어 감옥에 들어간 후, 구추백은 오히려 정신적으로 해탈한다. 그는 철저히 가면을 벗고, 통쾌하게 휴식한다. "나는 시종 가면을 쓰고 있었다. 나는 일찌감치 말한 바 있다. 가면을 벗는 것이 가장 통쾌한 일이라고. 다른 사람의 가면을 벗기는 것이 통쾌한 일일 뿐아니라, 가면이 벗겨지는 것도 통쾌한 일이다. 특히 자신이 벗을 수 있다면 더욱 그렇다. 현재 나는 최후의 가면 하나까지 버렸다. 너희는 나를 축하해야 마땅하다. 나는 가서 쉬겠다. 영원히 쉬겠다. 너희는 나를 축하해야 마땅하다."

 

아마도 '코미디가 곧 끝난다'는 희극적인 색채를 두드러지게 하기 위하여서인지, 구추백은 책의 마지막에 엉뚱하면서도 쁘띠부르조아적인 글을 남긴다: "중국의 두부도 아주 먹기 좋은 것이다. 세계제일이다."

 

마지막 이 말은 청나라의 문학비평가 김성탄(金聖嘆)의 처형때 모습과 비교할 만하다(죽기 전에 옥졸에게 말한다. 땅콩과 말린 두부를 같이 씹으면 호도맛이 난다. 이 기술을 전수할 수 있으니 죽어도 여한이 없다) 다면 학명열사의 모습과는 맞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구추백의 귀여운 점이다. 솔직한 서생의 모습이다. 초기의 공산당원으로 서생기운을 가진 사람이 구추백 한 사람이 아니다. 예를 들어 구추백의 전임인 진독수는 더욱 솔직하고 직설적이었다. 다만 그의 최후는 코민테른, 스탈린과 계속 어긋나는 바람에 결국은 '대오에서 탈락한 사람'이 된다.

 

당연히 모두 솔직한 서생이기는 해도, 진독수와 구추백은 분명한 차이가 있다. 진독수는 솔직하고 직설적이며 과감하게 행동했다; 구추백은 솔직하기는 하지만 직설적이지는 않았고, 연약하며 맹종하는 편이었다. 구추백은 자신조차도 자신이 얻은 것은 '배우의 성적'이라고 하였을 정도이다.

 

진독수, 구추백의 인생최후순간의 태도를 보자면, 둘은 모두 기개가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정치조직과 이론과 실천에서 이견이 발생하긴 했지만, 절대로 마지노선은 지켜서 전우를 배신하거나 팔아먹지는 않았다. 국민당수 장개석의 '변절'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그래서 공산당에서도 받아들여지지 않고, 국민당에서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니 버려지거나 죽을 수밖에 없었다.

 

구추백은 체포되기 전에, 코민테른과 그 대변인이 버린 사람이었다. 그가 희생된 후, 지위는 돌연 상승한다. 열사의 칭호를 얻는다. 당시 구추백을 숙청했던 극좌파들에게 묻고 싶어진다. 그들이 하는 정치는 상대방은 반드시 죽여야할 필요가 있는 것이었던가?

 

진독수, 구추백과 같은 운명인 것은 중국의 지식분자들만이 아니었다. 같은 시대에 소련에도 이런 대표적인 인물이 있다. 그는 바로 베르자예프였다. 저명한 <자유의 철학>을 쓴 그는 일찌기 마르크스주의를 쫓았다. 볼세비키의 승리를 축하했다. 십월혁명이후, 베르자예프는 '자유정신문화학원'을 만들어, 각종 세미나에서 자신의 이론을 강의한다. 그리고 한 때는 모스크바대학의 역사및철학과의 교수가 되기도 한다. 1921년, 그는 모호한 사건으로 체로되었다가 나중에 석방된다. 다음해 여름, 그는 다시 체포되고, 해외추방을 당한다. 이유는 베르자예프가 "이미 공산주의신앙으로 돌아가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조국을 떠날 때, 그가 얻은 경고는 만일 다시 소련경내에 출현하면, 그를 법에 따라 처결하겠다는 것이었다. 결국, 베르자예프는 타향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진독수, 구추백과 베르자예프같은 지식분자의 "대오에서 축출되는 것"에 대하여 대오내에 있던 사람들은 '혁명신념을 동요시킨다'는 말로 형요안다. 스탈린과 같은 사람들은 더더욱 체르니세프스키의 이론을 추앙한다. 목표가 고상하다면, 수단은 무시할 수 있다. 악은 선으로 반대할 수 없을 때 선의 목표를 위하여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을 수 있다. 도덕으로 혁명가를 평가하려해서는 안된다.

 

다만, 홍색혁명이 성공한 후에도, 구추백의 <다여적화>에서의 문인의 곤혹은 해결되지 않았다. 십년겁난을 거치면서 "바지를 벗기고, 꼬리를 잘린' 중국의 지식분자들은 여전히 인도주의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도덕으로 혁명가를 평가하려 해서는 안된다'는데 대하여는 마음 속으로 거리낌을 지니고 있다. 소련이 해체된 후, 지식분자들은 이런 사고를 더욱 강화된다. 많은 사람들은 도덕은 정치문명의 원래의 의미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솔제니친이 한 말처럼, "당시 공포수단을 통하여 국가를 정의와 행복의 나라로 만들었던 젊은이들은 얼마나 어리석었는가?"

 

정의는 위장할 수 있다. 야만은 감출 수 없다. 인간성을 왜곡시키는 사물은 결국 사람들이 싫어하게 된다. <다여적화>의 가장 큰 가치는 인간성의 회귀이다. 인간성과 도덕을 정치의 당연히 있어야할 층면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다. 문명정치만이 문명세계를 창조할 수 있다. 이 핵심의미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조금도 '다여(多餘)'하지 않다.